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주 국공합작과 남경국민정부의 성립
1. 제1차 국공합작과 국민혁명
1. 쑨원의 활동과 광동군정부(廣東軍政府)
◈ 제1차 광동군정부(1917)
— 쑨원의 중화혁명당 재건(1916. 1919년 중국국민당으로 변경)
— 비밀결사적 혁명당으로의 복귀와 쑨원의 절대적 지도권 확립
— 以黨治國論的 論理의 모색
◈ 제2차 광동군정부(1920)
— 광동정권을 장악한 천종밍(陳炯明)의 도움
— 쑨원의 북벌지향과 천종밍의 연성자치주의( 聯省自治主義 ) 대립
— 1922년 6월 천의 쿠데타로 붕괴
◈ 제3차 광동군정부(1923)
— 1922년 12월 군벌과의 연합으로 천종밍 축출
— 1923년 3월 광저우(광주)에 대원수부(大元帥府) 설치
— 서남군벌· 客軍과의 연합에 기초한 군벌정치적 행태의 한계
2.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
(1) 배경
◈ 5·4운동 이래 반제국주의 인식의 확산
◈ 쑨원의 정치 활동 : 천종밍 쿠데타(1922. 6.)로 드러난 한계
◈ 소련-코민테른과 중국 혁명
— 코민테른의 <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관한 결의>(1920)
— 중국공산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1922. 7.)
—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결의
(2) 제1차 국공합작의 성립 과정
◈ 당내합작(黨內合作) : 천두슈(陳獨秀) 등 공산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의 국민당에 입당(1922)
◈ 쑨원-요페(Joffe) 공동선언(1923. 1.) : 소련의 국민당 원조
◈ 중국국민당의 개조(改組)와 제1차 전국대표대회(1924. 1.) → 국공합작의 정식 성립
— 黨 조직의 개편 : 볼세비키式 당 조직. ex. 전국대표대회 - 중앙집행위원회
— 三民主義의 재해석 : 反제국주의를 표방하는 민족주의, 노동자-농민의 권리와 생활을 보장하는 민권주의와 민생주의→ ‘新삼민주의’
— 3大 정책 : 연소(聯蘇), 용공(容共), 부조농공(扶助農工)
— 황푸(황포)군관학교의 설립(1924. 6.) : 소련의 군사고문 파견과 재정 지원.
국민당의 黨軍. 校長은 장제스(장개석/蔣介石).
— 국민당 우파의 반발 : 서산회의파(西山會議派)의 결집
3. 북벌과 남경국민정부의 성립
(1) 국민정부의 성립과 장제스(蔣介石)의 대두
◈ 쑨원의 사망(1925. 3)
◈ 광둥(광동) 국민정부의 성립
— 1925년 7월 군정부를 국민정부로 개편
— 국민정부의 지도 체제 : 왕징웨이(왕정위)-장제스(장개석) 연합 체제
— 국민혁명군의 조직 : 장제스의 黨軍을 중심, 여타 군소 군벌군대 합류.
◈ 중산함(中山艦) 사건(1926. 3) 이후 장의 군·정 장악
(2) 제1차 북벌(北伐, 1926.7-1928.)과 국민정부의 분열
◈ 북벌의 개시 : 장개석(국민혁명군 총사령)의 지휘 아래 1926년 7월 북벌 개시
◈ 북벌의 진행
— 공산당 주도의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전개
— 국민혁명군의 순조로운 북벌 진행
◈ 국민정부의 분열
— 무한국민정부(우한, 武漢國民政府)의 성립 : 1926년 12월.
