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금강산림대법회'
관음사 주지 지현스님 법문이 펼쳐진 날 '송광사' 불기 2558(2014)년 11월 18일 11시 부터
송광사 금강산림대법회 주지스님 법문날에 맞추어 순천 송광사, 보성 대원사, 화순 쌍봉사로 관음사 윤달 3사 순례가 관광버스 9대에 분승하여 진행되었다.
'관음사'의 본사이자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는 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에 자리잡은 승보종찰이자 조계종 8대 총림중 '조계총림'으로
신라 말(新羅 末) 혜린 선사(慧璘 禪師)에 의(依)해 창건(創建)된 ‘길상사(吉祥寺)’라는 작은
절이었으나 대찰(大刹)의 모습과 함께 새 불교사상(佛敎思想)의 중심지(中心地)로 자리잡은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佛日 普照國師 知訥:1158~1210)의 정혜결사(定慧結社)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보조 지눌(普照 知訥) 국사(國師)는 고려 명종(明宗) 27년(1197)부터 희종(熙宗) 원년(1204) 까지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이때 절 이름도 바뀌었는데, 원래는 ‘정혜사(定慧社)’
로 하려고 했으나 인근에 ‘정혜사(定慧寺)’란 절이 있어 수선사(修禪社:고려시대에는 사찰을
‘寺’ 대신 ‘社’로 부르기도 하였음)로 하였다고 하며, 그러다가 조선 초기에 이르면 소나무가
많아 ‘솔뫼’라고 불리던 ‘송광산(松廣山)’의 이름을 본따 ‘송광사(松廣寺)’로 바뀌고 그 이름의
연원인 ‘송광산(松廣山)’은 중국의 영남(嶺南) 소주부(韶州付:현재 광동성의 곡강현)에 있는
육조 혜능(六粗 慧能)대사가 주석하셨던 산 이름과 같은 ‘조계산(曹溪山)’으로 바뀌었다. 한편 ‘송광사(松廣寺)’란 이름과 관련해서는 ‘송(松)’을 파자(破字)하면 ‘十八公’이고 ‘광(廣)’
은 ‘불법(佛法)을 널리 펼친다’는 의미로 ‘어른 열여덟 분이 배출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이름 풀이대로라면 16국사(十六國師) 이후 국사(國師)에 해당할 만한 큰스님 두 분이 더 배출될 것 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송광사는 국가지정문화재로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 ; 국보 42호), 혜심고신제서(慧諶告 身制書 ; 국보 43호), 국사전(國師殿 ; 국보 56호), 화엄경변상도( 華嚴經變相圖 ; 국보 314호) 등 국보 4점, 경패(徑牌:보물 175호), 하사당(下舍堂 ; 보물 263호), 약사전(藥師殿 ; 보물 302 호), 영산전(靈山殿 ; 보물 303호),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 ; 보물 1467호) 등 보물 21점을 보유하고 있고, 천자암 쌍향수(天子庵 雙香樹,곱향나무)나무가 천년기념물로, 송광사 전체가 사적으로, 조계산 송광사·선암사 일원이 명승으로 지정되었고, 능견난사(能見難思) 등 10점의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송광사의 주요 전각 배치는 세 영역(領域)으로나누어 볼 수 있는데, 맨 위쪽 수선 영역(修禪 領域 )에는 국사전(國師殿), 수선사(修禪社), 설법전(說法殿), 응진당(應眞堂), 상사당(上舍堂), 하사당(下舍堂)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운데의 중심 영역(中心 領域)에는 종고루(鐘鼓樓)를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승보전(僧寶殿), 관음전(觀音殿), 응향각 (凝香閣), 대웅보전(大雄寶殿), 지장전(地藏殿), 영산전(靈山殿), 약사전(藥師殿)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래쪽의 진입 영역(進入 領域)에는 청량각(淸凉閣), 일주문(一柱門), 척주각(滌珠閣)과 세월각(洗月閣), 우화각(羽化閣), 임경당(臨鏡堂), 침계루(枕溪樓, 안쪽 현판은 獅子樓), 천왕문 (天王門)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주문 송광사 일주문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옆으로 담장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판은 파란 파탕에 금색으로 '曺溪山大乘禪宗松廣寺(조계산대승선종송광사)'라고 세로로 쓰여있다. 현판에 세로쓰기를 하는 경우는 많지 않으며, 이는 중국에서 볼 수 있는 현판의 형식이라고 한다. 현판 안쪽으로 '僧寶宗刹曺溪叢林(승보종찰조계총림)'이라 적힌
