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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스테파노부터 호날두까지, 역사를 쓴 사나이들
축구 역사에서 처음으로 이적이 이루어진 건 1888년 잉글랜드에서 처음으로 프로 리그가 설립된 시기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다만 당시엔 이적이라기보단 리그 개막을 앞두고 팀 등록에 실패한 (속칭 방출된) 선수들이 새로운 팀과 계약을 체결하는 형태였다. 그마저도 원 소속팀의 동의를 구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으로 이적료를 지불하고 이적한 사례는 1893년에 이루어졌다. 그 주인공은 바로 스코틀랜드 출신 공격수 윌리 그로브스로 당시 그는 100 파운드(한화 약 17만원)의 이적료와 함께 웨스트 브롬에서 애스턴 빌라로 팀을 옮겼다.
하지만 1930년까지만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팀간 선수 이적이 발생하는 사례는 드물었다. 이적료 지출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실제 1900/01 시즌부터 1929/30 시즌까지 30년간 전세계 통틀어 전체 이적 횟수 총 45회(연평균 1.5회)에 불과했다. 심지어 1949/50 시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11회의 이적이 발생해 처음으로 두 자릿수의 이적이 이루어졌을 정도였다.
이후 1955년 유러피언 컵(챔피언스 리그 전신)의 출범과 함께 이적시장이 점차적으로 활기를 띄기 시작하면서 1972/73 시즌 들어 처음으로 이적료 총합 100만 유로 돌파(209만 유로) 및 세 자릿수 진입(101명)에 성공했고, 1982/83 시즌 들어 1000만 유로(1306만 유로) 고지를 점령했다.
1992년은 축구 역사에 일대 전기를 마련한 해이다. 1992/93 시즌 들어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는 프리미어 리그를 출범해 본격적인 프로 시대의 서막을 알렸고, 유럽축구연맹(UEFA)도 유러피언 챔피언스 컵을 UEFA 챔피언스 리그로 명칭을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축구는 본격적으로 상업화 및 글로벌화 시대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선수 이적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1992/93 시즌 들어 마침내 이적료 총액 1억 유로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1억 536만 유로).
세계 이적시장에 일대 혁명을 불러온 장-마르크 보스만 ⓒ gettyimages/멀티비츠
하지만 정작 이적 시장의 확장에 있어 기폭제가 된 사건은 따로 있었다. 바로 1995년 12월 15일에 유럽사법재판소에서 재정한 보스만 룰에 기인하고 있다. 1990년까지만 하더라도 선수들은 설령 계약 기간이 종료되더라도 기존 소속 구단의 동의 없이는 이적이 불가했다. 게다가 당시엔 같은 유럽연합(EURO) 가맹국에 속한 선수더라도 외국인 쿼터에 포함되었기에 자국 선수 외의 선수 영입이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이적 시장 환경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것이 바로 보스만 룰이었다.
보스만 룰의 탄생 배경에는 바로 장-마르크 보스만이라는 이름의 벨기에 선수가 있다. 보스만은 1990년 프랑스 리그 USL 뒹케르크로의 이적을 감행했으나 원 소속팀이었던 RFC 리에주의 반대에 부딪쳐 팀을 옮기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더 이상 리에주 1군 선수도 아니었기에 봉급 역시 삭감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그는 룩셈부르크에 위치한 유럽사법재판소에 소송을 냈고, 5년여에 걸친 공방 끝에 1995년 12월, 유럽연합(EURO)에 가입한 가맹국 노동자들에게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로마 조약 39조에 의거해 승소를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유럽사법재판소는 공식적으로 “계약이 끝난 선수는 구단의 동의와 이적료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팀을 옮길 수 있고, 팀 내 외국인 선수의 숫자는 제한될 수 없다”라고 선언하며 보스만 룰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유럽 리그에서 뛰는 축구 선수들은 계약 종료 후 이적료와 상관없이 다른 구단으로 자유롭게 이적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됐고, 소속 구단과의 계약 기간이 6개월 이하로 남을 시 타 구단과 사전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제도도 새로 생겼으며, EURO 가맹국에 속한 팀의 경우 자국 선수와 외국인 선수를 EU와 Non EU로 나누어 분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보스만은 5년간 소송으로 점철된 시기를 보내면서 파산 위기를 맞이했고, 아내와 이혼하는 등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와 함께 보스만 룰의 첫 수혜자는 바로 ‘싸움소’ 에드가 다비즈였다. 당시 아약스 소속이었던 다비즈는 1996년 여름, 보스만 룰에 의거해 이적료 없이 AC 밀란으로 이적했다. 이후 많은 선수들이 보스만 룰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렸다.
