澤堂先生集卷之十 / 墓碣 / 歙谷縣令李君墓碣銘 幷序
故縣令李君碩亨君會。生于嘉靖甲午。仕宣廟朝。卒以萬曆乙未。余後之且僻。未之聞也。今年天啓乙丑。始識其長孫上舍生新覺。按其先故。忠孝家也。方壬辰六月。倭寇嶺東。君時爲令歙谷。吏民勸其避入海島。君泣曰。宗社顚矣。何黨之矣。寧守此官。死此境也。未幾。闔門遇賊。君蹈鋒刃。君二子曰旻曰昇。以其身救君。君幸全而二子死。非君志也。昇之妻姜氏。隨其父在豐德。聞夫死。亦投海死。嗚呼。壬辰之亂。蒼黃殞躬者多矣。如君以身敎家。父殉於官。子殉於父。可謂難矣。然而或死或不死。豈非天哉。彼害義偸生而終或不免者。可愧也。君寬厚長者。守以廉謹。篤於孝。善居喪。不喜交遊刺謁。蓋其所蓄然也。君籍咸安。曾祖曰季通。司宰監副正。追封咸城君。祖曰世應。靖國功臣。平安道觀察使咸安君。諡襄簡。贈吏曹判書。考曰震。驪州牧使。妣曰密陽朴氏。縣監文璐女也。君擧戊辰進士。以薦仕。內職則活人署別坐,通禮院引儀,兼漢城府參軍,司憲府監察,東部主簿,堂隷院司評。外職則雲峯,報恩,延豐三縣監,歙谷縣令也。娶高靈申氏生員諱溫之女。有男三人。長卽旻。贈掌樂院僉正。次卽昇。季晏。亦死於兵。僉正娶宗室海豐君女。生男女。男卽新覺。女適司果金遵阧。昇有三歲男。與其母同死無後。晏生一女。適察訪朴知讓。新覺有一男。曰光咸。君方獨而歿。妹壻李副學廷馨。莅欑于衿川縣。申氏亦卒於歙谷。殯其地。新覺旣長。始遷兩喪。合葬于廣州治南葛麻村靈長山之先壟。時丁未十月也。銘曰。有才有守。有子有婦。有墓有銘。有孫克嗣。惟其有之。是以似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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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碩亨 1534 1595 咸陽 君會->咸安
*함양군은 지리산북쪽이고 함안군은 마산옆이다.
故縣令李君碩亨君會。生于嘉靖甲午。仕宣廟朝。卒以萬曆乙未。
君籍咸安。曾祖曰季通。司宰監副正。追封咸城君。祖曰世應。靖國功臣。平安道觀察使咸安君。諡襄簡。贈吏曹判書。考曰震。驪州牧使。妣曰密陽朴氏。縣監文璐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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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당선생집 제10권 / 묘갈(墓碣) / 흡곡 현령 이군의 묘갈명[歙谷縣令李君墓碣銘] 병서(幷序)
고(故) 현령 이군 석형(李君碩亨) 군회(君會)는 가정(嘉靖) 갑오년(1534, 중종 29)에 태어나 선묘조(宣廟朝)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만력(萬曆) 을미년(1595, 선조 28)에 죽었다. 나는 후생(後生)인 데다 견문이 좁아 그에 대해서 듣지를 못하였는데, 금년인 천계(天啓) 을축년(1625, 인조 3)에 그의 장손(長孫)인 상사생(上舍生) 신각(新覺)을 처음 알고 나서 그 선대(先代)의 고사(故事)를 살펴보니 충효(忠孝)의 가문이었다.
