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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요약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탑비.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크기 : 전체 높이 3.6m, 비신 높이 2m , 비신 너비 1m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의 탑비(塔碑)이다. 탑비(부도비)는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행적 등을 기록한 비석으로, 고승(高僧)이 입적한 후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해 승탑(부도)과 함께 세워졌다. 탑비의 건립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 비문의 일부가 훼손되어 언제 비석이 세워졌는지 알 수 없었으나, 1725년(영조 1)에 모각(摹刻)한 탁본이 발견되어 887년(신라 정강왕 2)에 탑비가 건조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진감선사 혜소
혜소(慧昭)는 774년(신라 혜공왕 10)에 태어나 850년에 입적한 승려이다. 804년(신라 애장왕 5)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26년간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830년(신라 흥덕왕 5)에 귀국하였다. 이후 장백사에 들어가 신도와 제자들에게 당나라에서 배워온 선법(禪法)과 불교음악인 범패(梵唄)을 널리 알렸고, 그 결과 범패는 선종의 수행 방법으로 사용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850년 옥천사(현 하동 쌍계사)에서 혜소가 입적하자, 당시 신라의 국왕이었던 문성왕은 혜소에게 시호(諡號)와 탑호(塔號)를 내리려 하였으나 탑비를 세우지 말라는 혜소의 유언을 듣고 그 뜻을 거두었다. 885년 헌강왕은 혜소의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 혜소에게 '진감(眞鑑)'이라는 시호(諡號)와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리고, 혜소의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탑비의 구성과 형태
귀부·비신·이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으로, 비신은 흑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3.6m이고, 이 중 비신의 높이는 2m이다.
귀부(龜趺)는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로 비신과 이수를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귀부는 목이 짧고 얼굴은 용의 형상으로 묘사되었다. 귀부의 등에는 육각형 모양의 귀갑문(龜甲文)이 새겨져 있으며, 비좌(碑座: 비신을 세우기 위해 홈을 판 자리)의 각 면에는 구름 문양을 장식하였다.
비신(碑身)은 탑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 혜소의 행적에 대한 기록 등이 새겨져 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이 직접 비문을 짓고 해서체(楷書體)로 글씨를 썼다. 비문의 내용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단은 서론으로 혜소가 당나라로부터 선을 전한 인물임을 밝혔고, 2단에는 혜소의 생애와 공덕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3단은 비문의 찬술 과정을, 4단에는 사언고시체의 게송(偈頌: 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을 기록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의 비문은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경주 승복사지 대숭복사비,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의 비문과 함께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에 속한다.
이수(螭首)는 탑비의 머리 부분으로 장식적인 역할과 비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海東故眞鑑禪師碑)’라는 전액(篆額)이 양각되었으며, 그 위로 보주와 반룡(蟠龍: 승천하지 아니한 용)을 조각하여 이수를 장식했다. 이수의 가장 윗 부분에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구슬인 보주(寶珠)를 올렸다.
가치 및 의의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통일신라시대에 범패를 처음으로 도입한 진감선사 혜소의 탑비라는 점과 최치원이 직접 비문을 찬술하고, 글씨를 쓴 탑비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또한 비석에 새겨진 비문에는 혜소의 행적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 제도, 불교 문화 등에 대한 정보도 포함하고 있어 역사학·불교학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며, 비석에 쓰인 글자는 금석학·서예학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비록 비신은 많이 손상되었으나, 귀부와 이수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며 귀부와 이수의 화려한 조각 장식은 통일신라시대 탑비의 대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국보 제47호 지정(등록)일 1962.12.20
소 재 지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쌍계사 (운수리)
시 대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쌍계사
관리자(관리단체) 쌍계사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등 중앙에는 비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 진감선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는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
[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15> 쌍계사 진감(眞鑑)국사
[불교신문 3396호/2018년6월2일자]
기자명 :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우리나라 최초 범패 도입…‘보살행’ 롤 모델
수년 전 중국 선종 사찰을 순례할 때, 그 사찰의 규모에 따라 사찰에 머물렀다. 작은 규모의 사찰은 비구니가 하루 이틀 묵는 일이 용이치 않지만, 큰 사찰에서는 우리나라와 똑같이 승려가 숙식할 수 있다. 필자가 승려 신분인지라 중국 사찰을 순례하면서 국적을 불문하고 ‘승가’라는 테두리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점이 승려로서의 복됨을 인식하는 계기였다. 며칠간 머물렀던 혜능스님 도량 광동성 남화선사, 운남성 허운스님이 개산한 축성사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지리산 쌍계사는 이런 연장선상에서 느끼는 순례라고 할까? 사찰의 면모와 그윽한 운치! 개산한 선사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동 쌍계사는 진감혜소국사가 개산한 사찰이다.
