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6)―[별첨]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제5일)] * 제6구간(안동→ 풍산)
▶ 2021년 11월 10일 (토요일) [별도 탐방] ① 송야천 금계- 안동 서후면(1)
* [해주오씨 계화공파 문중 2021-정기총회] (11:00, 안동시 풍산읍 ‘황소식당’)
오늘은 안동시 풍산읍에서 해주 오씨 계화공(季華公) 문중의 정기총회가 있는 날이다. 나는, 해주 오씨(海州吳氏) 벽성군(碧城君) 파조의 14세손이다. 벽성군(諱 致雲)은 조선 선조 때 호성공신으로 벽성군(碧城君)으로 책봉되었으며 한성판윤을 지내셨다. 그 삼자 사은공(沙隱公, 휘 得奉)이 안동 풍산으로 입향하셨는데, 그 후손들이 풍산의 증수, 수동을 중심으로 세거하게 되었다. 계화공(季華公, 諱 佐秀)은 입향조 사은공의 7세손으로, 그 후손들이 하나의 문중을 이루었다. 계화공의 후손인 나의 상계(上系)는 다음과 같다. 계화공의 장자 여백공(汝伯公, 휘 和隆)에 이어 차자 사보공(士保公, 휘 佑成)으로 이어지는데, 바로 나의 고조(高祖)이시다. 그리고 문경의 옥산으로 입향하신 증조 광언공(휘 재영在泳) 이래→ 차자인 조부 성여공(휘 인모麟模)→ 아버지(휘 수환壽煥)로 이어져 왔다. 그러므로 나는 해주 오씨 안동지파 계화공 문중 7세손이다. … 나는 이번 2021년 해주 오씨 계화공 문중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하게 되어 감회가 남달랐다. 그 동안 마음으로만 그리워했던 풍산의 우리 족친들을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서울, 부산, 대구, 구미 등 전국 각처로 출향한 많은 친족들이 한 자리에 참석하여 참으로 뜻 깊은 모임이었다.
특히 오늘의 회의의 주제는, ‘주손(冑孫) 명의’나 ‘개인 명의’로 되어 있는 종중의 세전재산(先代의 世傳 財産, 선산이나 전답)을 모두 ‘종중 명의’로 바꾸는 문제였다. 개인 명의의 문중재산은 대(代)가 내려갈수록, 한 뿌리 조상의 믿음과 의리가 희박해지면서 조상이나 문중보다는 그것을 개인의 재산으로 생각하기 쉽다. 사실 지금도 일부 갈래에서 그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 빨리 조치하지 않으면 재산 문제로 한 집안 족친 간의 다툼 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다행히, 우리 계화공 문중의 주손(冑孫)인 오승택 회장이 사안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선대 세전재산의 문중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문중 대소사의 역사와 현황에 밝은 오정택 총무간사가 실무를 담당하고 있다. 동국대 교수 오승택 회장은 법학박사이다. 오늘 한 자리에 모인 우리 문중의 모든 족친들도 이 사안에 만장일치로 찬성하고 서명했다. 모든 친족들이 한마음이 된 모습이 마음 든든했다.
나는, 작년 2020년 8월 3일부터 11월 11일까지, 강원도 태백에서 부산 다대포(몰운대)까지 낙동강 1,300리를 걸어서 종주(縱走)한 바 있다. 10월 14일 낙동강 안동―풍산 구간은 족손 정택(柾澤)과 함께 걸었다. 그때 정택의 안내를 받아, 안동시 남후면 고하리 건지산(갈골 뒷산)에 모셔져 있는 우리 계화공(季華公, 諱 佐秀) 할아버지 묘소와 휘(諱) 화융(和隆) 할아버지, 휘 화달(和達) 할아버지 묘소를 처음으로 참배했었다.
안동시 서후면 일대의 유적탐방
족손 정택과 규택이 함께 하는 길
오늘은 2021년 가을, 계절이 깊어가는 11월이다. 하늘은 푸르고 대기가 청정한 날. 하늘에서 맑은 햇살이 너른 들판에 쏟아지는 풍산이다. 집안의 문중회의를 마치고 … 족손 정택과 규택을 길라잡이로 하여, 학봉선생 종택을 비롯하여 ‘안동 문화유적’ 탐방 길에 올랐다. 족손 정택(柾澤)은 자질이 총명하고 동양 고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독서를 통하여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역사와 지리, 인물 탐구 등 인문학적 지식이 풍부하다. 그는 안동문화권의 모든 인맥과 학문 등에 수많은 정보와 자료를 가지고 있다. 작년 낙동강 1300리 종주 안동—풍산 구간을 함께 걸을 때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족손 규택(奎澤)은 풍산에서 출향하여 지금 구미에 살고 있는데 오늘 문중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에 왔다가, 기꺼이 자신의 백마(白馬)를 몰고 나와, 탐방 길을 열어주었다.
오늘은, 작년 낙동강 종주를 할 때 정해진 일정으로 말미암아 미처 탐방하지 못했던, ‘송야천—금계의 안동시 서후면 일대의 역사유적지’를 찾기로 한 것이다. 총명한 택손 정택이 길을 열었다. 송야천은 안동시 북후(면)에서 서후면을 경유하여 안동시 송현동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천등산 줄기의 상산(520m)에서 발원한 금계(金溪)는 서후(면)을 경유하여 교리에서 송야천에 흘러드는 작은 하천이다.
안동의 924번 지방도로는 안동(역)에서 송야천—금계를 따라 서후(면)으로 이어진다. 서후면 금계 상류의 성곡리에는 상산의 남쪽 아래에는 ‘안동 장씨 태사공 성곡재사’가 있고, ‘풍산 류씨 금계재사’를 비롯하여, 송림이 울창한 천등산 지맥의 산록에 안동 권씨 시조인 ‘태사공 묘소’와 ‘류성룡 부모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태사로 길목에 ‘권태사 능동재사’, ‘권태사 신도비(각)’이 있으며, 그리고 안동 장씨 ‘경당종택’이 있고, 그리고 그 아래쪽에 의성 김씨 ‘학봉종택’이 있다. 그리고 서후면 태장리에는 천 년 고찰 ‘천등산 봉정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또 태장리에는 ‘안동 김씨 김태사 재사’도 있다. …
'검제' ― 안동시 서후면 금계마을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 안동의 진산인 학가산(鶴駕山) 남쪽, 천등산(天燈山) 아래에 있는 속칭 ‘검제’ 마을은 야트막한 산 밑에 여러 채의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마을의 지세가 거문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금지’라고 불렀으나, 학봉선생이 임하면 내앞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면서 마을이름을 ‘검제’라 하고, 한자로 ‘金溪’(금계)라 적었다. 금계리에는 예로부터 원주 변씨, 의성 김씨, 안동 장씨의 집성촌이었다. 검제마을은 천 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수많은 선현 학자와 구국인물을 배출한 유서 깊은 마을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통일고려의 위업을 이룩하고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안동 장씨의 시조인 삼태사(三太師)의 묘소가 모두 모여 있는 안동 역사의 뿌리이며 사육신의 한 분인 단계 하위지(河緯地) 선생의 충절이 어린 마을이다. 《한국인명사전》에는 이 검제마을 출신의 선현이 15분이 실려 있다. 먼저 삼태사인 권행, 김선평, 장길 세 분과 단계 하위지, 용재 이종준, 마애 권예, 동호 변영청, 송암 권호문, 임연재 배상익, 학봉 김성일, 금역당 배용길, 경당 장흥효, 정부인 안동 장씨, 겸와 김진형, 서산 김흥락 등이다.
금계마을에는 하위지 종가를 비롯하여, 권호문 종가인 관물당, 학봉 종가인 풍뢰헌, 경당의 종가, 간재 변중일의 종가, 마애 고택이 있고, 배상지가 살았던 배죽당과 용재가 살았던 행정(杏亭) 옛터가 남아있는 등 여덟 곳의 종가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는 창열서원, 경광서원, 소계서당이 있고 마을 입구 임천서원, 청성서원 등 5개의 서원이 있다. 선비들이 학문을 연구하고 풍류를 즐기던 정자는 수없이 많다. 마을 뒤, 천등산 산록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있는 천 년 고찰 봉정사(鳳停寺)가 있고, 조선 초기 불경 간행 중심 사찰로 《훈민정음 해례본》(국보),《월인석보》(국보)가 발굴된 광흥사가 있다.
