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 에세이(14)]
기억해야 할 2월 3일 / 김잠출
어린 시절 세상은 더디고 천천히 굴러갔지만 지금보다 훨씬 여유가 있었다. 손으로 쓰고 꾸민 엽서를 방송국에 보내려고 우체국을 드나들었고 음악을 들어도 나름의 과정과 의식(?)을 거쳤다. 두 손으로 LP를 집어 호호 입김을 불어 먼지를 닦은 뒤 턴테이블에 올리고 조심스레 바늘을 얹고 나서야 음악을 들었다. 때론 귀찮은 절차였지만 진정으로 음악을 듣기 위해 거쳐야 할 당연한 의식으로 알았다. 그때는 찌지직하는 소리도 음악의 일부로 여겼다.
나는 아직도‘처음’에 대한 설레임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편이지만 오래되고 낡은 것에 대한 애착 또한 그에 못지않다. 때때로 세상의 빠른 속도에 불만을 터뜨리거나 멀미를 느끼고 지금보다 훨씬 느렸던 세월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명절이나 세시풍습은 여전히 음력을 기준으로 기억한다. 명절이 되면 고향에서 함께 했던 ‘어머니와의 시간’을 복기하고 마음이 설렌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그 시절이 아삼아삼하다. 올해의 설날은 1월 22일이었고 정월 대보름은 지난 2월 5일이었다.
타인에 대한 연민
어릴 때 고향 동네에선 동지섣달만 되면 ‘외지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어떤 이는 낯이 익었고 또 다른 이들의 말씨는 낯설었다. 각설이나 상이군인, 다부장수(도붓장수)들은 해가 지기 전에 동네를 떠났고 충청도나 전라도에서 온 방물장수 아지매 몇 분은 너댓새까지 우리 집에서 함께 지냈다. 인삼이나 동동 구리미, 참빚과 사분을 다 팔고 나서야 떠났다. 그들은 아침에 면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고 해가 지면 집에 와 어머니가 차려 준 밥상을 받았다. 저녁엔 이웃 사람들을 불러 모아 우리와 다른 방언을 쓰며 먼 도시 이야기와 세상의 풍문을 전했다. 풍부한 유머에 말솜씨까지 유창해 얼마나 인기가 많았던지 변사가 따로 없었다. 남진과 나훈아를 제 이웃인냥 자랑하고 최무룡이나 허장강, 이미자나 김지미에 대한 썰을 풀 때마다 이웃 아지매들은 눈이 커지면서 자지러지고 배꼽을 잡고 뒹굴었다. TV나 라디오가 무엇이며 전기가 어떤 건지도 모르던 산촌의 초가집에서 희한한 세상의 소문을 들었으니 그 사나흘이 얼마나 재미났을까. 주고받는 인심도 후해 내년을 기약하며 돌아 갈 때는 남은 물품과 몇몇 신상품을 선물해 어머니를 미소 짓게 했다. 나는 가끔 낯선 이들과의 동거가 불편해“왜?”라며 짜증을 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읊조리듯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잘 데 없는 사람들 불쌍타 아이가~”“배고픈 사람들 먼저 멕이고 우리는 좀 덜 먹으면 안 되나”
동정과 연민이 몸에 배어있던 어머니가 그나마 기대고 위로를 받는 대상이 필요했으니 무장무장 커가는 자식들과 샤머니즘과 애니미즘Animism 또는 정령신앙精靈信仰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평생 해와 달, 별은 물론 큰 나무나 바위, 바다 등 자연물에 신격을 부여해 경외하던 ‘나약한 여인’이었다.
