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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1)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로 증거하였다(요1:14)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요1:1)을 육신은 인간의 본질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안에 결합된 신비를 증거한다. 본래 하나님인 그가 인간의 본질 즉 인성을 취하신 사건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일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딛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롬9:1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이와 같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명칭,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영광을 돌림으로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 성경은 예수께서 참 참 사람이심을 또한 증거한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딤전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롬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고전15: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생각해 볼 문제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함께 지녀야 했던 이유 : 사람이 범죄했으므로 사람이 죽어야 했다. 더욱이, 그는 죄 없는 사람이어야 했다. 만일 죄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죗값으로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는 대속의 제물이 되려면 반드시 죄 없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야 했다.
(히4:15)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논쟁, 아우구스티누스 편. 최종원
1. 다름이 틀림이 되는 과정
기독론에 대한 논쟁은 초대교회가 교리를 확정해 나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주제들 중 하나였다. 이를 주요한 논제로 다루었던 에베소 공의회와 칼테돈 공의회 등을 살펴봄으로써 기독교 교리가 정립되어 가는 역사적 흐름을 짚어 볼 수 있다. 두 공의회들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리되기 전에 양 교회가 함께 이루었던 회의로서, 동. 서방 양 교회에서 공히 인정을 받았다.
삼위일체론이 니케아에서 중요한 교리로 다루어진 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차이 역사적 흐름의 차이를 살펴보면 서방은 외부와의 전쟁을 주로 치렀다. 로마를 약탈한 이교도와의 싸움에서 로마 교회가 서방 교회를 방어하는 역할을 해냄으로써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로마 감독(교황) 레오1세(재위 440~461)
452년 훈족이 서로마 제국을 침공하여 마침내 로마까지 이르자, 레오 1세는 직접 로마 교외로 나가 훈족의 왕 아틸라와 담판을 벌여 로마는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455년 반달족이 쳐들어오자, 그는 또다시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와 회담을 벌였다. 그리하여 로마 시내의 약탈은 막지 못했지만 로마의 파괴와 시민들의 살육만큼은 막아 내었다. 로마 시민들은 레오1세를 수호자로 받을었다.
서방 교회는 동방 교회에서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며 일으켰던 신학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서방 교회가 동방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것을 의미하며, 중세까지 교황 수장제를 기반으로 카톨릭교회가 교회 역사를 주도하여 발전해 나갈 수 있었던 유리한 토태가
되었다.
반면에 동방교회는 서방 교회처럼 외부로부터 위협을 방어하면서 강력한 권력을 형성할 기회가 없었다. 동방 교회는 황제의 감독과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서방 교회와 같은 절대 권위를 갖는 중심이 없었기에 초대교회에 다양한 신학적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이 때문에 일어난 일련의 신학 논쟁들로 인해 분열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 분열이라 하면 1517년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인한 구교와 신교의 분열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보다 조금 더 교회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1054년 카톨릭과 동방정교회의 분열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이전에도 결코 이보다 작지않은분열에 못지 않게 큰 교회 분열 사건들이 있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책에서 11세기의 동방 정교회와 서방 카톨릭교회의 분열을 최초의 분열로 지적하고 그 전에 이미 존재한 칼케돈 공의회를 전후한 교회 분열은 분리라고 보지 않는다. 이때의 교리를 둘러싼 논쟁에 따른 교회의 분열을 정통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에 있었던 사건들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기독론 논쟁에 대해 어떤 한 파가 다른 파를 이단으로 단죄하여 정통을 확립해 나갔다는 시각보다는 (그 시기의 이단 논쟁을) 견해 차에 따른 교회 분열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결론적으로는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열린 것이었다.....,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인간을 구원할 능력이 없을 것이므로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점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합의되었다.
(이것이 니케아에서 합의된 삼위일체설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는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와서 인간들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지고 십자가에 죽음으로 모든 죄를 사하였기 때문에 예수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면 논리적 모순에 빠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완벽한 신인 동시에,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있음으로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완벽한 인간이어야 한다.
성가족 대성당, 2017/5. 스페인
2.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논쟁
결국 기독론(공의회 논쟁)에서 핵심은 #신성과 #인성이 한 실체 속에 어떻게 공존하느냐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풀어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교회 공의회는 기독론에 관한 사상 세 가지를 단죄했다. 첫째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둘째 네스토리우스주의, 세째 유티케스주의 이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이 사상은 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단죄되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실체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둘이 완벽하게 합쳐져 연합(union)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편지지의 봉투에 편지지를 넣는 것처럼 예수의 육체안에 신성한 영혼이 들어왔다 설명했다.
