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기자: 1979년 12월 13일 아침,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체포되었다는 겁니다. 10.26 사건 당시 김재규와 공모했다는 혐의 때문이었습니다. 정승화 총장을 체포한 사람은 그의 부하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다. 12.12일 작전암호명 생일집 잔치, 군초유의 하극상이자 군사반란이었다. 12.12 군사반란을 시작으로 전두환 정권의 서막이 올랐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오늘은 대한민국 80년대의 운명을 결정 지은 12.12 군사반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이후 제5공화국을 발생시킨 역사적인 그날입니다.
홍석률/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12.12군사반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장군을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군대를 동원해서 군권을 장악한 사건입니다.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의 사전 재가 없이 two star가 four star를 체포한 것이죠.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근데 군에서 상하관계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계급도 중요하고 two star가 어떻게 four star를 체포할 수 있나요?
최원정: 5.16 쿠데타 때 박정희 소장도 two star 였거든요. 종종 있는 일이네요~ 놀랄 일도 아니네요.
이시원/배우: 아마 12.12사건, 그때 작전명이 생일집 잔치라고 했는데 왜 생일집 잔치라고 했을까요? 그날이 혹시 전두환 사령관의 생일이었나요? 아니면 5공화국의 시작을 알리는 그런 날이었나요?
허진모/작가: 12월 12일 군사반란으로 인해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새로운 권력자로 탄생을 했으니까 생일이라는 의미로 부여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러니 12월 12일은 생일이고 반란은 잔치였던 거죠.
다니엘: 근데 하필 12.12 인가요? 꼭 맞춘 것처럼 하네요.
이시원: 아~ 저 이런 얘기들어본 적 있어요. 전두환이 앞뒤가 똑 같은 숫자를 참 좋아한다고 그래요. 그래서 대통령 취임식도 3월 3일날 했고 혹시 그래서 12.12로 맞춘건가요?
최원정: 그래요? 앞뒤번호를 맞추는거 좋아했다구? 저도 사실 앞뒤번호 맞추는거 좋아해서 결혼기념일이 11월 11일이에요. 11.11사태~ 아무튼 거사일을 12월 12일로 정한 대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10.26부터 12.12까지 과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늘 저희와 함께 파헤쳐보시기 바랍니다.
홍석률: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1979.10.26)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이 됐습니다. 그리고 사망 다음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졌고 계엄사령관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었죠. 그후 박대통령 암살사건을 수사할 합동수사본부가 만들어졌는데 그 본부장에 임명된 사람이 바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습니다. 전두환은 대통령 시해사건이라고 하는 국가 중대사를 조사를 하면서 중앙정보부, 경찰, 그리고 검찰 까지도 핵심권력조직들을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된 것이죠.
최원정: 권력은 다 쥐었네요.
이시원: 그러니까 핵심권력은 다 갖고 있던 굉장히 중요한 보직에 있었네요.
다니엘; 그런데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그 당시는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었나요? 원래 유명한~
허진모/작가: 그렇지는 않았죠, 군인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는 경우는 사실 드뭅니다. 전두환이 대중에 처음 나타난 것도 10.26사건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할 때에 그때 처음 나타났던 거죠. 이 인물의 행적을 알고 봤더니 그런 거는 모르겠습니다만 눈매가 보통이 아닙니다.
이시원: 여기 뒤에 사진이 있는데 이 눈빛이잖아요. 굉장히 날카롭고~
최원정: 눈빛에서 앞으로 펼쳐질 역사의 복선 같은게 느껴져요.
이시원: 국민들은 상당히 생뚱맞고 깜짝 놀랐을 거 같애요. 갑자기 튀어나온 거잖아요. 그 당시~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똑 같은 거 같아요.
홍석률: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권력실세 다섯 손가락 안에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박대통령이 있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있고 차지철 경호실장이 있고 그 다음번에 네번째에 있는 인물이 바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던 것이죠. 근데 10.26사건으로 박대통령 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죽었고 김재규는 잡혀있고 전두환만 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두환이 실세로 서서히 부각이 되는데 11월 1일입니다. 11월1일인데 일본 마이니치 신문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실세로 떠오르고 있다 라고 보도를 했습니다. 이게 암살사건 일주일 정도된 다음에 나온 보도라는 거죠.
최원정: 외신들이 더 상황파악이 빠르네요.
이시원: 숨겨진 최고 실세네요.
최원정: 여기서 물밑에 숨어있던 실세라고 봐야될텐데 그런데 사실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차근차근 권력의 중심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이광용: 역사저널 그날 그 권력의 중심을 향해 차근차근 다가서고 있는 이광용입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 당시 그 못지않게 바쁘고 초조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지난해 7월 방송에서도 제가 직접 소개해 드린 적이 있었죠. 그 시각 육사생도 800명은 쿠데타 지지 행진을 벌였습니다. 이 육사생도들을 동원한 건 서울대 ROTC 교관으로 있던 육사11기 출신 전두환 대위입니다.(전두환 사진등장), 당시 순간 최고시청율 무려 7%~ 역사저널 그날 인상적인 한 장면 그날의 사진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말 강한 인상을 남겼던 전두환은 요직 중에 요직인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 가까이에 도달하게 되는데요. 여기서 역사 속 숨은 전두환을 찾아라~(전두환 박정희 육영수 군인장교 사진등장), 이 사진은 1967년 박정희 부부의 사진입니다. 과연 전두환은 어디 있을까요? 문제가 너무 어려운가요?----------------------
이시원: 난이도가 下수준이네요~ 왼쪽 사람입니다.
최원정: 그걸 어떻게 맞춰요?
이광용: 딩동댕~ 정답입니다. 전두환 중령은 1967년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에 임명이 되는데요. 경복궁에 주둔한 청와대 근위부대로 장교들의 출세코스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에 종종 산책을 나와서 30대대 본부에 들렀는데 그때마다 전두환 대대장~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서 충~성~ 이렇게 경례를 했는데 이 경례 소리가 효자동까지 들렸다는 풍문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육여사 없는 박정희 대통령 가족사진등장), 다음 숨은 그림찾기는 이 사진입니다. 1977년 박대통령이 당시 육사에 다니고 있던 아들 면회를 갔었는데요. 자~ 전두환은 어디 있을까요?
다니엘: 뒤에~ 왼쪽~
이광용: 왼쪽 뒤에 정답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바로 뒤에서 그것도 무려 차지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이 사람이 바로 전두환~
다니엘: 아니 그런데 박대통령의 개인 스케줄이잖아요. 개인스케줄에 같이 동반했다는 게 그만큼 뭔가 굉장히 친밀한 사이~ 절친~ 그런건가요?
이광용: 1976년 전두환은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임명되면서 또 다시 박대통령의 곁을 지키게 됩니다.
최원정: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항상 권력 중심에서 맴돌았네요.
이시원: 콕 가까이서 찰싹 달라 붙어 있는 느낌이에요.
이광용: 그런데 전두환의 과거 행적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은 따로 있었습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전두환을 불러서 은밀한 제안을 합니다. 임자~ 자네 정치해 볼 생각 없나? 그러자 전두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시원: 정말 이건 박대통령한테 감동적인 멘트였을 것 같애요.
이광용: 이 정중한 거절이 당시 박 대통령의 마음을 확 사로잡은 거에요.
