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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1653
5월29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연중 제8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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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내가 목자로서 어찌 사랑하는 조선의 양떼를 버릴 수 있으리오?>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에 맞춰 시복되신 124위 순교 복자들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이 한 분 계십니다. 중국 소주(蘇州)출신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1752~1801)입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조선천주교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인물인데,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해외 선교사이기도 합니다. 당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님께서는 당시 북경 교구 내에서 외모가 조선인과 흡사한 사제를 찾았는데, 바로 주문모 신부님이 당첨되셨답니다. 아직 천주교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정조 즉위 18년, 1794년 조선 초기 천주교회 신자들의 집회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제 우리도 외국인 신부를 모셔 와서 포교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신자들이 크게 동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황이라는 사람을 북경으로 파견하였는데, 북경 천주당(天主堂)에 머물고 계시던 주문모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황은 신부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는데, 유심히 사연을 전해들은 신부님께서는 흔쾌히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42세 때인 1794년 북경을 떠나 의주 외곽에 대기하고 있던 조선인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안내로 마부로 변복을 한 후, 약 일년여 만에 드디어 조선 잠입에 성공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지칠 줄 모르는 사목적 열정과 탁월한 다재다능함, 놀라운 덕행으로 조선교회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당시 신자들은 신부님에 대해 큰 존경을 표하며 한 목소리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께서는 지칠 줄 모르셨습니다. 먹고 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사목에 헌신하셨습니다. 밤에는 전국을 떠돌아다니시며 성사(聖事)를 집전하셨습니다. 낮에는 조용히 번역이나 집필 작업에 전념하셨습니다. 신부님은 틈만나면 단식과 고행을 거듭하셨습니다. 조선 교회에 끼친 주문모 신부님의 영향력은 수치상으로만 봐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사목활동을 시작하신 1795년 부터 순교하신 1801년까지, 6년여 동안, 수차례에 걸쳐 삼천리 방방곡곡을 순회하셨습니다. 신부님 입국 당시 4천 명이던 신자가 6년여 만에 두 배 이상인 만여 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거듭되는 박해의 위험 속에서도 오늘날로 치면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혹은 ‘가톨릭 교리 연구회’ 격인 ‘명도회’를 창립하여 신자들 스스로 교회를 이끌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초대 남성 회장으로는 정약종을, 여회장에는 강완숙을 임명하여 교우들 신앙의 활성화를 도모했습니다. 천주교에 박해를 가하지 않았던 정조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은 급격히 변화되었습니다. 정조에 대해 사무칠 정도의 원한을 품고 있던 정순왕후가 순조에 대한 수렴청정을 시작했습니다.
천주교에 호의적이었던 인사들이 하나 하나 제거되었습니다. 결국 순조 1년(1801) 정순왕후는 하교를 내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 유명한 신유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며, 동시에 인륜을 위협하는 금수(禽獸)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
자연스레 주문모 신부님의 목숨도 경각을 다투게 되었습니다. 사실 신부님께서는 착한 목자로서 조선 교회뿐만 아니라 조선과 조선인들을 무척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주문모 신부님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일단 고국으로 귀국을 결심하였습니다. 우여곡절끝에 드디어 국경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제 압록강만 건너면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이요, 죽음도 피할 수 있는 고향으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님은 국경을 넘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 번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내가 목자로서 어찌 사랑하는 조선의 양떼를 버리고 강을 건널 수 있으랴?”라고 외치며,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한양으로 되돌립니다. 한양으로 돌아온 그는 자기 발로 관아로 나아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바로 당신들이 그리도 애타게 찾아헤매던 그 주문모 신부요!”
자신으로 인해 무고한 신자들이 더 큰 고통을 당할까봐 스스로 순교, 다시 말해서 십자가형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의금부 이송된 주문모 신부님은 4월 19일, 50세의 일기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고 순교하셨습니다.
군문효수형이란 조선시대 사형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나라의 근간을 뒤흔든 죄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죄인에게 내렸던 중한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사형수를 백성들 앞에 세운 후, 죄명과 판결문을 낭독한 다음, 양쪽 귀에 화살촉을 꿰었습니다. 그리고 사형수의 웃옷을 벗긴 다음 목을 베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어진 목은 다른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군문에 높이 매달아 놓는 그런 잔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순교 직전 이런 말씀을 남기셨답니다.
“살아 있어서 도움이 안 되니 죽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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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형제님, 무슨 일이십니까?>
언젠가 트럭을 몰고 뭔가 운반하다말고, 복장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본당에 미사를 도와드리러 가게 되었습니다. 겨우 정각에 도착했기에 저는 뛰다시피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허겁지겁 제대 왼편에 있는 제의방 문을 확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은 제의방이 아니라 바로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었습니다. 바람이 확 들어오면서 신자들의 눈길이 제게로 확 쏠리더군요.
당황한 저는 한동안 안절부절 하다가 겨우 제의방문을 제대로 찾았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살았구나’ 하며 문을 여는 순간, 한 신사분이 제 팔을 꽉 잡으시더군요. 그리고 제 아래 위를 한번 훑어보시더니 이렇게 경고를 주셨습니다.
“형제님, 무슨 일이십니까? 거기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형제님’이란 호칭, 그때 들어 보니 참으로 괜찮은 호칭이었습니다. ‘아저씨’, ‘어이’, ‘저기요’ ‘형씨’ 이런 칭호보다 얼마나 예의바르고 정감이 갑니까?
