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산 입구~참성단] 구간
산행로 도중의
조형물
[마니산 입구~참성단] 구간
산행로 도중의
전국체전 성화 채화장소
[마니산 입구~참성단] 구간
산행로 도중의
참성단 재현물
[마니산 입구~참성단] 구간
단군로 산행로에서 바라본
(상봉~마니산) 연결 능선(좌)과 석모도 해명산(중앙)과 석모도 상주산(우)
[마니산 입구~참성단] 구간
단군로 산행로에서 바라본
참성단
[마니산 입구~참성단] 구간
단군로 산행로에서 바라본
참성단
참성단(塹城壇, 465m)에서
이성수
참성단(塹城壇, 465m)
참성단(塹城壇, 465m)에서
이성수
참성단(塹城壇, 465m)에서 바라본
455봉(좌)과 마니산 정상(우, 472.1m)
[ 위 사진부터 이어지는 7장의 사진은
참성단(塹城壇, 465m)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360도 파노라마 조망하면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참성단(塹城壇, 465m)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옹진군 신도, 시도, 모도, 장봉도
참성단(塹城壇, 465m)에서 바라본
장봉도(좌)와 상봉(우)
참성단(塹城壇, 465m)
참성단(塹城壇, 465m)에 있는 소사나무
참성단(塹城壇, 465m)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교동도 화개산, 강화도 덕산, 혈구산, 진강산, 불은면
참성단(塹城壇, 465m)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강화도 혈구산, 진강산, 불은면, 정족산
참성단(塹城壇, 465m)에서 바라본
455봉(좌)과 마니산 정상(우, 472.1m)
[ 이상으로 파노라마 조망 끝 ! ]
455봉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참성단(465m)
455봉에서
이성수
455봉에서 바라본
참성단(465m)
[ 위 사진부터 이어지는 6장의 사진은
455봉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360도 파노라마 조망하면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455봉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교동도 화개산, 강화도 덕산, 혈구산, 진강산, 불은면
455봉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강화도 혈구산, 진강산, 정족산, 길상산
455봉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강화도 정족산, 길상산, 마니산 정상(472.1m), 영종도 백운산
455봉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영종도 백운산, 옹진군 신도, 시도, 모도, 장봉도
455봉에서 바라본
참성단
[ 이상으로 파노라마 조망 끝 ! ]
455봉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참성단(465m)
455봉에 있는
마니산에 관한 안내문
[455봉~마니산 정상] 구간 능선 도중의
참성단 중수비에 관한 안내문
[455봉~마니산 정상] 구간 능선 도중의
참성단 중수비
[455봉~마니산 정상] 구간
암릉에서 바라본
마니산 정상(472.1m)
[455봉~마니산 정상] 구간
암릉에서 뒤돌아본
참성단(좌)과 455봉(우)
[455봉~마니산 정상] 구간
암릉에서 바라본
마니산 정상(472.1m)
[455봉~마니산 정상] 구간
암릉에서 뒤돌아본
참성단(좌)과 455봉(우)
[455봉~마니산 정상] 구간
암릉에서 뒤돌아본
참성단(좌)과 455봉(우)
[455봉~마니산 정상] 구간
암릉에서 뒤돌아본
참성단(좌)과 455봉(우)
마니산 정상(472.1m)에서 바라본
정수사 방향 암릉
[마니산 정상~정수사] 구간
암릉에서 뒤돌아본
마니산 정상
[마니산 정상~정수사] 구간
암릉에서 바라본
정수사 방향 암릉
[마니산 정상~정수사] 구간
암릉에서 바라본
정수사 방향 암릉
[마니산 정상~정수사] 구간
암릉에서 바라본
정수사 방향 암릉의 암봉
[마니산 정상~정수사] 구간
암릉에서 바라본
정수사 방향 암릉의 암봉
[마니산 정상~정수사] 구간 암릉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마니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암릉
[ 위 사진부터 이어지는 6장의 사진은
[마니산 정상~정수사] 구간 암릉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360도 파노라마 조망하면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마니산 정상~정수사] 구간 암릉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진강산, 초피산, 정족산
[마니산 정상~정수사] 구간 암릉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정족산, 길상산, 동검도, 분오 저수지
[마니산 정상~정수사] 구간 암릉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분오 저수지, 영종도, 신도, 시도, 모도
[마니산 정상~정수사] 구간 암릉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시도, 모도, 장봉도, 마니산 상봉
