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2022. 10. 29.)에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는 충남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마을에 내려갔다.
* 나는 눈이 나빠져서 운전대를 아내한테 넘긴 지도 오래 되었음
시골집 바깥마당에 들어서기 바로 직전에 차를 세웠다.
내 집으로 들어오는 입구와 바깥마당 끝자락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즐지어 서 있고, 은행알이 우수수 떨어졌기에 차를 멈춰야 했다.
차 바퀴에 은행알이 으깨어지면 고약한 똥냄새가 자동차 바퀴에 달라붙을 터.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장갑을 끼고는 대나무 빗자루로 길을 쓸고, 은행알을 줍기 시작했다.
길목만 겨우, 임시로 치운 뒤에서야 차는 바깥마당 안으로 차가 들어섰다.
두 달만에 들른 집.
바깥마당 화단 구석 하단에는 최근에 설치했다는 상수도 밸브가 눈에 띄었다.
지난 여름철 지하수 모터가 고장이 났기에 상수도 배관을 연결하도록 현지에서 사는 사촌동생한테 부탁한 적이 있었다.
웅천읍내의 기술자가 수도배관을 연결했다고 한다.
내가 수도 꼭지를 비트니 물이 잘잘 쏟아져내렸다.
울안으로 들어와 수도밸브를 여니 울안에서도 수도물이 잘 나온다.
충남 미산면에 위치한 보령호에서 공급하는 상수도 물이다.
이제는 물 걱정을 덜었다!
마당주변을 빗질할 때 웅천읍내에서 사업활동하는 사촌동생이 왔다. 저녁밥을 사겠다고.
사촌이 운전하는 차에 사촌누나(셋째), 사촌동생의 제수씨(대전에서 살고 있음), 우리 내외를 포함한 5명이 웅천읍 시내에서 저녁밥을 먹었다.
생선탕. 걸직한 생선탕 양이 많아서 배가 불렀다.
* 나는 갯바다 인근의 산골마을 태생이라서 갯것을 많이 보고 자라났는데도 생선류를 별로 즐겨하지도 않는다 비린내가 유난히 심하게 나기에. 그런데도 이번에는 양껏 먹었다. 다 먹지 않으면 음식쓰레기로 처리할 터. 음식물을 소중히 여기는 내 성미이기에.
뒷날은 일요일(10월 30일).
아침밥을 먹고는 이내 사촌동생네로 갔다.
사촌동생네는 내 집에서 300m 거리에 있다.
* 수십년 전에는 산지기네 세 집에서 시향 제수물을 지게로 져서 산으로 운반했으나... 지금은 사촌네에서 시제를 지낸다.
대전 사시는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숙부가 이를 관장하셨다.
대천시내에 사시는 큰당숙, 그의 아들인 육촌동생 내외는 서울에서 내려왔고, 대전의 작은당숙네 식구들은 대전에서 올라왔고, 공주에서는 사촌동생네는 올라왔고,. 나는 서울에서 내려왔고.... 등등.
시제/시향을 간략하게 약식으로 더 줄였다.
* 최씨네는 술에 약하니까 제주(술)은 전혀 마시지도 않았다. 공주 사촌동생이 술과 비린내가 심하게 나는 생선 일부를 싸서 가져 갔단다. 공장일꾼한테 나눠준다고.
시제를 지낸 뒤에는 밥 먹고는 각자 흩어졌다. 참가한 여자들한테는 용돈을 얼마씩라도 나눠주었다. 해마다...
시향이 끝난 뒤 우리 내외는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서 서낭댕이 선산에 들렀다.
서낭댕이 앞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소나무 몇 그루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대전누나한테서 들었기에 이를 확인하고 싶었다.
황씨네 소유의 땅으로 낸 산길.
강한 바닷바람에 뿌리가 뽑혀서 비슴듬히 누워버린 소나들이 산길을 막았다.
위험스럽게도 그 밑을 통과하지니 은근히 겁이 난다.
나는 10여 대의 조상 무덤마다 일일히 절을 올렸다.
이웃 소유의 땅이 문제이다. 최근에 벌목해서 다른 대체식물을 심었기에 내 산에서 바라보는 서쪽 시야는 훤히 드러났다.
* 황씨네 소유의 산을 외지사람이 샀다는 소문을 들었다.
보령시 남포면 용머리해수욕장, 더 멀리는 대천해수욕장, 더욱 먼 거리에는 녹도, 호도, 삽시도, 원산도 섬들이 줄줄이 보이고, 더 남쪽으로는 외연도로 가는 섬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최근에 이웃 산의 소나무를 완전히 벌목한 탓으로 갯바람이 엄청나게 넘어왔나 보다.
이런 현상은 내 생전에 처음이었다.
