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세유표(經世遺表)
부공제(賦貢制) 6
이하는 잡세(雜稅)이다.
각주고(榷酒考)
주관(周官)에 평씨(萍氏)는 술(酒)을 기찰(幾察)하고, 조심시키는 일을 관장하였다.
주석하기를, “술을 기찰한다는 것은 술 매매가 지나치게 많은 것과 시기가 아닌 것을 기찰하는 것이고, 조심시킨다는 것은 백성에게 씀씀이를 절약해서 항시 마시지 못하게 함이다.” 하였다.
한 무제 천한(天漢) 3년(기원전 98)에 술 매매를 처음 독점하였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술 매매에 금령이 있었는데, 그 율은 세 사람 이상이 까닭 없이 모여서 술을 마시면 벌금이 4냥이었고, 나라에 경하할 일이 있어 백성에게 음식을 크게 내리는 때에는 모여서 술을 마셔도 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때에는 음식 내리는 법이 있었으나 이때에 와서는 술을 독점하였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6년(기원전 81)에 조서하여 각고관(榷酷官)을 혁파했는데, 현량(賢良)ㆍ문학(文學)의 논의에 따른 것이었다. 율로써 백성에게 조(租)를 내고 술을 팔도록 하였는데, 1승에 4전이었다. 안사고(顔師古)는, “점(占)은 스스로 그 실제를 가만히 헤아려서, 그 말을 정하는 것이다.” 하였다. 유반(劉攽)은, “조는 술을 판 데에 대한 세이다. 술값이 1승에 4전이라는 것은 백성에게 후한 이를 얻지 못하도록 제한한 것이다.” 하였다. 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자, 비로소 법을 세워서 관(官)이 직접 술을 빚어 팔았다.
희화(羲和)어광(魚匡)이, “옛것을 법받아 관에서 술을 만드는데, 2천 500석으로 1균(均)을 만들어 죄다 하나의 지정된 판매처[盧]에서 팔기를 요청했다.” 하였다. 살피건대, 이후에는 술을 금단한 일은 있어도 술을 독점하는 영은 없었다. 진 문제(陳文帝) 천가(天嘉) 2년(561)에 술 매매를 독점하였다. 수 문제(隋文帝) 개황(開皇) 3년(583)에 주방(酒坊)을 혁파하여 백성과 함께 하였다.
후주(後周) 말기에, 관에서 주방을 설치하여 그 이익을 거두어들였는데 문제가 혁파하였다.
당 덕종(唐德宗) 건중(建中) 원년(780)에 주세(酒稅)를 혁파했다가 3년 만에 다시 복구하였으며, 백성이 술을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관에서 주점(酒店)을 설치하여 그 이익을 징수해서 군비(軍費)를 도왔는데, 1곡에 값 30을 징수하다가 얼마 후에 혁파하였다.
호인(胡寅)이 이르기를, “술과 다를 독점하고 배와 수레를 계산하며 산과 못을 주관하는 것은 옛적 성왕(聖王)이 하지 않던 것인데 후세에는 큰 이익의 근원으로 삼는다. 관청을 설치하고 법을 세워 엄하게 방지하고 모조리 빼앗는 것이 상부(常賦)보다 심했는데, 한 번이라도 느슨해지면 바로 모자라게 되니 삼대(三代)적 천하가 또한 후세의 천하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때에도 관리에게 늠록(廩祿)을 주었고, 군려(軍旅)에도 사용했으며,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진구했고, 사이(四夷)를 교제(交際)하였다. 억제한 것은 유독 공ㆍ조(貢助)로서 10분의 1만 해도 족했으니, 이것은 무슨 방도였던가? 그 까닭은 취하는 데에 제도가 있었고 쓰는 데에 한절이 있으며, 수입을 요량해서 지출하고 사치하거나 망령된 허비가 없으면 10분의 1인 공ㆍ조만으로도 족할 뿐이 아닌데, 지출이 끝 없고 요구가 법 없으면 독점하고 산하여도 재물은 고갈되고 백성은 배반해서 나라마저 잃게 된 것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소금ㆍ술ㆍ차 세 가지는 백성이 먹는 것인데, 백성이 먹는 것을 독점하는 것은 포학한 정사이다. 그러나 주ㆍ거(舟車)를 산(算)하고 산택(山澤)을 주관함은 법에 득실은 있을지라도 옛적에도 시행했음이 문헌에 나와 있으니 함께 논의할 수는 없다.
정원(貞元) 2년(786)에 술 판매를 독점해서 1주마다 이(利)가 150전이었는데, 회남(淮南)ㆍ하동(河東)ㆍ충무(忠武)ㆍ선무(宣武)에서는 누룩을 독점했을 뿐이었다.
생각건대, 이후부터 오계(五季)에 이르도록 모두 술을 독점하고 누룩을 독점한 것이 때에 따라 증감(增減)은 있었으나 족히 기술할 것이 없었다.
송나라 제도는, 술 판매와 누룩을 독점했는데, 아울러 개보(開寶) 8년(975)에 액수를 한정하고 다시 증액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태종(太宗)이 조서하기를, “전에 백성을 모집해서 차와 소금을 관장시키고 술 판매를 독점하도록 했었는데, 백성들이 상수(常數)보다 많이 증가되어 장(掌) 되기를 구하여 이익을 엿보려 하니 앞으로는 다시 (인원을) 증가하지 못한다.” 하였다. 신종(神宗) 희령(熙寧) 5년(1072)에 관에서 주무(酒務)를 감독하여 1승(升)마다 1문(文)을 첨가하도록 하였다. 숭녕(崇寧) 2년(1103)에 1승마다 2문을 첨가하였다. 4년, 주가전(酒價錢)을 첨가해서 상등은 1승에 5문, 차등은 3문으로 하였다.
희령 10년 이전에는 천하 여러 주(州)에서 술에 부과하는 세액으로서 40만 관(貫) 이상인 데가 두 곳[東京ㆍ成都], 30만 관 이상이 세 곳[開封ㆍ杭州 등], 20만 관 이상이 다섯 곳[京兆ㆍ鳳翔 등], 10만 관 이상이 서른 두 곳[西京ㆍ北京 등], 5만 관 이상이 일흔 세 곳[南京ㆍ淄州ㆍ靑州 등], 5만 관 이하가 쉰 곳[沂州ㆍ濰州ㆍ岢嵐 등], 3만 관 이하가 쉰 다섯 곳[遼東ㆍ漈州 등], 1만 관 이하가 열 아홉 곳[登州ㆍ瀘州 등], 5천 관 이하가 열 여섯 곳[桂陽 등]이었다.
생각건대, 송대(宋代)가 끝나도록 술과 누룩을 독점했으며, 말기에 와서는 방(坊)ㆍ장(場)을 박매(樸賣)해서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지금은 자세하게 기술하지 않는다.
송나라 때 여러 고을에 초방(醋坊)이 있었는데, 원우(元祐) 초년에 신하들이 초 독점하는 것을 철폐하기를 청했다.
소성(紹聖) 2년(1095)에 책사(翟思)가 여러 고을 초방의 이익 중에서 경비[調度]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다 상평(常平)으로 돌리기를 청하였다.
생각건대 초를 파는 것은 천하에 지극히 천한 짓이었다. 일찍이 만승(萬乘) 임금으로서 초를 파는 자가 있었는가? 우리나라가 비록 동쪽 변방에 있으나, 삼한(三韓) 적부터 나라의 임금으로서, 술과 초를 팔아서 이익을 취한 사람은 없었다. 저들이 오히려 중국이라는 것으로써 스스로 높은 체하는 것이 또한 부끄럽지 않은가?
