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동인지 3집 원고 (강경보외 13명)
마리오란자를 만나는 시간외 4편
강경보
1.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 주연을 따놓고 마리오란자는 음악을 녹음했다 세레나데 드링킹송 감미롭고 열정적인 노래들을 다 마치고 난 후 점점 불어나는 그의 몸무게 때문에 칼 하인리히 황태자 역할을 에드문트퍼돔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립싱크를 아주 잘 한 셈인데 이 좌절은 너무 커서 그는 작심하고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오페라를 하려고 했던 것인데 폭식과 폭음을 절제하지 못했던 그는 결국 서른 여덟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2.
성악을 독학했고 트럭운전사를 하면서 음악제에 참가하여 데뷔했단다 이런 대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이 다 벅차오른다 브리튼즈갓탈렌트에서 ‘공주는 잠못이루고‘1)로 우승한 폴포츠도 휴대폰 판매원이었다 하잖은가 뜨지 않았다면 영원히 묻혔을 평범한 삶이 내게 위안을 주는 거다
3.
그렇다고 뜨지 않은 삶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가령 건넌방 딸아이 방에서 ‘밥주세요’라고 연신 외치는 휴대폰 아바타의 가냘픈 목소리가 끝내 주인을 깨우지 못하고 저무는 것을 보는 일은 어쩐지 쓸쓸하다 저 무정물에게 당신의 꿈이 당신 안에 있는 한 이루어질 거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설 배달부
퀵!이라는 말을 좋아하나요?
좋거나 말거나 이건 아주 괜찮은 업종입니다
누군가의 기발한 아이디어였다거나
별 자본금 없이도
죽어라 일하면 될 듯 하다거나
몸으로 때우면 되는 거라고
말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생각하면 이것은 당신의 아주 단순한
욕망이 만든 업종이지요
세상에 나 같은 자에게 자부심을 다 주시다니요
욕망이 자비라면 자본은 선생님이라고 하고 싶어요
선생님이 칠판에 쓰시기를
상상하면 다 이루어진다, 고 했는데
선생님보다 걸출한 제자가 있었던 셈입니다
시인 여러분도 퀵!은 자주 이용하시나요
별로 쓸 일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믿을 어휘 하나 건지지 못할 때
한 번 불러 주세요
휘발유 같은 당신의 성깔머리나
어두컴컴한 골방의 PC 앞에 앉아 담배에 쩔은
꼬라지 같은 내용물이야 상관 안합니다
당신은 당신을 못 믿어도 살아가지만
끝내 이 퀵!을 못 믿는다면
살아가는 어느 하루 쯤
세상 뒤집어지는 날이 있을겁니다
파랗게 시린 아침의 질문
참 많은 말들이 버려졌다는 것을
매일 아침 거울 보듯 알 수는 없는 것일까
어제 술취한 영혼이
오늘 흐리고 풀린 눈동자를 퇴근할 수 없어
댓바람부터 젊은 주인에게 애걸중이다
몸이시여 제발 똑바로 걸어주소서
원래는 그대의 허락 없이 남의 집 담벼락 아래
가벼운 농담을 토설한 마음이 더 문제이겠으나
없는 기억을 끌고 다닌
그대는 언제부터 거기 있었답니까
도대체 다 보신 겁니까?
홍련암 길
강경보
낙산사 불타고 뼈 마른 바다가 퉤퉤
하얀 침을 내뱉으며 달려오는 저녁
아니 하얀 잠옷 치마 펄럭이며 달려드는 여자
참 옆으로 긴 교성을 다 지녔구나
소리가 점점 밤의 형식을 완성하고
형식을 깨뜨리는 시계바늘이 되어 걷는
나,
천 년을 새긴 불의 경전을 어제 보았는데
달 아래 저 겁나는 물의 여자를 읽는 일
앞으로 다시 천 년은 걸리겠다
폭설
눈, 내리는 눈
내리면서 사선을 치는 눈
내리면서 사선을 치다가 홀랑 뒤집히는 눈
바람이 잠시 농을 거는가 싶었는데
쫓겨 달아나는 눈의 절박함이
내 귀싸대기를 맵차게 후려친다
고개 들어 보니 아뿔싸!
이건 무슨 하나님의 사생아들이 틀림없으리
저 작고 순진무구한 것들과 살아갈 몇 날이
아주 잠깐 걱정되는 것을 보면
약력 : 2006년 『매일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우주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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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딸기 외 7편
권영길
오뉴월 땡볕이 너무 뜨거워서
저렇게 복날의 개처럼 혀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세상에 달콤한 것들은 죄다 따먹었거나
이리저리 감언이설에 이끌리다가 저렇게
혓바늘이 돋았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무슨 낯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켜버렸나
저렇게 얼굴 붉히는 것을 보면,
메롱! 하는 딸기에게 우린 여태 속아온 것일까
아니면 잠시 속아주는 척하는 것일까
그가 말을 못하도록 혀를 베어 먹으며
우리는 달콤한 입맞춤을 한다
2. 어떤 균형
터지고 나면 내 몸 속에 깊이 박히는
오뉴월 서릿발같은 파편들을 숨기고
톡 쏘는 속마음도 숨기고 그저 예쁜 척 달콤한 척,
시원한 바람 속에 냉가슴 속에
입맞춤을 기다리는 너는 밤의 여자
금방 터질 것 같은 수류탄처럼
안전핀이 뽑히면 나와의 사정거리는 제로
네게 온몸 가득찼던 무언의 욕망은
내 안에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한 줌 위로에 불과 하지만
욕망을 버린 순간 너는 입을 열기 시작한다
콜라와 사이다와 주스, 그 무엇이든
너의 과거는 한 방울 남김없이 드러났는데
이제 덜그럭, 세상 비밀을 다 발설하겠다고 한다
너를 힘껏 내려 밟는 순간
속수무책 꽉 차오르는 저 깡통
되받아 치는 저 바닥의 힘으로
내가 납작해진다
3. 비오는 날
저 수천 수만의 바늘,
땅 속 가장 캄캄한 추억이나
아픈 살, 뼈 마디 마디까지 다
더듬어 만져 보며 침을 놓아주던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난 것일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투면서도
호수, 그 싱싱한 숨결 속
감추어진 상처를 잘도 찾아낸다
새들의 가벼운 날개짓에도 놀라
마구 흔들리던 가슴 속에서도
모조리 중심을 찾아 꿰뚫는다
뒤늦게 둥글게 둥글게
흩어진 것들 모두 아우르는
저 파문
내 사랑에도 과녁이 있다면
그 중심은 어디쯤 있는가
그대의 동심원이 보고 싶다
4. 문제
○ 아니면 ×
나도 처음엔 그런 문제였던가
아들인지 딸인지 물음에
산부인과 의사의 아리송한 힌트로
궁금증만 시한폭탄처럼 부풀어 올랐던 것
맞아도 좋고 틀려도 좋은 연습문제처럼
어머니에게 나는
아들이었다가 때론 딸이었다가
마침내 그 질문을 해답처럼 빠져 나오던 날
한순간 내 삶은 명명백백해 보였지만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세상은 다시 의문투성이가 되어갔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문제점 투성이의 문제들까지 풀어가면서
또 얼마나 많은 오답들을 늘어 놓았던가
서점에 가보면 아예 집을 이루고 사는 그 문제들을
몇 채씩 뽑아다 풀고 또 풀어도
자꾸만 눈꺼풀에 감기며 적의를 품던
그 문제의 시간들,
쓰러진 사건들까지 다시 일으켜
전전긍긍하던 문제아,
어디 있느냐고 누가 내게 하느님처럼 물으면
지금도 기로에 서 있다고 답할 수 밖에 없으리라
온통 벽같이 보이는 그 땅에 기둥을 세운다
아무도 발들여 놓은 적 없는 허공에 못을 박는다
가지를 뻗던 감나무처럼
낙엽 지는 날 열매마저 다 떨구어도
까마귀밥 몇 개쯤은 하늘에 제출해 보리라
시험 보는 날
해독하기 어려운 지도 한 장 들고 나는,
낯선 오지에 들어선다
5. 꽃피는 시간
내가 놓쳐버린 시간일까
누가 쓰다 버린 시간일까
일반계 고등학생들을 위해 찾아낸 0교시,
숨어있던 1인치를 찾아냈다는 명품 TV광고에서
골키퍼가 화면밖으로 달아나려고 하는 공을 향해
1인치 더 긴 팔을 아주 천천히 뻗는 걸 본 적이 있다
이런 땐 시간이 면발처럼 쫄깃하다
나는 날마다 시간을 끌어당긴다
여덟시에는 아홉시를 아홉시엔 열시를,
오지 않을 까봐 목놓아 기다리고
달아날 까봐 착하게 기다려준다
먼저와 기다려 주던 시간이 조롱하듯 어느날은
아주 천천히 오기도 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소용없다는 듯
아홉시는 아홉시에 오고 열시는 열시에 왔다
할 일 없이 시간을 탕진한 날은
잃어버린 나를 찾아 오느라
시간이 나보다 더 힘들어 했다
좋은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계절이 밀고 당기는 힘들이 모여
해마다 어김없이 먼저 찾아오는 눈밝은 봄,
6. 봄날의 통화 2
몇 차례 더 눈이 더 퍼붓고
몇 차례 더 꽃샘추위가 오고 가고
몇 차례 황사가 다녀가고 나서야
승부가 난 듯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짓밟히듯 비를 맞던 오랑캐꽃잎들,
심상찮은 기류 때문에
감기에 자꾸 걸려 아이들은
저마다 제 몸피에 맞는 음색으로 콜록거렸다
그 때
누군가는 수화기를 세차게 내려놓았고
그 바람에 놀란 꽃잎이 앞 다투어 떨어졌다
여보세요!
여기 좀 보시라니까요?
세상은 한바탕 또 기싸움을 치르나보다
7. 손의 대화
리듬에 맞추어 음정에 맞추어
가↘위 바↗위 보
놀이터 아이들이
손들을 응원하는 소리가 분주하다
빨래 짜듯 손을 비틀어 궁리를 쥐어 짜는 아이
승부수는 손만이 알고 있다는 듯
쉽사리 알려주지 않는 손
주먹이라면 자신 있다던 아이도
이 때만은 손을 펴고
자신 없어 주눅들던 아이도
이 때만은 주먹을 꼭 쥐었다
어떤 녀석은 가위를 들고 싸움을 자르러 왔다
그런데 왜
바위-가위-보도 아니고
보-가위-바위도 아니고
하필 가위-바위-보 만 되는 거예요?