예수의 육체는 인간이고 영혼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면 예수는 완벽한 인간이 아닌 것이라는 결론이 된다. 그러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하는 완벽한 인간이라는 니케아 결정에 위배되는 것이다.
결국, 교회는 예수가 완벽한 신인 동시에 완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실히 선포하면서 이를 침해할 수 있는 설명을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1,2차 공의회 모두 로마 감독은 참여하지 않았다. 3,4차에서도 로마 감독은 동방의 문제라 여기고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동방 교회의 감독들끼리만 논쟁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3차와 4차 공의회에서도 이 문제가 논쟁이 된다. 3,4차 공의회에서는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대립하는데 이는 순수한 신학적인 것만이 아니며 두 교회 사이의 정치적 경쟁으로부터 빚어지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 반면에 #안디옥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했다. 안디옥 학파는 터키와 소아시아 지역에 영햑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이집트 지역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안디옥 학파(인성)는 같은 지역인 #콘스탄티노플학파가 사상을 형성하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 두 세력 간의 논쟁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예수의 신성을 중시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 혹은 하나님을 잉태한 여인으로 불렀다. 이것은 카톨릭의 성모 숭배와 연결되는 사상이다. 이때 그들의 주장은 물론 성모 숭배가 아니라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12~13세기 카톨릭의 성모 숭배 경향은 큰 발전을 이룬다.무흠수태설은 1854년, 성모승천설은. 1950년이 되어서야 교리로 지정된다)
#네스토리우스주의
이에 대해서 콘스탄티노플 감독으로 임명된 네스토리우스가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안디옥 학파의 전통 아래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감독 네스토리우스(? ~ 451?)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부르면 예수의 인성적인 측면이 가려지기 때문에 양 측면을 포괄하기 위해서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union - 화학적 결합, conjunction - 물리적 결합)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의 하나 됨을 물리적 결합의 의미인 conjunction 용어로 설명했다. 예수는 신성만이 아니라 완벽한 인성 또한 지녔다고 본 것이다. 일리 있는 견해이다. 그러나 문제는 신성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자기들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리우스는 네스토리우스가 기존에 받아들였던 신앙 체계를 흔들고 있다고 반박한다. 표면적으로는 신학적 반박이지만, 실제로는 콘스탄티노플의 입지가 강화된 데 따른 불안감으로 인해서 제기되는 정치적인 성격의 주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하나님의 어머니보다는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더 타당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를 둘어싸고 대규모 논쟁이 벌어진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네스토리우스가 두 아들을 만들어 냈다고 비판했다. 결국 양 교회는 설전을 주고 받다 결국 황제에게 심판을 요청했다. 이에 테오도시우스2세 황제가 432년에 에베소에 이를 다루기 위한 공의회를 열기로 한다.
니케아 공의회는 그 자체로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교회 문제에 세속 권력이 개입하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것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도 테오도시우스1세 황제가 마찬가지로 개입을 해서 문제를 해결했다.(아폴리나리우스 단죄) 결국 그 이후의 공의회 역시 누가 황제로부터 정치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되어 버렸다.
#에베소공의회 431년
네스토리우스는 공의회가 이집트가 아닌 에베소, 즉 자신의 영향권 안에서 열리기 때문에 자신이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결론은 반대였다.
에베소, 2013/9. 터키
테오도시우스2세 황제는 과거에 그의 누이가 네스토리우스에게 모욕을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신학적 쟁점에 대한 관심보다는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반감으로 그를 추방하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감옥에서 조용히 세상을 마감했다.
예베소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가 단죄되고 네스토리우스를 추종하는 교회들이 떨어져 나갔다. 이들을 네스토리우스파라 부른다. 네스토리우스파는 로마 제국의 경계 밖에 있는 지역인 페르시아로 진출하면서 로마 제국 안의 기존 교회와는 크게 분리된다. 그리고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 동쪽에 근거지를 세우고 교회를 이룬다.
네스토리우스파 바히라 교회, 시리아
중국과 몽골에까지 전해지고, 심지어 한반도에도 전해졌다고 알려진 정교는 동쪽으로 이동한 네스토리우스파이다.