원 태종(元太宗)이 술과 초에 관한 업무를 개설하고, 방(坊)ㆍ장(場) 관원이 매매를 독점해서 구실[課]을 마련하였다. 무종(武宗) 대덕(大德 : 1297~1306. 이는 成宗의 연호인데 무종이라고 함은 착오인 듯하다) 8년에 큰 도시 주과제거사(酒課提擧司)에 조방(槽房 : 양조장) 100곳을 설치하였다. 9년에 합병해서 서른 곳으로 만들고, 한 곳에서 하루 빚은 것이 25석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구준(丘濬)은 말하기를, “하루에 25석이면 서른 곳을 총계할 때에 하루 소비가 750석이고 한 달 소비는 2만 2천 500석이며 1년 소비는 27만 석이나, 오늘날 경사(京師)에서 1년 동안 소비하는 것은 이것뿐이 아닌 듯하다. 또한 술을 빚는 쌀은 모두 강남에서 나오는데, 배에 싣고 수레에 실어서 수천만 리를 지난 다음에야 여기에 이르니, 슬프다, 대저 백성의 마음에 하고 싶은 것을 금단해도 오히려 방종해질까 두려운데, 이에 누점(樓店)을 설치하고 불러들여서 그 하고 싶은 것을 방종하도록 함이 옳겠는가?” 하였다.
명나라 제도는 주국무(酒麴務)를 세우지 않고 오직 그 부과를 세무 안에 배정했는데, 초에 대한 금령은 없었다. 구준은 말하기를, “누룩에 대한 금령으로서 민가(民家)에서 제조하는 것이 1두를 넘지 않는 것은 백성이 스스로 하도록 청허(聽許)하고, 다만 교역(交易)해서 재물과 바꾸는 것은 허가하지 말기를 청(請)한다. 지금 천하에 누룩 만드는 곳은 오직 회안(淮安) 일부이나 소맥(小麥)을 허비[糜]하는 것이 많다 그 1년 동안 허비하는 것은 석으로 계산하면 무려 100만이나 되니 엄하게 금약함이 마땅하다. 무릇 민간에서 누룩을 제조하는 기구는 죄다 부수고, 범금(犯禁)하는 자가 있으면 사염(私鹽)이나 위전(僞錢)과 죄과를 같이 하면, 1년 동안에만도 소맥 100여 만 석이 남아서 백성의 먹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외쇄고(猥瑣考)
송나라 개보 6년(973)에 조서하여 영남(嶺南) 상고(商賈) 중에 생약(生藥)을 가지고 온 자는 (세금을) 계산하지 말도록 하였다. 또 시집가고 장가가는 자의 휘장(幃帳)과 경대(糚奩)에 대한 세를 면제하였다. 지도(至道) 원년(995)에 조서하여 양절(雨浙) 여러 주(州)에 종이 부채〔紙扇〕, 짚신 및 자잘한 물건은 모두 세를 받지 말도록 하였다. 진종(眞宗) 때에 항주(杭州)ㆍ월주(越州) 등 여러 주의 거위〔鵝〕ㆍ오리〔鴨〕에 대한 연액전(年額錢)을 면제하였다. 진종 상부(祥符) 원년(1008)에 조서하여 농기(農器)에 거두던 세를 면제하였다. 휘종(徽宗) 때에 일반 백성의 의복ㆍ신발ㆍ곡식ㆍ콩ㆍ닭ㆍ생선ㆍ과일ㆍ채소ㆍ숯ㆍ땔나무ㆍ자기(磁器)ㆍ와기(瓦器) 따위는 아울러 그 세를 견감(蠲減)하였다.
광종(光宗) 때에 조여우(趙汝愚)가 말하기를, “여러 현(縣)에 조치한 월용전(月椿錢)은 그 사이의 명색(名色)에 위법한 것이 많아서 세민(細民)에게 제일 해가 된다. 시험삼아 그 중 큰 것만 들어보면 국인전(麴引錢)ㆍ백납초전(白納醋錢)ㆍ매지전(賣紙錢)ㆍ호장갑첩전(戶長甲帖錢)ㆍ보정패한전(保正牌限錢)ㆍ절납우피근각전(折納牛皮筋角錢)과 양쪽이 송사(訟事)해서 이기지 못하면 벌전(罰錢)이 있고, 이미 이겼으면 환희전(歡喜錢)을 바치도록 하는 것이며, 다른 명칭과 괴이한 조목이 곳마다 같지 않다.” 하였다. 구준은 말하기를, “송나라가 강남(江南)으로 건너온 후에 이른바 총제전(總制錢)ㆍ월용전 따위가 있었는데 모두 상부(常賦) 이외의 것이며 일정한 제도의 가외로 다른 계책을 교묘하게 꾸민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당시 형편에 부득이해서 한 일이었고, 지금은 세대가 달라져서 죄다 혁파되었다.” 하였다.
《원사(元史)》에는 세액(歲額) 외에 부과한 것이 무릇 서른 두 가지나 있었다. 1. 역일(曆日), 2. 계본(契本), 3. 하박(河泊), 4. 산장(山場), 5. 요야(窯冶), 6. 방지조(房地租), 7. 문탄(門攤), 8. 지당(池塘), 9. 포위(蒲葦), 10. 식양(食羊), 11. 적위(荻葦), 12. 매탄(煤炭), 13. 당안(撞岸), 14. 산사(山査), 15. 누룩〔麴〕, 16. 생선〔魚〕, 17, 옻〔漆〕, 18. 효(酵), 19. 산택(山澤), 20. 탕(蕩), 21. 버들〔柳〕, 22. 아례(牙例), 23. 유우(乳牛), 24. 추분(抽分), 25. 포(蒲), 26. 어묘(魚苗), 27. 시(柴), 28. 양피(羊皮), 29. 자(磁), 30. 죽위(竹葦), 31. 생강(生薑), 32. 백약(白藥)이다.
구준은 말하기를, “《원사》 식화지(食貸志)를 상고하니, 이른바 세과(歲課)라는 것이 있었다. 산림과 천택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금(金)ㆍ은(銀)ㆍ주(珠)ㆍ옥(玉)ㆍ동(銅)ㆍ철(鐵)ㆍ수은(水銀)ㆍ주사(朱砂)ㆍ벽전자(碧甸子)ㆍ납(鉛)ㆍ주석(錫)ㆍ반(礬)ㆍ겸(鹻 : 소금 버캐)ㆍ대나무 따위는 그 이(利)가 매우 많은 것이고, 염법(鹽法)ㆍ다법(茶法)ㆍ상세(商稅)ㆍ시박(市舶) 이 네 가지는 여기에서 제외된다. 또 이른바 액외과(額外課)라는 것이 서른 두 가지나 있는데, 액외라고 이르는 것은, 세과는 모두 일정한 액수가 있는데 이 과(課)는 그 액수 안에 들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역일(曆日)이란 흠천감(欽天監)에서 역서(曆書)를 많이 인출(印出)해서 그 이익을 수입한 것이고, 계본(契本)이란 소위 아계(牙契)ㆍ인계(印契)로서 백성 중에 매매하는 것이 있으면 관에서 홍계(紅契)를 발급하던 것이었다. 하박(河泊)이란 선세(船稅)이고, 산장(山場)이란 재목에 대한 세이며, 요야(窯冶)란 염철(鹽鐵)에 대한 세이고, 방지조(房地租)란 저점(邸店)에 대한 세이며, 문탄(門攤)이란 관세(關稅)이고, 지당(池塘)이란 관개(灌漑)에 대한 세였다. 나머지는 혹 미상하므로 지금은 우선 생략한다.
역역지정(力役之征)
《주례》에 균인(均人)이 지정(地政)ㆍ지수(地守)ㆍ지직(地職)을 고르며, 인민(人民)과 우마(牛馬)ㆍ거련(車輦)의 역정(力政)을 고르는 일을 관장하였다. 무릇 역정을 고르는 데에는 그 해 연사(年事)로써 오르내리는데 풍년에는 공순(公旬)으로 3일을 쓰고, 중년(中年)에는 공순으로 2일을 쓰며, 무년(無年)이면 공순으로 1일을 썼다. 흉ㆍ찰(凶札)이 있는 해에는 역정이 없고 재부(財賦)도 없으며, 지수와 지직을 거두지 않고, 지정을 고르지 않는데, 3년마다 대비(大比)해서 크게 골랐었다. 정현은 말하기를, “정(政)은 정(征)으로 읽는다.” 하였다.