보스만 룰의 제정과 함께 유럽 구단들은 계약 만료를 1년 남겨놓은 시점에서 소속 선수와의 재계약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적극적으로 선수 판매에 나서기 시작했다. 또한 EU 가맹국 선수들이 자국 선수로 취급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외국인 선수 영입도 증가 추세를 띠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선수 이적 역시 날이 갈수록 증가 추세를 보였다. 실제 1995/96 시즌, 총 1억 9515만 유로의 이적료가 전세계적으로 발생했으나 1년 뒤인 1996/97 시즌 2배 가까운 이적료 상승(3억 6576만 유로)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새 밀레니엄(2000/01 시즌)에 접어들면서 전세계 이적료 총합은 마침내 10억 유로를 돌파하기에 이르렀다(11억 8649만 유로).
이렇듯 이적 시장은 날이 갈수록 무섭게 팽창해가고 있다. 역대 최고 선수 이적료 1위부터 10위까지가 모두 지난 6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자연스럽게 축구 판도 자체를 흔드는 굵직굵직한 이적들이 날이 갈수록 더욱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매거진S>는 그 동안 축구사에 있어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적 15선을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 세계 축구 역대 이적료 신기록 (그래픽 : 네이버 스포츠) |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레알 마드리드, 1953 ~ 1964)
‘금빛 화살(Saeta Rubia)’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디 스테파노는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프란츠 베켄바워와 함께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로 꼽히고 있다. 아르헨티나 명문 리베르 플라테에서 1945년 프로 데뷔한 그는 자국 리그 파업으로 인해 1949년 콜롬비아 구단 로스 미요나리오스로 이적했다. 이후 그는 4시즌 동안 102경기에 출전해 90골을 넣으며 남미 최고의 선수로 떠올랐다. 그런 그에게 1953년, 스페인의 두 명문 바르셀로나와 레알이 이적을 제의하고 나섰다.
그의 레알 이적 스토리는 짧은 지면에 설명하기엔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당시 디 스테파노를 영입하기 위해선 미요나리오스는 물론 친정팀 리베르 플라테로부터 이적 합의를 얻어야 했다. 문제는 아직 바르셀로나가 미요나리오스와 협상을 진행하던 와중에 리베르 플라테의 동의를 얻은 디 스테파노가 미리 스페인에 입국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당연히 미요나리오스 측에서 디 스테파노의 바르셀로나 행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 틈을 타 레알 마드리드가 미요나리오스와 협상을 통해 이적에 합의했다. 이와 함께 디 스테파노는 졸지에 이중 계약 신세에 놓인 것이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바르셀로나는 리베르 플라테로부터, 그리고 레알은 미요나리오스로부터 각각 디 스테파노 영입 권한을 사들인 셈이다.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했던 스페인 축구 협회는 디 스테파노에게 향후 4년 동안 1시즌씩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양팀에서 번갈아 가며 뛰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결정에 당시 스페인 최강이자 라디슬라오 쿠발라라는 스타 플레이어를 보유한 바르셀로나 팬들은 강한 불만을 표출했고 결국 바르셀로나는 디 스테파노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양팀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디 스테파노라는 구심점이 생긴 레알은 그가 입단하자마자 12년 만에 프리메라 리가 우승을 차지하며 바르셀로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실 디 스테파노 등장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레알은 프리메라 리가 우승 2회에 불과한, 마드리드 내에서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보다 성적 면에서 떨어지는 구단이었다. 하지만 디 스테파노가 뛰었던 11시즌 동안 레알은 8번의 프리메라 리가 우승과 무엇보다도 유러피언 컵(챔피언스 리그 전신) 5연패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다. 디 스테파노와 함께 스페인을 넘어 유럽을 호령한 레알이었다. 적어도 유럽 클럽 축구사만을 놓고 본다면 역대 가장 화려한 성적을 남긴 인물이라 칭할 만하다. 그러하기에 레알의 전설적인 공격수 에밀리오 부트라게뇨는 디 스테파노에 대해 “레알 신화의 기원이다”라고 평했다.
