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이한영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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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純粹)와 열정(熱情)-죽임의 문화 |
I. 죽임의 문화 - 무엇이 죽음을 가져오는가?
1. 나는 악마를 보았다1)
영화 <악마를 보았다>는 잔혹하고 혐오스러운 장면이 많이 나오는 공포스릴러물이다. 사람들은 왜 이런 잔인한 영화를 만드는 것일까? 공포 자체를 즐기는 것일까?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악마적 본성을 간접적으로 즐기는 것일까? 아니면 악마 같은 사람들이나 사회에 대해 복수하고 싶은 것일까?2) 그도 아니면 사회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일까? 시나리오를 쓴 작가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물론 진짜 목적은 본인들만 알 것이다.3)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주인공 수현은 국정원 경호요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약혼녀 장주연이 차를 몰고 길을 가다가 연쇄 살인마에게 잔혹하게 살해를 당한다. 수현은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 슬픔, 분노를 겪으며 범인을 찾아내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연쇄살인범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힘없는 여자들이다. 폭력과 살인이 자신보다 힘없는 사람에게 가해지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연쇄살인범은 일종의 새디스트(sadist)다. 강한 자에게 저항하고 대결하는 것은 새디스트가 아니다. 새디스트는 강자 앞에서는 굴종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상대가 약해지면 언제나 그 이빨을 다시 드러낸다. 새디스트의 특성은 언제나 약자를 향해 있다. 새디스트란 약자를 유린하고 약자 위에 군림하면서 힘을 과시하고 복종을 요구하며 존재감을 성취하는 존재다.
그런데 영화 속의 살인마 경철은 새디스트라기보다는 싸이코패스에 가깝다. 경철의 마지막 말 가운데 하나는 “나는 고통이나 두려움 같은 건 몰라”이다. 영화 속의 경철의 모습은 악마 자체다. 누구나 그의 모습을 보았다면, “나는 악마를 보았다”고 외쳤을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철면피 경철의 죽음으로 복수극이 마무리되면서 끝이 난다.
그러면 주인공 수현은 어떠한가? 비록 국정원 경호요원이라는 특수직을 갖고 있지만, 영화 속의 주인공 수현의 모습은 평범한 우리 직장인들과 다를 바 없다. 직업이 경호요원인 것은 살인마에 대항하여 복수할 수 있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설정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사람이 살인마를 상대로 이런 복수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복수를 위해 수현은 살인마처럼 폭력을 휘두른다. 하지만 경철은 가해자로서 즐기고 있는 것이지만, 수현은 피해자로서 복수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렇기에 수현은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에 통곡하기도 하고, 복수의 과정 속에서도 내면의 아픔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악마를 응징하겠다는 주인공 수현의 모습도 악마와 다를 바 없기도 하다. 범인을 찾아낸 수현의 복수는 매우 잔인하다. 수현은 살인마 경철을 붙잡아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을 주고 풀어준다. 그리고 다시 붙잡아 고통을 가하는 일을 몇 번씩 반복한다. 그리고 그가 했던 방식대로 똑같이 되갚아주려 한다.
선과 악의 대결. 이 둘은 서로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가인과 아벨처럼. 미카엘과 루시퍼처럼. 그리고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처럼. 그런데 어찌 보면, 마치 천사와 악마의 대결이 아닌, 악마와 악마의 대결 같다. 악마와 싸우기 위해서는 악마가 될 수밖에 없는가? 악마를 응징하기 위해서는 악마의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
영화는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복수를 말한다. 법정구속이란 단어는 피해자와 가족들이 감당해야 할 아픔, 고통, 삶을 담아내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다. 그러기에 이 부족한 “결여”를 채우기 위해 영화는 “과잉”을 필요로 한다. 국정원 경호요원이란 인물을 등장시켜 살인마를 철저하게 응징하는 방법의 “과잉”말이다. 여기에는 법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과잉”, 평범한 사람들 이상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과잉”, 과도한 폭력과 응징의 “과잉” 등이 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다. 영화는 슈퍼맨 같은 영웅을 등장시켜 관객들에게 대리만족을 제공한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누가 살인마와 겨루어 이길 수 있단 말인가? 현실 속에서 이 악마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대다수 개인들에겐 없다. 그러기에 하나 둘씩 병들어가고 하나 둘씩 죽어간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폭력과 살인을 경험하고 있다. 개인, 계급, 조직, 정부, 회사, 군대, 성, 인종, 종교 등 시스템에 의해 거의 매일 유무형의 폭력과 살인에 시달리고 있다. 육체적 폭력과 살인보다 더 큰 것이 사회로부터 당하는 정신적 폭력과 살인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는 이 거대 개인과 거대 조직, 거대 이념과 거대 시스템에 저항할 힘이 없다. 저항할 겨를 없이 다치고 병들고 죽어가고 있다.