‘형제님’, ‘자매님’ 아마도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호칭일 것입니다. 약간 어색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합니다. 이런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맞는 것인지도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형님이면 형님, 아우님이면 아우님이지 형제님이 뭔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자주 사용하다 보니 이젠 일반화되었고 자연스럽기까지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왜 서로를 향해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를까요? 이유가 있더군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으로 편입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식탁에 앉는 영적 가족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례 받은 사람들은 영적인 형제관계를 맺게 됩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된 우리는 동일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말로만, 또 호칭으로만 형제자매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로서의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의 살아있는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바라시는 바는 모든 장벽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한 형제자매처럼 지내는 것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장벽, 인종과 인종 사이의 장벽, 국가와 국가 사이의 장벽, 그 모든 장벽들이 허물어지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 부모 아래서 태어난 자녀들처럼 화목하게, 아기자기하게 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는 간구는 바로 이런 배경을 바탕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선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수도생활을 계속할수록 ‘백 배의 갚음을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예수님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종하기 위해 가족을 떠나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본래 가족과의 유대도 훨씬 강하게 엮어주셨는가 하면 더 많은 영적가족들을 선물로 주시더군요.
종신서원도 했겠다, 서품도 받았겠다, 이젠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한번 품에 안아보는 것은 물 건너 갔구나’ 생각했었는데, 수백 수천 명의 또 다른 아들들이 생겨났습니다.
부모님을, 그리고 형제를 떠나오게 되었으니, 이젠 정말 허전하겠구나, 쓸쓸하겠구나,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따뜻하고 인정 많은 형제들이 다가왔습니다. 훌륭하고 덕망 높은 영적 스승님들, 영적 부모님들이 저희를 보살펴주시더군요.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해 포기해야 할 것도 많지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 포기에 따른 상실감, 인간적인 아픔도 많겠지만, 그로 인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급은 그보다 훨씬 클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노력이나 투자는 티끌보다 미미하지만 하느님의 보상은 태산보다 더 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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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애정과 사랑의 차이>
노이나와 낟의 결혼식 청첩장을 받아본 신랑 낟의 어머니.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는데 어떻게 되어가니?”
“준비는 다 되었고, 마지막 점검 중이에요.”
낟의 어머니는 며느리 노이나와 단 둘이 설거지를 한다.
“너 그거 아니? 낟이 어렸을 때 정말 말을 안 들었어. 세월 참 빠르지... ”
“요즘도 말을 안 들어요.”
낟의 어머니는 배불러서 괜찮다는 낟에게 떠날 때 또 비닐봉지에 과일과 음료수를 넣어준다. 노이나가 대신 받아준다.
운전하고 있는 낟을 보며
“자기 어렸을 때 ‘노이나’ 먹다가 씨가 목에 걸린 적이 있었다며?”
“누가 그래?”
그러자 노이나는 신랑의 어머니가 준 노트를 보여준다. 운전은 노이나가 하고 낟은 어머니의 노트를 조용히 읽는다.
“1987년 3월 19일,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 몸무게 평균 이하(괜찮아, 내가 있잖아.) 애가 도대체 먹지를 않는다. 어떡하지? 1993년 9월 4일,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우유 한 컵을 다 마셨다. 1994년 3월 19일, 낟이 초콜릿을 좋아해서 초콜릿으로 생일 케이크를 만들고 있다. 1988년 11월 22일, 아들이 캠핑을 간다. 밤에 배가 고플까 걱정이 된다. 2000년 8월 6일, 아들이 농구 시합에서 이겼다. 대견해. 역시 내 아들이야! 우리 아들은 수박, 오렌지, 망고, 바나나를 좋아하지만 ‘노이나’를 싫어한다(씨가 목에 걸린 적이 있었다). 롱빈이 들어가지 않은 치킨바질을 좋아한다. 내 아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생선 머리를 좋아한다.”
‘엄마는 꼬리가 좋다고 하셨는데...’
아들은 어머니가 준 비닐봉투를 다시 보며 눈물을 흘린다.
노이나는 낟의 어머니가 이 노트를 주고 자신을 안아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노이나, 내 아들 잘 부탁해.”
마지막 장에 어머니와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있고 이렇게 쓰여 있다.
“너를 보살피는 것이 내 생애 최고의 행복이었단다.”
[출처: ‘큰 보살핌은 작은 한 입에서’, 태국광고, 유튜브]
예전에 이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기에 떠나신다는 그 말 나는 믿을 수 없어, 사랑한다면 왜 떠나가야 해, 그 말 나는 믿을 수 없어...”
사랑한다면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들을 보내지 못해서 자신의 아들을 빼앗아간 것처럼 며느리를 구박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보낼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애정입니다.
애정과 사랑은 반대말에 가깝습니다. 애정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상대로 나를 채우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상대가 떠나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사랑은 상대의 행복을 위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언제든 보내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금대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금대접으로 여깁니다. 금대접은 식탁을 장식할 수 있는 귀중한 것입니다. 그 그릇에 음식을 담느라고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 금대접이 사람이라면 자신과 같은 금대접이 옆에 있다가 사라지더라도 다른 곳에서 더 빛나겠거니 생각하며 한 편으론 기뻐합니다. 자신은 여전히 금대접이고 떠난 금대접은 또한 다른 곳에서 금대접으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질그릇이라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담기는 음식이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기 때문에 절대로 자신에게 담겨있는 것을 남에게 빼앗기기 싫어합니다.
이것이 애정입니다. 애정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용하는 감정입니다.
사랑도 아닌 애정 때문에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거나 주님을 따를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모든 애정을 끊어야만 합니다.
