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선의의 관심을 빌미로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질러왔다.
결코 그들이 악의를 갖고 그런 일을 저지른 짓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멍청하다.
그들은 자기가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른다.
그들은 인간을 이용하고 착취했다.
예를 들어, 예수는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진실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선 많은 환상이 필요하다.
단지 빵만으로는 안 된다.
인간은 신이 필요하고 악마도 필요하다.
인간은 천국과 지옥, 교황과 교회, 기도와 용서가 필요하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예수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인간들이 묶여 있는 이런 환상과 허구를 걷어낸다면,
그리고 신도 없고 악마도 없다면, 종교는 무엇에 관한 종교란 말인가?
모든 종교는 그대에게 허상을 안겨 준다.
그대의 마음이 어떤 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마음을 초월하거나 환상을 만들어 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래야만 근원도 모르고 목적지도 없이 부유하는 것 같은 공허감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이 갖는 가장 커다란 욕망 중의 하나는 필요한 존재가 되려는 욕망이다.
존재계는 그대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대는 존재계가 그대를 필요로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대가 없어도 모든 것이 완벽하게 움직여 간다.
해가 뜨고, 꽃이 피고, 계절이 바뀐다.
그대가 없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존재계는 그대의 가장 큰 욕망, 즉 필요한 존재가 되려는 욕망을 만족시켜 주지 않는다.
존재계는 그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이 그대의 마음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이 상황을 비집고 소위 종교라고 불리는 것들이 들어온다.
이런 종교는 모두 가짜이다.
진정한 종교는 필요한 존재가 되려는 그대의 욕망을 포기하도록 돕는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그대를 진정으로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런 욕망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지금 지구상에는 힌두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자이나교 등 종교의 탈을 쓴 것들이 판을 친다.
세상에는 3백여 개의 종교가 있지만 그들 모두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그대한테 똑같은 만족감을 심어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 위에서 신이 굽어보고 계신다.
그분이 당신을 돌보고 있으며, 언제나 당신이 잘되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당신의 삶을 인도하기 위해 세상에 경전을 내려 보냈고,
당신이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을 돕기 위해서 독생자를 내려 보내셨다.
그분은 당신이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메시아와 예언자를 내려 보내셨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로 갈지 몰라 당황하면 그들은 두 번째 약점을 파고든다.
그대를 악의 수령에 빠뜨리기 위해 온갖 수작을 일삼는다는 악마에 대한 공포심을 충동질한다.
인간은 보호자와 안내자로서의 신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지옥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성직자들의 계략이다.
그들이 악이라고 선전하는 것들에 대해 인간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고분고분한 인간으로 길들이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그 기준은 사회마다 다르다.
옳고 그름은 각 사회의 특수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거기엔 어떠한 절대적 기준도 없다.
마음을 넘어설 때 그대는 ‘깨어있음’의 상태에 있게 된다.
이때 비로소 그대는 선입견과 편견 없이 직접적으로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인식에 도달하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즉각적으로 알게 된다.
그때엔 옳고 그름에 대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어떠한 외부적인 계율도 필요치 않다.
모든 사회는 저마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식의 기준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행위를 못하도록 그대를 가로막는 방법은 무엇인가?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들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대개 자연적인 것이다.
자연적인 것은 그대를 유혹한다.
그것은 사회에서 나쁘다고 여겨지지만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적인 것은 인간의 마음을 끄는 힘이 강하다.
그래서 사회는 자연적인 유혹보다 더 강력한 공포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지옥이 탄생한 배경이다.
무셥죠?
수많은 종교들이 하나의 지옥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나는 그들이 왜 하나의 지옥으로 만족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는 자기들의 지옥이 영원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하나의 지옥에 만족한다.
그러나 힌두교인, 자이나교인, 불교인에게는 영원한 지옥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수직으로 내려가는 일곱 개의 지옥을 만들었다.
각각의 지옥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잔인하고 무자비해진다.
지옥의 잔혹상을 그토록 상세하게 묘사한 자들이 어떻게 ‘성인(Saint)' 칭호를 부여받았는지 경악할만한 일이다.
이런 자들은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같은 악당으로 변신할 소지가 크다.
그들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것을 실행할 권력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적 권력 대신에 은밀한 방식으로 다른 권력을 움켜잡는다.
교황, 종정, 샹카라차리아(힌두교의 수장) 등 교단의 수장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를 통해 그대를 지옥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잡게 된다.
인도에서 크리슈나는 무려 16,000명의 아내를 거느렸다.
그렇다면 아내를 잃어버린 15,999명의 남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들은 아내를 도둑맞았다. 강제로 빼앗긴 것이다.
