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 9월 21일 스코틀랜드 작가 월터 스콧이 세상을 떠났다. 월터 스콧은 흔히 ‘역사소설의 창시자’, ‘가장 위대한 역사 소설가’로 불린다. 그런데 스콧은 뜻밖에도 역사 전공자가 아니다. 문학도도 아니다. 그는 21세에 변호사가 되었고, 30세에 판사 대리로 임명을 받았으며, 평생을 법조계에 종사했다.
월터 스콧이 역사 공부에 매진한 것은 자신의 과거를 알아보려는 탐구심의 발로였다. 그래서 서른이 될 때까지 스코틀랜드 역사 공부에 매달렸는데, 때마침 19세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글을 써서 발표하기 시작했다.
스콧은 1802∼3년 첫 작품 <스코틀랜드 변경 지방의 민요>를 발표하고, 시집으로 1805년 <마지막 음유 시인의 노래>, 1810년 <호수의 여인> 등을 내놓아 이름을 얻었다. 소설을 처음 발표한 때는 43세이던 1814년이었다. 제목은 <웨이벌리Waverley>.
웨이벌리는 이 소설 주인공의 이름이다. <웨이벌리>는 세계문학사 최초로 태어난 역사소설이었다. <웨이벌리>의 성공에 힘입어 스콧은 계속 그 연작들을 발표했고, 그 이후 역사소설은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는 갈래가 되었다.
스콧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 자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향토사, 지역사, 국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더 좁은 범위로는 가족사와 마을사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호흡한 공기, 마신 물, 바라본 풍경, 주고받은 말, 읽은 책 등에 의해 그 정체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둘째, 역사소설을 쓰려면 역사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역사소설도 소설이므로 본질적으로는 허구이지만, 뒤틀린 역사를 독자에게 제공해도 무방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고의로 왜곡해서 잘못된 역사인식 또는 역사지식을 퍼뜨리는 행위가 중대 범죄라면, 무지의 결과로 잘못된 역사인식 또는 역사지식을 퍼뜨리는 일도 최소한 경범죄 정도는 된다.
영화의 사례를 들어보면, 1천만 명이나 관람한 <명량>조차 그런 지적을 받는 현실이다. 1592년 당시 일본군은 100년 전국시대를 거쳐 통일을 이룬 직후였고, 조선군은 1392년 건국 이래 줄곧 평화시대로 지내온 탓에 전투 경험이 전무했다.
갑판 위에서 백병전을 벌이는 조선군은 백전백패였다. 이순신은 멀리서 포격을 가한 뒤, 이어서 무겁고 튼튼한 판옥선으로 가볍고 허술한 일본 전선을 부수는 전술로 백전백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명량>의 이순신은 줄곧 백병전으로 일본군을 제압했다.
대한민국은 200년 전의 스코틀랜드보다 못하단 말인가? (*)
이 글은 현진건학교가 펴내는 월간 '빼앗긴 고향'에 수록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투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