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볼롱기에르(Hans Bollongier, 약 1600~1675년) / ‘꽃이 있는 정물화’, 1639년, 나무판에 유채, 67.6㎝×53.3㎝,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
다시 꿈꾸기
2013년에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글(https://news.joins.com/article/10463423)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는 ‘새 악보를 읽고 외우는 것’은 가장 자신 있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사흘에 한 번씩 새 곡을 연주하려면 암보(暗譜)는 힘든 일이라고 토로합니다. 연주회 준비 때 손으로 하는 연습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연주할 곡 듣기를 한답니다. 그래서 무대에서 연주할 때는 손만이 아니라 머리와 귀가 함께 암보를 도와주고 있음을 느낀다는군요. 그 글을 쓸 즈음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1번을 연주할 때는 기억을 돕는 제4의 ‘기관’도 있음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마음’이라구요.
이 글이 생각난 것은 책 한 권 때문입니다. 이미 4년 전에 발간된 『1만 시간의 재발견』을 최근 손에 잡았습니다. 읽는 내내 흥분을 느꼈습니다. 원저의 제목은 『절정(Peak)』입니다. 읽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과 기억들을 떠올리게 해 주었습니다.
저자 앤더스 에릭슨은 유전적으로 타고난 천재는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선천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 스킬을 배우는 초기 단계에서는 어느 정도 이점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이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줄어들고, 결국 개인의 실력을 결정하는 데는 노력의 양과 질이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아버지가 행한 훈련으로 재능을 개발시킨 결과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음악 재능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좋은 훈련법이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말이지요. 그에게 한 것과 같은 훈련으로 재능을 키운 손위 누이의 모범도 도움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에릭슨은 수많은 사례를 들면서 어떻게 재능을 개발하고 훈련할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타고난 천재가 많다고 믿어온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전까지는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으로 갈고닦은 재능이 모두 중요하다고는 여겼습니다. 그러면서도 타고난 재능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게 설득되었습니다. 읽는 내내 떠오른 생각과 기억들 중 손열음의 글 외에 개인적 경험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보면 어린 시절에 음치였습니다. 그 사실과는 관계없이 중학교에 입학하여 맞은 첫 음악 시간에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선생님은 우리가 처음 대하는 노래를 계명으로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다 장조라면 몰라도 샤프(#)나 플랫(b)이 붙은 악보의 계명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들 입을 크게 벌리고 잘도 부르더군요.
그날 이후로 음악 시간만은 예습을 했습니다. 혼자 입 닫고 있어야 하는 부끄럼을 겪지 않으려고요. 학교 다니는 동안 예습, 복습은커녕 숙제도 잘 하지 않았는데, 음악 시간 전날이면 다음 날 부를 노래를 펼쳐놓고 한 음씩 계명을 적어 넣었습니다. 오선지의 조표(調標)에서 맨 오른쪽 플랫이 붙은 줄이 ‘파’이고 샤프이면 ‘시’라고는 알았습니다. 그걸 기준으로 음표 하나마다 “파미레도”, “시도레미” 하는 식으로 계산해서 계명을 적다보니 한밤중이 되곤 했습니다. 그렇게 예습하길 얼마나 했을까. 언젠가부터 계명을 일일이 적지 않고도 처음 보는 노래를 계명창으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는 여러 경로로 음악을 대하였습니다. 피아노 교습을 받은 적도 없지만 고교 때는 보통의 찬송가는 피아노로 칠 수 있을 만큼 노력도 했습니다. 집엔 피아노가 없었으니 교회나 학교의 풍금으로 하루에 한 번씩은 독습(獨習)하였죠. 학생 애창곡 삼백 몇 곡이라는 제목의 악보 책도 구입해서 틈틈이 기타 코드에 맞추어 노래를 불러보았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교회에서 어린이성가대를 맡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엉뚱하고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경영학과 학생이 어린이들에게 호흡법과 모음 발성법을 훈련시켜 한때나마 상당한 수준의 소리를 내게 했지요.
