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깨끗한 환경
본 문 : 창 1:24-31, 요 6:8-13
발자국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발 사이즈나 발의 건강 척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지배하는 공간의 지수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서양인들은 침대를 사용합니다. 침대는 자고나도 공간을 점유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부자리는 아침에 개면 공간을 원점으로 환원합니다. 의자는 앉고 일어나도 공간을 점유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방석은 앉았다가 치우면 공간을 절약합니다.
가방은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아도 공간을 낭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적 보자기는 물건을 쌌다가 풀어놓으면 공간을 돌려줍니다.
서양의 양복은 입체수납하기 때문에 공간을 유지합니다. 우리네 한복은 접어서 장롱에 평면수납하기 때문에 공간을 절약합니다. 병풍이나 부채도 사용한 다음에는 다시 접어놓으면 공간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색종이 공작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주로 오려 붙이기를 하지만 우리는 접어서 치마 저고리를 만들고 배를 만듭니다.
우리나라는 공간경제가 발달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작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것은 환경 파괴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자국 지수가 낮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라고 하는 OECD 가입국 가운데 하위 다섯 번째라고 합니다.
브라질은 아시는 대로 국토가 굉장히 넓은 나라입니다. 발자국지수가 상당히 높은 나라입니다. 특히 아마존 유역에는 얼마나 많은 열대림이 있는지 ‘세계의 허파’라고 일컬어집니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외채가 많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얼마 전에 브라질에 갔을 때에 들은 얘기입니다. 브라질이 미국에 약 200억 달러의 외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브라질이 미국에게 부채를 갚지 못하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모라토리엄을 선포한 것이지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부채를 당장 상환하라고 하였답니다. 그랬더니 브라질은 돈이 없으니 아마존의 나무 200억 달러 치를 베어가라고 하였답니다. 아마존의 나무가 사라지면 미국은 당장 심각한 기상의 변화가 온다고 합니다. 가장 큰 피해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200억 달러를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브라질에 가서 안내원들과 교민들에게 여러 번 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볼 때 이건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이건 폭력배가 하는 억지지 이게 무슨 정당하고 신의 있는 국가간의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들은 자랑스럽게 이 이야기를 합디다. 지구의 환경을 담보로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지구적 폭력이며 인류에 대한 또 다른 신종 테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공간지수를 낮추어야 합니다. 환경에 대한 관심을 최대화해야 합니다. 이런 관심은 생태적 관심에서 성경적 신적 명령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환경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환경보존은 하나님이 주신 신적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게레트 하딘이란 분이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라 책을 썼습니다. 공유지의 자유사용권을 신봉하는 사회에서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면 끝내 모두 파멸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환경이란 인류 모두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자연은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올해 지구 표면의 온도는 1961년부터 1990년까지의 평균 온도보다 0.45도가 높아졌습니다. 얼마 안 높아진 것 같지만 이 온도는 대단한 환경변화를 가지고 옵니다. 지구상에 폭설이 내리고, 폭우가 쏟아지고, 태풍이 불고, 한발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비옥한 땅들이 급속하게 사막화가 진행됩니다. 지난 주간의 신문에는 알프스에도 황사가 와서 눈이 누렇게 변했습니다 사하라 사막의 모래 먼지가 그곳까지 간 것입니다.
지구의 온난화의 직접적 피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태평양의 폴리네시아의 작은 섬나라 투발루는 인구가 15,000명밖에 되지 않는 9개의 산호섬으로 된 나라입니다. 산호섬의 높이가 해발 4.5미터 이하입니다. 바로 이 작은 섬나라가 지구 온난화의 첫 희생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투발루 기상청은 지난 2월 19일 오후 조수가 평균 해수면보다 3.07미터 높아지고 20일 오후에는 3.1미터에 달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섬 대부분 지역이 1시간 정도 바닷물에 침수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였습니다. 나우루, 키리바시, 사모아, 투발루는 폴리네시아의 작은 섬나라들인데 이 나라의 교회들이 ‘세계선교협의회’(CWM)의 회원 교회들로서 저도 그 곳의 교회 지도자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들이 물에 잠겨 어떻게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그 곳의 교회들이 다 바닷물에 잠겼을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동식물은 50년 내 30%가 멸종한다고 합니다. 어떤 영국의 과학자는 2100년에는 지구의 온도가 5.8도 상승한다고 합니다. 그 분은 별 걱정 다 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온도가 5.8도 상승해서는 지구가 견디지 못하고 그 때까지 지구가 생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환경보전론자들은 지구상에 서식하는 동식물이 약 1400만 종이고 약 1만2000종이 멸종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수천 종은 이미 멸종에 다가가고 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다른 나라가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의 환경지속지수는 전 세계 142개 국가 중 136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환경에 대하여는 우리나라가 꼴찌나 다름없습니다. 수출입 물량이 세계 12위인 나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환경문제는 이제 어떤 나라의 지엽적 문제가 아닙니다. 지구적 과제이며 온 인류가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입니다. 배부른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서 할 얘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문제입니다.