[마니산 정상~정수사] 구간 암릉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마니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암릉
[ 이상으로 파노라마 조망 끝 ! ]
정수사 가는 길과 함허동천 가는 길의
분기점 삼거리에 있는
이정표
2024년02월16일(금요일) 강화도 [마니산&정수사&이건창 생가&초피산] 탐방기 탐방지 : 강화도 [마니산&정수사&이건창 생가&초피산] 탐방코스 : [마니산 입구 버스 정류장~(3.3km)~참성단~(0.1km)~455봉(정상 표지목이 있는 봉우리)~(0.6km)~마니산 정상~(1.8km)~정수사~(1.7km)~황토옛집~(0.4km)~이건창 생가~(1.3km)~초피산~(1.9km)~함허동천~(0.6km)~함허동천 버스 정류장] (11.7km) 탐방일 : 2024년02월16일(금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강화군 화도면 : 최저기온 영하 6도C, 최고기온 5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시간45분 소요) 08:21~08:50 구산역에서 6호선 지하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공항철도로 환승하여 김포공항역으로 간 후 김포공항역 3번 출구로 나옴 [29분 소요] 08:50~08:52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 [2분 소요] 08:52~09:26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에서 마니산 입구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60-5번 버스 승차 대기 09:26~11:08 60-5번 버스를 타고 롯데몰.김포공항역 정류장에서 마니산 입구 버스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 42분, 34개 정류장 이동] 11:08~12:24 인천 강화군 화도면 상방리에 있는 마니산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탐방출발하여 단군로를 거쳐서 참성단(塹城壇, 465m)으로 이동 [강화 참성단(江華 塹城壇)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산42-1번지 좌표 : 북위 37° 36′ 57″ 동경 126° 25′ 41″ 강화 참성단(江華 塹星壇)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마니산(摩尼山) 꼭대기에 있는 제단이다. 상고 시대 단군(檀君)이 쌓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1964년 7월 1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자연석으로 기초를 둥글게 쌓아 올리고 그 위에 네모꼴의 단을 쌓았다. 면적은 5,593m2이며, 하단 원형 기단의 지름은 4.5m, 상단 방형(方形) 제단은 한 변 길이가 1.98m이다. 동서 방향에 21계단의 돌층계가 있으며, 돌과 돌 사이의 사춤에 아무 접착제도 바르지 않았다. 총높이는 6m에 이른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 고려(高麗) 원종(元宗) 11년(1270년)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미 고려 시대 때부터 매년 봄과 가을에 대언(大言)을 보내 하늘의 별들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조선 세종(世宗) 12년(1430년)부터는 2품 이상의 관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인조(仁祖) 17년(1639년)과 숙종(肅宗) 26년(1700년)에도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왕 42년(1716년) 강화유수 최석항(崔錫恒)이 참성단을 중수하고 참성단의 동쪽 봉우리에 이르는 중간에 세운 참성단 중수비가 남아 있다. 1946년 10월 26일부터 27일(음력 10월 3일) 정오에 걸쳐 대종교 총본사인 천진전에서 채화한 성화(聖火)를 강화도 참성단까지 옮기는 행사가 대종교 기념식으로써 거행되었고, 1956년부터 매년 전국체육대회의 성화를 채화하는 곳이 되었다. 참성단과 단군 신앙 고려, 조선 양 왕조에 걸쳐 국가는 참성단에서 도교식 제전행사인 초제(醮祭)를 거행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강화도호부조에는 단군이 쌓은 제단이라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성단을 단군 시대의 종교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예컨대 18세기 중엽의 국학자 이종휘는 참성단을 단군 시대의 종교인 신교의 제단으로 이해하고 참성단의 제사가 도교적 성신신앙과는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며 그때까지 써오던 참성단(塹星壇)을 참성단(塹城壇)으로 바꿔 썼다. 참성단의 제단은 한민족만이 갖는 고유한 형태로 자연석들에 의지하여 둥글게 쌓은 하원단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방단의 이중 구조로 구성되었는데 이러한 원방형 제단이 중국 요하 지역의 홍산문명 유적에서도 발견돼 유사성과 함께 문화의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강화의 생김새가 천하의 요새이기 때문이며, 강화도의 고유 지명인 마이(摩利) · 혈구(穴口) 등은 하늘과 인연이 깊다고 전해온다. 