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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주석의 분단 극복노력 - 중국공산화 막을 수 있었다.
- 결국 자유민주주의와 개밥민주주의로 갈라지고 한쪽은 인간의 본성인 자유의지로 사는 세상이 되었지만, 한쪽은 동물농장처럼 백성들이 먹고사는 식량을 배급제로 평등하다는 구실 아래 수 백만이 굶주려 죽는 세상이 되어 쇳덩어리 앞에 땅을 치고 울어야 배급량이 달라지는 세상이 되었다. 김구주석의 분단극복 노력이 성공했으면 중국공산화는 저지되어 중국인의 삶의 질은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
1. 북한의 인민공화국 창건과정
북한은 1948년9월9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과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일(8월15일)보다 날짜가 늦는 것에 대하여 분단책임을 무턱대고 남쪽책임이라는 소리하는 사람은 100% 종북자들이다. 80년대 운동권 주장에 대하여 북한전문가의 집에서 그 과정을 직접 들은 바가 있다.
1945년8월24일 평양에 사령부를 설치한 소련군은 이 날을 기념하고자
1948년8월24일『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라는 단일후보 지지투표를 실시하고 8월25일 당선자 발표를 했다. 민족운동단체에서 주관하는 세미나 유인물에 인쇄된 어느 지방대학교수가 북한정권성립은 99% 참가해서 98% 찬성하여 성립한 정권이라는 주장을 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는데 더욱 가관인 것은 대한민국 최초 자유선거인 5.10총선의 투표율이 50%대인 것은 미군정에서 선거방해를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그런 자들은 아예 북쪽에 가서 살아야 한다.
1945년9월9일 소련군 88정찰(偵察)여단 소속 진지청(金日成의 중국어 발음, 소련군 군적 기록에 있는 이름)대위가 소련 점령군 정찰대(偵察隊)의 일원으로 북한에 진입한 날을 기념시키기 위해 1948년9월9일을 기해 인민공화국 창건을 선포시켰다.
평양주둔 소련군 경무사령부의 까삐땅(大尉, 대위) 진지청(金日成)을 마요르(少佐, 소령급)로 특진과 동시에 예편시키고 김일성(金日成)이라는 이름으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상으로 취임시켰다. 그리고 정통성을 확보시키기 위해『조선민족해방투쟁사』를 저술토록 하였다.
1947년 초 소련 당국은 장차 수립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기와 국장(國章) 도안(圖案)을 만들 때 진지청(金日成,김일성)이 소련 주도 코민테른 제7차대회(1935년7월25일~8월21일, 모스크바) 결정 반(反)파쇼투쟁 지령에 따라 1937년6월4일 밤 조선의 갑산 보천보를 습격한 공로와 당시 지휘자로 알려진 김일성(金一星, 별하나)이라는 이름을 기념하고 조선혁명의 밝아오는 새벽을 상징해 국기 도안에『새벽 하늘 푸른빛 바탕』과『별 하나』를 그려 넣게 했다. 조선혁명은 아직 혁명의 태양 스탈린 대원수가 떠 있는 소련처럼 밝은 세상은 아니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1935 August 20 The Seventh World Congres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Comintern) calls for a popular front to combat Fascism and support the struggles and wars of national liberation around the world.
7th World Congress --- Moscow --- July 25 - August 21, 1935.
《 갑산 보천보 기습작전 명령은 1937년3월29일~31일 사이에 중국공산당 滿洲省委(만주성위) 서기인 웨이정민(魏拯民, 위증민)이 소집하고 사회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1937년도 상반기 사업회의에서 웨이정민이 하달했다. 》
회의를 소집하고 사회한 웨이정민은 1935년8월20일 코민테른 제7차대회(1935년7월25일~8월21일, 모스크바)에서 내놓은 반(反)팟쇼〈파시스트 이탤리, 나치스 독일, 덴노오(天皇, 천황)주의 일본〉투쟁행동 결정에 근거해서 중국공산당 군대인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작전계획을 결정 하달했다.
혁명전투조직인 공산당의 민주집중 제(制) 회의에서는 상의하달(上意下達)에 대한 복명(復命)복창(復唱)과 명령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질문과 답변만 있을 뿐 하의상달(下意上達)은 용납되지 않는다.