이시원: 어떻게 보면은 김종필 김형욱 차지철 김재규 모두 군인출신 정치인이었잖아요. 대통령이 친히 정치계로 들어오라고 손을 내민 건데 그것을 또 거절하면서 충성을 제대로 보여줬어요. 박대통령이 2인자를 굉장히 안좋아했잖아요. 그건 박정희 대통령이 원하는 인재상입니다 라고 딱 어필을 한 거네요.
이광용: 그렇게 군에 남은 전두환은 본격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친위부대를 만들면서 본격 충성행보를 이어갑니다.
-----------------김정기 작가의 전두환의 비밀사조직 하나회를 라이브 드로잉----------------
최원정: 70년대 중앙정보부가 있다면 80년대에는 인제 하나회가 있다고 얘기하는데~ 민족도 하나~나라도 하나~ 또 충성을 바칠 곳도 하나~ 이래서 하나회 라고 한다면서요.
허진모: 하나회는 5.16 쿠데타 직후에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11기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군부대 비밀 사조직입니다. 한 기수당 10명 정도, 육사정원 대비 약5% 정도의 소수였다고 합니다. 대상은 주로 영남지역 출신의 성적이 우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약 조직에서 조직원을 뽑듯이 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가입을 시켰죠.
이시원: 영화에서 보면 사조직 사모임 이런 서클을 뽑을 때 신고식도 하잖아요. 맹세도 하게 하고 이상한 거 많이 시키잖아요. 혹시 여기서도 그랬나요?
허진모: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얘기는 있습니다만 뭔가 하나를 사실이라고 콕 찝어 얘기할 순 없겠죠. 하지만 강도 높은 신명을 다 바치는 그런 충성을 요구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국가나 국민이 아니라 그 조직이었다는 것에 문제가 되는 거죠. 그리고 가입 후에는 상급자로부터 활동비를 받아쓰고 그리고 재벌로부터 여러가지 자금을 얻어냅니다.
최원정: 재벌로부터 돈을 받아오면 봉투에 다 다른 금액을 넣었대요. 만원~ 십만원~ 백만원~ 천만원~ 그래서 하나회 멤버에다 쫙 뿌린답니다. 자기가 얼마를 오늘 가져갈지를 아무도 몰라요~ 그럼 사실 그게 재밋잖아요. 재미도 주고 감동도 주고~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관리했다는 얘기도 들었구요.
이시원: 재밋네요, 이 아이디어 혹시 전두환 한테서 나온건가요?
홍석률: 그럼 출연료도 그렇게 하죠~
최원정: 교수님, 저는 출연료 20,000원, 저는 잃을게 없습니다.
홍석률: 제가 잃을게 제일 없을 것 같은데요.
다니엘: 군 내부적으로 그런거 허용되어 있지는 않잖아요. 어떻게 그런 걸 만든거예요?
허진모: 군내 사조직 결성은 명백한 위법입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하나회에 대한 수많은 증언들을 계속 듣다보면 어떤 느낌이 드냐하면 영화 대부 family 를 연상시켰죠. 정규군 안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지금 생각하면 참 끔찍한 일이죠.
이시원: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뭉치게 만들었을까요? 그 당시에 육사출신이면 나름 한가닥씩 하는 인재들이었을텐데요~
홍석률: 하나회는 역사 속에 오명을 남긴 조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하나회의 구성원들이 뭉칠 수 있었던 중요한 정체성은 정규 4년제 육사출신들의 엘리트 의식이었습니다. 육사11기는 1951년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는데요. 그때부터 육군사관학교가 대학과 마찬가지로 4년제가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교육기간이 짧았구요. 그리고 1951년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장교가 좋은 직업이었죠. 그러니까 우수한 인재들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고 또 육군사관학교 교수진도 우수하다 보니까 육사11기는 과거 육사기수와는 다른 독특한 엘리트 의식과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시원: 우리는 잘 났는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구나 라는 불만으로 뭉친 군인들이 만든 사조직이네요. 하나회에 가입을 하면 뭔가 특별한 혜택 같은게 있나요?
허진모: 진급과 보직에서 우대를 받는 거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가 있었습니다. 비호 아래 요직이라고 할 수 있는 수경사 보안사 대통령경호실 특전사 중앙정보부 같은 데서 핵심 요직을 독차지 했었습니다. 군인으로서 이보다 사실 더 큰 혜택은 없죠. 그렇게 그들은 서로 자기들 끼리 끌어주고 밀어주고 하면서 그야말로 하나가 되었던 것이죠.
이시원: 정말 특급혜택을 준 거네요. 지금 보니까 하나가 숫자 하나라기 보다는 우리 1%야 1등이야 1등 군인이야 약간 이런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허진모: 그리고 아마 정상적인 명령체계가 아주 굉장히 웃어 보였을 겁니다.
다니엘: 어쨌거나 엘리트들이 모인 곳이잖아요. 엘리트들이 모이는데 어느 정도 운영되고 돌아갈 수 있겠끔 묶어주는 존재가 필요한데 그걸 아무래도 전두환이 한 거아네요? 리더쉽 능력이 있었나 봐요.
홍석률: 전두환은 전형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군인이죠. 근무지를 보면은 대부분 서울이니까 수도권에 요직이라고 할 수 있는 권력기관과 관련된 그런 직책을 맡았구요. 그렇지만 육사생도로서 전두환은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그래요. 본인 회고록에 따르면 입학성적은 끝에서 두번째 추가 합격을 했다고 하고요. 졸업성적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156명중126등~
홍석률: 근데 이제 운동을 잘 하고 교우관계가 좋고 카리스마가 있어 가지고 동기들 사이에 인정을 받아서 하나회를 리드하는 리더가 된 것이죠.
이시원: 어찌 보면 그 당시 군문화에 최적화된 사람이었을 것 같애요. 운동도 잘해 리더쉽도 있어 호탕해 말하는 거 보면 되게 낮추어 스럽잖아요.
허진모: 과거 정보부에 몸 담았던 분에 따르면 전두환씨가 안기부였죠. 안기부 때는 상여금을 줄때 돈을 쌓아놓고 세지 않았다고 합니다.
최원정: 그럼 어떻게 줘요?
허진모: 자로 이렇게 재가지고~ 호사를 누리고 단물을 빨았던 사람들은 저보다 훌륭한 보스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을 했겠죠.
최원정: 옆에서도 받아 먹은게 있으니까 대통령 오래 하셔야죠~ 만수무강 하세요~ 계속 부추었겠죠.
이시원: 자기 편을 잘 만든 것 같애요.
최원정: 전두환의 리더쉽 카리스마는 지금까지도 있는 거잖아요. 측근들이 모이는 거 보면은~
허진모: 어떻게 보면 정상적인 리더쉽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패거리 리더쉽 정도로~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최원정: 맞아요.
허진모: 그리고 전두환이 갖춘 능력이 그 리더쉽 보다 더 큰 게 있었죠. 정치감각~ 아까 군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자질 중에 가장 위험한 자질이 아닌가 쉽습니다. 그런 정치 감각을 전두환은 가지고 있었던 거죠.
이시원; 어찌 보면은 나서지 않았잖아요.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 있을 때는 다 기회를 엿보고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닐까요?
최원정: 그런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차라리 나대면 공공의 적이라도 생기잖아요.
허진모: 전두환은 11기 동기중에 대령에 가장 먼저 진급을 합니다. 그리고 대령에서 별을 다는데 준장이 되는데 3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굉장히 빠른 속도 거든요.