얘들아,
가위 바위 보 다같이 다 또 같지만
세상에 힘의 질서가 있듯
사랑에도 차례가 있듯
다시 한 번... 자... 순서대로
가위→바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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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금강에서
상상을 좀 하러 강가에 간 적이 있다
높으신 꽃들의 행차를 기다리는 듯
현수막이 걸려있다
상상플러스 어쩌구 저쩌구
다름아닌 사람의 손길을 자꾸 쳐바르겠다는 것
뻐언한 그 구절구절이 상상을 오히려 감소시킨다
아직 목숨부지한 갈대 몇이 쑤군거리고 있다
한마디로, 누구인지 목에 힘주고 와서
자연, 너 손 좀 봐줘야겠다는 것
손에 손에 들고 있는 꽃봉오리들이
눈물만 같던
어머니의 꺼질 듯 밤새 켜둔 그 촛불만 같던
개망초꽃들이
발모가지들 싹둑 잘려 있더니
그마저도 오늘은 간 데 없다,
꽃을 피해 길을 피해 저홀로 흘러가는 강
더 이상 아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날,
약력/ 권 영 길
경북 봉화 출생, 한맥문학으로 등단, 충북인터넷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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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매세지 외9편
김관옥
집에서 곰팡이 사냥하던
아내가 4박5일 동해안 여행
떠나고. 하루
무심하던 얼굴이 보이지 앉자
궁금증이 발동하여
손 전화기 두들겨
처음 사용해본 사랑포탄
일격에 함몰된 그녀
젖은 나를 말리느라
모처럼의 하루를 잡고 허둥허둥
묵호항 밤바다 따라
출렁이는 마음이
왜 이리도 향기롭냐고
동해바다에게 물어 보았다는 여자
3분 정거장
다산한 주모 엉덩이 쯤
되어 보이는 공간에서
어깨와 어깨를 마주 걸은 꾼들
상처 입은 하루를 이끌고
충장로 뒷골목
선술집으로 모여든다
바람 불어도 좋은 날
고추 가루를 붉게 치장하고
통무에 올라앉은
파랑치는 시간을 건너온
멸치 한 마리
허리를 곱게 접고
깊은 명상중인!
살아있는 명화도
만날 수 있는 이곳
쪽문의 고백
골목길을 지나다 거미줄에 포장된
쪽문과 마주치는 날이면
고향집 사랑채가 생각난다
옛날 목수들은 야음 출입을
감시하기위한 수단으로
스스로 울게 세웠다는 쪽문
어둠이 깔리고
그믐달이 앞집 가죽나무 가지에
낮게 걸리는 밤이면
탈출을 꿈꾸는 바짓가랑이
돌쩌귀가 괴성을 지르기 전에
바지춤을 열어 찔끔
지린 물방울 몇 조각으로
쪽문의 입을 틀어막았던
내 비행의 유년
미소 한 그릇
설산 허리춤에서
목탁소리 받아먹고 사는
어린 박새 한 마리
종일 내리는 장대비에
날개 접고 앉아 있더니
아직
법당에 독경소리 가득한데
부처님 앞서
허기진 배를 채운다
천천히 먹어도 된다고
자비롭게 굽어보시는 수도암
석가모니 부처님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오는
따뜻한 미소 한 그릇
파랑돔
새만금 방조제에 작은 물혹처럼
매달려있는 비응도 포구
그 주머니 속에 정박 중인 어선이
파도의 장단에 어깨춤을 추고
어시장 건너편
바닷물에 다리를 적시고 있는
파랑돔 횟집
접시위에 방금 교수형이 집행된
도미 머리통이
튀김기름을 뒤집어쓰고
원망하듯.
어안魚眼과 마주치는 순간
어안이 벙 벙
젓가락 든 손을 멈추고
하릴없이 소주잔을 비운다
취한 듯
침통한 듯 저녁 바다가
서쪽으로 가라앉는다
천왕봉
2008년5월11일백무동 등산로 초입에서
지리산 신령님께 입산을 고하고 길을 나섰다
맨 후미에서 “아이고”를 입에 물고
앞서가는 그림자 놓칠세라
연신 땀을 훔치는 도현이 할머니
선두에서 백무동 계곡바람으로
불씨를 일으키랴 앞뒤를 챙기랴
우리들의 산 대장 김 회장님
5시간을 태워도 꺼지지 않는 불씨로
하늘 궁전에 도착했으나
한발 앞선 등산객들로 장터가 되었으니
지상 어디에서도 천왕은 찾을 수 없고
줄을 서서 천왕봉 표지판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불빛이 마른번개 불처럼
마음에 달라붙어
하산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인데
일 년에 몇 번 뿐인
구름 티 한점 없는 천왕의 얼굴을
그래도 보고 가니
축복받았다는 장터목 산장주인
삼계탕 집 풍경
닭 벼슬처럼 입술이 붉은
여자 셋을 거느린 젊은 숫컷
뜨거운 뚝배기 안에
영계를 눕혀 놓고 뜸을 들인다
어느 암탉을 먼저 먹을까
후라이펜 위 계란처럼
중천에 해는 지글거리는데
저 남자 목구멍에서 금방
꼬끼요. 소리라도 터져 나올 듯
중복날 누구는 福도 많은데
제비꽃
가쁜 숨 몰아쉬며 길러낸 자식들
숨 쉬기 편하고 기름진 곳 찾아가라
등 떠밀었더니
무임승차거부 손사래로
익산역 레일과 침목사이에서 긴긴 시간
부들부들 떨다 봄바람에
목덜미 잡힌 제비꽃
작두날보다 더 무서운 세월의 레일위로
얼굴한번 내밀지도 못하고
땅에서 멀어지면 끝장이라는 오기로
허리를 낮추며
그래도 복장에 씨앗 하나 품어 안는
제.비.꽃.
딱따구리 부장님
(노상혁부장에게)
한남글라스 사무실에
목소리 투박한 딱따구리 한 마리
십년째 버티고 앉아있다
수화기가 토해낸 소리가 귀
나팔관을 난도질 했다고 하는데
아마 어머님이 만들어준 무기 일게다
남을 개의치 않고 두들겨대는
꽹과리소리에
매번 함몰당하는 공간
암컷이었다면 시집가 첫날밤 소박
면키 어려웠을 터.
오는 봄날
마른 가슴에 소리의 배려라는
깃발하나 키워보시게나.
사유思惟
새벽안개를 두려워마라
그 오리무중에서
따뜻한 햇살을 굽고 있으니
마음이 맑고 투명하면
그 그림자도 맑고 투명하다네
바람에 쓸려 가버린
날들이여!
밝은 등 밝히고도
나를 찾지 못할 때
깊은 겨울 산에 안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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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 막무가내 외9편
김현근
나는 최악의 타이밍에 늘 점포 문을 닫곤 한다 셔터 내리면 그날 영업 끝이라는 목사님 설교말씀 귀에 쟁쟁한데 나는 왜 목이 좋은 성가대에 진열되어 있으면서도 셔터 자주 내리는 버릇을 고치지 못할까 철컥! 잘 자라는 인사말도 못하는 눈썹 밑 셔터, 그래도 예배시간만은 알아 삐걱하는 숨소리조차 없다 그러나 보라, 읍교회 목사님은 사정이 없다 가벼운 헛기침만으로도 박집사 육중한 몸 셔터를 가볍게 들어 올리신다 팔순줄에 든 장로 권사 침몰하는 구멍가게 폐업도 인정 안하시는 칼목사님 때문에 나는 오늘도 안식일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영업 끝, 영업 재개 반복하고 있다
구절초 필 때, 나는
출세한 자는 자기만 아는 뭔가가 있다
내 친구 예수도
줄을 잘 섰거나
깡다구가 있거나
남 다른 재주가 있었을 터
끈, 깡, 끼,가 무기였구나 생각하면서도
금 은 동처럼
지하에서 땅 위로 드러나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힘의 도움을 받았으리라
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일장 짧고 기온 뚝 떨어진 시월에 피어난
저! 금산 상사암 구절초
무슨 죄가 있어
천애의 절벽을 피난처로 삼았을까
문득 거울을 바라본다
50대 초반에 반백이 된 내 머리초
평지에서도 바로 서지 못하고
헝클어져 바람에 맞서며
보이지 않는 구원의 손길 기다리고 있다
시계초 핀 자리
카네이션 한 송이 헐값에 샀다
어버이 날 가도록
다 지나가도록 시들지도 못한
꽃을 달 사람이 영 가슴을 보여주지 않아
기운이 없는지 꽃은 금방 고개를 떨군다
고개 수그린 꽃 옆에서
나도 시들어
내 가슴에 재깍재깍 시계초 한 송이 피었다
진다
딱 한 번 뿐인데
꽃 핀 자리 그리움의 씨알이 굵어진다
개구리꽃 담론
지상의 모든 것은 다 꽃이라네
별꽃 종꽃, 물고기꽃 사슴꽃,
우리동네 친절강사는
개구리뒷다리까지도 꽃이라네
개구리뒷다리!
소리내면서 몇 초만 멈추어보아요
입 꼬리가 올라가는 순간
제 얼굴보다 예쁜 꽃
사람꽃이 핀다네
하늘 아래 꽃 아닌 것이 없다네
올봄, 초록잎도 꽃이라
참! 꽃!이 더 생각나네 그러고 보면
나도 어머니를 만나면 꽃이 되려나
개구리뒷다리! 하시던
꽃
언제 벙긋 웃으실지 모르는
어머니의 봉분
앞,
물갈퀴를 우아하게 모은
영락없는
개구리꽃! 한송이로 막 피고 싶네
원죄
목사님 설교 중에
깜빡! 졸았는데
문득,
창세기 이전이 궁금했다
잠의 궁창을 헤집고
말라기에서 레위기 올라 출애굽하려는데
누군가가 머리를 툭 쳤다
거대한 공룡이었다
자세히 보니
무서운 덧니를 씰룩거리는 것이
곧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더 자세히 보니
마누라였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원시를 너무 가까이서 본
내 원죄가 깊다
머니 플랜트
뒷돈에 대하여 말이 많다
소연이는 국민들 뒷돈으로 우주선을 탔다
나는 아들에게 딸에게 평생 뒷돈을 대고 있다
세상에,
뒷돈 안 대본 사람 있나
‘한번 나와 보라고 해!’
