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0일 오늘의 역사<말씀> : CCCC ; 국민소통운동본부
소통 !
여러분의 고견과 댓글로
대한 국민<가족> 소통 운동에 적극 동참을 하십시다 !
박근혜정부에서는 동서남북 소통행정<소통정치>를 하시옵소서.
<<미래창조과학기술부 소관 주관>>.
"인연을 소홀히 하면
내생에 악연이 되어 다시 만난다.
오다가다 옷깃만 스쳐도 만남은
삼백생의 인연이요,
같은 좌석에 앉아 대화를 하면
오백생의 인연이요,
같은 솥의 밥을 먹으면 칠백생의 인연이라..
같을 피를 나누면 구백생의 인연이요,
부부로 만나는 것은 천생의 인연이니라.......
금생의 인연이 참으로 중하니
어떠한 인연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 이니라...
- 평택 소통 김평탁 -
평택 소통 김 평 탁
8월 10일
오늘의 말씀
① 시편 10장 전문
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22:1, 시35:22
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3.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5.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시2:4
6.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7.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8.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9.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시59:3, 미7:2
10.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11.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시73:11, 겔9:9, 욥22:13
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시9:12
13.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시10:3
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15.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16.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18.
고아와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사29:20
② 잠언 10장 전문
○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1.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2.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3.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5.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6.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거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7.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
8.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령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패망하리라
9.
바른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10.
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입이 미련한 자는 패망하느니라 잠6:13, 시35:19
11.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13.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14.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잠9:9
15.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 잠19:7
16.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17.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
18.
미워함을 감추는 자는 거짓의 입술을 가진 자요 참소하는 자는 미련한 자니라
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20.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21.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22.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 여호와의 경외와 생명의 연장
23.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 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삼느니라
24.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
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26.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
27.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년세는 짧아지느니라
28.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
29.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
30.
의인은 영영히 이동되지 아니하여도 악인은 땅에 거하지 못하게 되느니라 잠2:22
31.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패역한 혀는 베임을 당할 것이니라
32.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 약3:8, 전12:10
오늘의 샘터
① 이봉창의 말 : 한일애국단 선서식을 마친 이봉창 의사 !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② 우장춘의 신념 : “길 가의 민들레는 밟혀도 핀다.”
③ 오늘,
여기서,
지금,
곧,
바로,
나,
내<U & I>가 해야 될 가장 중요하고도 긴급한 일은 무엇인가 ? - CCCC -
④ 국민이 역사<국사>를 모르면 자녀가 어버이를 모르는 것과 같다 - CCCC -
오늘의 역사
① 표준시 자오선 : 1961년 8월10일을 기해 한국의 표준시 자오선이 동경 135도로 변경됐다.
그 전까지 우리 표준시 자오선은 한반도의 거의 중앙을 지나는 동경 127도 30분이었다.
일본을 지나는 135도로 표준시 자오선이 바뀜에 따라 한국에서는 태양이 남중(南中)하는 시각이 정오를 다소 넘기게 되었다.
표준시 자오선을 동경 135도로 변경한 것은 각 지역의 표준시가 그리니치 표준시와 정수(整數) 시간 차이를 가지도록 하는 국제 관례에 따른 것이다.
지구는 하루 24시간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360도 회전하므로 경도가 15도 달라질 때마다 시간은 한 시간씩 차이가 나게 된다.
따라서 동경 135도를 표준시 자오선으로 삼은 한국의 표준시는 그리니치 표준시보다 9시간 빠르다.
정오의 의미가 태양이 남중하는 시각이므로, 이 뜻에 충실하려면 시간대(時間帶)의 중앙을 지나는 자오선을 표준시 자오선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기는 하다.
실상 1908년 4월1일 한국에 표준시가 처음 도입됐을 때, 표준시 자오선은 127도 30분이었다.
그러다가 한일합방 이후인 1912년 1월1일을 기해 표준시 자오선이 일본에 맞추어 135도로 바뀌었고, 해방 뒤 이승만 정권 때인 1954년 3월21일에 다시 127도 30분으로 되돌아간 바 있다.
당시 한국 표준시는 그리니치 표준시보다 8시간 30분 빨랐다.
이렇게 표준시 자오선이 오락가락한 것은 정수 시간차라는 편의의 문제와 주체성의 문제가 거기 함께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8월12일에는 민주당 조순형 의원 등 여야 국회의원 22명이 우리 표준시를 현재의 일본 중심에서 과거의 한반도 중심(동경 127도 30분)으로 되돌릴 것을 내용으로 하는 표준시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낸 바 있다(고종석,2002)
⇨3월 21일.