이시원: 근데 이런 얘기도 있잖아요. 베트남 참전 당시 전두환이 지휘를 하면서 몰래 따로 무기를 밀매를 했대요. 그리고 나서는 이게 다 우리가 빼앗은 거다 이렇게 해서 보고를 했는데 웬걸 살펴보니까 이 총이 새(new)총인 거예요. 싸운 흔적도 없고 그래서 거짓말이 발각되었다는 얘기도 들어봤거든요.
허진모: 베트남 참전부대에서는 전두환에 대한 그런 소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질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한데요. 그런 소문이 많이 돌았다는 자체는 사실이에요.
최원정: 그렇다면 처벌 받아야지~
이시원: 전과를 부풀리려고 한 거잖아요.
허진모: 전두환의 선배였던 강창성 前보안사령관의 증언이 있습니다. 베트남 가서 전투는 안하고 파티열고 손님을 접대하는 등 군인답지 않은 행동을 많이 했다 (1991년 1월 26일 조선일보기사-전두환 장군의 경우…외부 손님들이 너무 찾아와 이들을 응대하느라 본연의 임무인 작전지휘권을 종종 참모에게 위임한 바 있다…너무 빈번하게 파티를 벌인 것이 문제점으로 제기), 그래서 귀국후에 훈장을 수여하려고 했는데 직속상관들이 반대를 했다 이런 증언이 있습니다.
최원정: 근데 약간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는 그런 역할은 있지만 얘를 잘 관리하면 하나회를 통해서 군을 감시견제할 수 있고 또 본인이 해봐서 알잖아요. 요렇게 해야지 쿠데타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라는 계산이 서로 맞물려 있었던 같아요.
다니엘: 근데 일단 지금 박정희 前대통령 어쨌거나 죽었을 때 전두환 입장에서는 약간 뒷 배경이 없어져서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가 왔겠네요.
홍석률: 그렇죠, 군사정권에서 기득권을 누렸던 정치적 성향의 장교들에게는 10.26 사건과 그 이후의 정국의 동향은 대단히 당황스럽고 난감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11월 10일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뭐라고 얘기를 하느냐 하면 유신헌법 절차에 따라서 새로 대통령을 뽑을 것이지만 새로운 대통령은 임기를 다하지 않고 개헌을 해서 민주화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12월 6일날 유신헌법에 따라서 최규하 권한대행이 정식으로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2월 7일날 긴급조치 9호를 해제를 해버려요. 최규하 대통령이 뭔가를 보여주는 거죠. 앞으로 자유와 민주화 방향으로 가겠다.
이시원: 그 당시 국민들은 얼마나 기대에 찼을까요.
최원정: 제일 기다렸던 소식 아닐까요. 근데 국민들은 굉장히 환호했겠지만 사실 전두환이나 하나회 입장에서는 궁지에 몰리는 분위기잖아요. 군 분위기는 어땠어요?
허진모: 군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이미 대부분의 군인들은 하나회 멤버가 군복 입은 정치인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죠. 그래서 10.26 직후에는 이 정치군인들을 척결해야 한다. 전역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굉장히 팽배했었고요. 정승화 참모총장 또한 군인으로서의 품위를 잃은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정리를 하겠다 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했었습니다. 12월 9일, 12.12가 있기 3일전에 정승화 총장이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골프를 쳤는데요. 이때 전두환 소장을 바꾸어야 한다. 전두환 소장이 마찰이 심하다 월권도 심하다 이런 말을 했던 거죠. 그리고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보낼 것이다 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것을 국방부 과거사 진상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로 발령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최원정: 그래서 선방을 날린거구나~
허진모: 문제가 바로 그것이 전두환의 귀에 들어갔던 거죠.
이시원: 근데 들어보니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 하고 원래부터 사이가 나빴었나 봐요.
홍석률: 두 사람의 성향이 워낙 다르기 때문에 부딪칠 수 밖에 없죠. 전두환이 합동수사 본부장이 돼서 청와대를 수색을 했는데 거기에 9억원의 현금이 있었는데 그걸 일단 상관한테 보고하고 정식절차를 거쳐야 되는데 그러지 않고 임의로 그중에 6억원을 대통령의 딸 박근혜에게 생활비조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1억원은 합동수사본부에서 쓰고 나머지 2억원은 정승화 참모총장한테 간 거예요. 그러니까 정승화 참모총장이 이걸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 어떡하느냐 라고 질책을 했던 것이죠.
최원정: 6억원을 제가 어디서 살펴보니까 당시 6억원이 79년도 대치동 은마아파트 분양을 막 시작했을 때인데 31평형 은마 아파트가 1800만원대였어요. 그러니까 은마 아파트 33채를 살 수 있는 어마 어마한 돈이에요.
허진모: 하나회 안에서 자기들 끼리 거액을 이런 식으로 처리를 하지 않았을까. 평소의 버릇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죠.
최원정: 약간 정승화 총장에게 2억을 건넸다는 건 우리 좀 잘 지내봅시다. 이런 건데~ 오히려 싫은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전두환 입장에서는 뭔가 지금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을 텐데 그러면 내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야 되겠다 이때 결심을 한 건가요?
허진모: 12.12 주동자의 한 명이었던 노태우의 증언에 따르면 전두환은 정승화 참모총장을 잡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11월초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10.26 직후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죠. 그 때부터 동기를 규합했을 것이고 군사행동의 첫번째 목표는 당연히 정승화 참모총장의 제거였습니다. 그래야지만 군권을 장악할 수 있었으니까요.
다니엘: 근데 체포할려면 어떤 명목이나 이유가 필요할 게 아녜요. 그건 뭐였어요?
허진모: 기가 막힌 빌미가 있었죠. 바로 10.26 이었습니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10.26 당시에 어디에 있었습니까?
최원정: 옆에~ 안가에~
허진모: 궁정동 안가에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그 장소에 있었습니다. 누구의 초대를 받아서 갔죠?
일동: 김재규요.
허진모: 김재규의 초대를 받아서 거기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김재규가 피묻은 셔츠를 입고 나왔는데 그런 김재규와 같이 움직였죠. 같이 차를 타고 육군본부로 갔습니다. 사실 이 정도면 죄를 만들기에는 부족함이 없죠.
홍석률: 정승화 참모총장이 바로 궁정동 사건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오해나 억측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죠. 심지어 자신과 아주 친한 절친들도 진짜 몰랐느냐 거긴 왜 갔느냐 그렇게 의심스럽게 본인한테 묻기도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나 10.26 사건 직후의 정황을 보면은 정승화 참모총장은 육군본부로 들어가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김재규의 체포를 지시하죠.
-------------(동영상) 전두환 합수본부장 중간수사발표: 동석하였던 비서실장으로부터 이 전모를 제보받은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은 즉시 범인 김재규를 구속, 수사하도록 지시하여------------
홍석률: 그러니까 김재규를 체포하도록 명령한 사람은 바로 정승화 총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측면으로 보았을 적에는 실질적으로 이게 사전에 모의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거죠. 10.26 사건에 대한 공식발표에서도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이 정승화 사령관에 대한 여러가지 억측들이 있지만 그거는 사실이 아니다 라고 얘기를 했고~
---------------(동영상) 전두환 합수본부장 중간수사발표: 군부 또는 여타 조직의 관련이나 외세가 개입된 사실이 전혀 없으며-------------------
이시원: 아까 11월초에 이미 전복을 꿈꾸었다고 했잖아요. 근데 왜 하필 12월 12일로 계획을 짰던걸까요?
