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림질의 온기, 그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의 온도
아마 그 옛날에도 구겨진 옷을 입는 것을 거부했던 것 같다. 그 시절에도 화장품이 있었고 여인네들의 얼굴을 희게 한다는 온갖 약초들을 구해 사용한 것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주름은 모든 여자들이 거부하는 세월의 흔적이다.
나는 어머니가 빨래를 밟는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 바쁜 와중에도 작은 틈을 내 빨래를 밟노라면 어느새 주름이 확 펴진 꼬들꼬들한 이불이나 옷으로 재탄생했다. 빨래의 주름을 어머니의 무게가 평평하게 만든 것이다. 그 무게는 바로 어머니의 삶의 무게이면서 눈물과 인내의 무게였을 것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다림질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억장 무너지는 삶의 무게가 바로 다림질의 그 기술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견딤’
주름을 편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말은 아름다우면서 긍정적인 상징성을 담고 있다. 여인네들은 옷의 주름을 펼 때 얼굴의 주름도 펴질 것 같았을 테고, 그러다 마음의 주름마저 활짝 펴지는 순간 여인네들은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동그란 달 같은 다리미에 숯불을 담아 다림질을 했다. 두 사람이 빨래의 양쪽 끝을 잡고 한 사람이 운전을 하듯 다림질 하는 것을 보면 화합의 미학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여인네들이 마주 잡고 이리 틀고 저리 틀면서 다리미 운전을 할 때면 구석구석 주름이 펴지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곤 했다. 영롱한 땀방울은 아름다웠다.
어머니도 그렇게 다림질을 했다. 잡아 주는 사람에게도 요령은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누가 잡아도 당골로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어이구 머리는 어디 가고 몸만 앉았냐?”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잡아주는 사람의 요령이 통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당겨!”, “이쪽!”, “저쪽!” 하시며 다리미 운전의 구령을 외치곤 했다. 어머니는 빨래를 잡아주는 그 작은 일에도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수천수만 번 하셨다. 학교 문 앞도 안 가신 어머니의 그런 지혜를 보면 반드시 학교교육이 인간을 숙성시키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의 다림질에서 가장 놀란 건 동그란 달 같은 다리미에 환한 불꽃을 피우는 숯불을 때로는 손으로 이리저리 만진다는 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제 막 불이 피어오르는 숯의 불붙지 않은 부분을 만지셨을 터인데, 그때는 어머니가 불도 척척 만지시는,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보였다. 불을 척척 만지는 그 삶의 경험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어머니 시대의 여성들이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인고의 굳은살이었을 것이다.
내 어머니도 특히 그랬다. 층층시하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겉돌았고,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없었다. 어머니는 24시간 일에 파묻혀 손에 눈에 마음에 굳은살이 박혀 뭘 봐도 뭘 만나도 뭘 집어도 그 상처의 아픔은 무감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비극’이라고 부르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가족주의의 바닥을 깔고 가족주의의 기둥을 세우고 가족주의의 지붕을 이룬 우리 어머니들의 사랑이라고 말하려 한다. 그 시절 어머니들은 어떤 고난이 와도 그것은 이겨내야 한다고,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족이 살아있는 한 극복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림질은 그런 가족주의 사랑에서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 가족주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서 다림질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옷의 주름을 펴고, 옷의 누기(漏氣)를 마르게 하고, 이를 통해 가족의 몸이 마르고 펴지고, 그들의 기분을 펴고 마르게 하는 일. 그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 그 자체일 것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에는 ‘견딤’이라는 어머니의 광활한 사랑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어젯밤 조금 속 터지는 일이 있다고 해도, 어젯밤 조금 서로 상처를 주었다고 해도, 어젯밤 조금 싸움질을 했다고 해도 아침에 가족의 옷을 다림질해 따뜻한 온기의 옷을 입힐 때 그 온기는 다리미의 온도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다림질을 한 여성의 남편·아들·딸에 대한 사랑의 온도일 것이 분명하다.
다림질을 단순히 주름을 펴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들은 펴고 터진 곳을 꿰매고, 펴서 얼룩을 지우고, 다시 펴서 죽죽 늘어뜨리면서 집안일에서 쌓인 감정을 다스린다. 그것은 삶의 훈장이다. 이런 훈장을 매일 달다 보면 불을 손으로 척척 잡을 수 있는 기술이 생기는 것이다.