마조 제자 신감에게 ‘인가’
진감 혜소(眞鑑慧昭, 774〜850년)는 전주 출생으로 속성은 최 씨이다. 부모를 일찍 여읜 탓인지 진감은 인생의 무상을 뼈저리게 느꼈다. 31세 늦은 나이에 출가해 804년 사신의 배를 얻어 타고 당나라에 들어갔다. 그는 창주(滄州)에 당도해 마조의 제자인 신감(神鑑)의 제자가 되었다. 진감은 얼굴이 검은데다 열심히 수행하여 주위 사람들은 그를 ‘흑두타(黑頭陀)’라고 불렀다. 진감은 창주신감 문하에 머물며 6년간 정진한 뒤 마침내 신감에게서 인가를 받았다.
이후 선사는 810년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서안의 종남산으로 들어가 지관(止觀)을 닦았다. 다시 진감은 여러 지역을 다니며 행각하는 도중 어느 곳에서는 짚신을 삼아 오고 가는 사람들이 짚신을 바꿔 신도록 보시행을 하였다. 이렇게 행각하는 중에 최초의 산문인 가지산문 도의선사를 만나 법담을 나누었다. 진감은 당나라에서 26년간의 수행을 마치고 830년(흥덕왕 5년)에 귀국했다. 얼마 안 되어 흥덕왕(826〜835년 재위)이 진감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도의선사가 이미 돌아왔고(821년), 이어서 선사께서도 신라로 돌아오셨으니, 이 나라에 두 보살이 있도다. 옛적에 흑의(黑衣) 이걸(二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제 누더기 입은 뛰어난 두 스님을 친견하니 하늘에까지 이름이 가득하고 자비로움이 충만합니다. 온 나라가 기쁨에 넘치는구나.”
진감은 상주 장백사에 주석하며 병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다시 진감은 삼법(三法) 화상이 세운 절 주변에 암자를 짓고, 제자들을 지도했다. 이때 민애왕(838년 재위)이 즉위하여 선사의 도명을 듣고 만나기를 청했으나 선사는 만나주지 않았다. 민애왕은 ‘색공(色空)의 경계를 깨달았으며 정(定)과 혜(慧)를 원만하게 구족한 승려구나!’라고 감탄하며 사신을 보내어 ‘혜소(慧昭)’라는 호를 내려 주었다.
이후 진감에게 제자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지리산 남령에 옥천사(현 쌍계사)를 세우고 여섯 분의 진영(眞影)을 모신 조사당을 세웠다. 여섯 진영이란 6조 혜능, 남악, 마조, 염관제안, 창주 신감, 진감이다. 진감은 이런 법계 체계를 세움으로써 쌍계사에 선문(禪門)을 수립코자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진감은 대중들과 함께 수행했으며, 성품이 늘 한결같았고, 천진스런 성품을 갖고 있어 대중들이 선사를 따랐다고 한다. 진감은 <열반경>의 대가로서 불성을 강조했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행적을 남기지 말라’고 한 승려로서 본연에 철저한 선사였다. 20여 년이 지난 뒤 헌강왕은 ‘진감(眞鑑)’이라는 시호와 함께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진감선사의 비는 하동 쌍계사에 있으며, 최치원이 지었다.