작전계획의 결정과 하달과정에 김일성의 '주체적 노선'이 제기될 여지는 전무하였다.
기본 방침으로 혁명 활동범위 확장투쟁의 일환으로 국경개념을 무시하고 일본군 지배지역 전체 즉 두만강 압록강 이남(以南) 조선총독부 관할 영역까지 월경(越境)진공 작전을 전개하며
코민테른결정 수행 1 단계 작전으로 제6司長(사장, 중대장 격) 金一星(김일성)에게 조선 함경남도 갑산군 혜산진 보천보를 기습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1945년8월24일 소련군은 함흥을 거쳐 평양 문수리 비행장을 점령하고 사령부를 설치한 다음 당의 지령에 따라 1945년9월14일 점령행정을 위한 조선인 정부수립계획을 모스크바로 보고하고 1945년9월 19일 로마넹꼬 소장의 경무(警務)사령부(속칭 정치사령부)는 소련 군정의 얼굴마담 감들을 소집해 심사했다.
소련출신들은 외관이나 능력 면에서 뒤떨어져 있었다. 제반 능력 면에서는 최용건이 가장 뛰어났으나 목소리가 쉬어있어서 대중연설에 부적합했다. 허우대가 크고 멀끔하며 쇼맨쉽이 있는 등 외관이 가장 뛰어난데다 소련군 88정찰여단에서 정치보위부에 충성하던 진지청(金日成의 중국어 발음, 소련군 군적 기록에 있는 이름)대위가 선정됐다.
다음날인 1945년9월20일 모스크바로부터 제1극동군사령관 바실레프스키(Alexandr M. Vasilevsky)에게 내린『민주정부』를 수립하라는 전문이 평양의 소련군사령부에 도착했다.
소련에서『민주』라는 용어는『공산주의』와 동의어(뜻이 같은 낱말)이다. 언어는 혁명의 무기라는 레닌의 교시에 따라『공산주의』개념을『민주』라는 용어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민주정부』를 수립하라는 전문에 따라 공산주의 정권수립을 향해 돌진하여 만들어낸 것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다.
소련은 자국의 국제법적 성격을 초기에는『창설적국가설』로 설명했다. 전제군주제 제정러시아의 영토 위에 착취체제와 무관한 새로운 국가를 창건했다고 주장하다가 제정 러시아가 타국과 맺은 이권들을 슬그머니 챙기면서『승계 적 국가 설』로 선회했다.
북한에서 저술된 조선민족해방투쟁사는 조선 왕조의 영토 위에서 조선민족이 수립한 국가라면서『승계 적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99절(구구절, 9월9일)을 인민공화국『창건』기념일로 경축하는 등 북한 주장의 전체적인 맥락은『창설적국가설』에 치중하고 있다.
북한측 논리 중『창설적국가설』로서 주목할 점은 일본 침략자가 1932년에 건국한 괴뢰 만주제국(滿洲帝國)과 동격인 괴뢰국가가 남조선에 건국됐다. 성스러운 이 땅에서 괴뢰국가라는 오물을 청소하기 위해 조선인민들이 일어나 남조선에 괴뢰국가 건국 3주 후 북쪽에 인민공화국을『창건』했다는 창설적국가설 주장을 폈던 일도 있었다는 점이다.
1948년8월15일 남조선에서 건국된 대한민국이라는 것은 민족의 영구분단을 획책하는『이승만 역도』와 미군정에 의해 건국된 괴뢰국가라는 주장을 폈던 일이 있다.
2. 대한민국의 건국기념일
1948년8월15일이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아니라 정부수립일이라고 하면 남한이 괴뢰국가라는 논리가 성립될 수 없다.
1948년8월15일을 1919년4월11일 수립된 국민국가 대한민국의 신정부 수립 일이라고 하면 미군정에 의해 수립된 괴뢰국가라고 비방할 논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북한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자 1919년4월11일 건국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否定(부정)했다.
