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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휴가 8월 29일부터 2박 3일 로 무작정 출발해 본다.
고참이라서 제일 늦게 받았다고 하니 오늘도 무작정 출발 한다. 사는 것이 이래저래 골치 아프다고 하니 말이다.
타인이 볼 때는 전혀 문제없지만 내부적으로는 항상 경제 문제이다.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어느 누구나 그러하지만 불안한 장래에 대한 불안감은 언제나 있다.
그래도 오늘은 간다. 집에서 출발해서 부평 계양의 서울 외곽도로를 올라타고는
어디 가고 싶냐고 하면서 1번 경주지역, 2번 화진포지역 하니 2 번으로 가고 싶단다.
난 오늘도 주야로 충성하는 기사가 되어서 강원도 강릉 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린다.
평상시에도 1년에 한두 번은 달린 곳으로 문막 휴게소에 가서는 잠시 쉬었다.
휴게소에는 중미에서 온 맥시코 사람들이 와서 자기네 민속 노래를 몸을 흔들려 하는것을
구경 하고는 다시 영동 고속도로를 달리니 그리 빨리는 가지는 못한다.
나의 청토마는 (적토마: 삼국지 유비의 의제 관운장이 하루 천리를 달리던 말 이름) 1톤
더블 캡 화물차인 관계로 백 키로 이상 달리기는 언제나 힘겹다.
횡성, 평창, 속사, 터널을 몇 개 지나서 대관령 고개 길을 가다가 강릉으로 내릴려 하던 것을
바로 속초 방향으로 돌려서 양양으로 가고 있었다. 여행은 특별 계획 없이 좋은 곳은 쉬고 또
가고 해서 양양비행장의 관제탑을 처다 보면서 속초로 향하니 좌측 편에 설악산이 눈에 들어온다.
계속 7번 국도를 따라 하염없이 올라가니 간성을 지나고 보니 좌측에 향로봉이 저 멀리 보이니
고향에 있는 두범 형님이 군 생활 한곳,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다는 보병 제 12사단
인제 원통지역 3년 4개월 군 생활 곳 향로봉이 보인다.
향로봉산적이라며 골짝 골짝을 다 안다며 지겨웠던 이곳이 죽기 전에 한번 가보고 싶다며 그리워 한곳이다.
17년 전에 7번 국도를 따라 간 것을 기억을 더듬어 가는데 갈수록 아직도 옛날 길 그대로 인 곳이 많았다.
화진포 군인 휴양소 들어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화진포호수와 해수욕장의 사이길인
1 번 군도를 따라 들어가니 변함이 없고, 자유당 시절의 제 2인자로 민의원 의장을 거쳐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의 별장과 북쪽의 통제 하에 있을 때 지은 김일성 별장이 나왔으며, 호수 넘어 이승만 별장으로
가는 안내 표시판이 눈에 들어온다.
특이한 사항은 고구려 장수왕의 부친인 광개토 대왕릉이 저 바다의 돌섬이라는 데는 잘 이해 가질 않는다.
대왕님은 대륙을 달리던 왕인데 이곳 바다에 잠들었을까하는 의구심이 난다.
이내 휴양소로 들어와 방을 하나 주문 하니 금요일은 예약 손님만 받는단다. 예약을 하지 않아서 방이 없다.
그래도 근심 하지 않는다. 이세상은 내 잠못잘 까봐서 호텔과 여관과 모텔과 펜션이 무수히 많고,
내가 배가 골을까 봐서 식당과 횃집이 즐비 하니까 말이다.
이왕 이곳에 온 것 송림에 산책이나 하고, 모래나 밟고 가야지 하면서 해수욕장을 들어 서는데 바다가
그 옛날에 올 때 보다 검게 보여 자세히 보니 물은 변함이 없는데 미역과 다시마가 요 몇 일전 풍랑으로
많이 밀려와서 사람들이 그것을 줍고 있었다.
바다 멀리 바라보고 심호흡 하는데 갑자기 “ 아림이 엄마 ” 하면서 이곳에서 동반자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돌아보니 20여년전 군 생활 같이 했던 창원 39 사단 항공 대장인 김경태씨의 부인이 부르는 것이 아닌가!
참 놀랄 일이다. 인천의 제일 구석에서 달려 천리를 왔는데 이곳에도 아는 사람이 있었다.
사모님 일행은 춘천 504 항공부대 옛 전우모임 들이다. 그중에 김응수 예비역 장군외 7명이 왔다는데
김 장군은 나와 육군 본부에서 3개월 파견 근무 때 같이 한 적이 있었다.
날 그렇게 챙겨 주었던 사모님에게 농사지은 사과 몇 개를 드리고 북으로 청토마는 달렸다.
동해안의 시원한 바다를 구경하면서 7번 국도를 벗어나 해변의 군도를 따라 올라가니 등대가 보였다.