또 단군 개국신화(開國神話)의 등장인물인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도 마니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환웅의 권속이므로 단군이 참성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 지낸 뜻을 짐작하게 한다. 한말 일제강점기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가 성립한 이후 강화도는 단군시대 정치중심지의 하나로 인식되고, 참성단의 네모난 상단과 둥근 하단은 각각 땅과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마니산은 음(땅)과 양(하늘)이 만나는 신성한 수중산(水中山)으로 이해되었고, 마니산 기슭에 단군사당이 건립되었다. 참성단을 민족성지로 서술한 기록으로는 김교헌(金敎獻)의 《신단실기》(神檀實記), 북애자(北崖子)의 《규원사화》(揆園史話), 대야발(大野勃)의 《단기고사》(檀奇古史), 그리고 《대종교중광육십년사》(大倧敎重光六十年史) 등이 있으나, 해당 저술들은 역사 기록으로서는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8·15 광복 후 대종교의 영향을 받아 개천절이 제정되면서 이에 따라 참성단도 민족의 성지로 이해하는 전통이 그대로 이어졌다.] 12:24~12:32 사진촬영 후 휴식 12:32~12:35 455봉으로 이동 [455봉에 472.1m가 표기된 마니산 정상표지목이 있음] 12:35~12:40 사진촬영 12:40~13:04 마니산(摩尼山, 472.1m) 정상으로 이동 [실질적 정상인 이 봉우리에는 정상석이 없다.] [마니산(摩尼山)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華道面)에 있는 산. 문화재 : 정수사법당(보물 161), 장곶돈대(인천기념물 19), 참성단(사적 136) 마리산(摩利山)·마루산·두악산(頭嶽山)이라고도 한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해발고도 472 m의 산으로, 강화도에서 가장 높다. 정상에 오르면 경기만(京畿灣)과 영종도(永宗島) 주변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정에는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塹城壇:사적 136)이 있는데, 이 곳에서는 지금도 개천절이면 제례를 올리고, 전국체육대회의 성화(聖火)가 채화된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이종휘(李種徽)가 지은 《수산집 修山集》에 "참성단의 높이가 5m가 넘으며, 상단이 사방 2m, 하단이 지름 4.5m인 상방하원형(上方下圓形)으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여러 차례 개축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산 정상의 북동쪽 5㎞ 지점에 있는 정족산(鼎足山) 기슭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사적 130)이 있고, 그 안에는 유명한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북동쪽 기슭에는 정수사법당(淨水寺法堂:보물 161)이 있고, 북서쪽 해안에는 장곶돈대(長串敦臺:인천기념물 29) 1기(基)가 있다. 산세가 아기자기하고 주변에 문화유적지가 많아 봄부터 가을까지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이 찾고 있다. 1977년 3월 산 일대가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마니산 정상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진강산과 그 뒤로 혈구산과 고려산이, 북동쪽에는 강화대교가, 동쪽에는 길상산과 그 뒤로 강화초지대교가, 동남쪽에는 동막 해수욕장과 그 뒤로 영종도가, 남쪽에는 신도와 시도와 모도가, 남서쪽에는 장봉도가, 서쪽에는 주문도가, 서북쪽에는 석모도와 그 뒤로 교동도가 위치한다.] 13:04~13:36 정수사 가는 길과 함허동천 가는 길의 분기점 삼거리로 이동 13:36~13:45 정수사(淨水寺)로 이동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문을 자랑하는 정수사(淨水寺) 마니산 동쪽에 자리 잡은 정수사(淨水寺)는 전등사, 보문사와 더불어 강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찰이다. 신라 선덕여왕 8년(639년)에 회정선사가 마니산의 참성단을 참배한 후 이 곳 지형을 보고 ‘불자가 가히 삼매 정수할 곳’이라 하여 사찰을 세우고 정수사(精修寺)라 했다고 한다. 이후 조선 세종 5년(1423년)에 함허대사(涵虛大師)가 중창한 후 법당 서쪽의 맑은 물을 발견하고 정수사(淨水寺)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창살을 자랑하는 대웅보전(大雄寶殿)도 이때 만들어졌다. 꽃문, 꽃살이라고도 말하는 문창살은 우리나라에서 꽃병을 새긴 유일한 문창살로 꼽히고 있다. 정수사 법당인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겹처마 맞배 지붕건물로 보물 제161호이다. 