지정은 전지(田地)의 소출이며 고른다는 것은 그 9등급의 율을 고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현은 말하기를, “지수란 형씨(衡氏)ㆍ우인(虞人) 등속이고 지직이란 농자(農者)ㆍ포자(圃者) 등속이었다(가공언은 “太宰가 九職을 맡기고 그것으로 인해서 세를 내도록 했다.”고 하였다). 역정이란, 인민은 성곽과 골목 길ㆍ도랑을 정리하는 것이고 우마와 거련은 화물 따위를 전운(轉運)하는 것이다.” 하였다. 순(旬)이란 편(徧)인데, 공순이란 그해 공사(公事)의 해마다 한 차례의 돌림이라고 생각한다.
가공언은 말하기를, “흉은 그해 곡식이 익지 않은 것이고, 찰은 천하에 역병(疫病)이 유행하는 것이다.” 하였다. 정현은 말하기를, “재부는 9부(九賦)이다.” 하였다. 지수를 거두지 않으면 산택에 세가 없고, 지직을 거두지 않으면 9공(九功)에 공(貢)이 없으며, 지정을 고르지 않으면 조속(耡粟)에 율이 없고 오직 곡식이 익은 해에만 거두어들인다고 생각한다. 3년마다 대비(大比)한다는 것은 모든 조속 및 9부ㆍ9공을 혹 보태기도 혹 줄이기도 해서 그 율을 크게 고르는 것이었다. 정현은 말하기를, “공(公)은 사(事)이고, 순(旬)은 균(均)이다 순순(㽦㽦)한 원습(原隰)이라는 순(㽦)과, 곤(坤)이 변해서 균(均)이 된 것처럼 읽는데 지금 글에도 순(旬)으로 씌어진 것이 있다.” 하였다.
살피건대 순(旬)과 순(巡)은 모두 편(徧)이었다. 《시경(詩經)》에, “내순 내선(來旬來宣)이라는 말이 있는데 순을 편”이라 하였다(毛詩傳). 《한서(漢書)》 책방진전(翟方進傳)에, “순세(旬歲)가 되어 한가하게 양사 도례(兩司徒隷)를 면했다.”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순(旬)은 만(滿)인데 순세는 만세(滿歲)라는 말과 같다.” 하였다. 공순이란 공역(公役)하는 해의 한 편(徧)이라는 것인데 왕제(王制)에, “백성의 힘을 쓰는 것이 1년에 3일을 넘지 않는다.” 했고 또한 세 편이라는 것인데, 정현의 뜻은 그른 듯하다. 생각건대, 흉찰이란 대흉 대살(大殺)된 해로서 상ㆍ중ㆍ하 3등의 해 외에 더 심한 것이었다. 늠인(廩人)이 4부(四鬴)ㆍ3부ㆍ2부 3등의 해로 구별했는데, 능히 2부도 못 되는 것은 또 그 밖이었다. 왕제에, “백성의 힘을 쓰는 것은 1년에 3일을 넘지 않는다.” 하였다.
진호(陳澔)는 말하기를, “사려(師旅)에 대한 일은 이 규례에 구애되지 않는다.” 하였다. 후주(後周)의 제도는 사역(司役)이 역역(力役)에 대한 정령(政令)을 관장하였다. 풍년에는 3순(旬)을, 중년(中年)에는 2순을, 하년(下年)에는 1순을 넘지 않았는데, 도역(徒役)을 일으키는 것도 한 집에 1인을 넘지 않았다. 생각건대, 공순(公旬)에 다른 뜻이 있었다. 혹은 공순으로 3일을 부린다는 것을 1년에 30일을 부리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주 제도가 이와 같았고, 수 양제(隋煬帝)도 낙읍(洛邑)을 건설하면서 달마다 정장(丁壯) 200만 명을 사역시켰는데 모두 경문(經文)을 잘못 해석한 까닭이었다. 나라에 백성 10만 명이 있는데 모두 3일씩을 부린다면 30만 병이 되는데 무슨 일인들 할 수 없겠는가? 해마다 30일을 사역한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다만 사려(師旅)에 대한 일은 이 제한에 들지 않았다.
당나라 때, 조(租)ㆍ용(庸)ㆍ조(調) 하던 법은 백성의 힘을 해마다 20일씩 사용하는데 윤월(閏月)이 든 해에는 2일을 더했고, 역역(力役) 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루에 깁(絹) 3천씩을 매겨서 용(庸)이라 일렀다. 일이 있어 25일을 더 역역한 자는 조(調)를 면제하고, 30일을 더한 자는 조(租)ㆍ조(調)를 모두 면제했는데, 정당한 역(役)을 통계해서 50일을 넘지 않았다. 생각건대 1년 동안에 백성을 50일이나 부리게 되면 백성이 견디어내지 못한다. 경서의 뜻을 한 번 그르치자 그에 따른 해독이 이와 같았다. 당 선종(宣宗) 대중(大中) 9년(855)에 조서하기를, “주현(州縣)에 차역(差役) 하는 것이 고르지 못하니 지금부터 현마다 백성의 빈부와 역사(役事)의 경중에 의거해서 차부(差簿 : 人夫帳簿)를 작성한 다음, 자사(刺史)에게 보내서 검열(檢閱)ㆍ서명(署名)을 받고, 영청(令廳)의 관리에게 익히도록 하여 역사가 있을 때마다 영(令)에게 위임해서 차부대로 돌려가며 차역시켜라.” 하였다.
살피건대, 차역하는 법은 이미 당대에 생겼으며, 송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송 태조 건륭(建隆) 3년(962)에 여러 주에 영을 내려서, 도로(道路)의 거민(居民)을 사역하여 체부(遞夫)로 삼지 못하도록 하였다. 5월에 조서하여 영좌(令佐 : 영의 막료)가 차역을 검찰(檢察)하여 고르지 못함이 있으면 백성이 서로 규탄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옛 제도에 역사를 부과하는 일은 모두 호민(戶民)에게 나왔고, 군국(軍國)에서 관물(官物)을 운반하는 것은 죄다 교거(僑居)하는 사람으로 충수했는데, 이 때에 와서 개정하였다. 국초(國初)에 옛 제도를 따라서, 아전이 관물을 주관하고 이정(里正)ㆍ호장(戶長)ㆍ향서수(鄕書手 : 書吏)가 부세를 감독했고, 기장(耆長)ㆍ궁수(弓手)ㆍ장정(壯丁)이 도적을 체포했으며, 승부(承符)ㆍ인력(人力)ㆍ수력(手力)ㆍ산종관(散從官)이 구사(驅使)에 분주하였다. 현(縣)에서는 조사(曹司)부터 압록(押錄)까지, 주(州)에서는 조사에서 공목관(孔目官) 이하 잡직(雜職)으로써 우후(虞候)ㆍ간도(揀搯) 등에 이르기까지 각각 향호(鄕戶)의 등급 차례로써 차임을 보충하였다. 구준은 말하기를, “이것은 송나라 초기 이래로 차역하던 법이다.” 하였다.
무릇 인호(人戶)를 사역하게 되면 그 등급 차례에 따라 돈을 내며, 면역전(免役錢)이라 불렀다. 그리고 방곽(坊郭)에 있는 민호 및 정장(丁壯)이 못 되거나 단정(單丁)ㆍ여호(女戶)와 사관(寺觀)과 품관(品官)의 집은, 예전에는 색역(色役 : 소임)은 없었으나 돈을 내는 것을 조역전(助役錢)이라 하였다. 무릇 돈을 배정(排定)할 때에 먼저 주와 현에 꼭 소용되는 고치(雇直)의 다소를 보고 호등(戶等)에 따라서 고르게 취했는데, 고치가 이미 쓰기에 충분하면 또 그 숫자를 율로 하고 2분을 더 취해서 수한(水旱)에 대비하였다. 결원이 있어 비록 증원하더라도 2분을 넘지 못했는데 그를 면역관잉전(免役寬剩錢)이라 일렀다.
구준이 이르기를, “상고하건대 이것은 송나라 희령(熙寧) 때의 면역법이었다. 그 논의를 한강(韓絳)이 시작했고 왕안석(王安石)이 이룩했다.” 하였다. 생각건대, 이것은 지금 우리나라의 민고전(民庫錢)과 서로 비슷하였다.