(단성론은 네스토리우스파의 주장이 아니다.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은 오히려 단성론과 정반대라 할 수 있다)
#유티케스주의
유티케스는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하는 키릴리우스파의 강경론자라고 할 수 있는데, 유티케스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이 나뉠 수 있다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정반대 논리를 내세웠다.
물과 포도주를 섞으면 그 결과물은 물도 아니고 포도주도 아닌 제 3의 본성을 가진 다른 성질이 된다. 예수는 신성화된 본성을 지녀 우리와는 다른 그렇지만 알 수는 없는 새로운 본성을 지니게 됐다고 주장했다. 유티케스는 예수를 하나의 본성(단성론)만을 지닌 존재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개최된 후 유티케스주의를 수정하여 합법화했다. 449년 에페소에서 2차 공의회가 열렸을 때 키릴리우스파는 유티케스주의를 정통으로 삼고자 시도했다. 이에 대해 로마 감독 레오 1세가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에페소 공의회를 합의하지 않은 내용을 통과시킨 날치기 공의회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유티케스의 주장을 #단성론이라고 처음으로 언급했다.
결국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2년 후인 451년 칼케돈에서 다시 공의회가 열리게 된다.
3. 부정의 신학 의 결정체
#칼케돈공의회(451년)
황제(마르키아누스)가 역시 소집하였으며, 무려 500여 명의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한 역대 가장 큰 규모였다. 로마는 훈족의 침입과 약탈로 인해서 대규모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 그리고 키릴리우스 서신 2통, 교황 레오 1게가 단성론을 부정한 것 등을 지지했다. 또한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플을 대주교로 승격하는 결정을 공식적으로 확정했다.
공의회 결정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모두는 만장일치로 가르친다. 한 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성자는 신과 완전한 인간으로 섞이거나 변화되거나 나뉘거나 분리되거나 함이 없는 두 본성이다. 이 두 본성 사이에 두 분이 연합(union)을 통하여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며 오히려 각 본성의 동일성은 보존되면서 한 인격과 존재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칼케돈 공의회 결정문의 핵심은 부정의 신학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는 ~이다’ 라고 언어로 규정하려는 순간, 그 주장은 공격을 받을 여지를 남긴다. 이 때문에 ‘~아니다” 라는 식으로 규정한 것이다. 칼케돈 공의회의 절묘한 성과는 주장하지 않으며서 주장하는 그 성격에 있다. 잘못된 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올바른 것만 남게 하는 것이 이 칼케돈 공의회의 결론이다.
어떤 개념에 대해서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지만, ‘~ 아니다’ 라고 선언함으로써 여백을 남겨 두는 부정의 신학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처럼 봉투와 편지지의 비유에 대해서 반박했다.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실체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둘이 완벽하게 합쳐져 연합(union)할 수는 없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함으로써 예수는 완전한 신과 완벽한 인간이라는 주장을 가능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신성과 인성이 두 본성이 섞여 변화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유티케스주의도 주의도 반박했다.
(유티케스주의 - 물과 포도주가 섞여서 혼합되어 본성이 변해 다른 제 3의 새로운 것이 된다)
또한 예수는 두 본성이 나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네스토리우스주의에서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네스토리우스주의 - 두 본성이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분리될 수 있다고 주장. 인성이 강조될 수도 신성이 강조될 수도 있다고 본다)
칼케돈 공의회, 451년
결론은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실제 연합(union)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연합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칼케돈 공의회의 한계이다. 양성이 연합하는데 어떤 식으로 결합되는지는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것이 칼케돈 공의회의 결론이다.
서방 교회는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수용한다. 로마 감독(교황) 레오 1세가 주창했던 단성론자에 대한 반박이 들어가 있었고, 서방 교회는 어쨌든 이 신학적인 논쟁에 깊이 관여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다.
반면에 동방 교회는 이 문제 때문에 네스토리우스파가 떨어져 나간 데 이어서 유티케스주의도 떨어져 나가면서, 양 극단이 분리되는 사태가 일어난다. 공의회를 열어서 문제가 해결되고 봉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들이 증폭된 것이다. 381년 아폴리나리우스파, 431년에 네스토리우스파가 단죄된 상태였기 때문에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는 칼케돈파와 단성론자의 갈등이 계속된다.