어머니가 가장 나약한 모습을 보일 때는 설에서 한 달 쯤의 기간이었다. 특히 정월 보름날은 설날 못잖게 분주했는데 새벽에 일어나 ‘용알 뜨기’를 하고 오후에 지신을 밟는다고 걸립패들이 들이닥칠 때까지 쉴 틈이 없었다. 길러 온 우물을 드무에 들이붓고 부뚜막에 촛불을 켜고 비손으로 조왕신을 달랜 어머니는 해가 마당을 비출 때‘소 밥상’과‘까마귀밥’을 챙기고 삽짝에 나가 고시래를 외치며 ‘물밥’을 헌식獻食했다. 어머니가‘사금갑射琴匣’ 설화를 알았겠냐마는 소를 식구로 대접하고 까마귀도 먹이고 아귀나 객귀, 무주고혼들이 배곯지 말아야 한다는 믿음만은 확고했던 것 같다. 의식을 끝내고 안방에 둘레판을 펴면 오곡밥과 나물반찬, 부럼을 가득 차렸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떠오르는 아침 풍경이 아직도 아삼아삼하다.
‘총독체제’인 지역 공영방송
연초부터 지역 방송사들의‘약자 괴롭힘’ 사례를 뉴스로 접하니 갑갑하다. 울산과 포항의 지역방송사들이 기상캐스터와 교통 리포터를 일방적으로 해고하고도 노동위의 결정이나 법원의 판단을 수용하길 거부한단다. 해고자들의 눈물 위에 경영 안정을 꾀하겠다는 목표 때문이라고 했다. 약자를 외면하고 연민이라곤 없는 냉혈한들이 지역방송을 경영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위의 복직명령도 거부하는 지역방송사, 참으로 비겁하고 최소한의 연민憐憫은커녕 수오지심羞惡之心도 없어 보인다.
그들은 왜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타인에게 그렇게 무감각해졌는가. 약자나 타인에 대한 연민이 없어서이다. 연민의 시선, 연민의 마음으로 타인을 바라볼 때 함께 사는 관계가 되고 서로 공감을 주고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역방송은 늘 이중적 차별을 받아왔다.‘중앙’에서 홀대받고 자기 지역에서도 외면당한다. 예나 지금이나 변방의 소리, 촌스런 존재로 취급받는 신세는 변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다 미디어 환경은 급변하고 광고나 수익은 갈수록 줄어들어 지금 지역방송은 더욱 힘들어졌다.
해묵은 과제인 지역방송의 위기를 해결한답시고 2014년에 도입한 지역방송 발전기금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었지만 지나고 보니 효과는 미미했다. 연 40억원으로 수 십 개의 지역방송을 위해 쓴다.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임시방편이었고 언 발에 오줌 누기요 응급실의 산소호흡기 정도였다. 한 발 물러서 보니 유튜버들이나 크리에이터들이‘지역’을 훨씬 더 잘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뉴미디어가 지역방송을 죽이는 게 아니라 지역성을 구현하기에 더 좋은 환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논의가 어김없이 재연되고 있다. 지방분권과 여론 다양성을 실현하기 위해 공영방송에‘지역 대표’ 몫의 이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간혹 들린다. 공영방송의 지역성 강화는 지방분권, 국가균형발전 실현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논리도 더러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서울에서 파견한 낙하산, 총독이 지역방송을 장악하고 대리 경영을 하는 관행이 여전하다. 지역을 대변하고 지역여론을 대표할 인사가 공영방송 이사회에 포함되고 지역의 대표 인사가 지역 공영방송의 임원이 되어야 하는데 실현은 요원해 보인다. 생각하면 간단한데 중앙은‘지역방송’의 수준을 아직도 믿지 못한다. 지역성을 제대로 구현하고 지역의 목소리를 충실히 반영해야 고사위기의 지역방송을 회생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할 사람이 누구일까. 2,3년 출장 온 기분으로 지역에 머물다 가 버리는 ‘총독’과 평생 자기가 사는 곳을 위해 복무해 온 ‘내부인’또는‘현지인’ 중에 누가 더 지역에 헌신하고 지역성 구현을 위해 애쓸까. 향토문화를 사랑하고 전승하려는 노력을 누가 더 할 수 있을까.