건물은 원래 정면 3칸, 측면 3칸의 방형평면이었으나 후대에 전면 툇간을 달아 현재 측면 4칸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워 기둥윗몸을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만 공포(栱包)를 짜 올린 주심포식(柱心包式) 건축이다. 함허대사는 성균관 유생으로 유학에 몰입하다 출가하여 무학대사의 밑에서 공부를 했고 조선이 건국되는 시기에 불교와 유교의 조화를 도모하는데 공헌을 했다. 함허대사부도는 정수사를 다시 일으킨 함허대사의 승탑이다. 강화군 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13:45~14:05 정수사를 탐방 14:05~14:33 인천 강화군 화도면 해안남로 1139 번지에 있는 ‘황토옛집’ 식당으로 이동 14:33~15:10 ‘황토옛집’ 식당에서 소머리국밥(1만원)으로 식사 15:10~15:15 이건창 생가(李建昌 生家)로 이동 [이건창 생가(李建昌 生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건축물이다.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조선 후기의 문신 영재 이건창(1852∼1898) 선생이 살았던 생가이다. 고종 3년(1866)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고종 11년(1874) 서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충청우도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강직한 성격 탓에 세 번씩이나 유배되고 또 풀려났다. 그의 저서 『당의통략』은 파당을 초월하고 친족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평가 받고 있다. 저서로는 『당의통략』외에 『명미당집』이 있다. 이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기둥이나 보 등의 치목수법(治木手法)으로 볼 때 1백여 년이 된 것으로 판단되며,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삼량(三樑) 가구로 몸 전체를 짠 전형적인 한옥의 구조로 되어있다. 안채는 ‘ㄱ’자형이며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고, 안방 앞으로 부엌을 내는 등 경기도 지방의 일반적인 살림집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 바로 옆에는 이광명(李匡明), 이시원(李是遠) 등 선조들의 묘소가 있다.] [이건창(李建昌) 이칭별칭 : 자 봉조(鳳朝), 자 봉조(鳳藻), 호 영재(寧齋), 이칭 송열(松悅) 본관 : 전주(全州)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학문 및 저술활동 정의 개항기 때, 한성부소윤, 안핵사, 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兒名)은 이송열(李松悅).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寧齋).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시원(李是遠)이고,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이상학(李象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할아버지가 개성유수로 재직할 때 관아에서 태어나 출생지는 개성이나 선대부터 강화에 살았다. 할아버지로부터 충의(忠義)와 문학(文學)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받았다. 5세에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장성한 뒤에는 모든 공사(公私) 생활에서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강위(姜瑋) · 김택영(金澤榮) · 황현(黃玹)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용모가 청수(淸秀)하였으며, 천성이 강직해 부정 · 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고 친척 · 친구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처단하였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양보가 없이 소신대로 대처하는 성격이어서 인심 포섭에는 도리어 결점이 되기도 하였다. 정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충간(忠諫)과 냉철 일변도의 자세는 벼슬길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1866년(고종 3) 15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너무 일찍 등과했기 때문에 19세에 이르러서야 홍문관직에 나아갔다.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청나라에 가서 황각(黃珏) · 장가양(張家驤) · 서보(徐郙) 등과 교유,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의 비행을 낱낱이 들쳐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고, 1년이 지나서 풀려났다. 