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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더라도 구경하다 죽겠다 " " 걷다가 죽겠다 " 마드리드의 민박집에 걸어놓은 방랑자들이 남기고 간 글중의 하나다. 움직이는것 만이 살아 자유를 느낀다. 몸속에 존재하는 평화와 생명력이 머무는것이 자유이지 뭐겠나. 시간과 함께 걷는다. 걷는것만이 오직 생명의 자유함의 총량이다. 생명에 대한 오직 한가지 선택은 걷고 오르며 하늘이 준 생명력의 최대치를 창조 해내는것이 자유함의 극치이다.
11월 3일 뉴왁에서 " 산이좋아 " 멤버 8명이 오후 6:35분 출발 오전 6시 30분 파리 샬스 드골 비행장에 도착 즉시 간이 기차를 타고 이내 TGV 급행열차로 프랑스 남쪽 도시 Bordeaux까지 가서 기차갈아타고 Bayone 이어지는 총 800KM를 달려가서 마지막 행선지 Saint Jean Pied de Port 에 도착할려니 철도부근의 농촌만 구경하고 도시는 전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란서에서는 전혀 장님노릇 아뭇것도 볼수 없었던것도 아이러니 하다. 석양의 끝자락에 도착해 마지막 58KM의 구간은 벌써 드라마의 서막을 올리듯 택시잡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4명의 한조가 택시를 잡아떠난지 얼마안있어 택시기사가 회사에 연락 다른 택시를 보내주어 운좋게 Bayone을 떠날수 있었다. 이구간은 산으로 올라가는 매우 굽이진 길을 기사는 노련한솜씨로 캄캄한 허공을 칼날처럼 내뿜는 헤드라이트가 앞차의 뒷바퀴만을 쫒아 추월할 기회를 노리며 전속력을 냈다. 밤 10시에닫는 Pigrims Office 에 간신히 도착 여권과 10유로씩 지불하고 " Credential del Peregrino- Carnet de P'elerin de Saint Jacques " 위에 순례자의 모습과 문장이 새겨진 Acceil - Saint Jacques 도장을 받고 날자를 기입해 주었다. 모두 70대로 보였고 자원 봉사자들임을 강조했다. 이제 늦가을의 두꺼워진 어둠을 더듬어 희미한 45란 숫자가 벽에 녹아버린 쪽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불이없어 앞이보이지 않는 다른 문을 열면 불이 켜져있는 간이 부엌을 지나 7-8개의 2층벙커 침대들이 들어있어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짐을 풀었다. 이미 몇침대는 외국인과 한국에서 오느 젊은이 들이 차지하고 있어 반가웠다. 청년은 제데 1개월후에 이곳을 찿았고 여학생은 대학 3년 휴학을 하고 이곳을 찿았는데 우리의 대학시절 에 비하면 세상과 시간의 변화의 물결을 느꼈다. 이내 불침을 하고 침낭을 펴는 즉시 코부터 골기시작하는 밤의 향연이 시작 한동안 귀가 아파왔다. 생명력을 보강하고 충전하는 밤의 신비한 시간인데 생명을 유지하기에 저렇게 쥐여짜며 괴로운 소리를 내야하는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도에 흠짓이 있음을 의심을 해보았다. 새벽 5시에 불을켜고 오직 우리만 있는것같이 소란을 피울때 한침대의 2인의 백인들은 한숨을 고르며 괴로움을 토해냈다. 그리고 듣기 거북한 F 발음도 마구튀어 나왔다. 이시간에 출발하면 헤드램프를 켜야되는데 발광들 말고 8쯤 출발하라고 훈계했다. 못들은척 하며 처음의 흥분에 들떠있는데 부엌으로 들어와 냉장고를 열어재껴 자기의 음식을 허락도 없이 먹어치웠다고 노발대발 하면 어째서 날 선택했는지 입으로 할수있는 모든 욕지걸이를 정말로 화가나서 발과 손을 휘저으며 분풀이를 내게 해댔다. 첯날부터 오물을 함박 뒤집어쓴 심정이였는데 오늘 일어날수 있는 일의 액댐이 되기를 기도하며 바보같은 웃음으로 달래며 이비룡 장로가 50유로로 서너개의 요구르트 값을 치루겠다고 건네니까 내가 돈때문에 그러는것이 아니고 네놈들의 염치와 무례함에 화가났을 뿐이라고 역시 백인다운 변명을 했다. 순례자를 위해 고맙게 써비스 하는 음식으로 착각했던거다. 역시 무식은 세상을 어둡게 만들었다.
