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다섯개 도를(경상남도-북도./전라북도./충청남도-북도.) 어우르는 땅으로 답날을 잡습니다.
그곳은 각도의 중심지에서 젤 먼곳이기도 하고, 고대로 부터 각나라의 경계이자 변방였던 곳이라
문명 또는 문화의 혜택이 젤 늦어 더디게 도달한 땅으로, 여태껏 답날에서도 매번 그냥 스치기만 한 곳.
그래서, 더 새롭고 기대로울 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답사준비를 하면서~
이름 처럼 '무진장'한 보물을 캐는 기분으로 가슴은 내내 두근댑니다..
답사자료는 군더더기 빼내고 한장으로 정리 하면서 ~
제목은 지리적 지명을 부각 하고자
'거함산(거창-함양-산청) + 무진장(무주-진안-장수) = 無盡藏'으로 하고,
산청-함양-(남원)-장수-진안-무주-(김천)-거창...동선을 따라 일정을 잡습니다.
안내지도에도 각 지역들을 구분해 표시를 하고 ~
각 답사지에서 만날 화두들을(key-words) 달아붙혀 안까묵고 이야기할 장치를 마련해 놓고요..ㅎㅎ
그렇게 답날을 출발 합니다 ~
첫 답사지 마천대불 일명 천왕대불 만드는 현장.
조금만 오르면 된다고 꼬득여(?) "쎼가 만발이나 빠지게~" 기어올라가 대불의 머리를 만납니다.
2002년 부터 시작한 대불 조성은 2025년 까지 목표로 잡았다지만 이렇게 머리 부분만 겨우 형태를 갖추고
아직도 주변은 마천석을 캐내는 기계굉음과 덤프트럭들로 소란하기만 합니다...
불두 위로 까마득히 보이는 해묵은 낙락장송은 근심스러운듯 내려다 보고 있고 ~
인터넷에서 검색한 완공될 모습의 불상과 절간 모습은 자연과 인간의 삶에 정치가 개입되면
어떤 폐해가 오게 되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여기 마천석재 사장 박모씨는 훼손된 환경 복원책으로 이런 거대한(?) 방책을 내고는,
10년 뒤 2012년에는 이곳 함양군 의원으로 당선되고 ~
그해, 함양군은 여기 마천면을 '지리산면'으로 바꿀려다 인근 지자체들의 반대에 부닥치고 ~
이 불상이 완공이 된다면 높이 108미터 세계 최대 불상이 된다는데,
법주사의 그 큰 미륵불상이 33미터임을 감안하면 그 규모를 짐작코도 남음이...
아래 그림은 길눈이가 2005년에 중국여행 중에 만났던 현존 세계최대불상인
쓰촨성 청두(성도) 외곽의 '러산(낙산)대불' 입니다. (이번 여름 대홍수로 TV에도 출연했던~)
높이 71미터로 앉아있으니 서면 더 커지겠지요 ㅎㅎ
그때만해도 디카를 못가져다녀 니콘 아날록 카메라에 담아 필름현상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
어쨋거나, 고갤돌려 남쪽을 보면 정면으로 지리산 천왕봉이 손 닿을듯 앞에있고~
바로 앞에, 백두대간 만복대 고리봉에서 발원한 임천/엄천강(남강 지류) 흐르는 곁으로는
가을 오는 계단논 익어감이 정겹습니다 ~
두번째 답사지 덕전리 마애불.
옛적에는 덕봉사라는 절간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고담사라는 절이 되어 있는 곳.
작년인가 정령치 마애불상군 답사 하면서 일정에 포함 시켰지만 늦어못와 아쉬웠는데
오늘에사 답날에서 찾았고, 그렇게 영험이 있다는 소문이 난 부처.
감은듯 실눈 뜨고서 입 다물어 뭔가를 가르쳐 줄듯 웃음끼 머금고서...
가까이 다가서가면~
가슴에 상큼하게 감아돌린 옷 매듭이 멋스럽고, 시무외여원인 손짓은 쪼그라들어 부끄러운데 ~
이중으로 장엄한 거신광배에는,
연주문에 틈틈이 매듭한 꽃모양 바클(?)이며 골뱅이 마냥 휘돌려 피어난 불꽃문이 새겨지고~
가사자락 말려 뒤집힐세라 세련스런 갈고리로 마무리 하고~
다섯닢 연꽃 대좌 위에 살짝 내놓은 발가락이 앙증스럽네요.
이 전부를 받드는 대좌는 탑에서나 볼수 있는 기둥식으로 만들어 차별성과 튼튼함을 노린듯 합니다..
