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시오적 영성생활
(6월 23일 경가회 공부방에서는 예수회의 이규성 토마스 신부님의 미사와 강의 "이나시오적 영성생활" 을 들었읍니다. 이 토마스 신부님은 1985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여 90년에 오스트리아에 유학하시고 95년에 사제서품을 받으셨고 다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수학하여 "'20C의 교황청에서 발간된 문서중 종교간의 대화 분석" 을 내용으로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3년 이후로 예수회 대학인 서강대학교에서 강의하고 계십니다. 다음은 강의의 내용을 정리한것 입니다.)
예수회에 대하여 소개 한다면, 다양하게 평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분열을 통하여 교회의 개혁을 추진한것에 비하여 성 이나시오 로욜라는 교회의 권위를 존중하면서 내적 쇄신을 통한 개혁에 헌신하였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사건 이후 성 이나시오는 인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간에 대한 봉사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성에 대한 수호자로서 신비가이며,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 대처하여 그 시대의 장단점을 잘 간파하여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쇄신하였습니다. 서양에서는 예수회의 규모가 커서, 1800-1900년대에 이르러서는 예수회가 가톨릭의 주도적 세력이었고 1950년에 이르기 까지 교황의 측근 모든 요직을 예수회원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다른 수도회의 회원들에게 “나쁜 세계정복을 위한 비밀조직, 은밀한 교황주의자” 라는 비난을 듣고, 근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봉건주의 구조에 반감을 갖고, 반시대적 정서의 집단, 교만하고 건방지고 음흉하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인간의 지성을 강조하여 교육에 치중하는 예수회의 정신이 반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가톨릭의 여러 수도회중 하나인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의 창설자 성 이나시오 로욜라(St. Ignatius Loyola 1491-1556)는 스페인의 바스크족으로서 로욜라성주의 13자녀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일찍 어머니를 잃고 큰형수가 양육하였습니다. 가문은 귀족이었지만 가풍은 호전적이고, 폭력집단 비슷하였다고 합니다. 이나시오는 12세에 집을떠나 아레발로라는 영주의 궁정에가서 지내며 교육을 받았는데, 돈 관리하는 회계교육과 음악교육등 행정교육에 해당하였습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한물간 기사도정신을 지니고 있었으며, 정식군인은 아니었으나 민병대수준으로 참전하였습니다. 군인과 기사의 다른점은, 군인은 영주로부터 급여를 받고 싸우는반면 , 기사는 급여없이 영주와의 친분이나 의리 신의로써 전투에 임하는자 였읍니다. 그는 도움을 받던 아레발로 영주가 권력투쟁에서 밀려나서 비참하게 죽게되는것을 목격하면서 젊은 나이에 권력의 쓰고 단맛을 경험하였습니다. 젊은 이니고 (Inigo당시의 스페인 발음)는 26세까지 멋부리며, 기사로서 출세하려고하는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화려한 청년이었습니다.
이니고의 회심의 사건은 이러하였습니다. 그는 스페인 출신이지만 여진족처럼 스페인의 주변민족인 바스크족 출신이었는데 프랑스와의 전투인 팜플로나의 전투에서 대포로 왼쪽다리에 부상을 입고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열심히 싸우는 모습이 프랑스군을 감동시켜서 고향으로 후송시켜주었습니다. 무료한 병상에서 기사도정신의 무협지를 읽고 싶었으나, 로욜라 성안에서 구할수있는 책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열전“ 이어서 그 책들을 읽는동안 회심하게되었습니다.즉 왕의 기사가 되는 꿈을 바꾸어 하느님의 기사가 되기로 마음을 바꾼것입니다. 그는 환상을 경험하고 선령과 악령으로 부터의 영적 경험을 하였으며 영적식별을 체험하였습니다. 선령과 악령을 경험한후에 그 이후의 여운을 골몰히 생각하며 살펴보았을때, 선령의 경우에는 그후의 여운이 좋았으나, 악령의 경우는 여운이 나쁨을 깨달았습니다. 성 이나시오의 영신수련(피정)을 할 때에는 한시간기도한후 15분동안 기도의 내용과 여운을 살피고 그 내용을 기록한다고 합니다. 깊이들어가며 자기 영혼이 움직이는것을 관찰하고 확인했을때, 기도가 끝나게 됩니다.
다리부상을 일단 회복하였으나 다리의 길이가 달라진것에 불만하여 격심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같게 만드는 수술을 한후 형님부부가 마련해준 노새를데리고 이나시오는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위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서는 바르셀로나와 베네치아를 거쳐야 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만난 무어인(아프리카인)이 성모님의 동정성에 대하여 시비하는 소리를 듣고 분개하여 따라가서 죽이려 하였으나 나귀가 큰길로 가는 바람에 그만두었는데, 여기서 이나시오는 교회와 신앙을 위하여 무엇이든 감당할것은 아니라는 것을 체험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직 영적식별력이 완성안된 상태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르셀로나로 가는동중, 몬세라토 수도원에서 갑옷투구의 전투복장으로 철야기도를 한후 거지와 옷을 바꿔입고, 만레사의 동굴에 가서 10개월 동안 영적체험을 하면서 기록한 책 영신수련 (the Spititual Exercise)을 작성하게 됩니다. 그후 이슬람의 점령지역인 예루살렘에 어렵게 가서, 당시 이슬람 교인들과 프란치스코 수도회원 사이에 체결된 성지순례에 대한 협의를 무시하고 예수님 돌아가신 장소에 몰래 올라 갔다가 프란치스코 회원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여기서 성 이나시오는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해서는 안된다는것을 다시 체험하게 됩니다. 그는 지식이 더 필요함을 깨닫고 공부하기로 결심합니다.