늘 앞 돈이 문제인 내가 큰소리 쳐 본다
올해는 나도 기어코 짭잘한 돈맛을 보리라
아내 몰래
*머니 플랜트 씨앗가게에 전화를 건다
검은 돈도 흰 돈도 아닌
초록동전을 위해 망설임 없이 뒷돈을 대리라
돈 나문지 독 나문지
전에는 알 수 없는
규제와 구제의 전봇대
높으신 분
말 한마디에
대불공단 전봇대가 뽑혔다
그 전봇대 지금쯤 어디에 누워있을까
본래 서있는 것이 자신의 의무 아니던가
다시 일어설 궁리를 하고 있을까
만약
다시 일어선다면
우주의 어느 행성 전략지역일까
그곳에도 대사 특보
정부산하기관이 있을까
이런 실용적이지 못한 내 생각들
하필,
최초의 우주인이 탄생한 날
규제, 구제의 전봇대에 묶여있다
벚꽃에게 시비걸기
-남해취재기-
벚꽃구경 가자고 조르던 아내와
안가겠다고 다투던 나는 싸움싸움 주말 꽃구경에 나섰다
만개한 아내의 얼굴이 특종기사 같다
그러나 고백컨대, 나는 봄꽃을 보면 꽃시절 보다 먼저 왔던 내 생의 겨울이 더 생각난다 저 벚나무들도 나처럼 엄동 설한 북풍에 맞서 어지간히 싸웠나보다 결국 이 화창한 봄날, 절대로 싸움에 끌여들여서는 안된다는 피붙이까지 기어이 끌어들여 대로에 줄서기 해놓은 것을 보면 우리집 하고 똑 같다 역시 아이들을 동참시킨 말꼬리가 화근이었을까 미조에서 노량까지 벚나무 가족 얼굴이 불덩이처럼 모두 확! 달아있다
차들이 빵!빵! 소리질러도 링 안에서 하는 싸움이라 다행이라 여긴다
나비의 꿈
그녀는 한 마리 나비 같다
팔랑팔랑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해묵은 천식을 애지중지 옆구리에 끼고 사는 엄마
우화등선
애벌레의 삶
하늘을 자유롭게 비상하고픈
그녀의 숨결이 힘차게 날갯짓을 하고 있다
돌아보면 다 들숨날숨의 시간들
내가 그녀에게 꽃이었던 날들이
있기는 하였던가
봄볕이 폴짝대는 한 낮
아직도 나를 꽃이라고 여기는
엄마의 눈빛은 그대로인데
개나리 따라 웃기
김현근
잎보다 먼저 웃는 꽃
개나리
내 마음의 노른자를 툭 툭 치는
봄날
나는 그대에게 묻는다
평생 한자리에 구들장처럼 눌러있는 것이
뭐가 좋다고
하하하 웃으면서 피냐고
씨를 맺지 못할 줄 뻔히 알면서도
먼저 씨익 웃고 수작을 거는
그대 따라 걷는 출근길
일단 입언덕이 비뚤어질 정도로 나도 웃어본다
하하하 웃을 일이 많지 않은 한세상
봄보다 먼저 웃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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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그대 외4편
김영순
장독대
항아리 밑
겨울흙
햇살 한자락 훔쳐
꿈을 피워 올린다
두세두세*
민들레 여린 잎새
다냥한*
봄날
* 두세두세:
`두런두런'과 비슷한 말로 여럿이 모여 작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 소리
* 다냥한 : 햇볕이 잘 들어 밝고 따뜻한 모습
저물녘이면 그리워지는 것들
'얘들아 밥 먹어라'
쏜살같이 달려오는 소리
엄마 치맛자락 따라 펄럭이던 밥 냄새
굴뚝 연기 쫒아가다 보면 어느새 별 나라
뚜벅뚜벅 어둠의 발자국 소리 덮고
산길 들길 따라 하루를 접는 수많은 소리 소리들
윙윙대던 꿀벌, 꿀 같은 시간들 사라져버린 저물녘
호박꽃잎 허공을 말아 쥐는 소리만
곤드레밥을 먹으며
곰취도 아니고 참취도 아닌것이
사내의 나물바구니에선 몸을 사리던
솜털 보송보송 잎은 까실까실
가시나물이라고도 불리는 고것이
혀에 닿으면 부드럽기로는 참나물 이상이렸다
사춘기 계집애 같은 나물, 곤드레나물밥
깊은 산속이나 세상숲에서
눈깜짝할 사이 세어버려 저 뒷전으로 밀려나는
그 나물
또 다른 봄이 목에 걸려 안 넘어간다
산나물 뜯고 내려오는 길
막걸리 한 잔 들이키면
나물들이 먼저 곤드레만드레 취하고 골짝물이 흥얼거리던
소리들이 곤드레밥 속에서 들린다
계절보다 앞서 따가와진 햇살도 깊이 잠든
이 봄 밤에
강물
물은 깊을수록 고요하다지만
강물이 자주 소리내어 흐르는 건
돌을 안고 재우는 물의 노래, 자장가 소리이다
깊고도 고요한
유명산을 타다
감투바위 곰 발자국은 보지못했지만
곰 같은 산의 울음을 들었다
늦가을 유명산
이름만큼이나 감당할 수 없었던 그 무엇이 있었을까
과속하던 바람의 바퀴자국이 나무마다 골마다 깊게 패여있었다
검붉은 낙엽위로 눈은 이별처럼 쌓이고
선어치고개, 그 고개에 앉아 보니
눈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산이 뜨거워 데인 제 몸 구석구석을 식히려 끌어다 덮는 것이었다
정상도 못 오르고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길
물은 골짝을 감싸안으며 제 안으로 흐르고
붕대를 감은 산허리엔 보슬비가 살포시 내리고 있었다
강원 횡성 출생
2003년 시와시학 등단
한국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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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자 아침 형이다 외6편
김정숙
아직은 이른 아침
하이힐 발목이 화면 속에 순이를 닮았다
바람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깨에 매달린 줄무늬 가방도 안절부절
아침상을 치우고
번개같이 그린 아침 화장은 분명 누군가의 엄마인 듯
플라타나스 가로수에 매달린 찬 공기며
질주하는 버스들도 붕-붕 부추겨 준다
그래 그래
한 치의 늦음도 허용치 않던
나를 깨우시던 어머니의 자명종 소리를 가슴에 품었는지
똑똑 구두소리에서 종소리가 쏟아지는 저 여자
그대 몸에서 등 푸른 바다가 보인다
풍덩 뛰어 들고 싶은 내 몫에 대하여
매양 허공을 휘저어도
어느 바다기슭에 등불처럼 걸려있는 절정을 향하고 있기 때문
오늘아침 회사 기록부에는
깨알 같은 노란 햇살이 섬섬 바다를 향하여 피어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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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꽃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 중
가장 공평한 것이 시간이라 하였던가-
손등에도 꽃이 피는가
시간이 게워낸 쉼표꽃
가장 헐벗은 순간을 입고
몸의 허공을 떠돌다
고향집 바자울 그늘에 피곤을 풀어놓은 듯
귀소 하는 저승꽃 몇 개
어느 돌아선 대궁을 깨워동행을 했을가
문득 멈춰버린 하늘아래 깊은 침묵을 이고
진실로 침묵하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그의 모국어를 해독하기 어려운데
한바다에 잠겨있는 섬도 아닌 것이
늦가을이 남겨놓은 발자국도 아닌 것이
천만 년 전 누군가 흘려놓은 불치의 울음소리가
누가 몰래 다녀가신 것인가
유리창엔 하루 종일 바람이 와서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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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의 고개를 넘어 선지도 오래
사월 바다, 파도의 몸짓에서 오늘은 내 숨결의 리듬을 느꼈지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춤에서 내 인식의 무지를 깨닫고 우우-허물기, 끝없이
쌓기를 또한 그에게 닿기까지 무수한 발자국은 얼마나 오래도록 창
밖에 세워 놓았는가를 밤이 기울도록 노트 빡빡한 이야기들을
내 방에 날마다 부려놓고 다시 싣고 가는 기차가 있었지 날마다 낡아가
면서 작아져 가면서 어느 날 몽당이란 이름은 서녘 종착 역으로 내려질
시간의 너와 나를 싣고 다니는 기차여 스무살적 당신의 손아귀에서 붉은
능금을 따 담던 그 하나 하나를 끓어 모아 다시 새로운 그 녀로 태어나기
펌프질 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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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파리
창문 철사 망에
불안전한 자세의
파리한 저 구도자
면벽 몇 백 년 만에 돌아온 것인가
또 다른 생에 이르기 위하여
손발이 모자라지라
뜨거운 저 염원
천 수 천만 인들 깊다하리
절정의 대궁을 꺾어 면류관을 지으면
작은 듯 큰 눈망울에
새파란 하늘 한 잎 내려와 머물러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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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 성소聖所
다만 공기의 내력이 내통하는 곳
엄니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진 곳이기도 한
이 곳 다용도실은 그녀의 성소
삼류 멜로물이거나 위대한 서사의 깊은 골짜기에서도
담을 기어 올라가는 줄 장미 붉게 붉게 피었다
사랑했던 자리마다 가시가 돋아나
뽑아도 뽑아내어도
남아 있는 절망을 질책하기에 좋은 방
그렁그렁 그녀의 목소리를 벗는 데로 다 껴입고
등을 다독여 주는 방
조금은 가뿐해진 등줄기에서“초롱”소리가 난다
속담에 소에게 한 말은 세지 않아도
엄니께 한 말은 센다는데
소보다 더 질긴 이 방의 입
그 녀를 이끌고 순한 짐승이 되어주는
하루의 등에 두 손을 합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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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예식장
국화꽃 진열된
정갈한 과일을 앞에 놓고
그는 웃고 있습니다
지상 가득히 썰물이 멀어져가고
암탉이 알을 품 듯
그 일생의 쓸쓸한 한 소절이 부표처럼 떠있는
꽃처럼 붉은 울음을 토하는
저 딸아이 못 견디게 흔들리는 몸짓에
이단 삼단 꽃그늘이 바람 없이도 흔들립니다
문득 액자 속에 주인공이 된 내가
두터운 안경 속에 흐릿하게 보입니다
내 생에 상 한 번도 받은 적도
꽃 속에 쌓여
꽃처럼 붉어 본 적도 없어
한 없이 오래 오래 죽고 싶은 날
모든 끝에 시작의 이음마디가 있다는
그대 새로운 출발 앞
떠나는 낯 선 길에 등불을 당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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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그리고....
