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우 김 종권님 께서 보내주신 좋은 글을 공유합니다.
도척지견(盜拓之犬)🍎
앞집 숫닭은 아침에
꼬꼬댁 하고~홰를 치고,
뒷집 진도개는 외부사람이 접근 하면 짖어대는 것이 그네들 일과(日課)였지요.
그런데,
언제 인가 부터 닭(酉)과 개(犬)가 조용해 졌어요.
"하루는 개가 닭에게 물었습니다.
"넌 왜 새벽에 홰를 치지 않니?"
그러자, "우리집 아저씨가 백수가 됐는데 새벽 잠을 깨워서 되겠나?"
그런데, "넌 왜 짖지않고 조용한 거야"?
요즘 앞을 봐도 도둑놈이요,뒤를 봐도 도둑놈들, 판인데 짖어봐야 뭐하노?
내 입만 아프지!! 그래서 입다물고 산다~~"
허허 그래요
요즘은 부정부패 도둑놈들의 천국이니 개가 짖지 않을수도 있겠지요,
옛말에"도척지견" 이란 말이 있어요,
이는 도척의 개라는 뜻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밥주는자 에게 무작정 굴종(屈從)하며 맹종(盲從)하는 얼뜨기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는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 "도척(盜拓)"이란 악명높은 큰 도둑이 있었는데 그 졸개가 2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도척"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유린(蹂躪) 하고 약탈 하는 악마와도 같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도척의 집에 있는 개(犬)는 도척이 어떤 놈 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먹다 남은 밥 찌거기나 던져 주는,"도척"에게만 꼬리를 흔들어 대며 "도척"에게 반(反)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냐를
가리지 않고 옳고 그름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작정 짖어 대고 물어 뜯었다고 합니다.
"도척"이 짖어라 하면,짖고 물어라 하면 물었어요,
그 더러운 밥 찌꺼기 한 덩이를 얻어 먹고자 "도척"의 눈치를 보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그래서 이때 만들어진 말이 "도척지견" 입니다.
"도척지견"은 도척(악명 높은 큰도둑 )의 개라는 뜻입니다.
사람답게 사는 길을
모르는 채 "도척"의 개(犬)처럼 앞도 뒤도 가리지 못하고 그저 먹다 남은 밥찌거기 한덩이 던져주는 자에게 글종하며 비열 하고도 악랄한 개 노릇을 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를 빗대어 "도척의 개" 라고 합니다.
그런되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언론을"도척의 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흔히 언론을 입법,사법,행정에 이은"제4부"라고 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권력에 맞서 진실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알아 보고 국민에게 알려야 함이 사명인데,
매사를 공정하게 보편적 가치에 따라 때로는 보수에 가깝고 때로는 진보와 뜻을 같이 할수 있지만,시시 비비(是是非非)를 가릴 실력과 엄정한 논리를 갖고 있다면,이념성향에 따라 다양한 언론이 존재 하는건 환영 할만한 일이다.
오랜 역사의 선진국 언론이 그렇듯 잘만 하면 여러 의견을 공론화 광장으로 끌어 낼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언론은 논쟁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 내는 문화에 익숙 하지못해 오히려 생각을 달리 하는 곳을 공격 하는데 열중 하고 있다.
치졸(稚拙)한 진영 싸움에 말려 들기도 한다.기꺼이 좌,우 극단의 선봉에 서기도 한다.
언론을 곤혹스럽게 하는 또 다른 이슈는 가짜 뉴스 이다.
검증되지 않았거나 악의적으로 왜곡한 정보가 SNS를 타고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발없는 말이 천리길을 간다"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하고 부정확한 글과 영상이 디지탈 공간에 넘처난다.
언론으로 위장한 자들이 만들어 내는 가짜 뉴스는 언론의 신뢰를 갉아 먹고 있다.
이것이 사화 갈등을 부추기는 진원지 이기도 하다.
가짜뉴스는 1920년대 "독일 히틀러"가 반 유대주의를 비판하는 언론을 "거짓말쟁이 언론
(뤼겐프레세)이라고 표현 한 것이 최초 라고 합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비판 보도를 가짜뉴스로 몰아세웠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정 보도한 "밥 우드워드"는 가짜 뉴스는 트럼프가 언론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 만든 정치적 용어라고 말했다.