최북단의 등대로 대진 등대란다. 대진 항에 들어오니 벌써 저녁때가 되어서 저녁을 먹을 려고 횃집을 물색을 하니
혼자 먹는데 값이 너무 비싸게 여겨졌다. 그래서 한 모퉁이를 돌아 나오니 작그 마한 식당 앞에 붉은 다라이 그릇에
팔팔 뛰는 이름 모를 바다 고기와 광어을 구경하면서 첫 인상이 좋은 어르신에게 회를 조금 부탁 했는데
쾌히 승낙하면서 식당에서 준비하는 회를 바라보고 있으니 맘에 든다며 등푸른 생선을 한 마리 더 회를 쳐서 주면서
이내 저녁사이 들어오고 동반자는 맛있게 소주와 섞어서 먹고, 난 구경만 하고매운탕 나오기만 기디리는데
그 시간 따라 식당 손님은 없으니 세상사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대진항 지역은 수복이후 땅 들이 거의 주인 없이 그냥 살다가 법의 조치로 땅를 찾고 하면서 땅 들이
뒤죽박죽된 상태로 그냥 살았단다. 그런데 항구 건너편 4평의 땅으로 인하여 같은 동네 옆집 사람과
땅 싸움이 일어나서 1평에 250만원 하는 땅을 홧김에 4천만 원을 주고 사면서 날이면 날마다 독설을 퍼 부어니
땅 판 사람은 2년 만에 바다에 이유 없이 빠져 죽고, 땅 산사람은 3년 만에 암이 걸려 죽어니 둘다 흔적이 없고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단다.
또한 어르신(홍현삼 63세 일미회집 011-9797-0174)께서 우리 집은 군인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군인 손님 많다고
자랑을 하면서 22사단 헌병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 몇 년전에 신상봉 동기생이 이곳에서
헌병대장을 했었고, 보병 때 첫 부임지가 통일 전망대 초입의 소대장을 했다는 것을 알기에 동기생 이야기를 하니
너무나 잘 안다고 해서 오늘 올 때 어디 가느냐고 전화 까지 오전에 통화 했는데 너무 반가와서 전화을 걸어
바꾸어 주니 두분이 너무나 반가와 하면서 한참 이야기하고는 끝는다. 사람의 인연이라 참으로 기가 막힌다.
이곳이 바로 동기생이 군 생활 하면서 자주 드려 친분을 많이 쌓아 놓은 집인줄 내 어이 알리...
은혜와 의리를 널리 베풀라. 인생이 어느 곳에서 서로 만나지 않으랴? 원수와 원한을 맺지말라.
길이 좁은 곳에서 만나면 피하기 어렵다. ( 景行錄에 曰 恩義를 廣施하라 人生何處 不相逢이랴
讐怨 莫結하라 路逢 狹處면 難回避니라) 명심보감 생각이 났다.
이 같은 교훈을 명심하여 남은 인생에서 실천에 옮기고 처세에 대원칙을 삼아야 겠다고 다짐해 본다.
어르신이 먼저 오늘밤 어디서 잘 것이냐고 묻기에 아직은 정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러면 금강산 콘도에 가서
자라 하면서 회원권 까지 빌려 주어서 콘도 까지 안내 해주고 돌아갔는데 비회원은 98,000원 인데 회원 자격으로
바다가 보이는 가장 좋은 자리에 43,000원으로 입실 하게 되면서 참으로 기분도 좋았다.
방은 깔끔하고 밥을 해 먹을 수도 있고 10평정도 방이다. 아마 해맞이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도 할 수 있단다.
오늘 하루 종일 운전하느라 피곤하여 샤워 하고는 바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을 잦는지 파도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려서 바라보니 남동쪽 1 키로 지점의 등대는 계속 빛을 발사하고
검은 천위에서 하얀 줄기의 파도 하염없이 육지로 달려오고는 사라지고 끝이 없이 하는데 도대체가 잠이 오질 않는다.
머리는 맑은데 정신은 또렷하고 파도만 쳐다보고 있다가 해맞이 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여명이 밝고 05시 30분에 일출이 있으니 그전에 핸드폰시계를 맞쳐 놓았다. 날이 밝았다
한참을 쳐다봐도 해변에 변화가 없는데 작은 고깃배들이 대진항으로 들어오는데 거의 오징어 배란다.
바다가 저멀리서 붉게 물 들고 부글부글 끓는는 듯하더니 이내 맑은 알하나가 하늘에 척 붙는다 그것이 태양 이였다.
붉은 빛이 나의 콘도 5층 쪽으로 길게 비쳤다.
머리에서는 이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태양은 가만히 있고 지구가 동쪽으로 시간당 15도 기울어 지니
사람들은 해가 뜬다라고 말한다. 실제는 내가 움직이는 것인데 태양이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산다. 易地思之를 생각난다.
아침 준비를 위해 산책을 나가려고 밖을 보니 콘도앞 철망에 6시도 아니되었는데 군인 들이 순찰을 하고 있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뀌고 또 보통 사람들이 군생활 한것보다 많이 했으니 그것도 꿈만 같다.
주변을 산책하고, 그 맑은 동해안 바닷물을 눈에 쉬도록 많이 보고, 철망쪽문을 열어놓은 곳으로 들어가 백사장에
산책을 하고 미역과 다시마을 한웅큼 건져서 들고 나오는데 이 좋은 곳에 과거 적이 침투지역이란다.
