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시기 원하는지 아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 소중하다.
하나님 나라안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위가 이루어야 할 소명과
세상에서 말하는 목적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리할 줄 알아야 한다.
소명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미 계획하신 것들을 살아가면서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자녀들이 목적을 가지는 것은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의 시간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하나님께서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거짓자아는 미래의 목적을 어떻게 이루어가야 하는지에 초점을 둔 삶을 살게한다. 그것은 내가
주체가 되고 지금을 수단으로 삼으며(목적으로 삼지 않고)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킹덤빌더는 지금 이순간 여기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지 초점을 둔
삶을 살게 된다.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자의 첫 번째 소명은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통치하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내적소명으 거듭난 자가 자기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론적 소명이다. 외적소명은 내적 소명을 이룬 자가 주님의 비전에 따라 목적을
갖지고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ㅏ신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일을 행할 때 주시는 비저넹 따라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을 정하고 그것을 주님께서
이루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과 행위로 미래에 이루는 목적이
아니다.
내존재와 내 행위가 일치될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 땅에 그의 통치를 나타낼 수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성과 원복이 있음을 아는 의식이 잇어야 한다.
이 내적 소명을 알지도 체험하지도 못한체 외적 소명만을 추구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내가 하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미래의
목적을 추구하는 삶으로 현재를 포기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그 삶은 언제나 한숨이고 공허이다.)
그럴때 거짓자아가 만든 보이는 형상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영원한 가치와 만족을 누릴 수 없다.
그 목적은 늘 상대적이고 일시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주한 마르다와 주의 말씀만을 들은 마리의 비유를 알고 있다.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하기
위한 일들이 주님자체를 빼앗기는 우를 저질렀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먼저 주님 앞에
머무는 것을 포기하거나 빼앗겨서는 안된다. 마르다는 분주한 환경에 의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선택했는데 그 대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으로써 그 혼이하나님의 영 안에 거하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예수와 하나되는 것이 먼저이고 그리고 외적소명인 열매를 맺는것이 나중이다.
내가 주님을 위해 가치있고 의미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통해 나타나시는
일이라면 일의 경중에 관계없이 바로 그 일이 가치있고 의미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는 것은 전부 다 하늘에 상급으로 카운트해주시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리스도의 현존의식 가운데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아닌 모든 추구는 거짓자아의 생존적 추구일 뿐이다.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일을 상급으로 쳐주시지 않는다(마6:20)
(나더러 다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마7:21)
내적 소명없이 외적소명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죽여가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왜적 소명에 초점을 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거짓자아로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다른말로 거짓자아의 정체서을 유지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가지기 때문이다.
거짓자아는 (현재의) 외부와 무엇에 대해서 생각하고 느끼고 관계를 맺음으로서 (확인,증명받고
싶음으로서 ) (가짜) 정체성을 유지하려 한다. 살아있다면 살아있는 동안에 무엇인가 해야 하는것
그것이 내 존재가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분리된 채 스스로 살고자아하는 거짓자아로
부터 나온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 일차적인 이유는 어떤 역할과 목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존재가 되도록 함으로써 안식 가운데 하나님을 나타내는
영광의 통로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하나님과 분리된 채 거짓자아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는 자는 겉으로만 기독교적인 것처럼 보이는 거짓 영성을 만들고
손질하는 데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다.
아둘은 항상 이분법적인 논리안에서 자신과 남을 판단해서 해야할것과 하지 말아야 할것, 그리고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채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둘뿐 진정한 자신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생득권으로 주어진 자녀의 신성과 원복을 누리지도 못한다.
(하나님밖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면서도(스스로 개척된 신앙생활을 해보겠다고 애씀)
그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주목받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대접받기를 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존재를 진지하게 대접하지 않으며, 하나님게서 우리를 예수님과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자신이 행한 선한 일만큼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적 소명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혼의 구원을 통해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우리 몸이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도록 혼이
허용하는 내적 소명을 이루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면서 행하는 외적소명에 하나님의
능력(기름부음심)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나타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더 이상 가치있고 의미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자체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수단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이다.
내적 소명을 경험하지 못하면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모른다. (마치 더하기 빼기를 못하면서
루트를 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반대로 내적소명을 경험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외적소명도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왜냐햐먼 하나님의 생명안에서 살아갈때 자신의 단점과 장점, 다른 사람과 같은 점과
다른점, 자신의 지식이나 기술보다 훨씬 잘되는 능력, 재능과 은사들이 개발되기 때문이고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이 통합되어 가장 잘 나타날 수 있는 일들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외적소명은 두 단계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무엇하기를 원하시는지 아는 것이고, 둘째 거짓자아를
포기함으로써 그 일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도록 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내적 소명을 이루지 않은채 살아갈 때는 내가 만든 어떤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데
초점을 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내 존재의 실재는 지금뿐인데 우리는 속아서 자신의 존재를
늘 미래에서 이루어질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의 관점(심리적시간)
에서만 계속 의미를 추구한다. 미래의 추구는 그 행위와 열매가 상대적이고 일시적이다.