그리고 100년 후인 553년에, 또 130년 후인 680년에 다시 이 문제를 가지고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다시 확인하고 양극단인 양성론자와 단성론자를 단죄했다. 이렇게 200년 동안 반복적으로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이 재확인되었다는 것은 이 문제가 200년 동안 해결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도 이 문제는 계속 남아 있었고, 단성론자 교회가 크게 세력을 얻고 확장해 나갔다.
4. 공의회가 남긴 유산
이렇게 기독론에 대한 차이로 교회가 분리된다. 교회의 분열은 카톨릭과 동방정교가 분리되기 이전에 이미 일어났다.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 네스토리우스 교회가 에베소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분리되었다. 단성론을 주장한 유티케스주의자들도 칼케돈 공의회로 인해서 분리되었다.
동. 서방 교회가 나눠지기 전에 이미 도나투스파, 네스토리우스파, 비칼케돈파 등이 교리를 두고 논쟁하다가 갈라졌다. 그들은 칼케돈 공의회의 결의를 거부하고 이집트, 서아시아, 에티오피아 등에 정착하여 토착 기독교로 자리 잡았다. 이들이 #오리엔트정교회이다.
시리아, 마론교, 콥트교, 인도, 아르메니아, 에티오피아 정교회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예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의 통치 시절 그의 각료 중에 기독교 신자들이 몇 명 있었다. 예상 외로 이라크의 기독교 비율이 높았다. 오리엔트 정교회가 이슬람의 통치 속에서도 천 년이 두 번 흐르는 동안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그리스 정교의 일파로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 정교와의 분리 이전에, 5~6세기에 걸쳐서 형성된 또 다른 기독교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7~8세기에 비잔틴 제국의 동방 지역이 이슬람의 지배하에 넘어가면서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 교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다. 유일하게 콘스탄티노플만 동방 신학의 유산을 간직하며 상징적으로 남았다. 더불어 키예프 공국에서 동방정교를 수용하여 러시아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폴란드를 제외한 동유럽 지역이 정교 지역으로 된다.
공의회의 결과는 이같이 교회 내 분리를 낳고, 서로 독자적인 신학의 형성을 가져왔다. 이렇게 하여 초대교회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중세교회사에 대해서 논할 때는 초대교회의 주요 교회들 중 하나였던 로마 카톨릭 교회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중세에도 그리스 정교와 로마 카톨릭의 화해와 일치의 노력은 계속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노력들은 실패하고, 서로 엄격하게 분리되고 말았다.
교회 공의회의 긍정적인 기여는 중요한 문제들을 정의하고, 신학을 정리해서 합의된 교리를 도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유산도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특정하게 정의하는 순간 그것을 수용하지 못한 집단들이 떨어져 나갔다.
공의회를 통해 결정된 것을 그저 정통과 이단 시비로만 규정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교리에 대한 차이로 나뉘었지만 여느 종교와 마찬가지로 민족과 종교가 밀착되어 발전하였다. 민족의 언어와 문화, 사상적 배경을 토양 삼아 각각 독자적인 신학을 형성하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확정한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인 초대 교회는 칼케돈 공의회 전에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관점에서 차이를 드러내고 분열하였다. 또한 넓게 단성론을 받아들인 교회와 양성론을 받아들인 교회로 갈라졌다.
한국 교회와 같이 성서 텍스트 해석 문제를 놓고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데 익숙한 분위기 속에서 동방의 소수 기독교 종파를 같은 뿌리의 기독교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의 발전은 성서 텍스트뿐 아니라, 언어. 문화. 사상 등 텍스트를 둘러싼 #컨텍스트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런 사실을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이해한다면, 정통과 이단을 몇 가지 기준으로 간편하게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하고 위험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기독교는 텍스트 기반의 교리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사람들이 문화와 전통 속에서 호흡하고 살아가는 컨텍스트를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텍스트 - 쌈자나티, 컨텍스트 - 아비자나티)
<12장>
초대교회의 뒤안길 - 아우구스티누스와 역사
*초대교회이 끝자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적 여정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아우구스티누스와 역사의식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354~430)
#아우구스티누스
1. 초대교회의 끝자락에서
왜 아우구스티누스인가? 오늘날 카톨릭과 개신교 진영 모두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그의 광범위한 사상의 사유 세계 덕분에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카톨릭적인 요소와 개신교적인 요소가 모두 발견되고 있다.
