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이숙 이야기(1)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믿는 자들이 때로는 믿음 때문에 환란을 겪지만 결코 파탄으로 끝나지 않는다. 불같은 시련에도 소망 중에 인내하며 기도하고, 험산준령도 찬송하며 걷는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일제 때, 신사참배와 천황숭배는 십계명을 범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절대권력 앞에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생명을 내놓아야 했다. 안이숙(1908-1997.10) 이야기다. 미혼이었던 안이숙은 일본에서 학교를 나온 후에, 대구여고보를 거쳐 보성여학교(평북 선천) 교사로 있었다. 그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형사들에게 쫓기면서 만났던 성도들과의 지하교회 생활, 박관준 장로와 일본 제국의회(제74회, 1939. 3.)에 들어가 신사참배 강요를 항의했던 일, 감옥 생활 그리고 사형집행 직전(1945. 8. 17)에 출옥하기까지, 한국교회수난사의 한 중심에서 살았던 분이다. 193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는, 일본의 강압에 짓눌려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신사를 찾아가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일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 이를 거부하고, 그런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학교 교사와 학생들도 매월 1일, 신사참배에 나섰다. 안이숙 선생은 신사참배 시간이면 이리저리 피했다. 그러나 금방 당국자의 눈에 띄었다. 교장이 학교의 존폐문제가 달렸다며 신사참배를 요청했다. 그런 교장에게 “염려마세요. 저도 오늘은 산에 올라가지요. 산에 올라가서, 크리스천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가를 분명히 보여드리지요.” 하였다. 성경의 한 장면을 묵상했다.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왕이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않을 것을 아옵소서...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녀는 말씀을 몇 번이고 암송했다. 말씀은 능력이었다. 신사神社 앞에 교사들과 학생들이 도열했다. 지휘관이 호령했다. “살아있는 신이신 천황폐하와 황태신궁을 향해 최경례!” 모두 땅에 닿도록 머리를 깊이 숙였다. 안이숙 선생은 하늘을 바라보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 순간, 마땅히 겪어야 할 고난을 생각했을 것이다.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 찬송를 불렀다. ‘이 장수 누구요 주 예수 그리스도 곧 만유 주로다 당할 자 누구뇨 불가불 이기리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의지했던 것이다. 학교에 먼저와 기다리고 있던 형사들에게 붙들려 군수 앞으로 끌려갔다. 그의 분노가 터졌다. “멋도 모르고 건방지게. 톡톡히 맛을 봐야지.” 비아냥대고 위협했다. 그 순간, 바로에게 쫓기던 홍해 앞의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 그 순간, 노기충천한 군수가 누구의 전화를 받으며 안절부절하더니, 정신없이 서류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안이숙은 “주여! 숨겨주소서.” 부르짖고는 순간적으로 그곳을 빠져나와 집으로 달렸다.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했다. “이 성에서 핍박하면 저 성으로 피난하라....”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집에서는 어머니가 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 길로 학교도 세상도 다 포기하고 집을 나왔다. 장래 일을, 내일 일을 주님께 맡겼다. 막연한 피신 길이었다. 신사참배를 피하여 교회를 나와 논밭이나 산골에서 예배드리는 교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캄캄한 밤에 밝은 빛을 비추는 별 같은 성도들이었다. 안이숙은 성경 100구절과 찬송 150장을 암송했다. 언제 어디서나 말씀을 묵상하고 찬송하기 위해 준비했던 것이다.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 말게 하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산 순교자 안이숙의 믿음과 삶은 이러했다.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던 고려 충신 정몽주의 단심가 같은 안이숙 노래는 한국 교회의 눈물과 전설이 되었다. 오늘도 이런 선진들 믿음, 더욱 굳세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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