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도 지역문학 대상(大賞) 작품 {아궁이} 평설】
지역문학 대상 작품 {아궁이}의 진실성과 허구성 분석
=[아궁이-아궁은 어머니의 자궁이요 또 다른 어머니다]=
서광 장 희 구張喜久(시인․수필가․소설가․문학평론가)
≪목 차≫
1. 지역문학 대상(大賞) 작품 위상을 평설 한 움큼으로 채우며… --- 1
2. [아궁이] 문장은 수려하나, 언어의 통일성과 경어체에 인색했다 -- 2
3. [아궁은 어머니의 자궁이요 또 다른 어머니다]란 부제는 허구다 -- 3
4. 집필은 주제의식을 붙잡고,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안목으로 --- 4
5. 어머니의 한과 눈물만 그리려다, 해학적 표현을 그만 놓쳤다 ----- 5
6. [나는 시인이지만 대상작을 수필로 양보했다]는 석연치 않는 말 -- 7
7. 심사과정에서 [심사위원 극비추천과 심사의 신속성]을 주문한다 -- 8
1. 00문학 대상(大賞) 작품 위상을 평설 한 움큼으로 채우며…
2016년도 지역문인협회 문학 대상(大賞)에 김某某 수필가(이하 ‘작가’라 함)의 작품 [아궁이]가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지역문화원장(원장 김某某)이 사비(私費) ‘일천만원’을 시상금으로 매년 출연하여 세 번째로 시상하는 제도다. 매년 12월 초순에 대상자 1명을 선정하여 시상하는 강서문학 대상은 구암(龜巖) 허준과 겸재(謙齋) 정선의 얼이 넉넉하게 스며있는 이 곳 지역에서 시행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지역문인협회 회원은 물론 다른 지역 문인들도 크게 관심을 갖는 시상제도다. 지역문인협회에서 발간하는 ‘지역문학(28호)’을 발행하면서도 문학의 저변확대에 이바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2017년에는 지역문학 본상은 13회에 걸쳐 시행하고 있는 성숙하고 원만한 모습을 보임에 따라 많은 이들의 관심을 갖는다. 일천만원 상금 액수도 이를 크게 뒷받침하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겠다. 평자 본인은 이 상의 중요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고 진면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제1회부터 작품의 평설문(評說文)을 써서 문학적 저변확대는 물론 작품성의 진위(眞僞)를 가리는데 기여하려고 했다. 그래서 지역문학의 위상을 드높이고 문학적 순수성을 일반에게 널리 알리는 등 저변확대를 기하고 있다.
이번에는 그 세 번째로 지역문학 대상을 수상한 수필 [아궁이]를 텍스트 작품으로 삼아 평설의 문을 두드린다. 평설자 본인이 쓴 평설문 또한 문학의 역사성과 진실성 그리고 영구성이란 입장에서 과장과 허위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 후진들에게 그 부끄러움은 없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결코 쉽지만은 않는 평설 장르의 문을 여닫는다. 또한 평자의 힘이 닿는 한, 그리고 지면이 허락하는 한 지역문학의 발전과 지역문화의 한 지평을 열면서 높이 휘날릴 수 있도록 집필하려고 한다. 지역문학의 발전이 한국문학의 지평을 여는 원동력이 된다는 속 깊은 생각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 [아궁이] 문장은 수려하나, 언어의 통일성과 경어체에 인색했다
도심의 젊은이들이 잘 모르는 ‘아궁이’라는 용어의 사전적 의미부터 정의해 본다. 아궁이는 ‘방고래, 솥, 가마’ 등에 불을 때는 구멍으로 열을 이용하기 위하여 불을 담아 두는 그릇이며, 숯불을 담아 놓는 그릇으로 일명 ‘화로(火爐)’라고도 했던 불 때는 기구의 일종이다. 약칭으로 ‘아궁’으로 표현하기도 하면서 ‘아궁이’와 동시다발적으로 함께 불렀던 기구다. 아궁이는 방고래에 불을 넣거나 솥 또는 가마에 불을 지피기 위해 만든 구멍으로 온돌문화에 젖어 수천년을 살아온 우리네 주거문화라는 실정에 잘 어울리는 구조라 하겠다.
평자는 [아궁이] 작품을 임의 15단락으로 나누어 작품 표현의 수려함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언어의 이중성 표현으로 오히려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여 아쉽다.
[지역문학 28호] 287p 3번 문장(1)과 289p 12번 문장(2)으로 그 예시문을 놓는다.
[(1) 그 아궁이가 있는 부엌은 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드나드시던 평생의 일터이셨다. 어머니의 그 일터는 아들들에게는 출입금지 구역이었지만, 딸들에게 평생 동안 여자로 지켜야 할 행실에 대해 하나하나 가르치는 학습 체험의 장이기도 했다. 예의범절도 중요하지만, 우리네 인생살이와 별반 다를 게 없다며 아궁에 불을 지피는 법부터 가르치셨다. 그리고 이다음에 커서 어느 집 며느리가 되고, 엄마가 되어, 험난한 세상을 스스로 헤쳐 나가는 지혜를 몸소 실천을 통해 가르쳐 주셨다. 그런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누나들도 서서히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2) 아궁이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어떻게 보면 삶과 애환이 가득 담긴 우리네 인생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육신은 불꽃이 되어 타오르고 연기(煙氣)는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 아궁에는 재만 남는다. 하얀 재가 되기 전 불꽃은 자신을 희생하고 불꽃을 사르신 어머니와 함께 우리들을 길러 주었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거칠고도 힘든 세월과 함께 피와 땀과 혼이 묻어있었다. 아궁 안에 재가 가득 차면 고무래로 긁어내시어 다시 불을 지피시면 불꽃은 더욱 더 강렬해진다.]