디 스테파노의 이적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 gettyimages/멀티비츠
# 에우제비우(벤피카, 1960 ~ 1975)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에서 출생한 ‘흑표범’ 에우제비우는 스포르팅 리스본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던 자신의 고향 팀 로렌수 마르케스에서 프로 데뷔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스포르팅에 입단해야 했으나 선수 시절 브라질 대표팀에서 미드필더로 뛰었던 명 스카우트 주세 카를로스 바우어의 눈에 띄어 만 18세였던 1960년, 약 14만 유로의 이적료와 함께 벤피카로 이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61년 5월, 벤피카 1군에 등록되자마자 곧바로 히트 상품으로 떠올랐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평가전에서 해트트릭을 작성하며 스타 탄생을 알린 그는 1961/62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3-3 팽팽한 동점 상황에서 2골을 넣으며 5-3 승리를 이끌었다. 이와 함께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린 에우제비우였다.
비록 이후 3차례나 유러피언 컵 결승전(1962/63, 1964/65, 1967/68)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준우승에 그쳤던 벤피카이지만, 에우제비우가 에이스로 군림하던 15시즌 동안 무려 11회의 포르투갈 리그 우승과 5회의 포르투갈 컵 우승을 차지하며 황금기를 구가했다.
# 요한 크루이프(바르셀로나, 1973 ~ 1978)
아약스에서 유러피언 컵 3회 연속 우승(1970/71, 1971/72, 1972/73)을 차지하며 유럽 축구의 정상에 우뚝 선 그는 1973년 여름, 당시 역대 최고 이적료인 92만 2천 파운드와 함께 바르셀로나에 입성했다. 아들의 이름을 카탈루냐 식으로 ‘조르디’라고 지을 정도로 바르셀로나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그는 1974년 2월, 자신의 첫 레알 마드리드 원정 경기에서 39분경 골을 넣으며 5-0 대승을 이끌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선 환상적인 백힐 슈팅으로 골을 기록하며 2-1 승리의 주역 역할을 담당했다(이는 크루이프의 유령 골로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렇듯 그의 활약에 힘입어 바르셀로나는 1973/74 시즌, 13년 만에 프리메라 리가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비단 선수 시절의 활약상이 전부가 아니다. 도리어 그는 지도자로서 바르셀로나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8년 바르셀로나 지휘봉을 잡은 그는 8년간 팀을 이끌며 프리메라 리가 우승 4연패(1990/91 ~ 1993/94)와 유러피언 컵 우승 1회(1991/92)를 비롯해 도합 11회의 우승을 차지하며 황금기를 구축했다. 당시의 바르셀로나를 일컬어 스페인 현지 언론들은 ‘드림팀’이라 지칭했다.
게다가 그는 1979년, 아약스 유스 아카데미를 본떠 바르셀로나에 ‘라 마시아(La Masia, 스페인어로 농장을 의미)’라고 불리는 유스 프로그램을 구축했다. 이 곳에서 바르셀로나는 크루이프의 축구 철학인 토탈 사커와 티키타카(원터치 패스)를 바탕으로 선수들을 육성해내고 있다. 즉 크루이프가 없었다면 현재의 바르셀로나도 없었을 것이다.
