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8일(수) 공덕원에서 열리는 대원불청 11주년 기념행사 가운데 하나인 '만해퀴즈열전'
골든벨 형식으로 열리는 이 퀴즈열전은 아래 자료에서 95% 출제됩니다. (나머지는 당일 주제발표에세 발췌하여 출제)
이 자료를 토대로 준비하시면 좋은 결과 있으리라 봅니다.
※ 정답이 '년,월,일'이 되는 문제는 출제하지 않을 예정이니 내용 중심으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단, 만해스님의 탄생년월일과 입적년월일은 출제될 수 있습니다.
萬海 韓龍雲 (1879. 8. 29 ~ 1944. 6. 29)
○ 본관 : 청주(淸州)
○ 호 : 만해(萬海 ·卍海)
○ 속명 : 유천(裕天), 자 : 정옥(貞玉), 계명 : 봉완(奉玩)
○ 출생지 :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2
○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1962)
○ 주요저서 :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1879. 8. 29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乙卯, 음 7월 12일)
본관은 청주, 자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이며, 득도(得度) 때의 계명은 봉완(奉玩),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卍]海)이다. 어머니는 온양 방씨 (方氏)이다.
1884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움. 서상기(西廂記)를 읽고, 통감, 서경기삼주를 통달함.
1892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와 결혼하다.
1896년 11월~1897년 1월
호론(湖論)의 영수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학통을 따르는 文人志士 김복한, 이설, 임한주 등이 일으킨 홍주의 을미 의거에 가담. 내포 지방에서는 을미 의거를 위한 모병을 일년 전부터 전개했음.
1897
홍주 의거가 실패로 돌아가자 고향을 떠나 출가하다.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다.
1899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의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다.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설악산에서 하산하여 불라다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박해를 받고 곧 되돌아와 이곳저곳을 정처없이 전전하다.
1904
시베리아, 만주를 주유하다가 봄에 다시 고향인 홍성으로 내려가 수개월간 머물다 출가함.
12. 21
맏아들 보국 태어나다. (보국 내외 북한에서 사망, 손녀 셋이 북한에 거주)
1905. 1. 26
백담사에서 연곡스님을 은사로, 영제스님에 의하여 수계를 하니, 득도 때의 계명은 봉완(奉.玩), 법명이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
이후 연곡스님에게에 받은 <음빙실문집>과 <영환지략>을 읽고 난 후 넓은 세계와 많은 나라들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으며 세계일주의 장도에 오르게 되는 계기가 됨.
<음빙실문집>은 청조 말 구국의 큰 뜻을 품은 대학자 양계초의 계몽서적이자 혁명서적
<영환지략>은 세계의 지리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는 지리서. 세계일주는 소련에서의 봉변으로 인하여 포기하고 일시 귀국
1907. 4. 15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다.
1908. 4월
일본의 마관·궁도·경도·동경·일광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다. 조동종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 淺田교수와 교유하여 유학 중이던 최린(崔麟)과도 사귀고 10월 귀국.
10월
건봉사 학암스님에게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다.
12. 10
일본에서 최첨단 기술인 측량술을 배운 후 귀국하여 서울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 개설하여 측량기술에 대한 강의를 시작(소장 취임 .국토는 일제에 빼앗길지라도 개인 소유 및 사찰 소유의 토지를 수호하자는 이념 때문이었음)
1909. 7. 30
강원도 표훈사 불교강사에 취임.
9. 20
경기도 장단군 화산강숙 강사에 취임.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
당시 해인사 주지인 친일승 이회광이 주도했던 한국불교의 일본불교 예속되는 일을 분쇄하고자 박한영·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조약’ 체결을 규탄하다. 그러나 총독부는 모든 사찰의 주지와 재산에 관한 권한은 총독이 가진다는 내용의 ‘조선사찰령’이 반포되자 만해는 만주를 주유하면서 동북아 정세를 살펴보다.
3. 15
범어사에서 조선 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하여 서무부장 취임
1912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불교대전] 편찬을 계획하고 경남 양산 통도사의 고려대장경 1,511부, 6,802권을 열람하기 시작하다.
1913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 박한영·장금봉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
5. 19
통도사 불교강사에 취임.
5월
<조선불교 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아들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이다. 천하에 어머니 없는 아들이 없다는 말을 하되 파괴없는 유신이 없다는 것은 간혹 알지 못한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 유신론은 당시 조선불교의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1914. 4. 30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다. 이 ‘불교대전’은 재래식 장경 위주의 편찬방법에서 벗어나 주제별로 엮은 최초의 책이다. 이 책에서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이의 편찬을 위해 통도사에서 그 방대한 고려대장경을 일일이 열람하였다.
1915. 10월
영남·호남 지방의 사찰(내장사·화엄사·해인사·통도사·송광사·범어사·쌍계사·백양사·선암사 등)을 순례하며 곳곳에서 강연회를 열어 열변으로써 청중들을 감동시키다.
조선선종 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하다.
