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7/19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Slender Loris, Loris grasilis (Lorisidae)
2010 - ‘희귀동물’ 슬렌더 로리스, 65년 만에 발견 “멸종한 줄 알았더니” 희귀동물 호턴 프레인스 슬렌더 로리스(The Horton Plains slender loris)가 65년 만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김정일 `10년 앙금` 털고 푸틴 영접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은 최근 동북아 정세와 남북한, 북.러 관계를 감안할 때 하나의 국제적인 '사건' 이다. 10여년간 지속돼 온 대북 냉각기를 끝내고 소련 붕괴 후 소원했던 전통적 동맹국과 이해 당사국과의 관계강화를 웅변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조인스 2002.02.23 12:13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3&Total_ID=677369
- 시인 정지용
1988 - 월북문인 120여명 해금 [책갈피 속의 오늘]1988년 월북문인 120여명 해금 1988년 7월 19일 월북 문인에 대한 해금조치가 발표됐다. 시인이자 국문학자로 잘 알려진 정한모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은 이날 그간 출판이 금지돼 온 월북 작가 120여 명의 작품 출판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을 때 제자들에게 시인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월북 문인의 시를 낭송해 줄 만큼, 정 장관 자신도 ‘반쪽’ 아닌 ‘온전한 한국문학’에 대한 열망이 컸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70719/8468136/1
1985 - 미국 여교사 우주비행사 선발 [책갈피 속의 오늘]1985년 美여교사 우주비행사 선발 우주비행사로 뽑히기 전까지 그의 삶은 평범했다.
한국청소년야구대표팀이 1981년 7월 19일 미국 오하이오 주 뉴어크에서 열린 제 1회 세계청소년야구 결승시리즈에서 미국을 3-1, 3-2로 이기고 2승을 먼저 따내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의 선동렬은 미국의 토드 번즈와 함께 최우수선수의 영예를 안았고 포수 김상국이 감투상을 받았다. 또 예선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고 타격 2위에 오른 김건우는 세계청소년올스타팀 투수로 선정됐다. 임광희 동아닷컴 기자 oasis@donga.com /동아닷컴TV 2010-07-16 17:53:33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1980 -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 개막 인류최대의 스포츠제전인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대회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 미국을 위시한 세계 약 60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레닌 스타디움에서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브레즈네프 소련 당서기장은 올림픽에 참석한 선수들과 관람객들을 통제하기 위해 레닌 스타디움 주위를 경찰과 군인들로 벽을 쌓은 뒤 개막을 선언, 동서 냉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이 대회는 1896년 근대 올림픽경기가 시작된 이래 사상최초로 공산권에서 개최되는 것이었다.
1979년 7월 19일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가 열린 베를린 마이펠트 그라운드. 세계대회에 첫 출전한 한국선수단에는 18세의 앳된 소녀 김진호(예천여고 3년)가 있었다. 간간이 비바람이 몰아친 이날 김진호는 여자 60m 더블라운드에서 643점을 쏴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다. 한국 기록경기 사상 첫 세계 제패였다. 김진호는 이튿날 30m와 50m에서도 우승한 데 이어 개인종합과 단체종합도 석권해 여자부문에 걸린 6개의 금메달 중 5개를 휩쓸었다. 외신은 한국양궁의 세계 제패를 다투어 전했다. 국내언론도 "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곳에서 43년 만에 태극기가 펄럭였다"며 "국궁에 눌려 빛을 못본 양궁에 투자하면 올림픽 금메달도 가능하다"고 흥분했다. 김진호의 세계 제패 이후 한국 여자양궁은 1984년 서향순, 1988년 김수녕, 1992년 조윤정, 1996년 김경욱이 연이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며 20년째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조선
모택동이 사망하고 4인방이 체포된 이듬해 1977년 7월 22일 '부도옹' 등소평이 세 번째로 부활하여 당 부주석으로 복권됐다. 등소평은 1976년 제1차 천안문사태를 초래한 책임으로 세 번째 실각했었다. 첫 번째 실각은 1933년 왕명 등 좌파의 당 중앙에 의한 모택동 비판 때문이었고, 두 번째 실각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였다. 급진적인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파탄을 가져온 1960년대 초 등소평은 '백묘흑묘론'으로 알려져 있는 현실주의적인 경제조정책을 중시했으나,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 때 유소기 다음가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내 제2의 실권파'로 지목되어 실각했었다. 연금과 노동으로 연명하다 1973년에 모택동의 배려로 국무원 부총리로 부활, 1975년에 중앙군사위 부주석, 해방군 총참모장, 당 부주석,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으나 강청 등 '4인방'과의 첨예한 대립으로 제1차 천안문 사태 때 배후자로 지목되어,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다. /조선
