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항~여서도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소안도
소안도(所安島)
항일운동의 땅, 해방의 섬
요약 : 소안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6°46′, 북위 34°06′에 있으며 면적 23.164km2, 해안선 길이 42km, 최고점 350m(가학산), 인구는 1,253가구 2,662명(2010년)이며 초등생 81명, 중학생 44명이다.
목차
지명 유래
개요
소안군도 중심 섬 소안도
역사가 깊은 소안도
개매기 마을 월항리
항일운동기념관
천혜의 항구 맹선리
해수욕장이 있는 미라리 마을
지명 유래
해남 이진과 소안 사이는 잔잔한 바다지만 제주와 소안 사이는 한없이 큰 바다로 평상시에도 파도가 일고 물결이 거칠어 바다를 처음 접한 관원들은 공포에 시달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 소안도에 상륙하면 안심한 곳, 즉 ‘소안(所安)’이라고 외친 것에서 유래한다.
개요
소안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의 본 섬으로, 면적 23.164km2, 해안선 길이 42km, 최고점 350m(가학산), 인구는 1,253가구 2,662명(2010년)이며 초등생 81명, 중학생 44명이다.
소안군도 중심 섬 소안도
소안도는 완도에서 남쪽으로 19km 정도 떨어졌으며 소안군도의 중심섬이다. 주위에는 소안도와 크기가 비슷한 청산도, 보길도, 노화도 등이 있다. 소안도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섬으로 전통사회 당시에 해남에서 제주도를 오갈 때 풍선들이 순풍을 기다리고, 바람이 많이 불면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는 곳이었다. 완도 하면 수많은 사람들은 청산도와 보길도만 생각한다. 보길도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섬이다. 아마도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등 교과서에 나온 시와 수려한 풍광 덕분일 것이다. 그 분의 유적과 아름다운 예송리의 자갈밭 해수욕장, 중리 모래 해수욕장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청산도는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 섬으로 지정되면서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렇게 보길도와 청산도의 유명세에 가려,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했지만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섬이 소안도이다. 그러나 소안도를 한 번 방문한 사람들은 역사와 풍광 그리고 먹거리에 놀란다. 매력이 넘치는 섬이 소안도다. 남쪽의 서중리 해안도로에서 바라보면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고,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는 미라리의 상록수림과 함께 자갈밭 해수욕장의 몽돌은 파도칠 때마다 달그락거리며 자연 그대로의 소리를 내보이고 있다. 소안도는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일출장소는 미라리 자갈밭 해수욕장과 가학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한 쉼터가 유명하다. 일몰은 서중리와 물치기미 쉼터가 아름답다. 가학산 정상은 해발 359m인데 여기서 다도해 풍경을 바라보면 황홀감에 빠진다.
무엇보다도 소안도의 자랑은 싱싱한 수산물의 보고라는 점이다. 전국 최고의 김과 전복, 미역, 톳 등은 어민들에게 높은 소득을 안겨주고 있다. 특히 남쪽의 소진 마을은 삼치잡이로 유명하다. 수십 척의 배들이 삼치 낚싯대를 우뚝 세우고 출어를 기다리고 있다. 가을 삼치는 지방이 가득해 부드럽기에 미식가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이웃 섬인 노화도와 보길도가 연도교가 건설되어 자유롭게 왕래하지만, 소안도는 이들 섬과 연결되지 않았다. 소안도는 노화와 보길도에 밀려서 관광객들이 많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노화도와 소안도 구도 사이에 연도교가 연결되고 있으며, 그 다리가 완성되어 소안도로 이어지면 그때 소안도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역사가 깊은 소안도
소안도는 조선조 명종대(1546-1567)에 최초로 김해 김씨, 동복 오씨가 월항리에 입주하였다. 이때는 섬이름을 달목도(達木島)라 불렀는데 임진왜란을 피하여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1866년 청산진 설치로 행정과 군무를 청산진에서 관할하다가 1896년 완도군이 되면서 소안면이 완도군 소속이 되었다. 조선조 정조(1777-1800) 시대에 가혹한 세금 징수로 주민들의 삶이 극심하게 피폐해지자 1864년(고종 원년)에 소안도 비자리에 별장을 설치하고 주민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옛날 강진 탐진포와 해남 관두포에서 제주 내왕을 관장할 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진에서 제주를 왕래할 때에는 반드시 소안도 월항리를 거쳐 오가도록 하였다.
조선후기 이곳은 육지-제주를 잇는 중요한 항구였다. 강진 마령에서 51km 떨어져 있는 소안도에 가면 재미있는 비석이 두 개가 세워져 있는데 제주도현감의 불망비이다. 면 소재지라고 할 수 있는 입구에 비가 있기 때문에 소안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볼 수 있다. 이 비석들은 육지인 강진 마량과 제주도 사이를 잇는 중간 기착지로 소안도를 발전시킨 것에 대한 감사의 징표라고 한다. 하나는 '제주목사백공락연영세불망비(濟州牧使白公樂淵永世不忘碑)'이고 하나는 '제주목사심공연택영세불망비(濟州牧使沈公賢澤永世不忘碑)'이다.
백락연은 고종 14년(1877) 정월에서 18년 5월까지, 심연택은 고종 20년(1883) 5월부터 21년 12월까지 제주목사로 재임하였다. 1977년에 발행된 완도군지에 따르면 이들의 영세불망비는 소안도를 기항지로 만들고 지역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는 공으로 소안도 주민들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소안도는 이런 관리들 덕택에 조선후기 대표적인 제주 육지 간 선박들의 길목 역할을 하였다.
길목이란 좋은 바람을 기다리는 후풍처(候風處)를 말하는 것이다. 강진의 남당포나 백도(신전), 해남과 관두량에서 출발하는 제주행 뱃길은 섬과 섬 사이를 따라 간다. 이 일대는 뱃길이 비교적 안전한 곳이다. 날씨가 좋지 않다거나 날이 저물다 싶으면 언제든지 가까운 섬으로 피신할 수 있다. 지금의 완도항인 가리포나 완도 군내면 백일도, 횡간도, 넙도 등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모두 후풍처였다.
소안도와 보길도를 벗어나면 이제 망망대해가 기다리고 있다. 언제 어떻게 태풍을 만날지 모를 일이다. 소안도에 배를 대면서 하늘을 보고 바람의 심기를 극진히 살펴야 했다. 섬사람들에게 육지와 제주도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들어온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었던 것 같다. 보통 30~40명 정도 되는 일행이 하룻밤을 묵어가면 그곳의 주막이나 여관 등이 재미를 톡톡히 봤을 게 분명하다.
기록에 따르면 이중의 일행은 군관 2명, 별파진 1명, 화공 · 서리 2명, 남자 노비 1명, 강진공방 1명, 포수 1명, 문서직 1명, 격군 8명 등 50명에 달했다. 또 제주에서 육지로 말을실어 나르던 공마선에는 격군만 소선 34명, 중선 37명, 대선은 43명이 올라탔다고 한다. 여기에 태풍이라도 불면 보통 일주일 이상은 섬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이 육지와 고립된 섬지역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을 것이다.
지금은 풍선에서 동력선으로 변하여 1970년대 들어서 육지에 나가는 일이 일반화됐다. 그 전까지는 거의 모든 것을 자급자족했다. 돛배를 타고 다닐 적에는 육지에 나간다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소안도를 집중적인 후풍처로 삼아준 제주 목사의 불망비를 세운 소안도 사람들의 심정을 알고도 남을 만하다.
이진과 소안 사이는 잔잔한 바다이나, 제주와 소안 사이는 한없는 큰 바다로 평상시에도 파도가 일고 물결이 거칠어 바다를 처음 접한 관원들은 공포에 시달려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다 소안도에 상륙하면 안심한 곳 즉, 소안(所安)이라고 외치게 된다. 이것이 소안도에 대한 간략한 역사다.
개매기 마을 월항리
입도조가 가장 먼저 들어온 월항마을은 바로 '소안팔경'의 한 곳이다. 여기서 보이는 건너편이 노화도 동천항이다. 인근 해안이 청정해역으로 김 양식이 일찍부터 행해져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바다낚시터로 유명해 전국 각지에서 낚시꾼들이 찾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소안도 입주민 중 제일 먼저 도착한 마을이 이곳으로, 명종 대(1546~1567)에 김해 김 씨가 장흥에서 처음 건너와 입주하자 때를 같이하여 동복 오 씨가 입주했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이곳은 면소재지가 있는 비자마을 다음으로 큰 마을이다. 1627년 이진진이 설치된 이후 이진에서 제주를 향해 출항한 배가 소안도에 기착한 길목 마을이었기에 그 당시 소안도의 지명 '달목(達木)'이라는 이름을 붙여 달목마을로 불렀고 달목을 차자하여 달(月), 목(項) 월항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직사각형으로 된 포구에는 가운데에도 방파제가 있다. 이곳 역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소안 어촌체험 관광단지 조성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특히 개매기 어업으로 유명하다. '개매기 어업'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이용한 전통 어로방식으로 말목이나 대나무를 이용해 수십 개의 지주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그물을 친 다음, 밀물 때 고기 떼가 들어오면 일제히 그물을 올려 물고기를 가두는 방식이다. 이것을 체험하는 행사를 매년 펼치고 있는데 올해로 여덟 번째였다고 한다. 철 지난 지금도 이곳에는 긴 장대들이 바다에 꽂혀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 개미기 체험은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한여름에 누구나 부담 없이 신나게 할 수 있다.
월항리에서는 7월에서 8월에 개매기 체험 현장을 운영한다. 물론 시원한 바닷물속에서 파닥거리는 고기를 맨손으로 잡으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 버린다. 개매기 체험은 어느 누구나 영원히 남을 추억의 놀이이다.
항일운동기념관
비자리의 초등학교 옆에는 보건지소가 있다. 아주 오래된 건물이다. 여기서 오른쪽에 건물 한 채와 함께 기념탑이 있다. '소안항일운동기념탑'이다. 1990년 6월 5일에 세워졌는데 이 탑이 비자리의 갯돌을 쌓아올려 만든 것이다. 기념탑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주민들의 성금으로, 검은 돌과 하얀 돌들을 높이 8m, 폭 4m로 쌓아 건축하였다. 검은 돌은 일제의 탄압을, 하얀 돌은 백의민족의 순결함을, 세 갈래로 솟아오른 탑 모양은 일본에 대한 강렬한 저항을 상징하고 있다.
기념탑 뒤에 있는 건물은 비자리 복지회관이다. 2층짜리 건물에는 각종 단체가 입주해 있다. 소안도의 항일 청년조직인 '소안배달청년회'를 비롯해 소안축구협회, 소안파출소자율방범대 등 대여섯 개의 단체가 입주해 있다.
기념탑 옆에는 검은 대리석으로 된 각종 안내비석이 있다. 물론 항일운동에 대한 안내표지석과 건립에 동참한 명단 등 그에 따른 부속 안내문들이었다. 그리고 한 쪽에는 '자지도항일전적비안내' 표지석도 세워져 있다. 자지도는 지금의 당사도를 말한다.
길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직진하면 가학마을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는 미라리로 가는 길이다. 그 갈림길에 항일운동공원이 있다. 바다를 바라보는 공원 한가운데에는 대형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기념탑 좌우로는 항일을 상징하는 군상들의 동상이 있다. 단 아래에는 넓은 공간, 그 좌우로는 화강암으로 된 표지석이 두 개 세워져 있다. 오른쪽에는 '해방의 섬 소안항일운동성지' 그리고 왼쪽에는 '꺼지지 않은 민족혼 항일의 성지 소안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입구 쪽에 세워진 안내문에 의하면 비자리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이 자리는 원래 '사립소안학교터'란다. 그러니까 소안도 중심지인 비자리에는 '소안항일운동기념탑'이 서 있고, 가학리 옛 사립학교 터에는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면민의 성금으로 세운 것이 기념탑이고, 정부 지원으로 건립한 것이 기념관이다.
국가보훈처와 완도군의 지원을 받아 2003년 옛 소안사립학교터인 이곳에 항일운동기념관과 기념탑을 건립하고, 2005년에는 소안학교 교사를 복원했다. 물론 당시에는 새로운 기념탑을 세우면서 옛 기념탑을 옮기자는 둥 새로 조형을 하자는 둥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지만, 옛 기념탑이 이미 소안도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점을 고려해 같은 모양으로 새 기념탑을 짓기로 해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공원이다.
기념관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사를 보여주는 시청각실과 전시실로 꾸며졌으며, 전시실은 소안도가 배출한 독립운동가 88인의 사진과 공적사항,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19명의 얼굴이 동판부조로 만들어져 있다. 제단 아래 광장에서 계단을 타고 오르면 기념탑 좌우로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왼쪽에는 앞뒤로 성금기탁자 명단이, 오른쪽에는 최금동의 '소안선열들에게 바치는 노래'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건립기(建立記)'가 있다. 기념탑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기념관이 있고, 왼쪽에는 사립학교였던 소안학교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남해의 외딴 섬 소안도 항일운동의 역사가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해방 후에 친일파가 득세한 나머지 독립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운동가들이 숨죽이며 살아갔다. 소안도 항일운동은 1990년도에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 비자리에 세워지면서 비로소 복권이 되었다. 선열들의 고귀한 뜻이 항일운동기념관 건립으로 이어졌고, 해방된 지 60년이 넘어서야 독립운동기념관이 들어섰다. 해마다 항일문화축제와 도로 양편에 365일 태극기를 게양해서 선열들의 항일정신을 알리고 있다. 소안도는 우리 민족의 혼이 서려 있는 자랑스러운 항일의 고장이다.
천혜의 항구 맹선리
가학리를 지나면 바로 맹선리다. 마을 입구에 문화재로 지정된 상록수림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340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맹선마을 서쪽 해안가 언덕에 있는 상록수림이다. 전체 면적은 길이 약 300m, 폭 35m 정도인데 마을 사람들의 생업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수 백 년 수령의 각종 나무들의 숲이 병풍처럼 해안을 따라 펼쳐져 있다. 국내 최대의 난대식물원으로써 수령은 200~300년으로 추정되며 후박나무를 비롯한 모밀잣밤나무 구실잣밤나무, 생달나무, 동백나무, 후박나무, 사스레피나무, 붉가시나무, 광나무, 보리밥나무, 감탕나무 등의 상록활엽수종과 느티나무, 팽나무 등의 낙엽 활엽수종 등 21종 245그루의 상록수가 해안선을 따라 방풍림을 형성하고 있다. 이 상록수림은 마을의 내지를 보호해주는 방어림 역할과 함께 마을의 미관을 더해주는 풍치림 구실도 한다.
맹선리 포구는 상당히 넓은 편이다. 좌우로 뻗어나간 방파제 역시 길다. 방파제 끝자락에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마을은 포구 뒤 산 아래에 위치해 있다. 마을 뒤로는 밭이 약간 있어 농사도 겸한다. 가구 수가 많은 편은 아니다.
남방파제 물양장 역시 다양한 어구들로 인해 분위기도 어수선하다. 튼튼하게 만들어진 방파제는 폭이 제법 넓다. 방파제 오른쪽에는 삼발이를 심어두었다. 태풍의 영향이 직접 와 닿는 부분이다. 여기서 서쪽을 바라보면 바로 보길도 백도의 글이 쓰여진 바위가 있는 그 지점이다. 이어 북쪽을 쳐다보면 소안항이 보인다. 그 앞은 온통 전복 양식장이다.
'맹선리'라는 지명은 해변에서 산세에 이르기까지 경관이 수려하며 지세가 신선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고려 정종 때 조씨(曺氏)가 유배되어 살았다는 설과 조선 인조 때 창녕 조씨의 입주설이 있으나 확증은 없다. 1500년경 진주 강씨가 입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상하 2개의 마을을 합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은 선박이 정박하기에 매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소안면 맹선리와 진산리 사이에 '팬티고개'가 있다. 지금은 관광코스가 되었다. 소안도를 등산하면 '팬티고개'를 만날 수 있다. 맹선리와 진산리를 잇는 옛길은 1980년대 초반 소안도 우회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던 고갯길이다.
진산리에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객선도 타고, 학교도 가고, 행정적인 일도 볼 수 있는 맹선리에 갈 수 있고 맹선리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는 것은 농토가 워낙 부족하여 진산리에 가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맹선리는 천연 양항이 있고 바다가 좋아서 어느 정도 살다보니 진산리 논의 절반은 맹선리 사람들의 소유였다. 이 고개는 약 2.4km, 높이는 고작 200m에 불과하지만, 이 고개에 사람들의 추억이 많다.