민주 사회에서 살아 있는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 하는건 언론의 숙명(宿命)이자, 존립 이유 입니다.
정론을 펼치는 언론 이라면,정권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불편한게 정상이라 보겠 습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유착(癒着)보다는 긴장관계가 백번 낫겠지요.
그러나 요즘 일부언론은 어떠 한가요?
"도척"의 개 처럼 마냥 짖어 대고만 있는것은 아닌지요?
이념 편향성에 함몰 되어 있는"민노총" 산하 언론 노조는 그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일부 언론을"도척의 개(犬)"라 하고 기자들을 기레기 (기자+쓰레기)라 하는 것이지요.
KBS.MBC.YTN 연합뉴스 등은 어서 빨리 민노총을 탈피해야 한다.
그것만이 언론의 자유를 누릴수 있고 언론(言論)이 살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국민이 외면(外面)한 언론은 존립자체를 뒤흔들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새 정부가 태동(胎動)하고 있다.
새로운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언론을 바로 잡는 일이다.
지금 처럼 편향(偏向)된 언론을 바로 잡지 못하면 새 정부(政府)의 미래도 불투명 하다.
새정부를, 옹호(擁護)하고 편드는 언론이 아니라,
정도(正道)를 지키는 본분을 다하는 진정한 언론으로 다시 태어 나게 해야 한다.
"언론이 진실을 보도 하면 국민은 빛 속에서 살것이고...
"권력의 시녀(侍女)로 전략하면서 어듬 속에서 살것이다.
지금 국민은 새 정부에 기대 하는 바가 클것이라 생각합니다.
차근 차근"공정"과 "정의"와 "법치"로서 비단 언론 뿐만 아니라,
선처를 베풀것은 베풀고,대 수술을 해야 할 곳은 가감 하게 수술 하여,
이념 성향(理念性向)으로 갈라진 국민 들을 한테 뭉치게 하여 정부를 믿게하고,
정부는 국민을 믿으며 안심하고 평화롭게 살아 갈수있는,흩트러 졌던,나라의 기강 (紀綱)이 바로세워 지기를 소망(所望) 해 봅니다.<感謝 합니다>
지인 李 相龍님 께서 보내주신 좋은 글을 공유합니다.
퇴계 (退溪)의 연정🍎
유교적(儒敎的) 법도에
충실했던 그에게 젊은한 여인을 향한 애정 한 편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소개(紹介) 합니다.
퇴계 이황(李滉)은 48歲때 경치 좋은 단양(丹陽) 군수(守)로 부임(赴任) 했는데, 그 고을 관기였던 18세의 어린 두향을 만난다.
두향은 첫 눈에 대나무처럼 올곧은 퇴계를 연모하게 되었고, 퇴계도 부인과 아들을 잇따라 잃었던 터라
공허한 가슴에 두향이 들어왔다.
30년 세월(歲月)을 뛰어넘는 사랑의 교감(交感)이고, 반상(班常)의 신분(身分)을 뛰어넘는 로맨스다.
두향은 詩와 書와 거문고에 능했고 특히 매화(梅花)를 좋아했다.
그녀는 언제나 퇴계의 곁에서 거문고(금:琴)를 타며 퇴계(退溪)의 얼굴에서
미소(微笑)가 떠나지 않게 한 여인(女人)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시작한지 꼭 9개월 만에 퇴계가 경상도 풍기(豐基) 군수로 전근 발령(發令)을 받는다.
두 사람 모두에게 대단한 충격(擊)이었고,
관기(官妓)를 못 데리고 다니는 당시의 규율(規律)때문에 결국(結局) 두향을 두고 퇴계는 혼자 풍기로 떠나야만 했다.
떠나면서 꾸린 짐 속에는 두향이 준 수석2개와 매화 화분(花盆) 한 개가 있었다.
떠나기 전날 밤에 마주 앉아 주고 받았던 한시(漢詩)가 백미다.