현판이 하나 더 있다. 돌계단 양쪽의 소맷돌 끝에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돌사자가 세월에 아랑곳 하지 언제나 처럼 지켜보고 있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니 돌무지 속 우뚝 서있는 고향수 나무 뒤로 ㄱ자 모양으로 서로 엇 비켜서 배치된 매우 작은 단칸 구조의 2개의 전각이 보인다. 척주각(滌珠閣)과 세월각(洗 月閣)이다. 이들 전각은 죽은 자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죽은 자의 혼을 실은 가마인 영가 (靈駕)의 관욕처(灌浴處)로 사용되는 특이한 전각이다. 즉 영가가 사찰에 들어오기 위해서 남자의 영가는 척주각에, 여자의 영가는 세월각에 모셔진다. 남자의 영가를 모시는 척주각 (滌珠閣)의 주(珠,구슬)는 남자를 상징하고, 세월각(洗月閣)의 월(月, 달)은 여자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전각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속세의 때를 벗은 영가는 푸른 내에 잠긴 우화각 (羽化閣)을 건너야만 사찰 안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된다. 세월각의 방향이 흥미로운데 ‘ㄱ’자 모양으로 자리잡고 있는 세월각과 척주당중 척주당은 사찰의 본 영역을 마주하는 방향인 반면, 세월각은 일주문 쪽을 향해 있다. 여성의 영가는 부처를 모신 대웅보전이 자리한 영역을 마주보지 않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고향수(枯香樹) 우화각(羽化閣)앞 돌무지에 키가 6~7m 정도인 앙상한 나무는 '고향수(枯香樹)'로 불리고 있는데, 이 나무는 보조 국사(普照 國師)가 처음 송광사(松廣寺)에 와서 향(香)나무 지팡이를 꽂아두자 잎과 가지가 무성하였고, 국사(國師)가 “너와 나는 생사(生死)를 같이하니, 내가 떠나면 너도 그러하리라. 다음날 너의 잎이 푸르게 되면 나도 또한 그런 줄 알리라 [이아동생사 아사이역연 회간이청엽 방지아역이(爾我同生死 我謝爾亦然 會看爾靑葉 方知我亦爾)]”라는 시(詩)를 지어놓고 입적(入寂)하니 그때부터 시들해지더니 결국 말라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傳)해오고 있다. 1751년 영조(英祖) 때 청화산인 이중환(靑華山人 李重煥1690 ~1752)의『택리지(擇理誌)』 에 기록된 이 나무의 모습도 “종고루(鐘鼓樓) 앞에 수각(水閣)이 있고, 그 앞에 한 그루 나무가 있는데…… 지금 반천년이 되어도 살아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칼로 껍질을 긁으면 안쪽은 촉촉하여 생기(生起)가 있어 만약 참으로 죽었다면 반드시 썩어 넘어졌을 텐데 지금까지 항상 꼿꼿이 서 있으니 이것이 참 괴이한 일이다.”라고 묘사되 있어 오늘날 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1886년에 만들어 왕실(王室)에 보고한 송광사 지도에도 역시 이 나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고 하는데, 그 옆에 적힌 글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었다고 한다. 고향수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노산 이은상과 송광사 인암 주지 스님의 시조 대결은 사뭇 흥미롭다. 먼저 노산 이은상이 운을 뗐다. 어디메 계시나요 언제 오시나요 말세 창생을 뉘 있어 건지리까 기다려 애타는 마음 임도 하마 아시리
노산의 시조에 화답한 인암스님의 시조는 다음과 같다. 살아서 푸른 잎도 떨어지는 가을인데 마른 나무 앞에 산 잎 찾는 이 마음 아신 듯 모르시오니 못내 야속합니다