그렇게 지내다보니 주변 사람에게서 음치라거나 노래를 못부르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노래를 부르노라면 음감이 좋은 아마추어나 전문 성악가에게서는 음정이 불안하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그 문제까지 극복하려고 노력했으면 해내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음악과의 접촉에서 에릭슨이 말하는 (직접 가르침을 받은) 좋은 교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심적 표상(현재보다 높은 단계의 성취 수준)’을 지닐 만한 상황이 있었기에 흥미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경험에서의 심적 표상은 ‘계명으로 부를 줄 알기’, ‘피아노로 찬송가를 치기’,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훈련하기’ 등일 것입니다.
책을 읽으며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글이 생각난 이유는 에릭슨이 집중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집중의 의미를 정리해 봅니다.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 배분과 관련됩니다. 집중한다는 말은 시간을 많이 배분한다는 뜻입니다. 고교 시절 두 해 동안은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대학 입시를 한 해 앞두고 다급해지니 입시와 관련 없는 모든 일을 포기할 정도로 마음을 한데 모은 일이 집중의 예입니다. 이후에야 집중의 의미와 효과를 몸으로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집중의 다른 한 의미는 한 가지에 생각을 모아서 그 순간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게 만든 상태이지요. 앞의 의미가 시간의 양에 관한 것이라면 뒤의 것은 시간 소비의 질에 관한 것입니다.
손열음이 말한 ‘마음’의 뜻을 다시 생각합니다. 그는 그 뜻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맥락상 집중(또는 의지)이라고 추정합니다. 집중한 결과 음표 한두 개, 혹은 한 악절까지 깜빡 잊을 뻔한 순간에도 손가락이 ‘저절로’ 연주할 수 있겠지요. 머리와 귀의 도움만이 아니라 거의 무의식적으로 말이지요. 우리는 자기 분야의 일에서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서른이 채 되지 않았던 나이에 지혜로운 글을 쓴 피아니스트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나이가 들 만큼 들었는데 웬 재능 개발 이야기냐고 묻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릭슨의 말을 더 인용해야겠습니다. “모든 잠재능력은 개발할 수 있다.” “나이 들어서도 꿈을 가질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신체와 두뇌 모두 성인이 되어서보다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적응력이 뛰어나지만, 대부분의 경우 평생토록 어느 정도의 적응력을 보유한다고 합니다. 나이와 적응력의 관계는 개인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다르다고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다른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10여 년 전 라디오 방송에서 유명 발레리나와의 인터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진행자가 발레리나의 초등학교 5학년 때 일화를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엄지발톱이 빠져서 기뻤다고 했더군요. 아프지 않았나요?” “그전에 선배들에게서 들은 말이 있었어요. 연습을 굉장히 많이 하면 발톱이 빠진다고요. 실제로 발톱이 빠졌으니 내가 열심히 하긴 한 모양이라고 생각되어 만족스러웠죠.”
나이 들어서도 어린 발레리나 지망생과 같은 경험을 해보면 좋겠다고 꿈을 꾸어 봅니다. 대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감은 갖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그래도 말입니다. 평생 종사해온 분야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이 있다면 뒤늦게라도 하나쯤은 이룰 수 있겠지요.
[옮겨온 글] / 출처: 2020년 04월 28일 (화)에 받은 자유칼럼그룹의 e메일 / 필자소개; 홍승철(고려대 경영학과 졸. 엘지 화학에서 경영기획 및 혁신, 적자사업 회생활동 등을 함. 1인 기업 다온컨설팅을 창립, 회사원들 대상 강의와 중소기업 컨설팅을 하고 있음)
성(性) 중립 언어
[박희권의 호모글로벌리스]
동성 결혼은 2001년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허용됐다. 필자는 헤이그에서 열린 동성 결혼식을 참관한 적이 있다. 시청 공무원이 두 여자(?)의 결혼식을 주재하고 있었다. “마리아 아데마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마르티나 마스를 당신의 법적 동반자로 맞이하겠습니까?” “예.” 다른 여자로부터도 “예”라는 대답을 들은 그는 “나는 두 사람이 동반자임을 선언합니다”라고 선포했다.
최근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나라가 늘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공식 문서에 남편(husband)과 아내(wife)라는 용어 대신 성중립 용어인 배우자(spouse) 또는 파트너(partner)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용어도 바뀌고 있다. 예컨대 프랑스에서는 학교 서류에 ‘아버지’ ‘어머니’ 대신 ‘부모1’ ‘부모2’로 표기한다. 순서는 가정의 자율에 맡긴다. 절대다수의 가정에서 부모의 성 역할이 구분되는 현실을 무시한다는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가족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동성 부부를 부모로 둔 아이들이 따돌림을 당하지 않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바뀌었다.