사무실에서 배포받은 Fang-Kil Bae - Jean Louis Aspirot 스페인 순례길 협회 사무총장이 한국 순례자를 위해 번역한 아내서의 내용이다. -
경로 - 적. 백색 경계선(GR65)과 Arneguy와 Ondarolle 국경까지 순례경계선. Vacarlos 부터 스페인 경계선 노란 화살표, 표시판 등고선 - 최고 해발 882M - 최저 해발 225M - 소요시간 - 6시간 30분 - 7시간 - 거리 - 22.80KM St-Jean-Pied-de-Port 순례협회는 동절기에 해발 1,430KM의 Cize봉을 넘는 나폴레옹의 길 Napoleon Route의 적설과 악천후로 잦은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Varcarlos로 우회루트를 권장함.
최고봉 해발 882M인 이길은 안전한 길이며 Roncevaux(랑스보) 까지 680KM이다. St Jean pied de Port기점에서 아래 경로를 통해가는 우회도로임. La Porte d'Espagne를 통과하여 계속 직진하면 벽에 Chemin de Mayorga 표시판이 있는 교차로 지점에서 D381 지방도를 따라 우회하여 500M 지점에서 왼쪽 D933 으로 접어들어 740M 직진하면 사각모양의 외딴집 이 나오는데 이곳이 D933 <span lang="KO" style="font-size:13.5pt;font- 4 Attachments
---------- Forwarded message --------- From: hun jae Won <hunjae43@gmail.com> Date: Thu, Nov 29, 2018 at 8:08 AM Subject: Fwd: To: yoonsart <yoonsart@shaw.ca> ---------- Forwarded message --------- From: hun jae Won <hunjae43@gmail.com> Date: Thu, Nov 29, 2018 at 7:43 AM Subject: To: hun jae Won <hunjae43@gmail.com> 죽더라도 구경하다 죽겠다 " " 걷다가 죽겠다 " 마드리드의 민박집에 걸어놓은 방랑자들이 남기고 간 글중의 하나다. 움직이는것 만이 살아 자유를 느낀다. 몸속에 존재하는 평화와 생명력이 머무는것이 자유이지 뭐겠나. 시간과 함께 걷는다. 걷는것만이 오직 생명의 자유함의 총량이다. 생명에 대한 오직 한가지 선택은 걷고 오르며 하늘이 준 생명력의 최대치를 창조 해내는것이 자유함의 극치이다.
11월 3일 뉴왁에서 " 산이좋아 " 멤버 8명이 오후 6:35분 출발 오전 6시 30분 파리 샬스 드골 비행장에 도착 즉시 간이 기차를 타고 이내 TGV 급행열차로 프랑스 남쪽 도시 Bordeaux까지 가서 기차갈아타고 Bayone 이어지는 총 800KM를 달려가서 마지막 행선지 Saint Jean Pied de Port 에 도착할려니 철도부근의 농촌만 구경하고 도시는 전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란서에서는 전혀 장님노릇 아뭇것도 볼수 없었던것도 아이러니 하다. 석양의 끝자락에 도착해 마지막 58KM의 구간은 벌써 드라마의 서막을 올리듯 택시잡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4명의 한조가 택시를 잡아떠난지 얼마안있어 택시기사가 회사에 연락 다른 택시를 보내주어 운좋게 Bayone을 떠날수 있었다. 이구간은 산으로 올라가는 매우 굽이진 길을 기사는 노련한솜씨로 캄캄한 허공을 칼날처럼 내뿜는 헤드라이트가 앞차의 뒷바퀴만을 쫒아 추월할 기회를 노리며 전속력을 냈다. 밤 10시에닫는 Pigrims Office 에 간신히 도착 여권과 10유로씩 지불하고 " Credential del Peregrino- Carnet de P'elerin de Saint Jacques " 위에 순례자의 모습과 문장이 새겨진 Acceil - Saint Jacques 도장을 받고 날자를 기입해 주었다. 