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29일 (수) 촬영.
오전 7시 10분 충무로역을 출발한 버스는 신갈 휴게소에 8시 30분쯤 도착해 준비해 온 식사를 했습니다.
젊었을 때 등산 다니던 시절이 생각났던 풍경.
길거리표 밥은 20여 년 만이었습니다. ㅎㅎㅎ
신갈 휴게소도 언제 와 봤는지 기억도 없었는데.... 전혀 기억을 못 하겠네요.
예정 시간에 거의 맞추어서 첫 번째 탐방지인 정림사지에 도착했습니다.
부여 정림사지 / 사적 제301호.
부여 정림사지는 백제 사찰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중심 사찰 터이다.
이 절터는 주요 건물인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을 건축하고 주위에 회랑을 구획한 형태로 주요 건물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기단은 기와를 사용하여 축조한 와적기단으로 이 역시 백제의 독특한 건물 축조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대 일본의 사찰에도 영향을 주었다. - 정문에 있는 현지 설명문 내용 -
남쪽에서 본 오층석탑과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에 세운 정림사지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백제식 건축물.
정림사지 / 사적 제301호
정림사지는 사비도성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백제의 가장 중요한 사찰이다.
중문과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위치하며, 동서 회랑 및 건물지, 승방지 등이 확인되었다.
중심 사역의 규모는 동서 약 62m, 남북 약 120m이다.
발굴 결과
민무늬토기를 포함한 청동기시대 문화층, 정림사 창건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삼국시대(백제) 문화층, 고려시대 문화층 등이 드러났다.
사찰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공방 시설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사찰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 정림사지 앞의 설명서 내용 -
정림사지.
백제 사비도읍기(538~660)에 건립된 사찰로서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 내부의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다.
남북 일직선상에 중문, 탑, 금당, 강당을 배치한 백제 가람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고려시대(1028)에 제작된 기와 명문을 통하여 정림사지라 불리고 있다.
백제문화권 정비 사업의 핵심 사업으로 주변 부지를 매입하고 발굴조사를 거쳐 가람터를 정비하여 오늘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정림사지 박물관 리플릿에서 - *나성(羅城) - 1,성의 바깥에 겹으로 쌓은 성. 2,성의 외곽.
정문에서 오층석탑으로 들어가는 길은 현재 발굴 보수 중입니다.
오층석탑 앞에 있는 연꽃의 안식처 연지.
연지에는 영하 7도로 기온이 떨어지고 있는 현재에도,
수련의 잎이 살아 있었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수련의 자취도 사라질 것 같네요.
서쪽 문입니다.
서쪽의 문밖에서 본 정림사지.
서쪽에서 본 오층 석탑.
회랑지(回廊址)
백제와 고려시대 두 시기의 회랑지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백제의 동, 서회랑은 기와를 활용하여 기단을 만든 와적기단으로 남북 45m, 동서 52m의 규모이다.
고려시대의 회랑은 중문에서 강당까지 연결하여 사원을 감싸는 합원(合院) 형식으로 적심석(積心石)의 간격으로 미루어 볼 때
정면 21칸, 측면 1칸으로 평면이 긴 사각형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현지 설명문 -
전면에서 본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정림사지 오층석탑 / 국 보
이 석탑은 백제가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 세운 것으로, 백제 석탑의 시원 양식을 잘 보여준다.
탑 모서리에 세운 민흘림기둥이나 탑신석과 넓은 지붕돌을 따로 가공해서 조립한 것은 이 탑이 목조건축을 모방했음을 알려준다.
균형 잡힌 형태와 비례, 장중하고도 세련된 아름다움이 백제 장인의 솜씨를 짐작하게 한다.
1층 탑신석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 592~667)이
자신의 공적을 과시한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새겨져 있다. - 현지 설명문 -
정림사지 오층석탑 / 국 보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다.
세부 구성 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석탑에 비하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준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 기단과 각 층 우주(모서리 기둥)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기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 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 정림사지박물관 리플릿에서 -
정림사지오층석탑의 상처.(전면인 남쪽에서 본 모습)
정림사지오층석탑은 과거에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렀다. 백제 사비성을 침공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탑의 1층 탑신에 승전기공문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새겨 놓았기 때문이다. - 정림사지박물관 리플릿에서 -
우측 우주에 새겨 있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문자.
오층석탑과 석조여래 좌상을 보호하기 위해지어 놓은 보호각 건물입니다.
회랑지에서 해설 중인 경 대장.
