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위협이 사라져 아무런 제약이 없이 체육대회가 열리는 동성인의 축제의 날이라 기대감을 갖고 교정으로 들어선다. 명찰과 추첨권을 받은 후 도시락과 물 그리고 간단한 선물을 챙겨들고 대운동장으로 다가간다. 10여분 전 10시이다. ㄷ모양으로 세워진 텐트 군에서 우리의 공간을 찾아 4개의 깔개를 구해 펼쳐놓고 친구들을 기다린다. 제일 위인 우리를 비롯해 10개 기수가 같이 사용하는 안식처에 후배님들이 좌우로 넓게 자리를 잡고 준비해온 먹을거리를 펼쳐놓고 부산하다. 예년과는 달리 물을 제외한 모든 주류, 음료수는 꽈리를 틀고 앉아있는 동문들한테 제공 되지 않는다. 다만 39회 이상의 선배들은 의자와 마시고 들 모든 먹을거리 혜택을 무상으로 누린다. 10시 조금 지나 규석이 나타난다. 개회식이 정시보다 30여분 늦게 여러 차례의 독촉 속에 이루어진다.
비록 이른 시간이라고 볼 수고 있지만 참여인원이 눈에 띠일 만큼 적다. 텐트 곳곳이 많게는 수십 명이 보일 뿐 허전하다. 문득 모교의 급격하게 침몰하는 안타까운 모습이 마음을 파고든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수십 년째의 쌓인 병폐의 얼굴이다. 단초는 고교평준화라는 상식이하의 교육정책이나 카토릭재단과 모교의 무능한 대책이 가장 큰 원인이다. 급격히 줄어가고 있는 청소년들과 심한 경쟁력을 감안해 모교를 강남으로 이전치 못한 어리석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통탄스럽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전교조 교사들이 형언키 어려운 행태가 나락의 길로 더욱 이끌었다. 모교가 서울 전교조의 본거지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구렁텅이에서 뒹굴고 있었다. 서울대학교에 한 명도 입학하지 못한 해가 있을 정도로 교육이 엉망진창이었다. 내로라하는 유명 학교들에 비해 학생 수는 무척 적었지만 뛰어난 학업성취의 동성의 명예와 자부심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다행이 졸업생인 신부가 교장이 되어 예전의 학업명성을 찾기 위해 온갖 노력 끝에 자율사립학교 직위를 얻어 교육을 본궤도에 올려놓는 첫발을 열었다. 그러나 열매가 맺기도 전에 후배 신부는 강력한 의지에 반해 재단으로부터 끌어 내려진다. 새 교장인 신통치 못한 신부는 3년 전 자율고 권한을 반납하고 일반고로 전환해 모교를 다시금 전교조의 각축장으로 만들어 급격하게 퇴락의 길로 빠져들게 하고 있다. 고교진학을 앞둔 학부모들은 모교에 아주 작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고 들려온다. 다시금 학교를 되살려 예전 같은 명성은 아니지만 마음을 끌어들이는 동성이 될 날은 없는 걸까! 실낱같은 희망은 재단의 과감한 투자와 개혁 전교조의 행패에서 탈출에 달려있다고 본다.
뼈아픈 상념 속에 잠겨있다 눈을 떠보니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 12시쯤 10명이 되었다. 무척 적게 모일까 봐 걱정했던 마음이 이내 사라진다. 모이자마자 점심인 도시락을 까기에 여념이 없다. 애타는 건 바뀐 행사의 면모로 제공받을 수 없는 주류, 탄산음료수 등이다. 체면을 바지주머니에 깊숙이 집어넣고 주변의 후배들한테 간청해 도움을 받는다. 탁발해 모은 먹을거리가 들고도 남아 동냥질은 대단히 성공적이다. 앞으로도 이런 모습으로 체육대회가 열린다면 우리도 제대로 준비해 각설이 타령은 그만두어야 한다. 다행이 내년만 참으면 늙은 어른이라는 달갑지 않은 칭호를 얻어 무상으로 모든 걸 시여 받을 수 있다.
올해부턴 행사가 3시30분에 끝나게 되어있다. 여느 해처럼 5시30분에 끝나는 줄 알고 점심을 든 후 교문을 나서 저녁으로 회연을 이끌어 가려고 칼국수 집에 예약을 해둔다. 돌아와 보니 벌써 추첨권 뽑기가 한창이어서 파장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들 중 종락이가 유일하게 당첨되어 2채의 이불 상품을 한성과 소인한테 돌려준다. 과거에도 심신을 곤두세우고 바라던 선물을 탄 이력이 있는 탓에 종락은 즉석에서 “미스터 상품권” 으로 불린다.
행사를 마치고 교정에서 기다리고 있는 충국을 데리고 냉면으로 시원하게 속을 풀려고 간혹 찾았던 음식점을 찾았으나 커피점으로 탈바꿈해 낭패다. 다행히 아이스크림으로 호응을 얻어 근처의 새로운 카페에 들어가 커피와 함께 들며 지칠 만큼 노닥거리다 길로 나선다. 어렸던 우리에게 정직하고 밝은 길로 안내하고 깊은 우정을 심어준 모교가 다시금 동쪽의 등불로 영원한 길잡이가 돼주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해본다.
함께한 친구들: 권충국, 김순화, 김희택, 박병현, 박재진, 서규석, 이승권, 이원식, 정한성, 최종락, 홍선우, 최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