만약 순교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인이 걱정되고 아이들이 걱정되고 어머니가 마음아파 하니 안 되겠다고 말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상태로는 아직도 내 행복이 애정에 의해 좌지우지되기에 주님이 가신 길을 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애정이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합니다. 애정은 묶이는 것이고 사랑은 독립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버리지 않고는 받을 수 없습니다. 떠나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관계는 묶이지 않은 독립된 한 사람과 또한 독립된 한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애정을 사용하지 않기에 애정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목숨을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옥으로 간다고 떠나면 어쩔 수 없어 하십니다. 그렇다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초대하십니다. 낟이 자신을 며느리에게 맡겨버리는 어머니가 원망스러웠을까요? 자신을 독립시켜주는 어머니의 사랑에 더 감사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지금 놓아줄 수 없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애정이란 명목으로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애정을 강요하지 않을 뿐더러 애정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때 발휘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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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오늘은 지난 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교황 프란치스코 주례로 열린 시복식을 통해 복자의 반열에 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인 124위 순교 복자들의 기념일이다. 이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들로, 신해박해(1791),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 때 순교한 부들 가운데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순교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각 지역에서 현양되던 분들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1997년 추계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그 동안 각 교구별로 이루어지던 이들의 시복시성을 통합 추진하기로 하고, 2001년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더욱 본격적인 준비를 해 왔다.
124위 복자 기념일 5월29일은 한국교회의 제안을 사도좌가 허락한 것이다. 기념일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천상 탄일로 지정되지만 사목적 이유 등으로 다른 적절한 날로 옮길 수 있다.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의 순교일은 12월8일이지만, 이 날은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다. 심사숙고한 끝에 윤지충은 전주교구 순교자이므로 전주교구의 순교자들이 많이 순교한 5월29일로 정한 것이다.(매일미사 2015년 5월29일 전문)
복음: 요한 12,24-26: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모든 씨앗은 땅에 뿌려져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려야, 즉 죽는 것과 같이 썩어야 새로운 생명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도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땅속에서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께서도 그러셨다. 그분은 혼자이셨고 영광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 가운 한 사람이셨다. 그러나 십자가의 수난을 겪으면서 영광을 받으셨고, 그 열매인 부활로 모든 이가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를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 자신을 버리고, 자기를 버림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올바른 사랑을 추구하고 옳지 못한 사랑은 피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속에서 하느님을 거절하게 되면 자기 자신에게서도 떠나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고 하셨다.
우리 순교자들은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갔다. 나 자신의 원의 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했으며, 신앙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욕심을 모두 거부하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만을 고집하였던 분들이다. 박해의 시간을 살면서 한 순간도 자신의 욕망보다는 하느님의 자녀로, 신앙으로 순교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매 순간 자기 자신과 싸움을 이겨낸 결과였다.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나 자신과 싸움을 어떻게 해 나가고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우리가 그리스도를 올바로 섬길 수 있으려면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1요한 2,6 참조) 자선을 할 때에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사랑하기 위한 행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마태 6,3 참조) 이러한 섬김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사람이며, 마땅히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을 들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구원체험이며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26절) 순교자들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섬김을 실천하며 그분만을 올바로 섬겼던 분들이었다. 우리도 그분들과 같은 삶을 실천하며 그 영광에 참여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오늘 기념하는 순교자들의 영성을 우리도 가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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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묵상
<(1)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한국 천주교회는 역사가 짧지만 많은 순교자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땅에 묻음으로써, 또 다른 생명을 더욱 많이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새로운 가치관을 갈망하던 그들이 복음을 접하면서 매료된 것은 인간 존중 사상이었습니다. 당시는 신분제 사회였고, 여자와 어린이에게는 인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선조들은 참된 삶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세상은 몹시 바쁘기에 남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습니다. 자신만, 내 가족만, 내가 속한 집단만을 위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은 힘 있는 이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옳은 일을 하다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가르치십니다. 눈에 보이는 가치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더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지요.
오늘 기념하는 윤지충 성인을 비롯한 순교자들은 이런 삶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이웃을 위한 봉사로 승화시켰으며 하느님만을 세상 만물의 주인으로 섬긴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에서는 바보 취급을 받았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하면서 나를 내어 주고, 나를 희생하는 방법을 익힘으로써 사랑이 무엇보다도 고귀한 가치임을 드러내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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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중 제8주간 화요일>
어제 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이 가진 것을 다 포기하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이를 본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고백하지요.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박해가 따르겠지만, 그와 달리 형제자매와 토지의 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실현되었지요.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처참한 박해와 함께 집과 가족마저 잃었습니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에서 새로운 영적 가족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었지요. 새로운 삶도 얻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주어지는 시련과 희생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난날을 곰곰이 돌이켜보면, 그에 못지않게 새롭게 얻는 것도, 축복도 많았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따름으로써 잃는 것보다 더 큰 보상을, 그와 다른 차원의 보상을, 이 현세 생활에서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입니다. 덧붙여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님의 판단 기준과 우리 판단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선입관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모든 사물을 바로 보는 식별력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모든 사건 안에 담긴 주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처장/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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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밤송이 김기현 요한 신부님]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지난 주 어느 순간부터 ‘내가 신자들의 심부름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부님, 면사무소 가실 때 우리 것도 좀 받아다 줘요.. 신부님이 다른 봉사자들한테 연락 해요... 들어오는 길에 그것 좀 가져오세요... 나가시면 거기 좀 갖다 오시죠...’
이제는 제가 배달하고, 일하고, 챙기고, 준비해 주는 것이 당연해진 듯한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이 힘들다거나 내 일이 아니다.. 하는 건 아니지만, 그 일 말고도 할 일이 너무 많아 조금 지칩니다.