초대교회사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막을 내린다. 인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이고 역사적 사건으로는 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막을 내리는 것이다. 또 종교개혁의 시작은 그의 상상이 재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시 말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대교회사의 마지막 인물인 동시에 중세교회사의 첫머리이고, 중세교회사의 마지막 인물인 동시에 종교개혁사의 첫머리이다.
교회사 시대 구분을 아우구스티누스 전과 후 혹은 그의 사상이 숨겨졌을 때와 재발견됐을 때로 나눌 수 있다. 그의 성과가 그만큼 탁월
했다는 것이다.
그는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초대교회의 모든 사상을 집대성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이나 주교구에서 활동하지 않았고, 공식적인 신학을 만드는데 일조하지 않았다. 단지 한 변방 교구의 감독이었을 뿐이다.
2.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적 여정
로마 제국이 혼란한 시점에서도 기독교는 성공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을 현실 정체에 적용하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 덕분에 유럽 중세의 지배적 정치사상으로 기독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중심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었다.
성아우구스티누스와 성모니카, 아리 셰퍼 작 . 1854년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아버지는 중산층 출신 이교도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티카스테라는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카르타고에서 수학했다. 여기서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한 여인과 동거를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는 이때를 아주 방탕하게 지냈던 때라고 <참회록>에서 회고하고 있다.
그는 마니교에 빠지기도 하고 또 기독교에 입문하기 전에는 신플라톤 철학에 깊이 경도되기도 했다. #마니교는 페르시아 마니가 세운 종교로 영혼과 육체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펼친다. 영은 빛이요 육은 암흑인 극단의 이원론적인 우주론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극단적으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영혼이 순수한 빛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러한 교리를 보면 마니교는 자기 완성을 추구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마니교는 이런 빛과 암흑의 대조를 통해서, 죄와 어둠, 선과 악의 문제를 이원화해서 풀어 가고자 시도한다.
그는 이 세상에 현존하는 악의 문제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신이 지고지순한 존재라면 악은 그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과연 악을 신이 만들었는가 고민하며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해답을 찾는다. 그는 날씨가 춥고 더운 이치를 비유로 들어서 이를 설명한다.
우주에는 태양이란 궁극적인 존재가 있는데 이 태양과 가까울수록 열을 많이 받아 따뜻하고, 태양에서 멀면 추워지는데, 선과 악을 이런 현상으로 본 것이다.
태양은 선에 해당한다. 악은 선에서 멀어져 선이 충만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악은 신이 만든 창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악은 어떤 존재의 근원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선이 결핍된 상태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선이 결핍된 자리에 악이 들어와서 그 자리를 메운다는 의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로 가서 밀라노 감독인 암브로시우스를 스승으로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암브로시우스는 행정가이자 뛰어난 웅변가이기도 했다. 그의 설교에 감동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를 받고 수사학 교사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수도사가 된다.
그는 수도회 운동에 전념하기 위해서 아프리카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북아프리카 히포에 도착해서 그곳 주민들의 성화에 못이겨 히포 교구의 감독이 되기도 했다. 그는 히포의 감독이 되고 나서 죽을 때까지 그의 삶은 치열한 현실적인 논쟁과 갈등, 대립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수도사 마르틴 루터
16세기에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사였다. 중세수도회의 전형은 베네딕투스 수도회였는데 이와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수도회로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회가 있었다. 이 수도회는
그의 사상적인 영향력, 삶과 규칙을 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도회였다. 그의 영향력이 이 수도회를 통해서 중세 내내 면면이 흐르고, 마르틴 루터에 이르러서 새롭게 열매를 맺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3. 펠라기우스와의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에서의 주장이나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의 쟁점 등 텍스트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적어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서는 그가 처해 있던 그 시대의 현실적이고 급박한 상황을 중시해야 한다. 이를 무시하면 사실상 그에 대한 이해는 반의 반쯤에 머물게 된다.
<참회록>, <신국론>, <삼위일체>는 모두 그가 직면한 시대적 상황과 고민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기독교의 도덕적 타락은 심각한 문제로 나타났다. 교회가 힘이 약하고 탄압을 받을 때에는 순수하게 믿음을 지키는 것이 가능했으나 교회가 기득권의 입장에 섰을 때에는 도덕적 하락을 경험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또한 그는 410년에 이 민족에게 약탈당한 로마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당시의 이러한 사회. 정치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그의 신학, 은총, 교회론, 신국, 지상의 도시라는 것들이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그가 살고 있던 시대의 상황은 내외적으로 너무나 긴박하고 치열했다. 그가 신학을 정리하고 고민해야 했던 시기는 문자 그대로 삶과 죽음의 문제, 즉 교회가 지속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되었던 때였다.