봄에는 단체로 이 고개를 넘어가서 모내기를 하고 아이들도 단체로 가서 못밥을 얻어먹었던 길이다.
배가 많이 고팠던 가난한 시절, 사람들은 그냥 올라가도 힘든 고갯길을 지게에 물건을 이고 지고, 다니면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그들의 땀과 눈물이 깃든 추억의 고개이다. 서부의 진산마을의 초 · 중학생들은 아침 일찍 서둘러 비자리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했다. 문제는 항상 가을이었다. 수확기에 벼를 일일이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이 고개 정상에 올려놓고 다시 맹선리 마을로 내리는 일이었다.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면서 다녔는지 '팬티가 다 젖는' 또는 '팬티만 입고 다니던 고개'라 하여 '팬티고개'가 됐다.
어느 주민은 "가을만 돌아오면 수확한 나락을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팬티고개를 넘는데 한꺼번에 집에까지 오는 것이 아니라 고개 정상에 다올려 놓은 다음 날 다시 집까지 내린다" 하였다. 진산리 논에서 팬티고개 정상까지 6번 정도 오가면 하루가 가버렸단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팬티고개 정상으로 옮긴 나락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밤을 새워 지켰다 한다. 봄철에는 퇴비를 지게에 지고 소를 몰고서 고갯길을 넘어 다녔다.
필자도 이 추억의 '팬티고개'를 넘어가려고 시도를 했지만 숲이 우거져 얼마 못 가서 포기하고 말았다. 얼마나 고생하면서 이 '팬티고개'를 넘어 다니며 농사를 지었을까? 너무 편리함에 젖어 사는 우리 후손들에게 이 '팬티고개'를 재현해서 빈 지게라도 지고 올라가 보게 했으면 한다. 이 '팬티고개' 지게 문화체험을 통해 선조의 근면과 끈기를 경험하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이 고개를 복원하는 데는 돈도 들지 않을뿐더러 자연 훼손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항일 운동의 섬 소안도가 개매기 체험, 전복, 김, 낚시 등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통하여 새롭게 거듭났으면 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날로그는 삶이고 생활이며 정이 정말 묻어난다. 이 고개를 넘어 가면서 이제 조금 잘 산다며 너무 빨리 옛것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해수욕장이 있는 미라리 마을
소안도의 '미라리'라는 마을 이름은 아름다운 경치가 도처에 널려 있다 하여 미라리(美羅里)로 명명되었으며, '미라팔경'으로 유명하다. 1km의 백사장이 펼쳐진 이곳의 천연기념물 제339호인 상록수림 지대에는 후박나무, 노송 등 20여 종의 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미라리 상록수림은 미라마을의 동쪽에 있는 해안가를 따라 형성된 상록수림이다. 이 상록수림은 주거지와 농경지를 보호하는 방풍림의 기능을 하고 있다.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에는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신제를 지낸다. 상록수림 앞으로는 펼치진 해수욕장은 검은 갯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갯돌은 오랜 세월 속에 바위가 파도에 닳고 닳아 자연으로부터 형성된 이색적인 갯돌의 모습을 연출한다. 날마다 파도가 치면서 물결에 따라 갯돌이 움직이면서 부딪치는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은 풍부한 어족자원으로인해 바다낚시터로도 유명하여 전국 각지에서 겨울 낚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청산도항~여서도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대모도와
그 우측에 보이는 완도 상왕봉
대모도(大茅島)
요약 :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 모도리에 딸린 섬.
면적 5.83㎢, 인구 230명(2001)이다. 완도에서 남쪽으로 약 10㎞ 지점에 위치한다. 띠가 많아 띠섬이라고도 하며, 소모도보다 커서 대모도라 한다. 1600년경 마씨, 진씨 등이 처음 들어왔으며 그후 추씨, 김씨, 서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정두실 외 14명이 배달청년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섬의 중앙부에 비교적 기복이 큰 산지가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동쪽과 서쪽 사면은 경사가 완만한 편이다. 해안은 암석해안이 대부분이고, 동쪽 및 남쪽해안은 높은 해식애가 발달하였다. 기후는 대체로 따뜻하고 비가 많다. 1월 평균기온 1℃ 내외, 8월 평균기온 26℃ 내외, 연강수량 1,322㎜ 정도이다.
취락은 동쪽 해안 만입부와 서쪽 해안 선착장 부근인 모동리와 모서리 마을에 모여 있다. 주민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한다. 농산물로는 고구마·감자·쌀 등이 주로 생산되며, 마늘·콩·보리·참깨 등도 약간 생산된다. 연근해에서는 멸치·도다리·삼치·숭어·도미 등이 잡히며, 김·미역 등의 양식업과 자연산 굴·톳·천초 등이 채취된다.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에는 산신제를 지내는데, 제주는 1개월 전부터 외도를 금하고 정성을 드려 만수무강과 소원성취를 빈다. 또 마을에서 흉한 일이 발생하면 제주가 산신제를 잘못 모셨기 때문이라고 탓하고 산신제를 다시 지낼 정도로 믿음이 강하다.
교육기관으로 모동리와 모서리에 초등학교 분교가 1개교씩 있고, 주요기관으로는 면출장소를 비롯하여 경찰지소, 우체국 분국, 보건진료소, 통신공사 분국 등이 각 1개소씩 있다. 완도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1일 1회 운항된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청산도항~여서도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청산도
[청산도항~여서도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생일도(좌)와 덕우도(우)
생일도
위치 : 전라남도 완도군 생일면
개요
생일도(生日島)는 해발 483m의 백운산과 금곡해수욕장을 낀 동백숲이 있으며, 남쪽에는 용출리 갯돌밭이 장관을 이루는 섬이다. 생일도란 지명은 처음에는 산일도(山日島), 산이도(山伊島)라 불리다가 주민들의 본성이 착하고 어질어 갓 태어난 아기와 같다하여 날생(生)과 날 일(日)자를 붙여 생일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유래는 예로부터 험한 바다에서 조난 사고와 해적들 횡포가 심해 이름을 새로 짓고 새로 태어나라는 뜻에서 생일도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백운산 서쪽에 위치한 금곡해수욕장은 최근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나, 면소재지인 유촌리와 해수욕장간 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폭 100m, 길이 1.2km로 주변에 후박과 잣밤, 동백나무 등 상록수림이 울창하고 야생염소들이 바닷가를 노니는 진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용출리 해안은 생일도 남쪽의 갯돌해안으로 바닷물이 깨끗하고 수변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해안가 뒤로는 백운산이 자리하고 있어 백운산에 올라 아름다운 다도해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2016년 가고싶은 섬으로 선정된 생일도는 바다와 숲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섬이다. 산세의 아름다움에 취해 구름도 머문다는 백운산, 상서로운 학이 머문다는 학서암, 금빛 모래사장과 동백숲이 아름다운 금곡해수욕장, 용출 갯돌해안, 구실잣밤나무 군락지, 탐방로 등 장소마다 살아있는 자연그대로를 온 몸으로 만끽할 수 있는 섬이며, 멍때리기 좋은 곳(너덜경)을 통해 조용히 남해안 바다를 조망할 수 있고 온갖 잡념을 떨쳐버릴 수 있는 힐링의 기회가 될 것이다.
이용안내
문의및안내
061-550-6672
관련 홈페이지
http://www.wando.go.kr/island/
상세정보
등산로
백운산 코스 (거리 8km, 소요시간 3시간 50분) : 서성항 - 백운산 - 학서암 - 금곡리 - 금곡해수욕장
관광코스안내
완도읍→신지 명사십리 해수욕장→고금 충무사→약산 삼문산→생일
덕우도(德牛島)
완도 전복의 산실
요약 : 덕우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생일면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7°1′, 북위 34°15′에 위치하며 면적 1.2km2, 해안선 길이 5.6km, 최고점 113.2m, 인구는 196명(2001년)이며 초등학생 18명, 중학생 8명이다.
목차
지명 유래
개요
전복 양식으로 활기찬 마을의 모습
덕우도 당산
자연산 전복으로 유명한 덕우도
지명 유래
‘덕우도’는 살찐 소가 앉아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개요
덕우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생일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 1.2km2, 해안선 길이 5.6km, 최고점 113.2m, 인구는 196명(2001년)이며 초등학생 18명, 중학생 8명이다.
덕우도에 사람이 터 잡고 살기 시작한 것은 350여 년 전부터로 알려지고 있다. 약 350년 전에 초계 최씨가 전남 장흥에서 들어와 일가를 형성하였고, 그 후 경주 정씨, 김해 김씨 등이 이주해 와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덕우도는 생일도로부터 5.8km, 완도에서 남동쪽 26km 해상에 있는 외딴섬이다.
전복 양식으로 활기찬 마을의 모습
등대호를 타고 덕우도 근처에 들어가니 바다는 온통 양식장이다. 배를 타고 마을에 들어가면 벌써 부자 마을이란 인식이 들 정도로 집들의 지붕들이 울긋불긋하고 제법 품격있어 보인다.
마을의 물양장에는 전복을 바다에서 건져와서 등에 붙어있는 굴 등을 제거하는 일과 전복과 관련된 일이 분주하다. 덕우도(德牛島)는 가장 높은 곳이 해발 113m에 불과하다. 섬의 허리, 선착장에서 반대편 해변까지는 50m가 넘지 않는다. 큰 태풍이라도 불어 파도가 치면 섬을 넘고도 남을 거리다.
덕우도 사람들은 집집마다 배를 소유하고 있다. 어떤 집은 큰 배와 작은 배 두 개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 이곳은 평소에는 선착장 안으로 배가 정박할 수 있지만 태풍이 오면 2t 이상은 완도항으로 피난을 가고 2t 미만의 배들은 대형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서 이양기에 실고 집집마다 소유한 화물차에 실어 안전하게 육지로 보낸다. 덕우도는 해산물 생산량과 마을크기에 비교하여 선착장이 작아 배가 댈 곳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태풍 때는 안전한 곳이 필요하다며 덕우도 항을 소규모 3종항으로 건설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몇 년 전만 해도 각종 어장이 잘되어 인구가 늘어났지만 지금은 조금씩 줄고 있다. 인구 감소의 결정적인 원인은 2006년 전에 분교장이 폐교되면서 교육문제로 자녀들이 완도읍이나 도시로 가면서 기러기 아빠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면 소재지인 생일도나 평일도처럼 큰 섬에는 초, 중학교가 있지만 덕우도 같은 작고 멀리 떨어진 섬은 어촌을 지키고 싶지만 학교도 없어지고 다른 섬으로 통학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갈수록 섬의 인구는 줄어들고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는 듣지 못하게 변해가고 있다.
마을 한 가운데는 보건진료소와 경로복지센터가 있다. 이곳이 학교가 있던 분교터다. 금일초등학교 덕우분교장이었는데 2006년 9월 1일자로 문을 닫았다. 분교터를 마을에서 공동으로 구입하여 기부했다고 한다. 경로복지센터는 2008년에 건립되었다. 이곳에는 지상 2층, 전체 면적 310m2 규모로 남녀 경로당, 생활 체육실, 물리 치료실, 식당, 찜질방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옛 학교 마당에는 어구들만 가득하다.
덕우도 당산
덕우도는 단일마을이다. 바로 앞 섬의 중심지에 빽빽이 들어선 숲속에 당산이 있다. 오래된 동백나무와 구실잣밤나무, 감탕나무, 생달나무 등 상록활엽수가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물이 부족한 덕우도에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은 그야말로 보배나무이다. 이 섬에 사람들이 살려고 들어온 역사보다 오래된 나무들이다. 섬에서 살려면 꼭 갖추어야 할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물이고 또 하나는 선착장이다. 이 두 요소를 비교적 잘 갖추어진 섬이지만 아직도 물이 부족하단다. 덕우도는 당제와 갯제가 분리된 이중적 제의를 지낸다. 당제는 음력 1월 1일 새벽 5시경 신사당에서 시작하지만, 풍어제 개념의 갯제는 음력 1월 7일 이른 아침에 바닷가와 인접한 물양장에서 거행된다. 당제는 풍물굿이 동반되는 온 마을의 축제적 제의이다.
아직까지 전통의 당제와 갯제가 사라지거나 통합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인 여건과 젊은층과 노장층이 한데 어울려 공동체적 모습이 마을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 덕우도의 당산신은 산신이나 해신이 아니라 덕우도의 입도조(入島祖)를 신으로 모셨다. 대부분의 수많은 섬에서 새마을운동으로 당제가 사라졌지만 이 섬에서는 아직껏 당제와 갯제를 정성껏 모신다. 인근에 바위섬이 하나 있는데 3년마다 어선이 암초에 부딪치는 해난 사고 때문에 이 재앙을 막기 위해 매년 초 당산제와 갯제를 지내고 있단다. 이 바위섬 부근에서 소머리를 제물로 드려서 사고를 예방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산 전복으로 유명한 덕우도
덕우도는 자연산 전복 때문에 알려졌다. 덕우도 주변 8개의 무인도에서 자연산 전복을 따고 있다.
덕우도는 자연산 전복으로 유명한 곳이다. 완도 전복의 산실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참전복을 길러 수확하기까지는 피나는 노력이 들어간다. 전복을 잡아먹는 해적 불가사리 때문이다. 덕우도 해녀들은 4~11월에 바닷속에 들어가서 불가사리를 의무적으로 잡고 있고 마을 주민들도 불가사리 퇴치에 노력하고 있지만, 워낙 번식력이 강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작년 불가사리 퇴치 사업비로 군에서 250만원이 지원됐지만, 마을 자체에서 불가사리 문제로 드는 비용이 2,000만원이 넘어섰다. 마을 실정이 전복치패를 뿌리는 것보다 해적생물을 잡아내는 것에 사활을 걸고 있다며 군의 충분한 지원을 바라고 있었다.
덕우도에는 5명의 해녀가 일하고 있다. 그중에서 48년간 해녀생활을 하고 있는 최고령의 양영자(69세)씨가 있다. 양씨는 현재 잠수 후유증으로 자주 병원을 찾는다. 양씨의 아들 이경록씨는 어머니가 힘든 해녀생활을 하며 자식 6남매를 남 못지않게 키웠고 이제는 손자들까지 돌 봐주는 등 아직도 생활력이 강한분이라며 앞으로 3~4년 동안 계속 해녀생활을 계속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걱정이 앞선다고 했다. 이씨는 덕우도 전복이 맛있고 유명한 이유로 조류소통이 잘되어 플랑크톤이 풍부하고, 수심이 깊어 전복이 건강하다고 말했다. 전복이 즐겨먹는 미역, 다시마, 파래, 김 등 사계절 내내 먹이가 풍부한 것도 덕우도 전복의 자랑으로 꼽았다.
[청산도항~여서도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완도군의 황제도(좌)와 여수의 초도(우)
황제도(皇帝島)
감성돔낚시터로 유명세를 누려온 섬
요약 : 황제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금일읍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7°10′, 북위 34°11′에 위치하며 면적은 0.6km2이며, 해안선 길이 4.9km 최고점 78.9m(돈대산), 인구는 8가구 13명(2016년)이다.
목차
지명 유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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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천국 황제도
지명 유래
섬 이름은 옛날 황제(黃帝)가 쉬어 갔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개요
황제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금일읍에 딸린 섬으로, 면적은 0.6km2이며, 해안선 길이 4.9km 최고점 78.9m(돈대산), 인구는 8가구 13명(2016년)이다.
완도군 금일읍 동백리에 속한 섬으로 완도에서 남동쪽으로 약33km 떨어져 있으며, 주위에는 무인도인 알매도를 비롯해 고래섬, 덜섬 등이 있다. 대동지지(1864년) 도서조에 장흥부의 섬으로 기록되었다. 효종 때 김해 김씨가 처음으로 이주한 뒤, 조양 임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옛날 본도 서남쪽에 속칭 가마솥을 설치한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황제가 쉬어갔다는 전설이 있어 황제도라 하였다 한다. 해산물이 풍부해 근해에서는 멸치, 갈치, 전어, 조기, 쥐치 등이 많이 잡히고, 해안에서는 김, 톳, 미역, 파래 등이 생산된다.
둘러보기
마을은 섬 중앙에 있다. 마을 뒤쪽에 위치한 봉우리는 해발 78.9m에 불과하다.
포구는 작은 편이다. 방파제가 끝나는 지점에 폐교터가 있다. 오른쪽에 마을로 들어가는 포장길이 있고, 왼쪽으로 허물어진 건물과 담벼락이 있는, 잡초만 무성한 공간에 책 읽는 소녀상이 있어 이곳이 한때 학교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반공소녀 이승복상 등 다른 조형물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그 옆으로 학교 선생님의 공덕을 기리는 두 기의 공덕비가 있고 그 옆으로 '황제리' 마을표지석이 있을 뿐이다.