이승만 전 대통령 하와이서 별세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별세했다.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영어 교사가 되었다가, 1897년에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 협회` 간부로 활약했다. 1910년 일본이 우리 나라의 주권을 빼앗자 귀국해 이상재 등과 `기독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며, 1912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기독교 학원과 독립 군관 학교를 세웠다. 1919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세워져 초대 대통령에 추대됐고, 1948년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고 이어 초대 국회의장,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1951년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자유당을 창당, 이듬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에 재선됐다. 1954년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조항 철폐를 골자로 한 사사오입 개헌으로 대통령에 3선됐고, 1960년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로 하야,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 마우나라니병원에서 요양 중 90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조선
인구 36만7천명에 불과한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제15회 올림픽이 1952년 7월 19일부터 8월 31일까지 개최됐다. 69개국 5,871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최대의 화제는 처음 참가한 소련이었다. 소련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해 스포츠 대국 미국의 76개 금메달에 이어 71개의 금메달을 획득, 스포츠세계에서도 미소대립의 시대를 열었다. 개인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인간기관차' 에밀 자토펙이 화제였다. 자토펙은 육상 5천m, 1만m 우승에 이어 마라톤에서도 우승, 세계를 감동시켰다. 자토펙 부인 다나도 투창에서 금메달을 차지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은 6·25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육상·역도·복싱·사이클·레슬링·승마 6개 종목에 참가하여 37위를 차지했다. /조선
1947 - 영국의 대중음악가 브라이언 메이(May, Brian) 출생 메이 [May, Brian Harold, 1947.7.19~ ] 브라이언 메이(Brian May, CBE, 1947년 7월 19일~)는 영국의 록 밴드 퀸의 기타리스트로, 독특한 기타 음색과 그가 아버지와 함께 직접 만든 수제 기타 레드스페셜로 유명하다. 그가 작곡한 히트곡으로는 〈We Will Rock You〉, 〈Tie Your Mother Down〉, 〈Who Wants To Live Forever〉, 〈Too Much Love Will Kill You〉 등이 있다. 음악가 /위키백과
1947 - 독립운동가 여운형(呂運亨) 암살 여운형 [呂運亨, 1886.5.25~1947.7.19] [어제의 오늘]1947년 여운형 암살 ㆍ통일 건국의 꿈 못 펼친 거인 오늘로부터 정확히 64년 전인 1947년 7월19일 낮 12시쯤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린다. 7월의 뙤약볕을 뚫고 날아간 흉탄은 일생을 나라 걱정으로 보낸 한 거인의 가슴을 검붉은 피로 물들인다. 거인의 이름은 여운형이다. 위해 김일성을 찾아가기도 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7182135155&code=100100&s_code=ap005
[유레카] 여운형 / 이재성 “다나카: 우리 일본은 천하무적의 육군이 수십만이고 팔팔함대가 사해를 달리고 있다. 이런 천하막강의 군대와 한번 전쟁해볼 용기가 있는가? 만일 조선인들이 끝까지 반항한다면 2천만 정도의 조선인들이야 일시에 없애버릴 수도 있다. 여운형: 그대도 글을 읽은 사람이면 ‘삼군을 거느린 장수의 뜻은 빼앗을 수 있지만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는 말의 참뜻을 알 것이다. 2천만명을 일시에 다 죽일 수도 있고 여운형의 목을 일순에 벨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천만명의 혼까지 죽일 수는 없을 것이고 여운형의 마음까지 벨 수는 없을 것이다. 호화롭기로 이름난 ‘타이태닉호’는 100분의 9밖에 안 보이는 빙산의 눈에 보이는 부분만이 전부인 것으로 얕잡아 보고 돌진하다가 물밑의 거대한 빙산에 부딪혀 파선을 당했다. 3·1 독립만세는 곧 물 위에 보인 빙산과 같을 따름이다.” 3·1 운동의 만세 소리가 잦아들던 1919년 11월, 상하이(상해)임시정부 외무부차장을 지낸 34살의 여운형이 적진의 심장 도쿄에서 일본 육상(육군장관)과 나눈 대화다. 여운형의 일본행이 일제에 매수됐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던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는 나중에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고 정정했다. 여운형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최초로 번역했으나 끝내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조선호텔에서 미군 장교들을 만났지만, 미군정 포고령을 무시하고 38선을 넘나들며 김일성을 만났다. 변절자, 기회주의자라는 비난도 숱하게 받았다. 어느 쪽도 아니었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리라.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을 동시에 추진하던 그는 극우파 암살범이 쏜 총탄에 유명을 달리했다. 1947년 7월19일, 63년 전 오늘의 일이다. 갑자의 세월이 지나도록 우리는 그가 남긴 숙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한겨레 2010-07-18 오후 08:49:55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30893.html