#펠라기우스
그에 대해서는 설이 많은데 여전히 그이 실체는 불분명하다. 브리타니아 섬에서 왔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그는 합리적인 도덕관을 가지고 이성적인 신앙을 전파하던 사회개혁자로고 보통 알려져 있다. 그는 로마를 방문하면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를 보고 매우 실망한다.
354~418?
그는 로마 사람들에게 로마 전성기의 도덕적 가치와 의무를 되새겨 주고, 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서에서 예수가 가르친 엄격한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르도록 가르친다. 쉽게 말하면 윤리적인 삶에 대한 요구를 강조한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이미 세속화 된 교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교회가 사람들의 세속적인 욕구를 종교적인 외피를 입혀 포장해 주는 경우가 교회 역사에는 늘 있어 왔다. 인간의 욕망을 매개로 성장하여 결국 교회를 삼켜 버린 연옥설과 면벌부 교리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대중의 세속적 욕망을 합리화해 주고 도덕적 책임감을 완화해 주는 수단으로 변질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펠라기우스가 문제를 제기한 부분도 바로 여기였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기 때문에 인간의 책임, 도덕적으로 살고 신의 약속과 계명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방관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은총론이 흘러갔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 이론과 사상의 기초는 구약과 신약에 나온 예수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자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신의 뜻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예정설은 그에게는 용납되지 않는다.
펠라기우스는 결국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다고 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신의 명령을 어기고 행한 모든 죄의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가 살던 당시 브리타니아 지역은 카톨릭 교회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군대가 주둔하던 곳으로 번져나간 기독교는 헬레니즘 세계의 동방 교회였다. 그리고 이 동방 교회의 수도원 전통이 브리타니아 지역에 독자적인 켈트 기독교 문화를 형성한다.
7세기에 이르러 카톨릭 교황 그레고리우스1세(504~604)가 켄터베리 주교로 아우구스티노를 영국에 파송함으로서 영국 내에 두 교회 전통이 공존하였다. 657년 휘트비에서 토착 수도원과 새로 들어온 카톨릭교회가 만나 협상하여 로마 카톨릭의 전통을 영국 교회가 수용하였다.
켄터베리 대성당중세기에는 영국의 정신적 중심지였다.
최초의 성당은 1070∼1089년 세워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이었다. 그 후 여러 번 증 ·수축하여 동서에 제실 ·익랑 ·수도원과 도서관이 있는 현재의 이중 본전식 대성당이 되었다. 1174년 화재 후 프랑스인 윌리엄 오브 센즈에 의해 일부 증축되어 프랑스 번성기의 고딕양식이 도입.
따라서 펠라기우스의 신학은 인간의 책임과 결단을 강조하는 동방 교회의 신학을 반영했다.
반면에 서방 신학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로 인하여 저주 받은 존재인 인간을 강조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의 타락과 원죄의 유전으로 인해 인간은 완벽한 선에 도달할 수 없으며 오직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반면에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선한 의지와 도덕적 삶을 위한 노력 등을 강조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반명,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가 주어졌더라도 성령의 도움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보았다.
펠라기우스는 창조의 선함, 인간의 본질적 선함을 주장하였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의 선함보다 원죄설, 즉 죄로 인한 인간의 부정과 타락을 강조하고, 교회와 성례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예수의 속죄, 대속 자체를 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는 이유로 단죄된다. 529년 펠라기우스 주장이 단죄되고 아우구스티누스의주의가 수용된다.
그러나 과연 펠라기우스는 틀렸고 아우수스티누스는 옳은 것인가? 여기에 두 가지를 변증법적으로 발전시켜서 수용한 것이 반(半)펠라기우스주의이다.
#반(半)펠라기우스주의
인간의 원죄와 그 죄가 유전된다는 것을 수용하고 , 은혜로 구원 받는 것도 받아들인다.(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설, 은총설을 수용)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구원에 반영될 수 있음을 수용함으로써 펠라기우스 주장도 반영했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중세 동안 이어졌으며, 로마 카톨릭의 신학 속에 자리잡았다. 이러한 도덕신학은 펠라기우스의 시대인 5세기에만 나온 것이 아니라 중세 내내 기독교의 타락의 시점에 제시되었던 주제이기도 했다.