물론 지역방송이 지역문화에 할애하는 열정과 시간이 물리적으로 미흡했던 것은 사실이다. 지역신문에는 문화면이 있어 지역의 다양한 문화소식을 전하고 있지만 지역방송은 상대적으로 지역문화를 홀대한 것도 맞는 말이다. 어느 지역방송에 향토문화를 전담하는 기구나 인력이 있는지, 지역이나 향토 문화를 위한 기자나 PD가 얼마나 공부하고 애정하는지, 지역방송이 반성해야 할 뼈아픈 대목이다.
울산만 기억하는 '1962년 2월 3일'
지역방송인은 지역을 제대로 알고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지역을 지키려는 의지나 애향심이 생기고 지역성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다. 지역의 특정 기념일을 기억하는 일도 지역방송인의 몫이다. 울산에선 2월 3일이 그런 날이다.
1992년 겨울, 한국 공업의 발상지 ‘울산공업단지’의 생일을 기리는 다큐를 제작하면서 ‘1962년 2월 3일생’ 주인공을 찾아 나섰다. 울산군 대현면 납도納島 일명 개구리섬. 5만의 읍에 대통령 등 단군 이래 처음 보는 VIP들이 와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을 가졌던 그날에 출생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내용이라 예고방송도 수차례 내보냈다. 그들이 겪어 온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통해 울산공단과 대한민국의 발전 과정을 함께 돌아보며 2월 3일의 의미를 반추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인공들을 찾지 못했고 대신 울산공단을 설계하고 초기건설을 담당했던 오원철, 김광호 선생 등을 초청했다. 그들은 1962년 울산특별건설국의 주역들이었다. 촬영 첫날 그분들과 함께‘한국 공업입국 발상지 기념비’를 찾았다. 1992년 6월 1일 세운 기념비에는 "민족적 번영과 복지를 마련하기 위한 한국 공업입국의 출발지가 된 이곳 발파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정성을 모아 기념비를 건립합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기념비는 남구 장생포동 고래길의 공장(KEP) 안 작은 화단에 있는데 이곳은 1962년 2월 3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공업센터 기공식 발파 버턴을 누른 장소이다.
당시 혁명정부는 현재의 ‘울산시 남구 장생포 고래길 84번지길 납도’ 앞 언덕배기에서 단군 이래 처음으로‘공업센터 기공식’을 가졌다. 공업센터는 4,900만 평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내빈들이 '공업입국'의 꿈을 담은 버튼을 누르자 납도 앞 바닷물이 분수처럼 치솟았다. 전 세계가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는 오늘의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시작을 알리는 광경이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송요찬 내각수반, 최고위원들과 외교사절, 주한 유엔군 사령관 등 대한민국의 요인이 총집결했다. 추운 날씨였지만 읍민들도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울산여고와 울산농고, 대현중학교 학생들도 동원되었다. 대한뉴스는 현장에 “3만 60명의 역사의 증인이 모였다.”고 전했는데 1961년 말 울산읍 인구가 3만 3,000명이었음을 감안하면 거의 전 읍민이 한자리에 다 모인 셈이다. 1962년 2월 10일 극장에서 상영된 대한뉴스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이곳 맑은 하늘에 검은 연기가 뒤덮이는 날 태화강변의 기적이 이룩될 것입니다.”
울산공업단지가 생긴 지 어언 61년이 되었다. 2월 3일은 울산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날이다. 한민족 역사상 4,000년 빈곤을 몰아낼 기념비적인 선언을 했던 날이고 대한민국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울산을 인구 50만 공업도시로 개발하겠다며 범정부적 행사를 처음 열었던 날이다.
'그때 그곳'은 지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거나 희미해졌다. 수많은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지형이 변했고 역사적인 장소도 공장부지가 돼 출입이 제한된다. 기억해야 할 역사적 장소는 '한국 공업입국 출발지 기념비'만 남았다.