위의 예시문(1)과 예시문(2) 두 문구는 주제에 따른 설명이 충분하고 주제 [아궁이]를 두고 어머니의 정성이 가득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누나들을 교육시키는 좋은 학습의 장임을 가르쳐 준 것은 대단히 좋은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장의 수려함이 이러하다면 앞으로 논조가 확실한 중수필을 쓴다고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이 주제 [아궁이]를 화폭에 담는 장인정신이 충분하다고 보여 지는 자신만만한 표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렇지만 위 두 예시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궁이’와 ‘아궁’을 혼용함에 따라 읽는 이들의 오해는 물론 혼동을 초래하게 하였다. 곧 언어의 통일성을 기하지 못해 작은 티끌이 큰 인물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하얗고 고운 쌀 속의 뉘라 하겠다. 위의 예시문에서 보인 ‘아궁이’는 2회, ‘아궁’은 3회 사용한 것을 포함하여 작품 전체에서 ‘아궁이’는 5회, ‘아궁’은 10회를 사용하는 등 어휘 남발이란 혼돈을 야기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우리말은 존칭보조어간이 잘 발달하여 ‘시, 셨, 사옵고…’ 등의 어간에 상대를 존칭하는 보조의 역할을 한다. ‘어머니가’가 아니라, ‘어머니께서는’으로, ‘가르치는’이 아니라 ‘가르치시는’으로, ‘길러 주었다’가 아니라, ‘길러 주셨다’로, ‘힘든’이 아니라 ‘힘드신’으로 쓰는 것이 살아 계실 때도 마찬가지겠지만, 지금 하늘나라로 떠나신 어머니에 대한 외경심(畏敬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미흡성을 낳게 했다. 예시문 (1)과 (2)에는 말의 중복성도 보인다. ‘아궁이는 우리네 인생살이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등은 문구의 이중성으로 짧은 수필 작품에서 전체적인 문장의 간결성이란 입장에서 보면 마이너스 효과다. 이 부분은 퇴고를 보지도 않는 저작이란 피할 없는 오류덩어리를 품에 떠안는 격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상(大賞) 수상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오직 학자적 양심이겠다.
3. [아궁은 어머니의 자궁이요 또 다른 어머니다]란 부제는 허구다
학자들이나 문학인들이 종종 제목 다음에 부제(副題)를 붙여서 주제를 한 차원 높게 부각시키거나 주제의 설명적인 논조 형식을 보인다. 논하고자 하는 제목에서 미쳐 다 다루지 못한 내용을 더 부각하려고 할 때 부제를 달아 논조를 더 깊이 하려는 작가의 작은 몸부림에서 부제를 단다. 이와 같은 부제도 주제 못지않게 논조를 이해시키려는데 큰 역할을 하는 만큼 본문 내용의 중간 부분에서 부제에 관한 논의가 한번쯤 이루어지던지, 그렇지 않으면서 결론 부분에서 작가가 다루면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아궁이]란 제목 밑에 붙이고 있는 [아궁은 어머니의 자궁이요 또 다른 어머니다]라는 부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나 논의가 본문 내용 중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아궁이]라는 주제만 있을 뿐, [아궁은 어머니의 자궁이요 또 다른 어머니다]라는 부제는 공중에 둥실 떠 있는 격이 되는 매우 졸렬한 작품이 되었다. 수필에서 무슨 논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평자가 부각하려는 것은 학자와 문학인들 성향을 아우른다.
아궁이가 어머니의 주된 일터임을 강조하려고 했다면 [아궁은 어머니의 품속이요 그 따스함이 스며있다]는 정도의 표현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하는데 더욱 용이한 표현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밥을 하거나 소여물을 삶을 때 [아궁이]에서 타는 그 열기는 따스한 사랑의 씨앗이란 하모니가 되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을 것이란 점이다. 곧 어머니가 품어 주는 사랑을 먹고 자랐음을 부각하는 것이 타당했겠다.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은 부끄러운 곳을 다른 사람에서 감추려고 하고, 입을 통해 말하는 것조차 부끄럽게 여겼다.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그 벌로 부끄러운 곳을 감추었다는 성서의 구절을 작가는 읽어 보지도 않았을까. 그 때부터 지금까지 병원에서나 흔히 썼음직한 ‘자궁’이란 용어를 늘 감추었을 뿐, 결코 노출하지는 않았다. 어디 여자들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부위인 [자궁]을 입으로 하는 음성언어도 아닌, 붓을 들어 문자언어로 남길 수 있겠는가.
지역문학 28호 290p 15번 문장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 부제를 한 번 더 떠올리려는 의도를 담은 듯 했지만, 역시 ‘자궁’이란 해설과의 연결은 매우 인색한 모습이다.
[고향 집과 아궁은 문명 속에 가려진 전설이 되었지만, 어머니는 지금도 옛날 그 아궁에 불을 지피시며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그 아궁은 우리들의 또 다른 어머니다.]라고 하면서 부제를 추겨 세우는 애잔한 모습을 작가는 보였을 뿐이다.
작가는 아마 어머니가 자궁을 통해 나를 낳아준 고마움을 작품에서 형상화하려는 의도였었다면, 진정 아궁이가 또 다른 어머니였다면 아궁이를 통해 나를 낳다(?)는 억지 표현도 가능하겠다는 논리는 성립되겠다. 어머니는 오직 나를 품에 안아 키웠고 젖을 먹여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품속도 따뜻하고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는 그 따뜻함이 밥을 익히고 국을 끓여 먹여 따스한 사랑을 만끽했다는 식으로 작품성을 전개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아쉽게 든다. 만약 이렇게 전개했더라면 많은 여자회원들의 박수갈채도 받았을 것이며, 우리 후진들이 이 작품을 읽고 큰 감동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역문협과 함께 영원히 존재하면서 남을 [지역문학 28호]의 빛도 더욱 활활 타면서 값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4. 집필은 주제의식을 붙잡고,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안목으로
작가가 일군 작품은 15개 의미적 단락 일부들은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면에서는 칭찬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상당 부분의 단락에서는 이와 같은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다. 주제의식에 따르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에 집착하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특히 내가 했던 일, 그 때에 느끼는 감정 표현이랄지 비유와 상징이란 문학성이 작품을 성공시키는 지름길이라는 점까지도 지적하고 싶다. 보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생각이나 느낌이란 표현을 그냥 스치는 안타까운 문장을 만나게 된다. 평자의 어린 시절에 한 일과 들은 일만 기록했던 ‘일기장’을 보면서 자상하게 지도해 주셨던 담임선생님의 지도 말씀에 다정한 감동을 받았던 뒷모습을 이제 다시 되돌아본다.
