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29일 (수) 촬영.
보령 성주사지,保寧 聖住寺址 / 사적 307호
성주사는 백제 시대에 오합사(烏合寺)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절로 전사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호국사찰이었다.
백제 멸망 후 폐허가 되었다가 통일 신라 시대 당나라에서 선종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무염대사(無染大師, 801~888)가
머무르면서(847~?) 다시 크게 일으켰고 신라 문성왕이 성주사(聖住寺)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통일 신라 말기에 유행한 선종(禪宗)은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기만 하면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불교 종파이다. 그리하여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아 크게 유행하였고, 선종 불교의 큰 중심지 절이 전국에 9개가
세워졌는데, 이를 9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 한다. 이 전국 9산선문 중의 하나가 성주산문이며 그 중심지가 성주사이다.
특히 성주산문은 9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고 많은 승려를 배출한 최대의 산문이었으며,
무염대사는 당시 최고의 선종 승려였다.
성주사는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 말 이후 폐사되었고, 지금은 그 터와 많은 유물이 남아 있어
옛 성주사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발굴 조사 결과 중문 - 석등 - 5층석탑 - 금당의 불대좌 - 강당으로 이어지는 1탑 1금당
가람배치에, 오른쪽은 삼천불전지, 왼쪽은 다른 불전지의 평면 구성을 하고 있다.
이 터에는 국보 제8호인 대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大郎慧和尙 白月菩光塔碑)를 비롯하여 통일 신라 시대 석탑 양식을
충실히 반영한 1개의 5층 석탑과 3개의 3층 석탑이 남아 있다.
성주사지 석등과 오층석탑
성주사지 석등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통일 신라 말기에 세운 석등이다.
지붕돌(옥개석)에 비해 등불을 두는 화사석과 받침기둥(간석)이 가늘게 만들어졌으며,
팔각형 지붕돌 위의 상륜부가 파손되었다. 높이는 220cm이고 재료는 화강암이며, 파괴되었던 것을 근래 수습하였다.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 / 보 물.
화강암으로 된 이 석탑은 성주사의 불탑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2중 기단 위에 세운 5층 석탑으로 전체 높이는 634cm이다.
기단부와 옥개석 탑신석이 완만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져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경쾌한 모습을 이루고 있다.
1층 몸돌에 사리공이 있으며 기단부와 1층 몸돌 사이에 괴임돌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통일 신라 시대의 전형적 석탑 양식은 2중 기단 위에 3층 석탑을 세우는 것인데, 이 석탑은 2중 기단 위에 5층 석탑이 올려져 있다.
이는 이곳이 옛 백제의 영역이었으므로 백제 탑과 신라 탑의 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보거나,
이 시기에 나타난 다양한 탑 양식 가운데 하나로 보기도 한다. 현재는 상륜부가 없어진 상태이다. - 현지 설명문 -
금당터에서 본 5층 석탑.
금당터 불대좌에서 본 5층 석탑.
금당 터.
금당터로 올라가는 전면 계단 소맷돌의 사자상.
성주사지 석계단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성주사의 금당에 오르는 돌계단이다.
이 계단 양쪽에는 사자상을 조각하여 세워 놓았었는데 그 조각 수법이 뛰어났다.
그러나 1986년 도난당하고, 현재 것은 사진을 기초로 복원한 것이다.
금당터 한가운데에 있는 불대좌
불대좌 뒤로 3기의 탑이 있습니다. 3기의 탑은 모두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좌측부터 <성주사지 서 삼층 석탑>, <성주사지 중앙 삼층 석탑>, <성주사지 동 삼층 석탑>.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 석탑 / 보 물.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 석탑 / 보 물.
성주사지 금당지 뒤의 3기의 석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2중 기단 위에 만들어진 3층 석탑으로 면석(面石)과 탑신석(塔身石)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지붕돌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새겨져 있는 등, 통일신라 말기(9c)의 전형적인 3층 석탑 양식을 띠고 있다. 화강암으로 되었으며, 높이는 443cm이다.
이 탑은 지붕돌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는 불교 행사 때 금동판이나 기타 장식품 등을 매달아 탑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현재 상륜부가 없어졌다. 이 탑은 승탑(부도)으로 추정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정광, 가섭, 약사여래 사리탑 중의 하나이며, 발굴 조사 결과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 현지 설명문 -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 석탑 / 보 물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 석탑 / 보 물
성주사지 금당지 뒤의 3기의 석탑 중 가운데에 있는 탑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국가를 상징하려고 초기에는 튼튼하고 높은 2중 기단을 가진 거대한 3층 석탑을 만들었는데,
통일 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3층 석탑의 규모가 작아진다.
이 석탑은 규모만 축소되었을 뿐 형식은 2중 기단 위에 3층 석탑을 세우는 통일 신라 말기의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재료는 반려암이며, 높이가 410cm이고, 상륜부가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으며, 날카로운 윤곽의 지붕돌이 특징이다.
이 탑은 승탑(부도)으로 추정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정광, 가섭, 약사여래 사리탑 중의 하나이며, 발굴 조사 결과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 현지 설명문 -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 석탑 / 보 물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 석탑 / 보 물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 석탑은 금당 터 뒤에 있는 3개의 석탑 중 동쪽에 있는 탑이다.