# 케니 달글리시(리버풀, 1977 ~ 1990)
이미 셀틱에서 4번의 리그 우승과 4번의 스코티시 컵 우승을 통해 스타덤에 올라선 스코틀랜드 간판 공격수 달글리시는 1977년 여름, 당시 영연방 역대 최고 이적료인 44만 파운드와 함께 리버풀에 입단했다. 이미 리버풀은 1976/77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하며 당대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었으나 그의 가세와 함께 본격적으로 황금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입단 첫 해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으며 우승(1-0 승)을 이끈 그는 1985년까지 8시즌 동안 5번의 1부 리그 우승과 3번의 유러피언 컵 우승을 비롯해 총 17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헤이젤 참사로 인해 조 페이건이 감독직을 사임하면서 클럽 역사상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자 탁월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며 3번의 1부 리그 우승과 2번의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1989년 힐스보로 참사 때도 팀을 지탱해준 인물도 다름 아닌 달글리시였다. 이것이 바로 그가 리버풀 팬들로부터 ‘킹 케니(King Kenny)’라고 추앙 받는 이유이다. 실제 그는 리버풀 팬들이 선정한 ‘콥(Kop, 리버풀 서포터 집단을 지칭함)에게 가장 충격을 준 100인의 선수’에서 스티븐 제라드를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분데스리가 외국인 활약사의 새 지평을 연 차붐 ⓒ gettyimages/멀티비츠
# 차범근(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79 ~ 1983)
1979년 여름, 프랑크푸르트 유니폼을 입은 차범근은 입단 첫 해 분데스리가 두 자릿수 골(12골)을 기록했고, UEFA컵에서도 맹활약을 펼치며 우승을 견인했다. 이는 프랑크푸르트의 유일한 유럽 대항전 우승이다. 이듬해인 1980/81 시즌, 그는 요추 부상으로 고전했으나 DFB 포칼 결승전에서 골을 넣는 등 포칼에서만 6경기 6골을 넣으며 프랑크푸르트에 2년 연속 우승 트로피를 선사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범근은 4시즌 동안 분데스리가 122경기에 출전해 46골을 넣으며 분데스리가 정상급 공격수로 명성을 떨쳤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그는 2013년, 프랑크푸르트 팬들이 선정한 ‘레전드 베스트 일레븐’에 당당히 뽑혔다.
한편 1983년 여름, 바이엘 레버쿠젠에 입단한 그는 1987/88 시즌 UEFA컵 우승을 차지하며 두 개의 다른 구단에서 UEFA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진기한 장면을 연출했다. 또한 분데스리가 통산 98골을 넣으며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분데스리가 외국인 선수 최다 골 기록을 수립했다(이 기록은 1999년 도르트문트 공격수 스테판 사퓌자에 의해 깨졌다. 현재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외국인 득점 순위는 5위). 말 그대로 당대 가장 성공한 외국인 선수였다. 차범근의 성공 신화가 있었기에 이후 많은 아시아 선수들이 유럽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 미셸 플라티니(유벤투스, 1982 ~ 1987)
1982년 여름, 생테티엔을 떠나 유벤투스 유니폼을 입은 그는 입단 첫 해부터 이탈리아 무대를 폭격하며 프랑스 축구 대통령의 위엄을 만천하에 알렸다. 1982/83 시즌 16골을 넣으며 세리에A 최초로 非 이탈리아인 데뷔 시즌 득점왕을 차지한 그는 1983/84 시즌과 1984/85 시즌에도 연달아 득점왕에 오르며 세리에A 득점왕 3연패를 달성했다. 그가 공격수가 아닌 미드필더라는 점을 감안하면 경이적인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입단 첫 해 코파 이탈리아 우승과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기록했고, 1983/84 시즌엔 세리에A 우승과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차지했으며, 1984/85 시즌엔 마침내 유러피언 컵 우승과 함께 유럽 정상에 올라섰다. 대회 득점왕(7골)도 그의 차지였다. 5시즌 동안 유벤투스에서 뛰면서 그가 들어올린 우승 트로피 숫자만 7회에 달한다. 게다가 그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최초로 발롱 도르 3연패 위업을 달성했다.