② 안강지구 전투전적비 : 경북 월성군 강동면 위치.
6.25 전란 당시인 1950.8.10-9.5 까지 이 지역 전투에서 국군 수도 사단은 괴뢰 제2군단 예하 주력 부대의 필사적인 공세를 분쇄하고 계속 지연전을 감행, 경주 및 형산강지구의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 전공을 기념하여 1958년 이 비를 건립하였으며 인근 안강읍 무릉산에는 위령비가 서있다.
③ 일제, 동아․ 조선일보 폐간(1940) : ⇨4월 1일 ⇨3월 5일
[日총독부, 동아일보 강제폐간] 일제강점기 말 한글로 발행되던 신문이 폐간되던 때 조선 사람들의 심회는 어떠하였던가.
유독 그 신문사의 사람들만이 아니요, 온 조선 사람이 실감한 어떤 종말(終末)의 기분이었던 것이다.
한 문학평론가는 1940년 8월 10일 일본총독부에 의한 동아일보의 강제폐간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일상생활에서도 국어(일본어) 상용을 강요하던 일제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만 남겨 두고 한글로 발행되던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폐간시켰다.
당시 총독부는 동아일보를 폐간시키기 위해 언문신문통제안(諺文新聞統制案)이라는 극비문서를 만들었다.
이 문서에는 신문을 폐간시키기 위한 갖가지 방안, 비용, 후속대책까지 꼼꼼히 기록돼 있다.
겉으로는 전쟁 준비에 따른 용지난(用紙難)을 이유로 들었지만, 이 문서에는 일제가 조선어 신문을 폐간시킨 진심이 드러나 있다.
시국의 무거운 압력에 의해 암류(暗流)하고 있는 민족의식이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여 흘러넘쳐(橫溢) 언젠가는 매일신문을 복멸(覆滅)하게 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통제하는 것은 불량지를 정리하여 민족의식을 베어 버림과 동시에 매일신보의 발전을 가져와 민심의 선도에 힘쓰게 하는 결과가 된다.
총독부는 사실상 강제 폐간이면서도 조선인들의 여론을 의식해 자진폐간을 종용했다.
동아일보에 대해 1940년 2월 11일 일본의 기원절(건국기념일)까지 폐간하라고 지침을 내렸지만, 동아일보는 6개월 이상 버티며 저항했다.
동아일보 고문인 고하 송진우는 일본 도쿄(東京)에 가서 일본 정계에 조선총독부의 부당성을 호소하기도 했다.
결국 일제는 저항하는 동아일보의 간부들을 구속시켰다.
혐의는 경제통제령을 위반했으며, 비밀결사를 조직했다는 것.
종로경찰서는 동아일보 간부들의 회식은 비밀결사 조직을 모의한 것이며, 송진우 명의의 은행자금은 독립운동자금이고, 전국 800여 지사 지국을 통해 독립자금을 모집해 상하이임시정부로 보냈다는 혐의로 백관수 사장을 구속시켰다.
백 사장은 구속된 지 열흘이 넘도록 폐간계 서명날인을 끝까지 거부했다.
일경은 결국 발행인 겸 편집인을 와병 중이던 임정엽 상무로 바꾸게 한 뒤 자진폐간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2006)
④ 대한매일신보 창간(1905) : 한-영 합병회사 일간지.
대한제국이 말로로 다름질칠 무렵 언론기관으로는 독립신문․황성신문․제국신문․만세보가 있었고 대한매일신보는 1905년 오늘 발간되어 배일사상을 북돋아 주었다.
이 신문은 영국인 배설(裵設)과 양기택이 시작한 것으로 서울신문의 시조가 되거니와 열심히 배일을 부르짖었기 때문에 「배설」이 상해로 추방까지 당하였고 양기택은 더욱 붓끝을 날카롭게 한 바 있다.
⑤ 건국동맹(建國同盟)(1944) :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비밀결사.
여운형․조동호․현우현․황운․이석구․김진우 등이 주동이 되어 일본의 패전을 전제로 이에 대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조직, 다음해 8월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간부가 체포되었다.
그 후 광복과 함께 출옥, 기구를 확대하여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에 편입되었다.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의 지도 아래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모여 건국동맹을 결성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일제의 통제 아래에서 침묵을 지키거나 소그룹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었고, 민족주의자들도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이후 활동이 미미한 상황이었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고자 뭉친 건국동맹은 "각인각파(各人各派)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 제세력을 구축(驅逐)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일, 반추축(反樞軸) 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일, 건설부면에 있어 일체 시위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대중의 해방에 치중한다"는 강령에 따라 활동했다.