공사(公事)에 성의를 다하다가 도리어 당국자의 미움을 사 귀양까지 간 뒤에는 벼슬에 뜻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이 친서로 “내가 그대를 아니 전과 같이 잘 하라.”는 간곡한 부름에 못 이겨, 1880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이 때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흉년을 당한 농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식량문제 등 구휼에 힘썼다. 한편, 세금을 감면해 주어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어 이건창의 선정비(善政碑)가 각처에 세워졌다. 그 뒤 어버이상을 당해 6년간 상례를 마치고 1890년 한성부소윤이 되었다. 당시 청국인과 일본인들이 우리 백성들의 가옥이나 토지를 마구 사들이는 것을 방관하는 사이에 그 규모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 그들이 소유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문제를 일으킬 것을 예측한 이건창은 시급히 국법을 마련해 국민들의 부동산을 외국인에게 팔아넘기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실시해야 한다는 소를 올렸다. 그 때 이홍장(李鴻章)의 부하인 청국공사 당소의(唐紹儀)가 한성부 소윤의 상소내용을 알고, 공한으로 “청국사람과의 가옥이나 토지매도를 금한다는 조항이 조약상에 없는데 왜 금지조치를 하려는가.”라고 항의하였다. 이건창은 “우리가 우리 국민에게 금지시키는 것인데 조약이 무슨 상관인가.”라고 일축하였다. 그러자 당소의는 이홍장의 항의를 빙자해 우리 정부에 압력을 가해 금지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건창은 단념하지 않고, 외국인에게 부동산을 판 사람을 다른 죄목으로써 다스려 가중처벌을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감히 외국과 매매를 못하였고 청국인들도 하는 수 없이 매수계획을 포기하였다. 1891년 승지가 되고 다음 해 상소사건으로 보성에 재차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93년 함흥부의 난민(亂民)을 다스리기 위해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어 관찰사의 죄상을 명백하게 가려내어 파면시켰다. 임금도 지방관을 보낼 때에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공무를 집행하는 이건창의 자세는 완강하고 당당하였다. 갑오개혁 이후로는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의 협판(協辦) · 특진관(特進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96년 해주부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극구 사양하다가 마침내 고군산도(古群山島)로 세번째 유배되었다. 특지(特旨)로 2개월 후에 풀려났다. 그 뒤 고향인 강화에 내려가서 서울과는 발길을 끊고 지내다가 2년 뒤에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 및 저술활동 이건창의 문필은 송대(宋代)의 대가인 증공(曾鞏) · 왕안석(王安石)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정제두(鄭齊斗)가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풍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학문태도를 실천하였다. 한말의 대문장가이며 대시인인 김택영이 우리나라 역대의 문장가를 추숭할 때에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라 하여 아홉 사람을 선정하였다. 그 최후의 사람으로 이건창을 꼽은 것을 보면, 당대의 문장가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대(全代)를 통해 몇 안 되는 대문장가의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성품이 매우 곧아 병인양요 때에 강화에서 자결한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개화를 뿌리치고 철저한 척양척왜주의자로 일관하였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 · 『당의통략』 등이 있는데, 비교적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5:15~15:51 초피산(椒皮山, 253m) 정상으로 이동 [초피산은 마니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솟아있는 해발 253m의 나지막한 산이다. 그런데 정상부는 경사가 급해 가파르기가 높은 산 못지않다. 산 아래서 바라본 뾰족한 부분은 험상궂은 바위로 정상을 이루고 있다. 정상에는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돌탑이 있다.] ["화살촉 같은 초피산, 생각보단 만만찮네!" 오마이뉴스 기사 입력일 : 2007. 9. 30. 오마이뉴스 전갑남 기자 옆집 아저씨는 산행을 참 좋아한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는 배낭을 꾸린다. 그렇다고 멀리 유명한 산을 찾아 나서는 것도 아니다. 