죽어가는 이 사람들이 외치고 있다. “나는 악마를 보았다!”
그렇다. 이들이 본 악마는 학교일 수도 있고, 선생님일 수도 있고, 목사일 수도 스님일 수도 있으며, 회사나 군대의 상사일 수도 있고, 정부나 기타 조직일 수도 있다. 그 주체가 개인이든 조직체든 개인 또는 단체에 위해를 가하거나 생명을 앗아간다면, 그 대상을 향해 우리는 “악마를 보았다”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윤일병에게 악마는 선임병들과 병영 문화였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폭력적인 계급 문화, 선후배 문화와 맥을 같이 한다.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비춰진 악마의 모습은 뭐라고 특정 지을 수 없는 다수의 많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거대한 구름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수많은 복수의 악마들이 있었다. 그것은 이기주의, 황금만능주의, 부정부패, 불의와 부정의, 권력과 조직, 안전불감증 등과 맥을 같이 한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영화에서 본 것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당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주어야 할까?
2. 이라크 공습과 가자 공습
여기에 악마를 본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걸프전. 1991년 1월 17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략을 계기로 미국 등 34개국 68만 명의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침공한다. 이에 앞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가들은 유엔 결의안을 통해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응징하기로 결의한다. 압도적인 공군력을 바탕으로 1개월간 10만여 회에 걸친 공중폭격을 감행하여 이라크의 주요 시설을 거의 파괴하였으며, 2월 24일, 전면 지상전을 전개하여 전쟁의 끝을 맺는다.
이로부터 10년 후, 미국에 경악할 만한 사건이 벌어진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두 심장부가 터졌다. 민간항공을 납치한 테러범들이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에 대해 동시적인 자살테러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워싱턴은 미국 정부의 핵심부이고, 뉴욕은 미국 경제의 핵심부이다. 즉 이는 미국의 정치 경제의 심장부에 타격을 가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4) 이로 인해, 미국은 같은 해 10월, ‘테러와의 전쟁’이란 명분을 내세워,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등에 대한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 발발 12년 후인, 2003년 3월 20일, 이라크에 대한 재침공이 감행된다. 이는 9·11테러사건(2001.9.11)에 대한 응징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를 제거함으로써 자국민 보호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대외명분을 갖고 있었다. 이 전쟁은 최첨단 무기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미국 및 연합군의 승리로 4월 14일 끝을 맺는다.5)
영화의 구도는 간단하다.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가 있다. 선과 악이 분명하다. 그래서 피해자와 한편인 응징자는 선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살인마는 절대악에 대한 응징이 가해진다.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도 미국과 악의 축의 구도로 단순화시키면 간단하다. 미국 및 미국 시민들은 피해자이며, 가해자도 있다. 따라서 미국 정부가 피해당사자의 입장에서 악의 무리들을 응징하고 소탕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그것은 미국과 중동을 둘러싼 역사, 종교, 정치, 경제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이라크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 많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이 글이 이 사건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악의 축” 발언이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추격을 계속하는 한편, 2002년 1월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미국의 ‘악의 축’ 발언은 “나는 악마를 보았다” 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악마를 응징하는 자칭 정의의 사도에게서 “나는 악마를 보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악마를 본 사람들이 왜 이렇게 다양하고 왜 이렇게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사건들에서 누가 천사이고 누가 악마인가? 누가 정의의 사도이고 누가 악의 사도인가? 미국인가? 연합군인가? 오사마 빈 라덴인가? 이라크인가? 아프가니스탄인가? 서로가 ‘내가 선(善)이고 상대방은 악(惡)’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정작 “악마를 본 사람들은 누구인가?”