침투일시 1961년 4월 30일로 장소는, 무송정 전방해안, 내용은 적 5명이 아군 군사시설 정찰하러 왔고 ,
우리의 육해공군이 합동 작전으로 2명 사살 3명도주한 지역 이였다. 빨리 통일되기를 기원해 본다.
아침은 큰 사발 라면 , 빵 , 유유, 사과로 하고 일찍 금강산 콘도를 나왔다.
통일 전망대를 가기 위해 7번 국도를 청토마로 5분도 못가서 통일 안보 교육관에서 출입 신고를 하는데
지금은 교육은 없었다. 그리고 주차비를 3천원을 면제 받았다. 젊은 날 평생을 군 생활한 내가 군사지역에서
대우 못 받으면 안 되지...
시간이 되어서 드디어 민통선에 도착 출입증을 통문 근무하는 군인에게 보이고 차로 들어 간다. 철책으로
둘러싸인 동해이지만 푸른 바다에 하얀 파도가 밀려오며 육지에는 벌써 벼가 누렇게 고개를 숙이는 중이고
좌측 편에는 “ 동해선 남측 출입 사무소”가 될 건물을 짖고 있었다.
전망대 들어서서는 금강산 해금강이 대부분 지역이 한눈에 들어 왔다. 금강산 9산신이 놀았다는 1만 2천봉의
마지막 봉인 구선봉 ( 낙타봉 )과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을 간직한 호수로 유명한 감호, 바다의 만물상들을
더 가까이 보기위해 망원경을 2번이나 보았다. 조국 분단의 현실 직접 볼수 있는 비무장지대와 철책 ,
남북한을 잇는 동해선 도로와 철로 얼마 전까지 간간히 다니던 길이 금강산 피살 사건 후는 남북한이
더욱 싸늘한 정국이 되었으니 가슴만 답답하다.
장차 내 청토마가 7번 국도를 계속 북으로 달려 금강산을 경유 명사십리를 거쳐서 함경북도와 두만강 푸른 물을
보고 북간도 지금의 중국 지린성, 서간도 지금의 중국의 랴오닝성을 둘러보고 또 이순신장군의 초임장교시절의
첫 부임지인 녹둔도를 거쳐 브라디보스톡을지나 나라 잃은 고려인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실려갔던 철도를 따라
모스코에 도착 세계에서 가장 독한 러시아 보드카 한잔하고 유럽으로 달려가고 싶다 아마 1개월이면 유럽에
도착하지 싶다. 상상의 날개를 끝없이 펼치며 북쪽 하늘을 바라본다.
군대 생활 했던 나에게 전망대 앞쪽에 351고지가 625 전쟁당시에는 366고지 였던 것이 전쟁 후 351고지로
15M 나 낮아 졌다는 기록을 볼 때 얼마나 많은 포탄을 쏟아 부었으며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죽어 갔는가 짐작이
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은 당신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라고
감사기도 하러 좌측 전망대 능선을 가니 전망대교회 문이 잠겨 있어 그 자리서 기도하고 다시 우측능선으로
내려오는데 그곳에 성모마리아님과 부처님께서 통일 기원하는 동상이 있었다. 글귀 하나가나의 발을
멈추게 했다. “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돈 없는 사람보다 추억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아쉬움을
뒤로 하고 7번 국도를 남으로 향해서 나오며 출입증을 반납하고 46번 도로 만나는 대대 삼거리까지 내려와
진부령 가는길에서 잠시 휴식을하고 속초로 내려 오면서 설악산으로 향했다.
설악산에서 산채 비빕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권금 산성을 올라 갈려고 케이블카로 갔다. 17년 만에 산에 올라 가니
카도 변해서 많은 사람을 수송 할 수 있었다. 올라 가는 모습이 헬리곱터가 떠오르는 모습 같았다.
조종간을 놓은지 10년인데 갑자기 헬기를 조종해서 설악산을 전부 구경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너무나 좋은 곳이라 내가 무엇하고 이제 왔는가 하는 가슴 뭉클한 절경를 구경 하면서
눈물이 났는데 이곳을 다녀간 세월 속에서 내 살붙이 남자 3명이 없으졌으니 이제는 눈물이 다 말랐버렸다.
그러나 무엇이 그리 바빠서 이제 왔는지 내 자신에게 화가 난다 그렇다고 명예를 얻었느냐, 돈을 많이 벌었느냐 ,
직위가 있느냐 벌써 55년 인생길 내리막길에 서서 있으니...
설악산을 뒤로하고 남을 향해서 7번 국도를 하염없이 내려오니 강릉 이다. 동서에게 전화를 하니 새로 산집에
처제와 이사 갈 준비와 새집에 페인트로 화장 하고 청소 한단다.
집 구경을 하고 청정지역 강릉에서 살면 노후경제는 문제없다고 공상을 하고 하룻밤을 자고 인천으로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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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ㅎㅎㅎ 청토마 기억에 계속 남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