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필영, ＜들옥의 노래＞

[타리]

들옥의 노래

이필영

   시월도 중순이고 찬 서리가 내리는 상강이 내일모레인데 날씨가 흐리다. 하루도 들바람을 쐬지 않으면 온몸이 들쑤신다는 들옥댁이 즐비하게 따놓은 포도를 봉지에 넣으며 사설조로 일정을 읊조린다.

   “할 일이 태산인데 비손님은 오실라 카고요. 내일은 콩을 꺾고 모레는 나락을 비야 일이 순서대로 마차질 건데. 하이고 세상만사 맘 묵는 대로 흘러간다면야 무신 걱정이겠노. 콩은 때를 놓치마 지 자리에서 꼬타리가 터져뿌고 늦가실 비가 이래 잦으머 팥도 속에 곰팡이가 생기제. 나락도 딘서리를 맞으머 밥맛이 찰지지 몬한 기라. 딘서리 오기 전에 나락 비라고 농협에서 방송을 햇싸대지만 책상머리보다야 농사꾼 맘이 애타지러. 해가 사나흘 쨍해야 나락을 말리지. 일꾼들아 쭉쩡이 잘 골라래이. 도시 사람들 입맛이 얼매나 까탈시러븐지 촌사람들 일이 및 갑절은 늘었대이.”

   들옥댁의 지시대로 동생들은 포도송이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쭉정이를 가려내느라 양미간을 찌푸린다. 너풀대는 잎사귀를 머리에 이고 포도송이가 탐스럽게 일렬종대로 매달린 모양은 농부가 빚어낸 예술 작품이다. 그들 자신도 밭둑에 서서 ‘햐 누구 그림인지 참말로 잘 그렸대이’라며 흐뭇해한다. 그러나 풍작은 이뤘지만 가격은 하락했다. 수요대비 5%만 과잉 생산돼도 가격이 하락에서 폭락으로 이어지는 게 모든 농산물이 처한 가혹한 현실이다.

   기어이 비손님이 당도했다. 비닐 가림막 위로 빗소리가 리듬을 타자 들옥댁이 고랑을 잽싸게 누비며 비설거지를 지시한다. 봉지에 싸인 포도는 가림막 안으로 넣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빈 상자는 쟁여 비닐포를 씌운다. 일흔이 훌쩍 넘은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몸놀림이다.

   선율처럼 토닥거리던 빗방울이 거세진다. 순식간에 바닥에 빗물이 흥건하다. 된서리가 내리면 포도는 버려진다. 상강에 된서리가 내려 포도 수백 상자를 고스란히 버린 악몽 같았던 어느 해가 있었다며, 들옥댁은 일은 좀 뒤처지겠지만 비손님이 한편으론 다행이라고 한다.

   “딘서리는 한참 물러갔다. 요 비가 상강 땜인 기라. 비가 쪼매 오고 그친다 켓으이 그새 점심이나 묵자.”

공들인 시간은 매한가지지만 풍년도 흉년도 자연이 하는 일이라며 들옥댁은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손으로 훔치며 가스레인지에 밥솥을 올린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농한기에 들면 읍내 정형외과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아파도 꾸물꾸물 움직거렸던 몸이 일을 놓자 삭신이 녹아내린다. 뼛골 빠지게 일해 병원만 좋은 일 시킨다고 말들 하지만 농부에게 땅은 부동산의 개념이 아니다. 곡식 나는 땅을 중하게 여겨왔기에 돈만 셈하지 않는 게 땅을 의지하고 산 그들의 마음이다.

밥이 구수한 냄새를 뿜어 올리자 들옥댁이 반찬 보따리를 펼친다. 찬이슬을 맞아 풍미가 더해진 가지와 애호박 무침이 맛깔스럽다. 콩나물과 무채, 고사리를 옆옆이 담고 아기 손바닥만 한 마른 가자미가 매콤하게 졸여졌다. 참기름에 듬뿍 휘둘린 배추겉절이가 양푼에 수북하다. 돔베기도 있고 미리 한소끔 끓여온 민어찜이 보글거린다.

   군침을 돌게 하는 들밥 앞에서 동생들은 피곤한데 무슨 구첩반상이냐고 구시렁대면서도 이것저것 맛보느라 젓가락이 바쁘다. 자장면을 시켜 먹을 수도 있지만, 들옥댁은 초저녁에 한숨 자고 반찬을 좀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동생들이 도시에서 ‘포시랍게’ 살지만 태생이 농부의 딸인 고로 밭고랑에 퍼질러 앉아 먹는 들밥을 먹여주고 싶었다며 붉은 무늬 콩이 듬성듬성 섞인 밥을 고봉으로 담는다.

   동생들이 품삯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포도 값을 넌지시 묻는다.

   “야들아, 고것은 묻지 말거라. 값이 워낙 헐어빠지자 이늠의 자슥들이 저녁마다 포도 값 물어쌌지만 얼름도 없다. 왜냐, 평생을 땅만 파고 산 농사꾼의 자존심이다. 값은 몬 갈쳐주고 사연은 요렇다. 실한 놈으로 골라 보기 조오케 담아 맛보기로 열 상자를 보냈더니 소문대로 거년의 절반인기라. 샛바람 부는 초봄부터 입때꺼정 애탄가탄 지은 농사가 그따구로 헐값인데 와 아깝지 않겠노. 자부룩하게 매달린 포도를 볼라치머 기가 찼지만 우야겠노. 젊어서는 삐가리 겉은 자슥들 공부시킨다고 허부고 뜯고 일했지만 인자는 흙이 동무 아이가. 올해 헐하머 후년은 비쌀 거리고 믿지러. 헐값 농사 제발 접으라꼬 즈거들이 암만 떠들어싸도 천지를 모리는 소리제. 사람 나고 일 났다고, 느거 어메는 땅을 천심으로 사랑하는 농사꾼이라고 뚝 무질러뿐다. 늙은 몸 마다않는 땅 있고 일 있는 게 얼매나 복이고. 들을 하도 좋아하다보이 내 이름 옥남이가 들옥이로 변했다. 겨울에는 경로당에 모여 온갖 우스개 해싸메 별미를 해묵는 게 재미다. 내가 들에 안 갔다 카머 들옥아, 퍼뜩 들노래 한바탕 부르고 오라고 등 떠민다. 알만 하제. 걸을 수 있는 날까지 들판을 누비는 기 내 소원이다. 하나 더 보탠다면 나랏일 맡은 공부 마이 한 사람들이 농사꾼 사정을 좀 살피보는 거다. 이마에 손 받치고 앉아 책상머리만 골 아프게 굴리지 말고 들판에 발을 디뎌봐야 농사가 좀 보이는 기라.”

   일을 마치고 드넓은 들판을 걸어 나오며 들옥댁 동생들이 언니의 소원에 마음을 보탠다.

   한여름 땡볕을 견디며 오곡백과를 길러낸 들녘은 머잖아 동안거에 들리라. 소먹이용 볏짚 뭉치가 설치미술 같은 조형미로 그루터기만 남은 논바닥을 뒹굴고 앙상한 포도나무는 칼바람을 견디리. 설경이 펼쳐지고 얼음이 쩡쩡 덮여도 흙과 손을 맞잡은 들옥댁은 여전히 하루 한 번 들바람을 쐬며 늙지 않는 봄꿈을 꾸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