또한 좌익․우익을 묻지 않았으며 불문(不問)․불어(不語)․불명(不明)을 철칙으로 삼았다.
1944년 10월경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책임자를 내정했으며, 자주적인 독립쟁취를 이루기 위한 준비로서 군사위원회․식량대책준비위원회․치안대 등을 결성했다.
다른 한편으로 결정적 시기에 해외 동포들의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반일단체와의 협력을 도모했다.
건국동맹은 8․15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할 수 있는 모체가 되었다.
⑥ 박정희 의장 중장 승진(1961) : 5․16 군사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 소장 !
1961년 오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소장이 육군 중장으로 승진합니다.
청와대에서 열린 계급장 수여식에서 윤보선 대통령과 송요찬 내각수반이 박정희 의장의 어깨에 중장 계급장을 답니다.
이와 함께 쿠데타에 적극 가담했던 대령 37명도 준장으로 진급됩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1962년 3월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합니다.
이어 박정희 의장은 1963년 8월 육군대장으로 전역한 뒤 같은 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⑦ 광주 대단지 난동사건 발생(1971) : 정부의 철거민 이주정책으로 정착한 광주대단지 주민들이 생활기반및 교통대책 등을 요구하며 집단시위를 벌이고 있다
광주 대단지 주민 5만여명이 1971년 8월 10일 정부의 무계획적인 도시정책과 졸속행정에 반발, "토지 불하가격을 인하하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성남 파출소 등 공공건물과 경찰 백차 등 차량 4대를 불태우며 소요를 일으켰다.
서울시는 무허가 판자집 정리사업으로 광주대단지(성남시)를 조성, 철거민을 집단 이주시킬 계획이었으나 졸속행정과 무계획적 도시정책으로 분양가격, 세금문제 등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은 분양가격 인하와 세금면제를 요구하며 6시간동안 광주대단지 전역을 장악했다. 오후 5시경 양택식 서울시장이 주민들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약속해 일단락됐다.
이 사건은 해방 이후 최초의 대규모 도시 빈민 투쟁사건으로 주민과 경찰 100여명이 부상당했고 23명이 구속됐다.
⑧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옹(금메달)과 함께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했던 남승룡씨(1936) : 남승룡옹이 2001년 2월 20일 별세했다.
남옹은 손기정옹과 함께 일본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 금메달을 딴 손기정옹과 함께 한국민족의 기개를 높였다.
`조선남아 의기충천!`
조선일보는 1936년 8월 10일자 호외를 통해 독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동메달을 딴 손기정옹과 남승룡옹의 쾌거를 그렇게 전했다.
비록 일장기를 달고 출전했지만 이들의 기개는 나라를 빼앗겼던 당시 `조선인`들에게 무한한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줬다.
그래도 마라톤에 대한 애정을 접지 않았던 남옹은 광복 뒤인 1947년 서른 다섯의 나이에 태극마크를 붙이고 미국 보스턴마라톤에 출전해 10위를 차지,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다.
⇨2월 20일.
⑨ 세종의 조세개혁 : 세종 12년(1430년) 8월10일(음력), 조선의 전국적 여론조사가 끝났다.
3월 중순부터 시작돼 5개월간 치러진 조사에 참여한 인원은 모두 17만,2806명. 전현직 관리와 양반은 물론 양인들도 참여한 초유의 여론조사였다.
요즘으로 치면 국민투표가 실시된 배경은 세종의 세제 개혁 의지. 해마다 풍작 정도를 조사해 세율을 정하는 손실답험법(損失踏驗法)으로는 관리들의 농간으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일정액의 세금을 납부하는 공법제(貢法制)를 제시(세종 9년)했으나 양반층의 반대에 막히자 3년이 지나 대안으로 꺼낸 게 여론조사다.
직접 민의를 물어 기득권층의 저항을 넘겠다는 뜻이 깔렸던 여론조사의 결과는 찬성 9만8,657명에 반대 7만4,149명. 세종은 승리했어도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가지 않았다.
반대 의견이 적지 않음을 받아들여 투표 결과를 정밀 분석하는 한편 새로운 대책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공법제가 시행되면 이전보다 세금부담이 감소하는 데도 양반들의 반대는 줄기찼다.
투명한 조세 행정으로 ‘착복의 원천 봉쇄’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최종안이 나온 게 세종 26년(1444년). 토지의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를 따라 54등급의 세율을 적용하는 ‘연등6등법’과 ‘정등9등법’의 축으로 삼는 공법제가 최초 논의 17년 만에 확정된 것이다.
