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 때 : 2022년 10월 23일(일)
○ 탐방구간
고종 40년 기념비전 ➡ 박인환 집터 ➡ 청진지구 유구 유적 ➡ 의금부 터, 신신백화점 터 ➡ 대한민보 터 ➡ 수송공원 ➡ 조계사 ➡ 조선중앙일보 터, 공평도시유적전시관, 민영환 자결 터, 태화관 터, 서울의 중심석, 김병로 집터 ➡ 화신백화점 터, 김상옥 의거 터, YMCA, 조선극장 터, 박자혜 산파 터 ➡ 탑골공원 ➡ 경시서 터, 한양의원 터, 조광조 집터, 지석영 집터, 교동소학교 터 ➡ 운정여관 터, 홍명희 집터, 오진암 터 ➡ 대각사, 좌포도청 터, 명월관 터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서울 종로구 세종로 1-68, 종로1가 1)
1902년에 해당하는 고종황제의 등극 40년과 보령(寶齡) 망육순(望六旬, 51세)을 기리는 칭경예식(稱慶禮式)과 관련하여 중흥송덕(中興頌德)의 내용을 담아 1903년 9월 2일에 완공된 비석이다
(원래 고종이 즉위 40년이 되는 해이자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입소한 해는 1902년이었지만, 콜레라 창궐 등으로 나라 형편이 어려워 한해 늦게 세우게 되었다)
이 비석의 전자(篆字)는 황태자(순종)의 글씨이며, 비문은 의정부 의정 윤용선(尹容善)이 짓고 원수부 회계국총장 민병석(閔丙奭)이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작은 규모의 비각에는 ‘기념비전(紀念碑殿)’이라는 편액이 걸렸는데, 이 글씨 역시 예필(睿筆)이라고 하여 황태자가 1902년 9월에 쓴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비각은 2중의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서 있는 정자형 건물로,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이나 경회루(慶會樓), 원구단(圜丘壇) 등과 같이 벋침돌 을 높이 쌓고 돌난간을 두른 다음 방위에 맞추어 동물 조각을 배치하였으며, 경복궁쪽에 자리하였던 기로소의 위치를 고려하여 경복궁 광화문 앞 대로와 종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건립하였기 때문에 이 건물 은 대한제국시기에 건립된 여느 기념물 가운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입구인 3문(三門)은 남향하고 있는데, 돌로 세운 기둥 사이에는 보기 드물게 철문을 달아 매었다
문의 기둥에는 앞면에 식물 무늬를 얕게 돋을새김 하였고, 윗부분에는 돌짐승을 하나씩 올려 놓았다
건물의 남쪽에 조성된 돌문에는 영친왕이 6세에 썼다는 ‘만세문(萬歲門)’이라 새긴 무지개 모양의 문이 있고,
이곳과 이어진 벽돌담장에는 ‘성수만세(聖壽萬歲)’ 라는 글자문양이 만들어져 있었다
일제 시기에 일본인이 만세문을 떼어다가 충무로에 있는 여염집의 대문으로 사용하였는데 그나마 한국 전쟁의 와중에 일부 파손되었다
그것을 1954년 7월 ‘비전’을 보수하면서 다시 찾아다 세우고
1967년경에 광화문 지하보도 건설과 종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 원래의 위치에서 북동쪽으로 약간 이전하였다
1979년에 전면적으로 다시 고쳐 옛 면모를 갖추게 됐다
'고종황제 즉위 40년 칭경기념비'(사적 171호)가 들어있는 전각이 원래는 명성황후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지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사진이 사진연구가인 정성길(69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에 의해 2016년 10월 26일 공개됐다
변화되는 과정
♤ 도로원표
우리나라 최초의 도로원표는 일제시대인 1914년 4월 세종로 광장 중앙(이순신 장군 동상자리)에 가로90cm, 세로30cm, 높이 70cm로 세워졌다
이후 세종로 도로가 확장됨에 따라 1935년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 앞에 있는「고종즉위 40년 창경기념 비(高宗卽位四十年稱慶記念碑)」옆으로 옮겨 놓았다
