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22
헌종 3
- 흉흉해진 민심과 흔들리는 왕실
이후에도 이양선의 출몰은 계속되었고
그럴 때마다 민심은 흉흉해졌다.
외세의 침투가 시작되고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백성들도 서서히 깨달아 갔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 합당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척사 정책을 고수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으며.
이 또한 견제 세력이 없는 세도정치의
폐단이었다.
한편 어엿한 청년이 된 헌종은
점차 외척인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헌종은 궁에 들어온
외숙 조병구를 불러 그의 죄를 따지며
"외숙의 목에는 칼이 들어가지 않습니까?"
라고 말했다.
이는 조병구에 대한 경고이자
풍양 조씨 세도에 대한 경고였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조병구는
황급히 궁을 빠져나와 수레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만 수레가 뒤집어져
조병구는 땅에 머리를 박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러나 외척 세도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뜻을 펼쳐볼 새도 없이
헌종은 1849년(헌종 15) 2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헌종이
혈육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왕실에는 그의 뒤를 이을 6촌 이내의 친족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남은 친족들도
신유박해로 모두 죽고 없었다.
이것은 500년 가까이 이어 온
왕실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헌종 사후 그 후사를 잇는 일은
흔들리는 왕실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또한 이것은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사이의 세력 다툼에도
커다란 변수로 작용했다.
순원왕후 김씨는
헌종이 죽자마자 옥새부터 찾았다.
그리고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전계군(全溪君,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의
아들 이원범(李元範)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
후사를 잇게 했다.
결국 다시
안동 김씨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간 셈이었다.
헌종 재위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자연재해가 빈번히 일어나고
역병이 돌아 삶의 터전을 버린 백성이 수없이
많았다.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고,
민란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지도층은 권력 다툼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강화도령' 이원범이 왕위에 올랐다.
헌종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東九陵) 내에
위치한 경릉(景陵)이다.
담회로~
[출처] 조선왕조 실록 《122》|작성자 DJ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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