마애불상을 지키는 지금의 고담사 주불전 관음전(한채 밖에 없지만~)에 걸린 사진은
길눈이가 찾을때 마다 달라져 있던 모습들을 남겨놓아 반갑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해가느니.....!
불전 뒷벽에 숨은듯 걸려있는 '진공묘유' 4글자가 첫 화두가 됩니다 ~
반야심경과 금강경에서 시작하여 사리자와 수보리를 거쳐 관세음과 관자재와 보살의 출현,
각기의 문명권에서 인식하는 조금씩 다른 의미의 "공(空)" 개념 !
그리하여 이곳을 스쳐 지나갔을 지눌과 영관과 서산과 경허의 이야기들을 흐르는 바람인듯 이야기 합니다...
색수상행식~ 안의비설신의~ 색즉시공-공즉시색~돈오점수~ 정혜쌍수~대기대용~ 진공묘유...!
진정한 공은, 열반은~ 현실속에서, 일상적 삶 속에 있을지니...
그때 그 자리에서 못다한 ~
눈에 보이는 세상~귀로 들리는 속삭임~코를 간지르는 향기~혀끝의 달콤함~몸을 휘감아도는 촉촉함...
그 모든 것을 다모아 속에서 맺힌 상처로 부터 밖으로 피워내는 꽃이여~
그 꽃은 분노일수도, 기쁨일수도, 절망과 희망일수도, 자아(atman)나 무아(anatman)일수도,
계-정-혜를 거친 반야일수도, 혹은 모든걸 품은 '공 空'일수도 있음이니.....!
여기서도 천왕봉이 구름을 이고 자태를 달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많은 지리산 골짝 중에서도 이곳의 기돗빨과 깨침이 젤 잘되는 곳이라 알려져 그런지~
백명의 무당들이 있었다는 백무동이 여기고, 이름에도 덕전-덕봉-실덕...등 덕(德)자가 많이 들어가고,
지눌이 3번째 깨쳤다는 상무주암, 벽암-영관-서산-사명-경허...로 이어지는 조선불교의 맥이 영원사에서 머물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최초로 개창된 선문인 실상산문이 있슴이니....
차로 이동 중, 실상사 못미처 경남과 전북/함양과 남원의 경계점에 비석들이 늘어서 있어
혹시나 하고 모두를 내리게해 둘러보니 그냥 송덕찬양비들 뿐입니다..
잊을수 없는 임진왜란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의 후손들이 망명 귀화해 해주 석씨가 되어
산청땅 생초에 땅을 얻어 살다가 이래저래 다 뺏기고 마천 추성리 칠선계곡으로 들어와 살았고,
그 후손 중 석상룡이란 이가 1907/정미늑약 때 의병을 일으켜
몇년을 이 임천강을 오르내리며 저항하다 잡혀 죽었고,
해방 후에는 역시 그 후손였을 석구봉 중도사가 법창야화에 나올 정도로 사건화 되기도 했던....
그런 것들을 기억하는 비석이 아닌가 했던거지요 ~
내린김에 그런 이야기며, 칠선계곡 벽송사 서룡스님의 제맘대로(?) 조절했던 입멸이야기 등으로
이곳 일정을 마무리 하고는 전라도땅에 들어섭니다 ~
일부러 조금 돌아서 도착한 곳은,
흥부가 형 놀부한테 쫒겨나 살다가 제비다리 고쳐주고 부자 됬다는 아영면 성리 입니다.
번듯하게 지어놓은 흥부기념관은 코로나로 못들어 가고
길가에 만들어논 소설 또는 판소리의 주연급 조각상들을 안주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판소리 6마당 중 3마당이(흥부가-가루지기타령-춘향가) 이곳을 무대로 한것이며~
농촌의 단순하고 질박한 삶의 이야기에서(흥부전),
좀더 복잡하고 미묘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를 거쳐(변강쇠옹녀전),
정치와 신분과 경제와 사랑 이야기들이 뒤섞힌 도시화로 확대되어 나가는(춘향전)....
그런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약을 팝니다 ~
우리 근대가 조금의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자발적이고 주체적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핑계 혹은 넋두리 밖에 되지않는 그 마지막의 안타까운 모습들을요....
한껏 늘어진 일정을 줏어 담으려 급한 마음으로~
남원-장수 백두대간을 잇는 '역적재'(유자광 넘던 길?)를 넘다가 장마/태풍으로 통행불가라 ~
내비아가씨도 자신없는, 길마져 희미한 골짝길을 타고내려와 어찌어찌 장수읍내로 갑니다.
그래도 가다보니 섬진강과 금강이 갈라지는 수분리 고갯길도 넘어서 ~
장수읍내에서 먼저 찾은 곳은 젤 번듯하게 단장된 논개사당-의암사 입니다.