‘악으로 규정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정부, 국가, 기관, 조직 등 거대체계의 입장에서는 여러 모로 상당한 잇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옳든 그르든, 고의적이든 아니든, 진정성이 있든 없든, 악마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군다나 상대방이 정말 악하다면, 악의 일면이라도 있다면, 그것처럼 고마운 일도 없다. 응징에 정당성과 대의명분을 제공받을 수도 있고, 실리를 취하거나 상대를 정복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수현은 살인마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복수한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러한 수현의 모습에 동조하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통쾌해하기까지 한다. 동일한 행위이지만 상대방이 악이라고 하는 설정은 자신들의 범죄를 정당화시켜주며 또한 면죄부를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희생양 메커니즘의 주요한 기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에서의 복수는 대개 피해자가 당한 것, 피해자가 당한 만큼이며, 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정상참작을 통해 응징자에게 면죄부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현실도 그러한가? 현실은 그 이상의 것, 그와는 상관없는 것을 요구한다. 더군다나 문제는 거대 체제 간의 충돌이 아니다. 거대체제의 충돌 속에서 이유 없이 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거대체제는 그것을 비호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존재한다. 세월호의 침몰과 병영내 폭력사건은 그 체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체제를 묵인하고 용납하고 비호하는 무리들이 있기에 존재가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2014년 7월 10일,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습이 있었던 날이다. 일단의 사람들이 산 위로 모여 들었다. 그들은 한쪽 방향을 응시하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낄낄 거리며 웃고 때로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웃음, 박수, 모임. 이 단어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웃음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좋은 것인가? 그러나 문제는 웃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실상, 이 사람들이 박장대소한 이유는 이스라엘 공군이 가자 지구를 공습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그 공습에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다는 생각이 없이, 포탄이 떨어지는 굉음과 화염의 모습을 보며 불꽃놀이 축제를 구경하듯이 즐겼다.6)
동화 작가 김일광은 그가 몇 년 전 북유럽 여행 중 만났던 한 소녀의 이야기와 이 모습을 오버랩시키며 이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워주었다. 눈망울이 맑은 이 소녀는 고향땅 팔레스타인을 떠나 덴마크로 피난을 가는 가족의 일원이었다. 다행히 아빠가 덴마크에 일자리를 얻은 이들은 그나마 천행이었다. 아빠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고향에서는 아이들을 키울 수가 없어요. 결국은 다 떠나야 해요. 그들은 그것을 원해요” 라는 말을 되뇌었다. 몇 년 전 이 소녀가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김일광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 가자 지구의 현실을 전한다.
가자 지구는 겨우 인구 180만 명이 빼곡하게 모여 사는 좁은 지역이다. 이스라엘의 무차별 포격으로 사망자가 이미 천 명을 넘어섰고, 폐허가 되었다. 특히 180만 인구 중에 어린이와 여성들이 70-80%를 차지한다고 한단다. 맞서 싸우지도, 재빨리 피하지도 못하는 이들을 향하여 세계 4위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일방적으로 포탄을 퍼붓고 있다. 이것은 학살이다.…문제는 어느 누구도 팔레스타인의 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북아의 작은 나라, 우리의 현실과 어느 면에서 너무도 닮은 것만 같다. 아무도 약자의 편에는 서지 않는 게 국제관계다. 그래서 소름이 끼친다.7)
이들이 본 악마는 누구였을까?
하필 그 폭력과 살인의 주체가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와 기독교이다. 무차별 폭격을 일삼는 이스라엘과 그들의 신 야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어떤 신의 모습일까? 사랑과 자비의 신일까? 아니면 악랄한 악마일까?
누가, 무엇이 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가? 영화 <악마를 보았다>가 잔인한가? 그것은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보다 더 잔인하고 이보다 더 뼈아프다.
거대 체제 간의 충돌도 문제지만, 문제는 이 거대 체제로부터 이유 없이 피를 흘려야 하는 사람들이다. 미국이 선이든 악이든, 이라크나 빈 라덴이 선이든 악이든 상관 없이, 너무 나도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각주의 통계 참조) 이들은 미국,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의 시민들, 부녀자들, 아이들이다.
II. 열정과 순수 그리고 죽임의 문화
1. 순수와 열정 - <악마를 보았다> 요한복음 버전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는 악과 선이라고 하는 이분법적 구조가 본래부터 정해져 있다. 주인공 경호는 악을 응징하는 선의 편에 서 있다. 이에 비해 살인마 경철은 절대악이다.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완전무결체로서의 절대악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생각도 양심도 없는 무자비한 살인자로서 선한 구석이라고는 요만큼도 찾아 볼 수도 없다는 의미 내에서의 절대악이다.
그런데 요한복음판 <악마를 보았다>인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의 사탄논쟁은 좀 성격이 다르다. 유대인과 예수. 이들은 순수하고 열정적이다. 그런데 서로 악마라고 한다. 어떻게 둘 다 순수하고 둘 다 열정적인데 서로 악마라고 할 수 있는가? 하지만 세상엔 이런 일이 많다. 정말로 한쪽이 악하고 한쪽이 선하여 벌어지는 대결과 투쟁도 있지만, 선한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들은 순수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선(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들에겐 시시비비(是是非非), 즉 옳고 그름이 중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이다.
이들은 뜨겁다.
신을 향한 열정이 과도할 정도로 넘치고 넘치는 사람들이다. 너무 넘쳐서 주체를 하지 못할 정도다. 그들은 신을 향한 열정을 세상을 향해서도 쏟아 붓는다. 그렇기에 가만히 지켜보지 못한다. 뜨거움이 넘치기에 옳지 못한 것들을 향해 쓴 소리를 내뱉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
너무나도 뜨거워 주체할 수 없는 신을 향한 욕망 속에서 그들은 경쟁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닮고자 하는 신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쌍둥이처럼 너무 닮아 있었다. 선과 악의 상징인 대천사 미카엘과 악마 루시퍼처럼, 선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신 앙그라 마이뉴처럼 말이다.