우리 동네 가까이 있는 마니산을 주로 찾는다. "마니산은 오를 때마다 새로워! 계절마다 다르고, 길을 달리하면 처음 오르는 것 같아. 새소리, 물소리, 거기다 풀벌레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깨끗해져. 덤으로 봄에는 나물도 뜯고 가을에는 알밤, 머루, 다래를 선물로 가져오지. 가까이 마니산이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 게다가 영산(靈山)이 아닌가?" 아저씨가 틈나면 산에 같이 가자며 들려주는 말이다. 산은 아무래도 혼자 오르는 것보다는 여럿이 오를 때 즐거움이 더한다. 아저씨도 그걸 잘 안다. 그런데 일손이 바쁜 농사철에는 아저씨처럼 자주 산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 가끔 내가 길동무가 되어주지만 아저씨는 혼자 산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함께 하는 산행은 즐거움이 두 배 연휴 마지막 날(26일) 아침. 날이 무척 맑다. 산행하기 알맞은 가을 날씨다. 아저씨가 채마밭을 둘러보고 있다. "아저씨, 오늘 바쁘세요?" "나야 만날 시간이 있지!" "저랑 산에 갈까요?" "산에? 듣던 중 반갑네." 술 좋아하는 사람에게 "대포 한 잔 할까?"하면 얼굴에 웃음꽃이 피듯, 내 말끝에 아저씨 표정이 딱 그 격이다. 정말 기다렸다는 표정이다. 나도 요 며칠 운동을 못해 몸이 찌뿌드드하던 터에 죽과 장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아저씨는 "어디가 좋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마니산 장군봉은 어떨까?"라고 묻는다. 그러다 오늘은 나더러 강화에 있는 좋은 산을 안내하란다. 진즉부터 한 번 오르고 싶었던 초피산이 생각났다. "초피산은 어떨까요? 그리 높은 산은 아닌데…." "덕포리에 있는 화살촉처럼 뾰쪽한 산 말인가? 그거 좋겠네. 그리로 가자구." 기분 좋은 출발! 아내가 주섬주섬 싸준 간식거리에다 막걸리 한 병을 챙겼다. 아저씨나 나나 막걸리를 참 좋아한다. 가끔 밭일을 하다 얼굴이 마주치면 막걸리를 곁두리로 마시고 지내던 터이다. 오늘은 밭이 아닌 산에서 텁텁한 막걸리를 들이키면 그 맛이 어떨까? 이리 좋은 문화재를 만날 지나치다니 가을 들머리라고 하지만 산은 아직 한여름이다. 녹음에서 풍겨 나오는 푸르름이 꼬리를 내리려면 한참 남았다. 산의 색깔만 보면 가을은 아직 이르다. 그렇지만 들판의 색깔은 완연한 가을이다. 따사로운 햇볕에 영그는 황금벌판을 보면 가을이 깊숙이 들어왔음이 분명하다. 뾰족하게 우뚝 솟은 산세를 뽐내는 초피산이다. 어디로 오르면 좋을까? 화도면 사기리에서 오르는 두 시간 남짓 타는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차에서 내리자 이건창선생생가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인다. 차도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전통 한옥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大문장가로 충청우도 암행어사와 해주 감찰사를 지낸 이건창 선생이 생전 살았던 집을 복원한 문화재다. 이건창선생생가는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명미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건창선생은 지행합일 학풍을 내세운 양명학의 마지막 강화학파로서 이웃나라에서 부강을 구하는 비주체적 개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시골 초가집이 정말 정겹다.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3량 가구 구조의 9칸 규모 'ㄱ'자 집이 예전 내가 살았던 집과 흡사하다.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집을 돌보지 않아 허술하다. 소홀한 관리가 못내 아쉽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마당에 빨간 고추를 널고 있어 길을 물었다. "아저씨, 이 길이 초피산 가는 길 맞나요?" "잘 들어오셨네요. 이 길을 따라 산에 오르고 덕포리 쪽으로 내려가세요." "그런데 사기리 탱자나무가 어디 있어요?" "생가 오시기 전 못 보셨나? 저기 보이잖아요." 사기리탱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79호이다.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 한계선인 강화도에 자리하고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아저씨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 길 건너 좀 왜소해 보이는 탱자나무가 한 그루가 보인다. 저게 천연기념물 사기리탱자나무라는 건가? 우리는 좀 의아한 생각으로 다시 길을 건넜다. 가까이 다가가자 멀리서 볼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의 나무이다. 오랜 풍상을 견딘 흔적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땅 위 나지막한 높이에 세 갈래로 갈라져 용트림하는 듯한 모양이 어떤 나무보다 멋져 보인다. 마침 노랗게 익은 탱자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가 상큼하다. 