-먼저 가버린 친구
알갱이가 토해놓은 뜨거운 비명이
문득 메아리로 솟구친다
한 고개 넘으면 또한 등성이
달고 씁쓰레한 맛이 꼭 인생의 맛이라던 너는
끝내 상심한 햇빛을 벗어버리고
모두를 떠나
은하의 천계로 가버린
너는 먹어 잔속에 빙빙-둥근 결로 남은
향 것 한 커피 한 잔
산소 호흡기처럼 가볍게 뽑혀버린
무심히 정지 된 너의 풍경이
아직도 벽에 걸린 정물화 같은데
제가 일으킨 소용돌이에 휘말린
무게도 없는 무개의 액체가 지금은
죄다 헐벗은 겨울나무 이야기
종양 같은 기억 하나가
언제까지 멈추지 않을 듯
빙빙- 떠나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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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문예한국 신인 등단
경남 문인 협회
아도 문학회 회원
참글문학 동인
시집- 개 옻나무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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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바보처럼 외 6편
박연규
살다보니 바람이
가슴에 못질 하는 날 있더군
너무 아파 그만
세상만사 몽땅
던져버리고 싶었어
그러나 차마 던지지 못했어
태풍 속에서도
꽃 피고 열매 달리고
소낙비의 매질 속에서도 새들은
알을 품고 있는 것을 보았거든
차라리 맨 몸
민들레 홀씨처럼 그냥 바람에 실려
바람소리 들으며
바람의 향기를 먹고 살다가
가벼이 누워 잠드는
그렇게 바보처럼 그냥 저냥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들녘의 누렁 벼가 고개 숙여
바람에 흔들리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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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그림자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물속을 들여다본다
물속에서 내가 흔들리고 있다
일그러지고 있다
일렁거려야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들어갔으니
흔들흔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라
갈대가 제 몸 흔들며 살아가듯
바람도 나무도 돌멩이도
그대도 나도 멈춰 서면, 어둠
어둠은 빛을 삼켜버리고
우리 모두는 칠흑 속에 묻혀버리겠지만
아직은 이승의 저녁답
싱싱한 노을빛 온 세상에 일렁이니
나, 그대 손잡고
강 건너 갈대밭 사이
오솔길 하나 만들러 가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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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안개 자욱해 더욱 밤송아리 같은 앞산
한 폭의 그림
저 뿌연 의혹 속에서는 지금 한창
억새꽃과 콩새 다람쥐와 도토리 들꽃과 벌 나비들이
황홀한 사랑의 축제를 펼치고 있을 것이다.
한평생 뻔한 모습만 부둥켜안고 살아왔던
그대와 나의 이 두툼한 거리를
진주 빛 얼비친 옷으로 갈아입고
저 산속에서 벨리댄스라도 추어대면
저 숲속의 생명들 황홀한 가슴 함께 부여안을까
눈부실라
아침 햇살 들면 곧 뻥 뚫려버릴 앞산 허리
우뚝하니 서 있는
한그루의 늙은 소나무 사이로 백로 한 쌍 날아든다
보일 듯 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아
꿈같은, 더욱 환상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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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이 똥땡이다
한 여름 뜨거운 햇살 속에
비지땀으로 온 몸을
씻다가 훔치다가
에 헤라! 구멍가게 앞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냉 막걸리나 퍼부어보자
남자의 오장육보에서는
꼬르륵 꼬르륵 얼큰한 바람이 일고
비틀 비틀 지친 분노는
살 속 뼛속을 돌고 도는데
덧씌운 금이빨 사이사이
허허! 헛바람만 새어 나온다나요
그래, ‘반나절 땡이다’
갈지자로 누어 드렁드렁 코를 골았던가
짓궂은 뙤약볕이
나뭇잎 새로 달려와 눈을
콕콕 쑤셔대는데
가지에 걸쳐 앉아 졸고 있던 참새군
너나 내나 똑 같은 놈이라고
물똥을 찍찍 갈겨댄다나요
‘이놈의 세상 똥땡이나 돼버려라’
뉘엿뉘엿 허리 굽은 늙은 해가
서산마루 힘겹게 떨어지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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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들의 반란
한 여름 보도블록 틈새로
주렁주렁 제 새끼 무겁게 매달고 있다
괭이밥 바랭이 강아지풀, 풀, 풀들
흙먼지 흠뻑 뒤집어 쓴 채
꽁꽁 한 여름 폭염을 뿌리로 동여매고
기어코 끝을 볼 작정이다
오토바이 바퀴에 열매꼭지 문질러지고
구둣발에 동강나고 자동차
매연에 콧구멍을 틀어막고서도 끝까지
새끼들 업고 지고
힘줘 보도블록 밀쳐내고 있는
저 연약한 깡다구들
세상의 부모들이 노랗게 멍들어가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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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적 산책을 하며
무심코 밟으며 지나쳤던 낙엽 푸르렀던 한 시절 빛과 물과 이산화탄소로 포도당 만들어 제 몸 불리고 꽃 피우고 씨앗 맺고 동물들 부양하고 낙엽으로 땅에 내려 또 미생들 부양하며 부서지고 망가져 새 생명의 밑거름으로 다시 살아나는 이 생태적 순환 원리를 누가 모른다 하겠는가 세상에 태어난 자 개구리밥도 물푸레나무도 너도밤나무도 실지렁이도 굼벵이도 사자도 독수리도 너도 나도 함께 고리지어 가는 이 단순한 원리를
문명의 손톱에서 나온 찌든 땟물이 우주를 먹칠하고 빙하가 녹아 땅, 땅, 땅이 수중 침몰한다 해도 썩어 뭉그러지거나 끊어지는 일 없을 오묘한 생명 순환의 길 누가 있어 끊고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길 가 독 묻은 콩잎 갉아 먹고 푸른 물 토하며 무릎 꿇는 메뚜기, 등 굽어 눈을 감고 더듬더듬 헤엄치며 떠오르는 물고기들, 뻘밭을 붙들고 퍼덕이며 울어 울어 목 쇤 새들, 환경적 자가 중독증에 걸려 심장박동이 멈춰버린 인간들의 아픔 모두가 푸른 잎의 손길로 다듬어진 생명의 끈을 붙잡고 한 지붕 아래 같은 땅을 밟고 같은 물을 마시고 같은 숨을 쉬며 살다 당한 이 억울함을 누구에게 호소해야 할까
가볍게 세월을 이고 가는 낙엽 한 생을 밟으며 세포 속 깊숙이 주파수를 던져본다 어느 누가 거짓을 외어 아픔의 씨앗을 우리 안에 살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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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장수 굿판에서
요천장터 엿장수 굿판 벌어지던 날
자주색 립스틱 짙게 바르고 콧등에 골무 끼우고 가슴에 조롱박 달고 금박이치마폭 훌러덩 걷어붙인 여장의 남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랫가락 늘어진다
바짓가랑이 걷어붙인 남장의 여자, 엿 바구니 둘러메고 구경꾼들 사이사이 비집고 다니며 ‘호박엿 강냉이엿 고구마엿 몽땅 한바가지 삼천 냥이여’ 외쳐대는데 농주 한잔 거나하게 걸친 구릿빛 용안에 밀짚모자 둘러 쓴 할배 한 분
엿 한 봉다리 허리춤에 매달고 한 동강이 입안에 쑥 집어넣고 눈치코치 아랑곳없이 은근슬쩍 무대 속 끼어들어 한바탕 혼을 빼시더니 엿가락 늘어지듯 흐늘흐늘 갈지자걸음으로 굿판을 빠져나오시다
‘짜가 짜가! 계집이면 어떠리 사낸들 어떠리 삿대질에 멱살 잡고 종아리 걷어차다 뒷북치고 ‘짜식 짜식’ 만만세 불러대는 번쩍번쩍 금뺏지굿판 보담은야 짜릿짜릿 엿장수 굿판이 좋응기여, 참 좋은 거! 달짝지근한 거 이렁거이 사람 사는 맛이제’
힘들어도 덩기덕 덩기덕 으스러져도 쿵더쿵 쿵더쿵 허리춤 엿봉다리도 얼시구 절시구 곤드레만드레라 불그뎅뎅 해님도 서산마루 걸터앉아 빙그레 웃으신다
성명 ; 박 연 규
약력 ; 2005 문예시대 등단
한국시인협회 회원
전주시 문인협회 회원
전주시 카토릭문인회 회원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시화집 아름다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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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채련採蓮 외5편
박일규
불국토를 촉촉하게 적시는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얼마큼인가를 알고 싶거든
연 밭에 가서 물어보라
시방세계十方世界 그윽이 젖어드는 비를
연잎들이 일어서서 되질하고 있다
손 모아 받은 빗물이 무거워지면
곡진하게 허리 굽혀 비워내고 있다
태초가 열리고
첫 빗방울부터 아마 그랬으리니
수다한 생명들 길러온
바다가 몇 됫박인지 알고 있으리라
연잎은
연못물을 무심히 강으로 흘려보내면서
물어도 아무 말하지 않을 것인데
취향정 피리소리는 물안개로 피어오르고
비에 씻긴 햇살 아래,
젖은 꽃대 꺾어 든 그대 손끝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도 느꺼웁다 웃음 짓는
저 꽃!
이것이 바로 그 대답이리라
*덕진채련 : 전주 덕진연못에서 연꽃 한 송이를 꺾어 들고 있는 모습을 말하며 예로부터 전주 팔경의 하나로 일컬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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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먼 별빛과
먼 강의 물결이
밤새 공모하여 맺은
정을
바람이
풀잎 끝에 매달아 놓고
그 무게를
달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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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낭콩
딸그락 딸그락
봄비에 씻긴 그릇 부딪는 소리가 나네요
여보! 여보! 주방에서 달려 나오는
아내의 목소리에도 봄이 호들갑스럽네요
긴 겨울동안엔
며칠이 되어도 고루 불지 않더니
어제 저녁 늦게야 물에 담가 둔 콩이
하룻밤 새 다 불었다고!