결당 1두5승~30두로 거두는 공법제도는 애초의 개혁 의지에 미흡했으나 조선의 초기 발전을 이끌고 왕조의 기본 조세제도로 뿌리내렸다.
세종의 국민투표로부터 579년을 맞는 오늘날 우리를 돌아본다.
수십조원이 들어갈 사업도, 국민의 다수가 반대한 법안도 손바닥 뒤집듯 결정되는 세상이다.
세종의 개혁에 반대했던 기득권의 행태만이 세월을 넘어 여전하다.
(인터넷한국일보, 2009/08/09)
⑩ DJ "YS, 나 죽으면 제일 슬피 울 사람" (2009) :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10일 투병중인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입원한 병원을 전격적으로 찾아 묵은 반목을 씻으면서 DJ가 YS와의 관계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토로한 발언이 새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DJ는 1990년대 초반 야당 정치인 시절 "내가 죽었을 때 제일 슬피 울 사람이 김영삼 총재고 김영삼 총재가 돌아가실 때 가장 슬피 울 사람이 이 김대중"이라고 말했었다.
1987년 대선에서 야권이 분열된 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DJ와 YS는 그 뒤로 22년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정국에서는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가 두드러졌다.
DJ가 이명박 정부를 '독재 정권'으로 규정하자 YS는 "그 입을 닫아라"라면서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YS도 DJ를 병문안하기 전 기자들과 만나 "(DJ는) 나와는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고 협력관계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한 관계다.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다"라고 표현하며 DJ와의 인연을 밝히기도 했다.
DJ 역시 곧 출간할 자서전에서 "1987년 대선 때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게 빚으로 남아있다"는 회고를 통해 YS에 대한 복잡다단한 심경을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경쟁'만으로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 경쟁'의 외피를 입은 '협력'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를 함께 견인해왔다는 평가도 많다.
YS는 이에 대해 "나와 김대중 대통령은 젊을 때부터 동지 관계였다.
협력도 오랜 기간 했고, 경쟁도 오랜 기간 했다.
둘이 합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고 말했다.
⑪ 콜린 파월(1937생), 미국 사상 첫 흑인 합참의장(1989) : 미 합참의장에 흑인 콜린 파월 육군대장은 미 육군 사상 숱한 기록을 깨며 "신화를 만든 인물"로 꼽혔다.
흑인이지만 서독주둔 미5군단장, 양대 국방장관의 수석보좌관,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 등 요직을 두루 거치고 흑인으로는 최초로 전군의 대부인 합참의 가장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파월 대장의 중용은 그의 친화력, 지성, 흑인우대를 통해 기대되는 정치적 이득을 겨냥한 부시의 계산 등이 어우러진 인사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군인중의 군인"이란 별명에 걸맞게 평소 참모직을 싫어해 서독주둔 미5군단장 시절 칼루치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의 부보좌관 제의를 수차례 거절하기도 했다.
결국 레이건 당시 대통령의 직접 권고로 부보좌관직을 맡게된 파월은 당시 이란 콘트라 스캔들로 엉망이 된 직원들의 사기양양과 대국민이미지 회복에 노력, 워싱턴포스트지로부터 '노스 중령 해독제'란 평을 받았다.
파월 대장은 그때 국가안보회의(NSC)를 재편하고 운영방향을 새로 설정, 높은 평가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1970년대 포병대대장으로 근무했던 파월은 지난 1937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자메이카 이민2세인 그는 1958년 뉴욕주립대학에서 ROTC 소위로 임관했으며 조지워싱턴대 미 국방대학에서 수학했다.
그의 이같은 지식축적과 판단능력은 1987년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회담에 동참하는 영예를 안겨주었으며 이때부터 흑인최초의 합참의장감으로 주목을 받았다.
1962년, 1968년 2차례 베트남에 근무하기도 했던 파월은 정치에는 무관심해 이란에 대한 무기판매사실을 의회에 알리자고 백악관에 건의하다가 당시 포인텍스터 안보담당보좌관으로부터 냉대를 받은 적도 있다.
상사들의 배려와 천거로 승진을 거듭했던 파월은 안보담당보좌관 시절에 레이건 前대통령 등의 총애를 받아 '레이건 슐츠 국무장관, 칼루치 국방장관과 파월은 특수관계'란 질시를 받았다.