산행 길로 접어들며 아저씨가 좋은 문화재를 보았다고 흡족해 한다. "수도 없이 이 길을 다녔을 텐데 이런 문화재를 놓치고 다녔을까? 멋진 문화재가 이곳에도 있다니! 강화는 어디를 가도 좋아!" 깔볼 수 없는 초피산 산행의 아기자기함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산행을 시작한다. 푹석푹석 밟히는 낙엽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사람 흔적이 없는 산길이 호젓하다. 어디서 들리는지 목청껏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풀벌레들의 합창이 정말 청아하다. 일상에서 듣는 소란스러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자연의 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잦은 비가 내린 뒤라 그런지 지천으로 버섯이 돋아났다. 낙엽이 쌓인 흙을 헤집고 고개를 내민 버섯이 꽃처럼 아름답다. 하얀 색을 띤 소박한 버섯, 화려한 색깔을 뽐내는 버섯, 거기에 수더분한 버섯까지 저마다 멋을 부리고 있다. 아저씨가 요모조모 버섯을 살펴보시며 말을 덧붙인다. "오랜 세월을 살았다지만 버섯 이름도 모르고. 독버섯인지 먹는 버섯인지 알지를 모르니, 눈앞에 보물을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격이야." 비단 버섯뿐일까. 산에 있는 나무며, 풀이며 이름을 제대로 아는 게 얼마나 있을까? 자연을 몰라도 너무 모르지 않나 싶다. 그러니 자연의 소중함을 잃고 사는지도 모른다.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산길이 지루하지 않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니 급경사 길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지금까지 낙엽이 쌓인 흙길과는 딴판이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산행을 해야 할 성싶다. 온몸에 열기가 휘감기고 숨이 가팔라진다. 앞서 가는 아저씨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물로 목을 축이니 그 시원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아? 쉽게 생각할 산이 아냐!" "초피산의 뾰족한 모습이 산길에서 그대로 나타나네요!" 초피산은 마니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솟아있는 해발 253m의 나지막한 산이다. 그런데 정상부는 경사가 급해 가파르기가 높은 산 못지않다. 산 아래서 바라본 뾰족한 부분은 가까이 와서 보니 험상궂은 바위로 정상을 이루고 있다. 드디어 산 정상. 산 정상이 코딱지만한하다.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돌탑이 보인다. 숨을 헐떡이며 올라온 사람들이 하나하나 돌을 얹어 탑을 쌓은 건가? 돌무더기가 있어 정상의 운치를 자아낸다. 아저씨가 주위에서 돌멩이를 주어 돌무더기 맨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무슨 소원이라도 담아내 듯 정성스럽다. 그리고서 산 아래를 펼쳐진 아름다운 가을풍광을 보며 기분 좋은 말을 꺼낸다. "돈 달라고 하지 않으며 사람을 끌어안는 산! 들판의 황금물결을 보니 내 배가 다 부르네! 야! 이 맛에 산에 오르는 거 아냐?" 틈만 나면 산에 오르는 아저씨의 산 사랑 이유를 길게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시원하게 들이키는 한 잔의 막걸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맛이 있다. 산과 바다 그리고 황금벌판이 발아래 펼쳐져 있다.] 15:51~16:11 사진촬영 후 휴식 16:11~16:30 [초피산~마니산] 연결 능선을 따라서 함허동천 가는 길과 마니산 가는 길의 분기점 삼거리로 이동 16:30~16:42 함허정으로 이동 16:42~16:53 인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함허동천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산행 완료 16:53~17:05 함허동천 버스 정류장에서 전등사 동문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4번 버스 승차 대기 17:05~17:14 4번 버스를 타고 함허동천 버스 정류장에서 전등사 동문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9분] 17:14~17:17 전등사 동문 버스 정류장에서 김포공항역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60-5번 버스 승차 대기 17:17~18:44 60-5번 버스를 타고 전등사 동문 버스 정류장에서 김포공항역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27분 소요] 18:44~18:54 김포공항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는 공항철도 승차 대기 18:54~19:19 김포공항역에서 공항철도를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25분 소요] 마니산 산행지도 강화도 [마니산&정수사&이건창 생가&초피산] 탐방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