- Myanmar, 1 Kyat (banknote) (Aung San) 아웅산 [Aung San, 1915.2.13~1947.7.19] 중부 미얀마의 마구에현(縣) 나마우시에서 출생했다. 1932년 양곤대학에 들어가, 1936년 동맹휴학을 지도하였다. 같은 해 미얀마 전국학생연합의 초대 서기장에 뽑혔고, 1938년에는 독립을 표방하고 나선 급진정당인 타킨당에 입당, 서기장이 되었다. 영국 당국의 체포령이 내리자 1940년 8월 일본으로 탈출하여 미얀마 공작기관의 스즈키[鈴木] 대좌(大佐)의 원조를 약속받고 하이난[海南]섬에서 미얀마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얀마독립의용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에 침입, 바 마우가 이끄는 임시정부(1943~1945)의 국방장관이 되었다. 1944년 8월 반(反)파시스트 단체인 인민자유연맹(AFPFL)을 조직, 1945년 연합군의 반격에 호응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후 AFPFL의 총재가 되어 총독의 행정참사회에 참가하였고,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C.애틀리와 아웅산 간에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미얀마독립을 위한 제1보를 내디뎠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9일 양곤의 회의실에서 행정참사회 회의 중 동생을 포함한 6명의 행정참사회원과 함께 암살당하였다. /naver
- 고종황제 어극 40년 기념
1907 - 고종 강제퇴위(양위조칙 발표) 1907년 7월 19일 조선 제 26대 왕 고종이 일본의 계략에 의해 강제퇴위 당했다. 일제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에 책임을 져야한다며 왕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고종을 협박해 고종의 퇴위를 선언하는 ‘양위조칙’을 강제 승인하도록 했다. 결국 이날 날조된 ‘양위조칙’이 발표됐고 순종이 고종의 뒤를 이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이후 일제는 7월 24일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체결시켜 국정 전반을 일본 통감이 간섭할 수 있게 하고 정부 각부의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는 등 이른바 차관정치를 시작했다. 임광희 동아닷컴 기자 oasis@donga.com /동아닷컴TV 2010-07-16 17:53:33
스노 [Snow, Edgar Parks, 1905.7.19~1972.2.15] 미국의 신문기자 작가. 미주리주(州) 캔자스시티 출생. 교외의 농가에서 출생하여 미주리대학교(1925~1926)와 컬럼비아대학교(1927)에서 수학하였다. 학생시절에 캔자스시티의 지방지 《스타》의 통신원으로서 신문기자의 첫발을 내디뎠다. 1928년에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차이나 위클리 리뷰[密勒氏評論]》의 부편집장(副編輯長)으로 활약하면서 중국문제 연구에 전념하였다. 1934∼1935년에 옌징대학[燕京大學] 강사로 출강하고, 동시에 《뉴욕 선》(1934∼1937), 《런던 데일리 헤럴드》(1932∼1941) 등의 잡지 특파원으로 극동·중동의 여러 나라를 순방하였다. 저작 활동으로는 1932년에 처녀작 《극동전선(極東戰線)》을 출판하고, 1936년에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옌안지구[延安地區]에 들어가 마오쩌둥[毛澤東]과 회견하고 저술한 《중국의 붉은 별》로 중국 공산당의 실태를 소개하였다. 중일전쟁(中日戰爭) 발발 이후에는 《아시아 전쟁》(1941)을 출판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 평론활동을 계속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종군기자로 중국은 물론, 아프리카·인도·소련 등을 방문, 《우리편의 민중》(1944) 《소비에트세력의 형태》(1945)를 출판하였다. 전후(1960, 1965, 1970)에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저우언라이[周恩來] 등과 회견하고 중국의 실정을 소개하였다. 그는 당시 중공사정에 정통한 기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네이버
- Tour de France Bicycle Race, Cent., Maurice Garin, Winner of 1903 Race
[어제의 오늘]1903년 제1회 투르 드 프랑스 개최 ㆍ신문 판촉 수단으로 탄생… 2400㎞ 질주 1903년 7월19일 프랑스 파리 외곽지역의 사이클 경기장. 32살의 모리스 가랭은 거친 숨을 내쉬며 경기장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순간 경기장 안팎에 운집한 시민 2만여명은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19일 동안 프랑스 동서남북을 가로질러 2400여㎞를 달려온 가랭은 자신이 우승자라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다. 가랭은 처음 열린 ‘투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투르 드 프랑스는 한 스포츠 신문의 판촉 수단으로 탄생했다. 당시 막 창간한 신문 로토(L’Auto)는 독자를 늘리기 위한 묘책이 필요했다. 로토가 생각해낸 아이디어는 프랑스 주요 도시를 순회하는 최장거리 자전거 경주 대회였다. 하지만 이 대회는 모험이자 도박이었다. 프랑스에서 자전거 경주 대회는 많았지만 대부분 1000㎞를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영찬 기자 /경향신문 2010-07-18 18:18:5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7181818505&code=100100&s_code=ap005
- 'Portrait d'Emile Zola' by Edouard Manet
1898 -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 영국 망명 [책갈피 속의 오늘]佛작가 에밀 졸라 英망명 에밀 졸라는 대학입학시험에 떨어지고 출판사 영업부에서 근무했다. 이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비참한 시대상을 소설에 담았다. 70030000000134/20080719/8604811/1
쉬베이훙 [徐悲鴻, 1895.7.19~1953.9.26] 저장성[浙江省] 출생. 1917년 일본에 유학하고, 1918년 베이징대학교 화법연구회 강사로 있다가 그뒤 쿵더학원[孔德學院] 교수가 되었다. 1919년 파리에 유학, 1927년 귀국한 후 1929년에는 난징[南京] 국립중앙대학 예술계 주임교수가 되었으며 1930년 이후 유럽 각지에서 중국근대화전을 개최하고, 1934년 소련을 방문, 1949년 중국의 중앙미술원 원장이 되었다.
