남연의 권사는 누구인가<3>
5시간 동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남연의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남연의 권사님의 딸 김양자 집사님의 간증 테이프를 간추린 것입니다.
남연의 권사님은 불교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3살 되던 해 우연히 몸종과 함께 외출했다가 여 선교사를 만나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권사님 집안은 소문난 갑부였으나 남존여비의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때라, 아들들은 동경으로 유학을 보낼 정도였으나 딸은 집안에 가두어두다시피 했습니다.
집안에 거의 갇혀 있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어린 소녀의 마음속에서 날로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집안 어른들은 꾸짖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굽히지 않자 심한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매를 맞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믿음은 더 강해졌습니다.
팔도에서 유명한 무당들을 차례로 불러 1년에 12번씩 굿을 하고, 곳간마다 지푸라기로 만든 무서운 우상들이 걸려있는 귀신을 섬기는 집에서, 계속해서 박해를 당하다가는 산송장이 될 것 같아 권사님은 가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신을 제일 사랑해주는 어머니에게 졸라대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집 안에 있으면 죽게 될 것이니 내보내 주면 공부를 열심히 해 금의환향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린 딸이 고초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남몰래 안타까워하던 어머니는 이를 받아 들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남장으로 변장시키고 배낭에 돈을 가득 넣어 새벽에 밖으로 내보내 주었습니다.
권사님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을 믿고 나왔으나 사실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소녀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대구로 가라!’ 는 영감을 주셨습니다. 외출도 거의 하지 못했던 소녀는 어디로 가야 대구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발길이 닿는 대로 가기만 하면 대구가 될 것이다!’ 영감을 주어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발길이 인도하는 대로 한 달가량 걸려 대구에 도착해, 어느 순경에게 대구에는 선교사들이 많이 산다는데 선교사들이 사는 곳을 가르쳐달라 부탁하자, 근처 양옥집으로 안내해주었습니다.
미국 선교사는 미소를 띠며 반갑게 맞아줬고, 마침 새벽기도를 시작하려던 선교사들은 아름다운 소녀가 예수를 잘 믿기 위해 공부를 하고 싶다는 간청을 듣고, 하나님이 보내 주셨음에 틀림없다고 기뻐하면서 마치 천사가 찾아온 듯이 대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공부를 가르쳐주기는커녕 세탁과 청소, 간단한 서양요리 등 힘든 집안일들만 시켰습니다. 자라면서 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권사님은 너무 힘들고 서러워 남몰래 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경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극복했습니다.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찬송을 부르며 기쁜 마음으로 봉사했습니다.
6개월을 한마디 불평 없이 맡은 일에 충실하자 어느 날 선교사들이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네가 진정한 하나님의 딸인지 정말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절대 순종할 수 있고 또 인내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았다.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그동안 희생과 봉사를 잘 해냈으므로 이제부터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우리에게 성경과 학문을 배워라.” 그동안 권사님을 시험하기 위해 휴가 보냈던 가정부를 다시 불러 공주처럼 돌보아 주었습니다.
권사님은 당시 선교재단에서 운영하는 대구 신명여중 1학년부터 다니게 되었습니다.
권사님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공부도 잘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 모범생이었습니다.
5년이 지나 학교를 졸업한 후 권사님은 멋쟁이 신여성으로 변했고, 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신여성으로서 해외 유학을 간다는 것은 너무나 귀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부심을 느낀 그녀는 부모님에게 승낙도 받고 기쁘게 해드릴 겸 찾아갔습니다.
한편 마산에서는 맏딸이 실종되자 막대한 보상금을 내걸어 행방을 수소문했고, 성과가 없자 죽은 줄로 포기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때 완전히 신여성으로 변모한 권사님이 찾아오자 문을 연 옛 몸종도 못 알아보았습니다. 권사님이 자신을 밝히자 비로소 알아차린 몸종은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대청마루에서 장기를 두고 있던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몽둥이를 들고 나와서, 그렇지 않아도 네가 노란 귀신을 우리 남씨 가문에 드려와 망신시키고 결국 도망가더니, 이제는 네가 노란 귀신이 되어서 집안에까지 찾아 들어왔으니, 우리 남씨 집안은 완전히 망하게 되었다.