홍석률: 12월 12일로 날자를 정한 이유가 있습니다. 12월 12일쯤이면 당시 김재규 재판,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한 재판의 사실심리가 거의 끝나가는 싯점이었어요. 최후진술만 남아있는 싯점입니다. 그러니까 이때 정승화를 그 혐의로 걸어서 재판에 넘기지 않으면 최후진술까지 가면 재판이 마무리가 되니까 어렵게 되는 거죠. 그리고 12월 12일이 어떤 날이었느냐 당시 국무총리로 신현확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가 되었습니다. 그의 임명동의안이 통과가 되면은 국무총리가 제청을 해가지고 장관을 세워서 조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게 12월 13일이었어요. 그러니까 신군부의 입장에서는 12일날 거사를 하면은 자연스럽게 조각과 함께 참모총장도 갈 수가 있고 여러가지로 12일이라는 날짜가 적합했던 것이죠.
이시원: 자연스럽게 흘러가겠끔 짰던 거네요. 뭔가 전두환하면 단순하고 불도저 같은 느낌이 있는데 상당히 치밀한 거 같애요.
홍석률: 12.12 거사는 온전히 계획된 것이었는데요. 전두환 노태우 재판판결문에 따르면 노태우와 전두환이 상의해서 12월 7일날 이미 거사 날짜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치밀한 사전준비를 했고 오후 7시에 정승화 참모총장이 체포되기 3시간 전입니다. 그날 12월 12일 오후5시에 전두환과 정승화 총장이 만났어요. 당시 김재규 재판이 마무리되는 중이었는데 국방부 장관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불러가지고 김재규가 그래도 고위 관료였으니까 용공세력 북한의 남침위험을 강조하는 걸 최후진술에 했으면 좋겠다. 그래 갔고 그 얘기를 듣고 12월 12일 오후 5시에 전두환을 자기 집무실로 부른 겁니다.
최원정: 재밋네요~
홍석률: 전두환은 지금 잡을려고 다 꾸며놓고 있는 사람인데 그래서 그 말을 전했고 전두환은 아마 김재규가 그렇게 할지는 어렵긴 하지만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라고 인사를 꾸벅하고~
이시원: 연기까지 완벽했네요~
최원정: 거기서 포커 페이스해야지~ 이글이글하는 눈빛으로 잠시 후 내가 너를 체포하겠다 라고 할 수는 없지~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허진모: 나오면서 아마 씩 웃지 않았을까요~
최원정: 그런 일도 있었군요. 이렇게 거사 날짜가 정해지고 디-데이는 점점 다가오고 암호명은 생일집 잔치~
--------------이광용: 12.12 군사반란, 암호명 생일집 잔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라, 여러분께서 기억하셔야 할 장소는 네 곳입니다. 먼저 경복궁에 있는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 만일에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하나회 핵심인사들은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연회동에 있는 요정, 참고로 이곳은 민간인이 운영하는 주택가에 있는 비밀 요정입니다. 이 요정에선 전두환 사령관이 주최한 연회가 열렸는데요. 전두환 사령관의 반대편에 설 가능성이 있는 지휘관들을 유인해서 발을 묶어놓기 위함이었죠. 다음은 오늘의 타겟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있는 한남동 총장공관 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최규하 대통령이 있는 삼청동 총리공관,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기 위해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데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총리 공관에 직접 갔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만큼 작전은 오후 6시 30분 동시에 딱 시간을 맞추어서 일제히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 이게 뭐야~ 큐 사인이 안떨어지는 겁니다. 실행을 해야 되는데~ 최규하 대통령이 국방장관의 허락을 받아 오라면서 재가를 안해주는 거죠.
이시원: 오라~ 그러면 정승화 체포조는 어떻게 됐죠?
이광용: 재가가 안난 상태에서 7시가 됐고 결국 사건은 벌어집니다. 오후 7시 총장공관에 도착한 체포조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만납니다. 10.26과 관련해 조사할 게 있으니 함께 가주셔야겠다. 그랬더니 정총장이, 그래 그럼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화 연결해, 정총장의 부관이 전화를 거는 순간~ (큰소리로) 탕~
이시원: 아이~ 깜짝이야~
이광용: 이게 총소리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최초의 총격이 바로 그 순간 발생합니다. 결국 이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부하들에게 개머리 판으로 맞고 머리에 총구가 겨누어진 채로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습니다. 7시 30분 경의 일이었습니다.
다니엘: 아니 근데 대통령의 재가없이 연행한 거면 결국 불법적으로 연행한 거잖아요. 빨리 국방장관한테 가서 허가를 받아야 되는데 도대체 지금 안왔잖아요.
이광용: 총장 공관 근처에 있던 국방장관은 총소리를 듣고 재빠르게 담을 넘어서 인근 대학교 체육관으로 가서 자동차를 타고 서울 시내를 배회하다가 육군본부에 잠시 들렸다가 미8군 방카에 갔다가 국방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시원: 국방장관 맞아요?
최원정: 도망다닌 거잖아요?
최원정: 지금 자기가 대통령 다음으로 명령체계 2인자인데~ 이걸 어떻게 해요?
이광용: 당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총소리를 듣고 전쟁이 난 줄 알았대요. 사실 얼마전에 대통령이 죽었으니까 안보위기 상황이고 했잖아요.
이시원: 아무리 전쟁이 난 줄 알았어도 북한이 쳐들어왔으면 맞서 싸워야죠~ 뭐하는 거예요?
이광용: 전두환 사령관측은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정총장을 연행한 싯점부터 반란군이 됐습니다. 그런데 소수의 반란군이 60만 대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 부담스러운 상황이잖아요. 전두환측은 묘수를 생각해 냅니다. 신사협정~ 군병력은 출동시키지 말자~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동영상) 기자: 정승화 총장이 연행된 후 반란군 진압을 위해 9공수 여단에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정보를 장악한 반란군 보안사에 즉각 파악된다. 보안사: 큰일 났습니다. 9공수 여단이 출동을 했습니다. 전두환: 뭐야~ 기자: 위기에 빠진 반란군 전두환측은 신속히 신사협정을 제안한다 띠리링~ 진압군: 참모차장이오, 반란군: 병력을 서로 동원하지 않기로 합의했잖소 신사협정 이리 깨도 되는 겁니까? 이건 약속위반입니다 빨리 부대복귀 지시하지 않으면 큰일날 꺼야 기자: 고민 끝에 협정을 받아들인 진압군, 진압군: 9공수 여단 상황실 대! 기자: 하지만 전두환측 반란군은 협정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반란군은 1공수 여단을 출동시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한다. 승지와 패자가 갈리는 순간이었다-----------------
최원정: 반란군 입장에서는 수가 밀리니까 서로 피보지 말자고 해놓고 뒤통수를 쳤네요.
이시원: 질 것 같을 때 우리 비긴 걸로 하지 않을래~ 했다가 뒤로 찌르는 거죠.
최원정: 신사협정은 사실 신사들 끼리 해야 되는데~ 협정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홍석률: 1공수 여단이 서울에 진입해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했는데 이거 외에 9사단 노태우 소장의 9사단 일부 병력도 그날 새벽에 서울로 들어왔죠. 근데 9사단은 우리나라 전방을 수비하는 부대입니다. 그것도 제일 중요한 서울 북부지역,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대를 권력장악을 위해서 동원을 한 것이죠.
허진모: 국가는 안중에도 없었다고 볼 수 있었죠.
홍석률: 그리고 9사단은 당연히 한미연합사령관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는 부대입니다. 그런 통제권도 무시하고 병력을 동원해서 군권장악에 나선 거고 물론 여기에 대해서 이런 군사반란 진압을 해야 되는 것이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서로 충돌했을 때 민간인들의 피해, 북한의 이용가능성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반란군의 진압이 상당히 어려웠던 겁니다.