모두 70대로 보였고 자원 봉사자들임을 강조했다. 이제 늦가을의 두꺼워진 어둠을 더듬어 희미한 45란 숫자가 벽에 녹아버린 쪽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불이없어 앞이보이지 않는 다른 문을 열면 불이 켜져있는 간이 부엌을 지나 7-8개의 2층벙커 침대들이 들어있어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짐을 풀었다. 이미 몇침대는 외국인과 한국에서 오느 젊은이 들이 차지하고 있어 반가웠다. 청년은 제데 1개월후에 이곳을 찿았고 여학생은 대학 3년 휴학을 하고 이곳을 찿았는데 우리의 대학시절 에 비하면 세상과 시간의 변화의 물결을 느꼈다. 이내 불침을 하고 침낭을 펴는 즉시 코부터 골기시작하는 밤의 향연이 시작 한동안 귀가 아파왔다. 생명력을 보강하고 충전하는 밤의 신비한 시간인데 생명을 유지하기에 저렇게 쥐여짜며 괴로운 소리를 내야하는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도에 흠짓이 있음을 의심을 해보았다. 새벽 5시에 불을켜고 오직 우리만 있는것같이 소란을 피울때 한침대의 2인의 백인들은 한숨을 고르며 괴로움을 토해냈다. 그리고 듣기 거북한 F 발음도 마구튀어 나왔다. 이시간에 출발하면 헤드램프를 켜야되는데 발광들 말고 8쯤 출발하라고 훈계했다. 못들은척 하며 처음의 흥분에 들떠있는데 부엌으로 들어와 냉장고를 열어재껴 자기의 음식을 허락도 없이 먹어치웠다고 노발대발 하면 어째서 날 선택했는지 입으로 할수있는 모든 욕지걸이를 정말로 화가나서 발과 손을 휘저으며 분풀이를 내게 해댔다. 첯날부터 오물을 함박 뒤집어쓴 심정이였는데 오늘 일어날수 있는 일의 액댐이 되기를 기도하며 바보같은 웃음으로 달래며 이비룡 장로가 50유로로 서너개의 요구르트 값을 치루겠다고 건네니까 내가 돈때문에 그러는것이 아니고 네놈들의 염치와 무례함에 화가났을 뿐이라고 역시 백인다운 변명을 했다. 순례자를 위해 고맙게 써비스 하는 음식으로 착각했던거다. 역시 무식은 세상을 어둡게 만들었다.
사무실에서 배포받은 Fang-Kil Bae - Jean Louis Aspirot 스페인 순례길 협회 사무총장이 한국 순례자를 위해 번역한 아내서의 내용이다. -
경로 - 적. 백색 경계선(GR65)과 Arneguy와 Ondarolle 국경까지 순례경계선. Vacarlos 부터 스페인 경계선 노란 화살표, 표시판 등고선 - 최고 해발 882M - 최저 해발 225M - 소요시간 - 6시간 30분 - 7시간 - 거리 - 22.80KM St-Jean-Pied-de-Port 순례협회는 동절기에 해발 1,430KM의 Cize봉을 넘는 나폴레옹의 길 Napoleon Route의 적설과 악천후로 잦은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Varcarlos로 우회루트를 권장함.
최고봉 해발 882M인 이길은 안전한 길이며 Roncevaux(랑스보) 까지 680KM이다. St Jean pied de Port기점에서 아래 경로를 통해가는 우회도로임. La Porte d'Espagne를 통과하여 계속 직진하면 벽에 Chemin de Mayorga 표시판이 있는 교차로 지점에서 D381 지방도를 따라 우회하여 500M 지점에서 왼쪽 D933 으로 접어들어 740M 직진하면 사각모양의 외딴집 이 나오는데 이곳이 D933 도로를 벗어나 오른쪽 Nive d'Arneguy 강을 건너 Lasse 에서 오는 교차로에서 왼쪽 길을 따라 Nive 강을 왼쪽으로 3.5KM 정도 직진. Mokosailla 에서 좌회전하여 Nive 강과 평행선 길을 계속 따라가면 스페인 국경 초입 마을 Arneguy를 맞남.
