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름의 성격과 횡폭性을 띄게 되는 武力과의 관계
규경덕추천 0조회 923.08.18 07:38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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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름의 성격과 횡폭性을 띄게 되는 武力과의 관계 칼로 물을 끊을수 없다.武의 行에 빌미를 주는 것은 물이 아닌 걸리적 (일을 함에 있어서 장애를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요소) 거리는 것들이다。太初以來로 武行이다。그만큼 세상은 우여곡절의 장애가 많다。 결단내는 과격한 힘을 加하지 않으면 進行의 방해를 받게 되고 도리혀 먹이體로 卞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大多數 깨인 個體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격과 방어를 겸비한 성격을 띄게 되어 그 겉모습 또한 성격을 대변하는 모양을 띄게 되거나 유인작전을 쓰기 위하여 독수리가 사나운 발톱을 털 속에 감추듯 그 毒性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식물이나 버섯 종류에 있어서 화려한 것일수록 독성이 강하다고 한다. 뱀 중에도 독이 많다 하는 살모사 칠점사 종류는 아주 귀공자 타입이다. 이런 것으로 생각해 볼적에 心에 가까히 와 닿는 것은 또 그렇게 해서 나타나 뵈이는 것은 武의 강한 결단력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강한 武力行이라도 물(水)을 베일수 없다는 뜻이다. 즉 흐름은 베일수 없다는 뜻이다。혹자가 정신의 혼란을 일으킬까 해서 다시 거듭 말하지만 太初는 理(엮음의 흐름 굴레 테)이니 時的인 흐름이 직선으로 뻗는다고 생각지 말라°따라서 太初란 理얽음으로써 아득하게 왔다는 생각을 버릴 것이다。말이 태초이지 理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게 없다.왜냐? 달리 무엇을 추구타 보면 정신의 혼돈을 가져오는 미궁(迷宮)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따라서 그 없고 삿된 끝 진리의 돌고 도는 테이다。凝集된 物事의 理(理治의 果斷한 行步)가 武行 관점이란 뜻으로 對決具圖에서 힘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한쪽이 승리하면 帝王한다는 힘의 우월논리 양육강식을 말한다。 도도히 흐르는 물처럼 역사의 궁글름(흐름)은 막을 수 없어 영원불변은 없는 것이다. 그 힘을 쓰던 주체 또한 그러하니 그 가졌던 힘의 자랑도 한때이고 한때의 승리이고 다른 理想의 主體로 그 힘은 옮아가 그 理想의 힘에게 앞서의 主體는 먹히게 된다는 것이다。그러나 힘이란 자신의 主體는 그 성격은 영원하다。 또한 도도히 흐르는 물은 유연한 것 같아도 그 단단한 반석과 석벽을 갉아먹어 언젠가는 소멸되게 하니 실제의 임시 와 닿는 (눈으로 보는) 폭력적인 강함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다. 一言해서 흐름의 축적 역사의 궁글름을 짧은 관점의 物理로썬 당해내지 못한다는 논리이다. 글을 쓰다보니 이치를 조리있게 규합하지 못해 말은 그럴듯 하나 내용은 말이 되지 않는 이상한 모순이 발생한 것 같다。