☆… 오늘 우리의 탐방은 학봉종택에서 시작한다. 우선 금계마을 ‘鶴峯先生舊宅’(학봉선생구택) 현판을 올린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화창하고 맑은 가을날, 고택은 고요하고 만추의 은은한 정취가 흘렀다. 잔디가 깔린 너른 마당이 아늑하고 평화롭다. 좌측의 정침과 이어진 사랑채 그리 고 맞은편에 보이는 풍뢰헌이 한 눈에 들어왔다. 고택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 한참을 서 있었다. 400여 년 전의 고택의 주인이신 학봉 선생을 추념하면서 시공을 초월하는 상념에 젖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짙은 은회색 두루마기를 입은 풍채 좋은 선비가 종택의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살펴보니, 연전 ‘퇴계학학술대회’에서 몇 번 만났던, 의성 김씨 학봉종택 종손이신 김종길(金鍾吉, 80세) 선생이었다. 시간을 정해 일부러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때맞춰 만난 것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김종길 공(公)은 학봉 선생의 15대 주손으로, 종부 이점숙 여사(81세)와 함께 학봉의 종가를 지키고 있으며, 현재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밝은 가을 햇살을 받으며 종택의 정원에서 함께 잠시 담소를 나누며 기념촬영도 했다. 공(公)은 사랑채로 들어가 한 권의 책자를 들고 나왔다.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서 발간한 책자를 건네주었다. 제목이 《400년을 이어온 학봉선생 고택의 구국활동》이라는 책이었다.
학봉종택 (鶴峯宗宅)
의성 김씨 ‘학봉종택’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년~1593)의 종가이다.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풍산태사로 2830-6)에 있다. KTX 안동역에서 924번 지방도로를 따라 서후(면)으로 가는 금계의 길목에 있다.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이자 명신인 김성일선생이 1582년(선조16년)(45세) 안동 ‘내앞마을’에서 이곳 금계(金溪)의 현 위치로 옮겨와 세거지로 자리 잡았다.
이 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가 되자, 학봉의 8세손 광찬(光燦)이 1762년(영조 38) 이곳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산 아래 현재 소계서당(邵溪書堂)이 있는 자리에 옮겨 살고, 종택이 있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한다. 그러나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옮겨왔다. 학봉종택은 1995년 12월 1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종택 건물은 푸른 소나무가 울창한 야산을 배산(背山)으로 하고 비교적 평탄한 대지에 서남향으로 좌정하였는데, 일(一)자형의 안채와 사랑채, 사당, 문간채, 풍뢰헌, 운장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솟을대문 앞 바깥마당, 산 아래 가장자리에 ‘학봉기념관’이 있다. 근년에 지은 5칸 규모의 동북쪽으로 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좌측에 ‘정침’(正寢 : 주택의 중심이 되는 집 또는 방)과 '사랑채'와 그 뒤의 ‘사당(祠堂)’이 서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마당 건너편에는 역시 근년에 지은 ‘운장각(雲章閣)’과 ‘별채 풍뢰헌’이 각각 서북향으로 앉아 있다. 풍뢰헌(風雷軒)은 그리고 솟을대문 맞은편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정침은 ㅁ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으나 최근에 좌측에 아래채를 달아내어 합해서 보면 ‘日’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정침의 정면 우측에 사랑채가 약간 돌출되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건물은 원래 있던 소계서당을 개조한 것이다.
안채는 우측 3칸을 대청으로 꾸미고, 좌측에는 2칸 안방을 두고 이어서 부엌을 연결하였다. 사랑채나 안채의 가구는 모두 5량 가구에 제형 판대공을 세웠다. 정침의 오른쪽 뒤편에는 3칸 규모의 사당을 배치하고 주위에 토석담장을 둘러 별곽을 이루었다.
소계서당(邵溪書堂)
‘소계서당(邵溪書堂)’은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70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조 말 영남의 유림을 대표하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강학소이다. 김흥락((1827~1899)은 학봉 선생의 11대 주손으로 능주목사 탄와(坦窩) 김진화(金鎭華) 공의 맏아들이다. 이 서당에는 ‘邵溪書堂’(소계서당)의 현판과 ‘西山’(서산)이란 아호 현판과 족질 후학 김정모가 지은 기문(記文)이 게시되어 있다. 김흥락의 자는 계맹(繼孟)이다. 구한말 영남을 대표하던 학자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1777~1861년)의 문인으로 수학하여 퇴계학맥의 적통(嫡統)을 이었으며, 영남학파의 종장(宗匠)으로 추앙받았다. 특지로 천거되어 승문원(承文院) 우부승지(右副承旨),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41년(헌종 7년) 김흥락은 성현의 격언을 발췌한《제훈집설요람》을 편찬했다. 1854년(철종 1년) ‘졸수요결’, ‘입학오도’, ‘주일설’을 지었다. 이돈우, 권연하 등과 교유하며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저서로는 《서산집》이 있다.
이 서당은 1762년 8대종손 김광찬(金光燦 , 영조38년)이 현 위치에 있던 종가가 잦은 침수로, 여기 소계서당 자리로 이건 하였다가, 200여년이 지난 1964년에 지금은 고인이 되신 14대 종손 김시인(金時寅)이 현 위치에 집터를 높여 다시 옮겨지었고, 서당만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중종 33년 안동 천전리(‘내앞마을’)에서 의성 김씨 청계공(靑溪公) 김진(金璡)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자가 사순(士純)이고 호가 학봉(鶴峯)이다. 1556년(19세 ) 도산서당 퇴계 이황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더불어 퇴계의 고제자(高弟子)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29세인 1566년(명종21년), 학봉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학통전수의 징표인 ‘병명(屛銘)’을 받았다.
학봉(鶴峯)은 27세에 사마시에, 1568년(선조 1) 중광문과 병과에 합격한 이후 이조와 호조의 낭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577년(선조 10)에는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명의 사신으로 가서 대명회전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기도 했다.(광국공신원종일등) 이어서 대간, 홍문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79년(선조12년)(42세) 사헌부 장령으로 직언과 탄핵을 서슴치 않아 ‘조정의 호랑이’(殿上虎)라 불렸다. 이어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史)로 나가 6진(鎭) 등 국경지대를 살펴보았고, 1583년(선조 16) 다시 황해도 순무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1582년(선조16년)(45세) 안동 금계(金溪) 현 재위치로 이거하여 세거지로 자리 잡았다. 1584년(선조17년)(46세) 대동법 및 7개조를 상소했다.
1584년(선조17년)(47세)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부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면서 호남 최초의 서원인 대곡서원(현 경연서원景賢書院)을 창건하고 환훤당 김굉필(金宏弼), 일두 정여창(鄭汝昌), 정암 조광조(趙光祖), 회재 이언적(李彦迪), 퇴계 이황(李滉) 등 5현을 배향했다. 1585년(선조18년)(48세) 나주(羅州)에서 퇴계의 저술인 ‘성학십도’, ‘계산잡영’, ‘주자서절요’, ‘퇴계선생자성록’, ‘향교예집(동자례)’, ‘의례도’를 간행했다.
1590년(선조23년)(53세)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正使) 황윤길 등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 그때 일본 근대유학의 개조인 후지와라(藤原惺窩) 등에게 퇴계학을 전수했다. 1591년 일본에서 돌아온 정사 황윤길은 현지의 분위기를 볼 때 일본이 침공해올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김성일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했다. 황윤길 외에 다른 수행원들도 일본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그해 학봉은 세 번의 소(疏)를 올려 국방을 강화할 것을 주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황윤길의 보고대로 이듬해인 1592년 일본이 침공해오자 선조 임금은 김성일의 처벌을 명했으나, 김성일은 그와 동문수학했던 유성룡의 변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은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어 함양, 죽산 등지에서 격문을 띄워 곽재우 등 의병을 도모하여 진주성전투에서 대승을 이끌었다.(진주대첩 선무원종공신일등) 이어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가 되어 관내 각지를 순행하며 독전하다가 이듬해 1593년(선조26년) (56세) 진주공관에서 병(病)으로 순국했다.
1607년(선조40년) 사림에서 학봉의 학문과 충절을 기려 임천서원 등 9개 서원공간에 위판을 봉안하였다. 1676년(숙종2년) 이조판서. 대제학에 추증되고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받았다.
의성 김씨(義城金氏) ― 학봉 집안의 내력
의성 김씨의 시조는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 석(金錫)이다.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고려 태조 왕건의 딸과 결혼 했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김석이다. 김석은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자인 것이다. 김석은 지금의 경북 의성군 일대의 땅을 봉토로 받으면서 의성군(義城 君)으로 봉해졌다. 김석의 자손들이 대대로 의성에 살게 되면서 본관을 의성(義城으로 삼았다.
그 후 김성일의 7대조 김거두가 안동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김거두는 안동의 유력한 가문이었던 김방경(구 안동김씨의 시조), 권한공 등의 집안과 혼인을 하면서 재지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김거두의 증손자 김한계는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단종 때 집현전 학사와 부지승무원 원사 등의 벼슬을 지내다가 세조가 정권을 잡자 안동으로 낙향했다.
의성김씨가 내앞시대를 연 이는 김만근(1446~1500)이다. 관직을 사직하고 안동에 은거한 김한계(1414~1461)의 장자다. 김만근은 임하현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가진 갑부 해주 오씨 ‘오계동 집안’에 장가들어 처갓집 재산을 물려받고 안동시 임하면 천전(川前, 내앞)마을에 살기 시작했다. 그것을 계기로 의성 김씨 ‘내앞파’가 생겼으며, 김만근의 손자이자 김성일의 아버지인 청계 김진이 내앞파의 중시조가 되었다. 호를 따서 청계대조(淸溪大祖)라고 불리는 김진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어지는 의성 김씨 내앞파의 기틀을 단단하게 다졌다. 김성일은 훗날 자신에게 인간적,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두 사람을 꼽았다. 그중 한 사람은 스승인 퇴계 이황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아버지 김진이었다.