이시원: 국민들을 완전히 불모잡고 반란을 일으킨 거네요. 그러니까 국민들은 당시 박대통령이 갑자기 죽고 나서 전쟁나는 거 아냐 얼마나 불안했겠어요. 진짜 반란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서 전쟁이 날 수도 있는 위기 상황까지 초래한 거잖아요. 진짜 국민들이 눈뜨고 당한 꼴이에요.
다니엘: 그래도 이해가 안가는게 북한이 쳐들어올 수가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좀 강하게 대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최원정; 십만명이 넘는데 진짜~
허진모: 그런데 12.12때 동원된 반란군의 숫자는 5천명 정도의 숫자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적은 숫자인데 사실은 군사반란에서 숫자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이미 5.16 쿠데타 때 이미 증명이 됐죠. 요소 요소에 정말 사람으로 치면 급소를 장악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거죠. 거기에다가 각군 주요 부대의 최고 지휘관들은 정상적인 명령체계인 정승화 총장 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무진이었던 영관급이 모조리 하나회에 포섭되어 있는 상황이었던 거죠.
홍석률: 당시 중요한 위치죠.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있었던 장태완 장군하고 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은 아주 명쾌하게 이건 군사반란이라고 규정하고 진압의사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밑에 있는 장교들이 하극상 쪽에 가담을 했기 때문에 모두 체포가 되었죠.
최원정: 거기서 13일 새벽에 이미 반란군이 육군본부랑 국방부를 다 점령을 한 거잖아요. 그리고 예비병력도 서울진입에 성공을 했는데 그러면 지금 대통령은 재가를~ 아, 그리고 국방부 장관 찾았어요? 어떻게 됐어요?
홍석률: 국방부 장관은 국방부에 1공수여단이 쳐들어오니까 지하실로 대피를 했습니다. 대피해 있다가 새벽 4시쯤에 발견되었죠.
최원정: 발각~
홍석률: 일단 청와대 근처에 보안사령부가 있는데 그리로 끌려가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나고 둘이 함께 대통령을 찾아가서 재가 서명을 받았습니다. 이때 시간이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경이었습니다. 10시간만에 상황이 종료된 것이죠.
이시원; 이렇게 쉽게 정복당하다니 참 맥 빠지네요~
허진모: 최규하 대통령은 서명을 하면서 옆에 시각을 적어 놓습니다.
최원정: 자기 사인하고 그 옆에다가요?
허진모: 네, 이것을 왜 했느냐 그 의도느 본인 밖에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나중에 전두환과 노태우가 했던 이런 거사가 반란이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가 됐습니다.
이시원: 나는 여기에 끼지 않았다 이런 사인 아니었을까요?
최원정: 우리가 사인 밑에다가 시간은 안적잖아요.
허진모: 그러니까 아무래도 근무시간이 아니니까
이시원: 아니면 난 협박당하고 있어~
최원정: 바른 소심한 어떤 반격? 방어?
홍석률: 사실은 아쉬움이 있는 거죠. 대통령 직위에 있으면은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의 권리를 수호해야 되는 거죠. 뭐 거기에 시간을 써넣고 사후에 알리바이를 만들고 그런 거는 그렇게 중요한게 아니겠죠. 부당한 일에 대해서 꾸짖고 질책하고 그러한 모습을 보여줘야 됐는데 안타깝게도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최원정: 하여튼 이렇게 신군부라고 쓰고 반란군이라고 읽히는 이들이 12.12 군사반란을 성공 시킵니다.
---------------(동영상) 기자: 12.12반란이 성공한 후 연예인까지 동원된 파티가 열렸다. 전두환: 국국민들로부터 뭔가 석연치 않다는 일종의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지만 충격적인 군사행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전두환이 마이크를 잡더니 김삿갓 노래를 부른다~동원된 연예인들과함께), 기자: 성공한 쿠데타를 자축하는 반란군들의 화려한 잔치였다-------------
이시원; 야~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거 같아요.
최원정: 연예인 도우미를 동원했다니까 더욱~ 말 그대로 생일집 잔치~
이시원; 이거 정말 자유민주주의 입장에서는 생일집 잔치가 아니라 초상집 곡소리가 되었네요.
홍석률: 신군부가 승리를 했고 저 파티를 즐겼던 인물들 중에 다 아시겠지만 두명의 대통령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참모총장 장관 국회의원이 나온 것이죠. 그 이후로 12.12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중요 요직을 장악을 했습니다.
이름 12.12 당시 직책 최종직책
전두환 보안사령관겸 합수본부장 대통령
노태우 9사단장 대통령
장세동 수경사 제30경비단장 청와대 경호실장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겸 합수부 비서실장 청와대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겸 합수부 총무처장 청와대 사정수석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겸 합수부 정보처장 민정당 사무총장
최원정: 참 씁쓸하네요~ 승자가 전리품을 나눠 갖듯이 정말~아주 추한 패거리의 모습같애요.
이시원: 야만적이에요 야만적~
다니엘: 정승화 참모총장은 어떻게 된 건가요? 어디로 끌려가서~
허진모: 끌려가서는 발가벗겨진 채 바로 직전까지는 부하들이었죠. 부하들한테 모진 고문 치욕을 받았다고 합니다. 정승화 총장이 후에 회고록에서 이렇게 써놨는데요. 내가 6.25 전쟁때 죽지 못해서 이런 고초를 당하는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내란방조죄 혐의로 7년형을 선고를 받았고요. 이등병으로 강제예편 당합니다. 그리고 같은 편에 서서 반란군 진압을 끝까지 주장했던 장군들도 전부가 강제 예편당하였습니다. (장태완 소장, 정병주 소장).
최원정; 군사반란 작전 중에 세명이 죽죠. 상관을 지키려다가 돌아가신 김오랑 소령(후에 중령), 그리고 제대를 1주일 앞둔 정선엽 병장, 그리고 결혼한지 20일 밖에 안된 반란군측에 있었지만 박윤관 일병, 이런 사람들의 죽음은 너무나 억울하잖아요.
이시원: 그러니까요 이렇게 세 분이나 돌아가셨는데 지금 잔치를 벌이는게 말이 돼요~ 정말 이런 비상식이 상식을 이기는 때는 파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애요.
홍석률: 그리고 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장악을 위해서 군대를 동원하고 또 심지어 총을 쏘고 이런 행태를 보였던 모습들은 결국은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항쟁 때 시민들을 학살하는 그런 행태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최원정: 1980년 9월 1일에 전두환씨는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체육관 마지막 대통령이에요. 그러면 12.12 군사반란 이때에 정권을 확실하게 장악을 했다고 봐야 되나요?
허진모: 12.12 사건후 10달 후에 대통령이 되니까 정권 장악에 필요한 군권을 장악했다. 실권을 쥐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맞죠. 그래서 12.12 군사반란을 두고 어떤 분은 세계 역사상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 라고 표현하신 분도 있습니다.
홍석률: 다단계 쿠데타였습니다.
이시원; 단계~ 단계~ 단계에서~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라갔는데 그렇다면 전두환은 언제부터 정확히 대통령의 자리를 꿈꾸었을까요? 12.12 사건때 아니면 10.26 때?