그동안 울산은 한국의 경제기적을 선도해 왔고 민족 번영의 초석을 다지는데 헌신해 왔다. 하지만 역사적인 발파장소는 공업단지 시발지라는 가치도 잊은 채 초라한 화단과 작은 기념비만 남아 있을 뿐 찾는 이도 드물다. 당시의 옹골찬 의지나 자부심은 바래서 미래에 대한 새 비전도 딱히 확인되지 않는다. 발파식에서 사용한 ‘대통령의 삽’은 1962년 2월 3l일부터 울산 시청 시장실 앞에 전시했는데 4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대통령의 삽이 없어져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고 누구 하나 찾으려 하거나 궁금해하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은 1962년 1월 31일 울산공업지구설정에 대한 담화를 시작으로 2월 3일, 3월 30일 등 한 달에 두세 번씩 울산을 찾았다. 매달 관련 보고를 받고 새로운 지시를 할 정도로 울산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컸다. 지도자의 의지와 전 국민의 노력으로 인구 3만의 작은 읍 울산이 세계적인 기업들이 가득한 공업도시로 성장했다. 어느새 울산은 우리나라의 자랑거리이자 세계적 공업도시가 됐고 한국산업의 심장이었고 엔진이었다. 반농반어의 작은 읍이었던 울산은 공단조성 이후 역사의 물살이 빠르게 흘렀고 구비마다 새 역사를 창조하는 고된 임무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세월이 60년을 지났다.
울산에 '말뫼의 눈물'이라는 골리앗 크레인이 하나 있다. 2003년 스웨덴 제3의 도시 말뫼시가 눈물 속에 우리나라에 팔았던 것이다. 한때 조선도시로 유명했던 말뫼시가 세계 최대의 크레인을 단돈 1달러에 팔아야 할 정도로 쇠락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의 말뫼는 지금 정보통신기술과 바이오산업 도시로 탈바꿈했다. 시 당국과 시민들이 나서 조선소와 공장 땅을 사들이고 기업들의 자발적인 협력과 참여로 IT와 지식산업을 기반으로 탄소 제로 도시로 거듭났다고 한다.
울산공단도 새 옷을 갈아입을 때가 됐다는 지적이 많다. 중후장대重厚長大의 갑옷 대긴 경소단박輕小短薄으로의 변신이 시급하다.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도시도 탄생과 재생, 성쇠를 거듭한다. 세월과 사람에 따라 움직이고 변한다. 때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도시도 있다. 시대와 산업 그리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것이 도시의 일생이다. 울산과 대한민국은 이미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고 신라의 영성을 재현하려는 민족적 욕구”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 공업도시의 나이가 환갑이 지났으니 ‘울산공단’의 변신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
다큐 ‘지독한 끌림’
“지리산 사계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1985년 사장이 지원동기를 물었을 때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이다. 그 후 어쭙잖은 방송생활 동안 실제로 몇 편의 다큐를 제작해 방송을 했으니 형식상 약속은 지켰다. 동해남부선과 민요 줍기를 시작으로 태화강 백리, 들판의 노래, 산 노래와 노동요 등을 거쳐 황소개구리, 도시의 매, 오대오천의 모기, 대곡천의 마지막 계절 같은 자연이나 환경 다큐를 방송했던 기억이 새롭다.
설 연휴를 앞둔 어느 날 밤, EBS 다큐‘지독한 끌림’에 지독하게 끌렸다. 오랜만에 TV에 완벽히 몰입한 시간이었다. 몽환적 풍경을 보다가 화려한 채색화와 잔잔한 수묵화를 보았다. 어떤 배우도 연기할 수 없고 어떤 연출도 불가능한 장면들이었다. 아직도 다큐멘터리는 살아있다는 탄성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짝짓기를 하던 따오기는 절정의 순간에 감창소리를 내며 귀를 즐겁게 해 줬고 흙경단을 만드는 동고비는 자식을 위한 어미의 희생을 보여주었다. 모든 순간이 있는 그대로 찍은 것이었고 출연한 동식물은 누구도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것 같았다. 끌림으로 인연 맺어 생명의 잉태로 대를 이어가는 장면들이 신비하기만 했다. 매화나 수리부엉이 직박구리와 동백, 고라니는 늘 보던 친숙한 대상이었지만 먹는 행동과 놀이, 몸짓과 산란, 양육의 고단함은 참으로 엄숙하게 보였다.