1893 - 러시아의 시인 마야코프스키(Mayakovskii, Vladimir) 출생 [Mayakovskii, Vladimir Vladimirovich, 1893.7.19~1930.4.14]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초기의 지도적 시인. 15세 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에 입당했으며 반국가활동으로 여러 번 감옥을 드나들었다. 1909년 독방에 수감되었을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석방된 뒤 모스크바 미술학교를 다녔으며 다비트 부를류크 및 몇몇 사람들과 함께 러시아 미래주의 모임에 참여해 곧 그들의 대표자가 되었다. 1912년 미래주의자들은 선언문 〈대중 취향에 가하는 따귀 Poshchochina obshchestvennomuvkusu〉를 발표했다. 마야코프스키의 시는 눈에 띄게 자기 주장이 강하고 도전적인 형식과 내용을 지녔다. 운문으로 된 모노드라마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Vladimir Mayakovsky〉는 191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상연되었다. 1914~16년에 2편의 주요한 장시 〈바지를 입은 구름 Oblako v shtanakh〉(1915) 〈척추의 플루트 Fleytapozvonochnik〉(1915, 발표 1916)를 완성했다. 두 작품 모두 짝사랑의 비극과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시인의 불만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일반의 조잡한 언어와 아주 과감한 기교적 혁신을 사용함으로써 시를 '비시화'(非詩化)하려 했다. 그의 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군중을 대상으로 한 연설조라는 것이었다.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열광적으로 볼셰비키를 환영했다. 〈혁명송시 Oda revolutsi〉(1918)·〈좌익 행진 Levy marsh〉(1919) 같은 시들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으며, 1921년 초연된 희곡 〈우스운 신비극 Misteriyabuff〉도 매우 인기를 얻었다. 이 희곡의 내용은 전세계를 휩쓴 대홍수 뒤에 '불결한 자들'(프롤레타리아)이 '청결한 자들'(부르주아)로부터 당당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다. 그는 공산당의 열렬한 대변인으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나타냈다. 1919~21년에는 러시아 전신국에서 포스터 화가이자 만화가로 일하면서 그림에다 적절한 압운(押韻)과 선전문구를 집어넣었고,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강연과 시낭송회를 갖는 한편 시사성이 짙은 정치선전시와 아동교육용 소책자들을 펴냈다. 1924년에는 레닌의 죽음을 추모하는 비가를 총 3,000행에 걸쳐 써냈다. 1925년 이후에는 유럽·미국·멕시코·쿠바를 여행했으며, 신랄한 소묘를 실은 소책자 〈나의 미국 발견 Moye otkrytiye Ameriki〉(1926)과 여러 편의 시에 자신의 인상을 기록했다. 또한 틈틈이 영화 대본을 썼는데 그 가운데 몇 편은 직접 출연하기도 했으며, 죽기 전 3년에 걸쳐 2편의 풍자극을 완성했다. 1929년에 상영된 〈빈대 Klop〉는 소련의 신경제정책과 함께 나타난 속물을 조롱하는 드라마이며, 〈목욕탕 Banya〉(1930. 1. 30 레닌그라드에서 상영)은 스탈린 치하의 어리석은 관료주의와 기회주의를 야유하는 극이다. 마야코프스키의 시는 사회적 의미로 가득 차 있었으나, 그런 사회 선전도 사랑에 대한 개인적 욕구를 억누를 수 없었다. 계속적인 실연으로 사랑을 바라는 욕구가 되풀이되어 폭발했던 것이다. 이 감정적 욕구는 초기 서정시 이후 발표한 2편의 시 〈사랑한다 Lyublyu〉(1922)·〈이것에 관하여 Pro eto〉(1923)에서 특히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또한 1928년 파리에 머무는 동안 망명객 타티야나 야코블레바와 사랑에 빠져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더욱이 교조적인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 및 소비에트 당국과 불화를 일으켰으며, 〈목욕탕〉의 상연도 실패로 끝났다. 사랑에 실패하고, 소련의 현실과 점차 멀어지고, 해외여행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자 그는 모스크바에서 자살했다. 마야코프스키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소비에트 문단에서 가장 정력적인 인물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공리주의적·시사적인 그의 시가 시대에 뒤떨어진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지극히 서정적인 시들과 혁신적 기교로 많은 소비에트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1930년대에 스탈린이 그를 일컬어 "우리 소비에트 시대의 가장 훌륭하고 재능있는 시인"이라고 선포한 뒤에는 러시아 밖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브리태니커