"死別己呑聲
(사별기탄성)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生別常惻測
(생별상측측)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 없네"
그리고 퇴계는 말을 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期約)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
두향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詩 한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우는데, 어느덧 술도 비워 없어지고
님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離別)은 결국(結局)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져
퇴계가 70세로 세상(世上)을 하직 할 때까지 두 사람은 한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퇴계(退溪)가 부제학(副提學) 공조판조(工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데~
아마도 두향은 누가 될까하여 퇴계에 대한 두향의 배려였으리라.
퇴계와 이별(離別) 한 후
두향은 관기(官妓)를 그만두고 퇴계와 즐겨갔던 남한강(南漢江) 강가에 움막을 짓고 평생(平生)을 살았다.
이별 후 이들은 만나지 못하고 서로 서신(書信)만 주고 받았다.
다음은 퇴계가 두향에게 보낸 시다.
"黃卷中間對聖賢
(황권중간대성현)누렇게 바랜 옛 책속에 좋은 말씀을 보면서
虛明一室坐超然
(허명일실좌초연) 빈 방에 홀로 조용히 앉았는데
梅窓又見春消息
(매창우견춘소식)매화 핀 창가에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
(막향요금탄절현)그대도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고 한탄 말라
퇴계는 말년(末年)에 안동(安東)에 있는 도산(陶山) 서원(書院) 에서 조용하게 지냈는데
한 때는병세가 위독해서 자신도 모르게 옷을 입은 채로 설사를 하게 되었다.
그 경황에서도 그는 시중드는 사람에게 불결(不潔)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며 매화 화분을 딴 방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 매화(梅花)가 바로 두향이 준 것 이여서 각별(各別)히 애지중지(愛之重之) 하였다
명종과 선조 임금이 항상 퇴계에게 큰 벼슬을 내리면서 조정으로 나올 것을 간곡하게 청했지만,
그는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출세(出世)보다는 학문에 전력했던 군자(君子)였다.
그러나 詩와 음악(音樂)과 한 女人을 사랑했던 로맨티스트였고,
또 달과 山과 江과 梅花를 유달리 사랑했던 풍류객(風流客)이었다.
기록(記錄)에 의하면 그가 병이 깊어 누워 있던 1570년 섣달 초여드렛날,
제자들이 부축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창문으로는 눈부신 겨울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윗목에는 매화 화분 하나가 두세 송이 부푼 꽃망울을 매달고 있는데,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이 말을 끝으로 선생은 미소 띤 표정으로 앉아서 이승을 하직 했으니,
이때 선생의 나이 70세 였다.
그날은 맑았는데 오후 다섯시쯤 갑자기 흰 구름이 집 위로 몰려들더니 눈이 한 치 남짓 내렸고
조금 뒤 선생이 숨을 거두시자 구름은 흩어지고 눈도 그쳤다.
두향이 퇴계에게 주었던 매화는 그 대를 이어 안동의 도산서원에 그대로 피고 있다.
어느 날 두향이 안동의 퇴계에게 난초를 보냈다. 단양에서 두향과 함께 기르던 것임을 알아차린
퇴계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자신이 평소에 마시던 우물물을 손수 길어 두향에게 보냈다.
이 우물물을 받은 두향은 물을 마시지 못하고 새벽마다 일어나서 퇴계의 건강을 비는 정화수(井花水)로
소중히 다루었다.
어느 날 이 정화수가 빛깔이 변하는 것을 보고 퇴계가 돌아가셨다고 느낀 두향은 소복 차림으로
단양에서 머나먼 도산서원 까지 4일간을 걸어서 돌아가신 님을 뵈었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퇴계 종가(宗家)에서는 두향이 묘(墓)에 벌초하고 그녀의 넋을 기린다.
퇴계 선생의 파격적인 사랑을 공식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지만,
그 애달픈 사랑을 잊지는 않는 다는 것이 사람의 禮인 모양이다.
또한 옛날이나 지금이나 女子는 존경(尊敬)하는 님에게는 •••
변치않는 숭고(崇高)한 사랑으로 승화(昇華)시키는것 같다.
💋 💖 🧎 🧎♀️ 💃 🕺 🍒🙏💏 🤩 🤠 ⚘ 🐓 🐤 🍒 🦀 ⛱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