이곳 역시 폐가들이 쉽게 눈에 띈다. 물론 사람들이 사는 집에는 옷을 말리는 풍경 등 사람냄새가 짙게 풍겨나지만, 빈집은 말 그대로 폐가다. 사람이 사는 집에도 인기척은 없다. 오르막길을 오르면 최근에 지어진 듯 한 조립식 건물이 몇 채 보인다. 대부분이 목재건축들이다. 오르막길을 계속 가면 끝자락에 발전소가 있다. 내연발전소다. 역시 전우실업이 운영하는 발전시설이다. 그리고 마당에는 태양광발전시설이 있는데 지난 2006년에 60kw 규모로 지어졌다. 이 지점이 섬의 제일 높은 지대다.
13명의 주민들은 해초를 채취하면서 가난하게 살고 있으며 대부분 완도에 집을 두고 자녀들을 가르친다. 역시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섬 남쪽지점에 바위섬인 육계도(陸繫島)가 있는데 이 일대가 각종 해산물의 주요 생산지이다. 육계도란 섬과 육지 사이의 얕은 바다에 모래가 퇴적하여 사주를 만들어 연결되면 생기는 섬을 말한다. 황제도 남쪽에 위치한 바위섬, 섬과 섬 사이는 큰 자갈들로 이어져 있다. 몽돌로 이루어진 자갈밭을 지나면 온통 바위로된, 좌우로 긴 섬이 있다. 육계도인 바위섬은 3개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두 개는 연결되어 있고 하나는 떨어져 있다.
오른쪽 고지대에 나무들이 있고, 왼쪽 낮은 곳은 제법 넓은 공간의 바위섬이다. 무인도 하면 별로 쓸모없는 공간이라고 무시해 버릴 수 있지만 현지 주민들에게 있어서 자기가 살고 있는 섬에 소속된 무인도는 보배 덩어리이다. 황제도의 바위섬과 부속 무인도로 거미여가 있다. 이곳에는 전복, 소라 등 어패류와 톳, 미역, 돌김 각종 해조류가 다량 서식하여 주민소득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낚시천국 황제도
이렇게 외해에 있는 조그만 섬이 그 가치를 인정받은 건 낚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물도 부족하고 면적이 0.6km2밖에 안 되는 섬이지만 완도권 최고의 낚시터이다. 섬 자체의 면적도 작을 뿐만 아니라 교통편도 격일제로 이틀에 한 번 섬사랑호가 운항하지만, 연중 낚시가 가능하고 성과가 뛰어나 항상 완도와 녹동의 낚시어선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섬이다.
황제도는 감성돔 포인트가 비교적 한정돼 있을 정도로 섬의 규모가 작은 편이다. 예로부터 3~4명의 낚시꾼들이 이곳에 집을 짓고 이사해서 살았을 정도로 낚시꾼들에게 사랑을 받는 섬이다. 알매섬을 비롯하여 자타가 인증하는 황제도 최고의 감성돔 포인터인 구중여 그리고 고래여 등이 있다. 알매섬은 토끼섬과 더불어 규모가 큰 부속섬이다. 연중 내내 갯바위 낚시가 이루어진다.
황제도에 가보면 민박집에 낚싯대를 갖다놓고 겨울이면 항상 이곳을 찾아 오는 꾼들이 있을 정도다. 위치상으로 바다에 외로이 떠 있어 고기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기에 다양한 어종이 사계절 내내 꾸준히 낚이고 있다. 바다의 수온이 낮아지면 어느 곳을 가더라도 감성돔을 만나기가 무척 어렵다. 그러나 겨울 낚시에서 꾸준하게 감성돔이 올라오는 곳이 황제도이다. 연중 손맛을 보기 가장 어려운 겨울에도 수시로 초대형 감성돔과 볼락이나 농어도 흔하게 잡힌다. 특히 황제도 섬사람들의 순박한 정(情) 때문에 해마다 불편한 여객선을 타고 와서 섬 주민들을 만나는 등 낚시꾼들이 늘고 있다.
현지에는 낚시꾼과 탐방객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는 민박집이 있다. 외지관광객이 원할 경우 실비로 숙식이 제공된다. 3년 전만 해도 전기가 없어 불편하였지만 지금은 완도군이 11억 원을 투입하여 태양광발전소를 통해 24시간 전기를 공급받고 있어 이곳 주민들의 삶의 질 또한 많이 좋아졌다. 황제도의 오른쪽(동쪽)에는 등대가 있다. 하얀색의 특이한 형태의 등대다.
이 섬에는 석선터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에 얽힌 전설이 재미있다. 신라 때 당나라 사람들이 근해를 항해하던 중 거센 풍랑을 만난 끝에 이 섬까지 밀려와 겨우 생명을 구하였다. 이들이 섬에 오르고 보니, 재질이 좋은 돌들이 널려 있어 시험 삼아 돌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워 보았다. 예상 밖으로 배가 물에 뜨자 이 돌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여 이곳을 '석선터'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현재 황제도에는 민박집 2곳과 소형 낚시어선 2척이 있다. 식사와 숙박, 뱃삯을 합쳐 1인당 하루 5만원이면 이용 가능하다. 마을 옆에 100년이 넘은 소나무가 있는데 그 밑에 항아리가 있어서 여기에 매년 섣달 그믐날과 삼월삼짇날 마을 주민 모두가 제를 올린다고 한다.
초도(草島)
거문도의 명성에 가려진 섬
요약 : 초도는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 7.719km2, 해안선 길이 22.6km, 인구는 204가구 450명(2016년)이다. 여수에서 남서쪽으로 77km, 거문도에서 북쪽으로 1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주변에는 솔거섬 · 안목섬 · 말섬 등의 작은 섬들과 손죽도 · 평도 · 광도 등의 큰 섬들이 산재해 있다.
위도 : 북위 34°13′
경도 : 동경 127°15′
목차
초도 개요
손죽도 · 거문도 어부들과 함께 바다를 개척한 초도 주민들
초도의 중심 마을 대동리
역사적인 이름, 진막마을
40년 전의 진막리 수력발전소
우체국이 있는 의성마을
초도 개요
맨 처음에 염씨가 섬에 처음 들어와 '구미리(仇味里)'라 하여 그렇게 불리다가 후에 풀이 많아서 '초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도(鳥島)'라고도 한다.
초도는 여수시 삼산면에 딸린 섬이다. 면적 7.719km2, 해안선 길이 22.6km, 최고봉은 상산봉(339m)이다. 인구는 204가구 450명(2016년)이다. 여수에서 남서쪽으로 77km, 면소재지인 거문도에서 북쪽으로 1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초도 주변에는 솔거섬 · 안목섬 · 말섬 등의 작은 섬들과 손죽도 · 평도 · 광도 등의 큰 섬들이 산재해 있다. 지명 유래를 보면 맨 처음에 염씨가 섬에 처음 들어와 '구미리(仇味里)'라 하여 그렇게 불리다가 후에 풀이 많아서 '초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도(鳥島)'라고도 한다. 초도는 여수에서 거문도를 다니는 정기여객선의 중간 경유지로 하루 두 번 운항된다.
손죽도 · 거문도 어부들과 함께 바다를 개척한 초도 주민들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여수의 먼 바다에 있는 삼산면 어부들을 소재로 '남녘 어부들이 개척한 뱃길'의 역사를 연구하여 발표하였다. 또 최근 호남대 연구논문에 의하면 1880년대 울릉도 개척 당시 원주민 80%는 전라도 출신이었고, 독도라는 섬 이름 역시 전라도 사람들이 부여한 지명인 것으로 드러났다. 고종 때인 1882년 이규원 울릉도 검찰사가 고종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울릉도 전체 인구 141명 가운데 전라도 사람이 115명, 강원도 14명, 경상도 11명, 경기도 1명으로 기록했다. 전라도 출신의 개척민 가운데 각 지역별로는 흥양(현재 전남 고흥) 3도(죽도, 손죽도, 거문도) 출신이 61명으로 가장 많았고 흥해(여수) 초도 33명, 낙안(순천)21명이었다.
논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나오는 초도 사람들은 먼 바다 한가운데 살았지만 험한 바다를 개척하는 개척자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여수지방에는 노동요 술비소리가 전해온다. 이 소리는 여수의 거문도와 초도 어부들이 어구용 밧줄을 꼬는 작업을 하거나 배를 부릴 때 불러왔고 지금도 부르는 노래이다. 노랫말이 힘차고 가락 또한 여간 역동적이지 않다. 그래서 부르는 사람도 그렇지만 듣는 사람도 흥에 취한다. 그런데 이 노랫가사를 살펴보면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멀리 울릉도와 독도의 뱃길을 개척하고 고기를 잡았던 숨은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에헤야 술비야/ 어기영차 뱃길이야
울고간다 울릉도야/ 알고 간다 아랫녘아
(중략)
돛을 달고 노니다가/ 울릉도로 향해 가면
고향생각 간절하다.
울릉도를 가서보면/ 에헤야 술비야
좋은 나무 탐진 미역/ 구석구석 가득찼네
이 노랫말처럼 초도와 거문도 사람들이 울릉도와 독도로 가서 고기를 잡고 좋은 목재도 가져온 것이다. 동력선도 없던 때에 어떻게 그 먼 곳까지 진출하여 어장을 개척했는지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아마도 온전히 풍선배를 타고 풍향을 이용할 줄 알았다는 말인데, 얼마나 지혜로웠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초도와 거문도 사람들은 옛날부터 진취적인 기질을 가졌는데, 그것은 지리적으로 손죽도와 거문도 사이가 워낙 풍랑이 드세어 이겨내려다 보니 독자적인 항해술도 익혔던 것이다.
울릉도 내왕 흔적은 초도마을에 아직도 남아 있다. 1880대에 지어진 김충석(전 여수시장)가(家)가 그 증거인데, 그 집의 마루벽이 여느 나무와는 달리 두터운 판목으로 짜여 있는 것이다. 목재가 없는 고장임을 생각할 때 어디서 가져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초도에서 태어나 자란 김충석 전 시장은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울릉도와 독도, 연평도 조기잡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고흥에서 시집을 온 할머니가 남편을 따라 울릉도를 한 차례 다녀왔다 한다.
또 다른 증거로는 독도(獨島)라는 지명이다. 전라도에서는 노상 돌덩이를 보고 '독'이라고 하는데 독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돌섬'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뱃길 개척의 역사는 흥미롭기만 하다. 겨울철은 샛바람이나 높새바람이 불어 배를 밀어내므로 그때는 피하고, 하늬바람이나 마파람이 부는 봄철에 떠났으리라. 그리고 항해코스는 지금도 많이 이용하는 손죽도와 소리도를 거쳐, 경상도 욕지와 부산의 절영도를 통해서 올라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울릉도와 독도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고기와 해산물이 풍부했다. 특히 울릉도는 수목도 울창하여 질 좋은 목재가 많이 생산됐다. 그래서 고기를 잡는 한편으로 집을 지을 목재도 켜서 실어왔던 것이다. 전해오는 말로는 이때 향나무도 함께 베어왔는데 제수용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문헌에 보면 조선은 섬을 비워두는 공도(空島)정책을 폈다. 태종과 세종 임금 때로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어간에 초도와 거문도 어부들이 어장을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장하고 우리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장보고와 이순신의 후예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초도의 중심 마을 대동리
여수에서 아침 7시 40분에 출발한 배는 9시 20분쯤 초도의 관문인 대동리항 영역으로 들어선다. 쾌속선이 하루 2회 여수항에서 고흥 나로도항~손죽도~초도~거문도를 오간다. 오후에 초도에서 여수로 나올 때는 거문도로 들어가는 쾌속선을 타야 한다. 탑승객이 적어서 거문도에서 여수로 나올 때는 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고흥 녹동항에서 거문도행 차도선이 초도에 하루 한 차례 경유한다.
초도에는 대동리 · 의성리 · 진막리 · 예미리 등 네 개의 부락이 있는데 대동리에서 시작하는 일주도로가 이들 부락을 모두 아우른다. 대동마을에 도착해 선착장으로 들어서니 여유롭기만 하다. 대동마을 포구는 그 크기만큼이나 물양장도 운동장처럼 상당히 크고 넓다. 이곳에는 가장 깨끗하고 현대화된 복지회관이 들어서 있으며 어민회관도 있다.
역사적인 이름, 진막마을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이 진을 쳐 진막마을이라 불렀다니 역사성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마을 중심에는 정자쉼터가 있다. '진해정(鎭海亭)'이라는 정자인데 바다를 진압한다는 의미다.
마을 앞에는 '안목섬'이 있다. 초도에서 유일하게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곳이다. 신비의 바닷길이라고 하면 진도와 여수의 사도를 우선 떠올리게 되지만, 초도의 신비의 바닷길도 꽤 멋스럽다. 사리 때를 전후해 한 달에 4일 정도 본섬과 안목섬을 잇는 바닷길이 온전히 열린다. 그 거리는 500m 정도, 폭은 30m에 이른다. 안목섬은 예로부터 초도 사람들에게는 보물창고로 불리던 곳이다. 속살을 드러낸 갯가에서 멍게 · 해삼 · 전복 · 소라 등 다양한 갯것들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렇게 잡은 갯것들은 지금까지도 주민들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40년 전의 진막리 수력발전소
초도의 진막리는 지난 1976년 6월 삼산봉 계곡에 수량이 풍부하여 수력발전소를 건설해 전깃불을 밝혔다. 계곡에서 내려온 물이 풍부해 마을 위쪽을 막아서 이 물을 200m에 달하는 수도관을 통해 해변 절벽아래에 보내 낙차를 이용해 80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했다고 한다. 그 당시 한집에 전등 2개만 허용되고 밤 11시면 전기 공급이 중단되었다. 수량이 풍부한 여름에는 연장되었다. 수력발전소를 만들어 전기를 공급했던 사건은 정보가 부족하고 가난한 그 시절 멀고 먼 작은 섬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모두 폐허가 되었고 그 대신 내연발전소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우체국이 있는 의성마을
의성리 포구 대합실 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커다란 나무와 더불어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비석은 공덕비이고 그 위 벼랑에 분재처럼 서 있는 나무는 '은혜갚은 팽나무'다. 뿐만 아니라 귀중한 사료가 적힌 석조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에는 "1882년 임오년 이전부터 목숨 걸고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하여 영토를 확보한 선각자들이 사셨던 흥양현 초도사람들", "일본에 나라를 뺏기지 않으려고 활약하신 김성택, 이병현 의병이 사셨던 초도의성!"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흥양현은 현재의 고흥을 말한다.
[청산도항~여서도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거문도
거문도(巨文島)
요약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에 있는 섬.
면적 12㎢이다. 여수와 제주도 중간 지점에 위치한 다도해의 최남단 섬이다. 서도·동도·고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도만을 거문도라 부르기도 한다. 옛이름은 삼도·삼산도·거마도 등이었으나 중국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섬에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문장가들이 많다는 뜻인 '거문(巨文)'으로 개칭하도록 건의하여 거문도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1396년 흥양면(현 고흥군)에 속하였고, 1701년에 통영으로 군정을 이관하여 별장을 두다가 1855년 흥양현으로 복귀하였다. 1885년(고종 22)에는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구실로 이 섬을 불법 점령한 거문도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때에는 해밀턴 항구라고도 불렸다. 1887년 영국군이 철수한 이후로는 일본의 해군이 이곳에 주둔하였고, 1905년 한일협약이 체결된 후로는 일본의 민간인들도 본격적으로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1896년 거문진을 폐하고 초도, 손죽도를 상도, 거문도를 하도라 하여 돌산군에 편입시켰다. 1910년 상·하도를 합해 삼산면이라 하였다. 1914년 여수군에 편입되고 1949년 여천군에 속하였다가 1998년 여수시로 통합되었다.
세 개의 섬이 병풍처럼 둘러쳐서 1백만 평 정도의 천연적 항만이 호수처럼 형성되어 있는 곳을 도내해(島內海)라고 하는데, 큰 배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항구 구실을 하고 있다. 입지적 여건 때문에 거문도항은 옛부터 빈번히 열강의 침입을 받아왔다.
최고봉인 동도의 망향산(247m)을 비롯하여, 서도의 음달산(237m)·수월산(128m) 등 비교적 경사가 급한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은 작은 돌출부가 많고 드나듦이 심하다. 대부분 암석해안이며 동도의 남쪽 해안은 높은 해식애로 이루어져 있다. 1월 평균기온 2℃ 내외, 8월 평균기온 25℃ 내외, 연강수량 1,361.7㎜ 정도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고구마·감자·마늘·보리·콩·유채·참깨·양파 등이 생산된다. 연안 일대에서는 삼치·멸치·장어·도미·갈치 등이 주로 잡히며, 자연산 굴·미역·조개류 등이 채취된다.