홍석률: 본인만이 알겠죠. 전두환이 언제부터 대권을 꿈꾸었는지, 그거는 정확히 얘기하기 어렵지만 12.12 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하는 순간, 정치적 권력까지 넘볼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왜그러냐 하면 불법적으로 군대의 권력을 장악했는데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정치권력을 장악한 사람에 의해서 숙청되겠죠.
최원정: 마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하고 나서 역성혁명을 안했으면 죽임을 면치 못했을텐데~ 그런 차원이 아니었나 싶네요.
허진모: 전두환은 박정희 라는 거대한 독재자가 만들어 놓은 그 길을 따라서 성장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유신체제는 전혀 그때 김재규로 인해서 청산된 것이 아니라 전두환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또 다르게 변형되어서 변형의 모습으로 연장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민중은 가장 비극적인 결과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거죠.
최원정: 바이러스도 변이되면 포악해 지듯이 어두운 권력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거네요. 이제 문민정부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일부 시민단체에서 전두환 노태우를 고발 고소 하잖아요. 그때 서울지검 검사가 불기소처분을 내리면서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뭔지 아시죠?
이시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최원정: 사실 이 얘기가 당시에 굉장히 국민들에게 불쾌감을 주어서 나중에 법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만 계속 그 얘기가 맴돌았어요. 쭉 들어보니까 말도 안되는 얘기지 않습니까?
이시원: 5.18 특별법을 제정했던 그때 또 유명한 어록이 있잖아요, 이분의 왜 나만 갖고 그래~어떻게 보면은 많은 국민들이 박대통령이 죽고나서 드디어 민주주의가 오나부다 했는데 오히려 더 암울해졌죠. 정말 어떻게 보면 초상집 분위기였을 때 생일집 잔치를 즐기면서 그때 한 몫 챙겼던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우리는 알잖아요. 과연 그 사람들이 이 순간에 반성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요~ 제가 볼 때는 아니오 그렇기 때문에 전두환 전대통령이 왜 나만 갖고 그래~ 그러는거 같애요. 나말고 나말고도 한 몫 챙긴 사람이 많은데 왜 나만 갖고 그래~ 이거에 대한 확실한 진상조사와 처벌, 환수가 완성되지 않으면 또 다른 독재자가 나타날 때 또 다시 충성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 같습니다. 우리 기억하고 끝까지 이 과정을 정리해야 될 것 같애요.
다니엘: 저는 개인적으로 작년에 남산의 부장들 이란 영화를 보면서 이게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 나세요? 마지막으로 전두환이 청와대 대통령 테이블을 바라보면서~ 영화가 끝나거든요. 대통령 암살로부터 47일 후 신군부세력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또 다른 군사독재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그게 마지막 장면이었는데~ 연속편 그 후의 이야기는 오늘 접하게 되어서 개인적으로 궁금증을 많이 풀 수 있었던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홍석률: 12.12 군사반란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고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알고 보면은 지금도 우리 일상 생활에서 또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회사든 공공기관이든 이른바 조직의 실세라는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 있죠. 거기에 대해서는 당연히 구성원들이 그런 실세들을 추종하기 보다는 명확하게 원칙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고 단호하게 비판하는 게 필요하구요. 또 이러한 실세들 인물들한테 충성하는 것도 문제지만 조직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그 조직이 표방하고 있는 공적 가치 목표 거기에 충성을 해야 되는 것이죠. 무엇이 이 조직의 공적 가치이고 목표인가에 대해서는 소통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패거리를 모아서 권력을 사유화하는 이런 도당들이 조직과 나라를 좀 먹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1979년 12월 12일에 전두환이 군사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대한민국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다음 회에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98회에서 정리).
① 1979년 12월 13일 아침, 충격적인 소식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체포되었다. 10.26 사건 당시 김재규와 공모혐의 때문, 정승화 총장을 체포한 사람은 그의 부하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 12.12일 작전암호명 생일집 잔치, 군초유의 하극상이자 군사반란, 12.12군사반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 정승화 장군을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군대를 동원해서 군권을 장악한 사건,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의 사전 재가 없이 two star가 four star를 체포, 5.16 쿠데타 때 박정희 소장도 two star였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이 새로운 권력자로 탄생했다.
② 1979.10.26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다. 사망 다음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선포, 계엄사령관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박대통령 암살사건을 수사할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임명, 전두환은 대통령 시해사건이라는 국가 중대사를 조사를 하면서 중앙정보부, 경찰, 그리고 검찰까지 통솔할 수 있다. 전두환은 10.26사건 중간수사결과 발표 때 처음 등장, 전두환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권력실세 다섯 손가락 안에 인물, 박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차지철 경호실장, 그 다음 네번째 인물 전두환 보안사령관, 10.26사건으로 박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죽었고 김재규는 잡혀있고 전두환만 남았다. 암살사건 일주일 후 11월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떠오르는 실세로 보도, 사실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차근차근 권력의 중심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③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 당시 바쁘고 초조한 인물이 있었다. 그 시각 육사생도 800명은 쿠데타 지지행진을 벌였다. 육사생도들을 동원한 건 서울대 ROTC 교관으로 있던 육사11기 출신 전두환 대위, 박정희 대통령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 가까이에 도달, 1967년 전두환 중령은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에 임명, 경복궁에 주둔한 청와대 근위부대로 장교들의 출세코스, 박정희 대통령은 종종 산책을 나와서 30대대 본부에 들렸다. 1976년 전두환은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임명, 1977년 박대통령이 당시 육사에 다니고 있던 아들 면회를 갔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바로 뒤에서 차지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④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전두환을 불러서 은밀한 제안을 한다. 정치해 볼 생각 없나? 전두환은 대답했다.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이 친히 정치계로 들어오라고 손을 내민 건데 그것을 거절하며 충성을 보여줬다. 박대통령은 2인자를 안좋아했다. 군에 남은 전두환은 박 대통령의 친위부대를 만들면서 충성행보를 이어갔다. 70년대에 중앙정보부가 있다면 80년대에는 하나회가 있다, 하나회는 민족도 하나~나라도 하나~충성을 바칠 곳도 하나~ 이래서 하나회라고, 하나회는 5.16 쿠데타 직후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11기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군부대 비밀 사조직, 육사 한 기수당 10명 정도, 육사정원 대비 약5% 정도의 소수였다고, 대상은 주로 영남지역 출신의 성적이 우수했던 정규육사출신 장교들, 마약 조직에서 조직원을 뽑듯이 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가입을 시켰다. 하나회도 강도 높은 신명을 다 바치는 충성을 요구했던 것은 사실, 그 대상이 국가나 국민이 아니라 그 조직이었다는 것에 문제가 된다. 가입 후에는 상급자로부터 활동비를 받아쓰고 재벌로부터 여러가지 자금을 얻어냈다. 재벌로부터 받아온 그 돈으로 회원들을 관리했다고,
⑤ 물론 군 내부적으로 하나회같은 사조직은 허용되지 않았고 군내 사조직 결성은 명백한 위법이다. 하나회는 영화 대부 family를 연상시켰다, 정규군 안에서 끔찍한 일이다. 하나회는 역사 속에 오명을 남긴 조직이지만 하나회의 구성원들이 뭉칠 수 있었던 정체성은 정규 4년제 육사출신들의 엘리트 의식, 육사11기는 1951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그때부터 육군사관학교가 4년제 대학과 마찬가지였다. 그전에는 교육기간이 짧았다. 1951년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장교가 좋은 직업, 우수한 인재들이 육사에 들어갔고 교수진도 우수, 육사11기는 과거 육사기수와는 독특한 엘리트 의식과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하나회 가입 특별한 혜택은 진급과 보직에서 우대, 박 대통령의 비호 아래 요직이라고 할 수 있는 수경사 보안사 대통령경호실 특전사 중앙정보부 같은 데서 핵심 요직을 독차지했었다. 군인으로서 이보다 더 큰 혜택은 없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 자기들 끼리 끌어주고 밀어주고 하면서 하나가 되었다. 그들에게는 정상적인 군명령체계가 아주 웃어 보였다.