설령 그것에서 의미와 만족을 발견한다 해도 그런 것들은 언젠가는 가치가 없어지거나 더 이상의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것이다. 내가 나를 위해서 달성한 목적들은 예외 없이
시간과 함께 소멸되기 때문이다. 영원이 아닌 심리적 시간의 축상에서 우리가 발견하고 부여하는
것은 모두 다 상대적이고 일시적일 뿐이다. 자신의 삶이 덧없음을 솔로몬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헛되고 헛되니 모든것이 헛될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인가?
거짓자아로 행하는 모든 일은 설령 그것이 영적으로 보이는 일이라도 수단이 목적을 타락시킬 것이다.
우리는 모두 미래적으로 성공을 추구한다. 이 세상은 우리가 미래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절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이 불편한 진실을 모른채 거짓자아로 살아가며 미래의 성공에 목숨을 건다.
그러나 거짓자아로부터 깨어나면 성공은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 여기에서
이뤄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죽는 순간에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하면 수단과 목적을 일치시킬 수 있을까? 지금 이순간에 행하는 일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다 묵적지는 이차적이라는 의미이다.
과연 자신의 결핍과 욕구의 성취를 이룬 삶이 성공일까? 그런 삶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왜냐하면
지금 이순간 여기에 존재하지 못하고 끝임없이 미래에 자신의 존재를 두고 살기 때문이다.
관념속에서 사는 삶은 물질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에 가치와 의미를 두는 거짓자아의 삶이다.
지금 이사회는 몸이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돌아볼 기회를 주지 않고 더 많이,
더 좋게, 더빨리 라는 심리적 강박으로 우리를 몰아붙이고 있다. (환란이 찾아올때 비로소
거짓자아의 허상을 보고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직면하게 된다. ) 더 이상 혼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이끌었던) 그것이 자신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현존의식으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시공간 안에 있는 피조세계에 주님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성공이다. 당신이 지금 이순간이라는 현재에
있지 않는 한 당신은 무엇을 하든 그 일 소겡서 자기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우리의 혼이 하나님의 영 안에서 늘깨어 자신의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잃은 상태에서는) 어떤 성공도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을 성취하든 우리는 금세 다시 불행해질것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혼이 다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동일시함으로써(행위와 사건에 대한 반응을 자신과 동일시하면 거짓자아로 지금
이순간 여기를 잊어버리고 정신세계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
결국 외적소명을 이룬다는 것은 내 소망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계획하고 이루어야 할 목적이
아니라. 내적 소명을 이룰 때 비전을 주신 주님께서 이루실 그 무엇을 받아들이고 내안에 계신 주님께서
계획하신 그것을 이루시도록 하기 위해 목적을 가지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 여기에서 깊이 있고 신비하고
풍성한 삶, 상황, 처지, 환경, 대상, 문제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삶, 그분의 통치 안에서 하늘의 보물을 쌓는
삶을 살게 된다.
외젹 소명을 이루는 실제적인 방법은?
지금 여기에의 행위자체가 목적이 될 때 (하나님이 영안에 있는 혼이 경험과 지식에 기초한 생각과
감정에 묶이지 않고 행할 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으로 행위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판단하지 말아보라. 지금이 내 행위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고 지금 이순간 그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해보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현존을 느껴보라. 진정한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불안과 온전하지 못함과 스트레스
를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거짓자아가 가지는 외부적인 목적이 내 몸을 지배함으로써 내적 소명을 잃어버린것이다.
불안과 스트레스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을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뷸언과 스트레스는 거짓자아가 지금 이 순간 보다 심리적 시간 속에 존재하는 가공 세계(정신세계)가
더 중요하다고 속이면서 (거짓) 정체성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을때 그리스도의 현존의식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무엇인가 하려고 집어넣으려고
하지 말라. 일을 할때에도 일자체의 내용에 빠지지 말라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관찰하라(매우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집에와서 공허한 이유는
거짓자아의가 일에 대한 생각들을 불어넣어서 자신의 존재를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기싫은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일이 되도록 하라.
다른살마과 만날때도 어떤목적을 이루려는 것을 이차적인 것이 되도록 시도해보라.일이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식(사랑, 온전, 갈망의식)을 나누는 것이 만남과 교류의 첫째 목적이 되도록 해보라.
그리스도 의식으로 하나됨의 차원을 나눌 때 실제적인 일들이 더 쉬워지고 잘 풀리게 될 것이다.
인간 존재들 사이에서 이러한 의식에 따른 생가과 감정의 동조와 공명이 나타나는 것이 관계에
있어 가장 핵심요소이다. 이러한 내적인 교류는 외적인 대화나 교제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인간이란
존재가 세상의 일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서평: 반보되는 내용들이 많았음에도 중요하기에 또 쓰고 또 묵상하고 했다.
너무도 맞는 이야기라 글을 읽으며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살면서 신앙생활에서의 조각과 같은 의문들이 맞춰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분법적 사고를 좀더 그리스도의 현존안에 머물러 있기를 소망했고
그 체험이 이루어졌다. 참자유가 이런것이구나 이 글을 읽으며 기뻐했고
묶인것이 풀어졌다. 다음에 읽은 내용들도 기대하며 글 속에 치유가 임하고
그리스의 현존을 누리는 삶이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