김진은 1525년 사마시에 급제한 다음 성균관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성균관은 과거를 준비하는 교육기관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얼마 뒤 김진은 돌연 과거공부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당을 세우고 집안 자손들과 동네 아이들을 모아 교육시키는 일을 시작했다. 김진이 과거를 포기하고 처사(處士)의 삶을 선택한 것은 당파 싸움을 일삼는 중앙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의 사연에 대해서는 전설과도 같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김진이 서울로 가기 위해 문경새재를 넘다가 고개 마루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한 백발노인이 고개를 올라오더니 김진의 곁에 앉았다. 김진이 어른에 대한 예의로 인사를 하자 노인이 물었다. “댁은 어디로 가는 길이오?” / “서울 갑니다.” / “서울은 웬일로 가시오?” / 잠시 머뭇거리던 김진이 말했다. “과거공부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 노인은 김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신수를 보아하니 살아서 참판 벼슬을 하는 것보다 돌아가서 증 판서를 하는 게 더 낫겠는데?”
증(贈) 판서를 한다는 것은 자식이 잘되어서 부모에게 높은 벼슬을 내린다는 뜻이다. 훗날 김진은 김성일을 포함하여 다섯 형제를 모두 과거에 합 격 시키는 등 자식을 훌륭하게 키웠으므로 그 노인의 말대로 된 셈이다.
이렇게 의성 김씨는 청계공(淸溪公) 김진(金進)의 조부인 망계(望溪) 김만근 이 내앞[川前]마을로 입향한 이래 기반을 다져오다가 청계공대에 이르러 가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청계공 김진을 다섯 아들을 두었다. 약봉(藥峰) 김극일, 귀봉 김수일, 운암(雲巖) 김명일, 학봉(鶴峯) 김성일, 남악(南嶽) 김복일이다. 5형제가 모두 퇴계(退溪)의 제자가 되었고, 그중 3형제(약봉, 학봉, 남악)는 문과에 급제하였고, 운암과 귀봉은 소과에 급제하였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흔히 이 집안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고 칭송하기도 하고 다섯 형제는 ‘의성 김씨 오룡(義城金氏五龍)’으로 불리기도 한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그 후손의 삶
학봉(鶴峯)은 성품이 강직하여 임금 앞에서도 직언을 잘하는 사람으로 ‘조정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일본 통신사 부사로 다녀와서 민심을 우려해 ‘금방 쳐들어올 것 같은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보고했다가 논란이 되어 파직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초유사로 관군과 의병을 함께 지휘해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경(敬)과 의(義)’의 실행을 중시하는 학봉의 학문은 훗날 후손들에게 이어져 독립운동의 자산이 되었다.
학봉의 장손, 단곡(端谷) 김시추(金是樞, 1580년~1640년)는 이이첨의 폭정을 단죄하는 ‘영남유생만인소’의 소수(疏首, 상소의 우두머리)로 활동했고, 이곳 종택을 건립하고 ‘풍뢰헌(風雷軒)’이라 했다. 호남 의병대장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이 임란 때 이곳으로 와 가족과 같이 지냈다. 11대 주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년~1899년)은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고제로 퇴계학의 적통을 고수했다. 조선의 마지막 산림(山林)이라 불렀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와 단발령에 항거해 안동의 ‘을미의병’을 창의했다.
13대 주손 여견(汝見) 김용환(金龍煥, 1887년~1946년)은 항일의병전투에 참전했고 의용단 활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종택과 종답을 매각하여 만주 독립군자금으로 지원했다. 이런 활동의 은폐를 위해서 ‘노름꾼, 파락호’로 위장했다. 그 후 해방 다음해 생(生)을 마쳤다. 서산(西山)과 손자 2대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고, 지손 15명이 독립유공 훈·포장을 받았는데 여견 김용환의 딸인 김후옹이 훈장을 대신해서 받았다. 학봉고택을 ‘문충고가(文忠古家)’, ‘연원회귀가(淵源回歸家’로 불린다. 보물 503점을 포함 고문헌과 유물과 유품은 ‘운장각(雲章閣)’과 ‘학봉기념관(鶴峰記念館)’에 보존`전시하고 있다.
☆ 학봉종택의 현판 ☆
‘文忠古家’ ‘博約眞詮’ ‘風雷軒’ ‘風花雪月山館’ ‘光風霽月’
학봉(鶴峯)은 퇴계 학풍의 징표인 병명(屛銘)을 받았으며, 그후 11대 주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이 다시 받아 2번이나 퇴계의 정맥을 이은 집이다. 그리하여 당호가 학봉의 시호를 따서 문충고가(文忠古家)라 하고, 또한 퇴계의 학풍이 다시 돌아왔기에 연원회귀가(淵源回歸家)로 부르기도 한다. 현판 ‘文忠古家’(문충고가)는 학봉의 시호로 붙인 이름이며, ‘博約眞詮’(박약진전)은 널리 배우고 예로서 요약하라 라는 공자의 말씀으로 진리를 깨닫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학봉종택의 ‘風雷軒’(풍뢰헌)은 학봉의 장손 단곡(端谷) 김시추(金是樞, 1580년~1640년)가 명명했다. 풍뢰헌에 '風花雪月山舘'(풍화설월산관)도 있다.
학봉종택 정침 — 종택 안채의 현판 ‘光風霽月’(광풍제월)은 미수 허목(許穆)의 글씨다. ‘광풍제월’은 중국 송나라의 대표적인 시인 황정견(黃庭堅)이 염계(廉溪) 주돈이(周敦頤)의 인품을 평한 말로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개인 날의 달처럼 가슴속에 맑은 인품을 지닌 사람’을 뜻한다.
퇴계(退溪)의 학풍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통하여,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밀암(密庵) 이재(李栽)-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으로 계승되고, 학봉의 11대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서산 김흥락의 제자로는 석주(이상룡). 일송(김동삼). 기암(이중업). 성재(권상익). 공산(송준필) 대개(이승희). 백하(김대락). 소창(김원식) 등이 있다.
종택의 사당(祠堂)
학봉 선생의 ‘불천위(不遷位) 신주(神主)’를 모신
학봉종택 안채 동쪽 뒤편에 위치한 사당에 학봉의 ‘불천위 신주(不遷位神主)’가 봉안되어 있다. 학봉 불천위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사당(祠堂)에는 학봉 내외 신주가 가장 서쪽에 있고, 종손의 4대조 신주가 그 동쪽에 모셔져 있다.
학봉선생 불천위 제사(기일은 음력 4월 29일)는 기일 0시30분경 출주(出主)를 시작으로 진행된다. 종택 안채 대청에서 열리며, 참석 제관은 50여명에 이른다. 아헌은 종부가 올린다. 학봉 내외의 제상이 따로 차려지며, 제청에는 ‘중류지주’(中流砥柱: 난세에도 의연하게 절의를 지키는 일 또는 그런 인물 비유하는 말)와 ‘백세청풍’(百世淸風: 영원토록 변치 않는 선비의 절개, 후세인의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 글씨가 있는 대형 탁본 족자가 내걸린다.
제사상에는 약과 위에 ‘산마’를 익혀 올리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학봉이 전쟁터에서 전염병(장티푸스)이 도는 병사들에게 직접 미음을 먹이다 본인도 전염돼 며칠 만에 사망하게 되는데, 그 때 ‘마’를 먹은 것으로 전해지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송기를 이용한 송편을 쓰고 있다. 이는 독야청청한 소나무의 기상을 닮은 학봉의 기개를 기리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또 ‘소금장’을 올리는데, 더운 여름에 별세해 초혼(招魂)할 때 부패방지를 위해 소금을 쓴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불천위 제사 때만 사용하는 병풍(屛風)이 있다. 10폭인 이 병풍은 지금의 종부가 40년 전에 직접 수놓은 것으로, 퇴계가 심학의 요체를 학봉에게 써준 ‘병명(屛銘)’이 새겨져 있다.
운장각(雲章閣) — 학봉종택 보물각
운장각은 학봉선생의 유물각으로 1987년 개관했다. 운장(雲章)이란 저 높은 은하수처럼(倬彼雲漢) 하늘가운데에서 맑게 빛난다(爲章于天)라는 ‘시경(詩經)’의 한 구절에서 취했다. 운장각에는 경연일기. 해사록. 등 친필유고와 사기. 고려사절요 같은 전적 56종 261점과 교지. 간찰류. 고문서 17종 242점 등 73종 503점이 국가 ‘보물(寶物)’로 지정되었고 안경. 벼루 등도 보관되어 있다. 학봉은 내치외교에 전력하였고 임란 전에는 통신사부사로 다녀왔으며 임란 때는 초유사(招諭使). 경상우도관찰사로 관군 의병을 총지휘하여 임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1593년4월 병든 백성을 규휼하던 중 진주공관에서 순국했다. 그후 이조판서. 대제학에 추증되고 문충(文忠) [道德博聞曰文 危身奉上曰忠]의 시호를 받았다. 학봉전집에 전한다.