진감선사비를 포함해 최치원이 지은 4개의 비문을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한다. 이 네 비명은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 특히 나말여초의 선종사를 비롯한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필자가 이 원고를 작성하면서 몇 차례 거론했는데, 가장 많이 언급한 비는 희양산문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이고, 성주산문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光塔碑), 지리산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만수산(萬壽山)의 초월산대숭복사비(初月山大崇福寺碑)이다. 이 네 비명은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해 은거하기 전까지 왕명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대숭복사비를 제외한 세 비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다. 진감선사비와 대숭복사비는 최치원이 직접 글씨까지 썼고, 성주산문의 낭혜화상비는 종제(從弟)인 최인연(崔仁)이 썼으며, 지증대사비는 분황사 승려 혜강(慧江)이 썼다. 사산비명은 우리나라 금석문의 신기원을 여는 웅문거편(雄文巨篇)으로서, 화려한 수사(修辭)에다 함축미와 전아(典雅)함을 잘 갖추고 있다고 한다.
앞에서 진감을 신감의 제자라고 했다. 그런데 진감의 법맥에 대한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 9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희양산문 긍양(兢讓)의 비문(碑文)에 의하면, ‘진감은 희양산문의 승려’라는 기록이 전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진감의 한국불교사에 미친 영향이 어떤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진감의 스승 신감은 마조의 제자이다. 한편 진감을 마조의 제자인 염관 제안의 제자라고 하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대만에서 발행된 <불광사전>에는 ‘창주신감이 마조의 직계 제자이고, 진감이 신감에게 인가를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의 다른 기록에도 “도의선사와 함께 동시에 당나라에 온 또 다른 인재가 진감혜소이다. 진감은 마조문하 창주신감의 인가를 받았다(與道義同時期來唐者有鑒慧沼 受馬祖門下之滄州神鑒印可)”는 기록이 전한다. 이에 진감을 신감의 제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쌍계사 금당(金堂)에 혜능의 정상(頂相), 즉 두골이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722년 두 승려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걸망 속에 혜능의 정상을 모시고와서 쌍계사 금당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에 봉안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쌍계사지>에 ‘선종육조혜능대사정상동래연기’로 전하고 있다. 글쎄? 이 점에 대해서는 필자로서 답변을 내리기가 곤란하다. 이 이야기의 진위여부를 떠나 우리나라 승려들의 6조혜능에 대한 사모와 순수함이 담겨 있다는 것만 염두에 두자.
차나무 들여와…‘다도’ 선구자
진감은 여타 선사들과 다르게 주목할 모습으로 여러 요소가 있다. 첫째, 진감이 개산한 쌍계사는 나말여초 9산선문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지리산 일대에 선풍을 전개함으로서 남방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둘째, 불교 행사 가운데 범패의식이 있는데, 이 범패를 최초로 도입한 승려가 바로 진감이다. 진감은 우리나라 범패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진감은 당나라에서 차나무를 들여와 다도(茶道)문화 발전에 공헌했다. 처음 중국에서도 차가 발달할 때, 승려들에 의해 보급됐다. 차는 정신을 맑게 해주는 것으로 졸음을 쫓는 역할을 한다고 하여 수행과 더불어 함께 발전했다. 고려 때 이규보(1168~1241년)는 ‘한 잔의 차로 곧 참선이 시작 된다’고 할 정도로 선(禪)과 차(茶)는 밀접하다. 또 조주(778˜897년)의 ‘끽다거(喫茶去, 차나 마셔라)’ 공안이 있으며, 보조국사 지눌(1158〜1210년)은 ‘불법은 차 마시고 밥 먹는 곳에 있다’고 했다. 이를 ‘다반사(茶飯事)’라고 하는데, 원래 밥 먹고 차 마시는 것처럼, 수행도 일상적인 데서 도(道)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차와 선, 불교와 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진감은 우리나라 다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분이라고 볼 수 있다.
넷째는 진감의 보살행이다. 보살이란 대승불교도들이 스스로를 ‘보살(菩薩, Bodhisattva)’이라고 칭하면서 보리심을 발하고, 중생을 위해 실천하는 수행자를 지칭한다. 선종도 대승불교에서 발달했으므로 선사들이 수행해 마치고 돌이켜 중생에게 회향함이 바로 보살행이다. 진감은 바로 이런 모습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진감은 당나라에서 행각할 때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해주고 싶어 했고, 신라에 돌아와서도 의료행위를 통해 많은 이들을 구제해 주었다. 물론 조선 시대에도 진표율사 등 여러 승려들이 의술 활동을 했다. 진감은 선사로서 의술 활동의 선각자 역할을 했으며, 우리나라 ‘보살행자로서의 롤’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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