마을 중심을 지나 교회앞 좁은 Ondarolle 길로 접어들어 오른쪽 강쪽으로 내려가면 알베르게와 식품점이 있는 Valcarlos 까지 가파른 오르막 길이며 Vakcarlos 에서 135 국도를 따라 2KM 지점에서 Ganecoleta 방향에서 좌측 다리를 건너 주 도로로 접어들어 2.3KM 가서 KM56 순례 이정표에서 주 도로를 벗어나 개천 방향으로 좌회전후 다시 오른편 오솔길을 따라 계속 가면 KM52 이정표 지점에 초록색 집이 나오면 왼쪽루트를 접어들어 Puerto de Ibaneta 까지 계속 오르막길임. Ibaneta 봉에서 Cize봉 쪽으로 1.32KM 숲길로 내려오면 목적지인 Roncevaux 수도원 합숙소에 도착함. 동계절과 눈이 덮인 계절에는 Ganecoleta 와 KM57 부터 Roncesvalles 까지 우회가 불가능함. 따라서 Valcarlos 부터는 끝까지 국도 135번을 이용하여 Rocesvalles 까지 직행 동계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해 각국어로 번역해 주신데 대해 저와 모든 순례자들에게 사의를 표함. { 수고에 비해 머리가 빙빙도는 안내서 같은데 노란 화살표와 조개살 표시만 따라가면 안전함}
주택들이 오른세의 산길을 올라가는 산사이를 두고 양옆에 올려다보이는 높이에 산을 개간하여 만든 농장들은 말과 양들이 무리를 짓고 평화로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전원 풍경이 이여 지며 각 집마다 기르는 목청이 산을 흔들만큼 저음과고음으로 무지막하게 짖어 나그네의 마음에 긴장감을 놓을수 없었다. 숫하게 읽은 프러시아 이전의독립국가들 사이의 전쟁 이야기 알프스산기슭에 펼져진 신비한 사랑이야기 속에 묘사되는 이개들의 울부짖음으로 그이야기들이 되살아났다.
평화와 조용함 외로움 산과 하늘과 넉넉치 않은 농작지에서 일생을 혹은 수많은 선조들의 생애를 반복하는 저들은 누구이며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최대의 행복으로 생각하며 살가? 아침내내 비소식을 기다리던비 눈을 치떠야 보이는 피레네의 높은 눈덮인 봉우리위로 어디서나 낮익은 시컿먼 구름 바람과 함께 낮은 계곡으로 쏜살같이 내려 오기 시작했다. 급히 판초로 무장하고 시야가 판초때문에 거북해져 앞사람만 따라 걸어가며 이젠 사진이고 나발이고 걷는데만 혼신을 다해 턱에 넘치는 숨을 고르기만 해도 힘들었다. 이제 겨우 반정도왔느데 거의 1KM 높이의 가파른 산정를 올라 Roncesvalles Pass를 넘어야할 텐데 걱정되기 시작했는데 전에는 걷는것 오르는것이 기쁨이고 즐거웠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걱정부터 앞선다. 이유가 뭔지 질문을 퍼부어가며 잠시의 쉼도 없이 걷기만 했다. 이높은산을 넘어가는데 27KM 거의 17Miles 인데 Camino 전구간중 가장 힘든길이며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이길을 가지않고 평지인 Pamplona서 부터 걷는다. 용의 눈알을 뺀 Camino를 하는것이다. 고수들이 이렇게 힘든데 평인들한테는 아예 불가능한 루트임을 알수 있었다. 차거운 공기가 기침을 자극하며 계속 나를 괴롭혀 감기에 감염되였나 의구심이 났다. 나무에 가려 정상은 볼수 없었지만 빗발이 세여지며 바람도 함께 강해져 판초가 국기처럼 펄럭거렸다. 앞서 가는 홍종만형의 침착하고 같은 속도를 어김없이 유지하며 걷는 보폭으로 그는 매우 건강하며 노련한 걷기 명수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그의 위치까지 언재도달 할건가 언덕마다 그를 몹시 부러워 하며 깊은 숨을 쉴때 목이 쓰리고 부어올라 있음을 알게되였다. 그런대로 큰문제를 느낄수 없었지만 이순간 몸에 최대한의 load가 걸려있는데 이미 높아져 있는 몸의 열속에서 심한 오한이 밀려옮을 느낄수 있었다. 젠장 평소에 감기를 우숩게 생각했는데 이럴때 내 발목을 붙잡다니 당황할수 밖에 없는것이 몸의 에너지 레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올라온 정상위에는 거칠것이 없는 비바람이 인간을 몹시 없신 여겼다. 누군가의 위급한 상황으로 두대의 엠블란스가 차에 붙어있는 모든 lights를 번쩍이며 산정상에 와있는것 황량한 이곳도 인간 세상이였다.