고재오의 기념식수
고경명 의병대장 13대 후손 충효부대장 고재오가, 2004년 3월1일에 힉봉종택을 찾아와 기념식수를 했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년-1592년)은 조선의 문신으로. 호남지방에서 의병장으로 할약했다, 본관은 장흥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학봉기념관(鶴峰記念館)
학봉선생구택(鶴峯先生舊宅, 현판) 솟을대문 바깥마당 좌측 가장자리에 ‘학봉기념관’이 있다. 학봉선생의 생애와 행장 및 유품(遺品)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종택의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대문 바깥에 있는 학봉기념관을 관람했다.
좌측의 입구에 들어서면 학봉이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지었다는 〈삼장사의 시〉가 게시되어 있고 안쪽으로 〈학봉 김성일 선생 연보〉를 시작으로 ‘임천서원’, ‘석문정사’에 대한 설명이 게시되어 있다. 그리고 아담한 실내의 전시관에는 학봉 선생이 생전에 쓰던 각종 유품을 비롯하여 퇴계 선생이 학통 전수의 징표로 손수 써서 학봉에게 내린 ‘병명(屛銘)’과 문집인 《학봉집》등 귀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출구 벽면에 ‘퇴계—학봉 김성일’로 이어지는 〈학봉학맥도〉가 게시되어 있다. 퇴계 선생의 고제자인 학봉이 스승의 학통을 잇고, 그 이후 세대를 이어가는 수많은 제자들의 이름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학봉의 촉석루(矗石樓) 일절(一絶)
矗石樓中三壯士 촉석루중삼장사 촉석루 마루 위에 마주보는 삼장사
一杯笑指長江水 일배소지장한수 한잔 술로 웃으면서 장강을 가리키네
長江之水流滔滔 장강지수유도도 장강의 저 물은 도도히 흘러가네
波不渴兮魂不死 파불갈예혼불사 저 강물 안 마르듯 우리의 넋도 죽지 않는다네
영남(嶺南)의 삼장사(三壯士)로는 학봉 김성일. 대소헌 조종도(생육신 조려이 후손). 송암 이로를 말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학봉이 초유사(招諭使)로 진주에 도착하니, 왜적이 대공세를 앞두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진주성은 거의 텅 비었고 남강의 강물만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그때 촉석루에 대소헌 조종도와 송암 이로가 찾아와 “적의 칼날에 죽느니 저 강물에 빠져 죽읍시다!” 하니, 학봉은 결연히 답한다. “죽기는 두렵지 않으나 여러분이 도와 의병을 일으킨다면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이요,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적을 꾸짖다가 죽어도 늦지 않소!” 학봉은 시를 써서 세 장사(壯士)와 함께 결사 항전할 것을 맹세했다. 그리하여 관군과 의병이 합세하여 진주성 전투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른바 진주대첩(晉州大捷, 제1차 진주성전투)이다.
그리고 이때 장렬히 전사한 창의사 문열공 김천일. 병마절도사 충의공 최경회. 충청병마절도사 황진 등을 호남(湖南)의 삼장사(三壯士)라고 한다. 이들은 1593년 6월 왜군이 진주성을 공략하자 진주성에 들어가 9일간 용전분투하다가 신명을 다한 분들이다. 그러나 호남에서는 제봉 고경명의 아들인 효열공 준봉 고종후를 장사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석문정사(石門精舍)
‘석문정사’는 1587년(선조20년) 학봉(鶴峯)이 건립했으며 안동 풍산 막곡에 있다. 벼슬을 그만두고 퇴계의 유서를 잇고자 건립했던 정자이다.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지산(芝山) 김팔원(金八元).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 등의 시판과 밀암(密菴) 이재(李栽)가 지은 석문정사 기문이 게시되어 있다.
학봉의 유품
서산선생문집 목판. 가죽신. 각대(위) / 무이구곡도. 말안장. 철퇴(아래)
‘각대(角帶)’는 관복을 입고 위에 두르던 띠로 학봉(鶴峯)이 사용하던 것이다. ‘말안장’은 학봉종가에서 누대로 사용하던 것으로, 13대 주손 참봉 김용환이 즐겨 사용하였다. — 1919년 1월 고종 승하 소식에 문중사람과 함께 솟대거리에서 제상을 차려 향을 피우고 삼베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 망골례를 올렸다. 망곡 후 종가상방에서 말견대 2개에 1원권 지폐를 꼭꼭 채워 넣고, 독립운동가 소창 김원식과 함께 석주 이상룡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전하러 만주로 갈 때 타고 갔던 말안장이다. ‘철퇴(鐵槌)’는 학봉이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 경상우도감사로 활동하면서 지휘봉 및 호신용으로 사용했다. 몸체에 은으로 용(龍)을 음각하였다.
유서통(諭書筒), 인장(印章)
‘유서통(諭書筒’은 1592년(선조25년) 4월11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된 학봉이 왕의 유지(諭旨)를 넣어 가지고 다니던 통이다. 양쪽 끝으로 고리가 있어 등에 멜 수 있게 만들었다. 왕명을 받든 문서가 들어 있어서 누구도 손댈 수가 없는 불가침의 통이다. 인장(印章)은 학봉종가에서 사용하던 도장으로 문서나 서류에 사용하였으며 당호 호 등을 새겼다. 서책에 찍어 소유자를 나타내기도 했다.
호패(號牌)
‘호패(號牌)’는 신분증명서와 같다.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니던 세로 모양의 패(牌)이다. 호구(戶口)를 명백히 하여 민정의 상황를 파악하고 직업 계급을 분명히 하며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 면에는 태어난 간지(干支)를 적고 그 뒷면에는 관아(官衙)의 낙인이 찍혔다.
학봉집(鶴峰集)
학봉선생 문집은 시(詩), 서(書), 일기(日記), 연보(年譜), 행장(行狀) 등과 학봉의 저술을 엮은 문집으로 목판본이다. 1649년(인조27년) 학봉선생 문집 7권을 여강(호계)서원에서 간행하였고 1726년(영조2년) 학봉선생연보와 1782년(정조6년) 학봉문집 속집 5권을 ‘호계서원’에서 모두 목판으로 간행했다. 1851년(철종2년) 문집과 속집을 중간하면서 문집 부 록4권을 처음으로 편제에 넣어 ‘임천서원’에서 간행했다. 또한 수백 년 보관되어 온 유초와 자료들을 일고 4권과 일고 부록 3권으로 문집에 처음으로 합편하여 1972년 학봉전집으로 간행했다. 1996년 국역 학봉전집 6권으로 완역 완간했다.
*******************************************
퇴계-학봉학맥도(退溪-鶴峯學脈圖)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
↓
한강(寒岡) 정구(鄭逑).류성룡(柳成龍).학봉(鶴峯)김성일(金誠一).월천(月川)조목(趙穆)
↓
황여일.배용길.임흘.조정.유복립.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유복기.권익창.김해.신지제.김용.최현
↓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표은 김시온. 김시추
↓
이숭일.이휘일.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권태시.이상일.김학배.김방걸.유직
↓
밀암(密庵) 이재(李栽)
↓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
공산(송준필).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일송 김동삼(독립지사).의암(류인석)
****************************************************
퇴계 선생께서 병명(屛銘)을 내리다
‘堯欽舜恭’ ‘翼翼小心 蕩蕩皇極’ ‘博約兩至 淵源正脈’
요흠순공 익익소심 탕탕황극 박약양지 연원정맥
퇴계 선생께서 손수 써서 김학봉에게 ‘병명’을 내렸다.(右先生手題金鶴峰屛銘) ― 병명(屛銘)은 유학의 도통전수의 징표를 뜻한다. 학봉은 29세 때 퇴계선생(당시 66세)으로부터 요순 이래로 성인이 전한 심법(心法)을 차례로 적은 80자를 퇴계 선생이 손수 쓴 병명(屛銘)을 받은 것이다. 내용은 요堯-순舜-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공자孔子-증자曾子-안자顔子-자사子思-맹자孟子-주렴계周濂溪-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주자朱子 등 16성현(聖賢)의 심법의 핵심을 각각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쓴 병풍 글이다.
‘요(堯)임금은 공경하셨고 순(舜)임금은 한결같으셨다(堯欽舜恭)’는 4언(四言)으로 시작하여, ‘박문(博文)과 약례(約禮) 두 가지를 모두 지극하게 하시고(博約兩至) 도통연원의 바른 맥을 이으셨도다(淵源正脈)’라고 주자(朱子)를 칭송하는 말로 끝맺고 있다. 이 병명에 대하여 갈암 이현일(李玄逸)은 경연(經筵)에서 퇴계선생이 ‘博約兩至 淵源正脈’(박약양지 연원정맥) 여덟 글자를 써 준 것은 스승의 의발을 전수한 것(師門衣鉢之傳)이라고 하였다.