요즘의 환경용어로 말하면, 에덴은 완벽한 생태계였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창조가 완벽하고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범죄는 생태계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깨끗한 환경은 깨끗한 양심, 올곧은 인간성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한 환경이란 어떤 상태입니까?
첫째, 창조의 원리를 보존하는 상태입니다.
창세기 1:1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합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일이었고, 이 세상의 시작이었습니다. 히브리서 3:4에는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 신앙 고백의 주체입니다. 지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한번도 인간이 주인이 된 적이 없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는 “종류대로”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생물을 종류대로, 육축을 종류대로, 기는 것을 종류대로,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모두를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모든 것을 종류대로 만드신 그 다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채소와 나무를 사람의 식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질서 있게 진행되었습니다. 질서란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질서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질서 있게 세계를 운행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그 질서를 하나님은 한번도 파괴하신 적이 없습니다.
욥기 38:25에는 말합니다.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비도 우뢰도 번개도 다 길이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의 길이 분명히 있습니다. 동물과 식물의 모든 성장과 번식과 이동이 길이 있습니다. 작은 기러기도 그 날으는 길이 있어 자기 길로 날아갑니다. 아무렇게나 자라고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길이 있고 성장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이고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와 원리와 길을 잘 보전해야 깨끗한 환경이 됩니다. 길을 파괴하면 진흙탕이 되고 무질서가 됩니다. 환경파괴는 제 얼굴에 침 뱉기가 아니라 제 손가락으로 제 눈 찌르기입니다. 모든 피해가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부메랑의 원리는 여기에서도 진리입니다. 파괴된 창조질서는 완벽하게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환경의 파괴는 파괴자 스스로에게 그 대가가 돌아옵니다.
최근 서울대학교의 황우석 교수가 사람의 체세포와 난자만으로 인간 배아(胚芽) 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세계 최초라고 하여 세계 유명대학교에서 그를 모셔가려고 하고 있지만 그는 한국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주간에는 그가 “당분간 인간 난자를 가지고 복제 연구하는 것을 중단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신이 시킨다고 하더라도 인간복제 실험은 거부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그 분은 지식과 더불어 지혜가 있는 분 같아 보입니다.
이사야 55:8에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라고 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가늠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인간적으로 조작하면 낭패를 당합니다. 곧 파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을 판단해야 합니다.
가장 깨끗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의 손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도 하나님의 생각과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 되어야 가장 깨끗한 환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가운데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란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땅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깨끗한 환경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깨끗한 나라가 되어야 이 기도는 이루어집니다.
둘째, 피조물을 바르게 다스리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신적 명령이 있습니다.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얼마나 멋지고 얼마나 인간에게는 황송한 하나님의 명령입니까?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씀은 유용하게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그릇된 사고는 지배하고, 파괴하고, 오용하고, 마구 사용하였습니다. 동물이나 식물 할 것 없이 바르게 다스려야 합니다. 바르게 다스리지 못하면 오히려 화를 자초하게 됩니다.
동물이 인간에 대하여 공격적이 됩니다. 식물도 점점 못 먹게 됩니다. 땅을 얼마나 더럽혔는지 땅이 곡식을 내지 못합니다. 북한에도 그렇습니다. 땅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부지런히 일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너무 그 동안 서로 경쟁하느라 화학 비료를 많이 줘서 이제는 땅이 생산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땅이 지치고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동물의 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병들이 동물만의 병이 아니라 인간의 병입니다. 이 병이 동물의 잘못으로 생긴 병이 아니라 인간이 잘못하여 생긴 병입니다. 광우병, 돼지콜레라, 조류독감, 장출혈성급성감염증(O-157), 이런 모든 것들이 인간이 잘못 다스린 결과입니다.
다스린다는 말을 영어로 ‘govern’이라고 하지요. 이 말의 뜻을 가진 헬라어는 ‘쿠베르네시스’(kupernesis)란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지도자가 별과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입니다. 땅도, 동식물도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지 지배할 대상이 아닙니다.