이곳이 유교화-문명화의 세례가 가장 늦게 도달하다 보니 여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거기에 대한 열등감 내지 조급함이 생겼을 것이고~
그 반증으로 '장수 3절'이 만들어 지고 그 첫자리에 논개가 들어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실존 여부나 행적은 그 다음의 이야기이고....
역시 사당에는 들어갈 수 없어 밖만 돌아 봅니다.
변영로의 '논개'에도 의암사의 '의암'에도 장수 이야기는 없고 진주 남강 이야기일 뿐이지만
남강가 보다는 이곳 장수에 논개는 더 만발해 있습니다.
조금 이동하여, 역시 3절의 한 무대 장수향교를 찾습니다.
이곳 역시 폐쇄 중이라 관리소에 허락을 얻으려 가니 점심 먹으러 갔는지 아무도 없어
좋다구나(?) 하고 용감하게 향교 안을 들어 섭니다. 많은 답날의 경험을 무기 삼아서요 ㅎㅎ..
이름만 명륜당인 강당은 구색만 갖추어 텅비어 있고 있어야 할 동재와 서재는
전라도의 서원이나 향교가 으례 그렇듯 뒤로 나앉아 동무와 서무를 겸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임란 전에 세워져 (비록 이후에 다시 지었지만) 국가지정 보물인 대성전은 위용을 품고 있어 반갑고~
맞배지붕이라 더 점잖아 보입니다.
다른데서는 볼수 없는 '뺄목받침'이 눈길을 잡아 줍니다.
이 건물을 지은 목수는 아마도 구조에 자신이 없었던가, 안전에 너무 꼼꼼 했던가 봅니다.
그래도 곧은 직선으로 하지않고 나무스럽게 휘어진 모습이 눈길을 부드럽게 합니다 ~
대성전 앞마당에 세운 "호성 충복 정경손 수명비" (성역을 지켜낸 충성스런 노비 정경손의 이름을 밝히는 비)
그리고, 대성전 내삼문에 주련으로 걸린 "본성역물범"(여기는 성스러운 곳이니 침범치 말라.)
이 이야기의 전말은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
하나 남은 3절은~ 순의리(殉義吏) 타루비로, 밥시간이 급해 장수를 뜨는 바람에 확인 하지는 못했고~
그렇게 '장수 3절'은 관기(?) 논개의 충열, 노비 경손의 충절, 현감 죽었다고 따라 죽은 아전의 순절...인데,
모두 지배층에서 소외된 신분이라 오히려 사대부/양반을 비꼬듯 역설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비석의 이름들도, "의암 주논개 생장향 수명비", "호성 충복 정경손 수명비", "순의리 타루비" 로
조금은 색다른 이름으로 되어있어 왠지 텁텁합니다...
그리고는 곧장 길을 달려 이윽고 나타나는 눈익은 마이산을 봐가며 산속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곧바로 그곳 명물 '더덕과 돼지의 만남'이란 메뉴를 시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서~
마이산에서 마이산을 못보며 산속으로 걸어 들어 갑니다~
아주 오래전 들렀던 그때의 풍경은 기억치도 못하게 바뀌어 있고,
물 가둔 연못에는 오리보트가 관광객을 부릅니다~ 통기타에 섞인 김광석의 노래가 흐르고~
솟은 역암의 피부는 군데군데 덜아문 부스럼딱지 끍어낸듯 눈길이 가게 합니다..
이처럼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인한 퇴적암에 박혔는 자갈덩이를 안에서 부터 밀어낸 현상을
'타포니' 혹은 '풍화혈'이라 한다는데, 이곳만의 특이한 현상으로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곳이랍니다.
길눈이 얼굴에 피는 열꽃들도 속열이 더 뜨거워지면 저리 될까 두렵습니다...ㅎㅎ
사진으로 익히 만났던 탑사의 전경.
100년도 되지않은 시간이지만 한 사람(이갑룡1860-1957)의 힘으로 만든 '공든탑'이 감동을 줍니다.
습관 처럼, "사람있슴"과 "사람없슴"으로 나누어 담아 봅니다..ㅎㅎ
좀더 올라가야 되는 은수사는 모두 절레절레 하길래 미련없이 내려와 다리도 쉴겸 길가 커피집에 퍼질러 앉아~
늦어버린 일정을 죄도없는 걷기와 시간을 탓하며 한 군데만 더가기로 해 '죽도'로 결정을 짓습니다 ~ㅎ..
죽도 가는 길, 진안읍내서 보이는 마이산.