공부하는것이 지식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을 돕기위한 목적(이미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상담해주고 있었으나) 이었습니다. 그 당시 루터에 의한 교회분열이 있었고, 조명주의라는 이단이 횡행하여져서 좀 색다른 이야기를 하면 일단 의심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나시오는 의혹을 살만했으므로 종교법정에 서기도 했으나 결국 무혐의로 처리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공부를 해서 지식을 충분히 얻기로하고 3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파리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48세인 1539년에 로마에 가서 교황님을 만나 사제서품을 받고 예수회를 창설하였습니다. 당시는 많은 교구 성직자들이 무식하고 타락한 상태였습니다. 라틴어를 읽을수만 있으면 부제가 될수 있었고 라틴어의 해석이 가능하면 사제가 될수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의 교육중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회는 다음의 사항들을 강조하였습니다.
1) 교육,
2)교육을 영성으로 연결시킴
3) 실천입니다.
현재 예수회에서는 전 세계에서 200여개의 고등교육기관을 운영하면서 좋은 교육으로 사회에 좋은 영향을 줄수있는 인재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만으로는 안되며 교육을 영성으로 연결시키는 영성교육을 지향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1개월 의 영신수련 피정 코스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영신수련에서는 하루에 5번 기도하는데 기도이전에 15분 준비하고, 기도후에 15분 반성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또한 영신수련 과정에서는 상상력을 강조하여 성경을 읽으면서 구체적 장면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그 장면의 구성원으로 들어감으로서 예수님, 성모님, 집사, 하인, 손님 이 되어서 느낀것을 체험하며, 좋은 순간에 길게 머물러 기도할수 있습니다. 그 기도가 좋으면 반복할수 있습니다. 성경전체가 아니라 한 두 구절만 읽어도 깊이 잠기며, 특별한 장면에 머물러 오감을 활용하고 감정이입이 되면 관상기도가 됩니다. 그러나 관상이 안되더라도 염경기도나 묵상기도가 되어도 좋습니다. 모두 각자에게 맞는 기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나시오식 영신지도는 각자에 맞추는 개별지도입니다. 세 번째로 실천에 있어서 성 이나시오는 인간에 대한 차별없이 빈민과 창녀촌에 가서도 영적지도를 하셨고, 그들 스스로 열악한 환경에서 나올수 있도록 도와주어 빈민교육과 여성교육을 지향하였고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위하여 사회사도직을 실천하였고 선교를 위하여 먼나라에 회원들을 파견하였습니다.
예수회를 창립하였을때 이나시오의 첫 동료중 하나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프랑스쪽 바스크 족으로서 이나시오와는 원수가문의 아들이라고 할수 있었으나 가장 사랑하는 동료였고 동양으로 선교를 위하여 파견하였습니다. 그는 폴투갈을 거쳐 인도와 일본까지 갔으나, 동양의 중심인 중국에는 가지 못하고 돌아갔으나 그의 후계자가 마카오를 통해서 중국에 입국했으며, “천주실의”의 저자인 마테오 리치와 중국의 천문직 고급관리인 흔천관을 역임한 아담샬이 중국의 조정에서 활약하였고 병자호란때에 중국에 볼모로 잡혀갔던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천주실의”를 가져왔으나 조선의 궁중서고에 100년간 방치되어 있다가 이벽 성조에 의하여 발견된어 이책을 중심으로 연구강학회가 만들어졌고 이승훈을 파견하여 최초의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앙에서 지적인 부분을 소홀히 하면 이단이 왔을때 신앙을 방어하며 적절히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위험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회에서는 지적능력을 중요시하여 교육사업에 헌신하며, 교황권을 거부하며 분열해 나간 루터교적인 부분에 대처하여 교황께 대한 특별한 순명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이나시오 로욜라 성인은 1622년 예수회 동료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과 이탈리아의 필립보 네리 성인과 함께 시성되었읍니다. 이탈리아적이 다변가인 필립보 네리성인과 달리 이나시오성인은 바스크족 특유의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첫댓글 기억하기 쉽게 사실적으로 재미있게 설명해주시여 성 이나시오의 모습을 좀더 이해할수 있고 그분이 가르쳐주신 영성생활의 방법도 좀더 잘 이해하게 해주신 이규성 토마스 신부님의 강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육간에 건강하시고 좋은강의 주님의 은총안에서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이 토마스 신부님께서 이 걸 보시면 녹음을 하여 그대로 글로 옮기신 줄 알겠습니다. 읽는 제가 이럴진대 유 선배님은 경가회 강의가 그대로 몸에 남겠습니다. 감탄, 감사드리며, 존경합니다.
유 선배님의 수고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신부님이 보시도록 전달할거에요.아마 놀라실거에요.신부님도 선배님도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존경하는 유병숙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너무나 부럽습니다. 부디 이 커다란 봉사를 위해서라도 항상 영육간에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유병숙 선배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강의 들을 때 보다도 더 머리에서 정리가 잘 되는것 같습니다. 경가회를 위해서 봉사해주시는 선배님께
하느님의 큰 사랑과 은총이 항상 함께 하시길 빌게요.
여러 선후배님들 칭찬으로 격려해 주셔서 감사하고 , 기도해주신다고하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성이나시오와 예수회에 대하여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신부님의 강의를 정리 하였읍니다. 글을 쓸때에는 전체를 이해하지만 쓰고나면 기억이 희미해지는것은 다른분들과 다르지 않답니다.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유병숙님은 아주 훌륭하신 일을 하고 계십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