섬 일대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섬 안에는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당시 이곳에서 사망한 영국군 수군묘비와 영국군이 설치한 해밀턴 테니스장, 거문도해수욕장과 한나라 시대 오수전이 발견된 서도해수욕장, 신지끼라는 인어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신지끼여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주민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전해지고 있는 《거문도 뱃노래》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 3개교, 초등학교 분교 6개교, 중학교 2개교가 있다. 서도의 남단과 북단에 등대가 있다. 360여 년 전 추씨가 처음 거주했다고 전해지며,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에는 추씨 할머니를 수호신으로 모시는 제사를 지낸다.
[청산도항~여서도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여서도
[청산도항~여서도항] 구간 운항
여객선에서 바라본
여서도 무인등대가 있는 암봉
여서도항에 도착한
섬사랑7호 여객선
여서도항에서 바라본
여서도 무인등대
여서도 표지석에서
이성수
여서도 표지석
여서도(麗瑞島)
완도권 최남단 천혜의 아름다운 섬
요약 : 여서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7°55′, 북위 33°59′에 위치하며 면적 2.51km2, 해안선 길이 10km,
최고점은 362m(여호산). 인구는 48가구 84명(2010년)이다.
지명 유래
‘여서도(麗瑞島)’라는 이름은 1945년 이후에 붙여졌으며 ‘천혜의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태랑도(太郞島)’라 불렀다고 한다.
대륙의 끝 그 너머에 바다가 있고 그 바다 위에는 섬이 있다. 한반도의 남서쪽 끝자락, ‘섬의 바다’ 다도해에서도 신안군 72개 다음으로 섬이 많은 곳. 바로 완도다. 265개 섬들 중 55개 섬에는 사람이 살고 나머지는 인적이 없는 무인도다. 완도는 전에는 뱃길을 따라가야 했는데 이제 대교 하나만 건너면 쉽게 육지에서 닿을 수 있다. 완도교를 지나 청해진에 닿으면 해상왕 장보고의 흔적들도 찾아볼 수 있다.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윤선도의 유적지 보길도와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청산도까지 완도에는 볼거리가 넘쳐 난다.
특히 완도 선착장에서 배로 세 시간 정도 거리인 완도 최남단의 섬 ‘여서도(麗瑞島)’는 하루에 배가 두 번밖에 닿지 않는 자연의 풍광을 그대로 지닌 섬이다. 긴 세월 거친 바닷바람에 맞서기 위해 담의 높이가 지붕의 처마까지 닿는 이곳은 대자연 속에서 이어 온 인간의 끈질긴 삶의 흔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지도에도 없는 섬, 여서도는 면적 2.51km2, 해안선 길이 10km로 40여 가구 8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완도에서 남동쪽 41km 거리에 있으며 제주도와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는 외딴섬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태랑도(太郞島)’라 불렀으나 1945년 이후에 ‘천혜의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에서 여서도로 불리게 됐다. 1950년대에는 최대 240여 가구 1,200명이나 살았고, 1968년도만 해도 여서초등학교의 학생수가 180명이나 됐다.
『완도군지』에 따르면 고려 때인 1077년(목종 10) 탐라(제주) 근해에 일주일간 대지진이 지속된 뒤 바닷속에서 큰 산(섬)이 솟았다고 한다. 고려의 ‘려’자와 상서롭다는 ‘서’자를 따 ‘여서(麗瑞)’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몇 년 전에 여서도에서 발견된 패총이 7,000년 전 신석기 시대 유적일 정도로 이 섬의 사람 살이 역사는 길다. 여서도는 외딴섬이라서 그전에는 왜구들의 침범이 심했을 것이다. 근세에 사람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690년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00년 가까이 지난 다음에 진주 강씨가 여서도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이다.
‘아름답고 상서롭다’는 뜻의 여서도는 아직까지도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섬이다. 특히 30~40m 깊이의 바닷속이 훤히 보일 만큼 맑아서 “여서도로 시집가던 새색시의 앞섶이 풀어지며 옷고름이 바닷물에 빠져 황급히 들어 보았더니 옥색으로 물들어 있더라”라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물이 깨끗한 섬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어종과 동식물은 보호할 가치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 특산물인 자리돔(생이리)이 완도에서는 유일하게 이곳에서 잡히고 있다. 주민들의 생계 수단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한다. 농산물로는 고구마·쌀·보리·콩·참깨 등이 소량 생산된다. 근해에서는 도미·숭어·도다리 등이 잡히며, 자연산 돌미역·해삼·전복 등이 채취된다. 여서도 해녀들이 주로 채취하는 것은 미역·소라·전복·해삼 등. 특히 여서도의 자연산 돌김·김·톳·미역·파래는 육지 가까운 데서 양식한 것과는 색깔과 맛이 다르다. 그리고 여서도의 자연산 해초는 최상급으로 그 중에서도 봄에 처음 따는 미역인 초각은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여서도는 완도 섬들 가운데 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청산도와 제주 추자도 중간에 있다. 직선거리로 제주까지 약 40km이며 완도까지는 41km, 여수의 거문도까지는 30km이다. 지금 이 섬에는 제주도 출신 아낙네들이 몇 명 있다. 여서도와 제주도가 가깝다 보니 이곳으로 물질을 왔다가 여서도 총각과 눈이 맞은 것이다. 제주도 해녀들이 한번 물질을 오면 계약 기간 때문에 오랜 기간 머물러야 했다. 또 돌아가고 싶어도 여객선도 없고 지금처럼 빨리 달리는 배가 아니어서 마음대로 섬을 떠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외해의 여서도의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섬에 발이 묶이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러다 보니 젊은 처녀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갇혀 있다 보면 자연스레 섬 총각과 가까워졌고 섬을 나올 때면 어느덧 애 엄마가 되었다. 속된 표현으로 ‘파도가 거셌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섬 남자들과 ‘눈이 맞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 사이에선 “여서도에 가면 애 배야 나온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러한 여서도의 사랑 이야기는 도회지의 이기적인 사랑과 거리가 먼 정말로 인간적인 외로움 때문에 정을 나누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여서도는 옛날부터 제주 풍선(風船)들이 육지로 오면서 이곳을 지날 때면 산돼지를 섬 앞바다에 던져 무사히 지나갈 수 있도록 용왕님께 빌었을 정도로 파도가 세차다. 그 대신 고기가 잘 잡혀서 먹을거리로 괜찮다. 이곳 사람들은 자녀를 유학 보내고 육지에 몇 백 평씩 소작지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자유당 시대의 국회의원 김선태 씨와 김수근(조선대 법대 학장) 등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한때 동력선이 40여 척 있고 고졸 이상의 유학생이 열아홉 명이나 있었다.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이 불편해도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은 있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물이 부족한 보통 섬과 달리 이곳 여서도에는 7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은 샘이 아직도 파랗게 솟아나고 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섬 밖에서 들여오는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섬에서 나는 물맛이 워낙 좋아 집에서 직접 누룩을 띄워 진한 농주 마시기를 즐기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너무 가난한 섬이기에 ‘처녀가 시집갈 때까지 쌀 세 말을 못 먹는 곳’이 청산도라면, 여서도는 ‘평생을 살아도 쌀 한 가마니를 못 먹는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먹을거리가 궁하고 가난한 섬이다. 이곳에 30~40대는 10여 명 안팎이다. 나머지는 모두 고령의 노인들뿐이다. 생활보호 대상자가 17명, 독거노인이 20여 명으로 섬을 떠나고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많아 빈집도 많다.
완도에서 여객선으로 4시간 정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외딴섬 여서도로 향한다. 완도항에서 하루 한 번 출발하는 여객선 섬사랑7호가 이 외딴섬과 육지를 이어 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오후 2시에 완도항을 떠난 섬사랑7호는 소모도-대모도-장도-청산도-여서도를 향한다. 이 여객선은 여서도에서 일박을 한 후 아침 7시 30분에 출발하여 청산도-장도-대모도-소모도를 거처 완도항에 입항한다. 그런 뒤 잠시 쉬었다가 오후 두 시에 다시 여서도를 향하여 뱃고동을 울린다. 세계가 지구촌 시대이며 전국이 일일 생활권에 들어간 지 오래이지만 여서도는 한번 들어가면 반드시 일박하고 그 다음 날 아침 일찍이 나와야 한다.
완도항을 떠난 여객선이 큰 섬 청산도까지는 별 일 없이 잘도 간다. 그러나 청산도를 지나면서부터 먼 섬 여서도까지의 물길은 뱃사람들도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바다를 상대하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말 중에 “여자 속마음과 잔잔한 바다는 믿지 말라”고 했듯이 바다는 항상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범선도 아니고 통통배도 아닌, 배가 크고 속도도 빨라서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 오히려 그러한 추억이 여서도로 향하는 여행길을 풍성하게 해 준다. 여서도는 먼 바다에 속하는 섬이라 파도가 조금이라도 높은 날에는 결항되기 일쑤. 특히 겨울철에는 더욱 그렇다.
여서도에 닿아 마을을 돌아보니 일반 도서와는 다른 특이한 점이 많아 후일 집중적인 인류학적 조사가 필요한 민속의 섬으로 보였다. 여서도 주민들이 이렇게 먼 바다에서 살아갈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배를 댈 수 있는 선착장 덕분이다. 어머니의 품속과 같다는 이 섬의 생명과 같은 선착장은 이제 현대 시설인 방파제로 변해 바다 바깥쪽으로 나와 있고 외해에는 콘크리트 삼발이가 많이 심어져 있다. 양쪽 긴 방파제 끝에는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반긴다. 섬의 모양은 거의 원형이며 동서남북 각각의 해안에 작은 만이 형성되어 있다. 해안은 대부분 암석 해안이며 곳곳에 높은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북쪽 해안에 형성된 만의 연안 일대에는 집채만 한 바위들이 산재해 있어 특징적인 경관을 이루고 있다.
여서도는 매립으로 이루어진 물양장이 제법 넓고 큰 편이다. 운동장으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넓다. 그러나 여느 항구처럼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아 보인다. 하얀 등대가 있는 방파제 쪽의 산을 깎아 매립한 흔적이 보인다. 이곳은 6~7년에 걸쳐 방파제 공사가 끝이 났다. 오래전에 매립 공사를 하는데 660억 원대 공사가 태풍을 두 번이나 맞아 보수하느라 1,000억 원대 공사가 되어서야 끝났단다.
이곳 주민들은 청정 해역에 있는 아름다운 섬에 환경 훼손이 심각하다고 하소연 하였다. 그리고 환경 오염은 물론이고 자연 경관 훼손, 방파제 공사로 조류 소통을 막아 마을 앞 바닷물이 정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방파제에 원활한 조류 소통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과 마을 오폐수 처리장 시설이 절실하다는 주장이다. 개발도 중요하지만 환경 보호도 절실하다는 모습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선착장에서 마을과 선착장이 있는 남쪽 해안이 전부 한눈에 들어온다. 물양장 가장자리에는 마을 표지석이 단순하게 세워져 있다. 그 뒤로 ‘여호 리조트’라는 표지석이 있고 거기에는 조그마한 건물이 있는데 민박(2층)겸 슈퍼(1층)다. 흔히 볼 수 있는 횟집이나 번듯한 건물은 발견할 수 없고 자그마한 민박 간판이 전부다. 선착장에는 크기에 비해 배들은 별로 없다. 모습은 예전 포구 그대로다. 그 뒤로는 언덕인데 주위에는 예전에 군 시설로 썼을 낡은 콘크리트 시설물들이 나란히 있다. 초소와 막사로 사용되었을 건물들이다. 그 앞에는 ‘여서도 치안 센터’ 파출소가 있다.
포구 쪽에 자리 잡은 마을은 거센 바람을 피하기 위해 높은 돌담에 둘러싸여 지붕들만 보인다. 해안이 좁은 탓에 집들은 산자락에서 산 중턱으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담장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바람이 많은 지역이라 그런지 온통 돌담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제주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높이도 3m 이상은 됨직하다. 거기에다 골목길도 자전거 하나 다닐 수 없는 계단에다 좁은 편이다.
얼마나 급경사 지대에 집을 지었는지 모든 집은 앞집과 뒷집이 돌담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높고 튼튼한 돌담길을 따라가면 몹시 구불구불하며 미로처럼 얽혀 있다. 도로도 좁은 탓에 경운기나 오토바이가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무거운 짐들은 지게로 힘들게 지고 날라야 한다. 집의 담장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돌담들은 오래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작은 섬에서 왜 이토록 높은 돌담이 필요했을까? 여름에는 태풍과 파도를 막아 주고, 겨울에는 북풍이라는 자연의 재해를 막기 위해 환경이 만들어낸 예술품 같은 것이 바로 돌담인 것이다. 그 많은 섬은 다 어디로 가고 바람과 파도를 막아 줄 무인도 하나 없는 넓은 바다에서 자연 앞에 늘 불안하여 바람과 파도의 공격을 막아 내려고 이곳 사람들은 돌담을 저토록 높이 쌓았다. 이것이 여서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 양식이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20년이 넘게 섬을 다니지만 이토록 원형이 남은 돌담은 섬 가운데 최고라 하겠다.
마을 뒤로 갈수록 길은 없어지고 산길이 이어지는데 집들이 거의 폐가들이다. 마치 성벽처럼 층을 이루고 있다. 밭도 그렇게 큰 편은 아니고 작은 것들이 주를 이루고 그 옆으로는 개울이 흐른다. 이것을 ‘다랭이 밭’이라고 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다랭이 밭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평지가 없고 경사진 곳을 이용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왼쪽은 계곡인데 계절 탓인지 모르겠지만 흐르는 물은 없다. 그러고 보니 마을은 계곡 사이로 형성되어 있다.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면 밭이 나타난다. 밭에서 보는 마을 풍경이 조금은 억척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밭도 그렇게 넓은 것이 아닌 조그마한 것들의 연속이다. 밭에는 흑염소들이 제법 보이는데 대부분이 묶여 있다. 벌어먹고 살 논도 없고, 마을 산비탈을 깎아 마을이 형성되어 리어카도 들어가기 힘든 척박한 땅이다. 여서도는 먼 바다에 홀로 떠 있기에 바람과 파도 때문에 바다 양식도 불가능해 오로지 고기잡이에 의존해 사는 곳이다. 서로 돕지 않으면 살기 힘든 섬.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남의 일도 자기 일처럼 도우며 가족처럼 산다.
현재 여서도에는 낚시꾼들을 위한 민박 두 곳과 가게 두 곳이 문을 열고 있다. 이 작은 섬은 낚시꾼들에겐 익히 알려진 명소다. 낚시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여서도를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다. 뱅어돔·감성돔·돌돔·해삼·전복 등 어족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섬이라 이곳을 찾은 낚시꾼들만이 늦은 밤까지 밤낚시로 활기를 띤다고 한다. 봄에는 볼락, 여름에는 돌돔, 가을에는 참돔, 겨울에는 감성돔이 잡힌다.
마을 회관 방향으로 가면 그 앞에 새로운 마을 표지석이 있다. ‘신비의 섬 여서도’라고. 표지석 바로 옆에는 마을 주민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는데 부부의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표석이 있는데 마을 연혁이 새겨진 표지석이다.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 같은데 이것에 의하면 2008년에 여서도에는 9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에 새겨진 주민 이름들도 모두 90명이다. 이 뒤에는 마을 회관이 있고 그 옆으로는 창고인 듯 보이는데 창고 한 쪽에 부녀 회관이 입주해 있다. 이 앞에는 팔각정 쉼터가 있다.
또 다른 골목 입구에 보건 진료소가 있으며 그 모퉁이에 이정표가 있다. 민박 간판이 있는 돌담 옆에는 마을의 시설물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데 ‘등산로 입구’라고 쓰여 있다. 6개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서 여서항까지 5.11km라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 바퀴 도는 형식으로 표시한 것 같다. 여기서 이 섬의 가장 높은 곳인 여호산 정상까지는 거리가 2.36km란다. 여호산의 해발은 무려 352m다. 여서도의 산은 산림이 상당히 우거져 있어 밀림을 연상하게 하고 육지의 산과는 달리 나무가 우거져 있어 산에 들어가기 힘들 정도다.