* [연세대학교 블로그] (2014.09.14) ☞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이광호 교수가 소장하고 있던, 퇴계의 유물 3점, 성학십도(聖學十圖), 병명(屛銘),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 병명(屛銘)은 8폭 병풍으로 퇴계선생이 사순(士純 金誠一)에게 써준 제금사순병명(題金士純屛銘, 10면 - 앞면 8면, 뒷면 2면)과 조카인 교(㝯)에게 써준 제교질자경병명(題㝯姪自警屛銘, 뒷면 4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금사순병명은, 퇴계가 학봉에게 준 뒤에도 연구되고 수정되어 문집에 실린 현재의 병명과 차이를 보이고 있는 원본이다, ☞ [출처] 이광호 교수, 성학십도 등 퇴계 유물 3점 기증 - 성학십도, 병명, 심경부주|작성자 연세대학교 / * ‘士純’(사순)은 김성일의 자(字)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퇴계학의 적통, 다시 학봉가(鶴峯家)에서 잇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년~1899년)은 학봉의 11대 주손으로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문하에서 수학했고 조선의 마지막 산림처사로 일컬어졌다. 서산(西山)은 ‘입학오도’에서 학문 방법을 입지(立志)-거경(居敬)-궁리(窮理)-역행(力行)의 4단계로 체계화했고 ‘경의 실천’을 규명한 대산 이상정의 〈경재잠집설〉을 도상화해서 〈경재잠집설도〉를 편찬했다.
서산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영남삼초(嶺南三初) 즉 만초(萬初) 이상룡(李相龍), 광초(廣初) 이중업(李中業), 범초(範初) 김형모(金瀅模)와 서문삼산(西門三山) 즉 청산(晴山) 이상익(權相翊),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등 700여명의 제자를 양성했다. 서산은 ‘안동 을미의병’을 지휘했으며 1899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서산선생문집》 30권을 간행했고 권상익이 행장(行狀)을, 이만도가 묘갈명(墓碣銘)을 썼다. 《만제집》 15책이 있다. 1936년 소계서당을 세웠다.
당파를 초월한 ‘조정의 호랑이’
학봉의 생애
간관(諫官)·언관(言官)·사관(史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사헌부 장령 때 임금의 형과 정승을 탄핵하니 사람들이 ‘殿上虎’(전상호, 조정의 호랑이)라고 불렀다. 또 학봉이 ‘魯陵復位 六臣復爵 宗親恕容疏’(노릉복위 육신복작 종친서용소)를 올렸는데, 그 후 115년이 지나도록 단종(端宗)은 복위 되지 못하고, 사육신(死六臣)도 관작이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상소는 당시 누구도 주청하지 못하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 뒤 단종이 복위되고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신원(伸寃)된 것은 모두 이 상소(上疏)에서 발단된 것이다.
☞ 魯陵復位 六臣復爵 宗親恕容疏’(노릉복위 육신복작 종친서용소)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때 강등되고 죽음을 당한 영월의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위하고 사육신의 벼슬을 복위하고 금성대군과 같은 종친을 용서해달라고 올린 상소를 말한다.
목민의 이상을 펴다
'함경도·황해도 순무어사' / ‘나주목사’ 선정(善政)
학봉(鶴峯) 김성일은 함경도·황해도 순무어사(巡撫御使)가 되어 북풍한설 몰아치는 국경보루를 강행군 하며 윤관(尹瓘). 김종서(金宗瑞) 장군의 북방개척을 기리고 세금. 부역. 부정군역에 시달리는 농민을 살피고 진보. 군기. 창곡 등 국방실태를 점검했다. 잘못이 있는 관리들은 책임을 묻게 했다.
학봉은 〈적병행(籍兵行)〉, 〈모별자(母別子)〉와 같은 시(詩)로 ‘어미와 아들이 눈물로 헤어져야하는 아픔을 노래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살리기 위한 7개조를 상소(上疏)하면서 대동법(大同法)과 사창법(社倉法) 시행을 주청했다. 또한 호남의 큰 고을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부임하여 직접 목민(牧民)의 이상을 실천하려고 했다. 동헌(東軒)에 큰북을 걸고 원통한 일이 있는 자는 북을 치라고 했다. 이것으로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은 매우 꺼렸으나, 백성을 편해졌다하며 상을 내렸다.
호남지역 최초로 나주에 대곡서원(현 경현서원景賢書院)을 창건하여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5현을 배향했다. 이런 호남과의 인연으로 임란 중 의병대장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일가족 수십 명이 학봉(鶴峰)의 본가에 와서 수년 간 살았다. 그 후 20년 후 4남 고용후가 안동부사가 되어 학봉의 노부인과 아들 집공을 관아로 불러서 잔치를 베풀면서 피난시절 은혜에 감사하며 울면서 헌수했다.
목숨을 건 외교(外交) — 역사를 바로잡다
학봉(鶴峯)은 1577년 중국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가서 조선 최고 외교 현안이었던 ‘종계변무’ 즉 태조 종계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 잡는 일을 약속받았다. 1590년 일본 통신부사로 임명되자 박제상이 되기를 각오했다. 당시 명이 만들었던 대명일통지 가운데 조선의 역사와 풍습 중에서 잘못을 바로잡은 ‘조선국연혁’ ‘풍속고이’를 저술하여 단군이 중국 요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바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일본 근대 성리학의 개조 후지와라(藤元惺窩)에게 퇴계학을 전수하고 시(詩)를 나누었다.
민심과 국가안정을 위하여
일본통신사 부사(副使)로 다녀와서
1951년 일본에서 돌아와, 학봉(鶴峯)은 왜적이 사신들을 뒤따라 금방 쳐들어 올 것이라고 말하여 인심을 요동시키는 정사(正使) 황윤길의 보고가 사의(事宜)에 어긋난다하여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것은 왜란의 가능성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왜적이 오기도 전에 조야가 겁에 질려 혼란이 생길 것을 염려한 것이니 꼭 잘못 주달한 것은 아니다. 그 후 황윤길과 김성일은 왜국사신을 만나 사정과 상황을 자세히 들었으며 부산에 도착한 왜사(倭使)가 오억령(吳億齡)을 만나 내년에 왜가 쳐들어 올 것이라고 했고 이를 왕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왜란이 발발하자 왕과 조정은 학봉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학봉의 보고 때문에 방비를 철수했거나 적을 불러들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학봉은 세 번의 소(疏)를 올려 국방을 강화할 것을 주청했다. 난(亂)이 일어나자 손을 쓸 수가 없던 것은 당시의 상황이다(이식의 해사록). 학봉은 귀국 뒤에 소차(疏箚)를 올려 인심이 흉흉하니 급선무는 내정개혁과 민생 그리고 민심의 안정임을 강력히 건의했다(선조실록. 학봉전집).
일본통신부사 학봉의 잘못된 보고
그러나 ‘학봉기념관’의 내용과는 달리 기행작가 이재호는 다음과 같이 썼다.(2020.06.09. 경북매일) … “학봉 김성일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임진왜란과 학봉은 피와 살 같이 붙어 다니는 인연의 원죄로 고통스런 아픔이다. 의성 김씨 문중의 입장에서는 퇴계학을 정통으로 받은 긍지이고 자랑스러운 선조이다. 퇴계와 서애, 학봉은 오늘날까지 추앙받고 있는 안동의 3대 스타이다. …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정사 황윤길은 선조 앞에서 미리 올린 보고서와 같이 바닷가에 배가 수백 척이나 있는 것을 보았고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사 김성일은 정사가 민심을 동요시키려 한다고 비판하면서 절대 침입하지 않는다고 했다. 같은 동인인 허성도 침략해온다 했다.