마라도나가 합류한 뒤 나폴리는 180도 변하기 시작했다 ⓒ gettyimages/멀티비츠
# 디에고 마라도나(나폴리, 1984 ~ 1991)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로 추앙 받고 있는 마라도나는 많은 기대 속에 당시 역대 최고 이적료인 300만 파운드와 함께 1982년 여름, 바르셀로나에 입단했다. 하지만 1983년 9월, ‘빌바오의 도살자’ 안도니 고이코체아의 살인 태클로 인해 심각한 발목 골절상을 입어 장기간 그라운드를 떠나 있어야 했고, 1983/84 시즌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선 아틀레틱 빌바오를 상대로 난투극을 벌이는 등 그리 행복하지 않은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로 인해 그는 결국 1984년 여름, 500만 파운드와 함께 자신이 기록했던 역대 최고 이적료를 경신하며 나폴리오 떠났다.
마라도나가 입단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나폴리는 전형적인 세리에A 하위권 팀이었다. 1983/84 시즌 나폴리는 승점 1점 차로 간신히 강등을 면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라도나가 가세하면서 나폴리는 180도 변했다. 1984/85 시즌 세리에A 8위를 차지한 나폴리는 1985/86 시즌 3위를 차지하며 UEFA컵 진출권을 획득했다. 1986/87 시즌엔 구단 통산 첫 번째 세리에A 우승에 더해 코파 이탈리아 우승까지 차지하며 2관왕에 올랐고, 1988/89 시즌엔 UEFA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1989/90 시즌에도 또 다시 세리에A 우승을 차지한 나폴리였다.
물론 나폴리가 마라도나 원맨팀은 아니었다. 브라질이 자랑하는 공격수 카레카와 이탈리아 정상급 수비수 치로 페라라가 버젓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마라도나라는 구심점이 있었기에 나폴리가 세리에A 상위권을 줄곧 군림할 수 있었다. 나폴리 사람들에게 마라도나는 신이나 다름 없다.
# 오렌지 삼총사(AC 밀란, 1987 ~ 1993)
1986년 2월, 밀란을 인수한 미디어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1987년, 떠오르는 명장 아리고 사키를 신임 감독직에 임명하는 한편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공격수 마르코 판 바스텐과 루드 굴리트를 동시에 영입해 대대적인 전력 강화에 나섰다. 사실 밀란은 1982/83 시즌만 하더라도 세리에B에 있었고, 이후 줄곧 5위에서 7위권을 유지하던 팀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콤비 판 바스텐과 굴리트의 활약에 힘입어 밀란은 1987/88 시즌 세리에A 우승을 차지하며 명가의 부활을 알렸다.
1988년 여름, 밀란은 또 다른 네덜란드 수비형 미드필더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영입하기에 이르렀다. 오렌지 삼총사의 결성이었다. 밀란은 오렌지 삼총사의 맹활약에 힘입어 1988/89 시즌과 1989/90 시즌 연달아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밀란 제너레이션의 개막을 알렸다. 그리고 1991/92 시즌과 1992/93 시즌엔 세리에A 2연패를 달성했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6년의 기간 동안 총 12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밀란이다.
하지만 1993년 여름, 굴리트와 레이카르트가 밀란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오렌지 삼총사는 해체 수순을 밟았다. 판 바스텐 역시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끔찍한 발목 골절상을 당해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한 채 1995년 8월, 만 30세라는 젊은 나이에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했다.