에라스무스1466?~1536
이 주장은 후에 루터가 에라스무스와의 자유의지론 논쟁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가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바뀌고 변화될 수 있다고 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에 입각한 <자유의지론>을 쓴다. 루터가 이것을 보고 반박하여 의지의 속박, 인간은 선을 행하고 싶어도 죄 때문에 근본적으로 행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선포한다.
마르틴 루터(1483~1546)
원래 동지적 관계였던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를 놓고 논쟁하고 결별했다. 인문주의사와 종교개혁자 간의 완전한 결별이었다. 마치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서로 논쟁하듯이 이 현상은 시대마다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중세 카톨릭의 특징 중 하나가 여러 가지 성례전을 규정하고 준수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례 제도란 형식과 또 선행을 쌓는 일 등을 통해서 구원에 점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고, 교회와 사제의 중재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서방 카톨릭 전통은 제도 교회와 사제, 성례에 인간이 철저하게 예속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펠라기우스가 카톨릭 위계 질서 속에 제도화된 교회를 강력하게 비판하고,모든 개별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강조한 점은 중세 말 유럽 교회의 사제 중심주의의 폐해를 고스란히 겪고 있는 오늘의 한국 교회 공동체에 돌아볼 지점을 고민하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사상을 통합하여 서구 사상의 근간을 놓았지만, 교조적인 관점에서 교회를 방어하고 전적인 타락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극도로 부정적인 인간관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그늘이다.
4. 아우구스티누스와 역사의식
410년에 로마가 고트족, 즉 바바리안들에게 약탈을 당하면서 서유럽과 소아시아의 기독교 세계가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진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로마가 허망하게 이교도들에게 짓밟힐 수 있는가? 라는 실존적인 질문이 던져졌다.
서고트족의 이동경로
413년에 있었던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의 약탈 사건의 충격은 매우 컸다. 서로마가 멸망한 것은 476년이지만 이때 이미 사망선고가 내려진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을 이 땅에 신국을 건설하는 주체로 생각했다. 기독교회를 이교도로부터 구원할 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국의 파국 앞에 로마의 지식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신들을 버린 결과 신들의 복수가 시작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신의 약속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로마가 파괴되고 멸망한 것은 현실적인 문제이면서 엄청난 재앙이었다. 당대 로마인들은 그 불행의 원인을 기독교에 돌렸다. 그 재앙의 원인을 가차없이 혹독하고 신랄하게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고, 신을 모독하는 상황이 아우구스티누스 당시 기독교가 처해 있던 상황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을 413년부터 13년간 저술하였다. 로마가 멸망한 것이 단순히 제국 하나가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위정자인 기독교 황제들이 잘못했기 때문이든, 신학자들이 무능한 황제를 잘못 세우고 조언했기 때문이든, 그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 사상적. 물적 토대화 가치의 붕괴에 대해서 해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의도가 <신국론>의 사회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의 논의를 끌어 가는 핵심은 사랑이었다. 진정한 본향으로서의 신의 나라, 그리고 신의 나라의 그림자로서의 지상의 왕국을 이끌어 가는 기본 원리는 바로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이 작용할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현현으로 위대하게 보이더라도 지상의 도성일 뿐이고, 반대로 사람들이 이타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어디든 하나님의 도시, 천상의 도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자체의 모순으로 로마가 멸망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된 행동으로 지상의 도시가 죄악으로 물들어 도덕적으로 병들고 타락해서 신의 버림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로마를 위해서 기도하고 로마인들이 부도덕성과 자기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존의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관인 순환론적 역사관(헬레니즘 역사관)에서 새로운 관점인 직선론적 역사관으로 보았다. 이는 히브라이즘 역사관으로 고대 히브리인들은 역사를 순환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창조로부터 완성으로 진행해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당시 그리스나 로마 사람들은 계절이 반복해서 순환하는 것처럼, 역사는 어떤 특정한 주기가 반복되며 순화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히브리인들은 역사는 신의 뜻, 의지의 구현이지 단순히 계절의 순환과 같은 반복되는 자연의 과정이 아니라고 보았다.
역사를 이해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본적인 관점은 역사를 움직이는 동인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신은 세속 역사 안에서 신의 뜻을 개입시키고 그 섭리 가 이땅에 구현되도록 움직이고 있다고 보았다. 로마가 멸망하고 이민족이 들어오는 것도 결국은 신의 섭리의 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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