성소수자를 배려하는 언어혁명이 진행 중이다. 성소수자 단체들은 이분법적 남녀 구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생물학적인 남성과 여성 외에도 성전환한 남성 또는 여성, 자신의 성정체성을 지정하지 않는 논바이너리(non-binary) 트랜스젠더나 젠더퀴어에 속하는 다양한 소수자가 존재한다는 이유에서다.
아버지, 어머니 대신 부모1, 부모2
오늘날 호주를 필두로 ‘제3의 성’을 추가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호주에서는 출생증명서와 여권에 제3의 성을 표기할 수 있다. 2016년 연방선거에서는 선거관리위원회가 남녀 이외에 ‘Mx(Middlesex・중성)’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고 통계청은 ‘기타(other)’란을 두었다. 2013년 독일은 유럽 최초로 제3의 성을 인정했다. 출생신고서에 남녀 중 하나를 기재해야 하는 규정을 공란으로 둘 수 있게 바꿨다. 아이가 성장해 자신의 성을 스스로 선택하거나 남녀라는 이분법적 성별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캐나다, 뉴질랜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몰타, 네팔, 미국(캘리포니아 뉴욕 등 일부 주)도 뒤를 이었다.
일상생활에서의 변화도 진행 중이다. 과거 미국 뉴욕 지하철과 버스에서는 ‘신사 숙녀 여러분(ladies and gentlemen)’이라는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승객 여러분(passengers)’이라는 중립적 표현으로 바뀌었다. 영국 런던 지하철에서는 ‘여러분, 안녕하세요(Hello, everyone)’로 바뀌었고 네덜란드에서는 ‘여행자 여러분(best travelers)’이 사용되고 있다. 많은 나라에서 경찰관은 ‘policeman’에서 ‘police officer’로, 신입생은 ‘freshman’에서 ‘first-year student’로 바뀌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국가(國歌) 가사까지 바뀌고 있다. 2018년 캐나다는 국가가 작곡된 지 109년 만에 가사 일부를 바꿨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를 격려하기 위한 ‘모든 그대의 아들들’을 ‘우리 모두’로 바꾼 것. 오스트리아는 ‘훌륭한 아들들’이란 표현을 ‘훌륭한 딸들과 아들들’로, ‘형제의 성가대’는 ‘기쁨의 성가대’로 바꿨다.
언어를 바꾸면 생각도 바뀐다
변경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논쟁과 국론 분열이 야기됐다. 2018년 독일에서는 국가 ‘독일의 노래’ 가사 중 ‘아버지 나라(fatherland)’를 ‘고국(homeland)’으로, ‘형제처럼’을 ‘용기있게’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됐는데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반대로 무산됐다.
영어 대명사와 관련해서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누구든지 자기 엄마를 사랑한다(Everyone loves their mother)’는 표현에 영문법 학자들은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their는 복수 대명사이므로 ‘Everyone loves his mother’가 맞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남성형 ‘his’가 남녀를 총칭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남성 대명사가 여성을 포괄한 것은 16세기 라틴어에서다. 18세기 영문법에 차용된 이래 오랫동안 사용돼왔다. 예컨대 ‘Each person must pay his taxes’라는 법규정은 여성에게도 적용됐다. 19세기 여성 참정권자들은 이를 원용해 ‘he’가 여성을 포함하므로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는 성이 불명확하거나 성을 언급하고 싶지 않을 때 ‘they’가 ‘he’나 ‘she’ 대신 자주 쓰인다.