신을 향한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힌 그들의 눈에는 이미 콩깍지가 씌워져 있다.
그들은 순수했다. 그러나 사랑은 맹목적이다. 사랑에 눈 먼 자에겐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것이 사랑의 맹목성이다. 이것이 사랑의 열정이다. 이들의 사랑은 순수했다. 그러나 무지한 순수가 얼마나 큰 해악이 되는지 그들은 몰랐다.
신에 대한 사랑이 너무 뜨거웠기에, 이들은 신을 향한 열정 속에서 악마를 보았다. 너무나도 신에 대한 갈망, 열정이 뜨겁기에 신의 뜻에 어긋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서로에게서 악마를 보았다. 악마란 무엇인가? 신에게 대적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신에게 대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수가 보기에 유대인들은 신에게 대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가 외쳤다.
“나는 악마를 보았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악마로 보았기에, 예수를 죽이려 하였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악마로 본 이유는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조금씩 이야기되어 왔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고 선포했던 일이다. 이 말이 끝나자 유대인들은 예수를 돌로 쳐 죽이려 했다.(요 10: 30-1) 유대인들에겐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라고 하는 예수의 말은 용납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요 사탄의 말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눈엔 유대인들이 악마요 악마의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정결한 자요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으며, 깨끗함과 불결함을 분별하는 눈으로 세상을 보고 차별하는 무리들이었다.
2. 지혜 없는 순수와 열정-죽임의 문화
열정과 순수만으로 예수와 유대인들을 구별하기는 어렵다. 이들은 모두 순수했고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한쪽은 죽음의 문화라고 말하며, 다른 한쪽은 생명의 문화라고 말한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다르게 하였을까?
결정적인 차이는 <지혜>였다. 지혜수준의 차이가 이렇게 다른 결과를 만들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을 꿰뚫어 보는 눈,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없었다. 지혜는 바로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대주제다. 요한복음은 이 지혜가 예수에겐 있었고, 유대인들에게는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더 나아가 예수가 로고스(말씀, 지혜) 자체라고까지 말한다. 요한복음 1장은 로고스는 창세전부터 계셨으며 만물을 창조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선언의 힘은 실로 지대하다. 그 누구도 창세전부터 있으며 만물을 창조한 그 신적 권위에 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고스란 바로 그러한 신적인 지혜다. 로고스는 만물을 창조하는 힘이며 생명의 힘이며 모든 육적인 것들을 품에 안고 있는 위대한 영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말하는 로고스, 즉 <지혜>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겐 <지혜>가 아니라 <분별심>이 있었다. 유대에서 가장 뛰어난 지적 스승들이며 의로운 사람인 나다나엘과 니고데모조차도 나사렛, 사마리아 사람들을 차별하는 분별심을 갖고 있었다. 더러움(부정함)과 깨끗함(정결함)을 나누는 정결신앙과 희생제사를 통해 이방인과 유대인, 장애와 정상을 나누었다.8) 이 분별심이 유대체계, 죽음의 문화를 만들었다.
요한복음의 예수도 “악마를 보았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달랐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비범함과 무경계성 속에서 악마를 보았다. 예수의 발언들은 신분과 계급, 지역과 인종, 성별과 장애의 차이를 통해 유지되어 왔던 그들의 체제를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반면, 예수는 유대인들 안에 있는 분별심 속에서 악마를 보았다. 예수는 유대인들을 향해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말할 정도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것은 적개심이나 복수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는 자신들을 죽이려고 한 유대인들을 향해 발걸음을 돌릴 정도로 사랑했다. 예수는 영화 <악마를 보았다>나 <이라크-가자공습>에서 볼 수 있는 복수와 응징의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복수혈전의 윤회의 사슬을 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수는 판 자체를 바꾸려 하였다. 죽임의 문화를 만드는 개인의 판을 바꾸지 않고서는, 죽임의 문화를 만드는 체제의 판을 바꾸지 않고서는 “나는 악마를 보았다”는 외침은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계급, 권력, 자본, 욕망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 우리 문화, 우리 종교의 판도 변화할 수 있을까? 세월호 침몰, 윤일병 구타 사망, 세 모녀의 자살 등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시스템에 의한 죽음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판 자체가 변할 수 있을까?
이한영 | 교수는 건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종교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學) 문학연구과에서 초빙외국인학자로 재직한 바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 기독교문화연구소 전문연구원이며,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종교철학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