새봄!
새봄이라서 그렇다나요!
아, 강낭콩 밥을 먹으면
뱃속에서 노오란 싹이 돋겠지요!
눈에선 푸르디푸른 강낭콩꽃이 피어나고
콧노래도 흥얼흥얼 장단을 맞추겠지요!
창밖에는 밤새도록 내린 실비에
마당귀 스치로폴 상자에 담긴 흙도
시퍼런 생기를 얻어 나를 노려보고 있는데
아, 시절을 알아차리고서
싹트려고 몸 부풀린 강낭콩을
밥에 두어 먹긴 먹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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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소폭포
실상용추*에 일렁이는 새 소리와
피는 꽃잎
지는 꽃잎 다 받아 안고 궁굴리는
너의 가슴은
꿈꾸는 옥빛 하늘 속
뭉게구름 그늘에서 젖고 있는 낙엽들마다
돋아나는 새잎마다 울울한 슬픔으로
뒤척이며 곤두박질친다
패이고 패인 네 만년의 상처가 향기로운
이승의 언덕에서
도도히 부서지는 물보라와 더불어
나는 한 판 판소리로 무너져도 좋으리!
그러나, 죽어
피안으로 발길을 옮기기엔
이 승경에 당도한 계절이 또 너무도 고와라
득음의 바다 또한 구만리 멀기만 하고
*직소폭포 아래 소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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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고목도 꽃이 핀다
아직은 연초록 느티나무가 도전장을 낸다
초등 2학년 늦둥이가
“아빠, 팔씨름 한번 해요”
고목의 가슴 저 켠
뒤울에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오른다
나를 감히 기진케 하는 어린 아들놈
짐짓,
힘이 달리는 척 기우는 팔에
놈의 앙증맞은 오른손의 완력이 더해진다
내게도 숱한 뭇 미물들 품어 살리던
아름다운 한 때가 있었단다
아무렴 너는 부디 이 못난 애비보다
네 품에 백 배 천 배
더 많은 생명들 쉬어가게 하거라
내일을 향해 뻗치는 새 순의 기운에
제가 차지하고 있던 허공을 내어주려
‘쩌엉!’ 또 하나 늙은 가지가 떨어진다 그래
너의 귀여움 아롱지듯
나의 저승에도 그늘이 깊어 시원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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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필 무렵
물총새 서로 부리 부비다가
짝을 짓는다
물레방아도 삭아 스러진 지 오랜 냇가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조차 잦아드는 밭둑에서
꽃 대궁 붉은 속삭임 없는 만남에도
맵고 짠 눈물의 강은 흐를런지
성서방네 처녀의 그리움도
아프도록 흐뭇한 기다림의 날들도
아둑시니 허생원 눈에 든
동이 왼손잽이도
‘노레보’ ‘다이안느’의 독기에 싸여
착상할 수 없으리라
무참한 큐렛 앞에서
운명보다 세찬 흡인기 앞에서
허무하게 다리 벌리는
오늘날의 쓸쓸한 자궁안에선
아기의 머루 눈이 태어날 수 없으리라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꽃 피던 자리
그 둔덕마다 검은 모텔의 가지마다
네온꽃만 피고진다
사랑은 죽고 회임을 거부하는
헛 방아질만 횡행하는 시대에!
*부분적으로 이효석을 인용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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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전북 부안 출생
동진초등학교
부안중학교
아도문학회 회원
버팀목문학회 회원
2006 시와시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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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러지다 외9편
송연우
고른한낮
나무 밑에서 잡초를 뽑는데
훨훨 새가 날아 나무 품에 든다
잎새가 나직이 흔들며 반기니
끼리끼리 한올지다
나뭇가지에서 나무 밑으로
재잘재잘 안부 묻는 소리
뿌리를 안은 흙이 고마운지
주둥이로 콕콕 쪼다가
막청 소리를 낸다
나는 한편의 오페라를 보듯 옴짝달싹 않고
그들을 보고 있다 듣고 있다
나무는 귀를 열고 한들한들 어깨춤을 춘다
언제나 내 영혼을 낯꽃 피우게 하는 나무와 새여
너희들이
세상 시름 한 삽 씩 들어낸다
별, 별
여름밤 별빛 아래 하얀,
푸른 백합도 피고지고
꽃술에 걸려 흔들리는
꽃송이 집어 입으로 불면
죽음 같은 고요를 흔드는
푸르잇* 병사가 부는 나팔소리 들리네
밤은 더욱 주름살지고
잠 못 이루는 강물의 시간이 흘러가네
깊고 깊은 하늘엔
숱한 별의 새싹이 돋아나고
할퀴고 짓밟힌 슬픔은
그대의 푸른 음률로
가슴을 두드릴 때
내 하늘 계곡에도 소리내어 은하수 흐르네
이제사
나만의 미래를 세우고
갈근거리는 내 영혼
붙박이별 밝게 반짝이니
이 밤 나는 하늘의 은혜 잊지못하네
.....................................................................
*영화<지상에서 영원으로>나오는trumpet을 부는 男優주인공
바위 부처
바위 속 사천왕이 눈을 부라리며 나를 훑어본다
산은 울긋불긋 바쁘게 옷을 갈아입는데
부처님은 단벌이시다
전란 때 빨치산의 꽃무덤인
이 곳, 젊은 석공은 목욕재계하고
십여 년 동안 햇살 한오라기 만져보지 못한 동굴에서
망치와 정으로 뼈를 깍은 참수행
쨍쨍한 망치소리도 목탁소리로 젖어들고
피멍 든 손길이 연꽃잎 피워냈던가
여덟 보살 십대제자 십장생이 어울린 극락세계 햇무리 돋아
비로자나불 선재동자
우러러 보며 수얼거리는 마음을 껴안고 또 껴안는다
어머니가 형제가 이웃들이
지문이 닿도록 빌고 빈 기도가
하루같이 산굽이를 메운 탓일까
산등을 잽싸게 오르내리는 청설모 다람쥐
묵묵하게 거센 세월 맞부딪친 그 흔적마다
전해주는 새소리
영원을 내비치는 푸르른 기운 일어
볼수록 가경 속에 나를 가둔다
능수매화
인고의 시간에서 새어나오는
이 고요의 황홀
펼치는 대담한 춤 한자락
훨훨 날아 오르는
흰나비 날개짓이 바람 속에 아름답네
하얀 꽃 송이송이
치맛자락 가볍게 쥐고
딛고 선 땅에게 빚을 진 듯
다소곳하게 고개 숙이네
마주 선 가슴에 은은한 향기로 옮겨 앉아
잠시 추억에 겨웠던가
어머니의 바다
한번도 바다를 안아 본 일이 없지만
파도의 하얀 메밀꽃 웃음을 만진적은 있다
한없이 가깝고
한없이 넓어
첩첩 산중같은
종일 일에 지쳐 온몸이 풀어져도
자고나면 새 기운으로
어머니는 바닷물 같이
말이 깊었고
종일 돌리는 재봉틀이 쉬는 사이 사이
열 식구의 수발을 혼자 하신 어머니
몸은 늘 출렁이는 파도이셨다
철석!철석!
오빠의 전사도 바위같은 가난도 넘어
약하게 마음 먹으면 영원히 갈아앉는다던 어머니
비취빛 야청빛 산홋빛
꽃 보다 고운 어머니 한 생의 색깔이셨다
.