마을 안쪽에는 섬마을 교회가 있고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청산초등학교 분교인 여서초등학교가 있다. 섬에서 유일하게 문화를 접하고 향유할 수 있는 곳이다. 시멘트 계단으로 된 입구에는 두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왼쪽에는 ‘여서도 31번 길 22-8’ 그리고 오른쪽에는 ‘청산초등학교 여서분교장’이 붙어 있다. 문이 없는 교문에서는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계단을 타고 오르면 바로 운동장. 잡초들로 인해 조금은 폐허가 된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그 뒤로 높은 곳에 학교 건물이 달랑 하나 있다. 기숙사 등 부속 건물은 학교 바로 바깥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여서도에 하나밖에 없던 초등학교 분교였는데 문을 닫았다. 섬의 유일한 학생이었던 주훈이가 중학생이 되어 완도 본섬으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이다. 바다가 유일한 놀이터인 섬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다.
학교 옆에 여서도 내연 발전소를 뒤로하고 높지 않는 산 정상에 올라가니 여서도 앞바다를 비추는 무인 등대가 태양광으로 작동하고 있다. 등대를 둘러싼 철조망 울타리는 통째로 기울어져 있다. 여기서 아랫마을과 물량장, 항구의 배들과 건너편 산 중턱에 있는 밭이 보인다. 지금은 거의 휴경지이지만 비탈 밭은 남해의 다랭이 논처럼 섬 살이의 고단함을 보여 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여서도는 바다의 한 가운데 있다 보니 풍선들이 각종 화물들을 싣고 가다가 여서도에서 바람을 기다렸고, 전남 강진에서 옹기를 싣고 가다가 바람을 기다렸다. 여서도는 서울에서 목포를 가는 데 KTX가 통과하는 광주의 송정리역 정도로 비교할 수 있다. 지금은 배들이 크고 빠른 동력선이기 때문에 먼 바다까지 진출하며 자녀 교육과 편리함 때문에 항구 도시에 생활권을 둔다.
완도가 여서도 사람들의 생활권이 된 것은 1968년 완도교가 생기고부터이다. 전에는 완도 역시 섬이었고 도시와 교통이 불편하였다. 그래서 60~70년대 이곳 사람들은 멀리 있는 여수가 생활권이었다. 어선들이 여수에서 잡은 고기를 팔고 생필품을 사들고 왔다. 그 당시 고기잡이 동력선만 50여 척이 철 따라 고기를 많이 잡았다. 냉동 시설이 미비한 그때에 잡아 온 삼치나 갈치, 고등어를 소금으로 염장해서 여수나 녹동으로 팔러 다녔다. 섬으로 돌아오면서 지붕 이을 볏짚과 식량 등 겨울을 날 곡식을 싣고 왔다. 식구가 많은 그 시절 보리가 나올 때까지는 온 식구가 그 식량으로 버텨야 했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갈치 잡이 철이면 뭍의 장사꾼들이 생필품을 들여와 생선과 바꾸어 가기도 하였다.
과거에는 이 조그만 섬에 수많은 사람이 북적이며 살았으니 생존 경쟁이 치열하였다. 바다 일 못지않게 농사도 큰일 중 하나였다. 바람이 불거나 날씨가 좋지 않으면 밭으로 달려 나가고, 가축을 기르며, 그물 일을 하고, 산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고 곡식 거두는 일에 필사적이었다. 나무와 숲이 우거진 관계로 약초가 많이 자라기 때문에 약초를 캐다 약초 수집상들에게 넘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는 어업으로 크게 재미를 봤지만 지금은 예년만 못하다. 과거의 어장은 6월부터 9월까지 송진과 솔로 만든 횃불로 멸치잡이를 하고 4월부터 9월까지는 미영(목화)을 타서 물레로 실을 짜서 낚싯줄을 만들어 고등어 잡이를 하였고 7월부터 10월까지는 낚시로 갈치 잡이를 하였다. 건착망(巾着網) 어선이 번성하면서 과거 방식은 없어졌고 현재 고등어 잡이는 안강망(鮟鱇網) 어선이 주로 한다.
당시 멸치잡이를 하던 11명이 승선하는 이앵이배가 있었고 1930년경부터 5장대 배가 나타났다. 이 배에는 12~15명 선원이 타며 10개의 창고가 있다 하여 열간 답이라고도 불렀다. 이 배는 10~15년 전에 없어졌다. 참고로 1장대는 5자에 해당한다. 배의 멸치잡이 어부들이 밤에 뱃전을 치면서 소리를 내면, 멸치들이 튀어 오르면서 횃불을 쫓아 그물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선주는 선원을 모으기 위하여 선원에게 선금으로 보리 한 가마를 주었다. 일단 선원들이 구성되면 6월부터 9월까지 모두 행동을 같이 했다. 잡은 멸치는 전부 16짓(선원 12명에 12짓이고, 뱃짓이 4짓이다)으로 나누었고 나머지는 술값으로 썼다. 멸치의 양으로 보면 1짓이 1통체리(1통체리는 16통)에 해당한다. 한 배가 잡아오는 양이 15통체리로 240통이 된다.
하지만 이곳은 20년 전부터 멸치잡이를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안강망들이 제주 해협에서 멸치 떼를 미리 잡아버리기 때문에 이곳까지 멸치가 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최근에 한우를 방목하여 수입을 올리고 있다. 원래 이곳에는 소 방목으로 유명한 곳으로, 산을 타는 건강한 소들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 소들은 외지에서 3월 초에 사 들여와 봄철에 산에서 방목하면 겨울에 훈련된 소가 되어 민가로 돌아온다. 20여 가구 주민이 소를 키우고 있는데 운동을 많이 한 여서도 소는 근육이 발달해 육회용으로 많이 찾는다.
또한 이곳 여서리에는 전답이나 마찬가지인 황금 바다를 지키기 위하여 주민들의 배가 매일 갯바위 주변을 순찰한다. 외지 선박이 불법 조업(뻥치기)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자체적으로 돈을 거둬 고향의 바다와 삶의 터전을 목숨처럼 지키고 있다. 정정석 이장님은 “타지 배들이 조업을 하거나 불법 조업을 하고 나면 감성돔이나 농어, 숭어 등 고기가 전혀 잡히지 않는다. 해경과 행정에 진정도 했지만 현장에서 잡지 못하면 현행법상 법적 제재를 할 수 없는 입장이어서 단속이 어렵다고만 한다. 더구나 불법 어장을 하는 것을 뻔히 알고도 잡을 수가 없다. 여서도 주민의 낡은 배로는 타지 배들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서리 주민들은 다른 지역에서 온 조업 어선들이 800m 안으로 들어오지 말 것을 당부했다. 특히, 불법 어업을 엄격히 단속할 강력한 법 규제를 마련해서라도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를 침범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건의했다. 여서도 인근 바다에서 불법 어업 행위가 계속된다면 마을 사람들은 몇 년 후쯤이면 고향 섬을 등지고 모두 떠나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서도를 떠나면서 되돌아보니 여서도는 너무나 외로운 섬이다. 그러나 이러한 섬의 전통적인 모습이 낚시꾼들과 인터넷 매체를 통하여 외부에 알려지고 있다. 너무나 외해이면서 홀로 떨어져 있는 관계로 수산 양식은 파도와 바람과 바다 깊이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섬이었다. 오로지 자연산 해초와 고기들이 많아 낚시꾼들의 천국이다. 다이버와 산과 바다의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곳에서 1년 중 몇 개월 살면 딱 좋은 섬이다.
여서도는 이제 마지막 남은 청정 지역이다. 이곳은 바다만 좋은 것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과 계곡에서 솟아나는 샘물도 좋아 매년 휴가를 보내고 싶어진다. 우리나라에서 손꼽을 정도의 먼 섬인 탓에 우리네 60년대 사람들의 인심이 그대로 살아 있는 여서도는 시간이 멈춰 버린 듯 늘 그리움과 고독의 섬으로 남아 있다.
여서도항의 고래 조형물에서
이성수
여서도항의 고래 조형물
여서도항의 고래 조형물에서
이성수
2024년3월2일 1박한
여서도항 근방에 있는 승혜네 집
승혜네 집 2층의 방
승혜네 집 2층의 방
2024년03월01일(금요일) 출발 2024년03월03일(일요일) 귀경 완도군 [완도&여서도&청산도] 여행기
회비 225,000원 1월29일 송금 완료, 28번 좌석 예약
2024년03월01일(금요일) 23:59시~ 2024년03월02일(토요일) 04:58시 “좋은사람들” 버스로 양재역 12번 출구 전방 국립외교원 앞에서 출발하여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보고대로 339 번지에 있는 완도연안여객선터미널로 이동 [432km] [4시간59분 소요]
2024년03월02일(토요일) 여행기
* 04:58~05:25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보고대로 339 번지에 있는 완도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보고대로 302-1 번지에 있는 청산신흥식당으로 이동
* 05:25~06:00 청산신흥식당에서 백반정식으로 아침식사
* 06:00~06:07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보고대로 339 번지에 있는 완도연안여객선터미널로 회귀
* 06:07~07:00 완도항에서 청산도항으로 가는 여객선 승선권 발권 후 승선 대기 (신분증 준비)
* 07:00~07:52 여객선을 타고 전남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 1255 번지에 있는 완도 연안여객선터미널을 출발하여 전남 완도군 청산면 도청리에 있는 청산도항으로 이동 (21km) [52분 소요] [여객선 승선요금 : 7,700원]
[2024년03월02일 전라남도 완도군 일출시각 : 7시1분] [퀸청산호 여객선 선상에서 일출광경을 감상]
07:52~08:40 청산도항에서 여서도로 가는 섬사랑7호 여객선 승선 대기
[섬사랑7호(청산/여서/완도) 운항시간표
항 차 기 항 지 입항 시간 출항 시간
1항차 여 서 07:00
청 산 08:00 08:05
장 도 08:17 08:20
청 산 08:30 08:40
여 서 09:40 09:55
청 산 10:55 11:00
장 도 11:15 11:18
모 동 11:40 11:43
완 도 12:33
2항차 완 도 15:00(14:50)
모 동 15:50(15:40) 15:55(15:45)
장 도 16:17(16:07) 16:20(16:10)
청 산 16:35(16:25) 16:40(16:30)
여 서 17:40(17:30)
2항차()는 동절기 시간표
여객·화물(차량) : 여서도 주민 우선 승선·승차
장도 유·무선 확인 승객 없을 시 未기항
기항지별 전화 사전 예약으로 未기항지가 있을수 있으니 회사 또는 선박으로 문의 필요 ]
08:40~09:56 섬사랑7호 여객선을 타고 전남 완도군 청산면 도청리에 있는 청산도항을 출발하여 전남 완도군 청산면 여서리에 있는 여서도항으로 이동 (24.4km) [1시간16분 소요] [승선요금 : 8,800원]
09:56~10:00 여서도항 근방에 있는 승혜네 집으로 이동
10:00~11:20 승혜네 집 2층 방으로 입실하여 짐 정리 후 휴식
11:20~11:56 승혜네 집 1층 식당에서 점심식사 [식사 제공]
산 : 완도군 여서도 여호산(352m)
[한국의 이스터 섬, 여서도
2016년 10월 섬학교 <여서도 돌담 특집>
프레시안 기사입력 2016.09.06. 22:26:34 최종수정 2017.11.01. 22:11:41
돌과 바람의 왕국, 한국의 이스터 섬, 여서도.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는 10월 1(토)∼2일(일), 제52강으로 완도 앞의 전설 같은 섬 여서도로 떠납니다. 완도에서는 하루에 한 번밖에 배가 다니지 않는 낙도라 심야인 10월 1일 0시에 서울을 출발해 여서도로 갑니다.
여서도는 한국에서 돌담이 가장 아름다운 섬입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고 거대한 돌담들이 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마을의 집들은 가파른 비탈에 서 있고 그 반은 돌집입니다. 작은 마을이지만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초행의 나그네는 길을 잃고 헤맬 정도지요. 바람 때문에 밭들까지도 돌담을 쌓았는데 그래서 마을의 돌담들은 모두가 하나로 이어진 거대한 성곽 같습니다.
오로지 이 돌담 하나 보기 위해 여서도로 갑니다. 여호산 트레킹 길도 있지만 가을에는 뱀들이 지천이라 산에 오르기 위험합니다. 그러니 이번 여서도 길은 오로지 마을의 돌담을 거닐거나 낚시를 하거나 해변에서 멍하게 앉아 있거나 아무튼 최대한 한가롭게 지내다 올 예정입니다. 트레킹을 원하는 분은 이번에는 참아주세요 민박집이 작아 선착순 25명만 함께 합니다. 완도에서는 구계등 해변과 상록수림도 거닐다 옵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0월 답사지인 <돌과 바람의 왕국, 여서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돌과 바람의 나라
완도항을 출항한 섬사랑3호는 청산면의 여러 섬들을 거처 여서도로 향한다. 여객선은 완도와 여서도 사이를 하루 한 번 왕래하는 정기선이지만 난바다의 드센 파도로 결항이 잦다. 떠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배다.
완도에서 여서도까지 직항로는 40여 킬로. 여객선은 쾌속선으로 50분 남짓이면 족할 거리를 세 시간에 걸쳐 항해한다. 여서도는 완도군의 200여 개 섬들 가운데서도 낙도다. 육지의 오지처럼 바다의 낙도를 가리는 지표는 거리가 아니라 접근성이다. 소모도와 대모도, 장도, 청산도 등의 기항지를 돌고 돌아 여서도에 입항한 배는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서둘러 회항한다.
무엇일까. 나그네를 섬으로 데려온 것은. 돌집들, 민가의 담장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고 거대한 돌담들. 이 섬은 돌과 바람의 나라다. 오래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섬은 마치 사라진 잉카나 이스터 섬의 유적처럼 경이롭다. 이스터의 거석 문명은 붕괴했지만 여서도의 돌 문명은 현존한다. 돌들이 나그네를 섬으로 이끌었다. 이런 섬의 모습이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마을의 집들은 가파른 비탈에 서 있고 그 반은 돌집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있어 나그네는 길을 잃기 쉽다. 이 나라 어느 마을, 어느 섬에서도 나그네는 저토록 장대한 돌담들을 보지 못했다. 궁궐의 담장도 이보다 높지는 않을 것이다. 돌담들에 둘러쌓인 마을은 마치 거대한 성곽도시 같다. 작은 섬에 어째서 이토록 큰 요새가 필요했던 것일까. 왜구나 해적들도 사라진 바다에 막아야 할 어떤 적이 더 있는 것일까.
흩어져 있는 돌들을 불러모은 것은 누구일까. 바람이었을까. 바람의 침략 앞에 섬은 늘 불안한 것일까. 섬에서 해적보다 무서운 것이 바람이다. 바람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사람들은 돌담을 저토록 높이 쌓았다. 돌담들은 거주 공간을 분리시켜 주는 동시에 하나로 굳건히 연결되어 섬을 보호한다. 높이 5미터가 넘는 돌담들은 아무리 큰 바람도 막아낼 수 있는 철옹성이다. 바람을 막아줄 무인도 하나 없이 큰 바다를 앞에 두고 산비탈에 의지하여 살 수밖에 없는 섬의 지형이 이런 주거문화를 만들어냈다.
여서도를 찾는 여행자는 희귀하다. 외부인은 대부분 낚시꾼이거나 공사장 인부들이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니 밭에도 돌담이 있다. 사람이 떠난 뒤 집을 허물고 밭을 만들었으나 돌담은 남겼다. 바람으로 인해 돌담은 소멸을 면했다. 바람은 자기 적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돌담이 없는 곳은 마대자루를 이어 붙여 바람막이를 했다. 고장 나 못쓰게 된 텔레비전조차도 담장으로 쓰였다.
“다 내빌고 가지라우”
북향한 섬마을, 겨울 해는 짧다. 어두워가는 골목, 돌담길을 따라 걷는다. 어느 집 대문간에 연기가 자욱하다. 할머니는 마른 풀을 태워 아궁이 불을 지핀다. 금새 사그라드는 불길을 뒤쫓느라 손놀림이 바쁘다. 산에 나무가 울창해도 땔감을 하러갈 힘이 없어 장작불은 엄두도 못 낸다. 가마솥 안에는 소먹일 여물이 끓는다. 여서도의 소들은 소막에서 키워지거나 산에 방목된다.
"아저씨는 자망하고, 나는 소 키고. 나가 핵교도 안 댕기고, 암 것도 몰라라우."
노부부가 할아버지는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할머니는 소를 키우며 산다.
"시킨 일만 하고 부모네 밑에서 살아나서 나는 참말 암 것도 몰라라우. 말도 배와야 하제. 할지도 몰라라우. 우리 애들은 고생도 징하게 했고. 씨어머니, 씨어머니 모시고 삼시로 애들 겔친디 한 번도 못 가봤어라우. 밥 한 끼 못해 줬어라우."