지난 임진년(1592, 선조 25) 6월 왜적이 영동(嶺東)으로 쳐들어 왔을 때 군은 흡곡 현령으로 있었는데, 이민(吏民)들이 그에게 해도(海島)로 들어가 피하도록 권유하였으나, 군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종묘사직이 무너졌는데 어느 곳으로 가겠는가. 차라리 이 고을을 지키고 있다가 이 경내(境內)에서 죽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얼마 뒤에 온 집안이 왜적을 맞은 상황에서 군이 적의 칼날에 희생될 운명에 처하였는데, 이때 군의 두 아들인 민(旻)과 승(昇)이 자신들의 몸으로 막아 군을 구해 내었다. 이렇게 해서 군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나 두 아들은 죽고 말았으니, 이는 군의 뜻이 아니었다. 그리고 승(昇)의 처 강씨(姜氏)는 그때 부친을 따라 풍덕(豐德)에 가 있었는데, 지아비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역시 바다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아, 임진년 난리에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희생된 자들이 많았지만, 군처럼 솔선수범하여 집안을 교화시킨 결과, 아비가 관소(官所)에서 죽으려 하자 아들이 아비를 따라 목숨을 바친 경우는 찾아 보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그런데 아들은 죽고 아비는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역시 하늘의 운명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의리를 해치면서까지 살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끝내 죽음을 면치 못했던 사람들의 경우는 이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군은 관후(寬厚)한 장자(長者)의 풍모를 지녔다. 청렴하고 근실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효성이 독실하였고 거상(居喪)을 잘 했음은 물론 교유(交遊)하며 명함을 내미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체로 군이 평소에 마음속으로 온축(蘊蓄)해 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은 관향이 함안(咸安)이다. 증조는 휘(諱)가 계통(季通)으로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을 지냈으며 함성군(咸城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조부 세응(世應)은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함안군(咸安君)의 봉호와 양간(襄簡)이라는 시호를 받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부친 진(震)은 여주 목사(驪州牧使)를 지냈고, 모친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현감 문로(文璐)의 딸이다.
군은 무진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한 뒤 천거에 의해 벼슬길에 올랐다. 내직(內職)으로는 활인서 별좌(活人署別坐),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겸 한성부참군(兼漢城府參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동부 주부(東部主簿)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을 역임하였고, 외직(外職)으로는 운봉(雲峯)ㆍ보은(報恩)ㆍ연풍(延豐) 등 세 고을의 현감과 흡곡 현령을 역임하였다.
공은 생원 휘(諱) 온(溫)의 딸인 고령 신씨(高靈申氏)에게 장가들어 아들 삼형제를 두었다. 장남은 바로 민(旻)으로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을 증직받았고, 그 다음이 바로 승(昇)이고, 막내가 안(晏)인데 역시 병란(兵亂) 통에 죽었다.
첨정(僉正)은 종실(宗室)인 해풍군(海豐君)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아들은 바로 신각(新覺)이고 딸은 사과(司果) 김준두(金遵阧)에게 출가하였다. 승(昇)에게는 세 살된 아들이 있었는데 어미와 함께 죽었으므로 후사가 없다. 안(晏)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찰방(察訪) 박지양(朴知讓)에게 출가하였다. 신각(新覺)은 광함(光咸)이라는 아들을 하나 두었다.
군이 바야흐로 자식도 없이 외로이 죽자, 매부인 부제학(副提學) 이정형(李廷馨)이 금천현(衿川縣)에 매장해 주었고, 신씨(申氏) 역시 흡곡(歙谷)에서 죽자 그곳에다 매장하였다. 그 뒤 신각(新覺)이 성장하고 나서 비로소 장소를 옮겨 광주(廣州) 관아 남쪽 갈마촌(葛麻村) 영장산(靈長山) 선영에 합장(合葬)하였으니, 이때가 정미년(1607, 선조 40) 10월이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뛰어난 재질에 꿋꿋한 절조 / 有才有守
그 아들들에 그 며느리로세 / 有子有婦
묘역 단장하고 묘갈명 세운 / 有墓有銘
군의 손자 그야말로 후손답나니 / 有孫克嗣
마음속에 지닌 그 덕 / 惟其有之
밖에 그대로 드러났네 / 是以似之
[주-D001] 마음속에 …… 드러났네 :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상자화(裳裳者華)에 나오는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