한 번 말라죽은 나무에는 이끼와 버섯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썩어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송광사 고향수는 지금도 썩지 않고 잎이 피기를 기다리며 꼿꼿이 서 있다. 이 나무에 잎이 다시 피어나면 보조 국사(普照 國師)가 다시 돌아온다는 전설따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염원하던 정토가 이땅에 도래할 날을 기다리는 듯 꿋꿋이 버티고 서있다. 삼청교(三淸橋)와 우화각(羽化閣 : 전남 유형문화재 제59호) 맑은 계곡물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정취가 송광사 정경중 압권인 삼청교와 우화각은 세월각과 척주각의 맞은편에 위치해 있으며, 사찰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꼭 건너야 하는 교각(橋閣)이다. 1938년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가 지은 송광사 내팔경(內八景) 한시가 있다. 내팔경 중에는 ‘우화각의 맑은 바람’이 7언 절구로 표현되어 있다. 그 중 마지막 절구는 불이층공가관선(不羡層空駕鸛仙, 학을 타고 하늘가는 신선이 안 부럽네.)이라고 표현하였다.
정면 1칸, 측면 4칸짜리 문루(門樓)로 숙종(肅宗) 26년(1700)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우화각(羽化閣)은 ‘날개가 생겨 날아올라 신선(神仙)이 된다’는 의미(意味)의 우화등선[羽化 登仙,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 중 전(前)적벽부에 ‘훌쩍 세상을 버리고 홀몸이 되어 날개를 달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에서 따온 이름으로 하부인 일명 능허교(凌虛橋)라고 불리는 삼청교(三淸橋)가 다리 역할을 하고, 상부인 우화각(羽化閣)이 건물이면서 대웅전(大雄殿)으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하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영조(英祖) 50년(1774)에쓴 능허교중창기(凌虛橋重創記)에 따르면 원래 판목(板木)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다리는 숙종(肅宗) 33년(1707)에 오늘날의 홍교(虹橋)를 조성한 후 60여년 후에 중건(重建)한 것으로 추정(推定) 된다.
삼청교 아래쪽 홍예 한가운데에 수면을 향해 배꼽처럼 툭 튀어나온 용머리상은 수살막이, 즉 계곡물에서 음습하는 나쁜 기운을 용의 기운을 빌어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 용머리 입 부분에 엽전이 철사줄에 꿰어져 매달려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다리불사를 위해 시줏돈을 받았는데, 다리를 완공하고 보니 엽전이 세 냥 남았다. 다리 불사는 끝났는데 남은 돈이 문제였다. 시주 받은 금품을 다른 일에 쓰는 것은 호용죄(互用罪)에 속하는 것으로 율장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대중스님들은 다리 아래 손이 닿지 않는 용(龍)머리에 철사를 꿰어 남은 돈을 매달아 두기로 했다. 훗날 다리를 보수 하거나 새로 건립할 때 보태 쓰도록 한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엽전 한 닢도 허투루 가지려 하지 않는 반듯한 수행자의 모습을 송광사는 오늘에 기억하려는 것이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은 저작 '심춘순례'에서 송광사를 "조선불교의 완성지"라고 했다. 우화각과 삼청교 그 아래의 엽전은 육당의 이 말이 빈말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임경당(臨鏡堂) 임경당은 '거울처럼 맑은 물에 가까이 있는 집'이란 뜻으로, 우화각의 아래에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건물 일부가 계곡 쪽으로 튀어 나와 아래 두 기둥이 계곡물에 드리워져 있다. 우화각 난간에 걸터앉아 임경당을 바라 보면서 계곡물에 마음을 비추어 보면 어언 두고온 세간이 아득해지리라.