오월, 꽃비
아카시의 겨드랑이 비비며
들어가 본 꽃마음 속
시달리고 찢긴 가지에
시린 세월이 가시로 돋아있네
잎새 비집고 내려앉은
봄 햇살
그리움의 송아리로
오소소 날아 앉은 하얀 나비떼
오월 꽃비 하얗게 내리는 이 한 순간
마디마디 부셔져 내리는
가슴 속 사슬 끊어지는 소리네
호젖한 벼룻길 언덕에
이렇게 향기로운 눈이 내리고
영혼의 꽃불을
올해도 한 생을 환하게 밝혀주네
저녁 별처럼
해거름 바람이 날마다 올라가는
대나무 백목련 정수리에
손을 얹고 다시 마음을 얹어본다
가지 가운데
반짝이는 별 하나 나래펴고
오늘도 나를 향해 오고 있었지
타는 눈빛으로
어둠을 뒤적이며 바람에 엎혀
내 가슴을 졸이고 졸인
가깝고도 먼
내 사랑이었던가
빛의 비수로
침묵으로 담을 쌓아 온
안으로 안으로만 빛나는
그대
강물에 시가 흐르고
푸른 바람의 비늘이 반짝이는
청량한 강가를 거닌다
산능선 넘어 오는
들큰한 산꿩 울음
저릿저릿 가슴을 파고드는데
깊은 거울강 바라보니
쪽빛 거울 속에 하늘이 더욱 깊어
한 마리 백조가
물 위에서 깃털을 다듬 듯
손을 씻고 얼굴을 닦아도
슬프고 긴 시처럼
눈에 든 내 먹구름은 날아가지 않고
강은 울먹이며 별 산 하늘 그리며 흘러간다
부석사에서
이 가을
선묘아씨의 넋이 깔린 비탈 길
천천히 은행잎 밟으며 생각하네
당신이 겪은 슬픈 이별
끝내 병이 되어 가을을 앓고 있네
일주문 천왕문 지나
단청 없는 무량수전
천년 깊은 뿌리의 세월이 무겁기만 하네
묻힌 듯 열린 말씀 받들고 있는 배흘림 기둥
발뒷굽을 들고 나는 고요를 비켜가네
단풍처럼 타는 기원
아비타불 빛에 취하고
안개구름 위에 누운 겹겹의 산 능선
품어 안은 가람의 자리
떠나야할 허허로움 한줌으로
나 오늘 그대에게 기대고 싶네
저 물억새풀
밀고 당기는 물결을 지키 듯
주남저수지 언덕에
물억새풀 진을 치고있다
그 발밑 물의 자궁 속에
물버들 참붕어 잉어 피라미 송사리 가물치 고동 품어 안고 있는데
때때로 속살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물억새풀 그늘을 두텁게 드리우고
하늘이 주는 가난을
조금도 내색 않는다
고요히 갈아앉힌
진진초록 속
산드라니 사로잡는 긴 잎새
산란의 방해자 소음이며 가뭄 단숨에 베어내겠다고
으름장 치며 서서
풀잎 칼날을 시피렇게 뽑아든다
* 본명 송미혜
* 경남 진해 출생
* <한맥문학>으로 등단
* 한국문인협회 회원
* 동원문학회원
* 아도문학회 회원
* 시집으로는 <비단향나무와 새와 시><여뀌의 나들이>가 있다
윤종분
잘 익은 토마토 몇 개 덥석 입으로 끌어다 넣는다
누구슈 아버지 딸이지유 어디서 왔수 조암이유 얼마나 사셨수 20년이유 어이구 그럼 돈 많이 벌었껐구먼 나도 거기서 살다왔는데 고상 숱허게 혔어 열아홉에 장가가 자식 낳고 논사고 밭사고 염전사고 지금은 하나두 읍서 누구슈 아버지 막내 딸이유 나이가 몇이유 쉰이유 어이구 그럼 큰 딸은 많이 늙었겄네
다 비워도 비워도 끝까지 잡고 있는 빨대같은 줄기
턱밭이에 남아있는 흔적이 달다
웅웅 바람불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인가
몸 속 붉은 옹이들 삭은 정신 줄에 내건
농익은 아버지의 얼굴에
붉은 강물이 흐른다
분꽃
어느 정(精) 많은 여자의 웃음인가
못다 준 사랑 남아있어
육신은 흙 되어 뿌리를 살찌우고
영영 시들지 않고 향기롭게 내게 오시는가
뜬구름 잡는 딸에게 꼭 다문 입 여시며
저녁쌀 씻으라고,
허공에 매달린 어깨 토닥이시는가
뜬눈으로 영그는 내 어머니
가슴속 빗길로 자박자박 걸어와
까만 젖꼭지 땅에 물리시는 이유
분리수거
501호 신혼부부 이혼한다는 소문이
재활용 더미사이에 쌓여있다
화닥화닥 타다 버려지는 것들도
분리수거중이다
도수 높은 어두움을 마신 늦가을 산
이미 물든 것들과 물들지 않은 것들의
경계가 확연하다
물들지 않은 채 떨어진 것들은
잘 타지 않는다
눈이 맵다
추락
一米七斤이라고
늘 말씀하시던 아버지 입에서 우주 한 알
힘없이 툭 떨어진다
칠만근의 무게로 내려앉는
자식들 가슴
폐경
달거리 빨래 토닥토닥 말리시는
어머니 옆에서 이유없이 발끈 토라지던
먹머루빛 눈망울
뒷뜰 배롱나무 영문도 모른체
톡톡 붉은 꽃 피워대고
그 꽃나무 힐긋힐긋 쳐다보며 몇번인가
얼굴 붉힌 일 밖에 없는데
그때 그 배롱나무
꽃자리 지우고
바람은 더이상 머물지 않는다
질그릇 꽃밭
깨진 입술이 밉다고
뒤꼍에 내놓아 낙숫물만 가득하던 질그릇
어머니 삼호제 치르고 올라오는 길
유해 모시듯 가져와
서랍속, 생전에 보내주신 꽃씨들
눈물 함께 그 가슴에 심었다
밤마다 조바심으로 잠 못 들었더니
'얘야 얘야'
아침 햇살에 저 느린 손사래
그리움 붉게 터져버렸다
어머니
망초꽃 길
윤종분
그녀 나이 열아홉 화상덩어리 미장쟁이 남편을 만나 뇌성마비 아들, 소아마비 딸 둘 애물단지 낳고 붙여진 이름이 주춧돌도 세우지 못한 년,그녀 가슴에 미장 솜씨 하나는 일품이라 두텁게 시멘트 발라 놓고 연기처럼 가버리더니 장돌뱅이 십수년 그녀의 퍽퍽한 팔자위에 큰아들 일류회사 합격 통지서 받아들고 달려오던 날 오랫만에 순대국밥집에 둘러앉아 눈물 겨운 밥 말아 먹고 나오는데 문득, 뻥 뚫린 뒤안길 같은 가슴 뚫고 그 화상이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나를 데려 가려고 모사를 꾸미는 것인지 망초꽃잎 홀로 지는 것인지
머리위로 하얗게 핀 망초꽃 서럽게 흔들리는 것을 보면
걸어가는 길이 파랗게 질린다
윤종분
경기 화성 출생
아도문학회 회원
하고픈 글벗 문확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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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 외 9편
임윤식
숨 죽이듯 잔잔히 출렁이다가
갑자기 거대한 태풍으로 다가오는 파도
넘실거리는 큰 물결 사이로
한 무리의 고래 떼들이 꿈틀거린다
아, 장엄하여라
승천의 꿈을 안고
뭍으로 뭍으로 기어오르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간절한 염원이여
영남알프스 가지산에 오르면
나는 온종일 고래의 등을 타고 넘으면서
고래의 숨소리를 듣고
고래의 기도를 읽으며
나도 고래가 되는 꿈을 꾼다
*가지산(1,240m)은 경남 밀양시,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걸쳐 있는 100대 명산중 하나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낙동정맥이 동해안을 끼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마지막 여력을 모아 빚어낸 산군을 일컬어 영남알프스라고 하며, 영남알프스에 속하는 1,000m 이상의 8개 산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월악산 영봉
임윤식
거추장스러운 옷도 벗어버려야 하고
화장도 다 지워야 한다
본래의 알몸 그대로만 보여야 한다
월악 영봉 오르는 길은
나신裸身의 성지聖地를 향해 가는 수행길이다
하나 하나 허물 벗어 던지고
몸속 깊이 숨어있던 찌꺼기까지 모두 쏟아낸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드디어 드러내는 웅장한 암봉
조물주가 처음 빚은 모습 그대로
발가벗은 채 우뚝 서 있다
어느 성자聖者 한분
지금 참선 중이다
*월악산은 충청북도 충주시·제천시·단양군과 경상북도 문경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주봉인 영봉(靈峰)의 높이는 1,094m이다. 달이 뜨면 영봉에 걸린다 하여 '월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상의 영봉은 암벽 높이만도 150m나 되며,하늘 위에 거대한 암봉이 떠 있는 모습이다. 이 영봉을 중심으로 깎아지른 듯한 산줄기가 길게 뻗어 있다. 청송(靑松)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바위능선을 타고 영봉에 오르면 충주호의 잔잔한 물결과 산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두륜산, 당신은
임윤식
땅끝 해남에 누워있는
당신을 찾아가는 길은 참 먼길이었습니다
내 마음 어딘가에서 보일 듯 말 듯
당신은 그동안 그렇게
내 그리움의 끝자락에 있었습니다
오늘 처음 본 당신
아, 당신은 한마디로 거친 야성이었습니다
언젠가 런던 하이드 파크 뒷골목에서
검은 탱크처럼 다가와 말을 걸던
그 흑인여인이었습니다
발 아래에는 수많은 연꽃들이 출렁이고 있었어요
난 억겁의 바램으로 솟아오른
쓰나미파도를 타고 있었지요
감히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당신은 진정
황홀한 유혹이었습니다
*두륜산(703m)은 거대한 암릉과 남해 조망이 장관인 해남의 명산이다. 대둔사(大芚寺) 이름을 따서 대둔산, 또는 현재의 대흥사(大興寺)를 따서 대흥산(大興山)이라고도 한다. 두륜산에서 대둔산과 주봉(胄峰:530 m)을 연결하는 능선과 대흥사로 들어가는 장춘동계곡(長春洞溪谷)이 이 도립공원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월출산
임윤식
남녘 태풍의 바다에는
갑자기 하늘로 치솟았다가
수직낙하하여 계곡으로 침몰하는
거대한 에어 쇼가 한창이다
휘몰아치는 파도능선을 따라
무리의 고래떼가 등을 세우고
웅성거리는 봉우리 봉우리들
물보라가 허공을 찌른다
월출산 천황봉에 오르면
발 아래로 축제의 행렬이 아득하고
무섭게 출렁이던 함성 어느새 잠잠하다
태풍의 눈이 잠시 감기는 순간이다
*월출산(月出山)은 전라남도 영암군과 강진군 사이에 산이다. 1973년 1월 29일에 도립공원으로, 1988년 6월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황봉(809m)이고 구정봉, 사자봉, 도갑봉, 주거봉 등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마치 수석전시장 같이 아름답다.
산길
임윤식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깊은 산속
홀로 발걸음을 세며 나 만의 길을 열어간다
바람소리 풀벌레소리가 새삼 반갑다
길바닥에 박혀있는 돌뿌리
흔하디 흔한 나무, 풀잎 하나도 다시 보인다
잣나무 고욤나무 노린재나무 물푸레나무 신갈나무...
그 많은 나무 나무들이
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혼자인듯 혼자가 아닌,
나도 그속에 서니 한그루 나무다
이름모를 새 한마리 갑자기
하늘 속으로 몸을 던진다
텀벙!