남한에서도 1919년4월11일 대한민국 건국 사실을 부정하는 북한 주장에 적극 동조 고무 찬양하거나 동조결과를 나타내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특히 조선총독부 경찰이나 일본군 헌병 등으로 부역했던 자들이나 1945년9월부터의 미군정 하에서 남로당 등 좌파와 싸운 세력들은 자신들의 공로로 이승만 대통령을 추대하여 1948년8월15일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또 제헌의회 의원들도 자신들의 공로가 단지 정부수립 공로로 되기보다는 건국공로자로 대우 받기를 바랄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된 창설적 국가이면 건국 이전의 대한제국 때의 영토를 승계 했다고 주장하기 어렵다. 헌법 제3조 영토조항도 흔들릴 수 있다. 간도 땅도 대한민국과는 무관하게 될 수도 있다. 1948년8월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1919년4월11일 수립된 대한민국을 이어받은 실체적 동일성과 계속성이 있는 승계적 국가이면 1919년 당시 대한민국의 모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1945년8월15일은 소련군과 북한에게는 해방《공산화를 위한 점령(占領)》기념일, 연합국에게는 일본의 항복 선언일, 일본 제국주의 주도세력에게는 종전(終戰, 전쟁종료)기념일, 동아시아 주민들에게는 일제(日帝,일본제국주의) 패퇴(敗退)기념일이다.
1948년8월15일은 한국인들에게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일 이다. 북한에서는 남조선 주둔 미군정이 괴뢰국가를『건국한 날』이라고도 한다. 한국 내 일부 인사들도『건국일』주장이 있다.
1919년4월11일 건국된 대한민국은 1910년8월29일 대한제국의 황제가 일본에게 탈취 당한 주권을 국민들이 되찾는 피탈(被奪)국권 탈환투쟁을 거쳐 국가주권을 국민들의 수중에 장악하고 수립된 국민국가이다. 대한제국을 이어받은 실체적 동일성과 계속성이 있는 승계국가로서 조선왕조의 모든 권리를 이어받아 보유한다.
1948년7월17일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고 있다.
현행 헌법 전문의 명문규정에 의하건대 대한민국의 건국기념일은 1919년4월11일이다. 1919년4월10일 각 도 대표로 선출된 인원 29명이 구성한 임시의정원에서 임시헌장을 채택하고 관제는 민주공화제로 하며 국호는 대한제국 대신 대한민국으로 하기로 하여 4월11일 대한민국 건국의식(儀式)을 거행했다. 초대 국무령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의 요구로 국무령을 대통령으로 개칭해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이 됐다. 이승만 박사는 1948년에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전제군주의 주권이 국민 수중으로 넘어온 경과를 살펴본다.
1898년3월10일(음력) 독립협회(1896년~1898년) 주도로 한성(漢城) 종로거리에서 1만여 명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는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1907년4월20일경 漢城(한성) 남대문 안의 尙洞監理敎會(상동감리교회)교인을 주축으로 결성된 신민회(新民會)는 은연(隱然) 중 미국식 정치제도(공화제)를 염두에 둔 사람들의 비밀결사였다. 황제국가인 대한제국에서 용납될 수 없는 미국식 정치제도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이라는 공화제를 희구하는 비밀결사였으나 들어내 놓고 공화제를 표방한 일은 없다.
1905년4월5일 미국 리버사이드에서 새롭게 태어나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던 공립협회(共立協會)는 동족상애(同族相愛) 뿐 아니라 위기에 처한 고국을 일신해서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을 추진키로 했다. 구국운동의 통일적인 연합기관을 국내에 설치하고자 안창호․이강․임준기․신달윤․박영순․이재순 등이 1907년1월 초순 미국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를 발기하고 안창호는 인천을 거쳐 2월20일 한성(서울)에 도착해 국민국가 건설을 위한 첫 도정(道程)에 발을 내디뎠다. 안창호 선생은 1907년1월20일 미국 샌프런시스코에서 귀국 길에 올라 S.S. 도릭(Doric)호 편으로 2월7일 일본 요꼬하마(橫濱)에 기착했고, 2월20일 한성(서울)에 도착하기 전 10일정도 요꼬하마와 도오쿄오(東京)에 머물면서 재일 유학생 사이에 인맥을 구축했었다. 그 때 일본에 와 있던 유길준과 박영호 등 개혁세력지도자들과도 만났다.
