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31일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마태오 13,31-35
강론에 비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
저는 강론에 항상 비유를 하나 이상 찾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라고 하십니다.
어째서 진리를 깨달은 이는 비유를 통해서만 가르치실 수밖에 없으실까요?
모든 비유를 다 깨달았다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비유를 깨달은 율법 학자가 꺼내는 옛것과 새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비유입니다.
옛 비유를 새 비유를 통해 가르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면 왜 강론에 비유가 들어가야만 진정 비유를 이해한 제자가 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오늘 비유 말씀을 이해해봅시다.
오늘은 하늘 나라의 비유 중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다른 비유들에 비하면 조금 해석이 어렵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이 해 놓은 해석은 조금은 제각각입니다.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처럼 우리 안에 심어집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어떤 열매가 맺히느냐면 이웃사랑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드는 것처럼 힘들고 쉴 곳이 없는 이웃들이 나에게 와서 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밀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간 누룩은 내 안에 들어와 어떤 변화를 일으킵니다.
왜 서 말일까요?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농부가 뿌린 씨가 열매 맺지 못하게 만드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길처럼 교만한 사람과 돌밭처럼 육체적인 사람과 가시밭처럼 돈 걱정 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밭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속, 육신, 마귀의 성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열매를 맺을수록 그 성향들이 줄어들고 부드러운 밭이 됩니다.
그래서 30배의 열매를 맺는 밭이 60배를 맺게 되고 나중에는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결국 하늘 나라는 생존욕구가 줄어들게 만들어 이웃을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주는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멍에를 주시며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가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은 모기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모기는 이웃을 찔러 달아나게 만듭니다.
쉼을 가진 사람만이 쉬게 할 수 있습니다.
비유는 체험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꿀을 먹어본 이가 그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꿀맛에 관해 설명할 때는 어때야 할까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소재들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꿀맛은 마치 연인들의 사랑처럼 달콤하고, 설탕물처럼 달며, 꽃의 향기가 납니다.”
그렇다고 꿀이 연인들의 사랑의 맛은 아니고 설탕물도 아니며 꽃향기와는 또 다릅니다.
만약 이것들을 각자 해석하려고 한다면 잘못된 해석으로 나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꿀맛은 연인들의 사랑이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설탕물이라 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꽃으로부터 왔으니 꽃향기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질을 잊습니다.
먼저 그 사람이 말하려는 추상적인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꿀은 맛있습니다.”
꿀맛을 보지 못한 이들은 꿀이 맛있다고 하는 사람이 그냥 자신들을 무시하고 놀리려고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맛을 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듯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해버립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 꿀은 연인들의 사랑처럼 달콤하게 맛있구나! 설탕물처럼 달구나!
꽃향기가 나는 맛있는 무엇이구나!’
하늘 나라의 비유도 상당히 여러 개입니다.
그러나 그 비유도 하나의 개념으로 모입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 14,17)
하늘 나라는 결국 성령으로 누리는 하느님 자녀의 행복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늘 나라 비유의 개념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오는 은총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부모의 희생으로 오는 선물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하느님 사랑을 받아 행복한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는지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모든 비유는 그 말하려는 개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개념은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그 말하려는 사람을 믿고 사랑할 때 비유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먼저 꿀을 먹어본 사람이 그 꿀이 맛있다는 말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비유 말씀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쫓아가서 꿀을 먹어본다면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비유를 이해함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비유를 그대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비유, 곧 다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게 ‘모기와 예수’라는 비유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비유가 더 쉽게 이해되고 그러면 예수님이 주시려는 하늘 나라를 순종으로 체험할 용기를 얻게 됩니다.
따라서 비유를 모두 이해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진리를 알려주는 율법교사가 됩니다.
율법교사가 되면 먼저
1.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말씀하시는 하늘 나라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2. 그 개념을 비유 말씀을 통해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분께 다다르기 위해 비유의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다.
3. 비유를 이해했다면 용기를 내서 그분께 순종하고 자신도 그분이 이끄시려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늘 나라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4. 자신을 이끌어준 비유를 설명하되 새로운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5.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신뢰를 주기 위해 희생합니다.
그들이 그 비유를 말하는 이를 신뢰하게 된다면 그들도 비유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새로운 율법 교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유를 이해시키기 위해 우리는 새로워 비유를 찾아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31일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마태오 13,31-35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결박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 그리고 교우들의 영성 생활 쇄신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영신 수련에
초석을 놓은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1491-1556)의 기념일입니다.
만년에 도달한 이냐시오가 남긴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참으로 놀랍니다.
“저는 지난 30년 동안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세운 결심을 단 한 번도 뒤로 미룬 적이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이냐시오는 개신교 출현으로 흔들리던 중세 가톨릭교회를 수호하는데 가장 앞장 섰던 돌격대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입만 열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외쳤고, 그 표현은 오늘날 예수회 회원들의 모토처럼 되었습니다.