신자들이 펜션 청소하고 있으면 같이 청소해야지, 쓰레기 분리수거 해야지, 망가진 물건이나 개선해야 할 것들 있으면 메모해 두었다가 필요한 재료들 사다가 손봐야지, 내 힘으로 안 되면 형제님들께 부탁해서 일해야지, 본당 농사 있으면 나가서 일해야지, 본당 행사 기획하고 담당자 정하고 사소한 일들까지 배정해 줘야지, 강론 준비해야지, 신자 재교육 준비 해야지, 성경공부 준비해야지, 조경이나 다른 아이디어가 있으면 구상하고 실행에 옮겨야지, 본당만 아니라 공소도 자리 잡을 때까지 관심을 가져야지, 가정방문 해야지.. 하다 보면 ‘참 바쁘다, 힘들다, 지친다...’ 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어제도 쉬지 못하고 신자 재교육 준비를 하면서 ‘몇 명 나오지도 않을 교육 준비는 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연쇄적으로 든 생각이 ‘이거는 해서 뭐하나.. 저거는 해서 뭐하나... 관심도 없고 참여도 없는데..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을 내가 다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면서 불평과 불만의 목소리들이 막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일주일치 말씀 문자를 보내고 있는데, 그 중에 이런 말씀이 제 마음에 깊이 파고 들었습니다.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잘라버리려는 주인에게 포도 재배인이 ‘거름을 주고 가꾸어 보겠습니다.’ 하는 내용 가운데 있는 말씀입니다. 제 입에서 나와야 하는 말을 그분께서 담아주신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 공동체가 자립하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 거름을 줘야 한다면 그 일을 성실히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마음에 다시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오늘 동기 신부가 얘기해 주는 복음 말씀을 들으면서 최근에 느끼지 못했던 저의 교만함, 과시욕,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 등을 살짝 깨달아 알게 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복음에 보면 제자들이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하자, 예수님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하시는데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내가 상을 받기 위해 이 일들을 하고 있나.. 어느 순간부터 내가 신자들에게 뭔가 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뭔가를 했다.. 내가 뭔가를 줬다.. 하는 생각도 의식하지 않고 잊어버려야 상대방도 부담을 느끼지 않고, 나도 보답을 바라거나 기대를 하지 않을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예비자 교리를 끝냈을 때 ‘신부님 덕분에 신자들 댁에서 식사도 하고 감사했습니다...’ 하는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이 없자 마음속으로 실망했습니다.
또 성지 순례를 가는 차에서 회장님이 의례히 하는 말 있잖아요.‘신부님 덕분에 성지 순례도 가고...’ 하는 말이 없으니까, 내가 버스도 싼 거로 알아보고 기획하고 준비했는데 알아주지 않는 구나.. 하는 서운함이 생겼습니다. 그런 걸 보면서 ‘내가 꽤 의식하고 있구나.. 해주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들 중에 ‘내가 너한테 밥을 얼마나 샀는데.. 해준 게 얼만데..’ 하는 친구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을 때 느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뭔가를 해주었다고 해도 그 순간 잊어버려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제가 하는 일들과 마음들은 그러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내가 뭔가 해 주고 있다...’는 겸손하지 못한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내려놓아야겠다.. 비워야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야겠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내가 지금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는 겸손함으로 일하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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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따름과 보상>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28-31)
여기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앞에 있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른 저희는 바늘귀로 빠져나갈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서 한 말입니다. 이 말은, 자신들이 한 일을 자랑하거나 생색내는 말이 아니라, 자신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해서 한 말로 생각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7-20)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르 2,14)
(직업을 버리고 가정을 떠나서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인생의 진로를 완전히 바꾼 것이고, 사실상 모든 것을 버린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구원과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세속의 부귀영화를 바라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들의 희망은, 사실은 처음에는 많이 막연하고 어렴풋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기도 했고(마르 9,34),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청하기도 했습니다.(마르 10,37)
예수님 말씀에서 “나 때문에”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는 이유는 당신에 대한 믿음 때문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고, “복음 때문에”라는 말씀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 믿음과 희망 없이 그저 속세가 싫어서, 속세를 떠날 목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진정한 ‘버림’도 아니고, 진정한 ‘따름’도 아닙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이라는 말씀은, 박해와 고난을 겪을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7-58)
(그렇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박해와 고난만 겪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힘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혹시 힘든 일을 만나더라도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힘들 때는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힘들지 않을 때에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도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현실도피처가 아닙니다.) 힘들든지 힘들지 않든지 간에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세속의 재미나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영적인 기쁨’은 신앙생활을 꾸준히 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라는 말씀은, 뜻을 생각하면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씀 뒤로 옮기는 것이 적절합니다. 모든 것을 백 배나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현세에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생각할 수는 없고, 내세에서 받게 될 ‘풍성한 은총’에 대한 약속이라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그런 것들을 백 배나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은총, 영광, 행복 등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이 말씀을 ‘교회’ 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도, 이 말씀이 내세에서 받게 되는 은총에 대한 약속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습니다. 지상의 교회 공동체는 내세의 교회 공동체를 미리 보여주고, 미리 체험하게 해 주는 ‘중간 경유지’일 뿐이고, 우리의 진정한 종착점은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은, 단순히 영원히 살게 된다는 뜻만 있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모든 것을, 즉 구원, 생명, 평화, 안식, 행복, 기쁨 등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그것들을 모두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버려서 영원한 것들을 얻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지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지상에서의 처지와 내세에서의 처지가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런데’라는 접속사는 좀 이상하고, ‘그처럼’, 또는 ‘그렇게’로 바꾸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말씀은, 지금 높은 자리에 있고, 부유하고, 잘나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는 회개하라는 경고 말씀이 되고, 동시에 지금 가난하고,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격려 말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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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기정 안드레아 신부님]
<영적인 보화와 상급 - 참 신앙인의 선물>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과 축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추종과 보상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 유한한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복음적 가치의 소중함을 깨달음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상급과 선물을 받아 누리는 참된 신앙의 삶을 살기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했을 때 주님 때문에 세상 것을 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상급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님 때문에 세상 것을 희생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것들 때문에 주님을 떠나고 멀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사라져 없어질 유한한 세상 것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일 때 아무리 그 희생이 크고 귀한 것이라 하더라도 허망하고 보상을 바랄길이 없는 무의미한 희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영원하신 하느님 때문에 신앙 때문에 행한 우리의 모든 수고와 희생은 아무리 그 수고와 희생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희생이 헛되지 않는 의미 있는 희생일 수 있을 것입니다.