시인 등단
대학 4학년은 모든 것이 불안하고 허탈하고 아득했다. 아니 암담하고 참담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그 아름답고 우아한 한옥이 남에게 넘어갔다는 통보를 받았다. 며칠이나 몸살을 앓았다. 나의 집, 아니 어머니의 집은 어쩌나. 그 풍성하고 향기 짙은 정원은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가장 두려운 것은 어머니였다. 사랑도 꿈도 야망도 모조리 실패한 어머니에게 닥친 극심한 불행의 안타까움을 어쩌나. 그리고 출렁이는 시인의 감성을 억누른 채 생활과 밀착하고 이탈도 하면서 한 남성으로서 꿈과 야망을 이루기도 했던 아버지는 어쩌나. 아버지의 추락도 염려가 되어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어머니는 앓아누우셨고, 아버지는 입을 닫았다고 전해 들었다. 기둥에 기대면 기둥이 사라질 것처럼 나는 넘어졌고, 비틀거렸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불운 속에서 가느다란 빛이 존재하는 법이다. 아무도 모르게 다섯 편의 시를 보낸 〈여상(女象)〉에서 당선 소식이 날아왔다. 전봉건 선생님이 주간을 맡으셨던 〈여상〉은 종합문예지였고, 당선은 등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복잡하고 불행한 생각 속에서도 야무지게 두 손을 쥐었다. 1964년 5월 나는 ‘환상의 방’으로 ‘여상 신인 문학상’을 수상해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고 이것 하나뿐
환상의 바다를
내 마음에 부르면
환상으로 짜여진 벽이며 창은
매혹으로 이끄는
그윽한 수궁
당신을 심은 화분에
온기 다스리는
상냥한 미소와 간절한 노래가
훗날에
훗날에 날 찾으시리라 믿는
내 마음은
기쁨의 숲으로 자라네
커텐을 내리우고
환상의 바다를 건너
해변가 모래알
그 소곤대며 귀기울여
아
음악속에 풀려나듯
이렇듯 충만한 황홀
그 뒤에 어리는
하얀 수증기 같은 외로움
번져오는 공허를
불사르며
나는 잠 못 이루는 먼 항해를 한다.
나는 혼란 속에서도 내적 힘을 키우며 미래를 바라보고자 했다.
“내 목숨을 바치더라도 니 졸업을 시킬기다.”
나 자신에 대한 희망에 집중했기 때문일까? 그때는 어머니의 집중이 두렵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험하고 위험한 독려에 나는 힘을 얻었고, 딸이 시인이 되었다는 말에 어머니도 조금은 힘을 얻었을지 모른다. 가난해졌다는 것이 별로 실감나지 않았다. 다만 가난이 아직 내 일상 속으로 파고들지는 않았지만, 큰일이 일어날 것 같고 급류가 몰려올 것 같은 막중한 위기감은 있었다. 그러나 ‘상처에 물을 주고 기르다 보면 상처의 꽃이 우리를 치유할 것’이라는 말을 그때도 믿었던 것 같다.
‘그래, 뭔지 모르지만 이겨내자. 자기비하는 악마의 운동장이다. 된다, 된다, 그렇게 생각하자.’ 장애물과 싸울 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깔깔거리는 일에도 빠지지 않았고, 큰 변화를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시인이 된 것에 어머니보다 더 반가워 한 사람은 김남조 선생님이었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인’이 되었어도 그렇게 아침이 왔고, 저녁이 왔다.
재클린과 오드리 헵번
대학시절, 친구들끼리 별명을 지어 주는 게 유행이었다. 당시 별명은 자신감을 뺏는 게 아니라 살짝 유머를 곁들여 신분 상승을 시켜주는 것이 친구들끼리의 별명 존중이며, 예의였다.
친구들이 내게 지어 준 별명은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이었다. 그 시절 케네디 대통령은 세계적으로 인기스타였고, 따라서 재클린도 인기 스타였다. 친구들은 나를 ‘숙명 재클린’이라고 불러 주었다.