1877 - 스웨덴의 인류학자, 고고학자 노르덴시욀드(Nordenskiöld, Erland) 출생 노르덴시욀드 [Nordenskiöld, (Nils) Erland (Herbert), 1877.7.19~1932.7.5] 남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연구의 선구자였던 스웨덴 민족학자이자 고고학자. 스웨덴 예테보리대학교에서 아메리카 민족학과 비교민족학 교수로 재직시(1924~34) 스웨덴과 덴마크 인류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과학자이자 탐험가 아돌프 에리크 노르덴시욀드의 아들이며 탐험가이자 지리학자 오토 노르덴시욀드의 사촌이었던 그는 파타고니아(1899) 및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1901~02)에서 동물학 탐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페루와 볼리비아의 산맥을 탐험하면서(1904~05) 고고학 연구로 방향을 바꾸어 볼리비아와 브라질 국경 근방의 삼림지대를 연이어 2차례 탐험했다. 이 탐험 결과는 볼리비아의 고총고분과 화장묘에 대해 다루는 주목할 만한 논문으로 나타났다(1912). 1913년 그는 예테보리 박물관 민족학부문 최고 담당자가 되었다. 1927년 콜롬비아와 파나마에 사는 초코 인디언과 쿠나 인디언들을 연구하려고 마지막 탐사를 떠났다. 남아메리카 문화가 지니고 있는 여러 요소의 분포를 지도에 표시하는 방법을 개척했던 그는 상당히 복잡한 이 지역의 문화사를 아주 명료하게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대중적 기풍을 곁들인 여행기뿐만 아니라 풍부한 삽화를 곁들인 〈아마존 분지의 고고학 L'Archéologie du bassin de l'Amazone〉(1930)을 비롯한 많은 학술논문과 저서를 썼다. 주요저서인 〈비교민족지학 연구 Comparative Ethnographical Studies〉(10권, 1918~38)에서는 볼리비아 부족들의 물질문화를 분석하고, 문화유형에 대한 자연환경과 그밖의 영향관계를 밝히려 했다. 인류가 처음 발달한 곳에서 문화요소가 전파되었다고 보는 문화권(Kulturkreis) 이론에 회의적인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는 오세아니아의 문화적 영향이 남아메리카에 있다고 하더라도 아메리카를 고도의 문명단계로 이끈 원동력의 주체는 인디언이라고 보았다. /브리태니커
자이펠 [Seipel, Ignaz, 1876.7.19~1932.8.2] 오스트리아의 로마 가톨릭 사제. 1922~24, 1926~29년 2번에 걸쳐 오스트리아 총리를 지냈다. 그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의 싸움에서 파시스트당의 정규군을 지원한 하임베르를 이용했는데 그 결과 오스트리아에서 파시즘 세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1899년에 서품을 받고 1918년 오스트리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잘츠부르크대학교와 빈대학교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쳤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진 뒤 기독교사회당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기독교사회당이 군주제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공화론자로 갈라지는 것을 막았다. 1922년 5월 대(大)독일당에 가입하여 그의 첫번째 정부를 수립했다. 동맹국들의 감독하에 경제·행정의 개혁을 단행하기로 하고 오스트리아를 위해 국제연맹으로부터 1억 달러를 확보했다. 디플레이션(통화수축)을 억제했지만 그의 노력은 지방 행정부와 자신의 당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으며, 보수파들은 동맹국들의 내정간섭을 싫어했다. 1924년 6월 1일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그로 인한 부상으로 그해 11월에 사임했다. 2번째 임기(1926~29) 동안 그는 의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임베르를 이용한 것은 1934년에 그의 추종자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오스트리아 민주주의를 말살시키고 성직자와 파시스트들로 구성된 독재정권을 수립하는 전초가 되었다. 생애 말년에는 더욱 권위적이 되었으며, 대통령이 권력을 장악하는 법인형(法人型) 국가를 옹호했다. 1930년 9~11월 외무부장관을 지내다가 건강 때문에 사임하고 그로부터 2년 만에 죽었다. /브리태니커
1870년 7월 19일 독일제국을 형성하려는 비스마르크와 이를 저지하려는 나폴레옹 3세 사이에 발생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인 보불전쟁이 발발했다. 스페인 국왕 선출을 둘러싸고 양국간의 불화가 불거졌고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를 자극시킬 목적이었던 엠스전보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5일 후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했다.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이 지휘한 프로이센은 북독일과 남독일제국의 지지를 얻어 4주 만에 바젠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무찔렀고 급기야 프랑스국내까지 쳐들어갔다. 그 후 프랑스는 나폴레옹 황제까지 직접 가담한 스당전투도 패하고, 마침내 9월 2일 프랑스 군대는 프로이센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 후에도 프랑스국민들은 프로이센에게 완강히 저항했으나 10월 27일에는 메츠가 함락되고 1871년 1월 28일에는 파리마저 함락됐다. 보불전쟁의 결과로 2월 26일에는 평화조약이, 5월 10일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50억 프랑이나 되는 전쟁배상금을 독일에게 지불해야했고, 알자스-로렌 지방도 넘겨줘야했다. 또, 1871년 1월 28일에는 프로이센의 빌헬름1세가 베르사유궁전에서 독일제국 성립을 선포했다. /조선