원우(元祐 : 송 철종 때의 연호, 1086~1093) 초년에 사마광(司馬光)이 “면역법(免役法)의 폐해가 다섯 가지나 있으니 조칙을 내려서 여러 가지 역인을 다 혁파하고 아울러 희령 때 옛 법대로 하자.”고 말하자, 장돈(章惇)이 사마광을 논박하여 말하기를, 갑자기 고쳤다가 후일 후회하게 됨은 마땅치 못하다.” 하였다. 소백온(邵伯溫)이 이르기를, “오ㆍ촉(吳蜀) 지방 백성은 고역(雇役)을 편리하게 여기고, 진ㆍ진(秦晉)지역 백성은 차역(差役)을 편리하게 여긴다.” 하였다. 여중(呂中)은 말하기를, “사마광은 차역을 주장하고, 왕안석은 고역을 주장했는데, 두 가지 역의 경중이 서로 같고 이해도 서로 반반이다. 차역하는 법은 비록 백성에게 역역(力役)하는 수고로움은 있으나, 전지가 있으면 조(租)가 있고 조가 있으면 역(役)이 있어서, 모두 나의 직분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유감될 바가 없다. 그 중에 혁파할 만한 것은 아전(衙前)의 중한 역이다. 고역하는 법은 백성이 비록 역역에 대한 값은 내어도, 온 가족이 편하게 앉아서 삶을 영위하는 계획을 할 수 있으니 또한 원망이 없다. 그 중에 없앨 만한 것은 관잉전(寬剩錢)을 지나치게 배정하는 것이므로 그 편리함에 따라서 해가 되는 것을 없애면 두 가지 역을 모두 시행할 만한 것이다.” 하였다.
구준은 말하기를, “예나 지금이나 백성을 사역하는 법은 반드시 이 두 가지를 겸한 다음이라야 시행하기에 치우치지 않으며, 특히 이해가 서로 반씩일 뿐만도 아니다.” 하였다.
생각건대, 송나라의 차역하던 법은 대개 천하의 학정이었다. 심지어는 과부가 개가하고 친족끼리 갈라살며 혹 전지를 남에게 주어서 상등되는 것을 면하고 혹 비명의 죽음을 구해서 단정(單丁)이 되기도 하였다(이상은 韓琦의 疏章에 있다). 집에는 감히 소를 먹이지 못했고, 마을에는 감히 뽕나무를 심지 못했으며(司馬光의 상주에 있다), 술잔과 공이를 남기지 않았고, 숟가락과 젓가락도 모두 계산하였다(吳充의 말이다). 그런데 왕안석이 면역법을 창설해서 그 폐해를 죄다 없애므로 백성이 편하게 여겼었는데 애석하게도 붕당(朋黨)의 화가 백성에게 미쳐서 비록 사마광의 어짊으로도 또한 당론(黨論) 때문에 백성의 이(利)를 막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대저 백성의 힘을 쓴다는 것은 성을 쌓거나 축대를 쌓는 일과 냇바닥을 파고 도랑을 정리하는 따위이니, 그 징발하는 것에 시기가 있고 그 시작과 마침에 기한이 있어서 농한기에 조용하게 사역시킨다면 그 해가 진실로 심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이와 같이 수레로 운반하고 채찍으로 몰아가며 도둑을 쫓고 빈객(賓客 : 외국 사신 따위)을 맞이하여 겨울도 여름도 없고 낮도 밤도 없으며 구렁에 자빠지고 구덩이에 떨어져 땀을 흘리며 무서워서 벌벌 떨며 숨죽여 쉬며 개나 닭보다 못함과 같겠는가?
차역과 면역은 그 이롭고 해로움과 편리하고 편리하지 못한 것의 차이가 흑백처럼 분명하건만, 당시에 정사를 의논하던 신하가 밑으로는 백성의 실정을 숨기고 위로는 임금의 결단을 변동시켜서 반드시 그 법을 혁파한 다음에 그만두었으니 어찌 심하지 않은가? 후세에 논의하는 자는 오히려 양쪽이 다 옳다, 혹은 다 그르다 하여 감히 굽고 곧음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나는 이로써 군자와 소인의 논쟁에도 또한 다 알 수 없음이 있는 것을 알았다.
희령 4년에 풍경(馮京)이 차역을 정리해서 보갑(保甲)으로 만듦으로써 인민이 극도고 노고하게 되는 폐단을 말하니 상이 말하기를, “이웃 백성에게 물어보라.” 하였는데 모두 면역법으로 함을 기쁘게 여겼다. 대개 비록 돈을 내어서 그 신역(身役)이 면제되었더라도 추후(追後)해서 형책(刑責)을 당할 걱정이 없으므로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던 바였다. 문언박(文彦博)은 말하기를, “조종(祖宗)께서 마련한 법제가 갖추어 있는데 반드시 경장(更張)해서 인심을 잃을 필요가 없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법제를 경장하면 사대부는 기뻐하지 않을 자가 진실로 많겠으나 백성에게야 무엇이 불편하겠는가?”라고 하자 언박은 말하기를, “사대부와 더불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지 백성과 더불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마단림은 말하기를, “노공(潞公 : 문언박을 가리키는 말)의 이 말은 잘못이었다. 대개 개보(介甫 : 왕안석의 字)가 새 법을 시행하면서, 그의 뜻은 용감하게도 모든 원망을 자신이 책임지며, 헐뜯음과 칭예함에 동요되지 않았다. 역법(役法)을 시행하여 방곽 품관(坊郭品官)의 집도(즉 都城에 있는 朝官) 모두 돈을 바치도록 하고, 방장 주세(坊場酒稅)의 수입을 다 조역(助役)으로 돌렸기 때문에 사부(士夫)와 호족(豪族)들은 원망이 없지 않았으나 실상 농민에게는 이로웠다. 이것이 신종(神宗)의 ‘백성에게 무슨 불편함이 있겠느냐?’라는 말이 있게 된 까닭인데, 노공의 이 말과 동파(東坡 : 蘇軾의 호)가 이른바 ‘피폐함이 너무 심해서 주전(廚傳)도 쓸쓸하다.’라는 것이 모두 개보가 ‘습속에 따라서 칭찬만 요구하는 자는 족히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지적한 것이니 이래서야 어찌 족히 그 치우침을 바로잡아서 폐단을 구제하겠는가?” 하였다.
생각건대, 차역하는 폐단은 당나라 말기에 일어났고, 송 태조ㆍ태종이 조보(趙普)ㆍ왕부(王溥)와 더불어 의정(議定)한 금석 같은 법이 아닌데 어째서 조종의 법제라고 이르는 것인가? 삼대 때 우ㆍ탕ㆍ문ㆍ무(禹湯文武)가 나라를 세우고 중정(中正)의 도를 세우면서, 예법을 마련하고 음악을 지어서 금석 같은 법을 드리우니, 어진 신하와 착한 보필이 사군(嗣君)에게 고하기를, “어기지 말며 잊지 말고, 죄다 옛법대로 하십시오.” 하였다.
그런데 후세에 세상이 어지러운 때를 타서 우뚝 일어난 자는 천명이 아직 정돈되지 않았고 인심도 복종되지 못하여 호족들의 원망을 받게 될까 염려해서 드디어 쇠란한 세대의 나쁜 제도가 겹겹이 쌓여서, 벌써 곪아터질 종창과 같은 것을 그대로 따라하였다. 혹 한 가지라도 좋은 소견이 있어서 경장하는 방법을 시험하고자 하면 원로 대신과 침중(沈重)하여 덕이 있는 듯한 자가 반드시 한마디 말로써 천천히 억압하면서, “조종께서 마련한 법제를 반드시 경장할 것이 아니다.” 하면 호족과 권세를 믿는 자로서 사(私)만 알고 공(公)은 모르는 자가 반드시 따라서, “노야(老爺)의 태산 교악(泰山喬岳) 같은 덕망이 국가를 진정할 만하다.” 한다. 그러나 실상 향원(鄕愿) 거짓 덕이고, 선을 좋아하는 마음은 한 점도 없는 자이다.