“다스리다”의 히브리어는 통치권 행사를 의미하는 어근을 가졌습니다. 통치는 지배가 아니라 섬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통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8에는 다스리는 은사을 이렇게 말합니다.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8의 말씀을 보면 “다스리는 것”은 분명히 은사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로 활용해야 합니다. 은사가 되어야 다스리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피조물이고 다른 모든 것도 우리와 같은 피조물인 것을 알 때에 깨끗한 환경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창조자가 아니라는 겸허한 자세가 환경을 깨끗하게 보존하게 합니다. “인간은 환경의 정복자가 아니고 환경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자의식이 있을 때에 환경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본래의 모습을 보전해 나가며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구 환경의 변화가 갈수록 큽니다. 홍수, 한발, 기근, 따뜻한 겨울, 추운 여름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잘못 다스리니까 발생하는 것입니다. 러더 위트락이 쓴 ‘영적 성숙’이란 책에는 “부럽게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창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타락의 결과로 그들은 세상과 자신에 대해서도 그릇된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인간의 타락은 창조에 대한 지식을 상실하게 하였습니다. 상실할 뿐만 아니라 그릇된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릇된 지식이란 무엇일까요? 파괴하는 지식입니다. 지배하는 지식입니다. 훼손하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군림하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아니라 원래의 지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원래의 환경으로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지막 31절에는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합니다. “좋았더라”는 말은 “토브”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좋고 아름다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창조의 완벽성,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만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것은 모든 창조를 다 끝내셨고 인류를 창조하셨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을 다스릴 인간을 만드셨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의 원리대로 다스렸다면 가장 좋은 상태일 텐데 그렇지 못하니 좋지 못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파괴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깨끗한 환경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우리가 보기에도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C. S. 루이스는 “창조주께서는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즐길 수 있는 아름다움을 만드셨다.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반응한다”고 하였습니다. 루이스는 이것을 ‘일상적인 반응’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이 그가 말한 일상적 반응입니다. 그런데 더러워진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보고 반응하지 못합니다. 더러운 것을 보아도 더럽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창세기 2:18에는 “좋지 못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하나님이 2장에는 좋지 못한 것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불만족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의 관계적 본성에 확실한 강조를 하십니다. 창세기 6:6에는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사”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상서 15:11에는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좋아하셨던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후회하십니다. 피조물의 타락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상태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루소는 말했습니다. “창조자의 손을 떠날 때 모든 것이 좋았다. 그러나 인간 손에 들어와서 모든 것이 나빠졌다”. 사람의 손은 만지면 만질수록 점점 더 나빠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손이 타락한 손이기에 그렇습니다.
결론
어떤 분이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내가 좋아하는 일을 주시지 않으시려면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게 만들어주겠습니까?” 우리의 절실한 관심과 요구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무얼 좋아하실까? 이것이 우리의 최대의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좋은 상태가 나쁜 상태가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좋은 자녀는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보통 자녀는 자기의 좋은 것을 합니다. 보통 이하의 자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나쁜 자녀는 부모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골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녀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해 드리는 자녀가 됩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본래 상태를 깨끗하게 유지하고 보전하여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이 되게 합시다. 이 일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며 만드신 모든 환경을 깨끗하게 잘 보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 목 : 남겨진 한가지 사명
본 문 : 창세기 1:31, 2:15-17
오늘이 6월 7일인데 벌써 한 낮에 온도가 거의 섭씨 30도가 웃도는 가운데 있습니다.
6월에 피는 꽃들은 이미 져서 이 때 쯤이면, 꽃 구경하러 산으로 들로 가는데, 이제는 피서지로 떠나는 인파가 자꾸만 늘어가고 있습니다.
아주 기이한 현상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을 보셨습니까?
환경 파괴로 인해 서울 도심에 알 수 없는 ‘괴물’ 출몰함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아주 박진감 넘치는 영화입니다. 구조적인 사회의 모순과 함께 환경의 중요성을 알렸던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최근 러시아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역사상 최악의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를 아실 것입니다.
1986년에 일어난 엄청난 사건입니다.
방사선 유출로 인해 엄청난 환경 피해를 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최근 체르노빌 지역의 강에 엄청나게 큰 ‘메기’가 출연했습니다.
4m에 이르는 ‘메기’가 출연했습니다.(그것도 여러마리)
이것은 메기가 아니라 민물상어입니다.
메기가 불과 50cm 나 됩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생김새도 영화 괴물에서 나오는 물고기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육지에는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군인이 이 괴물 메기에 물려 손이 잘렸다는 말도 있어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 체르노빌 지역에 있는 강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난 한 세기동안 자연 환경에 대한 편견도 가지고 있었고,
오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 첫 번째가 자연 환경은 우리 생활에 옵션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 자연 환경은 우리 생활에 옵션이 아니라 전부입니다.
자연 환경이 우리 생활에 옵션이다는 말은,
“필요하면 개발하고 필요 없으면 그냥 놓아두거나 파괴해도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자동차 사면 옵션으로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옵션으로 따라오는 것을 무조건 달면, 자동차 가격이 백만원 이백만원 그 이상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옵션으로 따라오는 것을 빼고 자동차를 삽니다.
그 전에는 에어백이나 ABS 혹은 네비게이션은 옵션으로 따라오거나,
아에 옵션에서도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출고될 때부터 장착되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에는 필요없지만 지금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옵션은 있으면 편리해서 좋고, 없으면 좀 불편하지만 없어도 괜찮아요!
과거 우리는 그런 식으로 자연 환경을 바라보았습니다.