나는 별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세계적 인기스타가 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미인이었고,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별명을 즐기고 멋을 내고 재클린 사진을 들고 그녀와 같은 헤어스타일을 내 스타일로 정하곤 했다. ‘그럴듯하군.’ 나는 의기양양했다. 그러다가 나는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나는 오드리 헵번에게 꽂혔다. 더 이상 재클린이 되고 싶지 않았다. 헵번처럼 산뜻한 싱그럽고 귀엽고 아름다운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 헵번이 되자. 헵번이 되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자. 그러면 남자들은 모두 내 앞에서 무릎을 꿇겠지.’ 신나는 일이다. 나는 그때부터 친구들에게 헵번으로 별명을 바꾸어 달라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친구들은 결코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실제와 거리가 너무 크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김밥이나 순대나 아이스케끼를 사주기도 하고, 당시로는 엄청나게 고가인 자장면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내게 얻어먹을 건 다 얻어먹고도 별명을 바꾸어 주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났고 우울했고 친구들에게 불만도 쌓였다. ‘그럴 거면 얻어먹지나 말아야지.’ 나는 토라져 있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고 10월이었다. 햇살 투명한 어느 날, 교정의 큰 느티나무 아래에서 별명 대장이 나를 불렀다. 별명식을 거행하겠다는 것이다.
“아, 헵번으로 해 주는 거야?”
나는 세상을 얻은 듯 황홀했다. ‘이제야말로 헵번이 되는구나.’ 나는 헵번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옷을 입고 그 자리로 갔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니, 내가 나를 바라보기에 헵번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누가 봐도 헵번이야.’ 하면서 나는 거들먹거리며 느티나무 아래로 갔다.
나무들이 겨우 붉은 물을 약간 머금은 10월이었다. 내 안에는 갖가지 눈물과 절망이 있었지만, 나는 시인이므로 이런 고비·고개·언덕·태산을 넘어갈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친구 다섯 명이 서 있었다. 나는 이미 헵번이 다 된 기분으로 걸음걸이도 우아하게 친구들 앞으로 다가갔다. 별명대장이 말했다.
“오늘 달자 별명식을 거행한다. ‘숙명 재클린’도 과분한듯한데 달자가 헵번이 되고 싶어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가 있지만, 달자에게 얻어먹은 게 너무 많아 오늘 조금은 섭섭한 별명을 달자에게 준다.”
그리고 별명대장은 종이 한 장을 활짝 펴면서 말했다.
“이것이 달자 새 별명이다.”
종이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오드리 될뻔’
나는 찡그렸고 아이들은 박장대소를 했다. 그렇게 내 새로운 별명식은 막을 내렸지만 ‘될뻔’보다는 ‘재클린’이 좋을 것도 같아 별명에 대한 나의 갈등은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우리가 졸업을 한 1965년 그 시절에는 취직이 하늘의 별따기였다. 될뻔하다가 안되고, 될뻔하다고 안되기를 반복했다. 취직을 하고 돈을 벌고 그래야 좋은 시인도 될 것 같았다. 너무 구지레한 삶은 싫었기에 나는 적어도 내 자존심을 지키는 생활을 하고 싶었다.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을 지키는 삶. 나는 별명대장에게 너희들이 별명을 이렇게 지어놔서 내 취직이 될뻔하다가 안된다고 떼를 썼는데, 별명대장은 “다, 니 팔자.”라고 했다.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인물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말하고, 연기하고, 쓰고 그리고 자지러지게 열정적인 영혼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남들의 시선을 받아 박수를 받는 그런 무대의 주인공이 나는 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 무대를 좋아했을까? 그래 팔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물릴 정도로 비극적인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고, 내 삶의 모든 일상도 생각해 보면 연극이요 영화였던 것 같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별명처럼 되지도, 안되지도 않는 게 인생이지만 결국 마음이란 그렇게 닮고 싶은 인물을 향해 가는 것이다. 젊은 날의 그런 추억은 지금도 활짝 웃으며 아침을 맞게 한다. 대학시절은 싱그럽고 건강했다. 내 친구 별명대장은 지금 캐나다에 산다. 결혼 후 30년이 지난 후 내 얼굴이 난 신문을 본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이미 할머니가 되어 있던 어느 날이었다.
“야! 너 이제 헵번으로 해줄게.”
글 신달자
첫댓글
덕분에,
요즘에 와서, 책을 잘 읽지 않는 저에게
긴 글을 인내성 있게 끝까지 보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달자님의 글 한 줄 한 줄에
그 시대적 어머니 상,
여학생 시절의 펼쳐진 꿈을
흐릿한 기억으로 변해가는 지금을 떨쳐 버리고
그 때를 기억하는 힘을 주는지
신달자님의 자서전 같은 글에 공감 백배 입니다.
'다림질' 이란 단어로 어머니의 속내를 재조명하고
'별명' 이란 단어로 신달자님의 소시적 꿈을 얘기하네요.
'오드리 될뻔' 이라고 지어 준 친구들의 게그가
많은 추억을 남깁니다.
매회마다 댓글 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저도 요즘 돈 되지 않는 일에 바빠서 그렇습니다.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