누가 버리고 간 외로움인가
하얗게 여윈 길이 잡풀 속으로 몸을 숨긴다
사량도 지리산
임윤식
물위에 떠 있는 꽃 봉오리
봉긋히 앞섶을 여민 모습이 황홀하다
사량도 지리산 옥녀봉 오르는 길
굽이굽이 몇 굽이던가
바위능선 타고 오르내리는 한걸음 한 걸음이
가슴 조이는 설렘이다
비취빛 바다내음에 취하고
장엄한 암릉의 거친 유혹에 흔들린다
이래 저래 만취한 나는 신들린 무당巫堂
칼날위를 춤추며 꿈속인듯 걸어간다
*사량도 지리산은 경남 통영시 사량도 윗섬의 등뼈와 같은 산이며, 등산코스 대부분이 칼날같은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타산 무릉계곡
임윤식
세상살이 어렵고 삭막하다 하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깊은 산 푸른 숲
감로수가 흐르는 계곡
모든 시름 잊고 찌든 마음 씻어낼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있지요
반석 위에 누워 잠시 눈을 감으면
수천길 바위 절벽 위에서 학이 날개짓하는 모습이 보이지요
하얀 물줄기 쏟아지는 폭포 아래 용소에는
선녀들의 옷벗는 소리 재잘거리는 소리도 들리고요
아, 하늘나라도 보이네요
끝이 보이지않는 수직계단을 기도하듯 한참 오르면
또 다른 별천지 천상의 문이 열려 있지요
신선들이 바위에 앉아 시를 읊고
천년 거북이가 하늘을 날지요
그래서 오늘도 난
꿈길을 따라 어디론가 떠나지요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이런 세상이
아직은 남아있기 때문이겠지요
*무릉계곡 : 강원도 두타산, 청옥산 자락에 있는 깊은 계곡. 중국 고사에 나오는 '무릉도원'처럼 아름답다 하여 '무릉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1977년 국민관광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가지論
임윤식
소귀고개 숲길을 걸으며 초봄
나무들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앙상한 가지 끝에서 꿈틀대는 산고産苦
곧 새 싹을 터트리겠다
나무의 가지
그 끝은 언제나 생명의 시작이다
비록 가늘고 힘도 없지만
가지없이 혼자 살 수 있는 줄기는 없다
바위를 타 본 사람은 안다
손발끝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가장자리에 모아지는 힘
그것은 온몸을 끌어올리는 지렛대다
남자들도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면 좋겠다
*소귀고개는 일명 우이령길이라고도 하며, 1968년 1.21사태(김신조 사건) 이후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41년만인 2009년 7월 일반인에게 재개방되었다.
공룡능선
임윤식
꿈이었다 나는
구름속을 오르고 있었다
바다위에는 기기묘묘한 봉우리들이 출렁이고
아직 피지못한 꽃들이 웅장한 암릉으로 이어져
하늘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건 승천을 위한 억겁의 몸부림,
처절한 바램이 칼날처럼 응고된 보석이었다
이곳은 분명 하늘나라 정원이었다
아! 샹그릴라
형형색색의 꽃밭과 신비스러운 조각바위들이 깊은 계곡을 수놓고
정상에는 거대한 바위성城이 동화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멀리 능선 넘어 신선들의 옷자락 펄럭이고
난 구름 사이 사이를 춤추며 걸어갔다
안개 걷히고 바다가 열리자
봉우리, 봉우리들이 은밀한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뒤틀린 근육 결 사이로 붉은 설렘이 낭자하고
멀리 뻗어내린 가지, 가지 마다
수많은 환희의 싹들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세상에, 이건 정원이 아니었다
난 쥬라기시대 거대한 공룡의 등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샛길도 없는 외길, 미끄러지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었다
굽이쳐 꿈틀대는 웅장한 등줄기를 타고
숨 헐떡이며 아슬아슬하게
거칠고 지루한 삶의 암릉을 넘어가고 있었다
*공룡능선은 외설악과 내설악을 남북으로 가르는 설악산의 대표적인 능선으로서, 그 생긴 모습이 공룡이 용솟음치는 것처럼 힘차고 장쾌하게 보인다하여 공룡능선이라 불린다. 공룡능선은 보통 마등령에서부터 희운각대피소 앞 무너미고개까지의 능선구간을 가리킨다. 속초시와 인제군의 경계이기도 하다.
아 ! 인수봉
임윤식
늘 바라만 보고
감히 넘보지 못했던 여인
오늘 그녀가 마음을 열고 나를 맞아주었다
난 벅찬 설렘으로 그녀의 심장을 향해
오르고 또 올랐다
그녀의 가슴은 뜨겁고 성스러웠다
꽃을 피우는 그 정상
절정의 봉우리에서
그저 신음할 뿐이었다
나른한 환희는 그렇게 왔다
햇쌀 출렁이고 바람 흐느끼는 땅끝에서
한마리 나비가 되어 춤을 추었다
하늘 아래 더 높은 곳은 없는 듯 했다
*삼각산 인수봉 인수B길 암벽등반 초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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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정부
전외숙
이 바닥에 발 담근 지 삼십 년
이 눈치 저 눈치 잔머리 굴리다가
아까운 청춘 다 퍼주고
얼쑤
용감무쌍하게 살아왔다
미친 척 착한 척 잘난 척
최선을 다했다 혼신을 다했다
이 순간이 영원하리라
잘 나가는 내 인생, 누가
태클을 걸었을까 어림없지
이판사판 해 보는 거야
고장난 기계도 수리하고
순정품은 아니더라도
부품교환도 해가며, 올인 해야지
정부미로 연명하는 주제에
주저 앉으면 끝장이거든
이골 난 그대의 정부 노릇에, 나는
지치지도 않아 게걸스럽게
혼자 먹어치울거야 몽땅
내 방식대로 세상을 굴릴거야
무장무장 욕정에 배팅하다가
나가떨어지기도 하면서
길들이는 정부(政府)와 정부(情婦)
말판 한판 잘 놀아보는 거야
말똥 예찬
온몸에 가시 칠갑한
말똥 한 무더기
저 혼자,
경계가 삼엄한데
늙은 해녀
방파제에 걸터앉아
무심히 말똥을
노오란 성게알을 발라낸다
쓸쓸한 바닷가
일광은
하얀 쌀밥에 황금알을 비벼 먹는다
똥이 고소하다고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고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겠다고
앙증맞은 앙장구밥 한 그릇
맞장구 쳐
게눈 감추듯 해치우고
저 혼자 저무는 바닷가
어둠속에서도
말똥말똥 두 눈 환히 뜨고
검푸른 바다 품어 안고
수만 마리 성게를 키울거라
만날
화력(花力)
당감동 119안전센터 앞
늙은 매화나무
앙상한 가지마다
꽃망울 자작자작 매달고
매운 추위를 건넌다
드잡이바람 한떼 몰려와
뉴타운아파트 새댁들
물색 치맛자락 거푸 들쑤시는데
어느새 목련꽃 부리 하얗게 벙글어
산 너머 감천화력발전소
해종일 전력 발전중이겠다
먼 바다 뒤척이는 소리 홀로 듣는다
홀로,라는 말 허리춤
소복소복 쌓이는 침묵의 불씨
단전(丹田)이 뜨겁다
노컷
동 틀 무렵, 붉은 하늘을 물고
일제히 날아오른다
가창 오리떼
거침없는 춤사위
하늘을 뒤덮는 가창력
수천만 날개의 힘으로
허공에다, 거대한 대륙을 구축하는구나
그들만의 땅, 자유
지축을 뒤흔드는 저
환호성
저토록 일사불란한 삶이라니
심장이 터질 듯
온 몸에 소름이 돋는데
나는,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급히
세상을 한번 닫았다, 열었다
석남사 가는 길
전외숙
가지산 가지 끝에 앉아
묵상에 잠긴 부처
내 가슴에 서린 기원
귀담아 들었을까
흙 내음 향긋한 들녘에는
또 한봄 싹트는가
새싹 틔울 채비 재촉하듯
봄 미나리가 한창이다
깊은 계곡
곧추 선 물줄기를
바람이 간지르자
폭포는 잔뜩 신명이 났네
왕대나무 솥에
오곡밥 삼계탕은
죽향(竹香)으로 끓고
매실향 권주가에
그대가 취하는가 조는 듯
부처가 취하는가
전외숙
경남 진주 출신
2002년 시와시학 등단
부산지방보훈청 총무과장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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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
이천 년 전,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달라고 간청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오라.”말씀 하시던 예수님
아버지, 며칠째 고뿔로 누워 있다
퇴근길에 잠시 들렀더니 어두컴컴한 방 안
인기척에 빼꼼 초승달 눈을 뜬다
저녁 드셨느냐는 막내아들 물음에
“글쎄다 니 엄마 잠시 장 좀 보고 온다더니 아직 안 왔구나.”
힘겹게 답을 주시고 다시 눈을 감는다
거친 숨을 내쉬며 귀먹고 노쇠한 예수님 이천 년 동안 누워계신다
개부랄꽃
지난해 가을 산에 갔다가 두 분이서 다정히 캐 안고 오신 개불알이
올여름 붉은 자줏빛 꽃을 사정했다
어머니는 불알 꽃이 피었다며 좋아하시는데
-무식하게 불알이 뭐노?
어머니와 며칠째 심사가 뒤틀려져 있는 아버지
-부랄 이지 할망구야
괜스레 트집을 잡는다
-할망구?
불알이면 우짤 건데? 이 노친네야
질세라 맞받아치는 어머니를 향해 눈을 부랄 이시며
-노친네? 너, 부랄 있나?
없으면 말을 마 이 할망구야
-하이고, 고깟 새알 갖고 불알이라고 하는겨?
남사스럽다 고마 떼 버려라
-뭐라꼬 고깟 새알? 좋다
불알인지 부랄 인지 함 따져보자
-좋다 그 잘나신 자존심 어디까지 가나 함 보자
윤경아 윤경아
어머니가 동생을 불러 세운다
-국어사전 좀 갖고 온나
불알인지 부랄 인지 내 손으로 직접 까봐야 쓰것다
-좀 전에 인터넷에서 찾아봤는데
개불알꽃이 맞던데요
-하이고 개뿔도 없는 것들이 이젠 서로 짜고 치는구먼
넌, 빠지고마
-승훈아 승훈아
다급히 찾으시는 아버지께 나는,
부랄을 흔들며 가야 할지
불알을 쥐고 가야 할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무척 난감한 일이었다
흉작
연애시절 그녀가 내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불행히도 방이 둘 이었다
그날 밤,
나는 방바닥을 맨주먹으로 내리치며
방이 둘 딸린 집에서는 절대 안 살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그녀와 결혼하고
방이 셋 딸린 집을 장만했다
십 년 동안 이 방 저 방 건너다니며
아들 하나 겨우 낳았다
슬픈 연가
어린 아들 녀석은 잠든 지 오래
아내의 부은 다리 주물러주며 티브이 속 연인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가녀린 여인의 손을 덥석 가슴에 대고 사내는 말을 한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아픈지 아니?”