이제 내려가는 길만 남아있어 마음도 몸도 여유를 찿을수 있었는데 좁은 길 위에 갑자기 두마리의 무엇이 길을 막고 섰는데 자세히 보니 어둑해 지는 빛속에 집채만한 말이였는데 짐바리에 쓰이는 체구가 제일큰 말들이였다. 목적지인 temple 안의 albergue 숙소근처에 이번에는 20여마리의 그놈들이 길을 점령하고 비켜주지도 않고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우리를 꼬나보는 그들의 군중의식이 위협적이였지만 길옆의 작은 무리들 틈을 비집고 빠져 나올때 겁이 났다.
우기로 접어든 이곳의 날씨는 부슬비가 지배하는 세상 아침을 근처의 식당에서 끝내는 즉시 각자는 무리를 지어 2번째 23KM 떨어져 있는 Zubiri 를 가는동안의 어저께 올라온 높은 산정에서 이제 낮은 지역으로 내려가는 길이였다. Bike를 타고 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심한 내리막길을 두꺼운 세멘트로 포장하여 매우 안전했다. 방울이 메달린 말과 소 양들이 움직일때 마다 시끄러운 소리가 합창으로 한참동안 주위가 시끄럽다. 이평화로운 들판이1635-1659과 1718블란서의 스페인에 선전포고등 BC 3세기부터 블란서와 스페인의 역대 왕국들의 수많은 전쟁으로 해가 지고 근대로 들어오며 18세기 블란서와 스페인의 천하주인이 되기위해 뿌린피는 과히 세계전쟁사에 큰 굴곡 이다.
스페인 모로코의 변두리에서 시작 스페인 본토로 확산된 내전은 1936 - 1939년 왕당파와 스페인 국민당 사이 즉 스페인 공화정부에 반기를 든 Francisco Franco 장군이 이끌어 승리한 전쟁인데 이는 세계 제2차전쟁의 전주곡(prelude) 의 서막으로 간주된다' 이내란으로 550,000만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의 사상가와 시대의 조류인 Facism 공산주의 사회주의 반정부 그리고 민주주의를 모두 불러 뫃은 사건이였으며 미국과 멕시코는 이전쟁을 수백만 시민들의 정치사회의 미래를 점치는 결정체로 받아들였다. Hemingway는 이전쟁에 참여 투우사들의 이야기 "The Sun Also Rises " 을 Pamplona 의 "Cafe Iruna" 에서 1926년에 탈고했다. 스페인이 낳은 뛰어난 투우사 ( Matador ) Cayetano Ordo'nez 의 생애를 통해 Bullfights 의 진명목을 소설화한 이야기다. 이유명한 식당에서 팀들과 함께 우리도 dinner를 즐겨보는 영광도 가졌다. 스페인의 투우역사는 AD 7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 Corrido de Toros " 는 Alfonso 8세의 여광스런 대관식을 위해 처음으로 시작되였다. 로마제국의 영향권에 있는 스페인은 검투사 (Gladiator Games) 의 대상으로 투우를 개발시켰다. 로마다음으로 세계패권을 노리며 인류의 첨단의 문화를 창조해낸 국민다운 착상이 아닐수 없다.
12세기 13세기를 통해 매년 250,000명의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순례길에 참여하였다. 자신들의 신앙의 감동과 다른 이유들 즉 신앙의 구원 참회 및 고행을 체험하고 또는 갑부들을 대신하여 어려운여행을 치루며 그댓가로 받아내는 현금을 위해 그리고 유죄판결을 끝내기 위한 다양한 목적으로 참가하였다. 순례자들의 가장큰 보람은 구원의 약속이였다. 교황 Calixtus 2세는 7월 25일이 일요일에 떨어지는해는 그해전체를 " Feast of James "로 선포하며 성스러운 해로 축제를 올렸다. 14세기경 부터는 종교전쟁 종교개혁등 많은 이유 때문에 전유롭의 순례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유롭을 강타한 열정의 순례자의 여행길은 한산했지만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 왔다
헌신으로 1980년대 부터 길표시판을 새로 만들며 새롭게 단장 Camino의 새황금기를 열어 놓았다. 오늘날의 전성시대를 연 산주역이다. 1885년에 1,245명 1993년 100,000명이 넘으면서 UNESCO WORLD HERITAGE 로 선포 하며 2010년 270,000명 이제는 500,000명으로 육박하는 인류최대의 행사중의 하나가 되였다.