문언박(文彦博)이 촉금(蜀錦)으로써 궁중에 통하여 정승 자리를 도모했으니 그 이(利)를 즐기고 염치 없는 비루한 사람임이 벌써 분명했다.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참 정성은 없고, 호족을 돌보는 더러운 뜻이 있었으니, 어찌 면역전이 백성에게 편리하다고 이를 수가 있었겠는가? 그가 곧 말하기를, “임금이 사대부와 더불어 천하를 다스리니, 사대부의 소원에 따름이 마땅하다.” 했으니 이 한마디에서 그 심술의 은밀함을 추측할 수가 있다.
아아! 시비는 성패에 확정되고 선악은 강약으로 결단되었으니 “같은 데에 찬동하는 자로 하여금 그를 바로잡게 하니, 이미 같은 데에 찬동했는데 어찌 능히 바로잡겠는가?” 하는 말이 진실로 천고의 명언이었다. 총괄해서 말하자면 차역은 나라에 능히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전(驛田)ㆍ참전(站田)ㆍ원전(院田)ㆍ도전(渡田)이 있어 급주(急走)하는 자를 공궤(供饋)하고, 체전(遞傳)하는 사람을 돕는 데에 백성의 재물을 거두지 않고 이에 공전(公田)을 주었으니, 그 송나라 법과 비교하면 매우 인후했다. 또 모든 진상(進上)하는 물품을 수운(輸運)하는 태가(駄價)와 짊어지고 가는 다리 품을 모두 대동미(大同米) 안에서 수량을 대조하여 회감(會減)해서 백성의 힘을 너그럽게 하는 것도 극진하였다. 그런데 군현(郡縣)에서 사사로 명목을 세워서 그 백성을 부리며 그 재물을 징수함으로써 이에 민고(民庫)라는 것이 생기게 되어 모질게 거둠이 대중이 없고, 훔쳐 먹는 것도 끝이 없으니, 전야가 날로 황폐해지고 여리(閭里)가 날로 공허해진다. 나라에서는 모르는 바이나 백성은 다 죽을 참이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송나라에서 시행하던 차역법과 면역법이 비록 좋은 점과 나쁜 점은 있었으나 반드시 조정 대신에게 의논하여 제도를 정하고 조서를 내려서 식례를 반포한 다음이라야 관에서 징수할 수 있고 백성이 응할 것인데 지금 우리나라에 민고의 법은 군ㆍ현의 작은 아전들이 서사(胥史)와 더불어 법제를 사사로 세우고 수령은 몽매하여 문서 끝에 조심스럽게 서명(署名)할 뿐인데, 거리낌없이 시행하여도 능히 막지 못하니 이것은 자그마한 아전이 임금의 권한을 훔친 것이다. 이로 인해서 말한다면 비록 법 없는 나라라고 이르더라도 변명할 수가 없다.
명나라에는 요역(徭役)을 고르게 하는 법이 있어서 10년 만에 한 차례씩 노역하므로 백성은 자못 편하게 여겼다.
구준은 말하기를, “요역을 고르게 하는 법을 강남에는 시행할 수 있어도 강북에는 시행할 수 없으며, 큰 현에는 시행할 수 있어도 작은 현에는 시행할 수 없으며, 큰 호에는 시행할 수 있어도 작은 호에는 시행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강북의 주ㆍ현에는 백성은 적은데 요역이 많기 때문이다. 큰 현에는 백성이 많으니 10년을 기다려서 한 번 요역해도 가하나 작은 현에는 백성이 적어서 요역한 지 3~4년 만에 벌써 한 차례가 돌아온 자가 있다. 큰 호에는 살림이 많고 정구(丁口)도 많은데, 살림이 많으면 재물 내기가 쉽고 정구가 많으면 힘 내기가 쉽다 무릇 가난한 호는 10년 동안의 요역을 일시에 아울러 쓰게 되니 어찌 능히 감당해내겠는가?” 하였다.
이사지례(弛舍之例)
왕제(王制)에, “나이가 80세가 된 자는 자식 1명이 종정(從政)하지 않고, 90세가 된 자는 그 가족도 종정하지 않으며, 몹쓸 병이 있어서 옆에 사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는 한 사람이 종정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50세가 되면 역정(力政)에 나가지 않는다.” 하였다. 종정한다는 것은 사대부가 나가서 벼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어(論語)》에, “지금 종정하는 자는 위태하다.” 했고, 또 “유(由)는 종정토록 할 만하다. 구(求)는 종정토록 할 만하다.” 하였다 《춘추전(春秋傳)》에는 “진(晉)나라에 종정하는 자가 새로 나왔다.” 했고(宣公 12년조), 또 “자산(子産)이 종정하니 여인(輿人)도 칭송했다.” 하여(襄公 30년조) 그 글이 뚜렷하다. 다만 정현의 주(注)와 잡기(雜記)와 왕제에 모두 종정을 역역하는 정(征)이라 했는데, 그들의 뜻도 또한 근본한 데가 있었다. 종정(從政)이란 종정(從征)이니 부모가 아주 늙었으면 그 자식이 집을 떠나서 멀리 갈 수 없으므로 모든 사려(師旅)와 성지(城池)의 역사(役事)는 반드시 면제해서 왕제에 이른 바와 같은 것이 있었지만, 그 부역을 견감하는 일 같은 것은 경서(經書)에 명문이 없다. 50세가 되면 역정하는 데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향대부(鄕大夫) 조에, “나라 안은 60세 된 자와 야외에는 65세 된 자도 모두 부세(征)한다.” 했으니(문장은 위에 있다), 역정이 부역이 아님도 여기에서 분명하다.
한 문제(漢文帝)는 나이 많은 사람을 예대(禮待)해서, 90세인 자는 한 아들이 역사하지 않으며, 80세인 자는 2산(算)을 면제했다. 무제(武帝) 건원(建元) 원년(기원전 140)에 조서하여 백성의 나이 80이 되면 2산을 면제하고, 90이 되면(그 집의) 갑졸(甲卒)을 면제했다. 또, “90이상은 그 아들이나 손자의 구실을 면제하고, 그 사람이 종신토록 처첩(妻妾)을 거느리고 공양(供養)하는 일을 이룩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것은, 나이 80이 된 자는 그 집 사람 2명에게 구산(口算)을 면제하는 것인데, 옛적에는 명문(明文)이 없었다.
후주(後周) 제도는 나이 80이 된 자는 자식 1명이 종역(從役)하지 않고, 100세가 된 자는 그 집이 종역하지 않으며, 몹쓸 병이 있어서 옆 사람이 아니면 살아가지 못할 자는 1명이 종역하지 않았다. 당나라 개원(開元) 때, 호부령(戶部令)에는, “모든 백성의 나이가 80이 되었거나 위독한 병이 있는 자에게는 모시는 사람 1명을 주고, 90세이면 2명을 주며, 100세이면 5명을 준다.” 하였다.
생각건대, 이것은 《주례》에, 비록 명문은 없으나 또한 아름다운 법이었다. 그러나 80세가 된 사람은 많아서 허위가 있을까 염려되니, 90세에 1명을 면역시키고 100세에는 온 집을 면역시킴도 또한 마땅할 것이다.
이상은 우로지사(優老之舍)임.
잡기(雜記 : 《예기》 편명)에 이르기를, “기년상(朞年喪)에는 졸곡(卒哭) 후에 종정(從政 : 정사에 종사함)하고 9개월 복상에는 장사만 마치면 종정한다.” 하였다. 왕제에는, “부모의 상에는 3년 동안을 종정하지 않고 제최복(齊衰服)과 대공복(大功服)에는 3개월 동안을 종정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것은 사대부의 예이다. 정현의 주에는, “요역을 면제한다.” 했으나 그 뜻은 잘못된 것이다(徐乾學은 “이것은 모두 사대부가 벼슬을 바친 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고 서민을 이른 것은 아니다.” 하였다).
예운(禮運 : 《禮記》의 편명)에, “나라에 벼슬하면 신(臣)이라 하고, 사가(私家)에 벼슬하면 복(僕)이라 하는데 3년상을 당했으면 기년은 부리지 않는다.” 하였다.
