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2일의 방영된 EBS의 "지도전쟁"이라는 해외 다큐를 보게 도었습니다. 그 프로에서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국가적인 차원의 엄청한 자본과 인력,그리고 그에 따른 과학이 접목되는 아주 거대한 사업이라 했습니다.
그 다큐 프로에서 서구 유럽에서 국가적인 차원의 지도 제작의 그 시원은 영국이라 했습니다. 1539년 경에 영국은 수도를 중심으로 수도를 둘러싸는 해안의 방어를 위한 지도를 제작하였는데 그 지도의 수준은 하나의 그림 수준 이라 했습니다.
서구 유럽에서 지도 제작에 아주 중요한 요소인 경도(經度),위도(緯度)를 적용한 아주 치밀한 지도를 제작한 시기는 1700년대 후반으로 프랑스의 카시니에 의해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서구에서 1700년대 그 이전에서 지도 제작에서 항해에서 특히 아주 중요한 경도(經度)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바다의 항해에 있어서 경도를 모른다는 것은 자신의 배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합니다. 실례로 1707년 영국의 실리제도에서 전함 4척이 연안 암초에 차례로 충돌,침몰하여 해군 1647명이 수장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옛날의 항해자들은 경도를 몰라 추측항해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알게하는 사례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곤여만국전도는 1602년에 제작된 것으로 이는 서양의 지리학을 처음으로 소개했다는 마테오 리치와 명조(明朝)의 이치조가 함께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와 과련된 기록을 보면,
학봉일고 제2권 부(賦) 학해부(學海賦)
빠뜨림이 하나 없이 비은을 포괄하고 / 包費隱而不遺
천하의 저 끝에다가 경위를 만들었네 / 作經緯於八極
그 가운데 존재하여 있는 것을 살펴보니 / 探厥中之所存
천지간에 만물들이 드넓기도 하구나 / 浩浩乎天地萬物
외집 6권 주해수용 외편 하(籌解需用外編 下) 천지경위도(天地經緯度)
분천(分天)을 12궁(宮)으로 하고 매 궁(每宮)마다 30도로 나누고 매 도마다 60분으로 나누며 매 분마다 60초로 나눈다. 이 남북의 세로 선은 모두 적도(赤道)와 만나며 이 세로선을 경도(經度)라고 말한다. 적도(赤道)에 가까운 곳일수록 경도 상호간의 도ㆍ분의 거리가 점차로 멀어지며 적도의 먼 곳일수록 경도 상호간의 도분의 거리가 점차로 가까워져서 양극에 이르면 모든 경도선은 1점에 합쳐버린다. 분계(分界)의 한계(限界)는 항성(恒星)으로서 기준으로 하고 항성이 없으면 모성(某星)이 동서(東西)에 몇 도 편의(偏倚)한가를 가린다. 동과 서는 몇 도를 한 개로 하느냐 하면 적도(赤道) 내외에서 자오(子午)선과 서로 만나는 곳을 한 개로 한다. 그리고 적도와 평행(平行)하여 권(圈)을 이루며 적도에 12궁(宮) 360도와 60분초로 되어 있는 것을 위도(緯度)라고 말하며 역시 그 거리는 같은 권(圈)을 이루고 있으며 적도 근방일수록 위도의 지름과 둘레는 점차 커지며 적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그 위도의 지름과 둘레는 점차 작아져서 북극(北極)과 남극(南極)에 이르러서는 1점에 마치게 된다. 그리고 그 분계(分界)의 한도는 역시 항성(恒星)과 편도(偏度)로서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1원을 꼭같이 나누어서 반원(半圜)이 되며 4분의 1원을 상한이라 하며 6분의 1원을 기한(紀限)이라고 말하며 지구 분도(分度)도 역시 천도(天度)에 의거하여 나누며 그것으로 절후(節候)를 측정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권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1권 경도(京都)