잘 관찰해 볼 것이다物과 理가 時의 形態 얽음 役事에 의함인데 말이 잘못된 것 아닌가? 하지만 때로는 武의 성격 또다른 때로는 물의 성격도 띌 수 있다는 것으로서°말이。恒常이지 그것이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다양한 변질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즐거움을 보이고 느낄려고 먹이되는걸 (스스로 원해서 먹이되는걸) 힘이 없어 먹이된다고 할순 없잖은가? 또 누가 알겠는가? 남에 뱃속에 들어가 남에 배를 터트릴 수작을 부릴는지….그렇게 해서 제가 도리혀 이용해 먹은 걸로 되는 것인줄 누가 알겠는가? ◎ 흐름이 空間의 變形하는 모습을 갖고 그 스스로 있음을 안다。사계절의 變化는 접어두더라도 世月이 흐르면 아무리 굳건한 石像일지라도 깎이고 파여서 卞形한다。다만 그렇게 되는 作用이 더딜 뿐이다. 흐름을 벗어나는게 탈파의 일편일지도 모를진데 不卞停止되야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이 된다 할진데 시에 의한 공간은 정지치 않으니 時로 인한 空間이 形成된 以上 不變은 없으니 진정코 고 의 벗어남은 없는 것이다。공간은 시간 差가 어지럽게 얽혀 뭉친 더딘 흐름。그 시간의 행태가 이렇다 한 것을 보여준 것。저- 雲石이 나타났다 사라지듯 無現形容의 흐름으로 다시 풀리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가르침이나 어떤 이들의 功德을 永世토록 잊지 않을려고 石刻 해두지만 그것 또한 흐르는 시간에다 표시한 것이라 그 석각도 시간의 일부이니 얼마 못가 풀려서 잊게 될 것이다。혹 몇억만년전 있었다는 표현을 하는 것 화석같이 된다면 불변한다 할지 모르지만 그 또한 언젠가는 풀려 사라질 것이니 그 진리라 하는 道를 영원히 붙잡아 둘수 없는 것이다. 퇴색의 꼬리가 그만큼 길어질수록 뭉친 흐름의 풀림이 더딜뿐 언젠가는 그 풀리리니 그렇게 되면 그가 르침의 道는 一期 의 단막을 이뤄 저만큼 흘러돌 것이다。이것이 無爲有動의 흐름속에 있지 벗어난건 아니다 로 생각이 기울어져 있을 한때의 생각이지만 무위유동 흐름을 벗어난 것이라 생각을 그리로 기울기면 저쪽으로 넘어가는 것을 이쪽으로 당겨 넘긴거와 같아 벗어난 것이 될 것이니 따라서 차차로 그에 의한 이 모든 것이 벗어난 것이라로 아주 생각을 확 재키듯 기울긴다면 온갖 時象행태의 공간은 벗어난 相이 되는 것이다. 탈파나 醒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니 이래로 저래도 입장을 달리하는 것은 같은尺 같은꼴 대등한 位致가 되어 一身으로 꽈베기 틀 듯 접하고 있으면 空이며 空相인 것이다. ◎ 시간의 모습은 앞서와 같이 공간의 변화로 표시하나 다음은 照明의 角度를 약간 달리한 內用이다。地球가 좀 기울어(크게는 삼십도 정도 적게는 십오도 정도 양극의 축점도 일정치 않다 한다。이는 왜일까? 이것은 巨大한 回이다。이는 우주축의 인력작용이 일정치 않음으로서다。 나를 中심한다면 大宇宙가回이고 大宇宙의 어느 곳을 중심한다면 나와 내 있는 곳이 이며 전체 우주 象이 一家이라 집은 가만히 있는 것이라 한다면 기 따로 活動하는 回象들인 것이다. 이를테면 우주 어느 한곳이 중심부분이라 한다면 저 멀게만 보이는 북극星이 鎚하여 돌고 북극성을 軸으로 한다면 길고 긴 줄 끝에 메어달린 것 같은 恒星 우리에 영향을 주는 태양이 鎚하여 돌고、태양을 축으로 한 여러 行星들이 추하여 돈다.이중에 우리가 사는 지구도 있다 할 것이다(지구가 양극을 축삼아 自轉하는 것은、태양의 영향 뿐만 아니라、저 멀리 있는 북극성의 인력작용의 영향에도 있다 할 것이다。