지구는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것인데,
인류는 이 대지로부터 떨어져 살아갈 만큼 그런 강한 존재가 아닌데, 함부로 다뤄왔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회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고 찬송하면서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짓밟고 파괴한 것을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라"는 멋진 문화명령을 주셨습니다.
본래 이 명령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세계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고 돌보라는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서적 명령을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자연을 오히려 파괴하고 이기적 욕망을 채우려는 생각으로 이용해 왔습니다.
특히 서구의 기독교 국가들이 앞장서서 이러한 일들을 했습니다.
많은 나라를 식민지로 점령하고 무차별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훼손했습니다. 더군다나 남태평양 같은 미지의 섬에 원폭을 터뜨리는 실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자연 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이 너무나도 큽니다.
자연은 더 이상 옵션이 아닌 것이죠?
이제 대다수의 사람들은 최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상기온 현상이나,
대 지진, 혹은 쓰나미와 같은 엄청난 해일 피해를 보면서,
이제 더 이상 자연 환경은 옵셥이 아니고 우리 생활 한 가운데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새롭게 변화되지 못하고 계속 자연을 훼손한다면,
자연도 인간에게 해악을 가져다줍니다.
아니 이미 `공해'라는 이름으로 자연은 우리를 방문했고, 우리 삶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 생태계는 순환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도 공기도 심지어 인간이 오염시킨 물질까지도 순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전도서에 있는 말씀을 보면 연하여 흐른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고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전 1:7)
"연하여 흐른다"는 말은 물이 온 곳으로 다시 되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생태계가 순환 한다는 것을 모르고 오염 물질을 버리면 그게 결국 인간에게 돌아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본에서 나타났습니다.
1932년 일본 미나마타 신일본 질소공업 주식회사 공장에서 유기 수은이 함유된 폐유를 그냥 바다에 버렸습니다.
그러나 24년 후 1956년에 이 지역에 이상한 환자가 집단적으로 발생했습니다.
눈과 귀가 어두워지고 기억력 감퇴, 언어 보행 장애 등 결국 많은 사람이,
신경이 마비되어 죽게됩니다.
이 피해가 확산되어 1960년 11명 환자중 40여명 사망했습니다.
1980년에는 2500명의 환자중 550명이 사망했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괴롭게 하면 자연도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자연은 거짓을 모르는 정직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순환하여 나에게 되돌아 옵니다.
이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인데,
만일 우리가 새롭게 변화되지 못하고 계속 자연을 훼손한다면,
자연도 인간에게 해악을 가져다줍니다.
이미 이것이 `공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방문했습니다.
지금 우리 삶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습니다.
생태계는 순환으로 엮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개발이라는 면목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존중히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자연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람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개발 성장이라는 면목으로 자연을 함부로 파괴하는 사람은,
사람도 우숩게 아는 경우가 많아요? 과거 서구사회가 이런 잘못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컴패션 대표 서정인 목사가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필리핀에 가서 어린 아이들을 돕는 데, 어느 거리를 걷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몰려와 먹을 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더럽고 냄새나는 아이들입니다.
모든 선교사들이 갈길이 바빠 외면하고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한 자매가 이 아이를 안고 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서정인 목사가 이 아이의 모습을 사진찍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카메라가 먼지 알았던 것입니다.
카메라를 얼굴에 대면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하는 가운데 빵조각을 먹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입니다. 눈 망울은 초롱초롱 빛이났습니다.
또 카메라를 대면 고개를 푹 숙이는 것입니다.
카메라가 있나 없나 보고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살캇은 시커먹고 옷은 다 헤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서정인 목사는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그 때 그 모습을 생각하며 컴패션 사역을 조심스럽게 한다고 합니다.
소설 동의보감에 보면, 허준의 생애속에 이런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지리산 산청이라는 곳에서 수양을 하는데 남원에 볼일이 있어 길을 떠납니다.
깊은 산속을 지나가는 데 이상한 냄새가 향기로워 심심 유곡을 들어다 보니 산삼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너무 감격해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손가락으로 땅을 팝니다.
피를 흘리며 산삼을 캐내는 장면은 자연을 향한 존중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신앙고백 맨 처음에 창조 신앙이 고백되는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대로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다 지으셨기에,
우리는 이 창조물을 지키고 보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을 이끌어 에덴에 두셨습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아담이라는 뜻은 남자라는 뜻도 있지만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앞에선 인간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이,
기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에 두실 때, 두가지의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켜라! 에덴 동산을 지켜라!
둘째,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명령입니다.(지켜야 할)
또한 에덴 동산을 지키라 하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 최초 인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영적인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에덴 동산을 다스리고 지켜라!”
토마스 메라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구에 두신 것도 감사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해 달에 두셨다면, 인간의 삶은 달의 세계처럼 황량하고 쓸쓸했을 것이다.”
인간의 지적 수준도 낮게되고, 따뜻함도 낮게되고, 색감도 모르고, 언어도 극히 제한되었을 것이다.