선조는 워낙 상반된 견해라 도요토미의 생김새를 묻는다.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라했고, 학봉은 “생김새는 쥐 같고 원숭이처럼 작고 못 생겨서 우리나라를 침략할 위인이 못된다”고 격하하였다. 결국 당시 실권을 쥔 동인의 의견대로 침략에 대비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정여립(동인)과 관련되는 모든 사람 1천 여 명을 죽여 버린다. 이때 실각해있던 서인 정철이 총 취조관이 되어 조선인재 대부분(동인)이 죽음을 당해 임진왜란 때 고전을 면치 못하는 원인도 되었다. 술 좋아하며 관동별곡, 장진주사 등의 글로 국문학적으로는 한 획을 그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신과 서인들의 권력을 위한 악랄한 사람이다. 통신사가 떠날 때는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가 정철이 선조의 후궁의 아들 광해군을 후계자로 추천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아 동인이 집권여당 되어 있어 논란 끝에 동인 김성일의 주장이 채택되어 적극적인 방비가 없었다. … (중략) 학봉이 당파적이든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하던 전쟁만큼 큰 일이 없는데 잘못된 허위보고로 7년 동안 온 나라가 찢어지는 고통을 당한 죄 값은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다. ….” ☜ 출처 : 경북매일(http://www.kbmaeil.com)
선비의 기개 그리고 정치적 혼란을 막기 위하여
반면, 유홍준은 그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바로는 학봉은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에 부사로 갔을 때,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必有兵禍)’이라고 말한 정사 황윤길과는 반대로 ‘그러한 정세를 보지 못했다(不見如許情形)’고 잘못 말한 장본인이다. … 훗날 학봉이 그때 불침론을 주장한 것은 정사 황윤길이 동래에 도착하자마자 곧 전쟁이 날 것처럼 말하여 민심을 뒤흔드는 것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며, 이것이 훗날 변명이라면 어떤 역사가의 말대로 일본에 가서 정사라는 자가 겁먹고 당황하는 모습을 못마땅해 하며 조선 사신으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바, 그 기개를 앞세운 나머지 현실을 잘못 읽었던 것이다. 아무튼 학봉은 일본 사신으로 가서는 당당했고, 국내에 와서는 오판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봉은 자신의 과오를 사죄하듯 초유사(招諭使)로 종군하면서 전국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고 (진주대첩을 이루고 나서) 관찰사로서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진주성이 함락되기 얼마 전 성중(城中)에서 전사하고 만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p110~111)
제1차 진주성전투의 승리 — 진주대첩(晉州大捷)
임진왜란을 역전시킨 초유사 학봉(鶴峯)의 3대 전략은 ‘의병의 봉기’. ‘의병과 관군의 합동작전’, ‘곡창 호남을 적의 침략으로부터 막기 위한 진주성(晉州城)의 사수(死守)’였다. 임진년 봄 왜적이 이르니 김성일은 동요하지 않고 세 가지 전략을 실행해 나갔다. 왜적이 웅천에 왔을 때 그는 말에서 내려 호상에 버티고 앉아 비장을 독촉해 왜적의 선봉장을 베니 이 때문에 조금 흉적이 물러나게 되었다. 임진왜란 최초의 승보이다. 관군과 의병이 서로 다투는 일이 생겼지만 김성일만은 영남의병이 그를 믿고 존중하여 패사하는 자가 적었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는 학봉의 옹호로 큰 전공을 세운 반면 호서(충청도)의병장 조헌(趙憲)은 관군의 협조를 얻지 못하여 패전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학봉(鶴峯)은 퇴계와 남명의 훈도를 받은 이곳(경상우도)에서 관군보다 유림(백성)에게 나라를 구하자고 호소하며, 명의 원군만 기다리지 않고 의병(義兵)과 관군(官軍)을 잘 조화시켜 항전체제를 구축했다. 전국의병 2만 2천 가운데 반수 이상이 학봉 휘하의 의병이었고(1593년 1월) 곽재우(郭再祐) 등 의병장과 민중을 영웅으로 탄생시킨 ‘의병의 아버지’로 숭배 받게 되었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김성일
진주대첩(晉州大捷)을 총지휘하면서, 학봉(鶴)은 ‘진양(晉陽)이 없으면 호남(湖南)이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고 민·관·군이 총력을 다하여 진주성의 사수를 외쳤다. 이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若無湖南是無國家)’는 전략과 일치했다. 몸을 피해 있던 판관 김시민을 진주목사로 임명하고, 최경회, 곽재우, 김준민, 윤탁, 정언충, 조응도, 정유경이 협력했다.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의 포위를 뚫고 남강을 건너 성안으로 무기를 공급하여 마침내 3만여 왜적을 격퇴한 진주대첩을 거두었다. 학봉은 ‘차계진주수성승첩장(箚啓晉州守成勝捷章)’을 조정에 보고했다.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초유사 김성일이 전주성 방어의 전말을 시간 순으로 적어 선조에게 보고한 글이다. 이 글은 김성일의 문집인 《학봉집》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김성일은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의 공을 크게 치하하고 군·관·민의 활약상을 담았으나, 자신의 공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이순신이 거느리는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김성일은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진주를 잘 지키고 있었다. 이 두 사람 때문에 적은 호남으로 들어갈 수가 없자 금산을 거쳐서 호서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이 역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이순신과 김성일이 바다와 진주를 잘 지킨 덕분에 군량을 제때에 댈 수 있었고 난리를 잘 극복할 수 있었다.”
학봉, 전장에서 병을 얻어 돌아가시다 — ‘진췌순국(殄瘁殉國)’
학봉 김성일은 임진왜란 때, 초유사(招諭使)가 되어 진주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가 되어 관내 각지를 순행하며 독전하다가 이듬해 진주공관에서 병으로 순국했다. 시호가 ‘문충(文忠)’이다. 도와 덕을 널리 알았으니 문(文)이요, 몸을 바쳐 나라를 받들었으니 충(忠)이다. 학봉은 임종 때도 사적인 일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아들 또한 옆방에서 함께 병이 걸려 위독했으나 한 번도 묻지 않고 오직 국사(國事)를 종사자들에게 면려하면서 진중에서 운명하니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비통해 하였다.
향년 56세를 일기로 생애를 군막에서 마치다. 진췌순국(殄瘁殉國)이었다 인재 홍진은 경연에서 ‘만약 성일이 생존했다면 진주성도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애(西厓)는 ‘학봉의 불행은 진주성 천만인의 불행이다’ 라고 말했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돌아가신 후, 한강 정구가 행장(行狀)을 쓰고, 우복 정경세가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짓고. 연보(年譜)는 밀암 이재가, 문집(文集) 서문은 용주 조경이, 발문(跋文)은 학사 김응조가, 해사록 발문(跋文)은 택당 이식이 썼으며. 속집(續集) 서문은 대산 이상정이 지었다.
학봉(鶴峰)의 학문과 인품
학봉(鶴峯)은 성품이 방정하고 강직하며 자질이 매우 뛰어나고 큰 절개가 있었다. 읽지 않은 책이 없으며 주자(朱子)의 글로 일신의 표적을 삼아 마음 깊이 새겼다.
학봉은 자신의 성품이 너무 강함을 스스로 알고 ‘寬弘’(관홍, 너그럽고 넓은 마음)을 써 붙여 놓고 반성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자신의 성품이 너무 강직한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었다. 학봉은 일찍이 “내가 평생에 걸쳐 얻은 한마디 말은 ‘나의 허물을 공격하는 자는 나의 스승이고, 나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자는 나를 해치는 자다.(攻吾過者 是吾師, 談吾美者 是吾敵)’ ― 이 열 네 글로써 항상 자신을 깨우쳤다.
학봉은 아주 명민했다.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였으나, 퇴계 이황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가장 애독했다. 마음속으로 깊이 탐구하고 가슴에 새겨 두며 삶의 지침으로 삼았으며, 마음을 가라앉혀 음미할 때는 침식까지 잊어버렸다. 강독할 때는 마치 선현을 직접 대하는 듯한 자세로 앉아서, 정밀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분변하며 조금도 지나치는 바가 없었다. 배움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온 마음을 쏟아 간절하고 지극하게 가르쳐 주었고, 문장을 지음에 있어서는 명백하고 전아하였다.
문인들에게는 “배우는 자가 걱정할 바는 오직 뜻을 세우는 것이 성실하지 못한 데 있는 것으로, 재주가 부족한 것은 걱정할 바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또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무자기(毋自欺)’ 세 글자는 모름지기 종신토록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이는 모두 자기를 속이는 일이다”고 가르쳤다.
자제들에게는 “학문을 하는 자는 마땅히 심학(心學), 즉 ‘마음공부’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 만약 과거 공부만 힘써서 한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그 본심은 이미 먼저 이욕에 빠져들게 되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훈계했다.
학봉은 짧은 생애에 공무와 전란으로 많은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조정에 차(箚), 소(疏), 상(狀), 계(啓)와 많은 시(詩)와 초유문 등을 남겼다. 학봉은 유학과 퇴계학의 핵심인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실천예학에 대한 깊이 연찬하고, 그의 실천의식은 상례고증 등 예서(禮書)의 저술, 퇴계학의 문목 등으로 나타난다.
그가 남긴 1,500여 수의 시(詩) 중에서 백성의 아우성을 그린 〈적병행(籍兵行)〉과 쉬우면서 뜻이 미치는 〈평포홍창(平鋪洪暢)〉은 한유와 구양수의 경지였다. 맑고 담백하고 주밀한 〈충담리도(沖淡理到)〉는 도연명과 소동파의 시에 방불하다.