공립협회는 이어 만주 및 러시아령 연해주지역을 활동의 거점으로 만들기 위해 제1차 원동위원으로 김성무를 파견하였다. 제2차 원동위원 이강(李剛)은 1908년3월 이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공립협회의 시베리아지부 회원인 안중근은 1909년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일본 추밀원의장 이도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를 사살 처단하는 의거를 행하였다. 공립협회의 지부는 만주 시베리아 뿐 아니라 멕시코지부 쿠바지부도 구성됐었다.
新民というのは新心を抱く者であり、新心とはキリスト敎精神であります
1910년8월29일 대한제국의 주권인 황제의 권력이 일본에 탈취된 후 신민회원 등은 황제가 뺏긴 주권을 국민들이 탈환하려는 피탈(被奪)국권 탈환투쟁을 전개했다. 그 밖의 수많은 정치활동을 거쳐 1919년2월1일《음력 정월 초하루》(토요일) 만주 지린셩(吉林省,길림성)에서 김교헌(金敎獻,가나다 순 첫 번째 이름) 등 39 인 명의로 『大韓獨立宣言書(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大韓民主(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했다.
건국기원4252년(1919년)2월1일은 음력으로《기미(己未)년 정월 초하루(1월1일), 병인(丙寅)월 갑신(甲申)일》이지만 선포를 위한 준비가 무오년(1918년)에 진행됐음으로 무오(戊午)독립선언(獨立宣言)이라고 불린다. 《1919년1월31일은 무오(戊午) 12월30일 을축(乙丑)월 계미(癸未)일 이다》
1919년2월8일(음력 1월8일 병인(丙寅)월 신묘(辛卯)일》(토요일) 오전 10시 일본 도오쿄(東京,동경) YMCA 회관에서 조선청년 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청년독립단 11인 명의로
<2․8『獨立宣言(독립선언)』성명서>가 발표됐다. 1919년3월1일(음력 1월29일 병인(丙寅)월 임자(壬子)일》(토요일) 오후 2시 京城(경성) 종로의 泰和館(태화관)에서 33인 명의(名義)(29인 참석)의 『宣言書(선언서)』발표와 함께 전국적인 독립투쟁이 폭발했다.
1919년4월11일 건국된 대한민국은 1910년8월29일 일본에 강탈된 대한제국의 국권을 국민들이 되찾아 세운 나라이다.
3.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외교와 카이로 선언
2차 대전 후 Korea 의 독립은 미․소 양국 군에 의해 공짜로 선물된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전개한 被奪(피탈)국권탈환투쟁의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다.
1943년11월 하순 카이로 회담에서 열강의 한국 국제 공동 신탁통치 합의 기도가 사전 봉쇄되고 도리어 카이로선언에 한국 독립이 보장된 것은 백범과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이 쟁취한 대성과였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
1943년11월 카이로선언에서 영국 미국 중화민국은 2차대전 종전 후 여러 식민지 중 유일하게『Korea의 독립』을 약속했다. 이것은 열강회의에서 식민지의 독립이 승인된 유일한 사례로, ... 한시준,「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독립운동사사전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
1943년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영국은 인도 등 여러 식민지의 독립운동 격화를 우려했고 미국은 필리핀의 독립운동을 우려해 영․미 양국은 전후 식민지 독립에 강한 부정적 입장을 취했으나 중화민국 장가이셱(蔣介石,장개석) 총통에 설득돼『적당한 절차(IN DUE COURSE)를 거쳐 한국이 자유롭게 되는 것을 결의한다』라는 선언을 최종 확정했다. 蔣介石(장개석) 출생․성장 지에서 부르는 발음은 Chang Kai Shek 이다. 중국의 5대 어계(語系)중 남방계 발음 대신 북방계 발음으로『장제스』는 아니라고 한다. 장가이셱 총통이 끈질기게 노력한 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절한 요청과 임시정부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 면이 컸었다.
장가이셱 총통은『고려 청년 윤봉길은 중국군 30만 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고 격찬했다. 장가이셱은 훙커우 공원 의거 이전에는 한국 독립운동에 호의가 없었으나 훙커우 의거 후에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와는 달리 이승만과 미국 내 한국독립운동세력의 독립요구는 미국의 국익을 움직일 힘이 없었다. 이승만의 줄기찬 독립청원외교는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미국 내 한국독립운동세력의 독립요구는 미국 정부에 의해 묵살 됐었다.