기와를 쌓아 만든 와적기단이 있는 회랑 터입니다. 오층석탑과 보호각 건물 사이에 있는 터가 금당지입니다..
동쪽에서 본 오층석탑.
회랑 밖, 동쪽에서 본 오층석탑.
북쪽에서 본 오층석탑.
북쪽에서 본 오층석탑.
북쪽에서 본 금당지 (金堂址)
금당지는 부처를 모시던 전각이 있던 곳으로 석탑 기단에서 북쪽으로 약 15m 거리에 있다.
고려시대의 기단은 백제 때의 기단을 재활용하였다.
금당지역 하층기단에는 동쪽에 7곳, 서쪽에 4곳, 남쪽에 6곳, 북쪽에 7곳의 적심석이 남아 있었고,
기단 내부는 한 곳에서 적심석이 확인되었다. 적심석 배치로 보아 금당은 툇간을 포함하여 정면 7칸 측면 6칸의 건물로 추정되며,
정면 18.5m, 측면 13.80m 크기이다. - 현지 설명문 -
서쪽에서 본 오층석탑.
서쪽에서 본 오층석탑.
서쪽의 기단석과 1층 탑신석. 탑신석에 어렴풋이 문자가 보이네요.
서쪽의 기단석과 1층 탑신석.
동쪽에서 본 기단석과 1층 탑신석.
정림사지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보호각 건물입니다. 백제의 건축 양식으로 지었습니다.
북승방지(北僧房址)
북 승방지는 강당지 북쪽 기단에서 약 7m 지점에 위치한다. 적갈색 사질토와 황갈색 사질 점토를 번갈아 다져 올린 성토층 위에
와적기단을 만들었다. 기단 내부에는 기둥을 놓았던 적심토가 남아 있고, 기단 동북쪽 모서리에는 계단 흔적이 확인되었다.
공포가 하앙식인 보호각의 우측면.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 좌상 / 보 물
이 석불좌상은 고려시대에 만든 불상으로 화재로 인해 심하게 마모되어 형체만 남아 있고,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좁은 어깨와 가슴에 올린 두 손의 표현으로 미루어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상으로 짐작된다.
대좌는 비교적 잘 남아있는데 단정하고 균형감 있는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남원 만복사 대좌와 함께 11세기 고려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 현지 설명문 -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의 대좌.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 좌상 / 보 물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남북축 선상에 놓여 있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이며,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긴 어렵지만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불상이 봉안된 곳은 백제시대 정림사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 정림사지박물관 리플릿 -
강당지(講堂址)
강당지는 경전을 연구하고 교육하던 전각이 있던 곳으로 정면 39.1m, 측면 16.3m의 긴 사각형 평면의 건물이다.
고려시대의 강당지는 정면 31.8m, 측면 17.9m로 백제 때 보다 작아졌다. 백제 강당지의 기단은 여러 장의 기와를 비스듬히
맞대 쌓아 만든 합장식 와적기단과 평평하게 쌓은 평정식 와적기단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강당지에는 고려시대 석불좌상의 보호각이 세워져 있다. - 현지 설명문 -
석조여래 좌상 보호각의 좌측면.
석조여래좌상 보호각입니다. 백제시대의 건축 양식으로 지었습니다.
하앙식 공포.
동쪽에 있는 문.
동쪽문 밖에 있는 명혜 공주 태실비와 부여임천대교비.
우측에 있는 자연석은 부여임천대교비(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111호)로
부여 임천면의 마을 진입로 확, 포장공사 과정에서 발견되었으며, 보존과 관리를 위해 2010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2단으로 된 비문은 조선시대 임천에서 서천군 한산으로 이어지던 대로(大路)의 하천에 놓였던 다리와 관련된 내용이다.
비문의 윗부분에는 다리의 건립 경위와 과정, 건립 연대 등을 적었고, 아랫부분에는 다리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했다.
명혜 공주 태실비 /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113호.
명혜 공주(明惠公主, 1665~1672)는 조선 제18대 현종(재위 1659~1674)의 둘째 딸이다.
이 태실비는 원래 충화면 가화리 용골 구태봉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면사무소 앞에 세워진 것을 2006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한 몸으로 된 비신과 머릿돌을 올렸다. 앞면에는 "명혜 공주 아기씨 태실, 뒷면에는 강희구년삼월십삼일립"
이라고 적혀 있어 조선 현종 11년(1670)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현지 설명문 -
정림사지박물관.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