Saint James(야고보) - 신비와 전설 찬란한 신화가 Camino의 전구간에 뭍혀있다. 순례의 역사에 따르면 전도사 요한의 형제 Zebedee 의 아들 St. James의 시체가 Alfonso 2세때 Galicia 들판에서 Pelayo라는 목자에 의해 발견되였다. 9세기때 야고보의 이름 Santiago or Santiago Saint James 를 뜻하는 야고보의 길 Camino de Santiago로 명명되였다. 야고보는 이미 800년전에 죽었는데 신화에 의하면 천사의 인도로 2제자들이 배를 타고 오늘날의 Camino de Portugues 선상에 있는 Sadron-Iria Flavia 마을 Galicia 로 운반 이지역에 매장되였는데 몇세기후 목동에 의해 재발견이 된것이다.
Alfonso 2세는 이소식을 듣고 그자리에 조그만 템플을 세우도록했고 그후 더큰 사원 으로 바꾸어놓아 전세계로 부터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는 예루살렘과 로마에 몰려드는 순례자들과경쟁을 벌렸다. 이시기는 전유롭이 광란의 사원건립과 순례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유물를 모으며 성야고보의 유물들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자의 길 Santiago de Compostela 를 완성시켰다. 이순례자의 길은 이베리아 북쪽을 여행하는 그리스도인의 큰 무리를 통해 유롭과의 문화적 유대관계를 유지 정치적으로 Moors 의 재침을 방어하는 강력한 도구로 쓰여졌다. 8세기 순례자들을 유혹한 매우 흥미로운 역사는 Camino가 세상의 끝 은하수의 끝 Fisterra - Finis Terrae - 땅의 끝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세상의 끝 죽음의 땅 다른세상에 가장 가까이 갈수있는 매혹적이며 신비한곳 이라고 믿는 순례자들을 끌어 모았다.
AD1078 년 Romanesque 성당의 건축이 시작되면서 산티아고의 황금기가 열였다. 오늘날 Camino de Norte 가 처음부터 가장 안전한 길이였고 9세기 Alfonso 2세왕 이 산티아고 까지 직접 순례여정을 마쳤다고 믿어지는 Camino Primitivo 2개가 있다. 이후 Camino Frances 는 Sancho the Great 왕들과 Alfonso 6세가 그들의 영토인 Navarra 와 Leon 을 가로지르는 길을 Moors 족의 영향으로 부터 해방되는 즉시 시작되였다. 수도원들은 순례자를 위한 병원 다리등 중요한 시설들을 차례로 완성시켜 산티아고 까지 가는 길을 걷는 순례자들을 보호해 주었다. 기독교 왕들은 국민들에게 이루트를 따라 이주할수 있도록 특권을 부여하여 많은 도시들이 생겨나서 그시대에 왕성한 번영과 번창을 이루게 하였다.
Zubiri 를 떠나 다음 목적지인 20KM 떨어진 Pamplona 향해걷는 하늘은 회색 으로 두껍게 구름이 끼고 가끔 부슬비를 동반했다. 오늘 이시간은 걷는것만이 다만 목적인데 몸 콘디숀은 나빳다. 가쁜숨결과 오한 뼈마디 마다 통증을 유발했다. 그리고 입맛이 없어 지난 3일간 별로 먹은것이 없다. 감기란 이처럼 몸의 균형을 억망으로 만드는 병일가. 어깨를 조여오는 배낭의 무게가 제일 문제였고 걸음의 속도를 낼수 없는것이 문제였는데 양쪽의 엉치근육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똑바로 걸을수 없어 게걸음 으로 옆으로 걷기시작했을때는 평소의 속도 반도 낼수없었다. 잘표시가 되여있는 길을 따라가니가 앞서간 팀들이 눈에서 멀어졌는데도 이젠 걱정을 않해도 될많큼 여유가 생겨 편한속도를 유지하며 옆으로 한발자국씩 내디디면서 순례자의 고행을 맘껏 즐겨보기로 마음을 달래려고 무진 애를썻다. 도시의 두께가 엷어져 가는 외곽에 이르자 갑자기 나훈아의 " 어메 어메 우리 어메 워짤라고 나를 낳았소 이놈신세 말이 아니네 - 이놈신세 말이 아니네..."