4. 연합국은 Korea의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국은 1937년7월7일 일본이 支那事変(지나사변,日支事変,일지사변)이라는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수도인 난낑(南京,남경)에서 30만 명을 학살한데 이어 전면전을 확대해 옴으로 방어전쟁을 했고 (南京 : 현지음은 난낑, 북방음은 난징)
영국은 1941년12월8일 일본이 선전포고를 하고 식민지인 말레이와 싱가폴 그리고 비르마(Birma, 버마, 미얀마) 점령에 이어 인도까지 점령하려 함에 방어와 반격전을 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은 1941년12월8일 태평양에 있는 진주만 군항을 비롯해 필리핀 등 태평양 일대의 미국 식민지 등이 공격받자 방어와 반격에 나섰고
소련은 미국의 권유로 대일 참전해 이득을 챙기려고 1945년8월9일 참전했을 뿐이다.
1943년11월22일부터 미국․영국․중화민국 수뇌가 카이로에 모여 2차 대전 종료후의 전리품 나누기 회의를 개최했다. 이보다 앞서 1943년7월26일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김구 주석, 조소앙 외무부장, 김규식 부주석,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 김원봉 군무부장 등 요인과 통역으로 안춘생 등 6인이 중화민국 국민당의 총재(總裁)를 겸하고 있는 장가이셱(蔣介石,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總統)을 찾아뵙고 연합국 수뇌회담에서 종전 후 한국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고 국제 공동관리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중국 측의 지지와 지원을 요청했다.
[총재접견한국영수회담기요(總裁接見韓國領袖會談紀要)라는 중화민국 정부자료에 대해서는 동아일보 2007.06.09 03:02 입력,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의 글을 참조]
카이로 회담에서 영국의 처칠 수상은 Korea 독립 제안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영국과 미국은 1900년대 초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倂呑)을 부추기거나 조력하던 당시 Korea는 미국․영국에 적대적인 편 예컨대 러시아에 병합될 위험이 있는 자립능력 없는 민족, 무능한 민족이라는 의식을 1943년11월말의 카이로회담 때에도 적나라하게 표출하던 나라들이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패전국 식민지인 Korea가 독립하면 승전국의 식민지인 인도의 독립운동이 격화될 것을 염려하는 것 같았다. 미국도 필리핀의 독립운동을 우려하고 있었다.
처칠이 Korea는 야만민족이라는 주장에 대해 장가이셱은 ① 그 많은 식민지 중에서 Korea는 1919년 3․1 투쟁으로 전 민족이 항일투쟁에 참여한 유일한 민족이다. 또 Korea는 자치능력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② 독립운동 과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장기간 국정운영을 하고 있으며 연합국과 함께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고 있다. ③ 또, 연합국이 지상에서 일본군 대장을 죽인 나라는 없다. 지상에서 일본군 대장을 죽인 유일한 전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윤봉길의 戰功(전공)뿐이다. 한국 광복군은 버마(Birma)전선에서 영국군과 함께 싸우고 중국 내에서는 일본군과 싸우는 점을 깊이 새기고 Korea 를 독립시키자고 반론했다.
장가이셱 총통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를 개별적으로 만나 한국을 독립시키자고 설득했다. 루즈벨트는 영국을 설득하려면 독립 시기를 좀 늦추어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키자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1943년11월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영국 및 중국이 합의한 적절한 절차(in due course)를 거쳐 한국이 자유롭게 되는 것을 결의한다」로 최종 확정됐다.
이 적당한 절차를 위해 미국은 1945년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안을 제의하게 된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동아일보 2007.08.29 참고했음]
[0001]강대국 분단논의 현장(광복 50/다시 여는 반세기:7)
한국일보 19950811 07면(해설)
◎겉으론 독립 실제론 분할 거론/카이로․얄타․포츠담서 한반도 앞날 좌우들은 잇따라 회담을 갖고 전후처리문제를 논의했다.43년 11월 카이로회담,45년 2월 얄타회담,그리고 7월의 포츠담 회담 등은 겉으로는 한반도 독립을 논의하는 자리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한반도 분할공작의 현장이었다.