1917. 4. 6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
12. 3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견성한 후 [오도송] 남김.
○ 오도송 -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 그 몇 사람 객수(客愁)속에 길이 갇혔나 / 한 마디 큰 소리 질러 삼천대천 세계 뒤흔드니 / 눈속에 복사꽃 붉게 붉게 피네’
1918. 9월
서울 계동 43번지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이 되다(12월까지 3권을 발행하고 중단됨). 이 <유심>지는 3?1운동의 전위지로서 불교근대화와 신 문화 운동의 전개로서 주로 민족의 정통성과 자존성을 가진 우리 청년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잃지 말라는 내용으로 역사의 어둠을 밝혔던 종합지였다. 동지 창간호에 논설 [조선청년과 수양]·[전로(前路)를 택하여 나아가라]·[고통과 쾌락]·[고학생]을 비롯하여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심](心)을 발표하다(일반적으로 신시의 선구를 주요한의 [불놀이]로 보지만 만해의 이[심]은 그보다 1년 앞서서 발표됨).
이때부터 더욱 문학 창작에 힘을 기울이다.
1919. 1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관련하여 최린·오세창 등과 조선독립을 숙의.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 삼장을 첨가하다.
3. 1
경성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투옥될 때에는 3대원칙 즉, ‘변호사’·‘사식’·‘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거사 후에 일경에게 체포되다.
7. 10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기초하여 제출하다. 53장의 논문을 옥중에서 참고서적이나 자료 하나 없이 완성할 만큼 독립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탁월한 식견고 정연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목적을 옥중에서 당당하게 주장함과 동시에 침략 강점의 일본 군국주의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더욱 놀랄만 한 점은 1919년에 벌써 군국주의 일본군도 제1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처럼 반드시 패망의 쓴 잔을 마실 날이 올 것이라고 확언한 사실이다.
1920
투옥 중 일제가 3·1운동을 회개하는 참회서를 써내면 사면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이를 거부하다. 가을, 감형되어 출옥하다.
6. 20
조선불교청년회 창립하다.
5월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철창철학]이라는 연제로 강연하다.
1923. 2월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하다.
1924. 10. 24
장편소설 [죽음]을 탈고하다(미발표).
조선불교청년회 총재에 취임하다.
이때를 전후하여 민중계몽과 불교대중화를 위해 일간신문의 발행을 구상했으며, 마침 시대일보가 운영난에 빠지자 이를 인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1925.6. 7
오세암에서 매월당의 <십현담주해>를 읽고 마음에 새로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스님도 직접 매월당의 주와 비교, 대조하면서 <십현담주해>를 탈고하였다.
8. 29
[님의 침묵] 탈고.
1927.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히다.
조선불교청년회의 체제를 개편하여 조선불교총동맹으로 개칭하고 제자들인 김상호·김법린·최범술 등과 일제의 불교 탄압에 맞서서 불교 대중화에 노력하다.
1929. 11월
광주학생의거를 조병옥·김병로·송진우·이인·이원혁·이관용·서정희 등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고 민중대회를 열다.
1931.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다.
6월
당시 유일한 불교잡지인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여 <유심>지에 못 이룬 종교 개혁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불교>지에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고 많은 논설을 발표. 7월 9월 9월 24일 10월부터 10월 논설 11월 12월
7월
전북 전주 안심사에 보관되어 있던 한글 경판 원본(금강경, 원각경, 은중경, 및 유합, 천자문)을 발견 조사하다.
[만화]를 7월부터 9월까지 [불교]지에 발표하다.
9. 24
윤치호·신흥우 등과 나병 구제연구회를 조직하고 여수, 대구, 부산 등지에 간이수용소 설치를 결의하다.
10월
시론 [한갈등](閒葛藤)을 [불교]지에 발표하기 시작하다.(다음해 9월에 끝냄).
논설 [중국불교의 현상]·[조선불교의 개혁안]·[불교개신에 대하여] 등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12월
시론 [중국혁명과 종교의 수난] 및 [우주의 인과율] 등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수필 [겨울 밤 나의 생활]을 <혜성>지에 발표하다.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다.
1932
계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10월
[불교청년 운동에 대하여], 기행문 [해인사 순례기] 등을 [불교] 지에 발표하다.
[월명야에 일수시] (月明夜에 一首詩)를 [삼천리]지에 발표하다.
12월
전주 안심사에서 발견한 한글 경판을 보각 인출(印出)하다. (당시 총독부에서 인출비용을 대겠다고 제의해 왔으나 강경히 거절, 유지 고재현 등이 출연한 돈으로 간행하다).
이때를 전후하여 일제의 사족을 받은 식산은행이 일본화정책으로 조선 명사를 매수하기 위하여 선생에게 성북동 일대의 국유지를 주겠다고 했으나 이를 거절하다.
1933. 1월
논설[불교사업의 개정방침을 실행하라] 및 [한글경 인출을 마치고]를 [불교]지에 발표하다.