지구공전 또한 북극성의 영향으로 인해 기울기가 같지 않아 축점이 변하게 되고 側度의 加減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順次的인 논리이나 모든걸 나를 중심하여 回의 관점을 논다면 理는 顚倒되는 것이니 심각한 어지러움이 발생한다 할 것이나 이것 또한 질서는 있어 마치 가는 실로 방적하여 옷감 원단을 짠 것 같고 용광로에 쇳물을 녹여 찌꺼기는 걸러내고 매끈하고 얇은 강철판을 만든거와와 같다 할 것이니…。생각을 한번 정리한다면 내 一身이 기어(톱니바퀴)라 한다면 내 주위엔 活用할 수 있는 무형에 起亞(機牙)가 많아 돌아도 어느 지방으로 갈수도 있고 가지 않을수도 있고 한 것이며 이와같은 논리에 의거해서 지구를 축으로 하여 태양이 鎚하여 돌고 그 태양을 軸으로 하여 북극성이 돌고 그 북극성을 축으로 하여 우주 전체가 무위유동으로 돈다 한다면 무질서한 혼돈 같아도 꽉찬 무우속 같이 질서를 유지하여 도는 것이다. 또한 宇宙一家라서 전체는 가만히 있는 것이라 한다면 제각기 활동하는 것은 제각기 도는 것이며 서로 침범해 연관작용이 있다 한다면 서로 섞여 도는 것이다로 하면 될 것이다。또 지구가 磁氣를 일으키는 것은 회전함으로 인해서 양극이 生成 발전 축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들을 한다。以上의 어지러운 말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要旨가 아니고 잡다한 客說일 뿐이고… 다시 지구가 좀 기울어 태양을 타원형으로 돌아 사시 사철이 생긴다. 이 말씀은 철학이 아니다。철학이 학교에서 배운 단순한 공식처럼 안다면 싱겁기 짝이 없다 할 것이다. 기본적인 생활상식도 물론 대의적인 면으론 철학이라 할는지 모르나 일상생활에 쓰이는 상식일뿐 심도있는 철학을 구상한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그럼 철학은 뭔가? 같은 것을 대하더라도 대하는 각도나 차원을 좀 달리해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앞의 사실적인 관점에서 차원을 좀 사시적으로 놓아 낮이 긴 것을 여름이라 하고 밤이 긴 것을 겨울이라 한다.그러함이 생기는 이유는 낮에 해가 천천히 가고 밤에 지구가 빨리 돌 때를 여름이라고 하고 낮에 해가 빨리 가고 밤에 지구가 천천히 돌 때를 겨울이라 한다。이렇게 거론한다면 이 논리는 철학에 가깝다 할 것이다.또 실제로 그런지 누가 아는가? 과학이 뭐 말라 비틀어진 것이 과학인가? ※水도 그 이치는 온도 차이에 따라 그 부피를 달리하고, 그 미치는 여러 영향에 따라 그 內在하고 있는 여러 意味(一例 生命力 등)에 差等이 있다 하니 사람의 因識에도 문제가 있다 할 것이다. 귀신이 사람이 그렇게 느껴 알고 생각하게끔 사람 萬類 등을 놀리는 것이겠지…。믿지 못할게 과학이라 한다면 손에 확실하게 줘어줘도 그를 머리에선 부정할 것이니 이러한 논리가 철학에 가깝다 할 것이다. 혹 이 생각하길 이것은 철학이 아니라 비뚤어진 심사를 두둔하는 괴팍한 성격을 부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글이라 할 것이나 이런 점에서 또한 이 글의 妙味가 있다 할 것이다. 以上과 같이 서론을 지루하게 꺼내어 본론으로 들어가는데 서론과 본론의 흐름이 뒤틀리는 면도 있을 때 철학의 묘미는 다해간다 할 이다。문맥이 막히고 이것을 들었는데 저기 걸어가고 동문에 서답이 철학이다 하면 철학이 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지금 필자가 말하려는 요지는 딴데 있다。