바이에른 뮌헨과 독일 전설의 수문장, 올리버칸 ⓒ gettyimages/멀티비츠
# 에릭 칸토나(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92 ~ 1997)
프랑스의 소문난 악동이었던 그는 1991년, 경기 도중 심판에게 공을 집어 던져 2개월 출전 정지 징계를 받자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나섰으나 플라티니의 조언에 따라 잉글랜드로 넘어가 리즈 유나이티드와 계약을 체결했다. 입단 첫 해 그는 리즈에 1부 리그 우승을 선사하며 스타덤에 올랐으나 하워드 윌킨슨 감독과 자주 충돌했다. 이에 리즈는 그를 120만 파운드에 맨유로 이적시켰다.
1992년은 잉글랜드 축구계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 해이다. 1985년 헤이젤 참사로 5년간 유러피언 컵 참가가 금지되면서 자연스럽게 하락세를 타던 잉글랜드 축구계가 1부 리그 명칭을 프리미어 리그로 변경하면서 분위기 반전에 나선 것. 그 중심에는 바로 맨유의 성공 신화가 있었다.
1966/67 시즌 1부 리그 우승을 끝으로 오랜 암흑기에 시달리던 맨유는 1986년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이후 서서히 성적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칸토나의 가세와 함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춘 맨유는 프리미어 리그 출범 첫 해인 1992/93 시즌 26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맨유는 프리미어 리그 우승 단골 손님으로 자리잡게 됐다.
칸토나가 맨유에서 뛴 5년 동안 딱 한 번 리그 우승을 놓쳤는데 그 한 번은 바로 칸토나가 관중에게 이단 옆차기를 날려 무려 9개월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던 1995/96 시즌의 일이었다. 즉 칸토나 정상적으로 뛴 시즌엔 별 무리 없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맨유이다. 이것이 바로 칸토나가 맨유 팬들에게 ‘올드 트래포드의 왕’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 올리버 칸(바이에른 뮌헨, 1994 ~ 2008)
칼스루어 유스 출신으로 1987년 프로 데뷔해 1990년부터 주전 골키퍼로 올라선 그는 1993/94 시즌 팀을 UEFA컵 준결승전까지 진출시켜 스타덤에 올랐고, 이에 힘입어 1994년 여름, 당시 골키퍼 최고액이었던 250만 유로에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했다.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쉽을 바탕으로 당시 ‘FC 헐리웃(스포츠면보다 가쉽면에 더 자주 이름을 올리는 바이에른 선수들을 지칭)’이라는 놀림을 당하던 팀을 바로 잡아나갔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바이에른은 1995/96 시즌 UEFA컵 우승을, 그리고 1996/97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연달아 차지하며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2000/01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발렌시아 상대로 승부차기에서 3개의 슈팅을 선방하며 팀을 유럽 정상의 위치에 올렸다.
2007/08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그는 바이에른에서 14시즌을 뛰며 분데스리가 8회 우승을 포함해 총 23회의 우승을 기록했다. 역대 바이에른 선수들 중 가장 많은 우승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그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년 연속 UEFA 최우수 골키퍼상을 수상했다. 그는 단순한 골키퍼 그 이상의 존재였다. 필드 플레이어보다 더 인기가 있었고,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 독일이 많은 재능 있는 골키퍼들을 배출하면서 골키퍼 왕국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 루이스 피구 & 지네딘 지단(레알 마드리드, 2000 ~ 2006)
레알 마드리드는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 부임과 함께 ‘갈락티코(Galatico: 은하수라는 의미의 스페인어. 스타 선수들을 은하수처럼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표현)’ 정책을 펼쳤다. 2000년 회장 선거 당시 라이벌 바르셀로나 에이스 피구 영입을 공약으로 내세운 페레스는 비현실적일 것만 같았던 이적을 당시 역대 최고액인 3700만 파운드의 이적료와 함께 성사시켰다. 피구의 영입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왔다. 바르셀로나는 피구의 이탈과 함께 흔들린 반면 레알은 피구 가세에 힘입어 프리메라 리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피구가 갈락티코 시대의 시작이었다면 완성은 지단이었다. 4660만 파운드와 함께 피구의 역대 최고 이적료를 1년 만에 깨며 레알에 입성한 지단은 2001/02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환상적인 발리 슈팅으로 결승골을 넣으며 레알에 통산 9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선사했다. 이는 아직까지도 챔피언스 리그 역대 가장 아름다운 골로 회자되고 있다.