바르 [Bahr, Hermann, 1863.7.19~1934.1.15] 오스트리아의 작가·극작가. 문화운동에 큰 관심을 가졌던 까닭에 전생애에 걸쳐 오스트리아 문학발전에 지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대학에서 공부한 뒤 빈에 정착해 여러 신문사에서 일했다. 초기 비평집인 〈현대 비평 Zur Kritik der Moderne〉(1890)·〈자연주의의 극복 Die Überwindung des Naturalismus〉(1891)은 자연주의와 낭만주의를 조화시키려 했던 초기 단계의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1907년 빈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다룬 뛰어난 평론 〈빈 Wien〉을 출판했으나 곧 출판금지당했다. 후기에는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영향을 받아 신비주의와 상징주의의 옹호자가 되었다. 〈빈 여인들 Wienerinnen〉(1900)·〈근경련(筋痙攣) Der Krampus〉(1901)·〈음악회 Das Konzert〉(1909) 등의 희극들은 그냥 읽기에도 재미있는 작품들이다. 1903년 베를린에 있는 독일 국립극장의 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18년에는 잠시 빈 부르크 극장의 단장으로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 가톨릭의 영향을 받아 쓴 소설 〈승천 Himmelfahrt〉(1916)은 오스트리아의 엄격한 가톨릭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마르시아스의 대화 Dialog vom Marsyas〉(1904)·〈표현주의 Expressionismus〉(1914) 등의 후기 비평들은 사회가 창조적 예술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준다. /브리태니커
언더우드 [Underwood, Horace Grant, 1859.7.19~1916.10.12] 미국인 선교사이자 교육자 한국명 원두우(元杜尤). 런던 출생. 1881년 뉴욕대학교를, 1884년 뉴브런즈윅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885년 H.G.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와서 광혜원(廣惠院)에서 물리·화학을 가르쳤다. 1887년 벽지전도부터 시작하고, 서울 새문안교회를 설립했으며,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설하였다.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 그 회장 등을 역임하며 성서의 번역사업을 주관하는 한편, 1890년에 《한영사전》 《영한사전》을, 1894년에는 최초의 찬송가인《찬양가》를 출판하고, 1897년에는 주간지 《그리스도신문》도 창간하였다. 1900년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였으며, 1915년에는 경신학교(儆新學校)에 대학부를 개설,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다. 1916년 신병으로 귀국, 애틀랜틱시티에서 죽었다. 한국 개화기에 종교·정치·교육·문화 등 여러 분야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 Elizabeth Stanton, Carrie C. Catt, Lucretia Mott
[오늘속으로<856>(7월19일)] 여성권리대회 1848년 7월19일과 그 이튿날, 미국 뉴욕주 세니카폴스에서 여성권리대회가 열렸다. 정식 이름이 ‘여성의 사회적ㆍ시민적ㆍ종교적 조건과 권리들을 토론하는 대회’였던 이 대회는 미국 여성운동의 시동을 걸면서 세니카폴스를 세계 여성운동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세니카폴스는 의복의 남녀 평등을 제창한 어밀리어 젠크스 블루머의 고향이기도 하고, 155년 전 오늘 열린 여성권리대회의 주동자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의 활동 근거지이기도 했다. 지금도 주민 수가 채 1만이 안 되는 이 조그만 타운에는 ‘여성명예전당’을 비롯한 여성운동 관련 사적지들이 많다. 세니카폴스 여성대회를 주도한 스탠턴이나 루크리샤 모트는 견결한 노예제 폐지론자이기도 했다. 이 여성운동가들은 노예제 역시 성차별주의처럼 인간 진보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성해방운동의 큰 줄기였던 여성참정권운동이 인종이나 계급 같은 다른 범주에 늘 따스한 눈길을 건넸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 미국의 많은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은 인종주의에 맞서기가 버거워지자 백인 여성에게만 참정권을 주자고 주장했다. 20세기 초 영국의 좀더 리버럴한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에게는 계급의 벽이 문제가 되었다. 예컨대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의 헌신적 투사였던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우선 부르주아 여성이라도 부르주아 남성과 동일한 참정권을 얻을 수 있다면, 여성 노동자나 남성 노동자의 참정권 획득은 미룰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여성해방운동의 흐름 속에서 즉각적인 성적 평등의 획득에 집착하는 근본주의적(radical) 경향과 성차별을 계급적 맥락에서 파악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은 일정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왔다. 민족해방운동이나 환경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하다. 인간의 정체성을 이루는 특질들의 기반이 다원적이기 때문이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3/07/18 16:26
- Chile, 10 Escudos (Banknote)
1840 - 칠레의 대통령 발마세다(Balmaceda, José Manuel) 출생 발마세다 [Balmaceda Fernández, José Manuel Emiliano, 1840.7.19~1891.9.19] 칠레의 대통령(1886~91). 자유주의 개혁가이며 의회와 충돌해 내란을 일으켰다. 1870년 칠레 의회의원에 선출되었으며 도밍고 산타 마리아 대통령 내각에서 일하면서(1881~86) 성직자의 권리에 반대하는 조처와 공공사업을 추진했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공공교육을 확대하고 철도를 건설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한편 1860년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반항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는 대통령 권한에 대해 의회가 제약을 가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이때문에 1891년 내전이 일어났다. 의회는 해군의 지원을 받아 8개월 만에 발마세다 군대를 패배시켰다. 이 패배로 그는 자살했으며 이후 칠레 정치는 1920년대 중반까지 의회정부가 담당하게 되었다. /브리태니커