10월
[자립력행의 정신을 보급시키라]는 논설을 [신흥조선]지 창간호에 발표하다.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다.
이 해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방응모, 박광 등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짓다. 이곳에서 입적할 때까지 말년을 보냈다.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돌아 앉아 민족의 자존을 지킨 집이다. 1984년 서울시가 사적 제7호로 지정하였다.
1934. 9. 1
딸 영숙(英淑) 태어나다.
1935. 3. 8~13
회고담 [북대륙의 하룻밤]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다.
4. 9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다. (다음해 2월 4일까지 연재함).
이때를 전후하여 대종교 교주 나철 유고집 간행을 추진하다.(미완성)
1936
장편소설 [후회]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이 신문의 폐간으로 50회로써 중단되다.
단재 신채호의 묘비를 세우다(글씨는 오세창). 비용은 조선일보 에서 받은 원고료로 충당하다.
1937. 3. 1
재정난으로 휴간되었던 <불교>지를 속간하여 <신불교> 제 1집을 내다(논설'[불교] 속간에 대하여'를 발표).
소설 [철혈미인]을 [불교]신집에 연재하기 시작하다(2호까지 연재하고 중단됨).
3. 3
광복운동의 선구자 일송 김동삼이 서대문구치소에서 옥사하자 유해를 심우장에 모셔다 오일장을 지내다.
조선은 앞으로 꼭 해방이 될 것인데 해방 이후 혼란이 있을 경우 그 혼란을 수습할 사람은 김동삼뿐이라고 믿고 있던 스님은 천지가 무너지는 듯 했다. 연고자는 김동삼의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공고가 나왔는데도 총독부의 눈이 무서워 어느 누구도 그 시신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스님이 달려가 그 시신을 업고 심우장까지 걸어와서 크게 울며 5일장을 지냈다.
1938. 2월
논설 [불교청년 운동을 부활하라]를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11월
[총본산 창설에 대한 재인식]을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만단(卍黨) 당원들이 일제에 피검되자 더욱 감시를 받다.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불교사를 정리하려는 구상의 일단으로 [불교와 고려제왕]이란 제명으로 연대별로 고려불교사의 자료를 정리 편찬하려고 자료를 뽑기 시작하다(미완성).
1939
회갑을 맞아 박광·이원혁·장도환·김관호씨가 중심이 되어 서울 청량사에서 회갑연을 베풀다. 이때 오세창· 권동진· 홍명희· 이병우·안종원 등20여 명이 참석하다.(음, 7월 12일)
사흘 뒤 민족독립운동의 비밀집회장소인 경남 사천군 다솔사에서 김법린·최범술 등 몇 명의 동지와 후학들이 베푼 회갑 축하연에 참석하여 기념 식수를 하다.
1940. 5. 30
수필 [명사십리]가 [반도산하](半島山河)에 수록되다. 창씨개명에 대하여 박광· 이동하 등과 반대운동을 벌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통도사사적]을 편찬하기 위하여 수백매의 자료를 수집하다(미완성).
1942
신백우·박광·최범술 등과 신채호선생 유고집을 간행하기로 결정하고 원고를 수지하다. 이때를 저후하여 <태교>(胎敎)를 번역 강의하다(프린트 본으로 간행하였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1943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
1944. 6. 29 (음5. 9)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 학병 징병을 거부하고 일체의 배급을 거부하며 영양실조가 되었던 스님의 육신은 홀연히 사라졌다.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다. 세수 66. 법랍39.
1948. 5월
만해 한용운 전집 간행위원회가 최범술·박광·박영희·박근섭·김법린·김적음·장도환·김관호·박윤진·김용담에 의하여 결성되어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다.
1950. 6월
6·25 사변이 일어나 전집간행 사업이 중단되었으나, 전란이 끝난 뒤 간행위원으로서 조지훈·문영빈이 새로 참가하여 제2차 간행사업을 계속하다. 사회 사정으로 중단되었다가 최범술·민동선·김관호·문후근·이화행·조위규 등이 제3차 간행위원회를 조직하다.
1962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이 수여되다.
1967
용운당 만해대선사비가 탑골공원에 건립.
1980
김관호, 전보삼 등이 중심이 되어 신구문화사에서 '만해사상연구회'를 결성하고 <만해사상연구> 제1집 간행.
1996
만해사상실천선양회(회장, 조오현 신흥사 회주)가 결성되다.
8. 15
독립기념관에서 대한불교청년회 주최로 만해어록비 다시 세움.
1999. 8. 13~16
제1회 만해축전이 만해학국제학술대회가 설악산 백담사에서 개최되다.
첫댓글 같은 내용으로 첨부파일에도 올렸습니다.
수석부회장님 첨부파일이 안받아지네요~다시 올려주셔요^^ 열공하겠나이다~
다시 올렸다. 그래도 첨부파일이 안 열리면 화면자료를 복사해서 출력하렴. 내용은 똑 같으니까. 수련화가 열공하여 만해선사의 따끈한 후예가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