그렇게 노발대발하며 매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심한 매질을 당한 권사님은 기절했고 동네에 소문이 날세라 그녀를 다락에 숨겨놓았습니다.
그래도 딸을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는 딸을 정성껏 치료하고 보약까지 먹였습니다.
건강이 회복된 권사님에게 자초지정을 다 들은 어머니는 주님에게 헌신한 딸을 막을 길이 없다 판단하고, 유학에 필요한 구비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었고 탈출시켜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권사님은 군용비행기로 하와이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산 부둣가에서 환송 예배를 드릴 때에 오라버니가 뒤쫓아 왔고 붙잡혀서 유학길이 좌절되었습니다.
또다시 매질이 반복되었고 집으로 끌려온 권사님은 죽든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집을 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드리기로 서원한 권사님은, 불교 집안에 시집을 가기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탈출을 강행했습니다.
이제는 대구 선교사 저택에도 머무를 수 없게 되어 중국 상해로 건너갔습니다.
주님 한 분만 의지하고 낯선 땅에 도착한 권사님은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YMCA 기독청년 회관을 찾아갔습니다.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기독 청년들과 어울리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했습니다.
특히 청년회 회장이 많은 호의를 베풀어주었고 마음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혼자보다 둘이 힘을 합해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두 사람은 결혼했습니다.
이때 27세 때였습니다. 당시는 13세에 시집가서 15세면 아기를 낳을 때였고 27세의 여자는 할머니 취급을 받았습니다.
시집 생활은 대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소문난 기독교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유학을 보낸 장손이 할머니가 다 된 색시를 달고 들어오자 시어머니가 크게 실망하였고, 자식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더구나 신여성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나마 신앙심이 깊은 시아버지의 사랑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애기를 낳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기우였고 권사님은 쑥쑥 애기를 낳았습니다.
넷을 출산하였는데 모두 딸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하는 집안 사정 때문에 다섯째 애기를 가졌는데 다섯째도 딸이었습니다. 여섯 번째 딸아이의 출산을 거쳐 일곱째는 틀림없이 아들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또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 여덟째로 태어난 딸이 바로 이 간증을 한 김양자 집사님입니다. 김양자 집사님은 어렸을 때부터 태어나지 말아야 했다는 서러움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이 서러움이 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통해 주님을 영접한 후 상처도 아물고, 오히려 여덟 째 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여덟 째 딸을 앉고 권사님 부부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동일한 감동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어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간청하지 않느냐? 그동안 계속 딸을 낳아도 감사하기만 하고 그저 아름답고 슬기롭게 키우겠다고만 하니, 너희의 원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지 않았느냐?”
그때부터 부부는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니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때는 권사님의 나이 47세로 경수도 끊어져 임신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100세에 사라가 90세에 이삭을 가질 수 있었던 기적을 믿고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기적적으로 임신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아홉째로 아들을 주시고, 그 뒤 아들을 하나 더 주시어 10남매가 되었습니다.
김양자 집사님은 어릴 때 새벽이 되면 어머니가 일어나 기도하시는데, 주위에 소외당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가며 중보기도를 하고는, 10남매를 위해 기도하고 기도를 끝마칠 때는, 언제나 10남매 중에 막내를 십일조로서 주님께 바치오니 주님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의 믿음은 훌륭했으나 자식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풍족한 집안에서 부러울 것 없이 자랐고 최고의 교육들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 교만했습니다.
부모님이 이름 있는 장로 권사였으므로 교회에는 부지런히 다니고, 주일학교 선생이나 성가대의 직분을 맡기도 했지만 참된 믿음이 없었습니다.