달에는 산천초목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자연이 주는 혜택을 모르면 안됩니다.
아니 우리는 이제 자연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지키면 자연은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것은 지구를 달세계처럼 만드는 꼴이 됩니다.
에크하르트의 말처럼,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에 대해 기록한 책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신성함을 창조물에게 전달했고 그 창조물은 하나님의 신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 만물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 귀를 열어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데서 해방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이 환경을 지키는 책임있는 사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후손들을 생각하고 내일에 대한 희망과 꿈을 심어 줘야 합니다.
후손들이 풍요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줍시다.
할렐루야!
둘째, 하나님이 세상 모든 만물을 만드실 때, 자연 만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여러번 나옵니다.
아시죠!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입니다.
사람 보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 세상 모든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입니다.
만물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면 됩니다.
사람보기에 좋은 것도 중요하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은,
아주 완벽한 조화, 아주 완벽한 미가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손 안대고 그대로 놓아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연 그대로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입니다.
우리가 이런 오해를 할 때가 있습니다.
①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언제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만드셨다!
또하나,
②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난 다음, 심히 보기에 좋았더라! 고 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6일 동안 만드실 때,,,,
항상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또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난 다음 “심히 보기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가 보통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 창세기를 자세히 구다보면, 둘째날,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셨다.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고 칭하셨는 데”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연세 많으신 모세가 임으로 빼 놓은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①생육 ②번성 ③충만 ④정복 ⑤다스리라(바다의 고기, 하늘의 새,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땅에서 나는 식물까지도 먹고 다스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왜 그랬을까요?
안 믿는 사람같으면, 아 모세 선생님이 또 깜박 하셨군요?
아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까짓것 문제될 것이 뭐가 있습니까?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저는 그 하나님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은 완전한 아가페의 사랑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심판이라는 심짜도 좋아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심판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심판을 칼을 내밀지만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원치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발견했습니다.
왜 그럴까? 쉽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궁창의 물은 노아홍수 심판때 하늘에 창에 문이 열려 사용된 심판의 물이요!
그 궁창의 물이 쏟아져서 모세의 가족만을 남기고,
모든 기식호흡하는 자들이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하는 일이 너무나도 악해서 하나님이 한탄하시면서, 홍수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지만,
수명이 900 세가 넘게 사는 시대에 하는 일이 너무나도 악하기에 하나님은 홍수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크나큰 오해가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심판의 주이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절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은 창세기 1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초에 구원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더디하시고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에덴의 삶을 인간에게 주시며 아주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에덴에서 살면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에덴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 생활입니까?
에덴은 본래 기쁨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에덴 동산은 기쁨의 동산, 즐거움의 동산, 희락의 동산, 행복의 동산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그 사람을 이끌어 그곳 에덴 동산에 두셨다고 합니다.
그곳엔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과 행복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네가 정녕 죽으리라 하였는 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에덴에서의 기쁨을 찾아볼 수 없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아담과 하와의 후손은 타락할 때로 타락하여,
아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후손으로 내려 갈 수록 더욱더 죄악이 깊어졌습니다.
모세 시대에 갔을 땐 사람의 죄악이 온 세상에 관영하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도 그 모든 계획도 항상 악했습니다.
좋은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가끔 삶의 계획을 들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하나하나)
여러분!
우리가 과연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인지, 그렇지 못한 것인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말씀에 비춰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이 저나 여러분을 세우신 것을 한탄하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창세기 6장에 보면, 야훼 하나님은 이미 한탄하셨어요!
창세기 6장 5-7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그 다음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당대의 의인으로써 이미, 120년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기식 호흡하는 모든 생물을 물로 쓸어 버릴것을 예고 받고, 그 때부터 아라랏산 높은 곳에 방주를 짓습니다.
120년이 지나고, 하나님이 홍수 심판을 하십니다.
그런데 창세기 7장 11절에 보면,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고 나옵니다.
또한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로 비가 쏟아졌다고 나옵니다.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는 것은,
궁창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 것을 말합니다.
궁창의 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
해발 5165m 이상되는 아라랏산이 잠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기식호흡(허파로 숨을 쉬는 모든 생물)하는 생물들이 다 죽은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것 까지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만드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 좋았더라!
말씀하셨는 데 궁창의 심판의 물과 죄짓고 홍수 심판받을 사람을 만드시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수 많은 죄를 짓어 용서받지 못할 타락한 인간이었지만,
하나님이 인간 만드신 것을 한탄할 정도의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구제불능이라 물로써 심판하실 수 밖에 없었지만,
끝까지 사랑하시길 원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우리는 창조 이야기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맨 처음 세상 모든 피조물을 만드실 때도 구원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동안 세상 모든 만물을 만드실 때, 맨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진 인간을 만드실 때도)
그렇다고 인간이 악하게 만들어 졌다. 하나님의 실패작이다 말할 순 없어요!