다음은 [지역문학] 287p-289p 5~6개 단락에서 주제의식을 놓친 경우들을 보인다.
(1) 단락2 [진흙을 개어 돌기둥을 세우고, 이마 돌을 걸쳐 만든 부뚜막에 솥을 걸었다.]
(2) 단락5 [산에서 나무와 풋나물을 뜯어다 장마당에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태셨지만, 많은 자식들을 혼자 감당하기란 내색은 안 하셔도 뼈를 깎는 아픔과 가슴속으로 흘리시는 피눈물이 마르신 날이 단 며칠이나 되셨을까?]
(3) 단락7 [여물 주걱으로 펄펄 끓는 쇠죽을 뒤집으시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4) 단락9 [냉수로 허기진 배를 채우시며 얼마나 기다리셨던가. 보리 이삭의 물고물이 들기가 무섭게 어머니는 밭에 나가 덜 영근 보리 이삭을 따다 가마솥에 볶아 가루를 내어 양식을 마련하셨다. 해마다 이어지는 풋바심으로 그 넘기 힘든 보리 고개를 단내를 삼키며 넘곤 하셨다.] =단락 4번(288p)과 단락 14번(290p) 문장도 위와 같이 주제의식을 놓쳤다.
위의 문장 외에 상당히 긴 단락인 문장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 6개 문단이 [아궁이]라는 주제의식과는 거리가 멀었고 가난과 싸우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당시의 느낌을 필름으로 되돌려가는 한 단면의 모습을 작가적 역량에서 찾는다. 위의 문단들은 [아궁이]라는 주제의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지적한 모든 문장들이 [아궁이]라는 주제의 보조문장이 되어 아궁이를 되살리는 부수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평자의 생각이다.
어머니께서 고생 하시는 그 모습을 그리면서도 [아궁이]에 주제의식을 갖도록 하려면 주제에 따른 부제를 달리 설정함이 좋았겠다. 위의 6개 문장들은 주제인 아궁이와 상관성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에 글을 조금 다듬어서 맨 앞으로 가던지, 중간에 들어가게 하여 주제인 [아궁이]에 대한 보조적인 관계를 갖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달랑 위 문장들로 한 단락을 형성했으니 두괄식도 아니요, 미괄식도 아닌 어중이떠중이식의 한 문단을 설정해 둠에 따라 작가적 역량 부족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주제는 잘 붙들었지만 전체를 보지 못했다. 위와 같은 의미를 담으려면 차선책과 같은 주제와 부제를 다는 것도 더 좋았겠다.
또 다른 차선책은【아궁이-질곡의 삶을 사셨던 어머니의 영혼을 아궁에 묻고】쯤이었다면 어렵게 사셨던 어머니의 모든 삶까지도 다 투영할 수 있었을 것인데, 부제를 [자궁]과 [어머니의 삶]만을 연계하려는 ‘작가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주제 의식을 놓치면서도 문장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보는 모양이 되었다는 오류를 범했다. 수필이기에 주제의식도 없이 무조건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은 아니다. 이런 오류는 작가는 물론 수필을 쓰고 있는 모든 수필가와 수필을 지망하는 예비 작가들께도 간곡하게 권고하고 싶은 평자의 충언이다.
작가(作者)는 물론 혹자(或者)들까지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편집자가 자기 마음대로 페이지를 4쪽으로 맞추기 위해 줄바꿈을 하면서 단락처럼 한 줄씩 띄어 놓았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궁색스런 변명을 하지 아닐까 모르겠다. 이것은 작가의 생각일 뿐 아무런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작가가 ‘행(行)바꿈’이나 ‘연(聯)바꿈’도 모르고 문장 간 연결을 잘못했다는 오류를 범했다. 독자들이 작가의 원고(原稿)까지 볼 수는 없다. 인쇄물로 된 책자를 통해 작가를 만나고, 고즈넉한 마음을 담아 작가와 필담이나마 나눌 수 있음을 명심하길 바란다. 작품을 쓰는 작자와의 대화는 이 길뿐이다.
5. 어머니의 한과 눈물만 그리려다, 해학적 표현을 그만 놓쳤다
수필(隨筆)은 보통 경수필과 중수필로 나뉜다. 경수필은 '미셀러니(miscellany)라 이름을 붙인 반면, 중수필은 ‘에세이(essay)’ 범주에 넣는 경향이 요즈음 부쩍 늘었다. ‘경수필’은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 따위를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기술한 일기나 기행문 식의 산문 형식의 글이 대부분이며, 형식은 작자가 의도한 대로 붓 가는 대로 쓰라고 했다. 이런 반면에 중수필은 일정한 형식의 주제를 가지고 체계적인 논리 구조와 객관적인 관찰을 바탕으로 하여 쓰여진 수필로, 비교적 무겁고 깊이 있는 느낌의 문장이라 하겠다.
위와 같은 점을 감안하면서 대상작품 [아궁이]를 눈여겨 읽어 보았을 때 이 작품은 생활수필로 경수필이란 아주 짧은 수필로 작가가 피를 토하면서 일구어 놓은 작품이란 의미전달이 애매한 경우가 많다. 작가가 처음 제출한 원문을 보지 못하여 작품의 전모에 대하여 가름할 수는 없지만, 작은 지면에서 뜻하고자 하는 작품 내용을 다 소화하려다보니 고개를 끄덕이는 이해심이란 인내에는 다소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이처럼 전체를 아주 조금씩 나뉘었다면, 최소한 ‘연(聯) 가림’ 대한 부연 설명과 그 때의 감정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면 독자들의 이해가 빠를 수 있었겠는데 이와 같은 친절함을 이 작품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저 작가가 ‘행(行) 가림’이란 문장을 늘림으로만 범벅을 칠했을 뿐이라는 호된 비판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행여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기도 하다.