‘조정의 호랑이’가 된 이야기
— ‘류성룡과 조목,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배웠다. 김성일은 마음가짐이 굳세고 꿋꿋하며 학문이 독실했다. 모습은 고상하고 위엄이 있으며, 행동거지는 가지런했다. 바른 말이 조정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그 충성과 절개가 빼어나게 남달라서 다른 사람들이 감히 다른 의견을 내지 못했다.’ — 학봉 김성일을 평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예화 (1) ☞ 학봉이 1574년(선조 7년)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어느 날 임금이 경연에 나와 “경들은 나를 전대의 제왕들과 비교해 볼 때 어떤 임금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어떤 이가 “요 임금이나 순 임금 같은 분입니다”고 했으나, 학봉은 대답하기를 “요순(堯舜) 같은 성군도 될 수가 있고, 걸주(桀紂) 같은 폭군도 될 수 있습니다”고 했다. 임금이 그 이유를 묻자 학봉은 “전하께서는 천부적 자질이 높고 밝으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시기 어렵지 않으나,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겨 신하가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병통이 있으십니다. 이는 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했다.
임금이 얼굴빛을 바꾸고 바르게 앉았으며, 신하들은 임금이 화가 났다는 것을 알고 모두 벌벌 떨었다. 이에 류성룡이 나아가 “두 사람 말이 모두 옳습니다. 요순 같다고 한 것은 임금을 그렇게 인도하려는 말이고, 걸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하는 말이니 모두 임금을 사랑해서 한 말입니다”고 했다.
임금은 겨우 얼굴빛을 고치고 술을 내리게 한 다음 자리를 파했다. 학봉은 임금과 왕실의 잘못에 대해서도 서릿발 같은 비판을 가했던 만큼, 신하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대상이 누구든 잘못이 있으면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예화 (2) ☞ 1578년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권세 있는 신하가 뇌물을 받은 일이 있자 임금 앞에서 하나하나 이름을 거론해 아뢰니 신하들은 벌벌 떨었다. 거론된 이들은 모두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임금이 싫어하는 기색을 보여도 거리낌 없이 간하였고, 조정 관리의 불의와 부정이 있으면 사정 없이 탄핵해 바로잡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조정의 호랑이(殿上虎)’라 불렀다.
예화 (3) ☞ 1579년에는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임금의 형이 주색에 빠져 멋대로 행동하며 폐단을 많이 끼치자 학봉은 그 집 종을 잡아다가 엄하게 형벌로 다스렸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위험한 짓을 했다며 후환을 두려워했으나 그는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옳고 그름만이 언행의 잣대였다. 그의 올곧은 자세가 널리 알려지면서 1579년 9월 학봉이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史)가 되어 온다는 말을 듣고는 일부 수령들은 인수(印綬)를 끌러 놓고 달아나기도 했다. 당연히 백성들은 “우리 부모이시다”라며 칭송했다.
학봉의 인간적인 면모 (1)
국난을 당하여 전장으로 떠나며
학봉은 평소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험하고 기괴한 말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내외의 집안 친족 가운데 스스로 먹고 살 수가 없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다 보살펴 주었다. 얻은 것이 있으면 모두 나누어 주었는데, 더 궁핍한 사람부터 먼저 나누어 주었다. 반드시 온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었으며, 마을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1587년 8월, 학봉은 안동 청성산 아래에 석문정사(石門精舍) 를 짓고 그곳에서 깊이 사색하며 마음을 닦았다. 1천 500여편의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한 그는 “내가 원래 바라던 바가 이것이다”면서 남은 평생을 학문 연구와 제자 교육에 바치려고 했다.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국난(國難)이 그를 조용히 지내게 놔두지 않았다. 온 가족이 서로 붙들고 울며 작별하는 가운데 전장으로 떠나면서 큰아들에게 이르기를 —
“공과 사에는 구분이 있는 법이니 서로 돌아볼 수가 없다. 너는 돌아가서 너희 어미를 모셔라. 홀로 되신 큰어머니와 둘째 큰어머니도 너희들이 어미와 같이 종신토록 잘 섬겨라.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을 경우에는 온 집안이 한꺼번에 죽어 황천에서나 만나는 것이 옳다. 나라가 보존되면 함께 보존되고, 나라가 망하면 함께 망하는 것이다. 어찌 나라가 멸망했는데 집안이 보존되겠는가”라고 했다.
공은 여러 진(陣)에서 왜적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 몸소 검사했다. 옆에서 누가 더러우니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하자 “싸움터에서는 으레 거짓으로 속이는 일이 많은 법이다. 잘못해 우리나라 사람을 죽였을 경우, 그 죄는 실로 나에게 있다. 그러니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자 머리를 베어 바치는 자가 감히 속임수를 쓰지 못했다.
학봉의 인간적인 면모 (2)
전란 중에서 부인에게 한글 편지를 쓰다
1592년 음력 12월 24일 학봉은 경상우도감사 발령을 받아 임지인 진주로 이동하던 중, 산청에서 안동 본가의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학봉은 한겨울 추위 속 아내와 가족을 걱정하며 “봄에 이르면 도적이 대항할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라고 불안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감사라 하여도 음식을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 것도 보내지 못하오.” “살아서 서로 다시 보면 그때나 나을까 모르지만, 가필 못하네.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계시오.” 아내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도 절절했다. 그 전문은 이렇다.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신지 가장 염려하네. 나는 산음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으나, 봄이 이르면 도적이 날뛸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 또 직산 있던 옷은 다 왔으니 추워하고 있는가 염려 마오. 장모 뫼시옵고 설 잘 쇠시오. 자식들에게 편지 쓰지 못하였네. 감사라 하여도 음식을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 것도 보내지 못하오. 살아서 서로 다시 보면 그 때나 나을까 모르지만, 가필 못하네.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계시오. 섣달 스무나흗날.’
‘봄 내다라면 도저기 갈욀 거시니 아마려 헐주랄 몰나하뇌….’ 부인에게 보낸 편지 중 한 문장이다. ‘봄이 오면 도적(왜군)들이 날뛸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의미다. 8문장으로 이뤄진 학봉의 편지를 보면 지금은 사라지거나 의미가 바뀐 조선시대 특유의 한글 어휘들을 볼 수 있다. ‘갈외다’는 다른 조선시대 사료에서도 종종 보이는 ‘날뛰다’는 표현이다. 걱정하지 말라는 표현은 ‘분별 마소’라 돼 있다. 기약은 ‘그지’라는 낱말로 쓰였고, ‘취이하다’는 표현은 오늘날 ‘춥다’는 의미다.
학봉의 따뜻한 인간적인 면모를 엿보게 하는 글이다. 이 편지는 결국 영원히 이별하는 편지가 되고 말았다.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고 4개월 뒤, 이듬해 학봉은 전쟁 임무 수행 중 병으로 사망했다.
임천서원(臨川書院)
임천서원(臨川書院)은 안동시 송현동 호암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이다. 조선 선조 때 문충공 학봉 김성일(1538∼1593)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단향으로 모신 안동 내의 유일한 서원이다. 김성일은 임진왜란 중 1593년(선조 26) 4월 29일 진주공관에서 수명을 다했다. 14년 뒤인 1607년(선조 40년)에 선생의 학덕과 공훈을 기려 일향의 선비들이 선생의 상자지향(桑梓之鄕, 고향)에 조두지소(俎豆之所, 사당)가 있어야 한다는 뜻에 따라 당시 안동부사로 와 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주도하여 안동 임하현 서쪽 옛 서당에다 사묘를 세우고 향사했다.
한강은 제문에서 ‘충의는 골수에 박혔으며 도리는 심장에 가득하다는 옛 선현의 말을 공이 진실로 받았다.’(忠義骨髓 道理心腸 古人此語 公實承當)고 학봉의 정충대절(精忠大節)을 기렸다.
1618년(광해군 10)에 ‘臨川書院’(임천서원)이라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620년(광해군 12) 유림의 공론에 따라 이황(李滉)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김성일의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복구하지 못하다가 1847년(헌종 13)에 중건하고 다시 위패를 모셨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당시 영남유림들이 훼철 반대를 상소하였다가 이문직, 유기호 등 14명이 귀양 가게 됐다. 그 뒤 1908년에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2010년 3월 11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64호로 지정됐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숭정사(崇正祠), 15칸의 홍교당(弘敎堂, 강당),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신문(神門), 4칸의 전사청(典祀廳) 등이 있다. 사당인 숭정사에는 김성일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들 건물 중 사당(祠堂)은 동향으로, 강당(講堂)은 남향으로 건립되었는데 이는 지형을 고려하여 건물을 배치하였기에 일정한 방향을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학봉 후손의 구국활동
임란 의병장 후손 400년 우국 항일명가
문중(門中)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나듯 종손들도 종가 일처럼 독립운동에 나섰다. 경북에서는 복국(復國)의 꿈을 안고 가산을 정리, 가족과 함께 집단 망명을 떠나 중국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등 항일 투쟁의 희생을 감수한 종손 활동이 이어졌다.
안동 임하 천전리(내앞마을) 의성 김씨 집성촌에는 학봉 김성일 5형제를 낳은 청계 김진(金璡) 집안의 '큰종가'와 '작은종가'가 있는데, 큰종가 종손 김병식(金秉植·애족장)과 작은종가 종손 김대락(金大洛·애족장)이 독립운동에 나섰다. 김병식은 안동의 협동학교 교장을 지냈고, 1919년 파리장서운동에 서명했다. 김대락도 협동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가족 등 150여명을 이끌고 망명, 중국에서 항일 활동을 벌였다.