우리 생활에서도 차별적 언어가 사용된다. 미망인, 처녀작, 집사람, 친가와 외가, 직원과 여직원, 안사람과 바깥사람 등. 오랜 가부장제의 영향일 것이다. 언어학자 에드워드 사피어의 말처럼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언어를 바꾸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바뀐다. 평등한 언어는 보다 평등하고 포용적인 사회를 여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성차별 언어를 성중립 또는 성평등 언어로 바꿔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옮겨온 글] / 출처; 한국경제신문 / 박희권(글로벌리스트・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 2020.04.28 00:16
애국가 4절
멕시코에서 태권도 대회를 지켜본 지인의 전언이다. 도복을 차려입은 현지인들이 우리나라의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는 것이었다. 경기장엔 한국 가요가 울려퍼졌고 차렷, 경례 등 경기 용어도 모두 한국어였다. 지인은 결국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초단을 따려면 태권도 유래와 한국 역사에 관한 논문을 써서 심사를 받아야 한다. 이런 기적의 중심에는 멕시코의 ‘태권도 대부’ 문대원 관장이 있다. 그는 스물일곱 살이던 1969년 태권도 불모지인 멕시코로 혼자 건너갔다. 가라테가 대세인 그곳에서 일본인 사범과 겨뤄 도장을 하나씩 접수한 뒤 일장기를 떼고 태극기를 붙였다. 그가 멕시코에 뿌린 씨앗은 태권 인구 200만의 거목으로 자랐다.
1964년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 박정희가 독일 땅을 밟았다. 대통령이 찾은 곳은 루르지방 탄광의 강당이었다. 이역만리에서 열악한 노동에 시달리던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들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광부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렸고 작업복엔 석탄가루가 묻어 있었다. 이윽고 애국가가 흘러나오자 광부와 간호사들이 함께 따라 불렀다. 강당은 이내 울음바다로 변했다. 어린 간호사들은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번엔 대한민국 심장부에서 감동적인 애국가 스토리가 등장했다.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탈북자 지성호 미래한국당 국회의원 당선인이 최근 보좌진 면접에서 애국가를 4절까지 모두 써보게 했다고 한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그는 2006년 목발을 짚은 채 ‘동토의 땅’을 탈출했다.
애국가 4절에서처럼 나라 사랑은 즐거울 때만이 아니라 괴로울 때도 똑같이 해야 한다. 유력한 애국가 작사자로 알려진 도산 안창호 선생은 애국의 이정표를 뚜렷이 제시했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백성의 질고를 어여삐 여기거든 그대가 먼저 의사가 되라. 의사까지는 못 되더라도 그대의 병부터 고쳐서 건전한 사람이 되라.” 요즘 남 탓만 하면서 ‘헬조선’이라고 나라까지 폄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에게 애국가 4절만큼은 꼭 불러보게 하고 싶다.
[옮겨온 글] / 출처; 세계일보 / 배연국(세계일보 논설위원) / 2020-04-27 22:42:26
전 세계 곤충 4분의 1 사라져… 고향이 소리를 잃고 있다
[이영완의 사이언스카페]
밤 운전 때 자동차 앞 유리에 수두룩 죽어있던 날벌레 왜 사라졌을까?
獨 과학진 "곤충 年 0.92%씩 감소"… 꽃가루받이 곤충 40% 멸종위기
소금쟁이 등 淡水 곤충 11% 늘어… 미・유럽 등 환경보호 노력의 결과
'우리 집도 아니고 / 일가 집도 아닌 집 /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 아버지의 침상(寢牀) 없는 최후 / 최후(最後)의 밤은 /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시인 이용악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라는 제목의 시에서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을 떠나 북방으로 이주했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은 유이민(流移民)을 그렸다. 시에서 풀벌레 소리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 쏟아 내는 자식들의 울음과 같은 역할을 한다.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풀벌레 소리는 늘 고향의 소리로 묘사됐다. 옛사람들은 집을 떠날 때 고향의 귀뚜라미를 가져다가 머리맡에 두고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식들이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고 있어도 마지막으로 귀에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지 벌써 75년이 지났다. 그런데 다시 사람들이 고향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고향의 소리를 이루던 풀벌레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24일 독일 통합생물다양성연구소 과학자들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지난 30년 동안 전 세계에서 곤충 약 4분의 1이 사라졌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1928~2018년 전 세계 41국 1676곳에서 진행된 166가지 곤충 조사 프로젝트에서 나온 결과를 분석해 이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과학자들은 최근 곤충의 대멸종 가능성을 두고 격론을 벌여 왔다. 발단은 이른바 '차 유리 현상(windshield phenomenon)'이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밤에 운전하고 나면 자동차 앞 유리가 날벌레 사체로 가득했는데, 요즘에는 어찌 된 일인지 유리가 깨끗하다는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2017년 네덜란드 레드바우드대 연구진은 곤충 수의 급감이 차 유리창 현상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발표했다. 지난 27년간 독일에서 곤충 개체 수가 무려 75%나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곤충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름에는 무려 82%가 감소했다.