흑인 젊은이에게 '소수민족의 기회균등을 위해 노력하라'고 충고하곤 하는 파월대장은 부인 앨마 여사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⑫ 9월 학살 사건(1792) : 파리시민 봉기, 프랑스 국왕을 의회내에 유폐.
⇨2월 2일.
⑬ 미국, 찰스턴 춤 경연대회(1925) : 192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사교 재즈 댄스 찰스턴 춤 !
1925년 오늘 열린 찰스턴 춤 경연대회의 모습입니다.
미국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지역의 흑인 민속춤에서 비롯된 찰스턴 춤 !
찰스턴 춤은 1923년 흑인 뮤지컬 와일드 런닝에서 소개된 뒤 미국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4/4박자의 빠른 리듬에 맞춰 양 발을 안팎으로 돌리면서 몸을 비비꼬는 스텝이 찰스턴 춤의 특징입니다.
⑭ 루스벨트-처칠 정상회담(1943) : 1943년 오늘 캐나다의 퀘백주 !
제2차 세계대전의 새로운 전략을 논의하기위한 미국과 영국의 정상회담이 퀘백주의 한 성에서 열립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총리는 정상회담에서 나치 독일이 점령하고 있는 유럽을 재탈활하기 위한 대규모 반격을 계획합니다.
공격지역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
두정상은 이들 지역에 대한 상륙작전을 통해 독일로 진격하기로 결정합니다.
퀘백에서의 정상회담이 끝나고 열흘이 지난 1943년 9월 3일!
연합군은 이탈리아에 상륙작전을 감행해 나치 독일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합니다.
⑮ 캐나다 다리 붕괴 사고(1966) : 캐나다 오타와주의 리도강 !
리도강 위를 지나는 고속도로 다리가 1966년 오늘 건설도중 붕괴됩니다.
붕괴된 다리는 12미터 아래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작업중이던 일흔명의 인부들 가운데 여덟명이 숨지고 쉰세명이 부상을 당합니다.
사고가 일어난 날은 공교롭게도 캐나다 전역에서 안전공사 캠페인이 시작된 날이었습니다.
사고를 수습하고 사고 원인을 분석하는라 다리 건설은 상당 기간 지연됐습니다.
⑯ 마젤란 스페인 출발(1519) : ⇨3월 6일.
⇨4월 27일
⑰ 美다우지수 2,600 돌파(1987) : “우리는 새로운 투자의 시대에 진입 중이다.”
1987년 8월 11일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전날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가 심리적 저항선인 2,600을 돌파하자 이렇게 선언했다.
당시 종가는 전날보다 43.84포인트 오른 2,635.84.
다우지수가 14,000을 찍은 요즘에야 이 같은 풍경이 우습기까지 하지만 당시로선 큰 사건이었다.
월요일이었던 10일 다우지수는 오전 내내 지지부진하다 오후 들어 뛰기 시작해 장 종료 전 30분 동안 일시에 14포인트가 급등하며 투자자들을 흥분시켰다.
직전 거래일인 7일 장중 한때 2,600 선을 넘었다가 장 막판에 다시 미끄러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날 주가는 드라마적 요소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던 것.
그러나 월가의 분석가들은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사실 외에는 강세장을 설명할 만한 근거를 내놓지 못했다.
국제 유가가 안정돼 인플레이션 위험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1년 전부터 지속돼 온 재료였다.
외국인 투자가 늘고 있다는 사실도 주가를 자극할 새로운 변수는 아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넘치는 유동성이 떠받친 ‘관성’이 주가를 끌어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틱했지만 불안했던 상승세는 두 달 만에 대폭락으로 우울한 결말을 맺고 말았다.
그해 10월 19일 월요일, 개장부터 ‘팔자 매물’이 쏟아지면서 다우지수는 508포인트(22.6%) 급락한 1,738.74로 마감됐다.
이날 주가도 장 종료를 앞둔 마지막 30분에 103포인트가 한꺼번에 빠졌다.
하락 폭은 대공황의 서막을 알린 1929년 10월 28일의 12.8%보다도 컸다.
이튿날 월스트리트저널의 톱기사의 첫 문장은 “주식시장이 붕괴됐다(The stock market crashed yesterday)”라는 5개 단어가 전부였다.
‘블랙 먼데이’라는 신조어는 이렇게 탄생했다.
20년 뒤인 2007년 한국의 증시는 어떤가. 6월 중 ‘광의 유동성’은 34조 원이나 늘어나 한국은행이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아파트 분양 계약을 해지하고 주식을 샀다는 사람도 있다.
주식 투자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기업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언제든지 ‘블랙 먼데이’는 나타날 수 있다.