특히 주의 종이 되게 해 달라고 십일조로 바친 막내아들은, 집안에서 황제처럼 떠받들어지며 자라더니 중3이 되면서 옆길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철없을 때는 어머니께서 밤낮 입버릇처럼 기도하던 주님의 종이 최고의 영예인 줄 알았는데, 자라면서 주님의 종이 제일 구질구질한 목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권사님은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특히 사랑이 충만해서 남을 위해 중보기도 할 뿐 아니라 이웃을 위한 희생과 봉사를 말없이 실천했습니다.
해가 질 때면 시장에 나가 그날 물건을 팔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장사들로부터 후한 값을 주고 사면서, 저는 예수 믿는 할머니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하고 전도했습니다.
사랑의 실천을 동반한 전도는 항상 상대방에게 감화를 주어 많은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집안 살림이 풍족했으므로 시장에서 사들인 배추 감자 생선 그리고 집안에 남아도는 옷들을 챙겨서, 그 다음 날 홍제동 언덕 판자촌의 빈민굴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할머니 왔습니다. 물건 받아 가세요! 하며 나누어 주었습니다.
빈민 굴 안에는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폐병으로 각혈하거나 암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거나 영양실조로 일을 못 하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권사님은 냄새나는 환자들의 방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뒤치다꺼리를 다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전도하고 들어올 때면 울어서 눈이 퉁퉁 붓고, 보따리 속에는 균 덩어리, 고름 덩어리, 피 걸레가 다 된 환자들의 옷들을 싸가지고 와서 빨아서 다시 갖다 주곤 하였습니다.
이런 권사님을 자식들은 무척 핍박했습니다.
어째서 예수를 그처럼 구질구질하고 청승맞게 믿어야 하느냐. 얼마나 무식하면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만 전도하느냐. 어째서 아버지처럼 경건하고 거룩하게 멋있게 신사답게 지성적으로 예수를 믿지 못하느냐 하며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권사님의 남편은 장로였으나 다른 신앙 태도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서재에는 기독교 서적으로 꽉 들어차 있고 성경에 해박해서 목사님들이 묻거나 책을 빌리러 찾아올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부요해서 교회에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제일 많이 하고 구제사업에도 앞장서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늘 자신을 내세우고 자랑하기를 기뻐했습니다.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의 신앙 태도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본받으라고 윽박지르고 창피해 죽겠으니, 제발 판자촌은 찾아다니지 말라고 구박했습니다.
그처럼 자식들과 남편으로부터 구박을 받으면서도 권사님은 한 번도 반박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항상 웃으면서 하나님은 아신다고 답변하시거나, 아니면 신앙의 뿌리가 깊어지면 이해할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며 괴로움을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건강해서 병을 모르고 지내오신 권사님이 어느 날, 체하여 토할 것 같다면서 막내딸에게 약을 사 오라고 했습니다. 약도 효력이 없자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면서 병원에 가보자 했습니다.
병 한번 걸려본 적이 없는 권사님이 스스로 병원에 가겠다고 나서자, 자녀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모시고 갔습니다.
의사의 진단은 악성 3기의 위암이었고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태여서 20일간의 시한부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건강했던 어머니가 더구나 며칠 전만 해도 판자촌을 누비고 다니시던 전도 왕이 위암이라니 가족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당시 암의 권위자인 박사님에게 다시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습니다.10남매는 권사님을 불광동 집으로 모셔놓고 예배를 드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묘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일반적으로 암 환자는 임종이 가까워질 때 피부가 검게 타들어 갑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정 반대로 천사의 얼굴처럼 빛을 발하는 영광스러운 얼굴로 변화되는 것이었습니다.
권사님은 10 남매에게 찬송과 기도와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면, 시커멓고 추하기 짝이 없는 동물 모양의 마귀들이 집 담을 넘어 나타나 방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지만, 예배를 드리면 마귀들이 질색하며 떠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머리맡에 앉아 찬송과 기도와 성경 읽기를 그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가정을 갖고 있는 자식들이 24시간 예배를 계속하는 것은 무리라서 3개 조를 편성해서 차례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암 환자의 얼굴은 날로 빛을 발했고, 교회에서 병문안을 왔다가 모두 놀라고 오히려 위안을 받고 돌아가곤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