이 탑은 승탑으로 추정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에 적힌 바에 따라 정광, 가섭, 약사여래 사리탑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
석탑은 중앙 삼층 석탑을 중심으로 양옆에 동 삼층 석탑과 서 삼층 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국내에는 이와 같은 가람 배치는 이례적인 것인데 발굴 조사 결과, 금당 앞에 오층 석탑을 세워 1탑 1금당 형식의 가람 배치를 조성한 후
뒤에 석탑 3개를 다른 곳에서 옮겨 와 추가로 배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탑은 2중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으로 면석과 몸돌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새겨져 있는 등
통일 신라 말기(9세기)의 전형적인 3층 석탑 양식을 띠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문 그림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고리를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이는 몸돌 안에 있는 사리공에 부처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 탑은 상륜부는 없지만 균형 잡힌 비례와 체감, 우수한 조형성을 갖추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일제 강점기부터 옆에 있는 탑은 관리 대상 문화재로 등록되었고 이어 보물로 지정되어 관리되었던 것과 달리
이 탑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지 않았다.
해방 후에도 문화재 지정에 누락되었다가 1973년에 충남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19년에는 보물로 지정되었다.
좌측부터 <성주사지 서 삼층 석탑>, <성주사지 중앙 삼층 석탑>, <성주사지 동 삼층 석탑>.
성주사지 석불입상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성주사지 내)
상주사지 석불입상은 고려 말과 조선 초 사이에 세워진 민불(民佛)이다.
본래는 절 주변에 있었으나 어느 시기인가 이곳으로 옮겨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얼굴은 타원형인데, 코와 오른쪽 귀는 심하게 풍화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다.
남아있는 옷의 주름으로 보아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들어 배에 대고 있는 형태이다.
손의 모양은 없어졌고, 발은 간략하게 선으로만 표현하였다. 입고 있는 법의는 양어깨를 모두 덮고 발까지 내려와 있다. - 현지 설명문 -
탑의 뒤편에서 본 모습. 세 개의 삼층 석탑과 1개의 5층 석탑이 다 보입니다.
좌로부터 동 삼층 석탑, 중앙 삼층석탑, 서 삼층 석탑입니다.
성주사지터에서 발견된 석물들.
성주사 비, 聖住寺 碑
통일 신라 하대 한림랑 김립지(金立之)가 지은 성주사 비는 사찰의 내력을 기록한 사비(寺碑)로써 상주사의 연혁과 규모 등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조각조각 파손된 비 편이 1960년대 이후 차례로 발견되어
현재는 10여 조각이 수습되었으며 동국대 박물관 등에 보존되어 있다.
비석의 머릿돌과 받침돌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신라인의 정교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 현지 설명문 -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大郎慧和尙塔碑 비각.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大郎慧和尙塔碑 / 국 보
통일 신라 말기 성주사에 머무르면서 선문9산(禪門九山) 중 성주산문을 일으킨 무염대사(無染大師, 801~888)를 기리기 위해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에 따라 지은 비석으로, 10세기 초에 세워졌다.
이 비석에는 5,120여 자의 긴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최치원의 화려한 문장을 최인연(崔仁渷)이 해서체로 쓴 것이다.
내용은 무염대사의 성장과 출가, 중국에 유학하여 공부하는 과정, 귀국하여 성주사를 일으키고 불법을 전하는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 선종사(禪宗史)와 당시의 신분제도 연구 등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남포오석(藍浦烏石)이 재료인 이 비석은 1천여 년의 풍상(風霜)을 견디며 고스란히 남아 있어 남포오석의 뛰어난 품질을 보여준다.
이 비는 최치원의 명 문장과 완벽한 보존 상태, 뛰어난 조각술 그리고 웅장한 크기 등이 어우러져
통일 신라 말기의 우리나라 고승 탑비들 중에서 최고의 비로 인정받고 있다. - 현지 설명문 -
5120여 자의 긴 비문이 새겨 있는 비의 전면,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는 최치원의 글을 새긴 사산비명 중 유일하게 파손되지 않은 비입니다.
귀부의 좌측면입니다.
파손되었네요,
오른쪽은 심하게 파손되었습니다. 귀부가 파손된 정도를 볼 때 비신이 멀쩡하다는 것이 기적 같습니다.
비의 뒷면.
사산비명(四山碑銘)
남북국시대 통일 신라 학자 최치원이 지은 비문 가운데 자료적 가치가 높은 4편을 모아 엮은 금석문집으로 아래와 같습니다.
하동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 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보령 만수산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大郎慧和尙塔碑), 국 보
문경 희양산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국 보
경주 초월산의 숭복사지비(崇福寺址碑)
이 중 진감선사비와 승복사지비는 최치원이 직접 쓴 글씨이고,
대낭혜화상탑비는 최치원의 종제(從第)인 최인연이,지증대사비는 분황사 승려 혜강(慧江)이 썼습니다. - 한국민족대백과사전 -
성주사지 쉼터
첫댓글 성주사 탑이
많네요
덕분에 구경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