서를 칠려면 동을 먼저 요란케 한다는 병법논리가 아니라 감지할 수 없는 엉뚱한데 요지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시간을 본다. 흐름을 본다. 어떻게 생겼는지 느낄 수 있다. 혹이 참 건방지다거나 고개를 갸웃거는지 모르지만 시간은 음과 양이다. 이렇게 간단한 말을 왜 모른다 할 것인가? 할 것이다. 시간은 어떻게 생겼는가? 다른 感은 다 접어두더라도 말씀으로 이론을 전개하여 形容을 일궈보자. 시간은 머리와 꼬리가 있다. 또 암수가 있다. 흡사 山 달팽이가 交接할 때 암수 한쌍이 맞물고 동그랗게 回 하고 있는 形과 같다. 시간은 흐름으로 움직인다. 즉 생명이 있다. 시간의 능력과 조화는 不測이고 무량이다。음과 양은 사각형을 斜線으로 그어 가르듯 반비례한다. 넓은 곳을 머리 좁은 곳을 꼬리라 한다(바꾸어 말해도 상관없다) 萬類形의 種子는 時間의 源形음(陰刻陽刻 하듯 해서) 維持하니 음양 合成한 원만함으로부터움직여 陰이나 陽의 形으로 짓데 처음 發芽 됨으로부터 점점 자라나 그 形을 갖추는 모습을 볼제 그 모양꼴은 같다(즉, 우주의 생김과 활동의 축소판을 그려 보인다는 뜻이다) (물론 여러 형으로 분파되어선 구체적인 내용상의 形에선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씨앗이 발아되면 열매 母胎에서 영향을 얻어 머리 잎 뿌리 形을 지으면서 점차로 자라 그 자랄 터에다 뿌리를 내린다.고환에서 생성되는 정자 또한 그러하여 난자에 들어가 배양되어 점차로 음과 양 形을 짓는다. 이러한 진행과 그 짓는 모양이 모두가 흐름을 축소한 여러 흐름의 축소판 모습이니 이 空의 形成에서 大小의 공간 또는 변화의 공간을 초월한 흐름시간의 능력과 조화는 무량이라 그 밭을 따라 만가지종류의 形을 짓는 것이다. 그 子質인 具成하는 原素性分이나 生物學的 反應이나 物理的 反應이나 化學的 反應은 알수 없으나 그또한 時를 뜻하는 생명의 능력 조화임에는 틀림없다。이러한 空形을 짓는다 하는 것이 靈長이라 하는 인간의 두뇌에서 뭔가 그렇게 感知해서 그렇게 그릴 뿐이지 其實은 삼라만류 形이 거의다 싶이 할 것이니 조그만 깨알 담배씨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정자 같은 속이라도 우주가 들었으니 어떠한 영상도 다그려져있다 할 것이다.이것이 그런게 아니라 자라가면서 바람과 햇빛이 싹을 어루만지듯 그려(圖)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씨앗밖에 있던 여러 形의 氣運이 스며들 듯 해서 그形을 완전하게 만드는지도 또한 알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방식을 취하여 짓데 어떤 物이 될 것이라면 그 아이가 그 흐름이 어느 흐름에 탈바꿈하듯해서 벗어 나왔는가도 다 기억장치에 기억돼 있고 다 그려져 있다 할 것이다。그 흐름이 억겁으로 돌아왔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자라면서 세상 여러 영향을 주는 짓거리에 물이 들면서 이 세상방식으로 표현할 단계에 이르러선 그 전생 흐름의 기억된 象은 모두다 사라지는 것인지도 알수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밭이란? 본래 다함이 없다。구분할게 없다 하는 無極인 것이다(무극은 現住位致空이다) 즉 음양 合ㅡ한 태극을 蘇生케 하는 본바탕은 이 무극이란 것이다。무극을 宮이라 한다。흐름이 생성되는 집 흐름이 사는 집인 것이다. 집은 그 흐름에 맞아야 한다。