신라때는 서쪽에 서있다고 '섯다산(西多山)', 고려때는 솟구쳐 오른다고 '용출산(湧出山)',
태조 될 이성계가 1380년에 운봉의 황산에서 왜구들과 싸워 대첩 이루고서 이 산을 지나면서,
꿈에 임금되라 '금척(金尺)' 받았던 산 모습이 여기와 닮았다고 '속금산(束金山/금척 붙잡아 두고 싶은 산)',
그 아버지 제끼고 왕이된 이방원-태종이 말귀 처럼 생겼다고 '마이산'이 되버린 산을 이곳에서 젤 잘 봅니다~
마이산 벗어나는 길가 지나치기 쉬운 자리에~
길눈이가 오늘 젤 많은 약을 팔려고 맘 먹었던 '이산묘' 사당이 있습니다.
이곳은 그야말로 100년전에서 부터 지금까지의 이땅 속살을 아프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귀한 장소 입니다.
고종과 의병장/이석용과 최익현과 송병선과 김구와 이승만과 신익희와 이시영과 김대중과 김영삼.....
금척대훈장, 1905-07/을사-정미늑약,단군과 태조와 세종과 고종 모신 이산정사,해방공간,민주화 시대...
우리 근대의 한 시점을 풍미한 인물들의 흔적 내지 글씨가 모두 모여 있는 곳 !
이곳도 또한 사당 경내는 못들어오게 개자식(?) 두마리가 목이 터지라 짖어대고 ~
뒷편 바위에는 '주필대(임금이 거둥하여 머문 곳)'와 '마이동천' 글자를 새겨놓아
이곳이 조선의 시작 과 끝을 인연 맺고 있슴을 다시 한번 상기시킵니다 ~
마지막으로 찾아 간 죽도.
금강 발원지를 막아 만든 용담호를 돌고돌아 깊숙히 자리한 죽도에는 길도 막다르고 ~
기대한 흔적은 눈씻고 봐도 없는데 세상 피해 온듯 닫힌 전원주택만 몇채가 음산하게 숨어 있습니다...
이곳이 근대가 태동할 때, 선구적인 공화주의자 정여창의 꿈이 머문 곳이고 또, 끝장난 곳입니다.
대동계를 조직해 민중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고, 임금만이 유일한 대안이 아님을(천하공물-하사비군설)
너무 일찍이 터뜨린 탓에 세상으로 부터 아니 지배층으로 부터 버림받아 제거된 정여창의 정신은 ~
허균의 홍길동으로 이어지고, 당취(땡추)들을 모으고, 장길산과 홍경래를 일으켜 세우고,
진주민란과 동학으로 이어 졌습니다...
1589/기축년 정여창이 가고난 뒤 딱 200년 후(1789)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남은 시간의 장난질인지....
이렇게~ 답날을 마칩니다..
오늘 일정으로 잡았다 미처 못 간 ~
적상산 사고(史庫)와 안국사, 나제통문, 무풍의 배두대간 덕산재,지례 흑돼지....
할수 있으면 내친김에 이번 달에 해치우고 싶지만 그곳들이 불러줄지 모르겠네요...ㅎㅎ
첫댓글 사람은 뭣을 듣고서~
30분 뒤에는 반을 ,9시간 뒤에는 2/3를, 일주일 후에는 3/4을 까묵어 버린다 합니다..
길눈이는 그래도 말을 한 덕분에 일주일이 지나서 반넘어는 복원이 된거 같습니다 ~ㅎㅎ..
답날인들은 "적자생존" 보다는 "듣보자생존"을 많이 하는게, 이왕 까묵을 것들은 포기하고~
속 상처로 맺혀 언젠가 밖으로 피는 꽃이 되는 '반야'가 아닐런지요 ?
정여창이라 자꾸 해 싸도 정여립이라 찰떡 알아듣는 답날인들입죠~
근심스런 낙랑장송, 꿈이 머문곳 끝난 곳, 개자식ㅎㅎ, 복습 많이 고맙습니다 ^^ 석성가 이야기를 처음알게 되었어요~ 아직 더 궁금해요
뒤에거 싹다 빼삔거는 탁월한선택입니더.
26일은 꼭 갈랍니다.
근데요 정여창은 아닌거 같은데요.
저가 현장에는 없었지만 거 가서는 분명 정여립이라 했지요?
여창(汝昌)-여립(汝立)-그리고 또 한사람 여해(汝諧).....
저도 인자 맛이 좀 갔나보네요ㅎㅎ..
그래놓고도 그게서나 여기서나 까맣게 시침(?)떼고 있었으니.....
백년전의 일두와 한살차의 죽도와 여해~
길눈이에게는 "여汝"자 돌림의 역사속 안타깝고 귀한 3사람으로 같이 하는가 봅니다..
행복한 관심과 지적 감사드립니다~
스스로를 경계코자 본문은 안고치고 놔 둘랍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