마치 자신이 여 주인공인 양 감격해 하다가
뭔가 못마땅한 듯 힐끗 나를 쳐다보는 내 아내 춘숙이
그래도 명색이 시인인데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나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 되어 씻지도 않은 아내의 발바닥 콱,
내 ㅇㅇㅇ에 끌어다 대고
“너 때문에 터져 미칠 것만 같아”
오늘도 아들에게 자리 내어주고 거실바닥에 나앉은 내 신세
창밖으로 팝콘 터지듯 펑펑 하늘 가득 눈꽃이 피어오르는데
*. 아내의 심의결과 부적합 판정을 받아 ㅇㅇㅇ 으로 처리함
느티나무 아들
홍천군 동면 노천리
마을 최고 어르신 느티나무
새참 막걸리 몇 잔 얻어 마시고
그분의 품속에 잠시 웅크리고 누웠는데
5월의 햇살에 눈이 부셔 게슴츠레 눈을 떠보니
어미 소가 갓 태어난 제 새끼 태반을 먹어치우듯
수천 수만의 초록색 혀가 연실 날름날름
내 몸을 감싸고 있던 그늘을 말끔히 핥아먹는다
삼백 년 넘게 나를 품어왔던 저 느티나무
긴 잠에서 깨어난 나는 이만하면 느티나무 새끼다
저 한 그루 어머니처럼
내 발은 땅속 깊이 의지의 뿌리를 내려
어떠한 비바람이 몰아쳐도 쉽게 좌절하지 않으리라
내 이상은 늘 푸르게 우주로 뻗어
꿈을 잃은 사람들의 그늘이 되어 주리라
가을이 오면 외로운 사람들에게
내 잎은 한 장 엽서가 되어 주리라
잠이 덜 깬 듯 주저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비틀 첫 걸음을 내 딛는데
움머-
대견한 듯 제 새끼 지켜보던 어미 소의 울음 뒤로
탈탈탈
남 걱정하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밭 가는 경운기 소리
아내의 잔소리처럼 귀에 못을 박는다
춘천역에서
사람들,
신문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인간으로 어찌 이럴 수가 ---
애꿎은 신문지를 멱살 잡듯 구겨 쥔다
햇살 좋은 주말 오후 나들이 길에 둘둘 말아온 신문지
가을 햇살에 졸음 겨워 깜박 벤치에 누웠는데
오소소 돋는 한기
무심결에 펼쳐든 신문지 한 장 덮었을 뿐인데
어머니의 숨결같이 따스한 온기
지하도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누운
노숙자들의 몸을 일일이 감싸 안았을 그 따스함이
내 뼛골까지 전해 온다
남의 집 불구경하듯 뒷짐 만 지고 서 있는 사람들
자신의 핏줄을 한강으로 흘려보내야만 했던
그 어린 소녀에게
신문지 한 장 되어주지 못한 우리의 잘못은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
앉아있던 의자에 읽던 신문을 버려둔 채
각기 제 갈 길로
담배연기처럼 흩어졌다
유리가게 아가씨
그녀는 유리가게 안에서 사무 일을 보고 있지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큰 유리문 안에 온종일 앉아
깨진 유리창을 갈아 달라는 전화를 받기도 하고 영수증을 끊어 주기도 하지요
가끔 그녀는 유리를 자르거나 자른 유리의 모서리를 둥글게 갈 때가 있습니다
유리를 자르다가 처음 손가락을 베이던 날 그녀는
빨간 핏방울이 목련 꽃잎처럼 뚝 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그녀는 유리를 자르다가 또 손을 베었습니다
흑장미보다 더 진한 향기가 피어오릅니다
그녀는 유리관 안에 놓인 예쁜 인형이 아니랍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유리에 손가락을 베어도 더는 울지 않습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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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훈 ; 강원도 춘천 출생
한국동시문학회 회원
2009년 겨울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시집 <개부랄꽃>을 출간하였다.
1. 빈집1 외9편
허소미
'레디 고!'
큐사인이라도 떨어진 양
어스름 밟고
저벅저벅 둘째 아들 발 소리
울안에 들어서면
힘아리 없이 쳐져있던
에미 얼굴에 핏기가 돌아
그래도 밥심이지
급히 밥을 안치고, 텃밭으로 내달아 투두둑 풋고추 몇 개,
생대파 날비린내 두들기는 도마질소리에
자글자글 된장 뚝배기 끓여 올린 그날의 밥상
그런시절 저혼자 텅텅 비워버리고
간신히 이승을 버티고 선 반신불수 몸뚱이 한 채
저물어가는 폐경기 여자
2. 깃발을 펼쳐들고
하늘이 내려 준 인솔자의 푯대라도 들었을까
돌아보며 채근하며
오직 한 길
제 팔뚝 안에서만
움직이라고
눈초리 비끌어맨다
가장이라는 이름의 저 사내
그의 등짝 뒤에서
흘깃흘깃 곁눈질로
세상바람 겨우 쏘이며
목 뻣뻣이 힘주어 걷고 있지만
내 눈과 귀로 보고 듣고
내 혀로 세상을 맛보고도 싶다
자유로이 재겨 디딜 틈 좀 달라는
아우성은
깃발이 살아야 콩가루 집안이 되지 않는다고!
그를 중심으로 쌓은 축대 앞에서
떡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나가
자꾸 옆길로 새려는 마음
그러나 금방 바짝 따라붙어보는
오직 하나 주어진
그에게로 가는 길
3. 문득
까만 동굴 속
한밤중 아파트 마당에
눈 맞추는,
가로등빛에 온몸 적시고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
잠을 잘 자야 자란다는데
주야장창 불빛에 노출이 되면
알밤처럼 머리통 굵어진다는데
온통 야단법석
붉고 노랗게 말씀의 가을 마당에도
시푸르딩딩
철들날 없을 것 같더니
매운 회초리 겨울바람이 싸다듬이로 후려쳐버렸을까
훌러덩 벗은 몸뚱아리
겨울 한복판
오래 얼어 떨고 있다
4. 저 단풍
에두를 사이 없이
무턱대고 뛰어들었다
쾅!
찍혀버린 心火
쳇기로 얹혀있다
우글부글
빵꽃처럼 발효하여
누렇고 발갛게
피워올린
한발짝
늦은
미련 곰탱이의 뒷북
5. 뫼똥 저 둥근
산을 품고 살던 사내
복중의 태아처럼
웅얼웅얼
죽음의 씨알 굵히고 있다
한때 살 부비며 살았던 피붙이들이
비워낸 발자국
제 몸 헐어야 산보다 더 큰 산을 이룰 수 있다
하나의 엄숙한 동그라미
산이 슨 알
아직은
주검이 싱싱하여
이승을 빠져나갈 때
한가닥 옷자락 부욱
나꿔챈
별리가 서러운
마침표
저 아래가 꿈틀하다
뫼똥;‘묘’의 방언(경남, 전북).
6. 한통속으로 묶이는 소리
윙윙윙 보일러처럼 잘 돌아야 할 날에
급히 째고 꿰매어야 할 탈이 났는지
앰블런스처럼 빨간 불 번득이며
아파트와 주택 사이 가리마길로
포크레인과 인부 몇이 부려진다
생의 복판이 뚫릴 때마다 굉굉굉 굉음소리
움찔움찔 살과 귓속으로 파편처럼 튀어박히는데
두터운 화장발 같은 시멘트 포장 낮짝
유적지처럼 개복하여
은밀히 숨겨져 있던 너와 나 하나로 아우르는가
철심 동맥 시원한 뱃속처럼 바람을 쐬는가
잊을만하면 한번씩 제 속 뒤집어
따스한 살갗처럼 만져지는 한동네 사람
한동네 사람의 흙가슴으로
연줄연줄 둘러리 서는 내 하루의 뒷심
7. 허수아비는 참새를 부른다
왼 가을 들녘을 다 차지하고서도
행여 독의 곡식 축날까
놀부심보로 지키고 섰다고들 하지만
다만 새몰이의 춤사위로
짭새가 되어 참새를 쫓고 또 쫓지만
우린
지구 밖에선 살아갈 수 없는
공존의 법칙 지닌 공동운명체
내 가슴 안
이쪽 저쪽으로 옮겨 앉으며
몰아붙이는 틈새 노려 배불리거라
오늘도
슬픈 이정표처럼
저 있는 곳을 들키는
들켜 버리는
허수아비의 너무도 허술한 파수
8. 귀뚜라미
붉은 띠 동여매고
구호를 외쳐대던
매미의 볼멘 함성
소리의 껍질을 깨고 나온
애벌레의
연하디 연한 살빛 같은
목소리
사근사근
귓속에 들어와 박히는
살가운 가을
9. 눈독 들이다
지금은 저 화상
흐리멍텅 딴전 피우고 있지만
조-심해야 할 일이다
불쑥 튀어나온 통방울
저 시선이 감지하는 통제구역 안에서 바둥이다
뒷문 살짝 열고 마악 한 발 내딛으려는 덜미 잡아채어
와다닥 머리채 뜯어버릴 손톱발톱 갈갈이 세우고 있다
지리릿! 진동이 울리고 고쳐 앉으며 눈에 불을 켠다
(불을 켜야 비로소 제 몫을 수행하는 그)
이제 저 눈 속이 내 마당이고 너의 뜨락이다
서로를 읽는다 읽혀버린다
한밤중 거실 깊숙히 끼쳐들어 번쩍이는 자동차 서치라이트
붉은 빛, 그 빛의 세기로 너와 나 사이 놓인 수백 리 길을
달려와 실시간으로 나를 전송한다 너의 구겨진 표정이 화면에 뜬다
콧김마저 서리는 천리안 웹카메라
10. 시월의 공원에서
하나, 둘 지워지는 얼굴들
비비추,원추리, 옥잠화
꽃시절 한 때를
흑백사진처럼 달랑 걸어놓고
사그라든
문안에 앞다투며 들어서는 나무들
혁명의 핏빛으로 괄괄한 붉은 단풍도
(이런 것일수록 더욱더 화력이 세다)
어느 날을 위하여
단련하는 근육질 몸매의 서어나무도
이쪽 저쪽 넘나들며 제 잇속 차리는
안전빵의 노란 은행나무도
모두모두
제 몸에 불을 질러대어 타다닥
다비하는 가을속 가리마길
그 길을 억새머리 하얗게 흔들며 가는
등짝을 따라 건너편 이마트 외벽 시계
어스름 한줌 한줌 쥐어내는
저만치서
밤이 경적을 울리며
다가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