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룬(Cameroon)
- 중앙아프리카 -
▶ 개관 : 위치 - 아프리카 중서부 대서양연안
인구 - 약 2,864만명 세계 53위[23,8,21]
GDP - 약 486억2,500만 달러 세계 93위
종족 - 카메룬고원족(31%), 적도반투족(19%), 키르디족
수도 - 야운데 (한국과 -8시간 차)
면적 - 약 47만㎢ (한반도의 2.1 배)
언어 - 프랑스, 영어
종교 - 그리스도교(40%), 토착종교(40%), 이슬람교
화폐 - 세파프랑 (XAF)
정부 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 다당제&단원제 (대통령 / 총리)
국가번호 - 237
관련 - 날씨 정보
▶ 약사 : 카메룬 최초의 주민은 남부의 삼림지대에 지금까지 살고 있는 피그미족으로
추정된다. 후에 적도 아프리카로부터 카메룬에 침입하여 남부에 정착했다가
나중에 서부로 터전을 옮긴 최초의 집단들 가운데 반투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
었고, 그들의 뒤를 이어 풀라니족 이슬람교도들이 11세기와 19세기에 나이저
강 분지로부터 들어와 북부에 정착했다.
카메룬의 해안에 발을 내디딘 최초의 유럽인은 1470년대초에 들어온 포르투갈
인들이었다. 1520년 무렵에는 포르투갈인이 사탕수수 농장들을 세우고, 노예
무역을 했으나 1600년대초 노예무역의 지배권을 네덜란드인에게 빼앗겼다.
1807년 영국은 노예무역의 불법화를 선포하고, 1827년에는 스페인으로부터
페르난도포 섬을 기지로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해안 수역을 경비하기
시작했다.
노예무역은 1840년대까지 단계적으로 감소되다가 없어졌다. 그후 영국인들은
보호령의 설치에 뜻을 두고 본토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884년초에 독일의
대표 구스타프 나흐티갈이 영국 대신 독일과 조약을 체결하도록 현지의 추장들
을 설득했으며, 1884년말에는 독일인들이 카메룬으로 보호령을 확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합동작전으로 독일인들이 스페인령
기니(적도 기니)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1919년 카메룬은 런던 선언에 의
해 프랑스 관할구와 영국 관할구로 나누어졌다. 국제연맹은 1922년 프랑스와
영국에 두 관할구의 통치를 위임했다. 1946년 그 위임통치는 국제연합(UN)의
신탁통치로 바뀌었다. 1960년 프랑스 신탁통치령은 독립공화국이 되어 UN에
가입했다.
1년 후 주민투표 결과 영국 신탁통치령의 남반부는 신생 카메룬 연방공화국에
합병되고 북반부는 나이지리아에 합병되었다. 1972년 중앙집권제 정부가 수립
되었다. 독립 당시부터 카메룬의 대통령을 지낸 아마두 아히조가 1982년에
사임하고 총리였던 폴 비야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비야는 1984년과 1988
년에 재선되었다.
▶ 경제 : 카메룬은 주로 농업에 기반을 둔 개발도상국의 시장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1960년에 독립한 이래 꾸준한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며, 1970년대말부터
유전 개발로 경제성장이 더욱 촉진되었다. 국민총생산(GNP)은 인구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1인당 GNP는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높다.
카메룬은 해외무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많은 공업용 원료와 제조품 대부분을
외국에서 수입한다. 수출품은 원유·커피·카카오·목재·알루미늄 등이다. 주요 무
역상대국은 프랑스·네덜란드·미국·독일 등이다.
▶ 대한 관계 : 한국과 카메룬은 1961년 8월 외교관계 수립, 1969년 1월 상주공관을 개
설했다. 그동안 한국은 카메룬에 의약품·의류·차량 등을 무상으로 원조하고 의
료단을 파견했으며, 기술연수생을 초청·교육하기도 했다.
북한과는 1972년 3월에 수교하고 같은 해 8월 상주공관을 개설했다. 한때 북한
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던 이 나라는 북한 요원들의 철수령을 1차례 내렸
으며, 그후 다시 친선협력협정을 체결했으나 관계 회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여행 정보 : 여행경보-여행유의 특별여행경보 발령: (2014.6.9) 최북부
전압 : 220/ 230 / 240V 콘센트 2구 220V 콘센트 3구
8:46
세계테마기행 -카메룬 1부 사바나의 아침 - 길이: 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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