다음은 지역문학 289p 상단부 10번 문단의 전문을 보이기 위해 앞 9번 문단의 전문과 11번의 문단의 뒷면을 약간 잘라 내면서 붙여본 구절을 다시 인용해 본다.
[前 : 냉수로 허기진 배를 채우시며 얼마나 기다리셨던가. 보리 이삭의 물고물이 들기가 무섭게 어머니는 밭에 나가 덜 영근 보리 이삭을 따다 가마솥에 볶아 가루를 내어 양식을 마련하셨다. 해마다 이어지는 풋바심으로 그 넘기 힘든 보리 고개를 단내를 삼키며 넘곤 하셨다.]
{인용문} : [1․4후퇴 당시에는, 고구려를 침공하던 그 후예들이 다시금 쳐내려왔다. 엄마와 누나들은 그들을 피해 아궁이 속에 며칠간을 숨을 죽이며 숨어 지내기도 했다.]
[後 : 성냥도 없던 시절, 화로에 묻어 두었던 불씨를 입으로 후후 불어 불을 살리면서 아궁이 속은 나무란 나무는 가리지 않고 다 받아 불꽃을 만들어주었다.…]
위 중간 ‘인용문’에서 보듯이 엄마와 누나가 아궁이 속에 들어가 며칠간 숨었다가 나온 몰골을 붓을 들어 화폭에 그리듯이 그 모습을 그려냈어야 했다. 숯덩이가 묻은 얼굴 모양을 수필의 필치로 그렸어야 했고, 아궁이에서 나온 이후 동그란 눈에 놀라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수필일진데 전혀 그런 터치도 없이 사실만을 기록해 두고 말았다. 딱딱하게 설명하는 식으로 어머니에 대한 그림을 부연설명이란 명칭으로 그리기 보다는 이 대목에서는 해학성으로 독자를 웃길 수 있는 그림의 소재를 작가는 그만 놓치고 말았다. 곧 이 작품은 [아궁이]라는 주제를 통해 어머니의 눈물과 한의 한 역사를 그리는 것이 주종을 이루어 내려고 했었다면, 이 대목에서는 해학적인 표현으로 읽는 이들에게 한 바탕 웃음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흔히 ‘수필이란 필치로 그림 한 폭을 그리는 작업’이란 말을 귀담아 듣지 못했다.
어느 학자는 “수필은 자유로운 장르인 만큼 작가는 글 주제와 글 구성 방식이 어울리게끔 글을 쓴다. 수필 작가는 자기의 글에 유머와 위트를 더하는 경우도 있고, 비평 정신을 통해 문학으로서 기능하도록 글을 쓴다”면서 비평이란 안목까지 언급한 학자도 있어 주목을 끈다. 이와 같은 수필에 대하여 내린 정의는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수필은 일상에서의 체험이나 느낌을 생각나는 대로 그림을 그리듯이 쓰거나 유머와 위트를 더하기도 한다면서 산문과 운문을 혼합한 형식의 글이란 말을 하기도 했음도 더 생각할 일이다. 수필가는 시인이 되기도 하고, 평론가가 되기도 하며, 곡을 작사하고 작곡하는 음악가는 물론 소설과 희곡의 한 꼭지까지도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됨을 지적했다. 참으로 지당한 말이다.
6. [나는 시인이지만, 대상작을 수필로 양보했다]는 석연치 않는 말
2016년 12월 08일(목) ‘지역문학 28호’ 출판기념회를 겸한 문학상 시상식이 열리면서 심사를 맡았거나 심사평을 썼던 정모 시인이 높은 단상에 올라 육성으로 심사평을 했다.
[나는 시인이지만 이번 강서문학 대상(大賞)은 수필로 양보했다]는 석연찮은 여운을 남기니 축하객들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심사는 공정하게 하라고 했다. 미래의 명운까지 걸고 지역문학 대상작품을 심사하는 심사위원이 어디 수필로 양보했다는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강서문학 연간집 책에 짤막한 심사평 한 페이지에는 심사 과정의 한 모습의 장면이 고스란히 나타나 보인다. 부분만 보아도 전체적 분위기를 알 것 같다.
[주제 :【개성적이고 감동적인 작품】- 이번 지역문학 대상 수상작인 수필 [아궁이]는 여러 수필과 시 응모작들을 물리치고 수상의 영예를 안을 정도로 좋은 작품이었다.
옛 어머니들의 일상적 생활공간인 ‘아궁이’를 자궁으로 은유한 것도 기발한 발상이거니와 어머니의 그 뜨거운 모성과 사랑과 꿈과 땀을 호소력 있게 감동적으로 잘 펼쳐 놓았다.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문장 또한 훌륭했다. 수상작 외에 응모작들도 좋은 작품들이었다.
대상 후보에 오른 다른 수필 역시 좋은 작품이었으나 아깝게 탈락되었다.
특히 응모자가 많은 시 분야에선 대상을 주어도 좋을 만한 시가 두 편이나 최종심에 올라왔다. 그러나 <지역문학대상> 규정이 장르별 구별 없이 단 한 사람의 작품에게만 시상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동이란 면에서 우세한 수필에 양보하게 되었다.
[아궁이]가 주는 보편적 진실과 호소력, 설득력의 무게에 간발의 차로 물러서게 된 셈이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보내는 것과 동시에 수상을 못하게 된 여러분의 건필을 빈다.
[지역문학 28호 291p 심사평 전문]
위 심사평에서도 대상(大賞) 작품을 꼼꼼하게 따지며 읽었느냐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첫째는 [‘아궁이’를 자궁으로 은유한 것도 기발한 발상이거나와]란 대목이다. 평자가 이미 지적했듯이 이 작품은 부제(副題)만 제시했을 뿐 본문 내용에 ‘자궁’으로 은유한 내용이 전혀 없다는 점을 부각하면서 의문이 제기된다. 작품 제목이나 부제는 ‘내용의 요약에 요약’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과연 올바른 심사가 되었느냐는 점을 평자는 지적한다.