수많은 흐름은 그에 마땅한 흐름집을 찾아 헤메이고 있는지도 모른다。그 집(家)은 진공이던 허공이던 또는 공이 아니던가 흐름의 집인 것이다.이로써 만류와 만류는 시간이 空化하여 나타난 것인 것이다. 우주는 在乎手하고 萬化는 生乎身이라。즉 머리와 뿌리는 모두가 같기 때문에 공간의 大小와 공간의 변화를 초월하는 것이다。이를 초월한다는 것은 흐름시간 생명의 거리감과 속도감을 초월한다는 뜻이니 時는 恒時고 空은 그 空인 것이다。다만 어느 것과 맞춰 초월해 무엇을 한다는 길(道)이나 다스림 지음(術=作이 아닌가 한다。그런데 術도 立案돼 있음)을 차원의 界를 달리 지어서 풀기 어렵게 되어 있을 뿐인 것이다. 만약상 만류가 다른 종류와의 언어소통을 누구나 다 할수 있다면(이것은 共存을 위한 行爲라는 별개의 차원이다) 시간의 질서는 어긋나 무너지고 또 그 시간인 생명은 존재가치를 잃어 따라서 空도 있을 수 없게 된다 할 것이다。(※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 시간의 蓄積造化는 저ㅡ 공간의 形으로 나타난다. 時線을 확대하여 본다면 있다는 것은 들지 않은 것이 없어 설령 허깨비라 지칭하는 귀신도 幻刻되어 활동하고 있어 보이리니 神이 곧 흐름이기 때문이다。靈이란 것도 볼 것이고 魂이란 것도 볼 것이고 현실감각으로 측량치 못하는 음성과 色、味도 느낄 것이다。지구의 사계절 즉 더울 적엔 여름을 머리라 하고 겨울을 꼬리라 하고 추울 적엔 겨울을 머리 여름을 꼬리라 하여 흐름을 形容해서 그려 본다 할 것이다. 모든 보이지 않는 흐름에도 환각되어 여러 가지 삼라형태가 거울속의 비침과 같이 실제로 존재한다 할 것이니 그러므로 무릉도원 같은 얘기를 한낱 이상하게 생각할게 없고 신선 바둑두는 것을 구경하다 무진장한 세월이 흘렀다는 얘기를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할게 없는 것이다. 다만 이런 것이 각 사람마다 각양각색으로 와 닿기 때문에 그 느끼는 形의 一貫性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할 것인 것이다。그는 왜인가? 사람마다 머리에 기억된 영상 같은 필름의 상이 틀림으로서니라。그는 또 왜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니 삶의 방식이 다르고 생활여건 주위환경 집안의 내력 배경 등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그 겪은 기억 영상필름도 달리지게 된다.그래서 그를 뜻하는 영상의 그림도 있는걸 갖고 적용함으로 그에 적당한걸 자기 위주로 그리기 때문이다.이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흐르는 에워싼 또는 속에서 활동하는 氣가 틀림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할 것이다.소위 기분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설령 그 흐름이란 걸 몽매간의 영상으로 그릴진데 하더라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엉뚱한 것이 나타났다 한다면 생시의 실제적인 상황을 투시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는 합성시켜 만드는 영상의 흐름을 그 재질(材質)이 될 수 있는 각 기억의 영상조각을 혼돈 속에 적용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할 것이니 흡사 몽타쥬 사진을 만들 때 찍어다 붙이는 조각상들을 합성시켰으나 잘못되어 균형감각을 잃은 것과 같다 할 것이다。