▷카이로회담◁
이런 가운데 43년 11월 22일부터 윈스턴 처칠 영 총리,프랭클린 루스벨트 미대통령, 장제스(장개석) 중 총통 등 연합국 수뇌들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가졌다. 23일 하오 8시 루스벨트는 자신의 숙소에서 장총통과 만찬회동을 갖고 『한국 등 식민지 장래문제에 대해 미 중 간 합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이에 대해 장 총통은 한국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배석했던 홉킨스 미대통령 특별보좌관은 카이로선언문 초안에 「일본에 의한 한국민에의 반역적인 노예화를 우리는 유념하고 있고, 일본몰락 후 가장 빠른 순간에 그 나라(한국)가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가 될 것임을 결의한다」는 문안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회담이 진행되면서 한국의 즉각 독립결의가 완화되는 쪽으로 초안이 수정됐다. 수정안의 문안은 「가장 빠른 순간에(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대신 「알맞은 순간에(AT THE PROPER MOMENT)」으로 후퇴했다.이에 따라 27일 발표된 카이로선언문의 한국독립 관계 문안은 「연합국 3대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를 유념해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한국이 자유롭게 되는 것을 결의한다」로 최종 확정됐다.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연합국 최초의 공약이었던 이 선언문은 일본패전 후 바로 독립될 수 있다고 믿어왔던 한국민들에게는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한국을 상당기간 위임통치 내지 신탁통치 하겠다는 루스벨트의 복안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1943년 12월1일,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수상, 장제스 중국 국민정부 주석의 이름으로 발표된 카이로선언을 계승하고 있다. 즉, 이 선언에서는 "일본은 또한 폭력과 탐욕에 의해 탈취한 모든 지역에서 구축되어야 한다"(Japan will also be expelled from all other territories which she has taken by violence and greed)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얄타회담◁
이 같은 미국의 복안이 표면화한 것은 얄타회담 때다.루스벨트 처칠 스탈린 3거두는 45년 2월 4일 비밀리에 크림반도의 휴양도시 얄타에서 만났다.회담 5일째인 8일 하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한반도 신탁통치 안에 관해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한국 신탁통치는 최소한 20~30년 정도 필요하다.신탁통치는 미국 소련 중국 대표로 구성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이 때까지 한반도문제에 관해 「특별한」 준비를 하지 않고 있던 스탈린은 『한국의 신탁통치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말해 미국의 신탁통치 안에 이견을 나타냈다.
이 같은 입장차이로 얄타회담에서는 한반도 장래문제에 관해 서면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다만 한반도의 신탁통치와 외국군 주둔에 대한 구두양해가 있었던 것만은 확실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얄타회담기간 열린 미 소 군사참모회의에서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지역을 침공하겠다는 군사작전 안을 미국 측이 양해함으로써 한반도 분할이 암시됐다.미국 측의 이 묵시적 동의는 45년 한반도 분할의 효시가 됐다.
▷포츠담회담◁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45년 7월 17일부터 트루먼 처칠 스탈린 등이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은 주로 독일항복에 따른 전후처리와 아시아에서의 대 일본 승전전략을 협의 조정하고,종전에 따른 제반문제를 마무리하는 자리였다.
연합국 3국 수뇌들은 7월 26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본본토를 완전 괴멸시킬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공표 했다.한반도문제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카이로선언을 재확인했을 뿐이다.그러나 미국 측은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공동신탁통치안을 제시했고,별도로 열린 미소 참모총장 회의에서는 소련 측이 대일 전 참전과 관련해 한반도 지상군 침공작전계획도를 미국 측에 넘겨주었다.이 지도에는 북한 전역과 서울에까지 화살표가 그어져 있었다.이에 놀란 미국 측도 한반도에 미군을 진주시키는 작전계획을 서두르게 됐는데 이 것이 38선 획정의 계기가 됐다.<권대익 기자>
오늘날도 개인과 개인간의 협상과 합의는 물론이고, 국가와 국가간의 외교적 협상과 합의도 자신이나 자국의 이익 극대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이치가 아니겠는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무엇인가. 여러 가지 요인이 많지만 능력과 국격, 즉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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