월어(越語)에는, “구천(句踐)이 백성에게 맹세하기를, ‘실을 당한(當室)자가 죽으면 3년 동안 그 정(政)을 쉬고, 지차 아들이 죽으면 3개월 동안 그 정을 쉰다.’고 했다.” 하였다.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 “옛적에 친상을 당한 자는 그 문간에서 부르지 않고, 제최복과 대공복을 당한 자는 5개월 동안을 역역하는 구실에 종사하지 않으며, 소공복(小功服)을 당한 자는 장사 전에는 역역하는 구실에 종사하지 않는다.” 하였다.
생각건대, 유향의 《설원》에는 역역하는 구실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으나, 호조(戶調)하는 부(賦 : 구실)는 경서(經書)에 그런 글이 없다. 지금 우리나라 법에는 번(番)이 면제되는 대신 베(布)를 상납하고, 상(喪)으로서 면제되는 법은 없다. 사사로 모집하는 군관(軍官)의 돈(錢)은 상을 당하면 면제하는데(喪頉이라고 이른다), 오직 3년상이라야 이런 혜택이 있게 되는데 아전이 이 법을 인해서 간사한 짓을 하며, 상고(喪故) 없는 자를 남몰래 공문(公文)을 내어서 또한 상고로 만들어 이를 면제하도록 하니 법이 본디 주밀하지 못한 때문이다.
한 선제(漢宣帝) 지절(地節) 4년(기원전 66)에 조서하여 “조부모의 상을 당한 모든 자는 요사(繇事)를 시키지 말고, 염(斂)하고 송종(送終)함으로써 자식된 도리를 다하게 하라.” 하였다.
생각건대, 요사도 또한 역역하는 구실이었다.
이상은 애상지사(哀喪之舍)임.
지관(地官) 여사(旅師)에, 무릇 새로 이사온 백성의 요구는 모두 들어 주고 정역(征役)을 없애도록 하였다.
생각건대, 이때에는 전(廛)을 준 다음에 전지를 주었고 전지를 준 다음이라야 백성이 되어서 이에 정역이 있었기 때문에 이 법이 있었으나 후세에는 관에서 전을 주지 않았으며, 옮겨가고 옮겨옴에 일정함이 없어서 요역을 도피하는 백성이 아침에는 동쪽에 있다가 저녁에는 서쪽에 있기도 하니 이 법은 쓸 수가 없다.
왕제에, “제후의 나라로 옮기는 자는 3개월 동안을 종정(從政)하지 않고, 제후의 나라에서 대부의 가읍(家邑)으로 옮겨온 자는 1년을 종정하지 않는다.” 하였다.
주하기를, “대부 채지(采地)의 백성으로 제후의 나라로 옮겨와서 백성이 되면 새로 옮겨왔다는 이유로 반드시 요역을 면제함이 마땅하나, 다만 제후의 나라는 땅은 넓고 요역이 적기 때문에 3개월만 종정하지 않으며, 제후의 나라에서 대부의 채읍으로 옮겨오면 대부의 채읍에는 요역은 많으면서 땅은 비좁기 때문에 1년이 되도록 종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종정이란 역역하는 정이므로 이 나라에서 옮기려는 자는 3개월을 종정하지 않고, 저 나라에서 새로 온 자는 1년을 종정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한 선제 지절 3년에 떠돌던 백성으로서 귀환한 자에게는 산(算)하지 말도록 하였다. 광무 황제(光武皇帝) 영평(永平 : 58~75. 이는 한 명제의 연호인데 여기는 착오인 듯하다) 9년에, 삭방(朔方)으로 옮겨간 자에게 구산(口算)을 면제하였다.
장제(章帝) 원화(元和) 원년(84)에 전지가 없어서 다른 지계(地界)로 옮겨간 자에게는 3년 동안 산을 면제하였다. 화제(和帝) 때에 떠돌이 백성으로서 돌아온 자에게는 1년 동안 전조(田租)를 면제하였다.
생각건대, 위ㆍ진(魏晉) 이래로 백성을 호적하는 법을 반드시 주호(主戶)와 객호(客戶)로 분간한 것은 새로 옮겨온 자에게 가벼운 쪽으로 따르게 하려던 것이었다. 부동(浮動)하는 백성과 요역을 도피하려는 자가 이 때문에 이리저리 전전했는데, 육지(陸贄)도 또한 그 불편함을 말하였다. 왕자가 법을 세우는 데에는 반드시 5가(家)를 비(比)로, 5비를 여(閭)로 하여 5와 5가 서로 보증하도록 해서 부동하는 자가 그 사이에 끼여들지 말게 하며, 혹 우접(寓接)한 자도 요역과 부세를 용서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전지를 사고 전택(廛宅)을 두어서 영구히 살 계책을 정하는 자는 3년 동안 부를 면제함이 또한 알맞을 것이다.
이상은 신사지사(新徙之舍)임.
왕제에, “향(鄕)에 명하여, 수사(秀士)를 논해서 사도(司徒)에 올리는 것을 선사(選士)라 하고, 사도가 선사 중에 우수한 자를 논해서 학(學)에 올리는 것을 준사(俊士)라 하는데, 사도에 오른 자는 향에서 정(征)하지 않고 학에 오른 자는 사도에서 정하지 않는다.” 하였다.
선사에게는 향 중에서 요역을 면제하고 준사에게는 국(國) 중에서 요역을 면제하는데 이것이 그 차(差)이다. 향대부(鄕大夫) 조에, “어진 자와 유능한 자는 모두 사(舍)한다.” 하였다.
한 무제(漢武帝)가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제자 50명을 두고 그 신역(身役)을 면제하였다.
원제(元帝)는 유사(儒士)를 좋아하여 경서 한 가지만 통한 자도 수년 동안 요역을 면제시켰는데, 그 용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변경하여 관원 1천 명을 두었다.
위(魏)나라 황초(黃初) 원년(220)에 비로소 태학(太學)을 여니 제생(諸生)이 1천 명이나 되었다. 박사 제자는 본디부터 요역을 면했으나 마침내 학문을 익힌 자는 없었다.
당나라 제도는, 국자학(國子學)ㆍ태학(太學)ㆍ사문학(四門學) 학생으로서 준사는 모두 요역 부과가 면제되었다.
주나라 제도에 선사와 2는 육향(六鄕) 밖에 나가지 않았고 육향은 왕성(王城) 안에 있었다. 주나라 법에 또 국택(國宅)에는 부세(征)가 없었는데, 향대부에 이른바 어진 자와 유능한 자에게 이사(弛舍)한다는 것은 부가지정(夫家之征) 및 구직지공(九職之貢)과 역역지정(力役之征)뿐이었다. 그런데 후세에는 태학 진사(太學進士)가 반드시 왕성 안에만 있지 않았으니, 그 택전(宅廛)에 대한 세가 면제될 수 없다 한ㆍ위(漢魏)의 제도는 다만 그 신역(身役)을 면제했으니 태학생으로서 면제되어야 할 바는 정전(丁錢)뿐이다.
이상은 현능지사(賢能之舍)임.
한 고조(漢高祖) 11년(기원전 196)에 여러 고을이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는데, 거기에서 모반하여 항복한 자에게는 3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였다. 혜제(惠帝) 4년(기원전 191)에 백성 중에 효제(孝悌)하고 농사를 힘껏 한 자는 그 신역을 면제하였다. 수(隋)나라 제도는, 효자ㆍ순손(順孫)ㆍ의부(義夫)ㆍ절부(節婦)와 동일 호적에 있는 자는 모두 과역(課役)이 면제되었다(당나라 제도도 같다). 송나라 신종(神宗) 때에 조서하여 문려(門閭)를 정표(旌表)한 칙서(勅書)가 있는 자는 역전(役錢)을 면제하였다.