생시에 알 수 없고 겪지 않았던 것도 몽매엔 많이 등장된다. ◎※ 이것이 마약 같은 글인가? 쓰고 싶지 않다가도 다시 한번 훑어보면 또 쓰고 싶은 것이 이상한 유혹의 손짓에 빠진 것 같다. 수차 거론했고 번복되는 감(感)이 든다 하지만 또 다른 뜻을 달고 있으니 필을 아니 놀릴 수 없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본문(木文)=완전(完全)한 수(數)는 무수입문개념(無數人門槪念)이다. ※ 달리 논함과 모순의 생각흐름이니 완결짓는 정상(산마루)은 꿈이지 무수입문개념이 아니라했음) 그 수에 의한 만류(萬類) 또한 무수입문관념이다。다만 미지수(未知數)、불안전(不完全)한 수는 무수입문개념이 아니다。따라서 그에 의한 모든 미지계(未知界)와 불완전한 것은 그 뜻과 명분의 지향(指向)하는 것이 있더라도 무수개념(無數槪念)에 들지 못하여 아무러크소니가 아니다. 일례로 시간(時間)의 흐름과 그 속의 영혼、 신(神) 등등 理想적인 주의 등등이 그것이라 할 것이다. 만류(萬類)는 다양하니 삼라(森羅)이다.나무와 물과 새와 사람과 풀과 여러 미물 벌레 등이라 해도 좋다. 무수(無數)에 들지 못하여 원 많고 고통하는 무리들이 일체의 원원(寃願)과 이상 · 사상에 의한 것、삼라(森羅)에 의거하여 갖은 원풀이 행(行)의 짓거리를 삼라의 행(行)으로 표현하니 실은 그것이 삼라(森羅) 자신의 행(行)이 아니라 그들의 행(行)으로써 삼라를 탈로 이용(利用)하는 착각된 행(行)인 것이다。그러면 삼라、 저의 행(行)은 뭔가? 그는 이리저리 원을 풀어제킴을 들어 주는, 제공해 주는 무수개념의 아무러크소니 행(行)이니 탈행(脫行)을 경시할 게 아닌 것이다。저들이 껍질의 탈을 뒤집어 행(行)으로 인해 원을 풀고 무수에 드는 것이니 내 벗은 쭉정이 껍질이라고 가볍게 여길 게 아니라 탈파에 참맛을 붙여놓고 그 원풀이 한 맛이 이렇다 함을 제삼라(諸森羅)에게 보시하듯 보여야 할 것이다。저 깨어난(醒) 아름다운 참외는 맛이 있다。저 천수(天壽)를 누리고 탈파하신 분의 거룩한 시신을 실은 꽃상여의 운구행렬(運柩行列)은 바라보고 지나가는 행인에게도 유덕(裕德)한 기운(氣運)을 보시하고 스며들게 하여 깨트림의 참맛을 얻게하니 그 아니 성자(醒者)라 아니하리. ◎ 말세(末世)는 세상이 없어져서 말세가 아니다. 만류(萬類)의 감도(感度)가 고도(高度)로 발달(發達)돼 간괴함을 이룰 때 각자 자기 혼란을 일으켜 스스로 무너져 없어지는 것이 곧 세상(世上)에서 끝장내버려지는 것이니(世上 이제 그만두세 ※ 말으세=末於世)를 줄인 뜻의 말씀이 말세(末世)인 것이다. 지나친 맑음은 답답함을 일으키고 지나친 슬기로움은 착란을 일으킨다。무르익음은 곧 쇠퇴한다는 뜻이요´과열은 식어짐의 시발이란 것이다。열매가 떨어지는 것은 그 계(界)를 뜬다는 것이요´ 무엇이든 얻었든 잃었든 다른 데로 감을 가르킨다。 생명(生命)과 아무러크소니는 맞수(맞먹어)라 버금과 차등의 논리가 없다。또 생명(生命)과 무극(無極)은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니라 어떠한 시회류(時回流)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없다는 구(球 : 구심점)이나 위(圍)를 동반하니 마치 촛불을 밝히면 어둠이 있는 것과 같다.그러므로 그 밭이 어디 있는가의 유무(有無)를 의심치 말고 그 밭(田)이 뭔가를 의심할 게 없다。씨앗이 있다면 밭이 어딘가가 있다는 뜻이요、 자(子)가 있다면 모(母)가 있다는 뜻이다。씨앗의 자람과 성숙함은 그 형(形)이 만류(萬類) 시생명(時生命)의 형(形)이며 부(父)이며 부(夫)이나니 따로이 그 있음을 의심할 게 없나니라.