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Chile)
- 남아메리카 -
▶ 개관 : 위치 - 남아메리카 남서부
인구 - 약 1,963만명 세계 65위[23,08,22]
GDP - 약 3,585억5,700만 달러 세계 42위
종족 - 백인 및 혼혈인(95%), 아메리카 원주민(3%)
수도 - 산티아고 (한국과 -13시간 차)
면적 - 756,096㎢ (한반도의 3.4 배)
언어 - 에스파냐語
종교 - 로마가톨릭(89%), 개신교(11%)
기후 - 사막성기후, 온대한랭성기후, 지중해사막성기후
화폐 - 칠레 페소 (CLP)
정부 형태 - 공화제 / 다당제&양원제 (대통령)
국가번호 - 56
관련 - 날씨 정보
▲ 칠레 마푸체족-아라우칸語를 쓰는 남아메리카 인디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부족
▶ 약사 : 스페인 식민시대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6세기 스페인인들이 발견했을 당시 아라우카니아 인디언은 주로 비오비오 강
남쪽에 살면서 다른 부족을 지배하던 유목민이었다(아라우칸人). 스페인인들은
19세기 내내 아라우카니아 인디언과 싸웠으나 끝내 그들을 정복할 수 없었다.
스페인은 1536년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지휘 아래 세력을 뻗어가기 시작했으며
1541년 페드로 데 발디비아가 산티아고를 세웠다. 대토지에 기반을 둔 농업이
주요경제활동이었고, 이로 인해 부유한 지주계급이 생겼다. 1808년 프랑스의
스페인 침공으로 인해 독립운동은 활기를 띠었다. 1810년 산티아고에 임시정부
가 수립되었으며, 1814년에 스페인이 통치권을 재천명했지만 애국 지도자 베르
나르도 오이긴스가 아르헨티나로 피신했다가 호세 데 산 마르틴이 이끄는 군대
와 함께 돌아와 1817년 차카부코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쳤다.
오이긴스는 국가원수로 선포되었으며, 이듬해 2월 12일 공식적으로 독립이 발
표되었다. 1861년까지는 헌법으로 보장된 지주들의 과두정치가 행해졌고, 그후
정권은 자유당으로 넘어갔다. 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축소되었으며, 유럽의 정치
흐름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879~83년에 있었던 볼리비아와 페루와의 전쟁으
로 두 나라로부터 옛 영토를 되찾아 영토가 확장되었다.
19세기에 토지를 소유한 이전의 소수 독재자들이 국내 정치계에서 계속 큰 영
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20세기초,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도
시중산계급이 출현했다. 그후 10년 동안 급진당·사회당·기독교민주당 등과 같은
새 정당이 창설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초 약간의 정치적 불안과 혼란이
있었지만 평화적인 정치발전이 계속되어 민주적 정권교체가 가능했다. 1938~
52년에 급진당에 속한 대통령들이 줄곧 통치했으나, 1964년에는 중도파인 기독
교민주당이 집권당이 되었다.
이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정치행정에 채용하는 개혁을 시도했다. 1969년 사회
당과 공산당은 급진당과 기독교민주당에 소속된 몇몇 좌파들과 연합해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과반수를 득표했다. 그들의 후보였던 살바도르 아옌데가 마르
크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대통령으로 선
출되었다.
아옌데는 미국 소유 구리광산을 몰수하고 여러가지 사회주의정책을 실시했다.
그후 2년도 안 되어 미국이 자본투자 거부를 주도해 경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많은 중산층 사람들이 아옌데 정부에 등을 돌렸으며,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
체트 육군사령관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옌데 정부는 전복되고 군사혁명
위원회가 들어섰다. 군사평의회의 수반인 피노체트는 엄격한 자유시장정책을
제도화했으며, 군부통치에 반대하는 국내 저항세력들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1980년 새 헌법이 승인되었고, 피노체트가 대통령으로 뽑혔다. 헌법에 명시된
대로 1988년 10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이 투표는 군사정부의 후보인 피노
체트의 8년간 재임 추진을 위해 실시된 것이었지만, 대다수의 유권자들이 피노
체트를 거부했다. 결국 피노체트는 물러났고, 1989년에 실시된 선거로 다시 민
간정부가 들어섰다.
기독교민주당(Christian Democrts/PDC) 출신의 아일윈 대통령은 군부정권에 살
해·실종된 정치범들에 대한 증거를 조사하기 위해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했
다. 10개월 후인 1991년 2월 위원회는 1973~90년 군부독재 기간 동안의 인권
침해 사례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279명이 사망했
고, 그중 1,068명이 고문·총살·처형당했다. 보고서는 1973~77년 군보안경찰인
디나(DINA)가 '체계적인 학살 정책'을 수행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보고서에
는 가해자의 이름이 빠져있었으며, 아일윈 대통령은 희생자들 일부에 대한 보상
이 주어지겠지만 인권재판은 열지 않기로 한 결정을 재확인했다.
▶ 경제 :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이 공존하는 혼합경제로서 서비스업·광산업·제조업 등에
주로 기반을 둔 자유시장경제가 부분적으로 발달했다. 국제 구리가격의 하락과
자유시장경제의 과감한 도입으로 인해 1980년대 국민총생산(GNP)이 감소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GNP가 인구보다 빠르게 성장했으며, 1인당 GNP는 라틴아
메리카 평균수준을 웃돈다.
좁은 경작지로 농업이 그다지 발달되지 않아 전체인구가 필요로 하는 식량을
공급하기에는 부족하다.
풍부한 페루(훔볼트) 한류 때문에 긴 해안선을 따라 좋은 어장이 많다. 바다물고
기가 주종을 이루는 어획고는 세계최고수준이며, 정어리류가 총어획량의 약
1/2을 차지한다.
칠레는 상당량의 석유, 천연 가스, 석탄, 철광석 등을 생산할 뿐 아니라 구리의
최다 생산국(세계시장의 1/5)이자 몰리브덴(세계매장량의 1/5)과 요오드의 세
계 최대생산국이다. 금·은·망간·아연·납·셀렌·석회암·천연질산염 및 수경성 석회
등도 채굴된다.
수출품은 구리 원광과 정련된 구리가 주종을 차지한다. 정련된 구리는 전체수출
의 2/5를 차지한다. 그밖에 공산품·과일·야채·종이·종이제품·화학제품·석유제품
등이 수출된다. 주요 수출대상국으로는 미국·일본·독일·브라질 등이다. 수출액이
수입액보다 약간 많아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 대한 관계 : 1962년 6월 12일 한국 정부와 국교를 수립했다. 한국은 1966년 1월 산티
아고에, 칠레는 1969년 11월 서울에 각각 상주공관을 설치했고, 1966년 11월
주칠레 한국대사관이, 1969년 11월 주한 칠레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북한과는 1972년 6월 1일 수교했으나 그해 9월 19일 단교한 뒤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지지하고 있다.
2003년 2월 15일 한국은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2004년 4월 1일부터
발효된 이 협정으로 칠레는 우리나라의 첫 자유무역협정 국가가 되었다.
▶ 여행 정보 : 치안상태-양호 / 긴급연락처-대사관 (56-2)2228-4214
팁 금액 - 일반적으로 총 금액의 10% 이내 / 무사증 체류 90일, 협정
전압 : 220 / 230V 콘센트 3구 220 / 230 / 240V 콘센트 2구
10:51
세계테마기행 - 칠레 1부- 불의 땅, 비쟈리카 화산 - 길이: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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