긴꼬리딱새와 노랑 어리연, 쇠물닭과 물총새, 끄리와 저어새, 가마우지, 논병아리와 오색딱따구리는 예전 우포 늪 촬영 때와 똑같이 재연해 줬다. 모든 생명은 유혹에 따라 끌림이 일고 인연이 시작돼 사랑의 행위를 하고 대를 이어갔다. 매 순간마다 탐미적 영상을 표현해 주었고 사계절 변화에 따른 우리의 자연이 저토록 아름답고 숙연한 모습임을 확인해 준 다큐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방송사들은 지금 모두 어렵다. 지역방송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형편이 어려워지니 돈 안 되는 다큐멘터리부터 없애버렸다. 제작비 덜 들고 의무 편성인 교양 비율을 높일 수 있는 강연이나 토크쇼로 시간을 때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EBS의 다큐 ‘지독한 끌림’은 공영방송의 역할을 보여준 걸작이었다.
지역방송도 지역 소재를 소중히 여기며 Glocal한 소재와 정신을 담은 뛰어난 다큐 제작을 쉬지 않았으면 한다. 소재와 문제의식, 이 시대의 질문을 담은 다큐멘터리는 방송의 꽃이다. 돈 때문에 다큐가 사라진 방송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적막하고 절망인 일인가.
시여 침을 뱉어라
또 언론인의 직업윤리가 문제다. 신문 방송사의 윤리강령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결국 밥 정이 문제였다. 술밥 정은 우리 기자 사회의 오랜 관행이었다. 기자 정신은 돈에 묻혀 혼탁해져 회복하기 어려워졌고 이성은 마비상태다. 더 이상 언론이 아니고 기레기라 비난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주요 언론사 부장급 간부들이 화천대유 대주주로부터 적게는 9000만원, 많게는 9억원까지 돈거래를 했다고 한다. 골프 접대를 받으며 100만원이나 그 이상의 용돈까지 챙겼다고 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군자연하며 얼마나 세상을 농단하고 비리척결을 외려댔을까. 상대를 비난하고 난도질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려고 언론자유를 외쳤는지 모른다. 심지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한다며 국민주로 출발한 신문마저 돈에 오염됐다. 기자가 돈 없으면 수천만 원어치 술을 마셔선 안 되고 아파트 분양을 안 받으면 된다. 돈 없는데 굳이 골프장에 갈 필요도 없다. 그들이 그렇게 욕하던 독재자나 천박한 자본가의 모습을 그들 스스로 닮아갔다. 그러니 시민들이 김수영 詩人을 다시 불러내 '시여 침을 뱉어라'를 환기해 준다.‘언론에 침을 뱉어라’로 바뀌었을 뿐.
벌써 얼음 녹는 소리가 들린다. 봄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신호다. 새해 일출을 맞던 1월은 어찌 그리 빨리 가버렸는지, 2월은 또 얼마나 짧게 지나갈지. 겨울을 잊으려 하는 순간이다. 다가 올 봄마저 서둘러 여름에 자리를 내주고 내년을 기약할 것이고 사람들은‘다음 계절’을 기다리며 반기려 한다.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고 내일 지나면 모레가 되고 모레 뒤엔 고모레(글피)와 고고모레(그글피)가 기다린다.
세월은 지나고 보면 늘 빠르게 가버렸다는 느낌을 받는다. 백구과극白駒過隙! 세월의 빠르기는 잘 달리는 흰망아지를 문틈으로 보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장자는 그렇게 인생을 찰나에 비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