⑥ 전두환은 전형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군인, 근무지를 보면은 대부분 서울 수도권 요직에 권력기관과 관련된 직책을 맡았다. 육사생도로서 전두환의 입학성적은 끝에서 두번째 추가 합격을 했다고, 졸업성적도 156명중 126등, 근데 운동 잘하고 교우관계 좋고 카리스마가 있어 동기들 사이에 인정 받아서 하나회 리더가 되었다. 당시 군문화에 최적화된 사람, 과거 정보부에 몸 담았던 사람에 따르면 전두환이 안기부에서 상여금을 줄때 돈을 쌓아놓고 세지 않고 주었다고, 자로 재가지고, 고로 자기 편을 잘 만들었다. 지금까지도 전두환 측근들이 모이는데 정상적인 리더쉽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패거리 리더쉽 정도로 보인다는 것, 전두환의 리더쉽 보다 더 큰 건 정치감각, 군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자질 중에 가장 위험한 자질이 정치 감각이다.
⑦ 전두환은 11기 동기중에 대령에 먼저 진급, 대령 3년만에 준장, 굉장히 빠른 속도다. 전두환이 베트남 참전 당시 지휘를 하면서 무기밀매를 했다고, 이게 다 우리가 빼앗은 거다 해서 보고를 했는데 웬걸 총이 새(new)총이고 싸운 흔적도 없어서 거짓말이 발각되었다는 얘기, 베트남 참전부대에서는 전두환에 대한 그런 소문이 있었다, 그걸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한데 그런 소문이 많이 돌았다. 전두환의 선배였던 강창성 前보안사령관은 전두환은 베트남 가서 전투는 안하고 파티열고 손님 접대 등 군인답지 않은 행동을 많이 했다. 1991년 1월 26일 조선일보기사-전두환 장군의 경우…외부 손님들이 너무 찾아와 이들을 응대하느라 본연의 임무인 작전지휘권을 종종 참모에게 위임한 바 있다…너무 빈번하게 파티를 벌인 것이 문제점으로 제기, 귀국후 훈장을 수여하려고 했는데 직속상관들이 반대를 했다는 증언, 근데 박대통령 입장에서는 얘를 잘 관리하면 하나회를 통해서 군을 감시견제할 수 있고 본인이 해본 일, 그래야지 쿠데타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라는 계산이 서로 맞물린다. 10.26 사건은 군사정권에서 기득권을 누렸던 정치장교들에게는 당황스럽고 난감한 것, 11월 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유신헌법 절차에 따라서 새로 대통령을 뽑고 새로운 대통령은 임기를 다하지 않고 개헌을 해서 민주화 조치를 취하겠다고, 12월 6일 유신헌법에 따라서 최규하 권한대행이 정식으로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2월 7일날 긴급조치 9호를 해제, 최대통령은 앞으로 자유와 민주화 방향으로 가겠다.
⑧ 국민들은 민주화를 환호했지만 전두환이나 하나회 입장은 궁지에 몰리는 분위기, 군 분위기도 대부분의 군인들은 하나회 멤버가 군복 입은 정치인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고 10.26 직후 정치군인들을 척결해야 한다. 전역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굉장히 팽배했었고, 정승화 참모총장 역시 군인으로 품위를 잃은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정리를 하겠다고, 12월 9일, 12.12가 있기 3일전 정승화 총장이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만나서 전두환 소장을 바꾸어야 한다. 그는 마찰이 심하고 월권도 심하다.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보낼 것이다. 이게 전두환의 귀에 들어갔다 정승화 총장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두 사람의 성향이 워낙 다르다. 전두환이 합동수사 본부장이 돼서 청와대 수색을 했는데 9억원의 현금이 있었다. 전두환은 임의로 6억원을 대통령의 딸 박근혜에게 생활비조로 주었고 1억원은 합동수사본부에서 쓰고 나머지 2억원은 정승화 참모총장한테 주었다. 정승화 참모총장이 이걸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 어떡하느냐 라고 질책, 당시 79년도 6억원은 대치동 31평형 은마 아파트가 1800만원대였는데 33채를 살 수 있는 어마 어마한 돈이었다.
⑨ 전두환은 하나회에서 거액을 이런 식으로 처리를 하지 않았을까. 평소의 버릇이 나오지 않았을까. 정승화 총장에게서 오히려 싫은 소리를 들었으니까 전두환 입장에서는 뭔가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12.12 주동자의 한 명이었던 노태우는 11월초에 전두환은 정승화 참모총장을 잡아야겠다고 결심하였다고, 10.26 직후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때부터 동기를 규합했을 것이고 군사행동의 첫번째 목표는 당연히 정승화 참모총장의 제거였다. 그래야 군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정승화를 체포하는데 기가 막힌 빌미가 바로 10.26사건, 정승화 참모총장은 당시에 김재규의 초대를 받아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그 장소에서 식사, 김재규가 피묻은 셔츠를 입고 나왔는데 그런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육군본부로 갔다. 이 정도면 죄를 만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10.26 사건 직후 정승화 참모총장은 육군본부로 들어가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김재규 체포를 지시하였다.
⑩ 전두환은 11월초 정부 전복을 생각했는데 12월 12일로 계획을 짰던건 12월 12일쯤이면 당시 김재규 재판의 사실심리가 거의 끝나가고 최후진술만 남은 싯점, 이때 정승화를 그 혐의로 걸어서 재판에 넘기지 않고 최후진술까지 가면 재판이 마무리가 되니까 어렵게 된다. 그리고 12월 12일 당시 국무총리로 신현확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 그러면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장관 조각을 하게 되는데 그게 12월 13일이었다. 신군부의 입장에서는 12일날 거사를 하면은 자연스럽게 조각과 함께 참모총장도 교체할 수가 있어서 12일이 적합했던 것, 12.12 거사는 계획된 것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12월 7일날 만나 거사 날짜를 잡았다. 치밀한 사전준비를 했고 오후 7시에 정승화 참모총장이 체포되기 3시간 전에 12월 12일 오후5시에 전두환과 정승화 총장이 만났다. 당시 김재규 재판이 마무리되는 중이었는데 국방부 장관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불러가지고 김재규가 고위 관료였으니까 용공세력 북한의 남침위험을 강조하는 걸 최후진술에 했으면 좋겠다. 그 얘기를 듣고 12월 12일 오후 5시에 정승화는 전두환을 자기 집무실로 부른다. 전두환은 하지만 최대한 노력하겠다 라고 인사를 하고,
⑪ 거사 날짜가 정해지고 디-데이는 점점 다가오고 암호명은 생일집 잔치, 12.12 군사반란 암호명 생일집 잔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라, 기억해야 할 장소는 네 곳, 첫째 경복궁에 있는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 만일의 사태대비를 위해 하나회 핵심인사들이 이곳에 모였다. 둘째 연회동에 있는 비밀요정, 전두환 사령관이 정승화편에 있는 지휘관들을 초대한 곳, 셋째 오늘의 타겟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한남동 총장공관, 마지막 최규하 대통령의 삼청동 총리공관, 전두환은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 전두환이 총리 공관에 직접 갔다. 촌각을 다투는 만큼 작전은 오후 6시 30분 동시에 딱 시간을 맞추어서 일제히 시작하기로 했다. 그런데 최규하 대통령이 국방장관의 허락을 받아 오라면서 재가를 거부, 이 시각 정승화 체포조는 재가가 안난 상태에서 7시가 됐고 사건은 벌어졌다. 오후 7시 총장공관에 도착한 체포조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만난다. 10.26과 관련해 조사할 게 있으니 함께 가주셔야겠다. 그랬더니 정총장이, 그래 그럼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화 연결해, 정총장의 부관이 전화를 거는 순간 체포조에 의해서 총격이 발사, 이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부하들에게 개머리 판으로 맞고 머리에 총구가 겨누어진 채로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다. 7시 30분 경이었다. 총장 공관 근처에 있던 국방장관은 총소리를 듣고 재빠르게 담을 넘어서 인근 대학교 체육관으로 가서 자동차를 타고 서울 시내를 배회하다가 육군본부에 잠시 들렸다가 미8군 방카에 갔다가 국방부로 돌아왔다.