‘투자의 달인’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은 말했다.
“세상에서 주식을 사는 이유 중 가장 어리석은 건 주가가 올라가고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이라고.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2007)
⑱ 포르투갈, 총리 해임 요구 시위(1975) : 포르투갈 전역을 휩쓴 반공시위가 절정에 달한 1975년 오늘 !
수많은 포르투갈 국민들이 공산주의자인 곤칼베스 총리의 해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입니다.
1년전인 1974년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선 포르투갈 !
아프리카 식민지 해방 등 다양한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공산당 중심의 극좌파와 사회당 중심의 온건 좌파가 크게 대립합니다.
이틀전인 8월 8일 공산계 일색의 내각을 구성한 곤칼베스 총리 ! 유혈반공시위가 계속되자 고메스 포르투갈 대통령은 곤칼베스 총리를 해임합니다.
곤칼베스 총리의 해임 후 포르투갈에는 소아레스를 총리로 하는 사회당 내각이 들어섭니다.
⑲ 영국의 찰스 2세, 그리니치 천문대(Greenwich observatory) 설립의 첫 발을 내딛다(1675) : 영국 내전 이후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권력을 잡았던 크롬웰 사후, 찰스 2세가 다시 왕위에 올랐다.
찰스 2세에게 천문 항해술 연구와 천체 관측을 위해 그리니치천문대 건설을 제의한 인물은 존 플램스티드(John Flamsteed, 1646-1719)였다.
1675년 8월 10일 플램스티드가 천문대 설립을 위해 찰스 2세 명의의 초대장을 발송한 2년 뒤인 1677년에 천문대 공사가 착수되었다. 처음의 의도와 달리 왕실의 지원을 받지 못한 플램스티드는 개인 비용으로 공사를 강행, 1688년 완공했다.
그리니치천문대의 초대 대장 겸 왕실 천문관을 역임한 플램스티드는 행성의 위치 관측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84년 워싱턴 국제회의에서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한 자오선이 경도의 원점으로 지정되어, 오늘까지 이를 기준으로 해당 지역의 경도를 측정한다.
그리니치(Greenwich)는 런던 교외의 지명이다.
런던 템즈강 부근에 설립된 그린이치 천문대는 1930년대 런던의 공해로 인해 관측에 어려움을 겪자, 1945년 서섹스주로 이전했다가 1970년 다시 카나리아제도의 라팔마스로 옮겼고, 1990년 캠브리지로 천문대 본부를 이전했다.
현재도 천문대 소재 지역과 관계없이 '그리니치'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⑳ 아스피린 탄생(1897) : 진통제의 대명사.
아스피린은 독일의 3대 발명품의 하나로 불리는 것이다.
1897.8.10 29세의 젊은 독일 화학자「펠릭스 호프만」이 버드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살리실산을 화학적으로 처리해 만들어낸 후, 1899년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이 특허를 획득, 본격적으로 연구․개발되기 시작했다.
위장에 부담을 주지 않고 탁월한 진통효과를 내며, 1900년 바이엘이 대중화하기 시작해 1914년에는 이미 세계 시장을 석권하며 진통제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㉑ 기타 오늘의 역사
1519 페르디난드 마젤란, 최초의 세계일주 출항
1898 제국신문 창간
1900 영국 일본 공사, 용암포조차 철폐와 의주개시를 요구
1913 부카레스트 강화조약 조인(제2차 발칸전쟁 종료)
1920 터키,연합국과 세브르강화조약 조인
1934 남한에 풍수해
1939 철도국, 목탄자동차 시험
1945 국군 가장한 무장간첩 검거
1945 송진우, 총독부의 정권이양 교섭을 거절
1945 일본정부 포츠담선언 수락 전쟁 최고 지도자 회의에서 항복 결정
1946 북한 주요산업의 국유화법 공포
1948 기독교아동연구회 설립
1954 인도차이나 반도 휴전 성립
1958 소련 세계 최대의 쿠이비세프 수력발전소 준공
1960 WCC에 기독교 장로회 가입
1961 한국-카메룬 국교 수립
1964 전국언론인대회, 언론윤리위법 철폐투쟁 결의
1973 신학사상 창간.신학 논문지.서울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발행,편 집겸 발행인 안병무 신국판,계간.매우200면 내외의 분량이다.