이후에도 레알은 호나우두와 데이빗 베컴을 영입해 화려한 스타 군단을 장식했다. 비록 갈락티코 1기의 성적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으나 스타 마케팅을 통한 비즈니스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갈락티코 정책을 기점으로 레알은 명품 구단이라는 이미지를 전세계 축구팬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2002 월드컵에서 슈퍼스타로 떠오른 호나우지뉴는 결국 바르사로 향했다 ⓒ gettyimages/멀티비츠
# 호나우지뉴(바르셀로나, 2003 ~ 2008)
이미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통해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로 떠오른 ‘외계인’ 호나우지뉴. 당초 그는 2003년 여름, 맨유 이적이 유력한 상태였으나 맨유 측에서 협상 막판 이적료를 낮추려다 파리 생제르맹의 분노를 자아냈고, 이 틈을 타 뒤늦게 영입전선에 뛰어든 바르셀로나가 호나우지뉴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바르셀로나는 1998/99 시즌을 마지막으로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심지어 2002/03 시즌엔 6위에 그치며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마저 놓치는 수모를 겪어야 했던 바르셀로나였다. 하지만 호나우지뉴의 가세와 함께 첫 시즌을 2위로 마친 바르셀로나는 2004/05 시즌 프리메라 리가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2005/06 시즌 프리메라 리가 2연패에 더해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까지 들어올리며 ‘드림팀 2기’의 탄생을 만천하에 알렸다.
비록 전성기가 짧았다는 단점이 있지만 호나우지뉴가 없었다면 바르셀로나의 2000년대 황금기도 없었을 것이다. 호나우지뉴가 버텨줬기에 리오넬 메시가 단계별로 차근차근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실제 메시는 2013년 7월, 호나우지뉴의 바르셀로나 입단 10주년을 기념해 가진 인터뷰에서 “호나우지뉴는 나에게 큰 도움을 준 인물이다. 16살의 어린 나이에 1군에서 적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호나우지뉴가 있어 가능했다.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 카카(AC 밀란, 2003 ~ 2009)
‘엄친아’ 카카는 2003년 여름, 브라질 명문 상파울루를 떠나 600만 파운드라는 다소 저가의 이적료에 밀란에 입성했다. 당시 밀란은 마누엘 루이 코스타라는 당대 세리에A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카카를 천천히 키워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입단하자마자 맹활약을 펼치며 10골과 함께 밀란의 세리에A 우승을 견인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2006/07 시즌 당시 노인정이라는 조롱을 받을 정도로 주축 선수들이 노쇠화된 상태에서도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을 펼치며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10골)과 우승을 동시에 차지했다. 이에 힘입어 그는 2007년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 도르를 동시에 획득했다. 비록 레알 마드리드 이적 이후 잦은 부상에 시달리면서 끝없는 부진과 함께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으나 적어도 밀란에서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세련되면서도 품격 있는 에이스였다.