그 여자들은 남편이 있는 유부녀이며 자식을 가진 어머니였다. 일부는 미혼이지만 대부분은 기혼녀였다.
하지만 크리슈나는 예쁜 여자가 눈에 띄기만 하면 닥치는 대로 끌고 갔다.
그 여자들을 모아 놓은 캠프는 거의 하나의 도시 규모였다.
무려 16,000명의 아내!
자, 이제 아내를 빼앗긴 이 15,999명의 남자들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그들이 연합한다면 아내를 강탈해 간 그 자를 죽이고 아내를 다시 찾아올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뭉쳐서 대항하는 것을 막아야 했고, 이 일에 사제들이 앞장섰다.
사제들은 크리슈나의 비호 아래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슈나는 군대와 사법기관 등 모든 세속적인 권력을 거머쥐고 사제들을 보호했다.
힌두교의 법에 따르면, 불가촉천민인 수드라를 살해한 경우에 10년만 수감생활을 하면 충분하다.
하지만 사제를 죽이면 무조건 사형이다.
그것도 이번 생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일곱 번의 생 동안 반복해서 죽음을 당해야만 비로소 형벌이 끝난다.
이처럼 세속적인 권력은 성직자들을 보호하고, 성직자들은 세속적인 권력을 옹호한다.
힌두교의 사제들은 이렇게 말했다.
“크리슈나는 보통 분이 아니다. 그 분은 신의 화신이다. 그러니 그가 당신의 아내를 배우자로 택해 데려간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 당신은 그 분의 축복을 받은 행운아이다. 당신은 장차 낙원에서 크나 큰 보상을 얻을 것이다. 분노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라. 반역은 꿈도 꾸지 말라. 신의 화신이 그 분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의 아내를 선택했음을 영광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라.”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으로는 크리슈나에 대항해서 싸웠을 것이다.
크리슈나가 아이들의 엄마를 빼앗아 갔다.
그 자가 나의 아내를 강탈해 갔다.
세상에 이렇게 분한 일이 있는가!
하지만 그의 자연적인 본능은 두 가지 방식으로 파괴된다.
이런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천국에서 엄청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상상을 초월한 쾌락, 아름다운 여자들. 수천 배의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원한을 품고 격분하거나 크리슈나에 대항하는
어떤 것이라도 한다면 일곱 번째 지옥에 떨어져서 끔찍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자, 이제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기득권층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는 무조건 금지된다.
가난을 예로 들어보자.
모든 종교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다.
예수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아주 정확하고 완전한 하나의 문장으로 말한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리라.
모든 종교가 이렇게 가르친다.
‘가난을 신의 은총으로 받아들여라. 가난은 신이 주신 선물이다.
이것은 단지 그대의 신앙심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이 가난에 대해 공평하지 못하다는 불만을 갖지 말고 신의 선물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천국이 너의 것이다.’
예수가 나자로에게 말했을 때, 그것은 크나큰 위안이 되었다.
마을에서는 큰 부자의 생일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배고픔과 갈증에 지친 나자로가 그 마을을 지나다가 그 집에 가서 약간의 물을 구걸했다.
그러나 그 부잣집 하인들이 그는 내쫓으며 말했다. “이 자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느냐? 우리 주인 나라의 생일잔치에 귀한 손님들이 와 계신 것이 안 보이느냐? 거지 주제에 집안에까지 들어와 물을 구걸하다니! 냉큼 이곳에서 꺼져라!”
그때 예수가 나자로에게 말했다. “상심하지 말라. 그대는 천국에서 온갖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고, 저들은 지옥불 속에서 고통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타는 갈증에 시달리면서 ‘나자로요! 나에게 물을 달라.’고 구걸하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위안인가!
그러나 이것은 가난한 자로부터 부자를 보호하려는 교묘한 계략이다.
부자는 소수이고, 가난한 자는 다수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생각을 품게 되면 그들은 부자들을 죽이려 들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말은 양쪽 면에서 매우 유용하다.
가난이 은총이라는 말은 가난한 자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자들을 보호해서 가난한 자들이 반역할 수 없게 만든다.
종교는 지구상에 가난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종교가 없다면 가난은 진작 사라졌을 것이다.
특히 현재처럼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 지구 전체를 낙원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땐 더욱 그렇다.
종교인들은 이 세상이 낙원으로 바뀌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지구가 가난과 기아, 굶주림과 질병에 허덕이는 상태로 유지되기를 원한다. 그들의 사업 전체가 이런 현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는 교회에 기부하고 교회는 그들을 보호한다.
끼니도 잇기 힘든 가난한 사람들 역시 교회에 헌금한다.
사람들은 교회가 천국에 이르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삶은 그리 길지 않다.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나갔고, 남은 삶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남은 시간 또한 지나가 버릴 것이다.