둘째는 심사평에서 [어머니의 그 뜨거운 모성과 사랑과 꿈과 땀을 호소력있게 감동적으로 잘 펼쳐 놓았다]는 면에서는 공감이 갔지만, 후문으로 듣자하니 심사과정에서 [오자와 탈자 띄어쓰기가 많다]고 하면서 관계자에게 넘겨 줄 때 ‘책자를 만들 때는 이 점을 보완하여 실었으면 한다’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이 또한 후문으로 듣자하니 처음 원고보다는 상당히 보완된 원고가 지역문학 28호에 실렸었다는 확실치도 않는 후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려옴도 막을 수는 없었다. 오자와 탈자는 아무리 꼼꼼하게 교정을 봐도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심사하는 과정에서 손질하여 관계자에게 넘겨주어 발표 이전에는 작가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행여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다음이 예상된다. 미발표 대상작을 들고 심사위원을 찾아가 작품을 손질할 우려가 있어 ‘제2의 대상작’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후유증도 예상할 수는 있겠다. 다음 지적은 심사위원은 왜 평자가 지적한 위의 네 가지를 하나도 보지 않고 심사를 했느냐는 점이다. 작품에 나타난 ‘아궁이․아궁’의 중복성에 따른 독자들의 혼란, 존칭보조어간의 미비성으로 인한 어머니에 대한 뜨거운 외경심의 결여, 핵심적인 내용이기에 재차 지적하지만 아궁이와 어머니이란 시어 내지는 문장을 도입했는데, 아무런 연관성이나 대책도 없이 등장하는 [자궁의 허구성]을 왜 지적하지 못했는가라는 점이다. 긴 문장 속에 숨어 있어서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소설이나 희곡이었다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애써 이해하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타자본 4쪽 분량에서 이를 발견하지 못했었다는 것은 이를 [묵과 내지는 왜곡]이란 점에서는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로 남는다 하겠다.
셋째는 심사평에서도 [양보]란 말을 문학적인 표현의 기법으로 쓰기는 했겠지만, 그것은 문어체에서나 ‘양보’를 ‘탈락’이란 용어로 치환시켜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행여 여길 수도 있겠지만, 구어체에서 ‘탈락의 변’을 ‘양보’라고 하기에는 다수의 눈동자는 결코 용서치 않는다. 심사에서 어떻게 양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정 심사위원이 발표했던 이 심사평 한마디 말을 두고 그 날 축하객들은 웅성웅성했을 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쾌재(快哉)감’으로 변신해 버렸다. 특히 그날 참석하지 못한 다른 심사위원도 이 말을 전해 듣고 놀라는 기색을 하면서 ‘부디 某某심사위원에게는 이 말을 전하지 말라’는 당부를 평자에게 직접했음도 이 자리에서 밝힌다.
넷째는 심사평에는 불문율과 같이 쓰는 말이 있다. 최종심까지 올라와 탈락한 작품이 어느 면에서 탈락이 되었는지 작품 제출자의 이름까지는 밝히지는 않더라도, 작품명을 밝히면서 탈락의 요인을 지적하는 것이 다음 작품을 일구는 요체가 된다는 점을 참고삼아 알려 드린다. ‘신춘문예’에서도 심사자들은 아깝게 탈락한 작품명을 제시하면서 다음 작품 수업에 크게 기여한다는 점을 지적한다면 가히 이해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심사평에서는 분명 탈락한 수필 1편과 시 2편 등 3편에 대한 ‘탈락의 변(?)’이 심사위원의 필치에서 나와서 문학 발전과 문학도의 길로 나아가려는 초보자 내지는 투고자들에게 크게 기여하는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거듭 밝혀둔다. 다음 심사위원님들께서는 이 점 각고의 고민을 바란다.
7. 심사과정에서 [심사위원 극비추천과 심사의 신속성]을 주문한다
1) 요약 : 2016년 지역문협 대상 작품 [아궁이] 문장은 수려하지만, 같은 용어인 ‘아궁이’와 ‘아궁’으로 혼용하는 등 언어의 통일성 부족은 물론 어머니에 대한 경어체가 인색했다. 부제로 붙인 [아궁은 어머니의 자궁이요 또 다른 어머니다]란 용어는 작품 전개와는 맞지 않는 허구성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작품을 전개하는 집필에서 주제의식을 붙잡는 수순이 미비했음을 지적했다. 작가는 작품 전체를 보는 안목이 부족했고, 질곡의 삶을 살았던 어머니에 집착한 나머지 주제 ‘아궁이’와 부제 어머니의 ‘자궁’을 살리지 못했다. 작가는 어머니의 한과 눈물이란 그림만 그리려다 해학적 표현을 붙잡고 독자를 웃길 수 있는 장면을 놓치는 오류를 범했다. 심사위원은 위에서 보인 주제의식이 부족한 점을 지적하지 못하고 [나는 시인이지만 대상작을 수필로 양보했다]는 등 엉뚱한 심사평을 기록하는 등 오류를 범했다.
2) 심사제도 개선 요망(초안) : 지금의 심사제도는 개편하는 것이 좋겠다. 심사위원 운문 1명, 산문 1명 등 2명이 선정되면, 응모작품을 개인 이메일로 보내 며칠간 심사위원들이 읽을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준 뒤에 지역문화원에 모여 갑론을박 끝에 최종 대상자(大賞者)를 선정한다. 심사평도 1명의 심사 위원에게 위임하여 추후 이메일로 보낼 것을 요청하는(?) 등 오픈된 방법으로 선정하여 연루설 야기를 품에 안고 있다. 평자는 이런 제도를 바꾸어 대상자 선정 방법은 물론 문학대상 심사위원 추천 제도를 바꾸는 것이 좋겠다. 누구를 추천해도, 작가와 심사위원 간에는 협회 모임 등으로 인해 늘 가까운 사이다. 제출된 작품이 신작(新作)이라 해도 미리 지도상담 때문에 ‘작품과 작가’는 늘 노출된다. 이에 대한 방지책은 없겠지만, 다음을 제안한다. ‘심사위원 극비추천과 심사의 신속성’으로 보완하면서 이어지는 차선 방안은 점심을 같이 하더라도 작품 심사와 심사평 타자 등 ‘모든 심사는 하루 만에 끝내는 방안’이 좋겠다. 심사위원은 2명보다는 3명이 더 좋겠으니 다수결이 용이하다. 심사위원을 3명으로 하면 심사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나이 든 원로 심사위원의 ‘갑질 제안’에 대해, 나이 아래인 다른 위원이 고개 끄덕이는 전횡(專橫)을 막을 수 있다. 심사위원 중 1명은 강서문협 회원으로 하되 다음 등으로 제한한다.(방법의 예시-운영위원회에서 추천. 운영위원은 피추천될 수 없음. 평생 1회 참여로 자격 제한. ‘토론권, 발언권, 표결권’은 부여하되 대상자 ‘추천권’은 제한함. 격년제로 남녀가 동수로 추천 받을 수 있게 함. 강서문화원 대상자 발표 이전에는 절대 비밀을 보장하고, 매년 2월에 열리는 총회에서 일반적 심사과정과 아깝게 탈락한 작품에 대한 탈락의 변 등을 5분정도 발표함으로써 1년 임기가 끝남).