보여 지는 현재의 행복은 완전하고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영속적이고 시들지 않는 행복만이 참된 행복입니다. 영원하신 주님만이 우리에게 시들지 않는 참된 행복을 주실 수 있는 우리 삶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주인으로 섬길 때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 없고 불안하고 불확실합니다. 반면 주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실 때에 현재의 불행은 불행이 아니라 미래의 보증이고 선물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이 원망스러운 어렵고 힘든 상황과 처지에 놓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나름대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주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인가?"라는 원망이 나오는 시련 속에서의 삶 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축복과 선물을 넘치도록 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우리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욕심으로 말미암아 축복과 선물을 축복으로 느끼지 못할 따름입니다.
보이는 세상의 좋은 것만을 많이 가지고 누리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놓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헌신하고 목숨을 거는 삶입니까? 과연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우리 삶을 바치고 있습니까?
주님만이 우리의 소중한 것을 버리고 포기해도 아깝지 않을 유일한 헌신의 대상임을 명심합시다. 매일 주님 때문에 신앙 때문에 우리의 것을 희생함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상급과 보화를 우리의 것으로 받아 누리려는 결심을 새롭게 하면서 오늘도 우리 삶의 진정한 주인이신 주님과 함께 보이지 않는 영적보화와 상급을 선물로서 받아 누리는 신앙 안에서의 기쁜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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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형수 베드로 신부님]
<버리고 떠남>
14세기의 독일 신비주의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버리고 떠남’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에크하르트는 단순히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버리고 떠나는 목적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영혼 안에 불어넣어 준 고귀한 영혼의 중심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에 마음을 쓴다면 거기에 집착한 나머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우리 영혼을 가리게 됩니다. 마치 유리의 먼지를 닦지 않아서 그 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늘 우리 영혼의 유리를 닦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당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살아 숨쉬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서 2장 20절에서 ‘나는 살아 있지만 살아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십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의미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때 버리고 떠남은 ‘가난’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가난을 물질적인 가난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볼 때 복음의 가난은 내적이며 영적인 것에 바탕을 둔 가난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어떤 것도 원하지 않고, 어떤 것도 알지 않고, 어떤 것도 갖지 않는 사람이 바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이기적인 의지의 지배와 대단한 지식으로 가득차서 우쭐대는 교만, 그리고 가짐의 방식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있는 상태를 가난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러한 가난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가난은 자신을 비움으로써 자기 자신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주도권을 온전히 넘겨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물질적인 소유를 없애는 가난의 의미를 넘어서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난의 상태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비로소 예수를 온전히 따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가난의 의미에서 볼 때,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치 하느님께서 정말 그런 분이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절대시 하는 것도 영적으로 가난하지 못하고 나의 하느님 상에 집착하고 매여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 성화에서 보듯이 하느님은 결코 옥좌에 앉아서 긴 수염을 기른 근엄한 얼굴로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하느님은 온갖 방탕한 생활을 하고 온 작은 아들을 맨발로 달려나와 끌어안아 주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런 하느님을 오해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너무 우리 죄에 집착한 나머지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자비를 과신한 나머지 뉘우침과 회개없이 배짱으로 일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차피 용서해 주실 건데 죽기 전에만 뉘우치면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같은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약속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표면적으로 용서받는 일회적인 고해성사로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의 존재 전체와 관계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단 한 번에 그 사람과 끈끈한 유대를 맺을 수 없듯이,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우리 생애 내내 그분의 자비를 받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이루어주는 그분의 은총과 자비는 무한하기 때문에, 이 은총과 자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유한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영혼을 투명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버리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이 버리는 가난은 현세에서 다른 이들이 추구하는 삶과는 다른 삶의 방식 때문에 ‘박해’를 동반합니다. 이 박해는 예수께서 겪으셨듯이 사람들의 몰이해와 오해에 근거합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신앙이 진리라면, 이러한 박해는 일시적일 것이며 진리를 드러내는 우리를 통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리인 생명을 추구하는데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면 죽은 이후의 영원한 삶은 불가능할뿐더러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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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뭘 포기 했나?>
사제로 살아가는 저를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 있어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행한 모든 교만을 전능하신 하느님과 신자 분들께 고합니다. 사제된 지 10년 되었습니다. 사제 생활하는 동안 예수님은 자꾸만 작아지시고 저는 더욱 커져만 갑니다. 고해 실에서 목소리가 점점 커져갑니다. 존경했던 선배 신부님들이 지금은 비난의 대상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사목의 대상이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로 옮겨갑니다. 초대받는 자리에 으레 가장 좋은 가운데 자리에 먼저 앉아서 받습니다. 어르신들이 무릎을 꿇고 술을 주셔도 이제는 앉아서 받습니다.