AC밀란 시절의 카카, 그는 세련되고 품격있는 에이스였다 ⓒ gettyimages/멀티비츠
# 디디에 드로그바(첼시, 2004 ~ 2012)
2004년 여름, 2400만 파운드의 이적료와 함께 마르세유를 떠나 첼시에 입단한 그는 첫 2시즌만 하더라도 결정력에서 다소간의 아쉬움을 드러내며 ‘골 못 넣는 공격수’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또한 큰 덩치에 맞지 않게 자주 과장되게 넘어지는 장면들을 연출해 ‘다이버’라는 오명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날이 갈수록 슈팅 정확도를 비약적으로 올렸고, 무회전 프리킥도 연마해 세트피스 전담 키커 역할도 담당하기에 이르렀다. 안드레이 셰브첸코와 페르난도 토레스 같은 정상급 공격수들이 그의 위치를 위협했으나 최종 승자는 언제나 드로그바였다.
솔직히 프리미어 리그 역사상 그보다 더 뛰어난 개인 성적을 올린 공격수들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첼시 황금기의 상징이었다. 로만 아브라모비치 첼시 시대의 개막은 드로그바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의 가세와 함께 첼시는 프리미어 리그 우승(3회)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4번의 FA 컵과 2번의 리그 컵, 그리고 2번의 커뮤니티 실드 우승을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2011/12 시즌 런던 구단 최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견인하며 첼시에서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첼시가 토너먼트에서 강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결승전의 사나이 드로그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그는 결승전 9경기에서 9골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첼시 팬들로부터 컬트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이유이다.
지난 2년 간 첼시를 떠나있었던 그는 은사 주제 무리뉴 감독의 부름을 받고 다시 돌아왔다. 이제 더 이상 전성기의 기량이 아니지만, 첼시 팬들은 그가 우승 부적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레알 마드리드, 2009 ~ 현재)
이미 맨유에서 그는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 도르를 수상하며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와 함께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러하기에 레알은 그를 영입하기 위해 역대 최고 이적료인 8000만 파운드를 과감히 투자했다. 이적 당시만 하더라도 지나치게 거액을 투자했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그는 연신 레알의 역대 득점 기록을 경신해나가며 돈값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레알 입단 후 최단 기간 250호골 고지를 점령하며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가장 바람직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 그는 68골만 더 넣으면 라울을 넘어 레알 역대 최다 골 기록자에 등극한다. 레알 입단 후 한 시즌 평균 50.4골을 넣고 있는 호날두이기에 부상만 없다면 늦어도 다음 시즌에 라울을 넘어서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레알 입단 4년차였던 2012/13 시즌까지만 하더라도 우승 횟수(프리메라 리가 1회, 코파 델 레이 1회, 수페르코파 1회)가 부족한 게 옥에 티였으나 지난 시즌 개인 통산 2번째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챔피언스 리그에서 한 시즌 역대 최다 득점(17골) 기록을 수립하며 레알의 숙원인 ‘라 데시마(La Decima, 10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를 견인했다. 게다가 아직 그의 우승 기록은 현재 진행형이다.
레알에서 호날두는 라 데시마를 달성하고 최정상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 gettyimages/멀티비츠
127년 이적 역사를 갈무리하며
이렇듯 선수 한 명의 이적은 단순한 이적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때가 있다. 어떤 선수를 영입하느냐에 따라 구단의 운명이 바뀌기도 하고, 축구 철학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며, 영입 기조 자체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번 여름 이적시장에도 축구 팬들의 이목을 끄는 대형 이적들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지난 시즌 EPL 최우수 선수였던 루이스 수아레스가 리버풀에서 바르셀로나로, ‘월드컵 득점왕’ 하메스 로드리게스가 AS 모나코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의 ‘라 데시마(챔피언스 리그 통산 10회 우승)’ 주역 앙헬 디 마리아가 맨유로 각각 이적하며 역대 최고액 이적 3, 4, 5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아직 이적시장 종료까지 3일을 더 남겨놓은 시점이다. 지난 시즌엔 이적시장 마지막 날에 가레스 베일이 레알 마드리드로, 메수트 외질이 아스널로 이적하면서 축구 팬들에게 흥미진진한 하루를 선사했다. 올 이적 시장 데드라인엔 어떤 이적들이 발생할 지, 그리고 어떤 이적들이 축구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될 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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