우리 인간은 로버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 의지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 의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것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때 심히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는 데,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과 모든 자연만물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만물과, 모든 만물의 영장되는 사람이 잘 다스리고 관리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보셨을 때 심히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그 모든 것을 바라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1장 31절을 쉬운 성경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매우 좋았습니다. 저녁이 지나고 아침이 되니, 이 날이 여섯째 날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것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운행되어진 것이 좋았던 것입니다.
하늘이 창들이 열리어 엄청난 홍수가 밀려오고, 쓰나미와 같은 엄청난 해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연재해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시고 좋았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동산에서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안정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좋아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새 피조물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사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좋아하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람과 자연이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사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을 리 없습니다.
죄를 먹고 사는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진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피조 세계와 잘 어울려서 산다면 그 보다 아름다운 모습은 없습니다.
하나님 보실 때 아름답지 못한 것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고, 죄 가운데 살고, 죄 가운데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언약이 없는 인간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 짓을 할 수 있어! 저게 사람이야!
사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실체를 성경 창세기 전반부에서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①아담과 하와의 모습속에서,(죄를 전가)
②가인의 모습속에서,(살인)
③라멕의 타락한 모습속에서,(창 4장에 나옵니다)
로마서에도 타락한 인간의 실상이 잘 나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1:29-31)
여러분!
우리가 창조기사를 창세기 1장으로만 끝내선 안됩니다.
성경 역사는 창조와 안식이 하나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도 시작과 끝이 하나인 것 처럼,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은 엿새동안 계속 일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다 하므로 안식하신 것입니다.
맨 처음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주시면서,
마음대로 자연을 파괴해도 좋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바로 안식하신 것입니다.
물론 뱀에 유혹으로 인해 범죄하여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때에는 땅을 정복해야죠? 땅을 다스려야죠?
그러나 창조세계에 대한 조화의 측면으로 볼 때는 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창세기 1장부터 2장 3장까지 자세히 구다보면,
인간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원에 대한 소중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 다섯가지의 축복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징계의 말씀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 신학자들은 P 문서다 E 문서다 하면서,
창세기 1장에 내용은 2-3장 보다 후대에 쓰여졌는 데 배열이 앞에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창세기 3장에 보면, 범죄한 하와에게 하나님이 징계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가 징계 끝나지 않고 축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 너가 저주을 받아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게 되는 데,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인죽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아담의 아내 하와에겐 아기를 잉태할 때의 고통, 아기를 낳을 때의 고통을 주실 것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28절에서는 이러한 고통이 전부다 축복으로 바꾸어 나옵니다.
①생육 ②번성 ③충만 ④정복 ⑤다스림 - 이것은 하나님이 하와를 만들고 난 다음, 아담에게 있어질 축복의 말씀이잖아요!(수고 잉태가 있으므로 후대에 이루어진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징계로 끝나지 않습니다. 축복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징계는 징계가 아닙니다. 축복입니다.
구약에 보면 징계에 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대부분 징계의 관한 말씀이 아니라 택하신 백성을 향한 축복과 사랑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찾아내기가 어렵죠?
예를 들어 범죄하면 죄 씻음 받기 위해 속죄제, 속건제를 받쳐야 했습니다.
양이나 염소를 잡아 하나님께 받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안되면 비둘기 잡아도 돼요?
집 비둘기가 없으면 산 비둘기도 돼요?
비둘기 잡기 어렵고 형편이 안되면, 에바 한 움쿰을 받쳐도 됐습니다.
하나님은 징계중에라고 구원의 길을 예비해 놓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 짓고 수치심에 가득한 아담과 하와에게 무화과 나뭇잎 대신에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은 어떡고요?
하나님이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이십니다.
때로 하나님은 징계의 채찍도 축복으로 바꿔주시는 분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죄 짓고 어둠속에서 방황하십니까?
나 같은 죄인도 용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이야기는 언제나 러브스토리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우리가 징계의 말씀으로 받아드리면 안됩니다.
전부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것이 하루아침에 징계가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뱀에 유혹에 넘어간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까지, 하나님은 예정가운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모진 고난을 다 받게 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상에서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분명한 것은 징계는 징계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으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축복으로 바꿔주시는 분이 되시기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겨레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입니다.
어디하나 부족함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봄과 가을이 없어지고 여름에서 겨울로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로 넘어가는 뜻한 느낌을 받습니다. 봄에 벚꽃을 볼 수 있는 시간이 급격하게 줄었습니다. 가을에 단풍구경할 시간이 없어 졌습니다.
제가 가끔 말씀 전하면서 질문을 드렸는 데,
너무나 쉬운 질문을 해서 어떤 분들은 그래요?
목사님 좀 차원높은 질문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좀 차원 높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환경보전의식을 함양하고 실천을 생활화할 목적으로 제정된 법정기념일로,
매년 6월 5일 세계적으로 기념하는 날은 무엇입니까?
좀 어렵습니까?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오늘이 환경주일입니다. 환경주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세계 환경의 날입니다.