전엔 예수님을 뵈러 가정방문을 갔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되어 가정방문을 갑니다. 칭찬과 감사, 격려의 말보다 불평과 원망, 지시의 말이 많이 나옵니다. 타인의 말을 듣는 시간보다 말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집니다. 강론도 자꾸 길어집니다. 교우들과의 회합 때 무조건 나의 판단이 옳다고 우길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 줄 알았는데 안 해도 되는 이유가 자꾸 늘어납니다. 이 밖의 알아내지 못한 교만에 대해서도 뉘우치오니 용서하여 주소서. 아멘.’
다음 카페 ‘여기 있나이다. 주님’ 조병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글 중에서 복음에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사제직을 통해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저는 집과 가정과 부모님과 자유의지를 포함한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버리겠다고 했지만,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좋은 집(사제관)이 있고, 함께 살아가는 가정 공동체가 있습니다.
저의 자유의지를 포기하겠다고 했는데, 여전히 저의 삶이 있고, 자유가 있고,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정말 ‘버리면 다 많이 받는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이곳 중앙 성당 신자 분들이 저의 부모님이요, 형제요, 자녀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저를 아들로 생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이들을 자녀로 청년들을 동생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내가 버린 것을 것의 없지만, 받은 것은 너무 많습니다. 박해는커녕, 너무 풍족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많이 받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도 않는 박해에 어려움에 자주 머물게 됩니다. 이미 풍족하게 주어졌음에도, 버렸다는 이유로 포기했다는 이유로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이에 대해 감사하지 못합니다.
이런 저의 모습은 분명 첫째입니다. 그러나 이 첫째의 모습이 언제까지 첫째일지 반성해 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포기했다는 것이 진정 여러분의 삶 안에서 마음 안에서 포기되었습니까? 여전히 자신 안에 있고, 어쩌면 더욱 많이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는 않습니까?
저처럼, 있지도 않는 박해와 어려움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는 그 안에 갇혀 힘들다고 괴롭다며 하느님께, 가족에게, 이웃들에게 외치는 것은 아닐까요? 꼴찌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정작 첫째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모두는 이미 하느님께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10을 포기했다고 하지만, 그 나머지 90은 받았습니다. 아니, 포기한 그 10까지도 열 배, 백 배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 주님을 따름에 있어... 신양생활을 함에 있어 기꺼이 포기한 그것까지도 주님께서는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늘 감사하고 또 감사드리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첫째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비록 꼴찌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첫째가 되는 길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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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버림의 성자”라고 말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계십니다. 어느 날, 프린치스코 성인이 수도원에 자신이 없을 때, 밥을 달라는 도둑이 들어왔는데... 수도자들이 혼내서 쫓아버렸습니다. 성인이 돌아와 그 이야기를 듣고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인데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쫓아 보낼 수 있느냐? 먹을 것을 가지고 산속으로 도둑을 찾아가 사과하고 주고 오라.”고 음식을 싸서 보냅니다. 그랬더니 며칠 후에 도둑들이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제자가 되겠다.”고 따라 나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말하였습니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내용인 마태오 복음 19장 27절에 보면, “저희는...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는 사람은... 잠깐 세상의 재물을 버리지만, 서로의 보살핌 속에서 더욱 풍성한 삶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을 보화로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대하여...” 자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제자들은 계속해서 “누가 크냐?” “누가 첫째냐?”면서 서로 다투었습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공로를 내세우면서 누가 크냐? 누가 첫째냐? 하면서, 다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는 주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모두가 똑같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된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는 구원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총임을 확신하게 밝혀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마태오 복음 20장에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에서 1시간 일한 사람이나 온 종일 일한 사람이나 품삯을 똑같이 주었답니다. 그 이유가 일꾼들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주인의 베푸신 은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똑같이 크고, 모두가 똑같이 첫째가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말합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항상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굳게 믿고 끝까지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의 때를 기다리며 기쁘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고운님들께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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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할아버지가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 개구리가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제게 키스를 해주면 저는 아름다운 공주로 변할 거예요.”
이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개구리가 말을 하는 것에 깜짝 놀랐고, 더군다나 키스를 해주면 아름다운 공주로 변한다는 말에 더욱 더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이 할아버지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키스를 해주지 않고 그냥 자신의 주머니 속에 넣었습니다.
개구리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죠.
“키스를 해주면 예쁜 공주와 살 수 있는데, 왜 그냥 주머니 속에 넣으시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내 나이가 되면 예쁜 공주보다 말하는 개구리가 더 좋다는 것을 알거야.”