흐름의 시류(時流) 생명(生命)은 능력과 조화가 무궁이라 그 여러 가지 만류형을 짓나니라.흐름의 능력은 무량이라 굳이 차례나 질서 없이도 이룩하나니라。왜냐하면 아무렇게나 흘러 뒤엉키는듯 해도 그것이 곧 흐름의 차례이며 률(律)이기 때문에 누가 이래라 저래라로 가르키지 않나니라. 그러므로 구차하게 누가 선후냐고 이듯이 씨앗과 밭을 논할 필요가 굳이(固)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子)·모(母)·부(父)·부(夫)·부(婦)는 우리(굴레테=돌아나가는 테) 회류로 있어 회류일 뿐이다。돌고 움직이는 것도 반작용(反作用)은 그림자와 같이 있는 법 가감(加減)해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되는데 하물며 움직이지 않는 것이야 말할나위랴? 그러므로 흐른다 하는 시간은 거래(去來)치 않나니라. 다만 살아움직일 뿐이로다. 생명이다. ◎ 신(神)은 어린 양(羊)을 키우는 목자(牧者)와 같은 제보살(諸菩薩)성을 띄기도 한다.그러므로 원(願)이 있거든 신(神)들께 강구(强求)하라。 그 아무것이 성자(醒者)께서도 (저 ㅡ있다면 저희가 원(願)해서 들어오고 에워싸고 있었을 뿐이다.왜냐? 그러한 빌미、깨뜨려짐이 삶만한 화려한 궁전처럼 보였을 것이다.) 능력이 없는데 아무리크소니야 말할나위랴? 능력을 구하려거든 진리의 신(神) 하나님이라 하는 분께 구하여라.하나님이라 하는 명분을 갖고 있는 신(神)은 진리이시며 생명(生命)이며 만사해결사이시 라。하나님께서는 진리이시니 모든 걸 초월하시니 목마른 자의 샘과 같으시나니 전지전능하며 못 하는 것이 없나니라. 해탈도 하나님을 통하여 되는 수가 있으니 그는 왜인가? 생명시회류(生命時回流)이기 때문이니 신통(神通)하여라. 정성을 쏟아 기도해서 신통하여라. 신은 도이니 (깨우침 말씀과 제반 行) 도통하여 빠르기가 서교(西敎)의 耶蘇神만함이 없나니 그 차원(次元)이 높음으로서니라. 혹여 말하길 만종교(萬宗敎)의 발상지는 인도이며 힌두신앙으로부터 제종교(諸宗敎)가 분파되었다 하니 그 또한 능력이 있을 것이며 그 세(勢)를 본다면 이슬람신 또한 능력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뿐만아니라 다른 진리에게도 구하여라。그 능력껏 능력을 행사(行事)하리라。산신(山神)님께서도 계시고 칠성(七星)님、 구천상제(九天上帝)님 등 다신사상(多神思想)에 의한 능력도 무시치 못하리니 이러한 사상의 주체신(主體神)께서도 정성껏 구하여라。그러면 원하는 바를 꼭 들어 주실 것이다. 주장은 삿된 것 같아도 혜택의 능력을 주겠다는 의미에는 하등의 탈 잡을 게 없다 할 것이니、 삿되지 않은 걸로 관점을 돌려 이 삿되지 않음인 것이다. 즉 삿되지 않나니라。아무러크소니의 탈파설은 능력의 차원과 거리를 멀리하고 멀리할 뿐이다。제이상(諸理想)이 어떻게든 힘을 얻을 時는 능력을 심은 것이다로 할 것이다. 가련한 것은 조건에 걸린 자들이니 저마다 조건지어진 것이라 하고 귀신이 올가미를 씌워서 종으로 삼고자 그 종사하는 업(業)에 갖은 훼방을 다 부려서 파탄을 내고자 하는 것이다。나를 따르지 않으면 네 목적하는 일을 끝까지 쫓아가 다 망가뜨리겠다는 악질을 부리는 것이다. 그런 고통과 질곡 속에 제삼라와 사람이 있으니 그 올가미에 벗어난 자 몇이나 될 것인가? 