— 남창국민정부 : 1927년 1월 국민당의 親장제스 세력이 남창(南昌, 난창)에 국민정부 수립
(3) 국공합작의 붕괴
◈ 장제스의 4·12정변과 ‘청당(淸黨)’ → 남경국민정부 성립 (4. 18)
◈ 노동운동-농민운동의 격화(‘과화(過火)’)와 무한국민정부의 ‘분공(分共)’ 결정 (7. 15)
◈ 무한-남경 국민정부의 ‘合作’
2. 남경국민정부의 시대(1928-1937)
1. 남경정부의 수립과 訓政體制
(1) 남경(난징, 南京)정부의 수립과 헌정체제
◈ 제2차 북벌의 재개 (1928. 4.)와 완수
— 북경 입성 : 1928년 6월 북경에 무혈 입성. cf.장작림의 폭사 사건
— 장쉐량(장학량, 張學良)의 역치(易幟)(1928. 12)
-> 북벌통일의 완성과 남경정부의 수립
(2) ‘以黨治國論’과 훈정의 실시
◈ 孫文의 三序論과 ‘以黨治國論’ : ‘軍政’ → ‘訓政’ → ‘憲政’
— 장래 민주적 정치체제 수립은 약속하나, 당장은 국민당의 일당독재 합리화
— 국민당대표대회가 국회를 대신하여 국민정부의 통치권 장악
◈ ‘훈정강령(訓政綱領)’과 ‘훈정시기약법(訓政時期約法)(1931)’
— 1928년 6월 15일 군정 종식 선언과 1928년 10월 3일 ‘훈정강령’ 발표
— 1931년 5월 ‘훈정시기약법’
— 공산당은 물론 국민당에 비판적인 정당·정파의 정치 활동 봉쇄
— 민주·인권운동의 탄압
(3) ‘안내양외(安內攘外)’의 對日政策
◈ 국민혁명시기 일본의 山東출병 → 지난(제남,濟南)사변 (1927. 5. / 1928. 5.)
◈ 만주사변과 ‘만주국(滿洲國)’
— 만주사변 : 1931년 9월 18일 → 유조호(柳條湖, 혹은 柳條溝)사건(9·18사변)
— 제1차 상해사변 : 1932년 1월 28일 →
— ‘滿洲國’(일본의 괴뢰국) 성립: 1932년 3월 푸의(부의, 溥儀)의 집정(執政) 취임
◈ 노골화되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국민정부의 타협정책
— 동북 장악 이후 화북지역으로 진출하는 일본의 침략에도 항일요구를 억압, 실력양성을 주장
— 외교에 의한 일본 압박 추진 →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1933. 3.)
— 홍군(紅軍) 토벌에 최우선권을 두면서 통일과 단합을 요구
2. 남경국민정부의 경제건설
(1) 화폐제도의 통일
◈ 중국 근대 화폐제도의 문란
◈ 폐량개원(廢兩改元, 1933. 3.)
◈ 폐제개혁(幣制改革, 1935. 11.) : 법폐(法幣)에 의한 관리통화제도 수립
(2) 관세자주권(關稅自主權)의 회복과 경제건설
◈ 관세자주권의 회복 : 1928-30년간 각국과의 개별 교섭을 통해 관세자주권 회복
◈ 이금(釐金)의 폐지 : 대신 이름만 바꾼 통세(統稅)로 內地流通稅 부활
(3) 경제건설과 그 성과 : 각종 산업진흥정책의 추진
◈ 장(장,蔣)·송(쑹,宋)·공(쿵, 孔)·진(쳔, 陳) 4대가족의 경제적 이권 독점
◈ 국민정부의 재정지출에서 군사비의 비중은 압도적(60% 이상)
◈ 대도시·도시계급 위주의 경제정책, 자연재해 등으로 농촌은 파산상태로 빠짐
— 양자강 중하류 유역에 제한된 국민정부의 영향력
— 1929년의 세계대공황의 여파 - 1930년 양자강 범람 등 자연재해
◈ 근대적 도시문화의 발전
— 대중적 소비문화의 발전
— 근대적 도시외관의 형성
— 근대학술의 발전 : 중앙연구원 설립
첫댓글 참 장학량이 어떻게 되느냐 도형군이 물었었는데, 이 폴더 211번에 가면 영화 송가황조에 관한 추가설명이 있습니다. 그곳에 장학량의 슬픈 인생역정과 한창 꽃미남 시절의 사진, 민국시기 장수만세 남녀에 관해서도 있으니 참고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