1976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 위원장에 조선일보사 방일영대표 선임
1977 미국, 2000년까지 파나마운하 파나마에 양도 합의
1981 북한군 비무장지대서 무차별 사격
1983 프랑스, 챠드내전에 개입. 공수부대 투입
1987 다우존스 공업주 평균지수(산업지수) 사상처음 2600선 돌파
1988 울진 원전1호기(발전용량 95만Kw) 준공
1990 삼성전자, 16메가D램 개발
1991 중국, 핵확산금지조약 서명에 원칙합의
1994 체신부, 성서공회 1백주년 기념우표 발행 발표
1994 제주공항서 KAL기 착륙후 폭발전소(승객은 긴급대피 무사)
1998 정부, 주민등록번호 포함 공공번호 83종 연도표기방식 확정
1999 네덜란드에서 '안락사'인정 법안 세계최초로 마련
1999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 미국최고영예훈장 '자유의 메달' 수 상
오늘의 인물
① 조광조 출생(1482) : ⇨12월 20일.
② 우장춘(禹長春 ; 1898.4.8 - 1959.8.10) : 농학자.
씨 없는 수박을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고, 씨앗의 육종 합성에 성공하여 우리 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농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
8․15 광복 뒤 낙후된 조국의 농촌을 구하고자 일본에서 쌓은 화려한 명성을 버리고 귀국한 우장춘 박사 !
우장춘 박사는 우리나라 토양에 맞는 채소와 볍씨의 품종개량에 온갖 정열을 기울였습니다.
우장춘박사의 노력으로 씨없는 수박을 비롯해 우리 농토에 맞는 수많은 씨앗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장춘 박사는 육종의 과학화와 우리나라 농업근대화에 커다란 기여를 했습니다.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받은 우장춘 박사의 장례는 국민들의 애도속에 사회장으로 치뤄졌습니다.
한편 을미사변에 연루돼 일본에 망명한 별기군 대장 우범선의 장남인 우장춘은 동경제국대학 농학과를 나와 육종학 연구자로 활동하면서 식물을 실제로 합성시키는 실험결과로 국제 농학계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는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이 어려워 6세 때 고아원에 들어가 갖은 고생을 하였다.
⇨11월24일(우범선 기일).
⇨4월 8일(우장춘 생일).
⇨10월21일(우장춘 기념관 개관).
③ 이봉창 출생(1901) : ⇨10월 10일
이봉창은 일왕 히로히토[裕仁] 암살 의거를 결행한 독립운동가이다.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마친 뒤 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6~7년간 기회를 엿보다 1931년 1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찾았다.
김구의 주선으로 한인애국단에 가입해 일왕 암살계획을 세웠다. 1932년 1월 8일 오후 2시 도쿄[東京]의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히로히토가 만주국 괴뢰황제 푸이[溥儀]와 관병식을 거행하고 나오는 것을 기다려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 기수와 근위병에게만 부상을 입혔을 뿐 히로히토를 죽이지는 못했다.
이봉창은 거사 직후 품안에서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체포되었다.
같은 해 10월 열린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한인애국단의 첫번째 거사였던 이봉창의 의거는 독립을 향한 한국인의 기개를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침체되어 있던 임시정부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의 항일협력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해주는 예상밖의 결과를 낳았다.
④ 이태영(李兌榮 ; 1914.8.10 ~ 1998.12.17) : ⇨12월17일.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다.
평안북도 운산(雲山) 출생.
1936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를 졸업하고 49년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였다.
52년 고시사법과에 합격하고 56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창설, 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법정대학 교수를 지내는 한편 한국여성문제연구회 이사, 가사심판법 기초위원, 가족법학회 부회장, 국제법률구조연합회 이사, 세계변호사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가정법률상담소 명예이사장.
법을 몰라 소외되고 고통받는 여성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 이다.
그녀는 1953년 여성단체가 국회에 건의문을 제출하면서 시작된 '가족법 개정운동'을 장장 37년에 걸쳐 진두지휘, 1990년 국회에서 개정안이 제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
1남3녀의 어머니로 32세 때 서울대 법학과 최초의 여학생으로 입학, 1952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야당 지도자 정일형씨의 아내라는 이유로 판사임용을 거부당한 뒤 1954년 변호사 개업을 했다가 1956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 법률구조활동에 뛰어들었다.
1963년-1971년 이화여대 법대학장을 역임했다.
⑤ 후버(Herbert Clark Hoover ; 1874.8.10 - 1964.10.20) : 미국의 정치가.
제31대 대통령.
인도주의자.
스탠퍼드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난민구호활동 등에 수완을 발휘한 후 1921년부터 상무장관을 지내면서 후버댐과 세인트 로렌스운하 건설 등 경제적 번영정책을 펼쳤다.