즉 조건에 의해 왔다는 것이니(내가 무엇을 해줄 테니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다오와 너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한다면 나는 너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이다의 껍질 조건체로 너를 엮어 네 있다는 뜻에 의한 서로간의 연연(連緣)에 의해 제반 것이 존재한다는 뜻일런지 알 수 없다)'이 조건이란 무슨 조건인가? 귀신을 받들라는 조건이란 뜻이다. 귀신을 능멸히 여기는 강팍하게 하는 내 마음이 고달프게 너를 위하여 능력행사치 않겠다는 너 마음귀신이 나를 홀대하겠다는 발악하는 뜻인 줄 내가 안다)이니 鷸蚌(도요새 조개)이 서로 물고 늘어져 너와 나 영원히 벗어남은 없다 함에 엉뚱한 자의 실리만을 취하게 한다고 할 것이다。귀신은 핍박으로써 저 요구를 관철시키고자하고 성자(醒者)는 覺露를 열어서 저 뒤집어쓴 허울을 벗게한다. 예전에는 깨뜨림의 말씀과 그 말씀하는 자를 가호키 위해 신들의 가호、신통력이라는 게 절로 에워싸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제의 세상은 판도의 넓음이 끝이 없음이라 또한 사상도 萬家爭名이라 누구만 옳다고 하여 에워싸 가호할 것인가? 또한 성자(醒者)가 신의 희롱에 듬을 부끄럽다 하여 신통을 배척하고 멀리하니 대성인(大聖人)과 같은 신통(神通)이 없는 것이요、설령 있어도 理想을 키우고 보호하기에 앞서 사복을 채우는데 급급하니 어떤 성령(聖靈)、 옳은 귀신이 있어 기껍다고 할 것인가? 모다 업보에 의한 고(苦)를 벗지 못해 한(恨)하는 탁령(濁靈) 삿된 귀신의 보챔이 신통(神通)처럼 나타날 뿐이다.이승에서 제 주제를 잘 파악、 갖은 향락을 다 누린 것이라 마음정리하고 여한없이 살다가 곱게 간 자의 영기(靈氣)라면 세상사(世上事) 관여치도 잘 않겠지만 부득이 관여할 형편이라면 그 성스런 자태를 드러낼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삶에 패배하고 도전에 패배 등 패배의식이 만연한 자와 제 영달을 위해 주위도 안 돌아보고 무자비한 삶을 산 자는 이 원척을 쌓은 것이라°이 두 가지 등 다양한 원(願)과 한(恨)들이 어찌 삿된 원귀가 되어 보채지 않을 것인가? 그들의 원 벗겨 줌이 신통으로 나타나거나 제삼라의 탈 행(行)짓거리인지도 모른다. 이제의 성(醒)자에겐 신통(神通)은 없어도 부여(賦與)된 운명(運命)의 여건은 조성되어 있으니 그 기회를 잃지 않는 것이 개우석(介于石)과 같다 할 것이다。 이형(以形)은 태극형(太極形)의 확대 축소、저 이 거래(去來)나 그런 방식에 의한 생명(生命)의 포태(胞胎)의 착상을 뜻한다. 뒤에 나오는지 앞에 이미 설명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포태의 착상은 이승으로 오는 문(門) 역할 열쇠 역할 길 역할을 한다는 것이고, 삶이 다하여 어떠한 장례를 치르던 그 완결지어가는 모습이 이 형(形)의 뜻을 취한다는 것으로써 가는 門, 열쇠, 통로 역할이 이와 같다는 뜻으로 그것을 좁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실제의 현 위치 저 넓은 우주공간(宇宙空間)이 싸고 있다는 뜻이다. ◎ 불자형(佛字形)을 볼진대 그 옛 상형(象形)이나 고문(古文)의 뜻은 알 수 없으나、只今의 글된 형(形)의 의미 관점에선 사람이 아니란 것은 만물의 영장귀신(靈長鬼神)만 아니란 뜻이니 지극히 슬기로운시류(時流)·생명(生命)·진리(眞理)만이 아니란 뜻이다。불(佛)은 대달(大達)、각성(覺醒)한 성인(聖人)이란 뜻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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