3) 앞으로 우리 수필 방향의 길잡이는 : 수필은 조선 후기에 발달하여 꽃을 피우면서 수필의 품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앙가슴을 부여안고, 애쓰는 ‘문학평론’을 한 장르로 만들어 신방(新房)까지 차려주었다. 이렇듯 수필은 일기문, 기행문, 감상문, 문학평론 등과 어울려 친하게 놀다가 이제는 제 갈 길로 다 가라고 손짓한 후에 혼자 소생하기에 분주한 모양새다. 그래서 수필은 독자 소생이란 무거운 발전은 이제 수필가의 몫이 되었다. 진정한 수필이 품위를 유지하려면 얄팍한 경수필(輕隨筆)에만 매달리지 말고, 묵직한 중수필(重隨筆)을 쓰면서 수필도 쓰고 학문도 더듬어 차지하면서 이른바 종합예술을 지향하는 한 분야를 잘 다듬어 가는 개척정신(뉴-프론티어)이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수필과 수필가들의 책무라는 점을 손에 꼭 쥐어드린다. 평자 본인도 1970년도 초부터 수필장르로 추천받아 어느 동기가 되어 수업에 정진한 적도 있었으며, 등단이란 문턱을 넘기면서 대학 강단에서 수필 분야 한 꼭지를 맡아 학생들과 같이 몸부림쳤던 경험을 살려 이 평설문이나마 어설픈 경험과 얄팍한 지식의 산물이란 묽은 물감으로 채색했을 뿐이다.◈
【2016년도 대상(大賞) 작품 {아궁이} 전문】
아 궁 이
아궁은 어머니의 자궁이요 또 다른 어머니다
수필가 : 김 × ×(서울 지역문협 회원)
① 내 고향 집 부엌에는 아궁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식구들 국을 끓이는 양은솥과 무쇠솥으로 된 작은 밥솥이 결려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잠자리만 다를 뿐, 우리 식구들과 별반 다름없는 누렁소의 여물을 끓이는 큰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② 진흙을 개어 돌기둥을 세우고, 이마 돌을 걸쳐 만든 부뚜막에 솥을 걸었다.
③ 그 아궁이가 있는 부엌은 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드나드시던 평생의 일터이셨다. 어머니의 그 일터는 아들들에게는 출입금지 구역이었지만, 딸들에게 평생 동안 여자로 지켜야 할 행실에 대해 하나하나 가르치는 학습 체험의 장이기도 했다. 예의범절도 중요하지만, 우리네 인생살이와 별반 다를 게 없다며 아궁에 불을 지피는 법부터 가르치셨다. 그리고 이다음에 커서 어느 집 며느리가 되고, 엄마가 되어, 험난한 세상을 스스로 헤쳐 나가는 지혜를 몸소 실천을 통해 가르쳐 주셨다. 그런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누나들도 서서히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④ 아침부터 하루 세끼를 장만하셔야만 했고, 저녁상을 물리고 설거지가 끝나면 정작 어머니의 일과는 그 때부터 또 다시 시작된다. 식구들의 옷감을 마르시고 물레를 돌리시며 밤을 하얗게 지새셨다. 대대로 상속에 되다시피 한 가난은, 전쟁으로 인해 더욱 어려워져 홀로되신 어머니를 더욱 힘들게 했다. 어린 우리들의 모든 것이 어머니만의 몫이었기에, 긴긴 겨울밤을 꼬박 지새우시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⑤ 산에서 나무와 풋나물을 뜯어다 장마당에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태셨지만, 많은 자식들을 혼자 감당하기란 내색은 안 하셔도 뼈를 깎는 아픔과, 가슴속으로 흘리시는 피눈물이 마르실 날이 단 며칠이나 되셨을까?
⑥ 그래도 우리들이 커가는 모습에 만족해하시며 아궁에 불을 지피시면, 솥에서는 어머님의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보리개떡이며 수수 풀때기가 펄펄 끓어올랐다. 자식들의 생일이나 명절이 되면 하얀 쌀밥에 미역국을 끓일 때도 더러 있었지만 그런 날을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⑦ 여물 주걱으로 펄펄 끓는 쇠죽을 뒤집으시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⑧ 아마도, 무럭무럭 커가는 외양간의 누렁이를 생각하시며 늘어가는 살림을 그때만큼은 마음 뿌듯하셨으리라. 그러시다가도 때 거리라도 떨어지는 날은 자식들 굶긴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시려고 빈 아궁에 일부러 불을 지펴 굴뚝에 연기를 올리실 때 어머니의 심정이야 오죽이나 하셨으랴.
⑨ 냉수로 허기진 배를 채우시며 얼마나 기다리셨던가. 보리 이삭의 물고물이 들기가 무섭게 어머니는 밭에 나가 덜 영근 보리 이삭을 따다 가마솥에 볶아 가루를 내어 양식을 마련하셨다. 해마다 이어지는 풋바심으로 그 넘기 힘든 보리 고개를 단내를 삼키며 넘곤 하셨다.