원표의 하단에 “원표 진위치는 55미터 거리, 남서 방향으로 69도 13분”이라는 사실이 표시되어 있으므로 도로교통의 편의상 일제강점기에 창경기 념비전 앞으로 이를 옮겨 설치한 것이 아닌가 짐작 할 수 있다
이 도로원표에는 전면에「道路元標」, 동쪽과 서쪽면에 즉 인천 42, 대전 183, 군산 263, 부산 477, 춘천 93, 평양 270, 청진 78? 등으로 돌위에 광화문 네거리를 중심으로 전국 주요 18개 도시와 의 거리가 일본식 방법으로 한자로 음각되어 있다
이 표석에는 거리를 나타내는 km를 일본식 한자 조합어인 '粁(m+1000=km)'으로 표기하였다
粁(킬로미터 천)은 1미터(m, 米)가 1천개(千) 모여서 1km가 된다는 의미다
♤ 새 도로원표 (서울시 중구 태평로1가 68-2)
현재의 도로원표는 서울시에서 1997년 12월 29일 일본식 도로원표를 한국식 도로원표로 바꾸어 세종로 네거리 광화문 파출소 앞 미관광장에 새로 제작 설치하였다
새 도로원표는 광장 가운데다 원형 화강암 돌에 아크형의 중심점 동판을 부착하고,중앙표석을 중심으로 방위표시와 우리 고유의 4방12방위를 상징하는 전통적인 12지신상 과 철골로 축구공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함께 국내와 세계 여러도시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원주 122km, 평양 193km, 몬테비데오 19,606km 등 km로 표시해 놓았다
서울역사박물관 상설전시실 3존 바닥에 설치된 도로원표는 1930년대 제작으로 추정되며, 경성을 중심으로 동경을 비롯한 17개 주요도시명이 새겨져 있다
♤ 도로교통법 제50조 제2항
'서울특별시의 도로원표는 서울특별시장이 설치·관리하며 그 위치는 광화문광장의 중앙으로 한다'
♤ 도시간의 거리는 각 도시의 도로원표를 기준으로 하며, 고속도로의 거리는 나들목(IC)를 기준으로 한다
염상섭의 상 (서울시 종로구 종로 1, 종로1가 1)
처음에는 종묘공원에 설치하였으나 2009년 종묘광장 정비과정에서 삼청공원으로 이전하였다가 문화계와 시민여론에 의거 2014년 4월 교보문고 옆으로 이전하였다
벤치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쉬어가기도 하고 기념사진도 많이 찍는 장소가 되었다
1897년 종로구 체부동에서 출생하여(출생지에 대하여는 체부동, 적선동, 종묘공원 앞 등 여러설이 있는데 종로구 체부동 106-1이 제일 정확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1920년『폐허(廢墟)』창간 동인으로 신문학 운동을 시작한 이래 <표본실의 청개구리>, <삼대(三代)>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우리나라 소설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 말년에 이마 한쪽에 자두만한 큰 혹이 생긴 것으로 유명하다
종양으로 보이긴 하나 건강에 지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가족들이 "의사에게 찾아가 수술이라도 받아 보라"고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병원 갈 필요 없다"며 그냥 넘겼다는 말도 있다
혜정교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3)
광화문 북쪽에서 흘러내린 중학천이 청계천으로 유입되는데 종로 쪽에 놓인 다리를 가리키며, 혜교 (惠橋)라고도 불렀다
이 다리 옆에 우포도청이 있었기 때문에 '포청다리' 라고도 불렀고, 조선시대 육조 관아가 집중되어 있는 육조거리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일명 '관가다리'라고도 불렀다
혜정교는 일제시대 때 이름을 잃어버렸고 해방 이후에는 그 물리적 존재마저 사라졌다
1926년 도로를 개수하면서 석교를 콘크리트교로 개수하고 이름을 '복청교(福淸橋)'라고 하였다
이 다리는 1412년(태종 12) 경상, 전라, 충청도의 역부를 동원하여 개천공사를 할 때 대광통교와 소광통교 등과 함께 만들어진 장식이 없는 평면의 돌다리이다
1986년 탑골공원 정비공사를 하던 중 원각사비 앞에서 발견된 복청교 교명주(橋名柱)를 2015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수습하여 야외에 전시중이다