⑫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 다음으로 명령체계 2인자인데 비겁했다. 전두환측은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정총장을 연행한 싯점부터 반란군이 됐다. 소수의 반란군이 60만 대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 전두환측은 묘수를 생각해 낸다. 신사협정, 군병력은 출동시키지 말자는 제안, 하지만 전두환은 협정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반란군은 1공수 여단을 출동시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한다. 승지와 패자가 갈리었다. 1공수 여단 외에 노태우의 9사단 일부 병력도 그날 새벽에 서울로 들어왔다. 9사단은 우리나라 전방을 수비하는 부대, 제일 중요한 서울 북부지역,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대를 권력장악을 위해서 동원, 그들에게 국가는 안중에도 없었다. 9사단은 한미연합사령관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는 부대인데 통제권도 무시하고 병력을 동원 군권장악에 나섰다. 이래서 반란군의 진압이 상당히 어려웠다.
⑬ 국민들을 불모잡고 일으킨 반란 국민들은 눈뜨고 당한 꼴이다. 12.12때 동원된 반란군의 숫자는 5천명 정도의 숫자, 군사반란에서 숫자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이미 5.16 쿠데타 때 증명이 됐다. 사람으로 치면 급소를 장악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각군 주요 부대의 최고 지휘관들은 정상적인 명령체계인 정승화 총장편이었다. 그런데 실무진이었던 영관급이 모조리 하나회에 포섭되어 있는 상황,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하고 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은 아주 명쾌하게 이건 군사반란이라고 규정하고 진압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밑에 있는 장교들이 하극상 쪽에 가담을 했기 때문에 모두 체포가 되었다. 13일 새벽 4시에 국방부 장관은 국방부 지하실에서 발각 보안사령부로 끌려가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나고 둘이 함께 대통령을 찾아가서 재가 서명을 받았다. 이때 시간이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경, 10시간만에 상황종료. 정부가 쉽게 반란군에 정복당하니 참 맥이 빠졌다.
⑭ 최규하 대통령은 서명을 하면서 옆에 시각을 적어 놓았다. 이것은 나중에 전두환과 노태우가 했던 거사가 반란이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 아쉬움이 있다. 대통령 직위에 있으면은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의 권리를 수호해야 되는데 거기에 시간을 써넣고 사후에 알리바이를 만들고 그런 거는 중요한게 아니다. 부당한 일에 대해서 꾸짖고 질책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정승화 총장은 전두환한테 그걸 했다. 12.12반란이 성공한 후 전두환은 연예인까지 동원된 파티를 열었다. 성공한 쿠데타를 자축하는 반란군들의 화려한 잔치였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 힘없는 자유민주주의 입장에서는 초상집 통곡소리가 되었다.
⑮ 신군부가 승리했고 파티를 즐겼던 인물들 중에 두명의 대통령이 나왔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참모총장 장관 국회의원이 나왔다. 12.12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중요 요직을 장악했다.
이름 12.12 당시 직책 최종직책
전두환 보안사령관겸 합수본부장 대통령
노태우 9사단장 대통령
장세동 수경사 제30경비단장 청와대 경호실장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겸 합수부 비서실장 청와대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겸 합수부 총무처장 청와대 사정수석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겸 합수부 정보처장 민정당 사무총장
정승화 참모총장은 발가벗겨진 채 끌려가서는 부하들한테 모진 고문 치욕을 받았다. 후에 그의 회고록에서 내가 6.25 전쟁 때 죽지 못해서 이런 고초를 당하는구나 라고 썼다고, 그는 내란방조죄 혐의로 7년형을 선고를 받았고, 이등병으로 강제예편 당한다. 같은 편에 서서 반란군 진압을 끝까지 주장했던 장군들도 전부 강제 예편, 장태완 소장, 정병주 소장, 군사반란 작전 중에 세명이 죽었다. 정병주 소장을 지키려다가 총격 사망한 김오랑 소령(후에 중령), 제대를 1주일 앞둔 정선엽 병장, 그리고 결혼한지 20일 밖에 안된 반란군측에 박윤관 일병, 비상식이 상식을 이긴 전두환 반란군은 결국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항쟁 때 시민 학살 행태로 이어지게 되었다.
ⓐ 1980년 9월 1일 전두환씨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마지막 체육관 대통령, 12.12 군사반란을 두고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 라고 표현, 불법적으로 군대의 권력을 장악했는데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면 당연히 정치권력을 장악한 사람에 의해서 숙청되기 때문,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하고 나서 역성혁명을 안했으면 죽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전두환은 박정희 라는 거대한 독재자가 만들어 놓은 그 길을 따라서 성장한 사람이다. 그러니 유신체제는 김재규로 인해서 청산된 것이 아니라 전두환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다르게 변형되어서 연장되었다. 거기에 민중은 가장 비극적인 결과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문민정부 시대에 접어들면서 시민단체에서 전두환 노태우를 고발고소, 그때 서울지검 검사가 불기소처분을 내리면서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말도 안되는 얘기였다. 이 얘기가 당시 국민들에게 굉장히 불쾌감을 주었는데 나중에 법의 심판을 받았다. 5.18 특별법을 제정했던 그때 전두환은 왜 나만 갖고 그래 민주주의가 초상집 분위기였을 때 생일집 잔치를 즐기면서 그때 한 몫 챙겼던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이 순간에 반성을 했을까, 전두환은 나말고도 한 몫 챙긴 사람이 많은데 왜 나만 갖고 그래, 이것에 대한 확실한 진상조사와 처벌, 환수가 완성되지 않으면 또 다른 독재자가 나타날 때 또 다시 충성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
ⓑ 1979.10.26 대통령 암살로부터 47일 후 신군부세력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또 다른 군사독재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12.12 군사반란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고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알고 보면은 지금도 우리 일상 생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회사든 공공기관이든 조직의 실세라는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 있다. 거기에 대해서 당연히 구성원들이 실세들을 추종하기 보다는 명확하게 원칙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고 단호하게 비판하는 게 필요하다. 이러한 실세들한테 충성하는 것도 문제지만 조직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것도 문제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그 조직이 표방하고 있는 공적 가치 목표 거기에 충성을 해야 되는 것이다. 무엇이 이 조직의 공적 가치이고 목표인가에 대해서는 소통과 대화가 필요하다. 패거리를 모아서 권력을 사유화하는 도당들이 조직과 나라를 좀 먹는 일은 없어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