우화각(羽化閣)을 지나자마자 바로 나타나는 천왕문에 들어서면 보물 제1467호인 소조 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이 나타난다. 사천왕은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 (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뿐만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여기서 잠깐 사천왕상의 존명 변화를 간단히 살펴보면, 보탑을 든 천왕이 통일신라때부터 고려 말까지는 북방 다문천왕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서방 광목천왕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에 대하여 그간 착오나 오류라는 등 여러가지 설이 있었으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보탑을 든 천왕이 서방 광목천왕인 ‘제불여래보살명칭가곡(諸佛如來菩薩名稱歌曲)’의 변상판화상의 사천왕상에 따랐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해 보인다. 명(明)나라 초인 1417년에 명나라 황제인 영락제(永樂帝)는 '제불여래보살명칭가곡(諸佛 如來菩薩名稱歌曲)'을 편찬하자마자 그해 조선에 보내왔으며(조선초에 모두 1300부이상을 명나라에서 보내옴), 억불정책을 펴는 조선이 불교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명나라를 의식 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승려들로 하여금 외우게 하였다고 한다.(1417년 부터 1434년까지 조선왕조 실록에 14회나 諸佛如來菩薩名稱歌曲관련 기록이 보인다.)
조선시대 1628년(인조 6)에 다시 만들었다(重造)는 송광사 사천왕상은 흙으로 조성한 것으로 송광사 천왕문의 좌우에 2구씩 모두 4구가 안치되어 있다. 사천왕상의 배열은 천왕문의 향 우측(바라보는 사람을 기준으로 우측)으로 비파를 든 북방 다문천왕(안쪽)과 검(劍)을 든 동방 지국천왕(입구쪽)이, 향 좌측으로는 용·여의주를 든 남방 증장천왕 (입구쪽)과 당(幢)을 든 서방 광목천왕(안쪽)이 각각 시계방향으로 북→동→남→서방의 순서로 안치되어 있다. 비파를 든 천왕의 복장 봉함목에 '북방'이라고 씌어 있어 북방 다문천왕의 존명이 밝혀 졌으며, 이를 기준으로 시계방향으로 북→동→남→서로 나머지 사천왕상의 방위를 상정하면 향 좌측 안쪽 당(幢)을 든 천왕이 서방 광목천왕에 해당한다. 북방 다문천왕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대웅보전(大雄寶殿) 우리나라 최고의 고건축전문가이자 문화재전문위원인 목수 신영훈(申榮勳)이 건축 분야를 총지휘하고, 불보살상을 비롯한 제반 조각상의 조성은 가헌 최완수(嘉軒 崔完秀) 간송미술 관장(澗松美術館長)이 총괄함으로써 1988년에 새로 지은 송광사(松廣寺)의 중심 전각(殿閣) 으로 백팔번뇌를 없애려는 기원을 담아 108평에 정면 7칸, 측면 5칸이다. ‘아(亞)’자형의 평면 구조가 눈길을 끄는 순 목조건물이다. 내부(內部)에는 화려한 닫집을 꾸미고 그 밑에 삼세여래(三世如來)와 사대보살상을 새로 조성하여 봉안하였는데 과거 연등불[燃燈佛 : 일명‘제화갈라불(提華迦羅佛)’이라고도 함]과 현세(現世)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및 미래(未來) 미륵불(彌勒佛)의 삼세불(三世佛)을 모셨 으며, 다음으로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좌우 협시보살로 지혜 제일의 문수(文殊)와 신행 제일의 보현(普賢)을 모시고, 또한 관음(觀音)은 자비(慈悲)의 화신으로 이승의 고난을 구제하고자 하는 서원을 세운 보살이며, 지장(地藏)은 대원본존(大願本尊)으로 저승세계 에서 고난받는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서원을 세운 보살이기에 각각 연등불(燃燈佛)과 미륵불(彌勒佛)의 좌우에 모시는 등으로 하여 사대보살상(四大菩薩像)을 봉안하였다.