과거 혜정교 앞에서는 실제로 탐관오리들을 팽형시키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백성들을 괴롭히는 관리들을 혜정교(惠政橋) 위에서 솥을 걸어 두고 그 위에 앉혀 삶아, 오가는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처형함으로써 백성 들의 한을 달래주고 다른 관리들에게는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삶지는 않았다
다만 처형이후부터는 죄인은 죽은 사람과 같은 취급을 받아 투명인간을 취급받았다고 하니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다
혜정교에서 팽아의 형벌과 같이 죄인을 벌하는 공간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때때로 죄인을 사면하는 곳이도 했다
과거 임금들이 태묘나 왕릉에 제사를 갔다가 환어하는 길에 혜정교에 들러 가벼운 죄인들을 사면했다고 한다
오늘날로 따지면 (광복절)특사들과 같은 개념이다
혜정교가 어디인지는 남아 있는 사진이 없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설(說)은 현 광화문 교보문고 옆과, 광화문우체국 앞과, 동아일보 앞이 있는데, 18세기 서울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에 혜교(惠橋)라고 표시돼 있는 지점과 우포청(우 포도청) 앞에 있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혜정교의 위치는 지금 표석이 세워져 있는 교보빌딩 쪽이 아니라 길 건너 광화문우체국 옆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중학천이 청계천과 합류되기 전 지점에 놓인 다리'라는 구전(口傳) 및 '다리 옆에 우포청이 있었기에 포청다리라고도 불렀다'는 구전과도 부합된다
중학천
중학천은 백악산 삼청동 계곡에서 발원하여 중학동을 거쳐 청계천으로 유입되는 하천으로, 삼청동의 동쪽을 흐른다 하여 '삼청동천'으로도 불렸다
중학천은 경복궁의 동십자각을 오른쪽으로 돌아 청계천으로 합류했다
이 하천은 오래전(1965년) 복개된 까닭에 지금은 혜정교의 흔적을 찾을 수없다
2003년 청계천 복원사업 당시 중학천은 포함되지 않아 지금도 복개된 채로 있다
도심의 역사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종로구청에서 청계광장에 이르는 340m의 옛 물길을 2009년 복원하였다
박인환 집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1, 세종로 116)
1948년 결혼 후 원서동 시댁에서 밤마다 친정이 그리워 우는 아내를 위해 처가살이를 한 아내 이정숙의 친정집으로 1956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하던 집터다
이곳에서 큰아들 세형과 딸 세화을 얻었다
♤ 원서동 집터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134-8)
1926년 강원 인제에서 태어난 박인환이 사업차 상경한 아버지를 따라와 살았던 곳이다
박인환의 집에 살았다는 사람이 남긴 글이다
"이 집안에 방이 7개나 있었어요. 그 중에는 비원이 훤히 내다 보이는 방도 있고요. 이 건물이 80년 됐어요. 제가 건축대장 떼보니 1930년대 지은 것으로 나와 있더라고요. 박 시인이 있던 방은 왼쪽 끝방이라 비원이 안 보였을 거예요"
♤ 박인환(朴寅煥)
1926. 8.15 강원도 인제에서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6년 국제신보에 '거리'를 발표하면서 활동시작
1956. 3.17일을 유난히 좋아했던 시인 이상의 기일로 알고(실재로는 4월17일 이었다 함) 오후 부터 지인들과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하다 1956. 3.20 오후 9시경 심장마비로 사망(31살)
첫댓글 예전에는 종로거리도 많이 걸었는데 요즘은 종로 가본지 참 오래된것 같습니다.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