나이가 들어갈수록 말을 함께 나눌 친구가 줄어든다고 합니다. 아마 이 할아버지도 그래서 예쁜 공주보다 말하는 개구리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함께 말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소중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요즘에 말을 함께 나눌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하지요. 언제나 나를 지지하고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족이지만 정말로 그렇던가요? 혈연을 나눈 가족보다 이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웃사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내 자신만을 위한 삶, 내 가족만을 챙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심지어 가족의 범죄를 숨기려 하고, 또 함께 범죄에 가담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좋은 이웃과 함께 하시는 분들이 더 많은 가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심지어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배의 보상을 받고 영원한 생명까지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뜻인 사랑에 걸림돌이 된다면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 할지라도 또한 너무나도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재산까지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혈연이라는 가족을 넘어서 세상가족이라는 선물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가족을 무조건 멀리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단지 내 자신이나 가족이라는 틀에 머무르는 협소한 사랑을 통해서는 주님의 축복을 선물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가족이라는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자신이 이웃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이기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모두가 함께 누리는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때의 삶은 더욱 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행복을 혼자서 누릴 수 없도록 만들었다. 행복은 친구가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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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손이 되어 살아가라.}
동유럽 알바니아의 시골에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체구도 작고 가난한 18세 소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뉴스를 통해 가난한 인도 소식을 접하고 인도를 돕는 꿈을 품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녀가 되어 인도의 빈민촌으로 가기로 결심합니다. 수녀의 길을 작정하고 집을 떠날 때 그녀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의 손을 놓지 말고 네가 사랑하는 예수님의 손이 되어 살아가거라.”
그 후 그녀는 그 어머니의 말을 늘 기억하며 인도의 캘커타로 가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위해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예수님의 손이 되어 살았습니다.
이 분은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이십니다. 성녀의 삶을 통해서 사랑을 나눔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깨닫습니다.
배운 것이 없어도 또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 손으로는 예수님의 손을 꼭 움켜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누군가를 꼭 움켜잡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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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성소 후원회 방문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포이동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포이동 성당은 구룡사와 문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면서 성당에서는 ‘부처님 오신 날을 함께 기뻐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어 놓았습니다. 성당에서는 사찰에 오시는 분들이 주차할 수 있도록 성당의 주차장을 개방하였다고 합니다. 사찰에서도 성탄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걸어 놓는다고 합니다. 동자들이 구유에 와서 경배한다고 합니다. 이웃의 종교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부처님도 예수님도 바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이 함께 하셔서 남과 북이 평화와 번영으로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당들은 당리당략을 앞세우기보다는 국민의 행복과 미래를 앞세우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4년 전 교황님께서 시복식을 주례하였습니다. 저는 교황 방한 준비위원회의 영성분과에서 일하였습니다. 시복식을 위한 기도문을 제작하였고, 심포지엄을 준비하였고, 순교자들의 영성을 기억하는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순교자 영성’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순교 영성이란 말은 흔히 순교 정신이란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곧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의 모든 신앙과 신념과 모범적 삶 모두를 총칭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생명까지도 포기하며 사는 삶, 그리스도와 닮은 삶을 사는 것, 바로 그것이 순교 영성, 순교 정신입니다.
첫째, 순교 영성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1고린 10, 31)이어야 합니다. 순교 영성은 바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살았고, 하느님을 위해 근본적 결단을 내리며,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세상에 밝혔을 뿐입니다. 사실 박해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지 않고 이 세상을 오랫동안 살다가 떠났을지라도 그분들의 하느님을 향한 마음과 열정은 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사는 삶이 순교 영성입니다.
둘째, 순교 영성은 포기함입니다. 어떤 것을 포기하든지 간에 포기함 없이 순교는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많은 순교자가 자신의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것을 뛰어넘어 순교하고자 하는 자신의 원의 까지도 포기했습니다. 꼭 외적으로 목숨을 버리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위해 많은 자리를 비워 놓으며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는 신앙생활이, 그러한 신앙의 자세가 바로 순교 영성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 24)
셋째, 순교 영성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문학 안에서 나타나는 순교의 특성은 스승이며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으며, 순교자들의 원형이 되셨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죽임을 당하신 스승을 따라 순교하는 것은 은총이며, 사랑의 증거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소중한 목숨을 바치는 순교가 스승이신 그리스도와 가장 긴밀하게 일치하는 것이며 그분을 가장 가까이 따르는 길임을 깨달았고, 길을 따랐으며 다른 이들에게도 그 길을 따를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순교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행위라고 할 때, 순교자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함께한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순교자의 자세가 그분의 자세 즉 사랑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순교자들의 삶을 살지 못하고 그분들의 정신을 기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알맹이 빠진 껍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그마한 일상에서 순교하는 삶,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그분을 위해 많은 자리를 비워 놓으며 그분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는 신앙생활이 오늘날의 순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의 순교자들이 목숨 바쳐 지킨 신앙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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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거룩한 삶>
-버림, 따름, 섬김-
삶은 버림과 따름과 섬김의 여정입니다. 날마나 안팎으로 버리고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섬기는 여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영원한 목표이자 희망이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한 버림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희망과 사랑 때문에 자발적 버림의 포기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1,13-1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성소요 의무입니다. 누가 거룩한 사람입니까? 온전한 사람입니다. 날마다 사랑으로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름으로 주님의 공동체에 속할 때 거룩한 사람입니다.
이런 공동체에 속해 형제들을 사랑으로 겸손히 섬기는 삶을 살 때 거룩한 사람입니다. 결코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일상속의 평범한 성인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 제자들 공동체’가 그 모범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중 분명히 드러납니다.
-베드로;“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로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삶은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섬기기의 여정입니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섬길 때 풍요로운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첫째가 꼴찌도 될 수 있으니 버림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늘 초발심의 자세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우리가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우리의 모든 희망을 걸고 사는 것입니다.
언젠가 소개했던 재미있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실 그분의 세상에서는 첫째도 꼴찌도 없을 것입니다.
-한 부자가 자신의 미래 구원에 대해 알고 싶어 천국과 지옥에 대한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하느님께 청했습니다. 하느님은 동의했고 먼저 그들은 지옥을 방문했습니다.