살피건대, 절행(節行)을 복호(復戶)하는 데에는 제한이 있는 것이 마땅하다. 한나라의 기신(紀信), 당나라의 장순(張巡)ㆍ허원(許遠)ㆍ안고경(顔杲卿), 송나라의 문천상(文天祥)ㆍ육수부(陸秀夫), 명나라의 방효유(方孝孺)ㆍ경청(景淸) 등을 봉사(奉祀)하는 집은 비록 10대(代)라도 복호함이 마땅하며 그 나머지 충신ㆍ효자ㆍ열녀는 혹 그 자식만 면제하고 혹은 그 손자대까지 미치게 할 것이니, 마땅히 면제를 조서하는 당초에 대수를 분명하게 나타낼 것이며, 과람하게 할 수는 없다.
이상은 절행지사(節行之舍)임.
한 고조 5년(기원전 202)에 조서하여, 제후의 아들로서 관중(關中)에 있었던 자는 복호하였다. 문제 4년(기원전 176)에 여러 유(劉)씨로서 속적(屬籍)이 있는 자는 복호하고, 집에 간예(干豫)함이 없도록 했다.
생각건대, 속적은 우리나라의 《선원보략(璿源譜略)》이 이런 유였다. 당나라 제도는, 태황 태후(太皇太后)ㆍ황태후(皇太后)ㆍ황후(皇后)의 시마복(緦麻服) 이상의 친척과 내명부(內命婦)로서 1품 이상의 친척이나 군왕(郡王) 및 5품 이상의 조부ㆍ형제(祖父兄弟)는 모두 과역을 면제하였다.
생각건대, 주나라가 친척을 높였기 때문에 노나라와 정(鄭)나라의 법에 공족(公族)은 모두 세경(世卿)과 세록(世祿)이었다. 그런데 당 이래 공족을 억압해서 서성 천족(庶姓賤族)보다 못하게 했음은 천리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법은, 공족은 비록 10대라도 군역을 매기지 않았기 때문에 서성 천족이 거짓 족보를 만들어서 함부로 선파(璿派)에 의탁한다. 내가 전일 서도(西道) 고을에 있을 때에 스스로 선파라고 칭탁하는 자를 보면 반드시 마음을 다해서 조사했는데, 위모(僞冒)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선원보략》에 4대만 기록함은 너무 간략한 듯하니, 그 제한을 넓혀서 4대 이상의 자녀는 다 기록하기를 지금 법과 같이 하고, 4대 이하부터 10대까지는 성 손(姓孫)만 기록하도록 하여 무릇 이름이 그 《보략》에 있는 자는 호세(戶稅)만 있고 그 정전(丁錢)을 면제하면, 친척을 친하게 하는 뜻에 거의 맞을 것이다.
이상은 의친지사(議親之舍)임.
한 선제 지절 2년에 조서하여, “박륙후(博陸侯 : 霍光의 封號)의 공덕이 훌륭하니 그 후손을 보호하고 간예함을 없애서 그의 공이 소상국(蕭相國 : 蕭何)과 같이 하라.” 하였다.
원강(元康 : 선제의 연호, 기원전 65~62) 원년, 고 황제(高皇帝) 때 공신이었던 강후(絳侯)ㆍ주발(周勃) 등 136명의 후손을 복호하고 제사를 받들게 하여 대마다 끊기지 않게 하고 사손(嗣孫)이 없는 자는 그 차손(次孫)을 복호하였다.
생각건대, 공신에도 원훈(元勳)과 차훈(次勳)이 있으니 제복(除復)하는 데에 원근(遠近)의 차가 있음이 마땅하며, 개괄(槪括)해서 소하(蕭何)ㆍ곽광(霍光)을 예로 함은 불가하다.
이상은 의공지사(議功之舍)임.
한 고조 11년에 풍읍(豐邑) 사람으로서 관중(關中)에 이사한 자는 그 신역을 모두 제복하였다. 12년에 패군(沛郡)을 탕목읍(湯沐邑)으로 만들어서 그 백성들을 복호하고 영구토록 간예함이 없게 하였는데, 패군의 부형들이 굳이 청하므로 이에 풍읍도 복호해서 패군과 같이 하였다.
광무(光武) 건무(建武) 5년(29)에 조서하여 제양현(濟陽縣)에 2년 동안 요역을 면제하였다(황제가 제양현에서 났다).
19년에 남돈현(南頓縣)에 행차해서 이인(吏人)에게 사여(賜與)하고 남돈현의 1년 조세를 면제하였다.
20년에 제양현의 요역을 6년 동안 면제하였다.
30년에 제양현의 요역을 1년 동안 제복하였다.
환제(桓帝) 영강(永康) 원년(167), 박릉(博陵)ㆍ하간(河間)두 군을 복호해서 풍ㆍ패와 같이 하였다.
영제(靈帝) 광화(光和) 6년(183)에 장릉현(長陵縣)을 복호해서 풍ㆍ패와 같이 하였다.
생각건대, 왕자는 사정이 없는 것인데 풍ㆍ패라 하여 사정을 쓸 수 있는가? 요역을 면제함이 돈이나 비단을 많이 줌만 같지 못하다.
이상은 제향지사(帝鄕之舍)임.
문제 3년에 태원(太原)에 행차했다가 진양(晋陽) 중도(中都) 백성에게 3년 동안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무제 원봉(元封) 5년(기원전 106)에 봉선(封禪)을 거행하고, 거둥한 현에는 그 해 조부(租賦)를 내지 말도록 하였다.
천한(天漢 : 무제의 연호, 기원전 98) 3년에 태산에 봉선을 거행하고, 지나는 곳에는 전조(田租)를 내지 말도록 하였다.
신작(神爵 : 선제의 연호, 기원전 61) 원년에 임금이 감천(甘泉)과 하동(河東)에 행차하면서 지나는 곳에는 전조를 내지 말도록 하였다.
영광(永光 : 원제의 연호, 기원전 43) 원년에 감천에 거둥하면서 지나는 곳에는 조부를 내지 말도록 하였다.
살피건대, 채옹(蔡邕)이 지은 《독단(獨斷)》에 이르기를, “천자의 거가(車駕)가 이르는 곳을 행(幸)이라 한다. 그것은 천자가 이르는 곳에 음식과 포백(布帛)을 하사하고 백성에게 벼슬도 등급이 있게 하며 혹 전조도 면제하는 영을 내리기 때문에 행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대개 한나라의 법이었고 옛 경서에는 근거한 데가 없다.
이상은 행행지사(行幸之舍)임.
한 고조 12년에 조서하여 진 시황제(秦始皇帝), 초 은왕(楚隱王) 진섭(陳涉), 위 안희왕(魏安釐王), 제 민왕(齊湣王), 조 도양왕(趙悼襄王)의 무덤을 수호하도록 각 열 집(十家)을 주었는데, 진 황제에게는 스무집, 위 공자(魏公子) 무기(無忌)에게는 다섯 집을 복호하였다.
송 신종(宋神宗) 때에 조서하여, “성조(聖祖) 및 조종(祖宗)의 능침(陵寢)ㆍ신어(神御)를 숭봉하는 사원(寺院)ㆍ궁관(宮觀)은 역전(役錢) 상납을 면제하라.” 하였다. 또, “전대 자손으로서 법에 음덕(蔭德)이 있는 자는 역전 상납을 면제하라.” 하였다.
생각건대 이와 같은 유는 혹 전지를 준 자이니, 그 요역을 반드시 면제할 것이 아니었다.
이상은 사묘지사(祠廟之舍)임.
한 고조 2년(기원전 205)에 촉한(蜀漢) 백성으로서 군사(軍事)에 수고한 자는 복호하여 2년 동안 조세를 받지 말고, 관중의 군졸로서 종군한 자는 1년 동안 복호하였다.
5년에 군(軍)ㆍ가(吏)ㆍ졸(卒)에게 관작을 내리면서, 사대부가 아닌 그 이하는 모두 그 신역과 호세를 면제하며 역사를 시키지 않았다.
8년에 영을 내려서, 이ㆍ졸로서 종군하여 성을 평정한 자 및 성읍을 지킨 자는 모두 종신토록 복호하며 역사를 시키지 않았다.
11년에 사졸로서 촉한과 관중에 따라들어간 자는 모두 종신토록 복호하였다.
12년에 조서하여, 이(吏) 2천 석과 촉한에 들어갔다가 삼진(三秦)을 안정시킨 자는 모두 대대로 복호하였다.