대웅보전의 삼세불을 모신 불단 뒤쪽 밑에는 남방에서 들여온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 형태의 사리단(舍利壇)이 조성되어 있다.
대웅전 뒤편에는 송광사(松廣寺)를 승보사찰(僧寶寺刹)답게 하는 수선 영역(修禪 領域)이 높은 석축(石築) 위에 잘 조성(造成)돼 있는데, 이는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通度寺)가 대웅전(大雄殿) 뒤쪽으로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두고, 법보사찰(法寶寺刹) 해인사(海印寺)가 대웅전(大雄殿) 뒤쪽에 높은 석축(石築)을 쌓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보관(保管)하는 장경각(藏經閣)을 둔 것과 비교해 보면 그 뜻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국사전(國師殿 : 국보 제56호) 보조 지눌 국사(普照 知訥 國師)를 비롯하여 왕(王)으로부터 국사(國師)의 칭호(稱號)를 받은 고려시대(高麗時代) 국사(國師) 열다섯 분과 그 공덕(功德)이 지난날의 국사(國師)와 같다고 하여 종문(宗門)에서 국사(國師)의 칭호(稱號)를 붙인 조선 초기(朝鮮 初期)의 고봉 법장(高峰 法藏) 화상(和尙) 등 열여섯 국사(國師)의 영정(影幀)을 모셨던 곳으로 승보사찰 (僧寶寺刹) 송광사(松廣寺)의 상징적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고려 공민왕 18년에 처음 지었고, 그 뒤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앞면 4칸·옆면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미고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천장의 연꽃무늬와 대들보의 용무늬는 건물을 지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축 구조상 조선 초기 양식을 지니고 있는 이 건물은 순천 송광사 하사당(보물 제263호)과 같은 시대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며, 소박하고 아담한 형태와 그 기법에서도 주심포 중기 형식의 표준이라고 할 만한 중요한 건축물이다.
국사전에 모셔진 16국사 진영
약사전(藥師殿 - 보물 제302호) 중생을 모든 병고에서 구하고, 무명(無明)의 고질까지도 치유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한다는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모신 이 불전은 우리나라 불전 중 그 규모가 가장 작은 앞면, 옆면 모두 단칸이고 팔작지붕으로 내부 천장이 대들보 없이 공포와 도리로만 메워진 특이한 건축물인데, 1974년 중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영조(英祖) 27년(1751)에 중건(重建)되었다고 한다.
영산전(靈山殿 - 보물 제303호)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재현해 놓은 전각인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화려한 다포 구조를 갖춘 팔작지붕집으로 약사전(藥師殿)보다 크기만 좀 클 뿐 건물 생김새는 거의 같은 인조(仁祖) 17년(1639)에 창건되고 영조(英祖) 13년(1737)에 중건된 건물인데, 건물에 사용한 부재의 세부 기법이 힘차고 간결하여 조선 전기 건물의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법당안 한쪽 벽면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木彫 釋迦如來坐像)과 함께 규모가 큰
영산대회탱(靈山大會幀)이 후불탱화(後佛幀畵)로 모셔져 있고, 나머지 세 벽에는 부처의 일대기를 8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팔상탱(八相幀)이 그려져 있다.
영산전까지 참배하고 주지 스님께서 법문하실 사자루로 향합니다.
사자루 법단에 올라 금강산림 법문을 여시는 주지 스님
송광사 무상 주지스님
수행에서 얻어지는 기쁨으로 공양을 삼는다는 禪悅爲食(선열위식)에서 그 이름을 따온 禪悅堂(선열당)과 앞 뜰에서 점심 공양을 합니다.
지장전(地藏殿)
승보전과 함께 대웅보전의 좌우법당으로 사용되는 지장전은 1988년 8차 중창기에 중창된 건물로, 중건 이전에는 명부전으로 사용되었다. 3단의 높은 축대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원형주초 위에 배흘림기둥을 얹고 1출목의 주심포와 그 사이에 화반을 둔 일반적인 맞배지붕 건물이다.