독일 곤충 수가 급감했다고 결과가 나오고 나서 다른 곳에서도 곤충 수가 줄었다는 연구 결과가 이어졌다. 반대로 증가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행히 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된 이번 분석 결과는 곤충이 줄어들고는 있지만 당장 곤충의 대멸종이 일어날 정도는 아니라고 밝혔다. 전 세계 곤충은 매년 0.92%씩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은 절대 아니다. 사이언스 논문의 제1저자인 로엘 반 클링크 박사는 "한 세대인 30년을 따지면 24% 감소이고 75년이 지나면 50%가 줄어드는 수치"라며 "매년 차이는 몰라도 어른이 돼 어릴 적 고향으로 가면 엄청난 변화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광복되는 해에 봤던 곤충의 절반이 지금은 사라진 셈이다.
곤충이 없으면 생태계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는다. 곤충은 지구 생명체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미국의 해양생물학자인 레이철 카슨은 1962년 저서 '침묵의 봄'에서 농약 남용으로 새 먹이인 곤충이 사라지면서 봄이 와도 새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최근 북미와 유럽에서 날벌레를 주로 먹는 제비나 칼새, 종다리가 급감했다.
곤충의 천적인 거미도 직격탄을 받았다. 스위스 바젤대와 벨기에 헨트대 공동 연구진은 지난 23일 스위스 중부에서 왕거미집이 1980년대보다 140분의 1로 줄었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조사한 지역의 3분의 2에서는 아예 거미집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곤충이 사라지면 인간세계도 무너진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세계 100대 농작물 중 71종이 꽃가루받이를 벌에게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살충제 남용으로 인해 2000년대 중반부터 미국과 유럽, 호주 등지에서 꿀벌이 네 마리 중 한 마리꼴로 사라지는 이른바 '꿀벌 군집 붕괴 현상'이 벌어졌다. 최근 보고서를 보면 꿀벌과 나비 같은 꽃가루받이 곤충의 40%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아직 작은 희망은 남아 있다. 이번 조사로는 소금쟁이처럼 담수(淡水)에 사는 곤충들은 오히려 30년 사이 11%가 늘었다. 연 구진은 미국과 유럽에서 호수나 강 등 담수 지역의 환경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그곳에 사는 곤충들이 늘어났다고 추정했다. 담수가 육지 면적의 2.49%밖에 차지하지 않아 곤충 개체 수 감소 추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가능성은 제시했다.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다시 새소리가 들리는 봄날 아침과 풀벌레 소리로 가득한 가을밤을 맞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옮겨온 글] / 출처; 조선일보 / 이영완(조선일보 과학전문기자) / 2020.04.28 03:14
완전 어울림 화음과 조율의 변천사
[삶의 향기]
좋은 음악가의 첫 번째 조건은 동료의 소리에 반응하는 능력
조화 맞출 마음 없으면 ‘결격’
음악가에게 있어 청각장애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다만 충분히 훈련된 작곡가에게 후천적으로 닥친 장애라면 작곡에 있어서만큼은 별다른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자신이 그리는 음악적 상황을 정확히 오선지에 기보하는 능력과 기보된 악보를 소리로 읽는 능력을 이미 갖추었을 터이니까. 서른을 갓 넘길 때부터 청각장애를 겪기 시작한 베토벤이 남긴 수많은 작품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니 베토벤이 청각장애로 겪은 고통은 작곡가 베토벤이 아닌 연주자 베토벤에게 가해진 것이었을 게다.