아 그렇구나? 굉장한 것을 얻었다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실 것 같은데,
옆에 분에게 말씀해 보실래요!
사실은 “당신만 몰랐습니다. 다 알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에덴 동산은 아주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고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남녀 아담과 하와가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권적인 강권하심이 있었습니다.
오늘 오늘 창세기 2장 15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아담과 하와)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은 정말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4대 강이 있었고, 정금과 진주와 호마노와 같은 보석이 가득했습니다.
그곳에서 아담과 하와가 아주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둘이 벌거벗었지만 부끄럽지도 않았고,
아담이 하와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할 정도로 서로를 위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며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놀라운 것들을 마음껏 누리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계명은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이미 따먹어 뱃속에서 다 소화가 되었고,
씨는 아담이 먹다가 목에서 걸려 아담스 애플이 되었습니다.(남자들은 목젓이 뛰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담과 하와에게 한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주신 사명도 같습니다.
“다스리며 지키게 하라!”(창2:15)
우리가 정의 평화 창조세계보전(JPIC)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과거에 얼마나 환경보호에 애를 많이 썼습니까?
이것이 1983년도에 나왔던 말입니다.
그 때, 땅을 정복하라는 의미에 대해서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 2000년에 와선 땅도 바다도 쉬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참으로 좋은 대안이었습니다.
무너지는 산천을 보고하기 위해 산도 바다도 안식년에 들어갔습니다.
등산로를 폐쇠하고 자연이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환경 대 재앙을 경험한 우리는, 이제 남겨진 한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에덴 동산, 이 땅을 “지켜야 합니다”
이제는 자연 환경을 원래 위치로 옮기기 위해 자연을 쉬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가만히 놓아두어선 자연은 파괴되고 맙니다.
다스리고 지킵시다! 지켜 나갑시다!
*본문; 행15: 35-41 *제목; “위기(危機)에 서다”
=몇개월동안 UMC(연합감리교단)에 속한 남가주의 한인교회(5곳)들이 어려움을 겼었다. 교단에서 동성애 문제에 반대했던 목사님들을 그 교회로 재파송을 못하겠다-해서 극한 대립해왔다. 총회가 일단 물러섰다, 서로 갈라짐에서 일단 봉합은 했지만 동성애문제라는 근본적 해결은 어려워 보인다.
=본문의 갈등은 봉합대신에 피차 갈라섬으로 끝을 맺었다. 진리문제였다면 이해할수 있을 것 같은데 의견대립/감정대립이다. 누구였죠? 안디옥교회의 기둥인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싸워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 동고동락, 교회의 기둥, 동역자이지만 바울에게 바나바는 아버지같은 동역자-였다.
=오랜 갈등이었는가? 아닙니다. 1차 선교여행; 어려움중에도 잘마쳤다. 행15장에 와서는 둘이 예루살렘총회에 파송되었다. 할례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중요했다. {오직 믿음}-[이신득의]에 대하여 26절에 “만장일치”의 인준을 받고 돌아왔다. 거리낌 없이 “땅끝”을 향한 문을 활짝 열 수 있었다.
=두번째 선교를 앞두고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엄청난 위기죠! 이유가 “마가-요한” 문제였다. 바울은 일심의 사람이 아니다, 데리고 갈 수 없다. 바나바는 생질이지만 {휼륭한 주의 종}이 될수 있다. (데리고 가자). 그것 때문에 존경받는 바나바와 바울이 정말-(유치하게) 싸웠고 갈라섰다.
=누가도 이해가 안된다. 이런 장면은 후대-독자를 위해서 생략해도 된다. 전에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었을 때처럼 의도적인 생략을 한 것처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윤리문제/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왜 기록했을까? 누가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을까? 궁금하다!
=진리의 문제가 아니였다면 뭐였죠? 한마디로 밑바닥이죠, 바나바와 바울 같은 하나님의 사람의 끝-모습이었죠. 누구나 다-있다. 우리도 밑바닥이 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위기가 기회가 되었다. 유럽선교의 문을 여는 기회로 삼았다. 성경을 13권이나 쓰게 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러한 위기에서 기회를 경험하고 이렇게 고백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의 위기도 주님 안에서는 기회입니다! 누가가 이것을 본 것이죠!
=그러면 본문을 상고하는 관점도 달라야 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위기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 밑바닥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은 새 기회를 열었습니다.
=그동안 선교중에 가장 힘들었던 경우는 청결 강박증이 있는 분이다. 쉽지 않다. 선교지의 화장실, 먹는 문제-정말 어렵다. 하도 괴로우니 나중에는 설사병이 생겨서 죽도록 고생하는 경우도 보았다.
=마가는 금수저-출신이다. 행2장의 성령 강림때 120명이 모여 있었는데 장소가 마가의 집이었다. 행12장에 야고보가 죽고,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행12:12)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안전-가옥, 신앙의 뿌리도 금수저였다.