승보전(僧寶殿) 대웅보전(大雄寶殿) 옆에 위치한 이 전각은 1961년 중창된 건물로 1988년 제8차 중창 이전 까지만 하더라도 대웅전(大雄殿)으로 사용되면서 절의 중심 전각 역할을 했으나 지금의 대웅보전을 새로 건립하면서 승보전(僧寶殿)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는데, 내부에는 영산
회상(靈山會上)을 재현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를 중심으로 가섭, 아난 존자 등 10대제자와 16나한, 그리고 1,250대비구를 모시고 있다.
관음전(觀音殿) 정면 3칸, 측면 3칸에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고색의 단청이 남아 있는 건물이다.
관음전은 본래 성수전(聖壽殿)이라 하여 1903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聖壽望六·51세)을 맞아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편액을 내린 황실기도초로 건립되었으나 1957년 옛 관음전을 해체하면서 관세음보살님을 옮겨 모시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세음보살 좌우에 그려진 태양과 달이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상징하고 있고 내부 벽화에 문신(文臣)들이 허리를 굽히고 불단을 향해 서 있으며, 내외벽에는 화조도, 산수화 등이 그려져있다. 관음전의 처마 끝에는 海와 水자가 교대로 쓰여 있으며, 내부 천장에는 연화문 반자를 중심
으로 물고기, 용들의 머리와 꼬리가 뒤엉켜 있는 형상이 단청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불(火)의 기운에 해당되는 송광사로부터 전각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 - 복장유물과함께 보물 제1660호)
송광사 관음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복장되어 있던 저고리와 별도의 백색비단에 적은 발원문을 통해 1662년 궁중나인(宮中內人) 노예성(盧禮成)이 경안군(慶安君) 내외의 수명 장원(壽命長遠)을 위해 발원하고, 경안군 내외와 나인 노예성, 박씨, 당대의 고승(高僧) 취미수초(翠微守初) 등이 시주하여 17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조각승 혜희(慧熙)와
금문(金文)이 조각하여 조성한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발원문을 통해 경안군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던 나인 노예성이 경안군
의 수명장원을 위해 발원 조성한 관음보살상이라는 데 그 역사적 의미가 크며,
특히 경안군의 것으로 추정되는 쪽빛 저고리 안쪽 면에 적힌 발원문은 당시 정세의 일
단면을 읽을 수 있는 함축적인 메시지가 담겨있어 이 이상의 사료적 가치를 더 해주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관음전 내벽 중앙 감실을 중심으로 좌우에 위패를 향해 공손히 몸을 숙이고 있는 14명의 신하가 그려져 있다. 이 신하들은 왕에 대한 공경심을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하마다 적혀있는 품계를 보면 정1품, 종1품, 정2품의 신하들로 구분되는데, 이는 ‘정2품 이상의 문관 가운데 70세 이상’이라는 기로소 입소 규정에 따라 그려진 것이다. 여기에 그려진 신하들은 1902년 고종과 함께 기로소에 들어갔던 기로신(耆老臣)들을 재현한 것이라 한다.
***기로소(耆老所)는 조선시대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전직·현직 문관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로, 기로소에 들게 되는 것을 크나큰 명예로 생각했다. 나이가 70이 되면 기(耆), 80이 되면 노(老)라고한다. 다만, 임금은 나이에 제한이 없어 숙종은 59살에, 영조와 고종은 51살에 기로소에 들어
갔으며,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 여기에 들어간 사람은 7백여 명이었고 그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던 사람은 98살의 윤경(尹絅), 97살의 이구원(李久遠), 96살의 민형남(閔馨男)
이었다고 한다.