1929년 공화당에서 입후보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0월 20일
⑥ 로렌스 비년(Laurence Binyon ;1869.8.10 - 1943) : 영국의 시인․미술 비평가.
대영 박물관 동양부장. 동양 미술의 권위자였다.
시집 <서정시집> 이외에, <극동의 회화> <영국의 회화> <시에 나타난 풍경> 등.
⑦ 제이 쿡(Jay Cooke ; 1821.8.10 - 1905) : 남북전쟁 초기, 링컨이 위기에 빠졌다.
북군의 연패로 유럽 자금이 빠져나가 돈줄이 말랐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을 각오하고 불태환지폐 그린백을 발행해 다소 숨을 돌렸지만 전쟁은 끝없이 돈을 불렀다.
대안으로 연수익률 7.3%라는 좋은 조건에 국채를 발행했지만 팔리지 않았다.
국채를 사들일 기관투자가들의 호주머니도 비었던 탓이다.
파산 직전의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외면당하던 국채가 팔리기 시작한 것. 은행가 제이 쿡의‘마법’ 덕분이다.
쿡의 수단은 분할과 일반공모. 최소가 1,000달러짜리 국채를 50달러짜리로 쪼개 국민들에게 팔았다.
쿡이 고용한 통신판매원 2,500명은 국채 매입이 애국이자 횡재하는 지름길이라는 신문기사와 전단지를 갖고 보부상처럼 전국을 누볐다.
덕분에 채권투자 붐이 일고 5억달러어치의 국채가 모두 팔려나갔다.
전쟁 직전 인구의 1%에 불과했던 증권투자 인구도 5%까지 불어났다.
은행과 증권 브로커, 유럽 투자가들의 전유물이던 채권 투자가 대중화하는 첫 단추가 끼워진 셈이다.
전후에도 8억3,000만달러어치의 국채를 같은 방식으로 판매하는 데 성공, 최고 갑부로 떠오른 쿡의 출발점은 위조지폐를 가려내는 촉탁 행원. 1821년 8월10일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학교를 마치고 18세 때 은행에 들어가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철도회사 투기 실패로 1873년 대공황을 야기하며 파산한 뒤 광산투자로 재기, 1905년 83세로 사망할 때는 부자로 죽었다.
맨손으로 은행을 세우고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거짓을 일삼아 권모술수에 능한 투기꾼이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그는 채권 대중화를 통해 신생 미국이 방대한 자금수요를 스스로 충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2007.서경.권홍우 편집위원)
⑧ 기타 오늘의 인물
1489 쉬투름 출생.독일의 개혁자.그는 정치적 대회와 종교적 대회 에스터라스부르 도시의 대표로 91회에 걸쳐 참석하였다.
1516 하베르만 출생.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1540년경에 복음 주의교회로 개종했고 신학을 공부했고,여러곳의 목사직을 거 쳤다.
1597 하이다누스 출생.개혁파 신학자.그는 신학과 철학이 각자의 영역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함.
1625 도이치만 출생.루터교 신학자.경건주의자들의 지도자인 쉬페 너에 반대하여 도이치만은 자그만치 263개의 이단적 요소를 들어 공박했다.
1654 니우벤티트 출생.박학한 네덜란드 수학자이며 철학적 저술가.
1660 케네트 출생.피터보로우의 주교.외국 복음전도를 위한 협회의 창단 멤버들 중 한사람이 되었다.
1674 루츠 출생.스위스 경건주의자.그는 그의 저술에 의해서 상당 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그 저술들은 1721년 이후로 연이어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1729 뉴컴 출생.아르마의 대주교.12권의 소선지서 에스겔 및 신약 성경 등에 관한 개역을 각주로 달아 출판함.
1753 초대 미국법무장관 에드먼드 랜돌프 출생
1802 독일 물리학자 애피누스 사망
1848 목슴 출생.회중파 교도.그는 1894-97년에 하버드에서 대학교 설교자,1895년에는 로웰강사를 지냈다.
1861 항 장티푸스 백신을 개발한 영국의 세균학자 라이트 출생
1862 이내수 출생. 천주교 초기신부.영세명 아오스팅.1897년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받음.
1894 작가 조명희 출생
1899 배우 잭 헤일리 출생
1923 여배우 론다 플레밍 출생
1925 언론인, 국사학자 천관우 출생
1928 가수 에디 피셔 출생
1928 가수 지미 딘 출생
1958 김병수 출생.장로교 장로.한말의 교육가.실업가.농촌계몽운동 가.독립운동가
첫댓글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