지옥에 도착한 사람은 크게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온갖 풍요로운 음식들이 크고 둥근 식탁위에 마련되어 있었고, 모두가 식탁 둘레에 앉아 있었고 그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침묵중에 앉아 앞에 있는 아름다운 음식들을 바라 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긴 젓가락을 들고 있었고 각자 먹으려 하니 음식은 도저히 자기 입에 도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히 그와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지옥입니다!
하느님은 부자를 천국에 안내했습니다. 그는 다시 놀랐습니다. 앞서와 똑같은 식탁에 풍부한 음식들이 있었고 모두가 최고의 영혼들 상태에 있는 듯 했습니다. 곳곳에서 웃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실제 그들은 자신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젓가락이 정상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 역시 똑같은 긴 젓가락을 갖고 있었고 서로 맞은 편 형제들에게 음식을 넣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천국입니다!-
새삼 환경이 좋아서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임을 깨닫습니다. 똑같이 좋은 환경도 관계가 좋으면 천국이고 관계가 나쁘면 지옥입니다. 바로 위 이야기는 오늘 복음에 대한 좋은 설명입니다.
모두가 섬길 때 모두는 섬김을 받습니다. 모두가 줄 때 모두는 받습니다. 모두가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서로 섬기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힘들어도 평생 배워야 할 공부가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서로 섬기는 삶입니다. 새삼 분도 규칙에 나오는 성인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바이다.”(성규머리45-46)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선 주님을 섬기는 학원 공동체가 바로 우리 수도공동체입니다. 흡사 복음의 예수님 제자들의 공동체처럼 행복하고 풍요로운,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서로 섬기는’ 형제들로 이루어진 수도공동체입니다. 비록 수도공동체가 아니더라도 모두가 안팎으로 부단히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서로 섬기는 삶에 전념하는 공동체일 때 주님의 축복도 뒤따를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버림, 따름, 섬김의 삶에 충실함으로 우리 모두 거룩한 사람들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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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비우는 만큼 채워주신다>
세상 사람들은 소위 출세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며 권력을 누리려고 합니다.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잇속을 챙기려 합니다. 그러나 그 출세라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습니다”(마르10,28).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구원 받는다는 것을 출세하는 정도로 생각하였나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자랑 삼아 말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내가 모든 것을 버렸으니 한자리 주십시오.’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고하셨을 때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하는 문제로 길가에서 논쟁한 것에서 드러났고, 세 번째 예고를 하셨을 때에도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린 이유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버려야지, 자신을 위해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을 위해서 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신을 위해서 살려면 예수님을 버려야 합니다. “사실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버린 사람은 그것을 버렸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좋아했던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함께야).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진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지닌 것을 첫째로 여기지만, 하늘에서는 많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를 봅니다. 무엇을 위해 썼느냐가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지만 버려야 할 것을 하나씩 기쁘게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내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요? 아니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요? 재물, 권력이나 명예. 자식이나 건강을 첫째라고 생각한다면 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주님 마음에 드는 꼴찌의 자리를 차지하여 마침내 천상에서 첫째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인간관계나 소유물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것에서 마음을 비우고 주님만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비우는 만큼 그분께서는 채워주실 것입니다.” 지상의 것들을 버리는 것이 그에 상응해서 천상의 것들을 채우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베드1,13-15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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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복된 순교자들을 기리며>
요한 12,24-26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찾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복된 순교자들을 기리며>
세상에 제 낳으신 고운님 모셨도다
함께함이 삶이요 떨어짐이 죽음이라
제 목숨 빼앗길수록 영원생명 빛난다
너와 나 갈림 없이 님안에서 하나로다
님 닮은 사람이라 모두 다 귀하기에
사람의 높낮이 매긴 냉혹 세상 부순다
님 품은 순간부터 평화의 사도로다
찢기고 억눌려도 온유함 가득하다
시퍼런 칼날아래서 찬미노래 부른다
님 따라 나선 길을 선혈로 물들인다
피 삼킨 어머니 땅에 하늘빛 드리운다
기나긴 어두움 뚫고 새하얀 새벽연다
앞서간 고운 넋들 간절히 손짓한다
두려워 하지마라 한걸음에 따라오라
찬란한 새 하늘 새 땅 아낌없이 맛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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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12,26)
오늘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된 우리나라 124위 순교복자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순교란?'
'나의 순교는?'
지금 여기에서 나의 온 존재가 예수님이 되는 것,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 저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 방식이 아닌 예수님께서 하셨던 방식대로 너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해야 할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순교자는 오늘 독서에서 언급되는 엘아자르처럼,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는 124위 순교 복자들처럼 자기 목숨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미워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12,25)
'영원한 생명'은 믿는 우리들의 궁극적인 희망이요 목적입니다.
이 희망과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항상 오늘 순교하려고, 오늘 내가 먼저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과 온전하게 하나가 되려고... 오늘 예수님께서 사셨던 방식대로 살고... 오늘 예수님처럼 나 없음의 삶, 너를 더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이요 목적인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나의 순교를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순교하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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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다."(요한 12, 24)
아픈 시간이
있었기에
기쁜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하느님을 향해
뜨겁고 풍요로이 삶을
살다가 떠난 이들이
있었습니다.
순교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어져 있습니다.
씨앗이 죽지 않고서는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걸어가지 않으면
우리의 길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늘 어떻게
삶을 사느냐가
중요한 우리 삶의
관건이 됩니다.
그 어떤 때에도
하느님을 선택하고
그 어떤 환경에서도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밀알이 죽지 않으면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은
복음을 위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 바치는 복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시금 우리의 삶이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처럼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순교의 발자국은
결코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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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정리/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눠드립니다■
[이름, 본명, 지역(본당), 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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