=다툼의 이슈가 뭐였죠? 결벽증이 아니었다. 1차 선교에 중도하차-였다. 너무 힘든 사역이었죠. 바나바는 재도전의 기회를 주자, 휼륭한 그릇이다. 바울은 아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그래서 심히 다퉜다.
=바나바가 맞았다. 왜냐면 두사람의 갈등에 가장 충격 받은 사람이 마가였다, 자기 때문에 싸우고/ 갈라졌다. 마가는 자기를 변화시켰다. 이게 보이지 않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기록했다. 바나바가 아니었으면 복음서의 핵심인 마가복음이 탄생-불가했다.
=성도는 어떤 상황, 때로는 갈등에서도 마가처럼 자기를 발견해야 합니다. 고후5장-“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성령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십시오, 어떤 상황에도 새롭게 거듭나시길 축원합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평생-선생이고 은인인 바나바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위기가 그를 바꾸어 놓았다. 바울은 일-중심의 사람이다. 바나바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사람중심으로 나아갔다. 동반자가 아닌 동역자-중심으로 바꿨다. 40절에 “실라를 택한 후에”-동역자로 택했다.
=행16장1절부터 “디모데”를 동역자로 택했다. 나중에는 마가까지 동역자로 택했다. (몬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동역자가 되었다. 딤후4장에는 디모데에게 순교를 앞두고 “마가를 데리고 오라”; 죽기전에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사는 세상과 지상교회는 갈등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갈등의 처음은 문제만 보이고 잘못만 보인다. 자신을 보기시작하면 마가처럼/바울처럼 달라집니다. 하나님앞에서 늘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위기를 기회 삼아야 합니다. 더 성숙의 기회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기회로, 동역하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안디옥 교회는 바울의 동역자로 실라를 택하였습니다.
=릭웨렌목사님이 세미나에서 이런 말을 했다. 교회-찬양-악기를 <한 옥타브>를 올렸더니 수백명이 떠났다. 수천명이 몰려왔다. 그 수백명도 지금 다른 교회에 가서 일꾼으로 봉사하고 있다. 갈등의 현실이죠.
=두사람의 갈등문제를 묵상하다가 큰 은혜를 받았다. 1)자기이익이 아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를 생질에게 담임목사를 맡기겠다가 아니다. 다 이익/이권이 단 하나도 없다. 2)열심때문에 싸웠다. 잘-해볼려고 잘-선교해 볼려교 싸웠다. 3)교회를 두쪽으로 갈라놓지 않았다; 자기사람, 자기편--
=4)자기 사역에 충실했다. (행15: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사실, 이러면 싸울 일이 없죠. 신기한 것은 갈라진 이후로 바나바는 성경에서 사라졌다, 사도행전에서도 사라졌다. 전승에 의하면 “구브로”섬에서 바로 순교했다고 한다. (기회-불가)
=대신 사도행전의 전부를 바울이 차지했다. 바울서신 13권을 집필했다. 이유가 뭘까요? 갈라섬의 시작부터 다른점이 보여집니다. 바나바는 39절에 마가를 “데리고”-(능동태) 자기중심이다. 실라는 40절-“택한 후에”-(중간태); 교회/성령이 택한 실라를 바울이 “동역자”로 택한 것입니다. 엄청난 차이입니다.
=출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bye가 아닙니다.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기도다; 성도와 교회가 함께 “주의 은혜”-동행하시도록 기도하고, 사역이 1차처럼 교회-중심이 되도록 하였다. 이것 때문입니다. 복음은 교회중심입니다. (딤전3:15)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이번에는 바울이 옳았습니다. 2차도 교회중심, 3차도 교회중심, 바울서신도 전부 다 교회 중심이다. 로마서, 고린도서, 에베소, 빌립보-; 전부 교회중심의 서신입니다. 지금까지 땅끝은 교회중심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교회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교회의 빠른 회복은 교회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자기 중심으로 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보다 교회였고 성령이었다. 자기보다 기도로-“은혜의 부탁”을 했다. 그것이 문제의 자신/교회를 살려냈다. 성전에서 위기를 기회 삼자. 문제의 자신을-살리자!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금요일새벽에 마이애미 고급 콘도 55채 누더기처럼 주저앉았다. 12층이 12초, 사흘이 지났다. 지금까지 단 한명만 구조했다. 159명, 건물이 팬케익 상태~, 안타깝다.
=인간관계의 무너짐, 그후는 chaos-정말 어렵다. 무너짐 인간관계-사람-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너지기 전에 먼저 {화목하며 살자, 사랑하며 살자, 용서하며 살고, 빌4장-“관용”하며 살자}
=기회는 위기속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바울은 가장 갈등이 심하고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말했다. (고전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이게 교회다! 동역자/밭/집이다. 동역자이니 함께 섬기고, 밭이니 함께 교제하고, 집이니 함께 누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