산속의 소나무가 뽑혀서 반쯤 쓰러진 상태.
* 소나무도 벌레 피해로 구멍이 숭숭 뚫린 채로 죽어 나자빠졌다.
나중에 벌목꾼을 불러서 산길을 가로막는 소나무를 기계톱으로 잘라내야 할 터....
사촌동생한테 부탁하니 한 달 뒤에 벌목꾼한테 부탁해서 작업해야겠다고 대답했다.
황씨 소유의 산으로 낸 길이기에 황씨네, 조씨네, 최씨네 등이 함께 길을 이용한다.
저녁 무렵에 화망마을 3반에 사는 김씨가 쌀 2가마니(20kg 8푸대) 를 트럭에 실어서 가져왔다.
* 트럭에는 햇쌀 푸대가 무척이나 많았다.
내년 5월 쯤에 또 방아를 찧어달라고 부탁했고, 나머지 쌀은 돈으로 내년 봄에 달라고 말했다. 아직은 쌀값이 고정되지 않았기에.
또한 2반에 사는 김씨는 쌀 두 가마니 값을 가져왔다. 80kg 한 가마니 쌀값은 17만원이란다.
지난해(2021년)에는 한 가마니당 21만원했는데도 올해는 17만원으로 하락했단다.
얼마 전까지는 15만원까지 더 내려갔다고 한다.
뒷날인 월요일(10월 31일).
보령시 남포면사무소 근처에 있는 대왕자동차 공업사에 차량검사를 의뢰했다.
사촌동생이 대왕공업사로 왔기에 그의 차를 타고는 우리 내외는 홍성법원으로 올라갔다.
웅천읍 구룡1리 서낭댕이에 있는 땅이 지방도로 확장공사로 토지수용되기에 보상비를 서류 신청)작성)하려고 법원에 들렀다.
* 조부 명의의 대지이기에 현재는 손자 손녀들이 재산 상속자이다. 무려 20여 명.... 신작로 도로변에 붙은 작은 토지이기에 지금껏 재산상속이 이뤄지지 않았다.
내 아버지는 호주상속인, 그의 아들인 나도 호주상속인.
2020년대인 지금에는 호주상속제도가 없어졌다.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의 자식 가운데 한 사람인 나는 보상 신청서를 일괄작성해서 제출했다.
* 대천 법률사무소 직원의 도움을 받아서 작성한 상속 지분율을 제출.
나중에 처리되면 내 몫으로 된 보상비를 얼마만이라도 수령해야겠다. 다시 홍성법원에 들러야 할 터...
* 사촌동생은 이미 수령했다고 한다.
귀가하면서 사촌동생이 점심을 산다기에 대천시내에서 밥을 먹었다. 음식이 맛이 있고, 양도 무척이나 많았다.
귀가하는 도중에 남포면 대왕자동차 공업사에 다시 들러서 내 차 정기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이상이 없단다. 다행이다.
저녁무렵에 화망마을회관 앞 도로변을 빗자루로 쓸면서 청소하다가 길 가생이에서 길게 늘어진 뱀을 보았다.
손에 들고 있었던 삽으로 대갈통을 내리찍었고, 몸뚱이도 거듭 거듭 찍었다.
완전히 죽여버린 뱀을 삽으로 떠서 불소개를 태우는 쓰레기통 안에 넣었다.
* 화망 마을회관 바로 코앞에 쓰레기를 태우는 쓰레기통이 있음.
담부리 내 밭에서 기어나온 맹독사이겠지.
나는 쌍둥이형이었다. 나보다 체격이 훨씬 큰 동생은 1969년 8월 여름방학 때에 서울에서 시골집에 내려왔다가 울안에서 뱀 물려서 다음날 죽었다!
이날부터 나는 하나뿐인 쌍둥이형이 되었다!
나한테는 뱀은 원수이다!
다음날은 11월 1일 화요일.
오전 아침밥을 먹기 전에 화망마을 2반 담부리 도로변에 서 있는 은행나무 밑 주변을 대나무 빗자루로 길바닥에 떨어진 은행알을 쓸어 모았고, 삽으로 떠서 삼태미로 담아서 집으로 들고 왔다. 무게로 허리는 더욱 굽어지고.
물통에 쏟아붓고는 장화 신은 채 은행알을 눌러서, 살살 비벼가면서 능정거리는 은행알 생껍질을 벗겨냈다.
함석지붕 아래에 놔두었던 물통에 빗물이 가득 찼기에 물통에서 물을 떠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은행알을 씻었다.
물기만 임시로 빼 낸 뒤에 푸대에 넣고는 자동차 트렁크에 실었다.
아침밥을 먹고는 그참 서울로 올라가려고....
자가용 차에 쌀 20kg짜리 8푸대를 실었다. 차가 무척이나 무거울 터.