- Guatemala, 5 Quetzales (Banknote)
1835 - 과테말라의 대통령 바리오스(Barrios, Justo Rufino) 출생 바리오스 [Barrios, Justo Rufino, 1835.7.19~1885.4.2] 과테말라의 대통령. 독재적인 수단으로 자유주의적 정책을 실시했으며, 외교적 방법이 잘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중앙 아메리카의 통일을 이룰 것을 계속 주장했다. 법률을 공부한 뒤 과테말라 육군 사령관을 지냈으며 1871년 보수당 정부가 무너질 때 대통령 미겔 가르시아 그라나도스의 배후세력이었다. 1873년 그라나도스에 이어 대통령이 된 뒤 '개혁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지방귀족들을 억누르고 예수회를 추방했으며, 교회재산을 몰수하고 학교체계를 확대·세속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고속도로·철도·전신선로 등을 건설하고 국가 농업의 근간인 커피 재배를 장려했으며, 새로운 헌법을 공포했다(1876). 1838년에 붕괴된 5개국 연방을 되살리기 위해 여러 중앙 아메리카 공화국의 국정(國政)에 계속 간섭했다. 정치적 설득을 통한 방법을 사용했으나 이것이 실패하자 이웃 엘살바도르를 침공했다가 전사했다. 그의 조카 호세 마리아 레이나 바리오스는 1892년 과테말라 대통령이 되었다가 1898년 암살당했다. /브리태니커
1834 - 프랑스의 화가 에드가 드가(Degas, Edgar) 출생 드가 [Degas, Edgar, 1834.7.19~1917.9.17] 드가는 발레리나들의 그림으로 대중에게 친숙한 프랑스의 화가이다. 은행가이면서 미술 애호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에는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1855년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제자 루이 라모드의 화실에 들어갔다. 1854년 이탈리아에 가서 정교한 인물 소묘로 유명한 안드레아 만테냐, 산드로 보티첼리, 한스 홀바인, 니콜라 푸생 등의 그림을 자세히 관찰하고 묘사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파리에 돌아와 친구들의 초상과 역사적인 주제를 주로 그렸다. 1862년 클로드 마네를 만나고 카페 게르보아를 출입하면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곡예사', '세탁부', '무희', '말'과 같이 움직이는 소재를 뛰어난 데생에 의거해 사실적으로 표현한 소묘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말년에는 시력을 잃어 촉각에 의존해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브리태니커
"전문가들의 대화를 듣는 것은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멋진 일이다."
- 에드가 드가
켈러 [Keller, Gottfried, 1819.7.19~1890.7.16] 독일계 스위스의 작가이자 시인. 취리히 출생. 직공의 아들로 15세 때 취리히공업학교에서 교사배척사건에 관계하여 퇴교당한(1834) 후 독학으로 공부했다. 화가가 되려고 뮌헨에 유학하였으나(1840), 소질이 없음을 깨닫고 1842년 귀향하여, 많은 시인과 사귀는 동안에 문학에 뜻을 세우게 되었다. 스위스 망명 중 혁명시인의 영향으로 급진적 정치시를 지어 문재(文才)를 인정받았다. 1848년 취리히 주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수학(1848∼1850), 철학자 L.A.포이어바흐의 ‘종교의 본질에 관한 강의’를 듣고 세계를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소설로 전향하여 1854∼1855년 인세를 선불받고 자전적인 장편 교양소설 《녹색의 하인리히 Der gr犧 ne Heinrich》의 구판(舊版)을 썼다. 베를린 시절에는 이 밖에도 《신시집(新詩集)》, 단편집 《젤트빌라의 사람들 Die Leute von Seldwyla》의 제1부(1856)를 썼는데, 여기에는 5편의 단편이 수록되었다. 1855년 취리히주(州)의 1등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15년간 근무하였다. 그 동안에 《7개의 성도전설(聖徒傳說) Sieben Legenden》(1872) 《젤트빌라의 사람들》(제2부, 1873∼1874) 《취리히 단편집 Z犧 richer Novellen》(1878~1879), 단편집 《우시(寓詩) Das Sinngedicht》(1882) 《푸른 하인리히》의 개작(改作), 소설집 《격언시(格言詩)》 《전시집(全詩集)》, 장편소설 《마르틴 잘란더 Martin Salander》(1886) 등이 출판되었다. 일생을 독신으로 지낸 그는 유언으로 인세의 제1상속인을 취리히 주정부로 정함으로써 주정부에서 받은 은혜에 보답하였다. /네이버