이비룡 장노는 뒤에 쳐저 나의 속도에 마추며 6번째의 순례길을 나를 위해 보살펴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하늘이 내려준 구주 천사였다. 첫날 St. Jean 의 알베르게 에서 이미 와있었던 외모가 가련한 독일청년의 사정을 듣고 선듯 적지않은 현금을 내주는 장노의 선행은 그자리에 있었던 나를 얼마나 감동시켰는지. 그의 신앙심과 자비는 항상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다. 그는 상태를 직감하고 시내 외곽으로 빠질때 Nursery 에 들어가 택시를 불러줄 것을 요청 마지막 3킬로를 택시를 타고 갔다. 앞서 갔던 팀들이 같은시간 albergue 에 함께 도착했다. 결국 7일의 순례길을 나는 3일로 포기해야 했다. 이장노님은 호텔에 2베드방을 예약해 함께 머물게 하는 호의도 베풒어 주었다. 10시쯤 호텔에서 나와 교외 버스 정류장은 그리 멀지않는곳에 있 바꾸어 주는 백화점 지하 2층을 찿아가 영어가 통하지 않았고 또 불친절을 감수해야했다. 그녀의 영어에 대한 멸시와 증오를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이런 멘탈리티로 스페인이 세계정상급의 나라로 발돋움 할수있을가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들었다. 9층의 카페로 올라가 오랫만에 여유류를 갖고 아침식사를 하고 12시쯤 정거장에 도착해 알아보니 Burgos 까지 가는 직행이 없고 Vitoria 에가서 갈아타야 된다고 했다. 3 시간을 기다려 버스를 타고 Burgos 에 도착한것은 비가 줄기차게 퍼붙는 오후 7시반 그날밤을 자야하는 알베르게는 1.5KM 정도라 걸어서 같다. 저녁식사를 해야되는데 오직 수프만 먹고싶어 크고작은 식당들 모두 들려 헛탕을 치고 마지막 돌다리를 건느기전 좌편으로 작은 bar 로 들어가 물어 보니 만들어 줄테니 앉아 기다리란다. 올리브 기름에 핫쏘스를 넣어 상처난 목구멍에 심한 자극을 주었지만 먹을만했다. 10시에 닫는 알베르게에 9시반경 문을 열고 들어가니 늙은 할아범이 5유로 요구했다. 마드리드로 내일떠나면 하루 체제비가 이보다 훨씬 비쌀텐데 이곳에서 하루더 묵기로 마음을 작정했다. 이곳의 룰을 알턱이없는 나는 9시에 짐을 맡겨놓고 마지막으로 나왔는데 오후 2시서부터 문을 열어 연장신청을 다시 하는데 9시까지 꾸물 거렸다고 호된 꾸증을 해됐다. 악몽으로 변한 새로배정된 침대는 밤새 빈대의 습격을 받고 밤을 새우다 시피했다. 아침일찍 서둘러 바로 앞에있는 식당에서 커피와 간단한 아침주문하고 영국과 벨지움에서 온 젊은이 들과 함께 앉아 잡담을 주고 받았다. 영국청년은 Braxit 로 인해 그들의 자부심과 자존심에 닥쳐올수 있는 불안과 염려를 감추지 않았다. 벨지움에서 온 20대 초반인 젊은 처녀 였는데 벨지움에서 사는것을 행운으로 생각 하지만 그곳 정치인 들은 손바닥만한 나라에 영어 불어 독일어 본토언어를 쓰는 지역 으로 갈라져 서로 독립을 하겠다는 정치꾼들의 아우성 때문에 그녀의 행복지수가 말이 아니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모든 학생들은 모든 언어를 고등학교 수준의 실력을 쌓는것이 필수 조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억지와 불만과 불평의 요소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정권창출과 국회에 입성하기위해 모든수단을 마다하지 않는 지구상의 모든 정치인들의 면모를 느낄수 있었다. 그녀는 순례자의 길을 이만 접고 급한일이 생겨 서북쪽 해안도시 San Sebastian 으로 가서 한번만 갈아타면 14시간안에 집에 도착 할수있다고 했다. 비가 쏟아지는 초저녁의 마드리는 어둠속 헤드라이트에 반사되는 빗줄기에 flamengo dance 처럼 어른거리는 시간 에 도착되였다. 겨우 찿아간 민박주인은 연락도 없이 미리나타난 나를 시내 한복판에 있는 어서 유로를그의 또다른 집으로 데려다 주느라고 외곽에 서 시내 중심으로 운전해갔다. 