이냐시오의 전기를 모두 읽고 난 후 제 머릿속에 딱 남은 성경 구절이 있었는데, 루카 복음 12장 49절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냐시오의 생애는 그야말로 불꽃 같은 하루하루였습니다.
그의 이름 이냐시오가 지닌 의미 역시 ‘타는 불’이었습니다.
그는 교회 분열의 위기 앞에 목숨조차 내건 투쟁의 삶을 살았습니다.
무너져가는 교회의 수호와 재건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용감한 병사로서, 그에 걸맞은 수도단체인
예수회의 설립과 제자 양성에 온몸과 마음을 다 바친 열정적인 생애를 살았습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급격히 약화되어 가는 당시 사제들과 수도자들, 신자들의 영성 생활에
불꽃을 일으키기 위한 헌신의 날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갔습니다.
이냐시오의 성소 여정의 동기가 된 사건들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그는 원래 사제나 수도자가 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 대신 군인이 되어, 전쟁터로 나가 큰 공을 세우고,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고 싶은 야심으로 가득 찼던 청년이었습니다.
묘하신 주님께서는 이런 이냐시오를 눈여겨보시고, 총애하시고, 그를 당신의 애제자로 발탁하십니다.
이냐시오 개인에게 있어 그 과정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속적 야심으로 가득 찬 그에게 깊은 바닥 체험을 시키시고, 그 바닥에서 그를 당신의 병사로 재탄생시키셨습니다.
이냐시오가 서른 살 되던 해,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에 참가하여 팜플로나라는 요새를 수비하던 임무를 수행하던 이냐시오는 폭탄에 맞아 다리에 중상을 입게 됩니다.
워낙 큰 부상이었기에 치료도 어려웠고, 후유증이 상당했습니다.
꽤 긴 투병 기간이 필요했었는데, 그 시기 이냐시오는 워낙 심심한 나머지 이런저런 책을 뒤적거리게 되었는데, 그때 만난 책들이 여러 성인들의 성인전, 그리고 카르투시오 수도자 루돌프가 저술한 ‘그리스도의 생애’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심심풀이로 읽었는데, 조금씩 흥미를 느끼고, 마침내 온전히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인생관에 대한 회의감이 일기 시작했고, 현세의 허무함을 느끼는 동시에 드디어 영적인 눈을 서서히 뜨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냐시오의 삶은 180도 뒤 바뀌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국왕의 용맹한 병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용맹한 병사로 탈바꿈하게 된 것입니다.
뒤늦은 나이에 시작한 사제 양성 과정을 이수하느라 큰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홀로 꿈을 이루기가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 이냐시오는 선한 의지를 지닌 동료들을 규합하여 교회 쇄신 운동을 전개해나가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1529년 두 제자가 생겼는데, 성 베드로 파브로,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이냐시오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오해를 사게 되고 이단자 취급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런 순간에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결박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2023. 7. 31. 월)(마태 13,31-35)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신앙인은 구경꾼이 아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1-32).”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함부로) 판단해서 미리 포기하지 말고,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시작 단계만 보고 자만심에 빠지지 말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 나라 건설’을 포함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입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이라는 말씀은, “인간들은 어떤 일의 시작 단계에서 그 일이 너무 보잘것없다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면서 실망하고 포기하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신다.” 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라는 말씀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그 일들은 전체 인류에게 내리는 은총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겨자씨의 비유’의 한 예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창세 17,4-5).”
그 당시에 아브라함은 세속의 눈으로 보면, 정말로 보잘 것 없는 떠돌이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가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예고하셨고(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작은 겨자씨를 심으셨고, 그 씨는 수많은 신앙인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그 당시에 사도들이 이스라엘 밖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을까?
혹시 있었더라도 그렇게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다른 민족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성령강림이 이루어지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모든 민족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 긴장하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과연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자신들의 능력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두려워하고, 또 의구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인간 세상이라는 밭에
사도들이라는 작은 겨자씨를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위해서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씨만 심으신 것이 아니라, 그 씨가 잘 자라도록
여러 가지로 보살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갔고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모든 신앙인은 누구나 예외 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하나의 겨자씨로 심어진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자기 자신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노력하는 일입니다.
‘나 자신’이 먼저 성장하려고, 또 성숙해지려고 노력해야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게만 보이는구나.” 라고 감탄하기만 하고,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구경하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신앙인은 구경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는 일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버지의 집’이고, ‘나의 집’입니다.
‘밖에서’ 구경만 하는 구경꾼은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누룩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는 뜻은 같은데,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초점을 맞춘 비유이고, ‘누룩의 비유’는 ‘내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신앙인은 모두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누룩입니다.
우선 먼저 할 일은 자기 자신이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세상을 복음화 하려면 ‘나의 복음화’가 먼저 이루어져 있어야 합니다.
‘복음화’의 반대말은 ‘세속화’입니다.
만일에 신앙인이, 또는 교회가 세상을 복음화 하기는커녕 세속화된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부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실제로 그렇게 될 뻔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부패를 발효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