시어머니 모시고 외딴 섬에 사느라 뭍에 나가 공부하는 자식들 한 번도 찾아가 보지 못했던 것이 할머니의 평생 한으로 남았다.
"딸 다섯, 아들 둘인디, 다들 잘 사는디 큰 아들만 학굘 댕기다 말아서 군산에서 배하고 산다우. 저는 배 안타면 좋겠다고 합디다마는 지가 공부 안 했는디 인자 후회하면 머 하꺼시오. 안산서는 딸 하나가 산디, 노화도 사람하고 살어라우. 노화 대당리."
낯선 말소리에 할아버지가 뒤 안에서 나온다.
"요새는 당최 도미가 안와요. 전에는 감생이(감성돔)도 많이 들었는데. 아주 안와. 고기 잡으면 완도까지 싣고 가서 경매 하는디, 우리 배로 왔다갔다 하면 세 시간, 딸뿍딸뿍 하면 세 시간 반이 걸리고. 아주 숨이 왔다갔다 하지라우."
풍랑이라도 거센 날이면 물고기를 싣고 완도까지 내왕 하는 뱃길이 저승의 문턱처럼 위태롭기도 하다. 예전에는 제주 해녀들도 많이들 물질하러 왔었다. 그래서 '제주 처녀 여서도 들어가면 애 배야 나온다'는 말도 생겼다. 할머니는 그 시절이 꿈속 같다.
"물질은 제주서도 오고 여그 사람도 하고 그랬어라. 그때가 사람 사는 것 같았지라우. 그래도 제주서 들어와 산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어라우. 큰 제주 작은 제주가 살았었는디 지금은 모다 돌아가셨지라."
큰 제주는 먼저 시집와 산 사람이고 작은 제주는 나중에 시집온 사람이었다. 외딴 섬이지만 여서도는 지금보다 옛날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어장에 고기가 말라 이제 더 이상 외지 배들이 오지 않는다. 완도의 다른 섬들과는 달리 바람막이가 없는 난바다의 섬인지라 바다 양식도 여의치 않다. 그러니 섬에 들어와 살려는 젊은 사람도 없다. 섬은 적막하고 섬은 아주 늙어버렸다.
요즈음은 섬의 장례 풍습도 바뀌었다. 사람이 죽어도 산이 아니라 완도로 간다. 메고 가 묻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죽어도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하게 된 사람들. 나이 들고 병들어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는 노인들은 자식들을 찾아 뭍으로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생애와 하직한다.
"다 내빌고 가지라우. 몸만 가제. 아깐 집조차, 밭조차 다 내빌고 가제라우."
다 버릴 수 있다는 장담은 쉽지만 실상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가진 것 모두를 버리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은 뒤에는 무엇 하나 가져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기어코 손에 쥐고 죽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여서도의 노인들은 살아서 모두를 버린다. 섬을 떠나는 것이 곧 삶을 떠나는 것이니 가능한 일이다.
"어더지요. 어서 가씨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민박집으로 돌아가라고 할머니는 등을 떠민다.
바람이 묻어온 이야기
8000년 전 신석기 시대 유적이 출토되었을 정도로 이 섬의 사람살이 역사는 길다. 하지만 근세에 사람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말경이다. 그때 처음 먼 바다를 건너 섬에 정착한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갈 곳 없어 숨어들어온 외딴 섬. 섬이 숨어 살 만하다 생각했겠지.
그러나 그런 생각은 열흘도 못 갔을 것이다. 섬은 숨어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갇혀 지내야 하는 곳이다. 숨고 드러냄은 선택이지만 갇히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다. 옛날 이 난바다의 섬에서 바다를 건너는 일은 곧 생사를 건너는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 때문일까 뭍에서 먼 섬일수록 사람들의 세계관은 숙명적이다.
여서도는 완도와 제주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직선으로 가면 제주도 조천이 40여 킬로 거리다. 여수의 거문도까지는 30킬로, 완도나 제주보다 가깝지만 서로 왕래하지 않는 두 섬은 전혀 다른 세계의 섬들이다. 옛날에는 여서도를 ‘작은 제주’라 했었다. 거리도 가깝고 풍토도 비슷했던 까닭이다. 여서도의 정정석 이장은 오랫동안 마을 이장을 했던 선친을 옆에서 지켜본 탓에 60, 70년대 여서도의 생활상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선친이 여서도 이장을 할 때는 이장을 보좌하던 이 서기까지 있었다. 그는 80년대에 완도로 이주했다가 5년 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서도는 여서리 200-1번지에서 시작되어 500번지에서 끝난다. 한때 이 작은 섬에 300가구까지 살았다는 증거다. 인구가 줄어 193세대였던 1968년도만 해도 여서국민학교의 학생수가 180명이나 됐다. 지금은 학생이 둘뿐이다. 옛날의 여서도는 제주와 육지의 중간 기착지였다. 여름에는 제주에서 수박이나 과일들을 싣고 가던 풍선(風船)들이 여서도에서 바람을 기다렸고 가을이면 전라도 강진에서 옹기를 싣고 온 풍선들이 바람을 기다렸다. 제주의 고기잡이배들도 많이 들락거렸다. 심지어 그 뗏목처럼 위태로운 테우(떼배)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너와 자리돔을 잡아가는 제주 어부들도 있었다.
완도 본토가 완도군 섬사람들의 생활권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68년 완도대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완도 역시 섬이었고 대도시와 교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래서 60~70년대 여서도 사람들은 완도로 나다니지 않았다. 여수가 생활권이었다. 어선들이 여수로 고기를 팔러 다녔고 여수에서 생필품을 사들여 왔다. 보길도와 소안도, 노화도 등 완도 '서삼면(西三面)' 사람들의 생활권 또한 완도가 아니라 목포였다. 섬사람들은 완도-목포간, 완도-여수간 정기여객선을 타고 여수나 목포로 나가야만 서울이나 부산으로 갈 수 있었다.
그때는 여서도 사람들이 지닌 동력선만 50여 척이 넘었다. 섬사람들은 잡아온 갈치나 고등어를 '염장질' 해서 경상도 충무와 삼천포까지 팔러 다녔다. 멸치는 젓갈을 담아 강진 사초리나 장흥 삼신포 등에 내다 팔았다. 귀항 길에는 지붕 이을 볏짚과 쌀, 보리 등 겨울 날 곡식을 사왔다. 봄보리 나올 때까지는 그 식량으로 버텨야 했다. 여름에서 가을 사이 갈치 낚시철이면 뭍의 장사꾼들이 장비를 직접 가지고 들어와 빵이랑 엿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박물장사들은 생필품을 들여와 생선과 물물교환 해 갔다. 인천의 배들까지 갈치잡이를 오곤 했다.
섬사람들에게는 바다 일 못지않게 농사도 큰 일이었다. 작은 섬에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며 살았으니 산밭을 개간하여 곡식 거두는 일에 필사적이었다. 농사철이 지나면 섬사람들은 약초를 캐다 약초수집상들에게 팔았다. 이장은 오래된 사진들을 꺼내서 보여준다. 사진 속의 여서도에는 집들이 빼곡하다. 이제 막 혼례를 치른 신혼부부의 모습이 어제 같다. 이장은 여서도의 역사를 증거해 줄 자료집이라도 만들어 후세에 남길 생각이라 한다.
섬은 산이다!
여서도의 주산은 여호산(352m)이다. 섬 전체가 여호산이라 해야 옳을 듯하다. 마을은 여호산 산자락에 기대 자리잡았다. 여호산 등산로를 따라 걸으면 섬을 한 바퀴 일주할 수 있다. 산정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다. 작은 섬의 산이라고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산길을 걷고 싶은 사람은 단단한 채비를 차려야 한다. 산정에 오르니 소모도, 대모도, 청산도, 소안도 등 완도의 섬들이 아스라하다. 구름에 쌓여 오늘은 제주도가 보이지 않지만 맑은 날에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여호산 산정에서는 길을 잃기 쉽다. 정상에서 하산길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참을 헤매다가 왔던 길을 다시 되돌려 kt중계탑 부근에서 길을 찾았다. 당산숲 방향으로 하산을 하다가 해양사의 중요한 유적 하나를 만났다. 여서도 요망대(瞭望臺)다. 돌담으로 쌓아 만든 요망대는 아름다운 돌 건축물처럼 보이지만 실은 군사시설이다. 높은 곳에서 적의 동정을 살피는 곳이 요망대인데 감시초소인 셈이다.
여서도 요망대는 조선조 말 대원군 시절 이양선의 출몰을 감시를 위해 만들어졌다. 요망대는 둘레가 약 20m로 바깥 높이가 1.5m 정도인데 내부의 바닥에는 구들장이 놓여 있다. 추운 겨울 요망대를 지키는 봉군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깔아놓은 것이다. 요망대 아래쪽에는 봉군들이 숙식하던 집터가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 요망대는 일제의 파수대 역할을 했다. 해방 직전까지도 섬 주민들이 봉군으로 차출되어 요망대 근무를 했고 서양 선박을 발견하면 지서의 일본인 순사에게 보고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요망대에서 마을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여서도의 당산숲이 있다. 마을 윗당이다. 당숲의 경계는 돌담을 쌓아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했다. 거목들이 그늘을 드리운 당숲은 신령하기 그지없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섬사람들은 이 당숲을 신성하게 여기고 해마다 당제를 올린다.
알려지는 것이 두렵고, 사라져 버릴 것이 두렵고
돌담길을 따라 동쪽 능선을 오른다. 이 섬도 위성 안테나 덕분에 텔레비전 시청이 편리해 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여전히 구형 안테나를 장대에 매달았다. 바람을 피해 여러 가닥의 끈으로 안테나를 붙들어 두었으나 위태롭다. 안간힘을 써도 안테나가 잡을 수 있는 전파란 기껏 한두 개다. 이 길목에는 사람의 집보다 밭이 더 많다. 많은 집들이 폐가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돌담길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낯설고 신비롭다. 현세가 아니라 과거의 어느 시간 속을 걷는 듯하다. 당숲을 지나 마을 서쪽 길로 접어드니 작은 개울이 흐른다. 개울에는 돌다리와 돌우물이 온전하다. 뭍에서라면 이미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의 집들을 가르는 경계는 돌담이지만 그 돌담은 또한 이웃과 소통의 공간이기도 하다. 돌담 중간에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다. 물건을 주고받고 소식을 나누던 생활의 통로다. 저 통로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을까. 바람은 통로를 지나면서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묻어갔을까. 돌담들이 없이도 이 섬에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돌들은 섬의 수호신인 동시에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다.
내연화력발전소를 지나 섬의 서북쪽 산정에 있는 등대로 간다. 무덤들, 산속 유택들의 경계를 가르는 것도 돌담이다. 돌담과 함께 이 섬을 지켜온 또 다른 공로자는 방풍림을 이룬 상록수들이다. 길 가의 동백나무 노거수 한 그루는 이제껏 나그네가 본 동백나무 중 가장 크다. 동백나무는 야물고 단단해서 성장 속도가 아주 느리다. 어른 두 사람이 둘러도 다 못 품어안을 저 정도의 크기라면 5백년이 아니라 천년은 족히 될 것이다. 오랜 세월 나무들은 섬사람들을 지켜주었으니 이제 사람이 나무들을 보호해야 할 차례다.
동백나무뿐이겠는가. 섬 전부를 천연기념물이나 문화재로, 보물로 지정해 보호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그네는 두렵다. 이 섬의 보물들이 알려지는 것이 두렵고,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버릴 것이 또한 두렵다. 그러나 끝끝내 숨길 수 없고 숨긴다고 보전되는 것이 아니라면 드러내서 모두가 함께 지킬 방도를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섬 자체가 문화재인 이런 섬은 자치단체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보호관리를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주민들의 동의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섬의 문화유산 보존이 주민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비전만 있다면 반대할 주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산정에 오르니 멀리 소모도, 대모도, 청산도, 소안도 등 완도의 섬들이 아스라하다. 가깝고도 먼 것이 섬들 간의 관계다. 바로 붙어있는 듯이 보이는 저 섬들의 삶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섬들은 제각각 육지만을 지향하는 까닭이다. 등대로 가는 길목에서 '고래' 한 마리를 만난다. 바위는 금방 바다 속을 헤엄치다 숨 쉬기 위해 솟아오른 고래 같다. 고래바위라 이름 붙여준다. 고래는 실눈을 뜨고 입을 벌려 깊은 호흡을 한다. 나그네도 막혔던 숨통이 비로소 트인다.
여서도 앞 바다를 비추는 등대는 태양광으로 작동되는 무인등대다. 등대를 둘러싼 쇠울타리가 통째로 기울어져 있다. 바람의 힘이 얼마나 거셌던 것일까. 건너편 산은 정상까지 밭이다. 지금은 모두 휴경중이지만 비탈밭은 섬살이의 고단함을 증거해 주는 귀중한 사료다. 비탈 같은 삶이 섬뿐일까. 삶의 비탈은 세상의 도처에 널려있다. 오후가 되면서 바람이 잠잠해진다. 내일은 다시 배가 뜰 것이다. 이제 나그네는 섬을 떠나 또 어느 곳으로 가야 할까. 어디를 가든 사람은 결코 삶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산행코스: [ 승혜네 집~무인등대 왕복~사형제바위~여호산 정상 표지목~봉화대~전망대 쉼터~우물~승혜네 집 ] (약 5km)
일시 : 2024년03월02일(토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2024년03월02일(토요일) 전남 완도군 청산면 최저기온 영하 2도C, 최고기온 7도C]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2시간47분 소요)
* 11:56~12:15 전남 완도군 청산면 여서도의 여서도항 근방에 있는 승혜네 집에서 산행 출발하여 무인 등대로 이동 [등대에서 청산도가 조망된다.]
* 12:15~12:20 사진촬영
* 12:20~13:12 사형제 바위를 거쳐서 여호산(余湖山) 정상이라는 표지목이 있는 곳으로 이동
* 13:12~13:25 사진촬영 후 휴식
[여호산 정상임을 표시한 표지목이 있지만, 이 곳보다 봉화대가 6m 더 높은 최고봉이다.]
* 13:25~13:36 여서도 여호산의 최고지점인 봉화대(352m)로 이동 [봉화대라는 이정표가 있는 곳이 여서도의 최고봉인 요망대(瞭望臺)이다.]
[여서도 요망대는 조선조 말 대원군 시절 이양선의 출몰을 감시를 위해 만들어졌다. 요망대는 둘레가 약 20m로 바깥 높이가 1.5m 정도인데 내부의 바닥에는 구들장이 놓여 있다. 추운 겨울 요망대를 지키는 봉군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깔아놓은 것이다. 요망대 아래쪽에는 봉군들이 숙식하던 집터가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 요망대는 일제의 파수대 역할을 했다. 해방 직전까지도 섬 주민들이 봉군으로 차출되어 요망대 근무를 했고 서양 선박을 발견하면 지서의 일본인 순사에게 보고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 13:36~13:45 사진촬영
[봉화대에서 남서쪽으로 제주도가, 남쪽으로 우도가, 남동쪽으로 남해가, 동쪽으로 거문도가, 동북쪽으로 여수 초도가, 북쪽으로 청산도가, 북서쪽으로 소안도가, 서쪽으로 사수도와 추자도가 조망할 수 있다.]