임진왜란 때,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여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학봉(鶴峯)선생의 후손들은, 구한말-일제 강점기에도 항일구국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1995년 광복절 50주년을 맞아 학봉선생의 직·방계 후손들이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훈장을 받았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건국훈장(建國勳章)을 받게 된 학봉의 후손은 김용환, 김장식, 김흥락, 김병식, 김징로 등 5명이다.
학봉선생의 13대손인 여건(如見) 김용환(金龍煥, 1887~1946) 선생은 1911년 만주의 독립군에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하다 세 차례나 체포되었으며, 1922년 비밀결사인 ‘의용단’에 입단하여 경상도 일대의 군자금 모금 및 동지포섭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학봉선생의 11대손 김흥락(金興洛, 1827~1899) 선생은 영남지방의 거유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냈으며, 1895년 경북 안동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안동관참사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김병식(金秉植) 선생은 1911년 안동협동학교 교장으로 민족교육에 평생을 바쳤다. 김징로(金徵魯) 선생은 1919년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고, 김장식(金章植, 1898~1949) 선생은 군자금 모금 및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지금까지 정부에서 인정한 독립유공자로 학봉선생 후손이 17분, 방계 후손이 27분, 그리고 학봉의 11대 주손인 서산(西山, 김흥락) 선생의 제자 70여 분이 배출되었다. 학봉가문은 단일 가문으로는 최대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그야말로 학봉가는 한국독립운동사에 빛날 ‘독립운동의 명가’라고 할 수 있다.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과 ‘통의부’등을 조직해 중국에서 무장항일투쟁을 벌인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등도 의성김씨의 후손이다. ☜ [조선일보](1995.8.15)
의성김씨 청계공파 대한민국 건국유공 훈포장자 명단
연번 성명 호 출신지 종파 대동보권면 비고 훈격
01 김병식(金秉植) 임하면 천전리 약봉파 2-122 천전 대종손 애족장
02 김후병(金厚秉) 창암 임하면 천전리 약봉파 2-178 김창현의 증조부 애족장
03 김필락(金珌洛) 오은 임하면 오대리 약봉파 2-169 김시명의 증조부 애국장
04 김재락(金載洛) 임하면 오대리 약봉파 2-169 김필락의 4촌제 표창
05 김술병(金述秉) 임하면 오대리 약봉파 2-507 김시승의 조부 애족장
06 김병문(金秉文) 임하면 천전리 약봉파 2-152? 김경열의 부 건국포장
07 김징로(金徵魯) 임하면 약봉파 2-441 애족장
08 김홍구(金弘九) 임동면 지례리 약봉파 2-392 표창
09 김학이(金鶴伊) 영덕군 약봉파 애족장
10 김대락(金大洛) 백하 임하면 천전리 귀봉파 2-582 애족장
11 김동삼(金東三) 일송 임하면 천전리 귀봉파 2-689 대통령장
12 김장식(金章植) 임하면 천전리 귀봉파 2-690 김동삼의 6촌제 애국장
13 김동만(金東滿) 임하면 천전리 귀봉파 2-689 김동삼의 4촌제 애국장
14 김정식(金政植) 임하면 천전리 귀봉파 2-717 도사공의 손자 애족장
15 김만식(金萬植) 임하면 천전리 귀봉파 2-712 김시중의 조부 애족장
16 김규식(金圭植) 안동시 귀봉파 2-983? 애국장
17 김후식(金厚植) 임하면 천전리 귀봉파 건국포장
18 김성로(金聲魯) 안동시 귀봉파 2-659 김태훈 증조부 애국장
19 김주로(金宙魯) 임하면 천전리 귀봉파 2-751 김시방의 부 건국포장
20 김성로(金成魯) 안동시 귀봉파 2-983? 애국장
21 김 락(金 洛) 임하면 천전리 귀봉파 2-583 백하공의 여동생 애족장
22 김시태(金時兌) 안동시 귀봉파 표창
23 김도주(金道周) 임하면 신덕리 운암파 2-1133 김시중 확인 애국장
24 김흥락(金興洛) 서산 서후면 금계리 학봉파 2-1222 학봉 종손 애족장
25 김회락(金檜洛) 서후면 금계리 학봉파 2-1223 김흥락의 종제 애국장
26 김용환(金龍煥) 견여 서후면 금계리 학봉파 3-127 학봉 종손 애족장
27 김연환(金璉煥) 서후면 금계리 학봉파 3-134 애족장
28 김동식(金東植) 봉화군 학봉파 3-674 애족장
29 김화식(金華植) 봉화군 학봉파 3-675 김 동식과 형제 애족장
30 김병동(金秉東) 예천군 학봉파 이강년의병활동 애족장
31 김병락(金柄洛) 서후면 금계리 학봉파 2-1257 애족장
32 김세동(金世東) 서후면 금계리 학봉파 2-1257 김병락의아들 애국장
33 김진의(金鎭懿) 서후면 금계리 학봉파 2-1290 대과급제 건국포장
34 김윤모(金潤模) 서후면 금계리 학봉파 3-433 김호면의 증조 건국포장
35 김원식(金元植) 서후면 금계리 학봉파 3-475 김聖로의 부 독립장
36 김현동(金賢東) 예천군 학봉파 애족장
37 김규헌(金奎憲) 서후면 금계리 학봉파 3-348 애족장
38 김준모(金濬模) 서후면 금계리 학봉파 3-340 김영조의 고조부 애국장
※ 2012년 8월 15일, 의성김씨 청계공(靑溪公) 후손 김종섭(金鍾燮)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65주년에 즈음하여 작성한 자료임.
********************************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겸와고택
안동시 금계리 마을 학봉고택 바로 옆에 겸와고택(謙窩古宅)이 있다. 구한말 김진형이 처음 지은 집으로 초산댁이라고도 한다. 구한말 관료를 지낸 겸와 김진형이 처음 지은 전통한옥으로 구한말 안동지방 양반가옥의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5칸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연이은 ‘ㅁ’자형 주택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랑채는 대헝마루가 있는 3칸 규모이며 안채을 넓은 대청마루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방과 부엌을 배치해 놓았다. 학봉종택에 비해 소박하고 검소한 느낌을 준다.
김진형(金鎭衡), 가사 〈북천가(北遷歌)〉
김진형(金鎭衡)은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덕수(德錘)이며, 호는 겸와(謙窩) 또는 청사(晴蓑)이다. 김종수(金宗壽)의 아들로 1801년(순조 1)에 태어나 1865년(고종 2)에 세상을 떠났다.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856년(철종 7) 문과 중시에 다시 급제하였다. 1853년(철종 4)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이조판서 서기순(徐箕淳)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수찬 남종순(南鍾順)에게 몰려 한때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었다.
1864년(고종 1)에는 시정의 폐단을 상소하였는데, 조대비(趙大妃)의 비위에 거슬린 구절이 있어 전라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함경도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방면되어 귀환하는 왕복의 기록을 담은 것으로 「북천록(北遷錄)」이라는 한문일기와 가사 〈북천가(北遷歌)〉가 전한다. 유고를 모은 미간행 《청사유고(晴蓑遺稿)》를 그의 5세손인 김태현(金台鉉)이 소장하고 있다.
겸와(謙窩) 김진형(金鎭衡, 1801~1865)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10대 종손 김진화(金鎭華, 1793~1850)의 아우이다. 전라도 능주목사로 있던 김진화(金鎭華)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지사로 서산(西山) 김흥락(학봉의 11대 종손)의 아버지이다. 안동김씨 세도 정권을 심하게 비판하다가 함경도 명천에 유배 갔었던 유배가사〈북천가(北遷歌)〉의 저자 김진형(金鎭衡)의 친형이다. 그러므로 겸와고택(謙窩古宅)은 학봉종택 옆에 겸손하게 자리잡은 ‘작은 집’인 셈이다.
가사 〈북천가(北遷歌)〉는 그 함경도 명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방면되어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읊은 장편가사이다. 내용은 상소(上疏)를 올렸다가 유배령을 받는 신세, 서울로부터 북관(北關)으로 가는 유배과정, 북관에서 그 곳 수령의 융숭한 대접과 칠봉산(七峯山)구경 및 기생 군산월(君山月)과의 사랑, 북관에서부터 유배지 명천까지 이르는 과정, 명천에 당도하자마자 방면된 소식을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과 강호·태평 등을 차례로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체험에 바탕을 둔 사실적인 묘사와 서술은 조선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잘 포착하여 보여 주며, 다양한 표현법과 예술적인 형상화 또한 높이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김진형의 재취부인 진주 강씨가 아주버니 김진화에게 보낸 한글편지가 전해진다. 이 편지는 안동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시대 한글편지’로 데이터베이스에 구축되어 있다. 그리고 겸와고택은 필자의 지인 수경재(守敬齋) 장성덕의 처가이다.
********************************
…♣ [계속] ☞ 「안동 장씨 경당종택」 탐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