⑩ 1․4후퇴 당시에는, 고구려를 침공하던 그 후예들이 다시금 쳐내려왔다. 엄마와 누나들은 그들을 피해 아궁이 속에 며칠간을 숨을 죽이며 숨어 지내기도 했다.
⑪ 성냥도 없던 시절, 화로에 묻어 두었던 불씨를 입으로 후후 불어 불을 살리면서 아궁이 속은 나무란 나무는 가리지 않고 다 받아 불꽃을 만들어주었다. 장작이던, 풋나무던, 청솔가지던, 상관하지 않았다. 그 아궁이 속에서는 비단 나무만 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눈물도 배고픔의 서러움도, 피맺힌 한도, 불길과 함께 타고 있었다.
⑫ 그 아궁이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어떻게 보면 삶과 애환이 가득 담긴 우리네 인생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육신은 불꽃이 되어 타오르고 연기(煙氣)는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 아궁에는 재만 남는다. 하얀 재가 되기 전 불꽃은 자신을 희생하고 불꽃을 사르신 어머니와 함께 우리들을 길러 주었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거칠고도 힘든 세월과 함께 피와 땀과 혼이 묻어있었다. 아궁 안에 재가 가득 차면 고무래로 긁어내시어 다시 불을 지피시면 불꽃은 더욱더 강렬해졌다.
⑬ 그러던 어느 날 얼떨결에 부엌문을 열어보니 (어머니께서는) 부지깽이로 아궁에 불을 뒤집으시며 눈물을 훔치시고 계셨다. 그 눈물은 철부지 자식들을 걱정과 가난에 대한 저항과 한이 맺힌 몸부림이요, 피눈물이셨으리라. [※ 괄호 안은 반드시 들어가야 할 주어(主語)인 ‘어머니’가 생략되었다.]
⑭ 자식들이 성장하여 하나 둘 둥지를 떠나는 동안, 그 새 어머니의 옛모습을 오간데 없고, 풀밭에 나뒹구는 해박송이나 싹이 튼 씨앗을 마지막까지 잡고 있는 빈 꺼풀 또는, 알곡이 털린 집 북데기가 되셨다. 아궁의 불은 꺼지고 하늘과도 같았던 어머니의 그 위대함도 이제는 모든 짐을 내려놓으셔서 그러실까. 머리에는 하얀 서리꽃이 피기 시작했고, 손등은 뒷동산의 소나무나 거북 등이 되셨다. 자식들에게 부지깽이로 야단치시던 그 기력은 어디에도 없고, 길마등처럼 굽어가시는 모습이 자식들 마음을 너무나도 아프게 한다. [※ ‘굽어가시는’ 현재 진행형아닌, ‘굽어가셨던’ 과거형.]
⑮ 어찌 보면 우리에게 어머니는 아궁과도 같으셨다. 그 속의 불꽃은 우리들의 꿈이요, 희망이며, 미래였다. 부지깽이 달랑 하나로 우리 집의 불꽃을 만드시느라, 어머니의 가슴을 타다 못해 새까만 숯이 되셨고, 그 불꽃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혼魂이 되어 우리 곁에 계시다.
⑯ 고향 집과 아궁은 문명 속에 가려진 전설이 되었지만, 어머니는 지금도 옛날 그 아궁에 불을 지피시며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그 아궁은 우리들의 또 다른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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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지역문학 대상작품 심사평 전문】
개성적이고 감동적인 작품
심사위원 : 정00(시인․문학평론가)
심사위원 : 신00(수필가․문학박사)
이번 지역문학 대상 수상작인 수필 [아궁이]는 여러 수필과 시 응모작들을 물리치고 수상의 영예를 안을 정도로 좋은 작품이었다.
옛 어머니들의 일상적 생활공간인 ‘아궁이’를 자궁으로 은유한 것도 기발한 발상이거니와 어머니의 그 뜨거운 모성과 사랑과 꿈과 땀을 호소력 있게 감동적으로 잘 펼쳐 놓았다.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문장 또한 훌륭했다. 수상작 외에 응모작들도 좋은 작품들이었다.
대상 후보에 오른 다른 수필 역시 좋은 작품이었으나 아깝게 탈락되었다.
특히 응모자가 많은 시 분야에선 대상을 주어도 좋을 만한 시가 두 편이나 최종심에 올라왔다. 그러나 <지역문학대상> 규정이 장르별 구별 없이 단 한 사람의 작품에게만 시상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동이란 면에서 우세한 수필에 양보하게 되었다.
[아궁이]가 주는 보편적 진실과 호소력, 설득력의 무게에 간발의 차로 물러서게 된 셈이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보내는 것과 동시에 수상을 못하게 된 여러분의 건필을 빈다. =◈=
【참고수필 : 작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묵직한 ‘중수필(重隨筆)’ 1편】
『답게』예찬
=주제의식을 붙잡고 읊어낸 이 한 편 속에는=
서광 장 희 구張喜久(시인․수필가․소설가․문학평론가)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 많지 않는 것 같다. 너와 내가 더불어 살아야 함에도 상대를 속이고, 죽이는 엄청난 사회문제를 볼 때마다 씁쓸한 생각이 들곤 한다. 학생은 ‘학생답게’, 정치인은 ‘정치인답게’. 남편을 ‘남편답게’, 아내는 ‘아내답게’… 자기의 신분과 처지에 따라 분수를 지키면서 살아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사람을 볼 때마다 의문의 실마리는 얽히고설킨다. 연예인은 연예인답게 사회의 귀감이 되어야 함에도 자칫하면 대마초에다 성스켄들까지 불거져 나오는가 하면, 재벌은 경제인답게 국민경제에 이바지해야 함에도 영원한 미제(未濟)로 남을 수 있는 정경(政經) 유착은 대가성 뇌물들로 이어지고 있다. 문학인은 문학인답게 처신을 분명하게 하고, 문학성이 풍부한 작품을 써야함에도 심사위원과 소곤소곤 등단하고, 상(賞)을 받아낸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한 주제를 설정하여 주제의식에 분명한 글을 써야 함에도 ‘주제나 부제’는 저 건너편에 두고 혼자의 넋두리로 일관해 버린 어중이떠중이 글을 써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작가답게’ 글을 쓰지 못하는 사이비 작가들도 자주 만나면서 회의감이 든다.