하사당(下舍堂 - 보물 제263호) 대웅전(大雄殿) 뒤 한층 높은 곳에 위치한 이 건물은 작은 요사채이지만 경내의 명물로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인데,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승방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조선 초기 건축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 짜리 맞배지붕집으로 왼쪽 두 칸은 전면에 툇마루를 갖춘 온돌방이고 오른 쪽 한 칸은 부엌이다. 이 건물 지붕 위에 작은 지붕이 하나 더 솟아 있어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는 전라도 민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솟을지붕’으로서 부엌칸 지붕 위에 따로 설치되어 환기장치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해우소(解憂所)
이곳은 우리 선조들의 생활의 지혜가 유감없이 발휘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는데, 첫째는 단순한 배설공간에 지나지 않던 곳에 ‘근심을 푸는 곳’이란 뜻의 ‘해우소(解憂所)’란
이름을 달아주거나, 심지어는 “비우고 또 비우니 큰 기쁨일세. 탐진치(貪嗔痴) 어둔 마음
이같이 버려, 한 조각 구름마저 없어졌을 때, 서쪽에 둥근 달빛 미소지으리. 옴 하로다야
사바하.” 등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오히려 이곳이 수행공간으로서의 위상과 품격을 지니게
되었으며, 두 번째로는 근래에 들어와 생태건축 차원에서도 손꼽히는 건축물(建築物)로 평가 받고 있다.
대원사로 가기전 송광사 3대 명물을 살펴 보기로 한다.
천자암 쌍향수(天子庵 雙香樹)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88 호로 지정된 송광사의 곱향나무 쌍향수는 나이가 약 8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2.5m, 가슴높이 둘레 4.10m, 3.30m이다. 두 그루가 쌍으로 나란히 서 있고 줄기가 몹시 꼬인 신기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보조 국사(普照國師)와 담당국사(湛堂 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나란히 꽂은 것이 뿌리가 내리고 가지와 잎이 나서 자랐다고 한다. 담당국사는 金나라 왕자의 신분으로 보조국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나무의 모습이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 절을 하고 있는 듯하여 예의바른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한손으로 밀거나 여러 사람이 밀거나 한결같이 움직 이며, 나무에 손을 대면 극락(極樂) 에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능견난사(能見難思) 수백여 개의 접시들의 순서를 바꿔 위로 올려도 맞고 아래로 맞춰도 그 크기가 신기하게 딱 들어맞는 능견 난사는 중국의 金나라(1126~1233)의 장종황제(章宗皇帝1188~1208)가 보조국사(普照國師1158~1210)께 보내온 접시이다. 당시 금나라의 황후(皇后)는 질액(疾厄)에 오랫동안 걸려 있었는데, 보조국사는 정중(定 中)에서 이를 관찰하고, 신통으로 공중으로 날아서 金나라에 다다른다. 金나라에 도착한 보조국사는 약시(藥施)와 법시(法施)로 황후를 낫게 하였다고 하며, 이에 감탄한 장종황제가 감사함의 표시로 능견난사와 함께 그의 셋째 아들을 딸려 보내게 되는데 장종황제의 셋째아들이 바로 송광사 16국사 중 제9세국사인 담당국사(湛堂國師)이다. 능견난사의 명칭은 원래 능견난사(能見難思)가 아닌 應器(응기)라고 불렸으나 능견난사의 신비함을 전해들은 조선 숙종(1674~1720) 임금이 장인(匠人)들에게 명하여 이와 똑같이 만들어 보도록 하였으나 수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주조가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숙종 임금이 ‘능히 보고도 그 뜻을 알 수 없다 (능히 보고도 만들지 못한다)’는 뜻의 ‘能見難思’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이다. 능견난사는 처음에는 500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28년에는 50점, 현재는 30점이 남아있을 뿐이다.
비사리구시 승보전 한켠에 놓여 있는 '비사리구시' 는 보성군 문덕면 양동리 내동마을 입구의 느티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며, 절에서 국재(國齋)를 모실 때 대중들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일종의 밥통으로 쌀 7가마(4천 명분)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