시내로 들어올려면 따로 허가증을 발부받아야 들어올수 있는데 시내로 들어오는 차량을 제한하고 통제하는것은 시정부의 방침이며 이는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매연을 감소 시키려는 의도이다. 불편한 걸음으로 반마일 중심지 솔광장 마요로광장 왕궁 을 두루살펴보았다. 중세기이후 르네쌍스를 거치며 PAX ROMANA 를 건설했던 열정으로 CONQUISTADOR 의 정신으로 무적함대를 앞세워 세계지배의 의지로 유례없는 제국을 건설한 역사를 보며 느끼는 시간이였다. 와궁앞에 있는 큰성당속벽에는 무진 매질로 피로얼룩진 예수의 조각은 발길을 뗄수없는 마력이 지니고 있었다. 특히 놀라웠던것은 성당 오른쪽 끝에 검은자태의 사도 바울 의 동상위에 로마서 첯장 첯구절이 동상위 벽에 쓰여져 있었다. - Paulo, Siervo de Christo Jesus, llamada a ser Ap'ostol - 그의 일생을 통해 피맺힌 한이 이구절속에 다들어 있었다. 이동상은 예수를 직접섬기기 못한 제자의 명분때문에 예수의 제자들로 부터 따돌림과 세상의 눈으로 보는 제자의 자격 문제에 큰 부담을 느끼며 살았던 그의 외로움이 전달되는 것 같아 큰 감동을 안겨 주었다. Toledo Greco Museo 에서 본 베드로의 눈물 - 첯닭 울기 전 나를 3번 부인할것 이라는 스승의 예언을 기억하며 뉘우침의 눈물이 가득한 눈을들어 위를바라보는 모습은 너무나 성스러웠다.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되겠다는 용기를 그에게 심어준 뉘우침의 이눈물이 내몸을 한동안 굳어있게 만들었다. 뉘우치고 회계 하는것만이 한계인 인간본연의 모습을 통해 인간에게 신앙을 갖을수 있는 특권만이 오로지 인간의 한계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님을 깨닫게했다. 이특권을 얻은 " Among whom you also are the called Jesus Christ - Romans 1 : 6 " 의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왕궁주변에서 우산 셀피봉등을 팔며 어려운 삶을 살 고있는 파키스탄 코리안을 맞난 이야기 이다' 그는 18년의 젊은 시절을 서울에서 좋은 직장과 주인을 맞나 살며 한국이 세계최고의 살기좋은 나라임을 나에게 확신 시켜줄려는 훌융한 한국인을 맞난것은 기쁜 추억 이였다 . 더이상 한국체제비자를 못받아 쫓겨나와 스페인으로 나왔다. 내가 갖고있는 한국의 이미지와 정서를 확 바꾸어 놓았다. 그는 한국이 지구상 제일 살기좋은 나라 돈벌기 쉬운 나라로 믿고있으며 한국으로 귀화하고 싶은 많은 동남아 외국인의 한사람 이였다. 시내관광 버스를 타고 마드리드 시의 부분이지만 스페인을 느끼고 감상하기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던 여행이였다. 심한 감기로 7일중 3일만에 포기해야만 했던 순례자의 길 이였지만 4일간의 시간에 나에게만 허용된 시간을 내신앙의 내면을 조명하고 바라던 영적체험을 카돌릭 성당에 쌓여 있는 조각과 성화를 통해 AD 1200 초에서 부터 시작한 인류가 긴세월동안 축적한 지적 능력을 총동원 600년의 세월속에 금자탑을 세운 역사를 부분적으로 최험하며 신앙과 인류라는 최고의 명제를 우주속에서 우리만 누릴수 있는 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었던 경험은 기쁨과 환희 그자체였다. 최한영 팀장의 완벽하며 주도면밀한 인도와 지도력으로 훌융한 여행을 마칠수 있었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용기와 약으로 내일생에 제일 아팟던 시간을 함께 할수 있었던 "산이좋아"의 팀웍과 우정에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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