○ 《경위선분야도(經緯線分野圖)》에는 “만국전도(萬國全圖) 경위선에 의하여 우리나라 전도를 그리면, 적도 이북 37도를 떠나서 시작하여 복도(福島) 이동 63도 1백 50리를 떨어지면 경도(京都) 한성부의 본자리를 얻게 되며, 경도에서부터 서쪽으로 가서 황해도 풍천부(豐川府)에서 시작하여, 복도를 1백 61도 89리를 떨어지면 북쪽으로 여진 백도눌(女眞白都訥) 동쪽 경계를 범하고 동쪽으로 경상도 영해부(寧海府)에 이르며, 1백 65도 1백 90리를 떨어지면 북쪽으로 여진 흑룡강(黑龍江) 동쪽 경계를 범하는데, 모두 4도 1도가 2백 50리가 된다. 1백 2리가 된다. 남쪽으로 전라도 해남현(海南縣)에서 시작하면 북극성이 나온 곳에서 31도 3백 44리에 서쪽으로 중국 절강성(浙江省) 북쪽 경계를 범하며, 또 해남현에서 바다를 지나 제주 남쪽 경계에 닿고, 북극성이 나온 곳에서 37도 1백 97리에서 서쪽으로 중국 복건성(福建省) 남쪽 경계를 범하며, 북쪽으로 함경도 온성부(穩城府)에 이르면 북극성이 나온 곳에서 44도 91리에 서쪽으로 여진 길림(吉林) 북쪽 경계를 범하는데 모두 16도 1백 58리가 된다. 경도는 산동성(山東省)과 위도(緯度)가 같은데 조금 북쪽이며, 길림 땅과 경도(經度)가 같다. 대개 위도의 넓이는 여진의 경계와 같은데 뚫고 들어갔으며, 경도의 길이는 중국과 대략 같은데 움츠러들었다.
위의 기록들을 상세히 살펴보면 기존의 역사를 뒤집는 기록들 입니다. 교육방송에서 위도,경도를 적용한 지도는 1700년대 후반에 나왔다고 합니다. 또 백과사전에서 본 지식에 의하면 1700년대만 해도 서구의 서양인들은 경도의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추측항해 결과 참담한 사례까지 나왔는데 위의 1500년대 사람인 김성일은 위도,경도를 알고 있으며, 1700년대 사람인 홍대용은 위도,경도의 정확한 개념을 알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경위선 분야도는 만국전도를 인용했는데 여기서 만국전도는 1602년에 제작된 곤여만국전도를 의미하는 것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해서 알수 있는 사실은 곤여만국전도가
위도와 경도를 적용한 지도 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1600년대에 서구는 위도,경도를 적용한 지도를 만들기는 커녕 엄두조차 내지 못했는데 마테오 리치의 서구 지리학의 일방적인 도움으로 지도를 제작하였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 입니다. 서구의 위도,경도 적용 지도는 1700년대 후반에 나왔는데 대륙의 중조(中朝)는 위도,경도를 적용한 지도가 1602년에 나왔습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한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기측체의의 기록에서 포도아 사람 가노가 명조(明朝) 만력제때 지구를 일주했다고 합니다. 위에서 말한것처럼 서구는 위도,경도의 적용지도가 나온것은 1700년대 후반이며
또 1700년대에만 해도 경도를 몰라 추측항해의 낭패를 겪었는데 명조의 만력제때는 1500년대 중반에서 1600년대 초기 인데 이 당시 서구는 1700년대 영국의 참사처럼 경도를 몰라 낭패를 겪었는데 이보다 100년전의
항해에서 경도의 개념을 전혀 모르는 서구의 포도아 사람 가노가 어떻게 지구를 일주할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당시 중조는 경도,위도의 개념이 있었기에 곤여만국전도가 나온 시기 입니다.
본인의 관점에서 볼때 서구의 포도아 사람 가노의 지구 일주는 중조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항해 였다는 것이며 또 가노의 업적은 가노의 지구 일주를 통해서 보다 정확한 대륙의 위치를 알수 있었다는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