음악가들에게 요구되는 청각적 능력을 흔히 ‘음감(音感)’이라 한다. 어떤 음악이든 그 음악의 조(調)나 음악적 맥락과 무관하게 모든 음의 절대적 높낮이를 인지하는 능력을 ‘절대음감’이라 한다. 이를 음악적 재능과 동일시하는 이들도 적잖지만, 사실 이는 음악가에게 딱히 필요한 요건은 아니다. 심지어 기보된 음과 실제로 울리는 음이 서로 다른 트럼펫・호른・클라리넷 등 이조(移調)악기 연주에는 오히려 장해요인이 되기도 한다. 반면 음 상호 간의 관계를 파악하여 상대적 높낮이를 인지하는 능력을 ‘상대음감’이라 한다. 음을 인지하는 방법이야 어찌 됐든 연주자는 자신이 연주하는 음의 역할에 따라 소리의 뉘앙스, 세기, 심지어 그 높이까지도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서로 다른 음높이를 지닌 음들이 함께 어울려 내는 소리를 화음이라 한다. 그 중에서도 화음을 이루는 세 음(예를 들어 도・미・솔)의 진동비가 4:5:6일 때 우리는 그 울림을 완벽히 어울린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 완전한 어울림 화음은 음악가들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 현상이고 자연이 우리에게 준 근사한 선물이다. 이 세상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소리는 진동의 복합체로서 여러 진동이 정수비로 중첩된 고른음과 불규칙한 비율로 중첩된 소음으로 구분된다. 그러니까 이 완전한 어울림 화음은 이미 존재하는 온전한 하나의 울림을 여러개의 음으로, 즉 정수비로 쌓아 재구현한 것에 다름없다.
음악사적으로 살펴볼 때 여러 개의 음이 결합하여 조화로운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은 생각과는 달리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기원전 피타고라스는 2:3(5도)의 진동비로, 동아시아에서는 2:3과 4:3(4도)의 진동비로 음을 맞췄다(三分損益法). 이 두 방법 공히 완벽한 비율(4:5:6)을 지닌 화음을 만들지 못하였고, 2:3과 4:5(3도)를 혼용한 순정률에서의 완전 어울림 화음은 그 수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후 16세기에 등장한 가온음율은 더는 2:3의 비율에 집착하지 않고 4:5 비율로 구한 음과의 오차를 여러 음 사이에 분산시킴으로써 사용 가능한 화음의 수를 확대하였다. 음들의 거리를 모두 같이 함으로써 다소 불만족스러운 울림을 감수하고 모든 화음의 사용이 가능하도록 한 오늘날의 평균율은 조율의 최종 타협점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조율에 있어 완벽한 울림 그 자체를 지키는 것과 사용 가능한 화음의 수를 늘리는 것은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었다. 반면 관현악이나 무반주 합창은 ‘듣기’와 ‘맞추기’를 통해 처음부터 모든 화음을 완벽한 울림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음의 높이를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는지가, 즉 악기의 구조적 차이가 이러한 차이를 만들었다.
따라서 평균율로 조율된 건반악기에 있어서의 같은 음(다른 이름 한 소리)인 ‘올림 레’와 ‘내림 미’가 바이올린 연주자에게는 엄연히 다른 음이다. 심지어 같은 ‘솔’이라 해도 ‘도・미・솔’에서의 ‘솔’과 ‘내림 미・솔・내림 시’에서의 ‘솔’은 그 높이가 미세하게 다르다. 그렇게 연주해야 한다고 시키지 않아도 그들의 귀는 다른 이들이 내는 음과 정확히 어울리는 소리를 원하고 그들의 손은 부지불식간에 그 음을 찾아 짚는다. 그래서 관현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현악기의 지판에는 기타와는 달리 음높이를 고정하는 프렛이 없다. 사실 대부분의 음악가는 이에 대하여 별다른 지식이나 관심 없이 무대에 오른다. 다만 자신의 소리를 고집하지 않고 매 순간 각 음의 상호관계에 따라 음높이를 미세하게 조절하며 연주한다. 무반주 합창곡의 정결한 화음, 현악합주의 온전히 하나 된 화음, 관현악의 장엄한 울림이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음악가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첫째 조건은 동료의 소리를 듣고 그에 반응하는 능력이다.
처음에 썼듯이 음악가에게 있어 청각장애는 치명적 결함이다. 타인의 소리에 맞추어 반응할 도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듣되 그에 조화롭게 맞출 능력이나 마음가짐이 없다면 결함이 아니라 아예 ‘결격’이다. 음악가로서, 아니 한 자연인으로서….
[옮겨온 글] / 출처: 중앙일보 / 전상직(서울대 음대 교수) / 2020.04.28 00:15
"Repin Stump" - Egor Zaitse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