* 13:45~14:16 전망대 쉼터로 이동
* 14:16~14:29 간식 후 휴식
* 14:29~14:39 우물로 이동
* 14:39~14:43 전남 완도군 청산면 여서도의 여서도항 근방에 있는 승혜네 집으로 원점회귀하여 산행 완료
14:43~18:00 승혜네 집 2층 방으로 입실하여 세면 후 낮잠
18:00~18:50 승혜네 집 1층 식당에서 저녁식사 [식사 제공]
[2024년03월02일(토요일) 완도군 청산면 일몰시각 : 18시30분]
18:50~22:00 승혜네 집 2층 방으로 돌아와서 샤워 후 TV를 보면서 휴식
22:00~ 승혜네 집 2층 방에서 취침
2024년03월03일(일요일) 여행기
05:30~06:00 승혜네 집 2층 방에서 기상하여 세면 후 짐 정리
06:00~06:30 승혜네 집 1층 식당에서 아침식사
06:30~06:34 여서도항으로 이동
06:34~06:58 여서도항에서 청산도항으로 가는 섬사랑7호 여객선에 승선하여 출발 대기 (신분증 준비)
06:58~08:21 섬사랑7호 여객선을 타고 전남 완도군 청산면 여서리에 있는 여서도항을 출발하여 전남 완도군 청산면 도청리에 있는 청산도항으로 이동 (24.4km) [1시간23분 소요] [여객선 승선요금 : 8,800원]
[2024년03월03일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 일출시각 : 7시]
[청산도의 관문인 청산도항(도청항)부터 선창(부둣가)를 따라 걷는 미항길은 관광객, 상인, 주민, 청산도 농특산물이 한데 모이는 길로 바닷가 삶의 활기가 넘치는 길이다. 청산도항(도청항)의 대표적인 풍경인 빨강색과 하얀색 등대를 지나 청산도항(도청항)에 내리게 되면 방문자센터가 있다.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2011년 새롭게 리모델링 되었으며 승선권 구매 및 관광안내를 받을 수 있고 자연의 맛을 그대로 살린 청산도 어판장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08:21~08:52 청산도항에 있는 갯마을식당으로 이동하여 아침식사 (아침식사 제공)
탐방지 : 완도군 청산도 [서편제 촬영지&봄의 왈츠 촬영지&목섬(항도) 새목아지&신흥리 풀등해변&노적도 일출전망대&진산 갯돌해변&국화리 포구&지리 청송해변]
[청산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에 속하는 섬이다. 물도 푸르고 산도 푸르다 하여 청산도라 한다. 완도 남동쪽 17.5㎞ 지점에 있으며, 서쪽에 대모도(大茅島), 동쪽에 황제도(皇帝島), 남쪽에 여서도(麗瑞島)가 있다. 왜구 등의 침입으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다가 효종 때 입도(入島)하여 1866년(고종 3)에 진이 설치되었고, 1895년에 진이 폐지되어 1896년 완도군에 속하게 되었다. 매년 음력 1월 15일에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설치한 훈련장을 기념하기 위해 바위와 나무에 음식을 차리고 마을의 경사나 군에 입영한 자식의 무사를 비는 신앙제가 행하여지고 있다. 주요 농작물로는 쌀·보리·고구마·콩·마늘·참깨 등이 생산된다. 근해에서 삼치·멸치·도미·민어·갈치·쥐치·장어·문어·낙지 등이 어획되며 굴·미역·조개 양식이 이루어지는데, 특히 김장용 멸치젓과 김 양식이 유명하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일부로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날씨가 따뜻하여 관광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탐방코스: [ 청산도항에 있는 갯마을식당~(1.5km)~서편제 촬영지~(268m)~봄의 왈츠 촬영지~(0.5km)~당리 버스 정류장~(4.5km를 청산도 공영버스로 이동)~항도 입구 버스 정류장~(2.3km)~목섬 삼거리~(0.4km)~목섬 새목아지~(0.4km)~목섬 삼거리~(2.3km)~항도 입구 버스 정류장~(0.2km)~신흥리 풀등해변~(2.0km)~노적도 일출전망대~(0.7km)~진산 갯돌해변~(2.3km)~국화리 포구~(3.4km)~지리 청송해변~(1.6km)~도청리 뒷등길~(0.4km)~도청항 ] (총 22.8km 중 4.5km를 버스로 이동하고 18.3km를 도보로 이동)
탐방일 : 2024년03월03일(일요일)
날씨 : 구름이 낀 날씨 [완도군 청산면 : 최저기온 4도C, 최고기온 12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시간9분 소요)
08:52~09:15 청산도항(도청항)에 있는 갯마을식당에서 탐방 출발하여 청산도 슬로길 1코스를 거쳐서 전남 완도군 청산면 당락리에 있는 서편제 촬영지로 이동
[청산도 슬로길 1코스 미항길+동구정길+서편제길+화랑포길 (거리 : 5.71km / 소요시간 : 90분)
미항길
도청항방문자센터220m도청리쉼터300m갤러리150m도락리안길
청산도의 관문인 도청항부터 선창(부둣가)를 따라 걷는 미항길은 관광객, 상인, 주민, 청산도 농특산물이 한데 모이는 길로 바닷가 삶의 활기가 넘치는 길이다.
도청항의 대표적인 풍경인 빨간색과 하얀색 등대를 지나 도청항에 내리게 되면 도청항 방문자센터가 있다.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2011년 새롭게 리모델링 되었으며 승선권 구매 및 관광안내를 받을 수 있고 자연의 맛을 그대로 살린 청산도 어판장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미항길을 걷다 갈림길이 나오면 오른쪽 복지회관 앞을 지나면 된다. 이 앞에 1코스 안내판과 청산완보 스탬프가 있다.
1코스 안내판에서 청산완보 스탬프를 찍으신 후 느림의 종 타종으로 슬로길 걷기를 힘차게 시작해보자.
복지회관을 지나 푸른 바다가 동무처럼 따라 부는 길에 청산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삶을 주제로 한 사진 갤러리가 조성되어 있다.
비록 도심 속 전시관처럼 멋스럽지 않지만 바다냄새, 마을냄새, 파도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
동구정길
도락리안길400m동구청310m도락노송길410m당리입구(서편제촬영지)
도락리에 있는 동구정이란 오래된 우물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길로 동구정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항상 같은 수위를 유지한다하여 신비의 우물이라고도 불린다.
도락리 안길 속 아트 갤러리(2011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장관상 수상)을 지나 동구정에 다다르게 된다. 동구정은 도락리에 있는 마을 우물로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항상 같은 수위를 유지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만남의 장소로 이웃 간의 소식과 정보를 알 수 있었던 우물가는 현재 도보 여행자의 갈증을 풀어주는 휴식처가 되었다.
도락리 해변을 따라 서 있는 나무는 얼핏 보면 소나무와 똑같이 생겼지만 바닷가에서 자라는 곰솔이다.
땅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지대에 청산도 사람들은 이렇듯 곰솔을 심어 방품림을 조성하고 농사를 지었고 오랜 세월 묵묵히 바람을 견디며 청산도 사람들의 터전을 지켜준 고마운 나무이다.
이 길을 올라오면 서편제 주차장에 들어서게 된다.
서편제길
당리입구(서편제 촬영지)420m봄의왈츠 드라마세트장
한국영화 최초 100만 관객을 동원한 서편제의 명장면 주인공 세 사람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구불구부한 돌담길을 걷는 장면이 촬영된 길이다.
봄에는 유채꽃과 청보리,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길에 수놓아지면 언덕 위에는 드라마 봄의왈츠 세트장이 한폭의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다.
해안을 따라 언덕길을 오르면 영화 [서편제] 촬영지가 나타난다. 이 길에서 서편제 주인공 유봉과 송화, 동호 세 사람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돌담길을 내려오는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5분 롱테이크로 촬영되었다.
정자쉼터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당리 부녀회에서 직접 만든 전과 막걸리를 판매하는 서편제 주막이 있다.
또한 신발 조형물과 풍경사진관도 설치되어 있다.
당리마을 언덕은 KBS 2TV 드라마 [봄의 왈츠]가 촬영된 곳으로 세트장으로 사용된 언덕 위의 하얀 집이 자리잡고 있다.
세트장을 배경으로 노란 유채와 초록 보리가 어우러진 그림과 같은 풍광을 자랑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도락마을 전경 또한 일품으로 SBS 드라마 [여인의 향기] 주인공 김선아와 이동욱이
자전거 데이트와 캠핑 등 멋진 로맨스 장면을 연출했다.
봄의 왈츠 세트장 뒤 조개공예품판매장에서는 주민들이 직접 만든 아름다운 수공예품을 판매한다.
조개공예체험도 진행되니 슬로시티 청산도에서 만나는 자연의 선물을 체험해보자.
화랑포길
봄의왈츠 드라마 세트장1,370m화랑포갯돌밭입구(삼거리)2,130m연애바위 입구
화랑포에서 새땅끝을 연결하는 길로 먼 바다에 파도가 일면 그 모양이 꽃과 같다하여 꽃 화, 파도 랑자를 써서 화랑포라 부른다.
파도가 이는 모습이 마치 꽃과 같다하여 이름 붙여진 화랑포(花浪浦)에는 탁 트인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카메라도 좋고 두 눈도 좋다. 이 곳에서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을 가득 안고 지친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어보는 것도 좋겠다.
슬로길 1코스 마지막 지점인 화랑포에는 잠시 걸음을 쉬어갈 수 있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푸른 바다와 하얀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일상의 답답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여유를 느낄 수 있다.]
09:15~09:18 서편제 촬영지를 사진촬영
[청산도항에서 당리 언덕길을 오르면 영화 [서편제] 촬영지를 만날 수 있다. 영화 서편제는 우리나라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로 남도 이곳저곳에서 촬영되었지만 이곳이 유독 유명한 이유는 유봉일가가 당리의 황톳길을 내려오며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이 가장 아름다운 명장면으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5분 30초에 걸친 롱테이크가 촬영된 곳이었는데, 원래 그렇게 길게 찍을 계획은 아니었으나 임권택감독이 이 장소가 너무 좋아서 시나리오를 바꿨다고 한다.
구불구불한 돌담이 매력적인 이곳은 4월 중순이면 노란 유채꽃이 피어나고 9월 하순에서 10월 초면 코스모스가 돌담사이로 피어 파란 바다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노란 유채꽃밭 황톳길 옆에는 송화가 소리공부를 하던 초가가 복원되어 있다.
서편제 쉼터 주막 앞마당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어 막걸리를 마시면서 주변의 경치를 즐길 수 있다.]
09:18~09:20 전남 완도군 청산면 청산로 136 번지에 있는 봄의 왈츠 촬영지로 이동
09:20~09:23 봄의 왈츠 촬영지를 사진촬영
[청산도에서는 KBS 2TV 드라마 ''봄의 왈츠''가 촬영 되었다. 젊은 남녀의 사랑을 그린 멜로 드라마 ''봄의 왈츠''는 겨울연가, 여름향기, 가을동화에 이른 계절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청산도가 배경이 된 이 드라마는 노란 유채꽃과 청보리밭 그리고 돌담길이 어울린 장면들이 주가 되었다. 당리에는 봄의 왈츠 촬영지로 ''바닷가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는 콘셉트로 지어진 유럽풍의 이층집 오픈세트장이 있다. 오픈세트장 안은 관람이 가능하며 거실, 주방, 침실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드라마 속 모습 그대로 잘 관리 되어 있다. 그 밖에 주변에는 읍리~청계리 들녘(유채밭, 보리밭), 지리해수욕장 남자주인공집, 읍리 청용공원 등이 있다.]
09:23~09:29 당리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09:29~09:31 당리 버스 정류장에서 항도 입구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청산도 공영 버스 승차 대기
[청산도 공영버스가 도청항(청산항)에서 신흥해변까지 하루 9번 운행한다.]
09:31~09:43 청산도 공영 버스를 타고 당리 버스 정류장에서 항도 입구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12분 소요]
09:43~10:14 청산도 슬로길 7코스 들국화길(신흥리 풀등해변~새목아지)을 따라서 목섬 삼거리로 이동
[청산도 슬로길 7코스 돌담길+들국화길 (거리 : 6.21km / 소요시간 : 136분)
돌담길
상서돌담마을~(100m)~돌담길/소막~(670m)~동촌길돌담길~(410m)~동촌리할머니나무~(220m)~1박2일촬영지~(200m)~신흥리풀등해변 정자쉼터
상서리와 동촌리를 지나는 길로 마을 전체가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눈만 돌려도 한가득 들어오는 것이 청산도 돌담이지만 이 곳에서 원형 그대로 보존된 돌담을 만날 수 있다.(슬로푸드를 즐기며 피로를 풀 수 있는 쉼터와 돌담찻집이 운영되고 있다)
바람이 많은 섬 지방의 특성 때문에 청산도 슬로길을 걷다보면 돌담이 둘러친 집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특히 상서리는 마을 전체가 구불구불한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층층히 쌓아올린 돌담은 소박하게 지어진 농가와 조화를 이루고 마을 입구에 슬로푸드를 즐길 수 있는 슬로쉼터가 있다.
포근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상서마을 옛 담장은 2006년 등록문화재 제279호, 2010년 환경부 자연생태우수마을, 2011년 국립공원 명품마을로 지정되었다.
돌이 흔한 청산도는 소 우리(소막)까지 돌로 만들어졌다. 상서리 돌담길을 천천히 걸으며 돌담이 속삭이는 이야기와 순한 눈망울의 미소(牛)를 만날 수 있다.
주의사항 : 소를 놀라게 하지 말기, 소에게 먹이주지 말기, 마을 주민들에게 정답게 인사 건네기, 마을 농산물을 탐하지 않기, 쓰레기는 챙겨가기
상서리 돌담마을을 걷다보면 시원한 차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돌담찻집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곳에서 지친 다리를 쉬며 쉼과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돌담은 청계리, 원동리, 상서리, 동촌리까지 이어지는데 같은 돌담이지만 마을마다 분위기는 조금씩 다르다.
오랜 세월 마을을 안고 있었던 돌담이 어느새 자신이 품고 있는 사람을 닮아 따뜻한 체온을 지니게 된 것은 아닐런지...
마을마다 각기 다른 돌담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걸어보자. 동촌리 돌담길을 따라 오면 풀등이 내려다보인다.
(동촌리 할머니 나무 밑에는 청산도 슬로우걷기 축제기간 동안 슬로장터가 운영된다.)
들국화길
신흥리풀등해변 정자쉼터~(630m)~국화길 해변공원~(180m)~상서 돌담마을~(440m)~목섬(항도) 연도제주차장~(400m)~목섬 삼거리~(1100m)~목섬 새목아지~(1860m)~목섬(항도) 연도제주차장~(1860m)~신흥리 풀등해변
신흥리에서 항도까지 주변 갓길이 들국화로 조성되어 있어 들국화길이라 부른다. 특히 항도로 가는 길은 청산도 비경으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들국화길은 또 다른 섬, 항도로 향하는 길이다. 청산도 사람들은 목섬이라고도 부르는데 가을이면 주변 갓길로 들국화가 조성되어 있어 들국화길이라 부른다.
목섬으로 들어가 울창한 소나무 숲을 따라 계속 걸어가보자.
목섬은 아주 작은 섬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어 태고적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청산도의 숨겨진 보물섬이다.
목섬삼거리에서 400m를 더 가면 목섬새끝까지 갈 수 있다. 산길이 비교적 좁아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지만 목섬(항도)의 장관을 만날 수 있다.
이후 목섬새목아지 반환점에서 돌아서 나오다 목섬 삼거리에서 내려가는 다른 슬로길을 선택하면 연도제주차장으로 나오게 된다.
목섬(항도)연도제주차장에서 들국화길을 다시 걸어가면 신흥리 풀등해변에 도착하게 된다.
부드러운 모래사장에서 갖가지 조개와 바지락을 채취하는 청산도 주민들의 일상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0:14~10:23 청산도 슬로길 7코스 들국화길(신흥리 풀등해변~새목아지)을 따라서 청산도의 동쪽 끝 지점인 목섬 새목아지로 이동
[새목아지에서 서북쪽으로 노적도와 그 뒤로 다량산이, 북쪽으로 신지도와 약산도가, 북동쪽으로 생일도와 평일도와 덕우도와 매물도가, 동쪽으로 황제도와 그 뒤로 여수의 초도가, 동남쪽으로 여수의 거문도가, 남쪽으로 완도군 최남단 섬인 여서도와 그 뒤로 멀리 제주도가 보인다.]
[신흥리에서 1차선 해변도로를 따라 1㎞쯤 걸어가면 외딴 섬 목섬 앞에 선다. 목섬과 청산도를 연결한 제방이 설치돼 있어 물때와 관계없이 드나들 수 있다.
목섬으로 들어가면 하늘을 가린 숲길을 걸을 수 있다. 목섬은 슬로길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의 통행이 없어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해 온 청산도의 보물섬 같은 곳이었다. 섬 전체가 숲으로 덮여 있는 목섬은 동쪽 끄트머리에 천하절경을 이룬 ‘새목아지’라 불리는 기암괴석이 신비로운 풍경을 선물해준다.
동쪽으로 뻗어나간 기암괴석의 모습은 마치 새의 긴 목 같다.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새목아지가 바다로 날아가는 새처럼 느껴진다. 새목아지에 서 있으니 멀리 생일도 평일도, 덕우도, 형제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손짓한다. 바다 위를 맴도는 갈매기가 자유를 만끽한다.]
[목섬에는 섬을 순환하는 산책로가 있다. 한 바퀴 도는 거리는 약 1.9km이고, 소요시간은 40분.]
10:23~10:26 목섬(항도) 새목아지에서 주위 풍경을 사진촬영
[새목아지에서 북쪽으로는 신지도와 약산도를, 북동쪽으로는 생일도와 평일도와 덕우도를 동쪽으로는 황제도와 그 뒤로 여수 초도를, 동남쪽으로는 여수 거문도를, 남쪽으로는 여서도와 그 뒤로 제주도를 조망할 수 있다.]