1799 -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발견 1799년 7월 19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가 나일강변 전략요충지 로제타에서 요새 터 파기를 하던 중, 한 장교가 문자들이 빽빽하게 적혀있는 가로 72㎝·세로 114㎝ 크기의 검은 현무암 석판 하나를 발견했다. 돌에는 54행의 그리스 문자와 이를 번역한 이집트 상형문자, 서민들이 즐겨쓰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폴레옹이 중요한 돌이란 사실을 모를 리 없었건만 2년 뒤 영국군에 패배하는 바람에 돌은 영국으로 넘어가 대영박물관에 보관됐다. 그때까지도 이집트 상형문자가 해독되지 않은 터라 많은 학자들이 달려들었다. 프랑스의 샹폴리옹도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해독에 매달렸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상형문자가 '의미'를 표현하는 표의(表意)문자라고 생각한 데 반해 샹폴리옹은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表音)문자일 수 있다며 주류와는 다른 연구방법을 선택했다. 돌에 쓰여진 그리스 문자는 돌이 기원전 196년에 제작됐고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공덕비임을 확인해주었다. 상형문자에도 반드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름이 들어있을 것으로 믿은 샹폴리옹은 유독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한 기호에 주목했다. 어렵게 해독한 결과 왕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제2의 로제타 스톤'으로 불린 오벨리스크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이름도 찾아냈다. 이로써 로마인의 역사책에서나 등장하던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이집트 역사에서도 생생하게 살아나게 됐다. 샹폴리옹의 발음기호 찾기는 1822년이 되어서야 27개 파라오(왕)의 이름과 이집트 상형문자의 음가(音價)를 모두 밝혀낼 수 있었다. 이집트 5000년의 신비가 풀리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조선
Covent Garden
1573 - 영국의 건축가, 디자이너 이니고 존스(Jones, Inigo) 출생 존스 [Jones, Inigo, 1573.7.19~1652.6.21] 영국의 건축가. 런던 출생. 1596∼1604년 이탈리아에서 회화 및 무대미술을 배운 후 귀국하여 궁정에서 의상(衣裳) 디자인에 종사하였다. 또한 가면극을 연출하고 원근법에 의한 배경·장면의 변화를 나타내는 회전무대 사용을 소개하여 영국 연극계에 큰 공적을 남겼다. 1613∼1614년에 재차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로마 및 르네상스 건축, 즉 A.팔라디오의 고전주의 건축을 연구하고 그 양식을 도입하여 새로운 면을 열고 17세기 영국건축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귀국 후 1616년에 궁정 건축 총감독관으로 활약하였다. 후에 청교도혁명으로 지위를 잃게 되어 만년은 실의 속에 궁핍한 생활을 보냈지만, 영국 국민에게 신격화된 건축가로서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페트라르카 [Petrarca, Francesco, 1304.7.20~1374.7.19]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 토스카나주 아레초 출생. 아버지 페트라코로는 피렌체의 서기였으나, 귀족옹호파인 흑당(黑黨)으로부터 추방당했으므로 페트라르카는 망명지에서 태어났다. 1311년 피사로 이사하였으며, 그 후 아비뇽으로 갔다. 몽펠리에 및 볼로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아비뇽으로 돌아가 교황청에서 직업을 얻었다. 여기서 시인으로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연애 경험이었다. 1327년 성키아라 교회에서 라우라(Laura:?∼1348)라는 여성을 만나 연애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평생 그녀의 모습을 노래하였다. 또한 교황청의 방대한 장서를 탐독함으로써 교양을 쌓았다. 30세를 넘길 무렵 그에게 예술적 성숙기가 찾아와 1337년 라틴어 서사시 《아프리카 Africa》의 집필을 시작했으나, 같은 해 로마의 여행에서 자극받은 고대에 대한 애착이 성숙해졌다. 현실 사회에 대한 혐오에서 이상으로 하는 고대의 연구였다. 여기서 이 시인의 인문주의의 밑뿌리를 받견할 수 있다. G.보카치오도 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며, 이후 두 사람의 우정은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기본적인 것을 형성하였다. 1341년 로마에서 계관시인(桂冠詩人)의 영예를 안았다. 이듬해 프로방스에서 그의 사생아가 태어나 주교(主敎)였던 그의 동생 게랄도의 개입으로 그에게 정신적 위기가 찾아왔다. 이때에 성아우구스티누스와 대화형식으로 자기의 고민을 고백한 라틴어 작품 《나의 비밀 De secreto conflictu curarum mearum》(1342∼1343)을 집필하였다. 1347년 로마에서 일어난 콜라 디 리엔치(Cola di Rienzi)의 반귀족정치의 혁명을 지지하였으나 그 혁명은 좌절하고 말았다. 이듬해 파르마 체재 중 라우라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지상(地上)의 것은 덧없음을 호소하는 새로운 사건이었다. 만년에 그는 아르쿠아에 은퇴하여 단테의 《신곡(神曲)》을 모방한 이탈리아어 작품 《승리》를 집필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당시 속어였던 이탈리아어 작품을 경시했던 그를 불멸의 시인으로 만든 것은, 1342년경부터 집필한 이탈리아어로 된 서정시 《칸초니에레 Canzoniere》이다. 지상의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신에 대한 전면적 헌신과 양립하지 않는다는 그의 고민에 찬 의문이 발생한다. 그의 경우 지상의 것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생전과 사후의 라우라로 가득 채워진 이 서정시집은 인간적인 것, 성스러운 것의 투쟁의 증거로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미녀 찬양과 쪼아 다듬은 시풍은 소네트의 한 극치로서, 후년 ‘페트라르카 시풍(petrarchismo)’이란 이름으로 서유럽 각국의 시인의 규범으로 숭앙되기에 이르렀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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