살피건대, 옛적에는 천하 전지가 모두 군전(軍田)이었는데, 왕이 이미 전지를 주었으므로 백성들에게 군졸ㆍ수레ㆍ말ㆍ소를 부과(賦課)해도 백성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후세에는 천자가 송곳 하나 세울 만한 전지도 백성에게 준 것이 없으면서 백성을 빌려 군사로 삼으니, 백성이 순종하지 않자 이에 그 잡요(雜徭)를 면제해서 그 수고했음을 갚았는데 모두 구차스러운 정사였다.
이상은 군졸지사(軍卒之舍)임.
한 고조 2년, 조서하여 향삼로(鄕三老)와 현삼로(縣三老)는 그 요역을 면제하였다. 송나라 제도에 8품 이하의 관직에 있다가 죽은 자의 자손은 요역이 편호(編戶)와 같았는데, 인종(仁宗)이 조서하여 특히 견감하였다.
생각건대, 서인으로써 관직에 있는 자는 서울과 외방을 논할 것 없이 반드시 그 요역을 면제했는데, 촌리(村里)의 보정(保正) 따위는 반드시 논의할 것이 아니었다. 또 조관(朝官) 집으로서, 그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그 자손을 복호하는 것은 옛 경서에 근거할 만한 것이 없다.
이상은 직역지사(職役之舍)임.
한 고조 7년에 백성이 자식을 낳으면 복호하여 2년 동안 역사를 시키지 않았다.
살피건대 월어(越語)에 “구천(句踐)이 영(令)하기를, ‘장차 면(免 : 젖먹이를 말한다) 하려는 자를 보고하면 의원으로 하여금 보호하도록 하되 세 사람을 낳으면 나라에서 유모를 정해주고, 두 사람을 낳으면 나라에서 먹을 것을 주라’고 했다.” 하였는데, 고조의 영도 또한 이 뜻이었으나 다 선왕의 법이 아니니 족히 기록할 것이 없다.
이상은 신산지사(新産之舍)임.
마단림은, “주나라에서 복제하던 법은 그 정역을 면제할 뿐이었는데, 한나라에 와서는 부세마저 아울러 면제했으니 한나라 법이 어찌 주나라 법보다 나은 것이겠는가? 아니다. 대개 부세는 전지에서 나오는데, 주나라사람은 전지를 모두 관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그 정역만 면제하였으나, 한나라에 와서는 전지가 민유(民有)이어서 관에서 주고 받는 권한을 잡지 못한 까닭으로 복제해야 할 예에 있는 자는 그 부역을 아울러 면제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에는 벼슬한 집으로서 음덕(蔭德)이 있거나 한 정(丁)뿐이거나 혹 늙고 병든 자에게 그 부역을 면제했던 적은 있었으나 조세를 면제한 일이 있다는 말은 두 번 듣지 못했다.” 하였다.
생각건대, 이사(弛舍)하는 은택은 가볍게 시행할 수 없는 것이다. 요행으로 면제된 자는 비록 즐거워하겠으나 치우치게 고초(苦楚)받는 자는 괴롭지 않겠는가? 법이 이 때문에 어지러워지고 간사함이 이 때문에 생기며, 용도가 이 때문에 축이 나고, 은택의 고마움이 이 때문에 줄어드니 한 임금이 세운 법으로서 마땅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는 원래 부세가 없었다가 중엽 이후로 군보(軍保)에게 베(布)를 거두는 법이 있었으나, 나라 안 귀족은 다 이사(弛舍)하는 예에 들었다.
이 법이 오래되자 시골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는 백성도 모두 귀족이라 칭탁해서 모두 이사하는 중에 들게 되었다. 오직 남의 집에 고용하는 하천(下賤)과 떠돌이ㆍ비렁뱅이, 늙고 병들어서 호소할 데 없는 백성이 이에 군부(軍賦)에 응하고 또 군ㆍ현의 소리(小吏)는 사사로 민호(民戶)를 뽑아서 계방(契房)을 만들었다. 무릇 계방 마을로 된 곳은 곧 털끝도 들어갈 틈이 없어 부역의 치우침이 지금과 같은 때가 없었다. 무릇 부렴(賦斂)을 마련하는 자는 이사하는 예에 처음부터 삼감이 마땅하며, 그 길을 가볍게 열어놓음은 불가하다.
[주D-001]희화(羲和) : 당우(唐虞) 때에 희(羲)씨와 화(和)씨가 역상(曆象)에 대한 일을 맡았는데, 그후 역상을 관장하는 관원을 희화라 일컫게 되었다.
[주D-002]연액전(年額錢) : 1년 동안 거둔 세전(稅錢)의 총액.
[주D-003]월용전(月椿錢) : 송대에 군비(軍費)조로 징수하던 세전. 지금의 방위세와 같다.
[주D-004]국인전(麴引錢) : 인(引)은 면허증과 같은 것. 누룩 제조에 발급하던 면허장에 대한 세전.[주D-005]백납초전(白納醋錢) : 백납(白納)은 토사(土司 : 지방 관서)의 하나. 지방 관서에서 초(醋)에 대해서 징수하던 세전.
[주D-006]호장갑첩전(戶長甲帖錢) : 호장(戶長)은 이정(里正)과 같은 것. 호장에게 보갑첩지(保甲貼紙)를 발급하고 징수하던 돈.
[주D-007]보정패한전(保正牌限錢) : 송대에 창설했던 자치 제도. 500집을 도보(都保)로 하고 도보에 보정(保正)이 있어 통할했음. 패(牌)는 10집을 1조(組)로 하고 패를 만들어서 호주와 성명을 기록하는 것인데,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보정이 갱신되면서 보민(保民)에게 수수료를 영수했고 그 돈에 대해서 세를 징수하던 돈.
[주D-008]절납우피근각전(折納牛皮筋角錢) : 절(折)은 그 값을 정한다는 뜻. 값을 정해서 그 값에 대한 세전을 바치는 것.
[주D-009]총제전(總制錢) : 송대 부세(賦稅)의 명칭. 송 선화(宋宣和) 연간에 진형백(陳亨伯)이 경제사(經制使)로 있으면서 이 세를 창설했고, 그후 옹언국(翁彦國)이 총제사(總制使)가 되어 세액을 증가해서 총제전이라 일컫게 되었다.
[주D-010]4부(四鬴) : 1부(鬴)는 6두 4승. 한 사람이 한 달 먹는 쌀이 4부라는 뜻이다.
[주D-011]차역(差役) : 중국 송나라 때의 과역법(課役法). 백성의 빈부의 차를 9등급으로 나누어 4등 이상에서만 공용의 인부를 징발하고 5등 이하는 면제하였다.
[주D-012]체부(遞夫) : 각 역(驛) 사이에 공문서 따위를 전달하던 역졸(役卒).
[주D-013]고치(雇直) : 인부를 부리고 지급하는 삯.
[주D-014]아전(衙前) : 송대 부역의 명칭. 이정(里正)과 향호(鄕戶)를 아전으로 삼아서 부고(府庫)를 관리하고 관물(官物) 운반을 책임지웠다.[
주D-015]향원(鄕愿) : 그 지방 인심에 영합하면서 가장 점잖은 체하는 사람. 《논어(論語)》 양화(陽貨) 편에, “鄕愿德之賊”이라고 보인다.
[주D-016]구산(口算) : 인구에 부과하는 세. 즉 인두세(人頭稅).
[주D-017]실을 당한(當室)자 :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가사를 담당한 사람을 말함.
[주D-018]12년에 조서하여, …… 안정시킨 자 :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에는 “2천 석의 관리로 장안에 이사한 자와 촉한(蜀漢)에 들어갔다가 삼진을 …… (吏二千石 入徒長安者 入蜀漢定三秦者 …… )”이라고 되어 있다.
[주D-019]향삼로(鄕三老) : 관직의 이름. 한나라 제도에 향마다 삼로(三老) 한 사람을 두어 교화를 관장하게 하였음. 《한서》 고제기에, “擧民年五十以上 有修行能帥衆爲善 置以爲三老 鄕一人 擇鄕三老 一人爲縣三老”라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