그런데 종교는 영원한 삶이 있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꼬드긴다.
교회가 그 길을 가르쳐 주고 예수가 그 길을 보여 준다고 한다.
섹스, 배고픔 같은 자연적인 본능들을 물리치는 방법으로 종교인들은 금식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에 반하는 일이다.
과식도 금식만큼 나쁘다.
계속해서 자신을 무엇인가로 과도하게 채워 넣는 것은 자연에 어긋나는 일이다.
거기에는 뭔가 심리적으로 잘못된 점이 있다.
그대는 공허감을 느끼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면 모조리 긁어모아서 채우려고 한다.
그래야만 그대의 심리적인 공허감이 충족되기 때문이다.
종교가 자연적인 본능에 대항하도록 그대를 세뇌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거기엔 그대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이 ‘죄의식’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죄의식은 그대를 파괴하고 착취하고 자기들 멋대로 그대를 조종하는데 이용된다.
죄의식은 그대에게 굴욕감을 주고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일단 죄의식이 생겨나고
그대가 자신을 죄인으로 느끼기 시작하면 종교의 역할은 성공적으로 수행된 것이다.
이제 누가 그대를 구원해 주는가 하는 문제만 남고, 이때 구세주가 등장한다.
이런 과정을 위해서는 먼저 죄의식이라는 것을 심어주어야 한다.
나는 이 같은 일을 하는 두 젊은이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동업자였다. 한 젊은이가 밤중에 도시에 들어가 집집마다 문과 창문에 콜타르를 던져 놓고는 도망간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문과 창문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자, 이제 이것을 어떻게 치우겠는가? 그때 두 번째의 젊은이가 나타나서 콜타르를 치운다고 외치며 다닌다. 사람들은 그에게 몰려가 집과 창문을 청소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럴 즈음 다른 젊은이는 다음 도시에서 집집마다 콜타르를 집어던지고 다닌다. 그렇게, 한 사람은 사람들의 집을 더럽히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치운다. 이 두 사람은 동업자이다.
먼저 사제들은 죄의식을 심어준다.
이것은 그대의 얼굴에 콜타르를 집어던지는 것과 같다.
이제 그대의 얼굴을 씻어줄 누군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들이 콜타르로 오염시킨 이 얼굴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대 스스로 콜타르를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대는 그 얼굴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성직자들이 그대에게 죄의식을 심어주었고, 그대가 아는 것이라고는 ‘나는 죄인이다.’라는 생각뿐이다.
그대는 나에게 묻는다.
신도 없고 악마도 없다면, 왜 종교가 필요합니까?
오로지 그럴 때만 참된 종교가 탄생한다.
신과 악마가 있는 곳에는 참된 종교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신과 악마 그 둘이 전체 공간을 점유해 버린다.
그 둘은 허구이지만 엄청나게 큰 규모여서 종교를 위한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참된 종교가 들어설 공간을 만들려면 먼저 신과 악마를 둘 다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그대의 심리적 욕망을 이용하는 사이비 종교가 들어서지 못한다.
참된 종교는 그대의 존재를 변형시켜서 심리적 욕망을 초월하게 해준다.
진정한 종교는 그런 욕망들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예를 들어보자.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외롭다.
하지만 그런 욕망을 초월한 사람은 ‘홀로 있음’이 무엇인지 안다.
홀로 있음(aloneness)은 강한 힘을 갖지만 외로움(loneliness)은 허약하다.
외로움은 항상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고 거기에 의존한다.
그래서 서로가 상대방을 지배하는 관계가 형성된다.
무엇 때문에 남편은 아내를 지배하고 아내는 남편을 지배하게 되는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다른 사람이 없으면 외로움을 느끼고, 외로움을 느낄 때 두려움이 찾아온다.
두려움에 질린 두 겁쟁이가 서로를 중요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외로움이 사라지기는커녕 두 배로 늘어난다.
신혼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둘이 같이 앉아 있을 때에도 그들은 진정으로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둘 다 외로움에 지쳐간다.
그래서 상대방이 나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쉽게 분노한다.
작은 실수도 싸움의 구실이 된다.
최소한 싸울 때만이라도 그들은 외로움을 잊는다.
이것이 싸움의 목적이다.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려면 이런 마음의 장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럴 때 외로움이 아닌 홀로 있음이 찾아온다.
이 홀로 있음이 참된 것이다.
종교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마음은 분열되어 있고 수많은 군중들로 들끓고 있다.
하지만 마음을 넘어서면 하나의 통일된 의식에 도달한다.
거기엔 분열이 없다.
이 분열되지 않은 의식에 대한 앎이 곧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그 외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이 전부이다.
- 오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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