장관은 ‘장관답게’ 행정의 한 분야에서 혼신의 정열을 바쳐서 국민 공복의 사표(師表)로서 궁행(躬行)해야 함에도 사리사욕에 더 많은 고민을 쏟아내고 있는 모습을 쉽게 만난다. 대통령은 ‘대통령답게’, 그 아들은 ‘아들답게’, 광역단체장은 ‘시장이나 지사답게’, 교육자치장은 ‘교육감이나 교육장답게’ 스스로의 처신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을 때 국민은 진심으로 신뢰하고 존경하며 따르게 되는 건 당연하다 하겠다.
「답게」는 ‘∼답다’라는 형용사의 ‘답’이라는 어간(語幹)에 '게'라는 어미(語尾)가 첨가되어 부사형이 된 전성부사다. 곧 형용사 어간에 ‘아(어)·게·지·고’ 등의 어미가 첨가되어 동사를 수식하는 식의 접미사로 쓰이면서도 주로 명사와 함께 어울려 성질이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사전에는 ‘∼답다’라는 원형만 표기되어 있을 뿐「답게」는 표기되어 있지 않는 어휘다. ‘∼답다’의 사전적인 용어의 뜻은 [명사 아래에 붙어서 '그 명사가 지니는 성질이나 특성이 있다'는 뜻의 형용사를 이루는 접미사]라고 되어있어서 그 자체만으로 독립해서는 사용할 수 없는 일종의 접미사다. 독립성이 없거나 불안정한 접미사이지만 이 어휘가 의미하는 내용의 진폭은 넓고 크게 보인다. 성질이나 특성이 있음을 '몽땅' 한 그릇에 담아내면서 전성적(轉成的)인 의미로 귀착시켜 주거나 이 어휘의 허리를 부여안고 살며시 굴절(屈折)시키면서 은연중에 풍기는 「∼답게」란 의미의 뉘앙스는 사회발전과 사회변동을 완만하게 촉진시킬 수 있는 바탕이 스며져 있기 때문이다. 나라 발전의 원동력을 만든 모태(母胎)가 되기도 했던 용어다.
선거철이 되면 너나없이 “내가 적임자입네” 하고 나서는 철새 출마자를 본다. 자기의 확고한 비전과 철학을 공약으로 제시하여 선량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보다는 상대방 흠집 내기에 급급한 나머지 ‘출마자답게’ 행동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비하시키는 어쭙잖은 모습도 심심찮게 본다. 교사는 교사 그 이상이거나 이하여서도 안 된다. 승진을 위해서 발버둥치는 교사상이 학생과 학부모의 눈에 비춰져서도 안 된다. 제자들에게 존경받고 신뢰받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승진하고 영전하는 순수한 그 모습, 오직 ‘교사답게’ 비춰지는 [덩치 큰 사표(師表)의 상(象)]을 만들어 내야한다.
사랑을 베풀 때는 진심한 마음에서 우러나와 ‘사랑답게’ 쏟아야 되고, 아름다운 정경은 예술적인 감각일랑 우선 두고라도 눈에 보이는 대상만이라도 ‘아름답게’ 감상하며 느낄 줄 알아야한다. 어려운 일은 유연하게, 고통스러운 일은 시원하게, 얽힌 일은 매끄럽게 풀어 나가는 「속이 꽉 찬 ‘∼답게’」는 누가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겠다. 심리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인간이 타고난 성질이나 특성은 하늘의 뜻에 의한 ‘선천적인’ 것이라고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사회학자들은 후천성을 가미하면서 변화에 적응하며 자기 성찰에 의해 다듬어 가는 ‘후천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변해가려는 자기희생과 꾸준한 연찬(硏鑽)을 통해서만이「답게」살아 보려는 지혜 속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국민다운 ‘답게 정신’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 가면서「국민답게」살아 보려는 지혜가 생겨나면서 한 차원 높게 성숙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본다.
인간의 인지가 깨어나고 지식이 발전된 이후 현대만큼이나 급속한 양의 변화가 심했던 적이 일찍이 없었다. 지식의 양이 급속한 만큼 사람의 지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와야 할 것이며, 「답게」살아가야 한다는 의식이 중요하게 강조되어야 할 것은 자명하다 하겠다. 이와 같이「답게」사는 시민의식과 국민의식이 성숙되었을 때, 어두웠던 지난날의 모습들보다는, 보다 활기찬 모습들이 앞으로 전개될 수 있으리라.
출판인은 ‘서적답게’ 좋은 책을 만들고, 의사는 ‘의료인답게’ 국민건강에 진력해야 하며, 농부는 ‘농사답게’ 속이 꽉 찬 미곡과 채소를 생산해 내야한다. ‘어른답게․어린이답게, 부모답게․자식답게, 남자답게․여자답게, 선생답게․학생답게, 사주(社主)답게․근로자답게, 장군답게․병사답게, 대통령답게․국민답게’ 슬기롭게 지혜롭게 그리고 명예롭게 자기 일을 성실하게 추진해 가는 국민의식이 성숙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이 아침에 다져 본다.
이제 다사다난했던 2017 정유년(丁酉年) 한 해도 서서히 저물어 간다. 돌아오는 2018 무술년(戊戌年) 한 해에는 작가는 자기 작품을 잘 썼다고 하겠지만, 문학성이 한 참 뒤 떨어진 운문과 산문 등으로 덩치 큰 상을 받는 등 선량의 대상자(對象者)를 현혹시키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돌아온 새아침에는「사람답게」살아보려는 자성(自省)의 기회로 삼고자 오늘 아침「~답게」를 되뇌면서 그 예찬(禮讚)의 노래를 불러본다. =◈=
【평설자 약력 및 발간 및 발간예정 책자】
敍光(서광) 張 喜 久(장희구)
문학박사 / 시조시인․문학평론가․소설가․수필가
(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사)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前 남부대 교수․북경 경무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