홍시(감)도 한 푸대....
들깨기름 한 병 : 서낭댕이 밭을 방치했는데 읍내 빵가게 주인이 들깨농사를 지었다며, 흉내를 냈다(내 사촌동생의 친구).
대전 누나가 시골집에 석곡 화분 하나를 가져왔다고 했다. 제법 큰 화분에 든 난초류는 겨울철에 얼어죽을 것이 예상되기에 서울로 가져왔다.
* 서울 아파트 안에도 화분이 100여 개나 가득 찼는데.... 설마하니 빈 공간 하나 마련하지 못할까?
11월 2일 수요일.
오전 내내 오후 내내 은행알 껍질(목질)을 뺀찌로 눌러서 은행알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도 종일토록 목질의 은행알을 뺀찌로 눌러 깨뜨려서 속 알맹이를 꺼냈다.
은행알이 무척이나 자잘하다. 내 시골집 주변에는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기에 가을철에는 은행알이 엄청나게 많이 쏟아지나;... 올해는 눈꼽만치만 서울로 가져왔다.
아내가 은행알을 보면 알르레기 반응이 심하고, 아내가 서울로 일찍 올라가려고 서두르는 바밤에 나는 은행알 줍기를 포기했다.
* 은행알을 제대로 줍는다면 아마도 한 가마니도 훨씬 넘게 주을 게다. 이게 다 돈인데.....
대신에 서울 올라오기 직전에 늙은 감나무에서 홍시를 땄다.
길이가 긴 왕대나무를 대나무밭에서 잘라왔고, 장대 끝을 쪼개고 그 틈새를 벌려서.... 감나무 가지를 꿰어서 감을 따야 했다.
가뜩이나 눈 시력도 나빠지는 나. 긴 장대를 높이 쳐들어서 감나무 가지를 겨냥하는 게 무척이나 곤란했다. 시력이 많이도 나빠졌다는 뜻.
내 아버지는 60여 년 전인 1960년에 대전에서 GMC대형트럭으로 과일묘목을 운반하여 텃밭 세 자리에 사과묘목을, 욱굴산에는 감나무를 심어서 과일농장을 경영하려다가 실패했다. 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감나무와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 그 흔적은 남아 있다. 번식시킬 수도 있는데... 그냥 60년 넘게 그 흔적은 남아 있다. 맛이 무척이나 좋았는데....
나 또한.... 퇴직한 뒤인.... 십 년 전에 400여 그루의 묘목을 심었고, 그 가운데 하나인 감나무 묘목은 180여 그루. 나도 실패했다. 감나무, 대추나무 묘목은 거의 다 죽었다.
현재의 감나무는 재래종.
60년 전에 대전의 아버지가 심었던 감나무는 두 그루는 시골집 마당 하단에 아직껏 살아 있었다. 너무나도 늙어서 이제는 감이 별로 열리지 않았다.
나는 퇴직한 뒤인 2010년에 감나무, 모과나무, 매실나무, 대추나무. 석류나무 등 묘목 400여 그루를 심었다가 대부분 실패했다.
* 2014년 어머니가 병원중환실에 장기간 입원하셨고, 아들이 하나뿐인 나는 병원에서 살다시피했고, 2015년 2월 말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처자식이 있는 서울로 되올라오는 바람에 과일 묘목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과일밭 농사도 포기한 결과로 변해버렸다.
* 특히나 감나무 묘목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내가 심었던 모과나무 묘목(인부 몇 명이 작업)은 이제는 제멋대로 웃자라서 모과가 열리기 시작한다.
풀속에 떨어진 모과를 주웠다. 반 가마니도 훨씬 더 넘는데도 아내는 '그냥 내버리라'고 거듭 말했다.
아내가 서울 가져가는 것을 매우 싫어하기에 울안에 그냥 놔뒀다.
모과꽃이 필 때에 농약을 살포해야 하는데도 그냥 방치했기에 벌레 먹은 흔적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아내는 몇 개만 서울로 가져오고, 나머지는 겨우내 얼겠지. 그냥 썩겠지.
오늘은 11월 3일 목요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은행껍질(목질)을 깨뜨려서 속 알맹이를 뽑아냈다.
자식들한테 조금씩 나눠줄 게다.
은근히 지친다.
시골 다녀온 여독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기에.
3박4일 동안에 정말로 바쁘게 돌아다녔고,
서울 올라와서도 고약한 똥냄새가 나는 은행알 겉껍질을 깨뜨려서 속을 꺼내야 했다.
2022. 11. 3. 목요일.
나중에 보탠다.
며칠간의 생활일기.... 시골에서는 내가 할 일이 엄청나게 많다!
쉬자. 잠깐이라도
오늘도 몸이 무척이나 피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