[청산8경 중 제 1 경이 項島歸帆(항도귀범 : 돛단배가 일몰 직전에 고기를 잡아 항도로 돌아오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항도의 순우리말 표현이 목섬이다.]
10:26~10:34 목섬 삼거리로 회귀
10:34~11:03 항도 입구 버스 정류장으로 회귀
11:03~11:07 청산도 슬로길 8코스 해맞이길의 시점인 신흥리 풀등해변으로 이동
[신흥해수욕장은 지리청송해변과 함께 청산도를 대표하는 해수욕장이다. 손을 담그면 금세 파랗게 물들어버릴 것 같은 쪽빛바다를 자랑한다. 신흥해수욕장은 지리청송해변과는 청산도 섬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사장이 매우 넓은 해수욕장으로, 지리청송해변에 비해 편의 시설이나, 방풍림은 적으나 물이 깨끗하고 조용하며 주변 바다가 전부 낚시터이다.
썰물 때면 2km에 달하는 모래사장이 모래섬이 되고 물이 차면 마을 앞까지 물이 차는 자연의 신비를 감상할 수 있다. 간조시 드러나는 수만 평의 은빛 모래사장에서 가족이나 연인끼리 백사장에서 체험할 수 있는 조개잡이는 또 다른 추억을 간직할 수 있다.
이곳에서 슬로길 7코스, 들국화길을 이용하여 목섬(항도)까지 갈 수 있는데 목도까지 가는 길은 청산도 비경으로 꼽힐 만큼 아름답다. 가을이면 신흥리에서 항도까지 주변 갓길이 들국화로 조성되어 있어 들국화길이라 부른다.]
11:07~11:37 청산도 슬로길 8코스 해맞이길(신흥 해변~국산리 정골꼬랑)을 따라서 노적도 일출전망대로 이동
[노적도 일출전망대에서 다량산(194.5m)과 그 앞의 섬인 노적도와 청산도 동쪽의 섬들인 생일도, 평일도, 덕우도, 매물도, 황제도 등을 조망할 수 있다.]
[청산도 슬로길 8코스 해맞이길 (거리 : 4.1km / 소요시간 : 77분)
신흥리 풀등해변~(750m)~성산포 보리마당~(1000m)~노적도 일출전망대~(700m)~진산리 갯돌해변~(570m)~진산천~(1080m)~정골꼬랑(상수원입구)
청산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를 맞이할 수 있는 목섬, 신흥리, 상산포, 진산리를 잇는 길로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길이다.
8코스는 신흥리 풀등해변에서 시작되고 왼쪽으로 가면 해맞이길이 나온다.
군도를 따라 걷다 보면 노적도 일출전망대가 나타난다. 노적도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일출 광경을 조망할 수 있으며 일출 이외에 주변 경관 또한 뛰어나 포토 포인트로도 손색이 없다. 굳이 일출이 아니더라도 보배로운 햇살에 뒤척이는 푸른 바다는 마음까지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아침 햇볕을 처음 볼 수 있는 광명의 보배로움을 지니고 있다 하여 진산리(疹山里)로 부르게 되었다. 진산리 갯돌해변은 둥글둥글한 갯돌로 이루어진 해변으로 오랜 세월 구르고 구르며 모서리가 닳아버린 갯돌은 모래사장과는 또 다른 파도소리로 귀를 즐겁게 한다.
갯돌 위를 맨발로 걸으면 발바닥이 제법 아린 것이 지압하기 좋고 해맞이길에 위치한 진산리 갯돌해변은 청산도에서 가장 인상적인 해돋이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기도하다. 진산리 마늘밭을 지나면 정골꼬랑이라 부르는 상수원 입구에 도착한다.]
11:37~11:44 청산도 슬로길 8코스 해맞이길(신흥 해변~국산리 정골꼬랑)을 따라서 진산 갯돌해변으로 이동
[진산 갯돌해변에서 동쪽으로는 노적도와 매물도와 황제도를, 동남쪽으로는 목섬을 조망할 수 있다.]
[진산 갯돌해변도 일출 명소이다.]
11:44~12:11 청산도 슬로길 8코스 해맞이길(신흥 해변~국산리 정골꼬랑)을 따라서 청산도 술로길 9코스 단풍길의 시점인 정골꼬랑으로 이동
12:11~13:10 청산도 슬로길 9코스 단풍길(국산리 정골꼬랑~지리 청송해변)을 따라서 청산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국화리 포구를 거쳐서 청산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청산도 슬로길 10코스 노을길의 시점인 지리 청송해변으로 이동
[국화리 포구에서 북서쪽으로는 완도와 그 뒤로 해남의 두륜산을, 북쪽으로는 신지도와 약산도의 삼문산을 조망할 수 있다.]
[청산도 슬로길 9코스 단풍길 (거리 : 3.21km / 소요시간 : 55분)
정골꼬랑(상수원입구)~(750m)~국화리입구~(460m)~오천기미입구~(1070m)~진짝지입구~(930m)~지리청송해변입구
진산리에서 지리까지 단풍나무와 함께 걸을 수 있어 단풍길이라 한다.
아름다운 단풍만으로도 눈이 즐거운데 푸른 바다를 옆에 끼고 있어 선명한 색의 대비에 눈을 떼지 못하는 길이다.
9코스 시작점에 안내판과 청산완보 스탬프가 있다. 육지의 단풍이 질 무렵, 청산도에는 단풍물이 들기 시작한다.
미처 단풍놀이를 즐기지 못했다면 청산도로 단풍여행을 떠나보자. 멀리 단풍을 찾아온 만큼 그 아쉬움을 달래주기 충분히 깊고 아름다운 단풍색을 감상할 수 있다.
뒤를 돌아보면 푸른 바다와 붉은 단풍의 선명한 대비를 느낄 수 있다.
군도로 이용되는 길이니 차에 유의해주시기 바라며 물이 아닌 섬에서 그것도 푸른 나무들이 많은 청산도에서 단풍을 만난다는 건, 이 길이 주는 행운과도 같은 선물이다.]
[지리 청송해변에서 남서쪽으로는 지초도와 그 뒤로 소안도를, 서쪽으로는 대모도를, 북서쪽으로는 소모도와 장도와 그 뒤로 완도를 조망할 수 있다.]
[지리 해수욕장은 2km의 은빛 백사장과 200년 이상 된 소나무 숲을 갖춘 청산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해수욕장이다.]
13:10~13:45 청산도 슬로길 10코스 노을길(지리 청송해변~도청리 뒷등길)을 따라서 청산도 슬로길 11코스 미로길의 시점인 도청리 뒷등길로 이동
[청산도 슬로길 10코스 노을길 (거리 : 2.67km / 소요시간 : 51분)
지리청송해변입구~(520m)~지리청송해변~(1270m)~고래지미~(400m)~도청들녘~(480m)~도청리뒷등길
노을길은 섬의 서쪽 가장자리로 난 길을 따라 걷기에 청산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길이다.
노을의 검붉은 농담이 푸른 바다로 흘러내리는 장면이 장관을 연출한다.
10코스 시작길 지리청송해변 입구에 안내판과 청산완보 스탬프가 있으며 지리마을은 전복양식으로 유명하며 논농사와 밭농사를 겸하고 있다.
지리 청송해변은 수심이 완만하고 앞으로 폭 100m, 길이 1.2km의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200년 이상된 해송이 시원한 그늘을 만드어주어 해수욕을 즐기기에 좋은 청산도의 대표적인 일몰 포인트이다. 자연이 만들어준 붉은 조명에 그저 감탄하게 되는 아름다운 해변이다.
슬로길을 걷다보면 청산도 고유의 장례문화인 초분을 만날 수 있다. 일종의 풀무덤으로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관을 땅 위에 올려놓은 뒤 짚, 풀 등으로 엮은 이엉을 덮어두었다가 2-3년 후 뼈를 골라 땅에 묻는 방식이다. 솔가지가 꽂혀있는 건 가족이 방문했다는 뜻이다. 죽음조차 느리게 흘러가는 초분을 보며 생에 대해 잠시 사색해보는 것도 길이 주는 또다른 선물이다.
지리청송해변과 이어지는 언덕을 올라 숲길로 들어서면 더 광활한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이 나타나는데 일명 고래지미 포인트이다.
일몰에 역광으로 비쳐지는 섬 모양이 고래 같다 하여 고래지미라 부르며 청산도 주요 일몰 포인트인 지리청송해변, 도청항과는 또 다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일몰시간에 가장 아름다운 노을길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낮에는 해국, 머루, 마삭줄, 협죽도, 동백 등 청산도에서 자생하는 다양한 생태를 만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 13:45~14:01 청산도 슬로길 11코스 미로길(도청리 뒷등길~도청항)을 따라서 전남 완도군 청산면 도청리에 있는 청산도항(도청항)으로 이동하여 청산도 슬로길 [1코스의 (서편제 촬영지&봄의 왈츠 촬영지)&7코스~11코스]의 탐방을 완료
[청산도 슬로길 11코스 미로길 (거리 : 1.2km / 소요시간 : 21분)
도청리뒷등길~(200m)~사장개~(500m)~청산지역아동센터~(120m)~안통길~(130m)~향토역사문화전시관~(250m)~도청항방문자센터
청산중학교에서 도청항까지 이르는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길을 찾는 재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소소한 일상까지 만날 수 있다.
또한, 청산 파시문화거리에서는 1930년~70년대 전국 3대 어시장으로 유명했던 청산도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다.
11코스 미로길 시작점인 도청리 뒷등길은 등산로 1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2013 청산도 슬로우걷기 축제 때 그려진 벽화가 길을 안내해준다. 파란색 화살표를 따라 걷다 보면 도청마을 쉼터에 도착하게 된다.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는 마을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고 마을로 들어서면 슬로길을 나타내는 파란색 화살표가 사라진다.
이 길에서만큼은 잠시 길을 잃고 헤매보며 길 속에 스민 느림의 미학을 만나보자.
미로길을 걷다 보면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를 만날 수 있다. 2011 청산도 슬로우걷기 축제 때부터 2013년까지 총 13점의 작품이 그려졌으며 벽화 덕분에 미로길은 정말 미로(迷路) 속 미로(美路)가 되었다. 길 곳곳에 스며있는 벽화를 찾으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미로길을 빠져나와 도청항 뒷골목길로 들어서면 11코스의 끝인 안통길이 나타난다.
예부터 청산도는 흑산도, 거문도와 함께 전국 3대 어장 중 하나로 안통길은 청산도에서 가장 번화했던 거리이며 과거 1930년대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번성했던 청산 파시의 옛 생활문화와 역사가 남아있다. 파시는 풍어기에 열리는 생선시장으로 예부터 청산도는 고등어 파시와 삼치 파시가 유명했다. 안통길을 걸으며 청산이 간직하고 있는 파시의 기억과 이야기를 만나보자.
안통길에는 청산도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전하는 향토역사문화전시관(구.면사무소)가 마련되었다.
일제 강점기 건축양식이 그대로 남아있어 시대사적 보존 가치가 높은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2012 한국농어촌건축대전 대상 수상)
또한 2012 청산도 슬로우걷기 축제 때 느림카페가 조성되어 있다. 이 곳에는 받고 싶은 달을 선택할 수 있는 12개의 월(月)별 느림 우체통이 있다. (느림카페에서 엽서를 구입할 수 있다)
좁다란 골목길을 찬찬히 살펴보면 어부와 상인들의 피로를 풀어줬을 선술집과 요리집, 그들이 묵었던 여관, 함께 이야기꽃을 피웠을 다방 등 옛 안통길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청산 파시문화거리가 조성되어 있어 걷는 길을 더욱 즐겁게 한다.]
14:01~14:05 청산도항에서 전남 완도군 청산면 도청3길 11-3 1층에 있는 어부횟집으로 이동
14:05~14:36 어부횟집에서 소주 1병(5천원)을 반주로 전복뚝배기김국 정식(13,000원)으로 식사
14:36~14:40 청산도항으로 이동
14:40~15:00 청산도항에서 완도항으로 가는 청산 아일랜드호 여객선에 승선하여 출발 대기(신분증 준비)
15:00~15:54 청산 아일랜드호 여객선을 타고 전남 완도군 청산면 도청리에 있는 청산도항을 출발하여 전남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 1255 번지에 있는 완도 연안여객선터미널로 이동 (20km) [54분 소요] [승선요금 : 7,000원]
15:54~16:01 완도항 앞에 있는 섬인 주도를 사진촬영 후 “좋은사람들” 버스로 이동하여 출발 대기
[벌채를 금한 성스러운 산, 그림처럼 떠 있는 섬 주도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완도의 숲과 나무... 주도의 상록수림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일 : 2023.10.20.
글 : 완도신문 유영인
완도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보이며 발길을 잡는 섬이 있다. 완도항 앞 바다에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며 그림처럼 떠 있는 섬 주도이다.
예로부터 완도사람들은 이곳이 저울 추처럼 생겼다 하여 추섬(錘섬)이라 부르며 주도만조명월(珠島滿潮明月)을 완도팔경 중 제1경으로 꼽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드론의 발달로 공중에서 바라본 섬의 모양이 하트처럼 생겼다 하여 사랑의 섬으로도 불리운다.
주도는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난대식물의 보고로 인정받아 최초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1962년에는 우리나라 식물학자들이 재조사를 통하여 천연기념물 28호로 재지정한 난대수림의 보고이다.
풍수지리적으로는 완도항의 여의주(如意珠)로 완도읍의 동망산과 서망산이 청룡과 백호로 뻗었고, 공고지(空高地)와 객사등(客舍登), 비석산(飛石山) 등 다섯 마리의 용이 떠 받치는 오룡배주(五龍杯珠)형국으로 주도가 육지에서 흐르는 물을 막고 있어 완도읍의 경우 어디에 지하수를 개발하더라도 물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주도 상록수림은 식생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난대림 천연기념물 중 그 모습이 가장 잘 유지·보존되고 있으며, 높이 25m, 1만7355㎡(약 5200평)의 척박하고 좁은 면적에 비해 많은 종류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난대림의 학술연구에 귀중한 자원이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좋은 임상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숲에서 생성된 풍부한 유기물로 물고기 떼를 해안으로 유인하는 어부림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목포대학교(책임교수 김철수)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원래 주도에는 124종의 식물이 서식하였으나 완도항을 준설하면서 남겨진 갯펄에 네 종류의 식물이 귀화하여 오늘날은 128종류의 목·초본류(木·草本類)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수림을 형성하는 전체 나무 1700여본 중 대표적인 나무들은 구실잣밤나무(땟밤나무) 500여본, 감탕나무 400여본, 육박나무 110여본, 광나무 120여본, 황칠나무 60여본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기타 다정큼나무, 참식나무, 돈나무, 사스레피나무, 광나무, 후박나무, 생달나무, 소나무, 청가시덩굴, 인동덩굴, 고란초, 콩짜개 등이 있다.
원래 완도읍에는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할아버지 당과 할머니 당이 있었는데, 할아버지 당은 완도중학교 위 소나무 숲에 있었으나 사라호 태풍으로 사라지고, 주도는 할머니 당으로 신성시되어 숲이 잘 보전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정상에는 당제를 모셨던 당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옛날, 이곳 섬의 중앙에는 작은 샘이 하나 있었다. 작은 샘의 물은 영험한 기운이 있어 복통이 있거나 위장장애가 있을 때, 마시기만 해도 씻은 듯이 낫게 되어 주민들은 이곳 샘을 애지중지했다.
이곳 샘에서 크게 효험을 본 어떤 이는 샘에서 물을 퍼 올릴 수 있게끔, 은그릇 하나를 마련해 주었고,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 은그릇으로는 오직 식수만을 뜰 때 사용해야 하는 불문율이 만들어져 대대로 내려오게 됐다.
주도는 예부터 벌채를 금해온 봉산(封山), 그래서 지금도 섬 중앙에는 원시림이 그대로 남아 있어 해상의 나무 전시장으로 나무랄 데가 없다. 일제 때 일인들은 섬 꼭대기에 금북라(金北羅)라는 신사를 짓고 참배하도록 했으나 주민들이 신성한 이곳에 일본 왕을 찬양할 수 없다고 거부했던 이야기도 전한다.]
16:01~20:59 “좋은사람들” 버스로 전남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 1255 번지에 있는 완도 연안여객선터미널을 출발하여 서울 양재역으로 귀경 (432km) [4시간58분 소요]
여서도 지도
청산도 슬로길 11개 코스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