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율곡 이이 선생과 신사임당의 묘소를 찾아서
* 촬영 : 이재익 시인 , 2013.4월 하순 비오는 날
[2] 화석정花石亭
율곡 이이 선생과 신사임당 묘소, 자운 사원,
경기도 파주시.법원읍 동문리
1. 율곡의 저서 [성학집요]의 정신 :
보편적 규범 중시. 성인들의 방법은 다르나 백성들의 마음을 중히 여기고 하늘의 참뜻을 존종.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변함이 없다. 성인이 죽으면 또 다른 성인이 각 시대에 맞는 내용과 방법으로 백성을 가르침. 전통적 가치는 변함이 없으나 시대적 특수상황 중시. 가치가 시대에 알맞게 구현되어야 한다.
2. 이이의 성리학 학문적 경향은
주기론인데 한국적 성리학의 실천적 방향 제시을 제시한 것이다.
이이가 파악하는 이기론은 이理(정신적)와 기氣(물질적)는 구별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는 아니 된다.
이와 기의 관계는 말을 탄 무사와 말과의 관계로 설명한다.(이승기발론 ; 理乘 氣發論)
3. 이 지역 유적이 잘 정비 된 데는 역시 박정희 대통령의 세심한 배려 덕분이다.
대통령은 그 바쁜 국사 중에도 전국의 역사유적을 가꾸고 보존하는 데 남다른 열정을
보이셨다. 이 점은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4. 이이 선생은 학문적으로 기호학파, 경세적이었다. 성리학을 응용적으로 적용하여
정치와 생활에 실천적인 경향을 중시한 것이다.
사후에 내린 존칭 즉 시호가 문성이니 '문성공' 이시다. 이순신을 충무공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실은 이이는 충무공과 같은 집안이다. 덕수 이씨이다.
5. 이율곡 선생 신도비
중종 31년 1536년 강릉 외가 오죽현에서 태어나 6세 때까지 외가에서 살았고, 서울에서 1년을 보낸 후 임진강가 화석정이 있는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로 옮겼다.
6. 이율곡 선생을 모시는 자운서원
7. 이이 선생에 대한 존경심은 이 자운서원 뿐만 아니라 전국의 20 여 개 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있다.
8. 자운서원
23세 때 이퇴계를 뵈었다.(퇴계는 59세)퇴계는 율곡에 대하여 “두뇌가 명석하여 많이보고 기억하니 후배란 두려운 것(後生可畏)” 율곡이 하직할 때 퇴계에게 청하니 퇴계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 주었다. ‘持心貴在不欺 立朝當戒喜事’ (사람의 마음가짐에 있어서 귀한 것은 속이지 않는데 있고 벼슬하여 조정에 나가면 공을 세우려고 쓸데없는 일을 만들기를 좋아해서는 안된다.)
9. 유적지의 광장 한 부분
율곡은 13세에 진사가 되었고, 과거시험 아홉번에 모두 장원하였고 한꺼번에 겨우 열 줄밖에 못 읽는다고 할 정도로 두뇌가 명석하였다.
10. 자운산 기슭에 있는 이율곡 가족묘 14기가 있는 곳으로 들어 가는 문
11. 여견문을 지나서 이율곡 신사임당의 묘가 있는 곳의 돌계단
12. 맨 먼저 아들 이경림의 묘가 나타난다.
13. 아들 이경림 묘
14. 우리나라 화폐 5만원권의 초상로 나오는 신사임당, 영원한 모성과 지성을 가진 여상상인데, 나이 겨우 48세에 별세하여 단명하신 것이 안타깝다. 아들 율곡 선생도 49세에 들아 가셨으니 수명이 짧았던 집안이었다.
15. 이율곡 선생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합장묘
16. 이율곡 형 이선 부부합장묘
17.
18. 이율곡 선생과 뒤쪽에 부인 곡산 노씨묘
깊고 넓은 안목을 가진 정치가이며, 봄바람같은 온화한 성품을 가진 위대한 德人으로 한번 우러러보아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19. 이율곡 선생과 뒤쪽에 부인 곡산 노씨묘
계모가 신경질적이고 술을 잘 마셨으면 율곡의 봉급도 제멋대로 쓰고 율곡은 손도 못되게 하였다. 마침내 율곡의 정성에 감동되어 사람이 달라졌다.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3년상복을 입었다. 1584년 49세로 시상을 하직하자 수의 만들 천조차 없었다. 영구가 서울을 떠나자 횃불을 들고 따르는 시민이 수십리.
◈ 율곡 이이(李珥) 선생
- 1536~1584,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릉 출생.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 이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의 선생의 묘소에는 부인 노씨의 봉분이 그 뒤에 있다. 왜란 중 부인이 왜병에 항거하다 시녀와 함께 칼에 맞아 죽었다. 일년후 시신을 거두니 누가 누구인지 몰라서 였다.
- 중종 31년 1536년 강릉 외가 오죽현에서 태어나 6세 때까지 외가에서 살았고, 서울에서 1년을 보낸 후 임진강가 화석정이 있는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로 옮겼다.
-16세 때 부 이원수가 수운판관이 되어 공무로 평안도 출장 갈 때 따라갔는데, 어머니 신사임당이 갑자기 병이 들어 임종도 못하고 여의고 말았다. 18세 때 봉은사 금강산 유점사 등에서 승려가 되고자 했으나 맞지 않아 환속함.
- 율곡은 13세에 진사가 되었고, 과거시험 아홉번에 모두 장원하였고 한꺼번에 겨우 열 줄밖에 못 읽는다고 할 정도로 두뇌가 명석하였다.
- 23세 때 이퇴계를 뵈었다.(퇴계는 59세)퇴계는 율곡에 대하여 “두뇌가 명석하여 많이보고 기억하니 후배란 두려운 것(後生可畏)” 율곡이 하직할 때 퇴계에게 청하니 퇴계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 주었다. ‘持心貴在不欺 立朝當戒喜事’ (사람의 마음가짐에 있어서 귀한 것은 속이지 않는데 있고 벼슬하여 조정에 나가면 공을 세우려고 쓸데없는 일을 만들기를 좋아해서는 안된다.)
- 29세 때 벼슬이래 여러 판서를 역임. 왜란 10년전 경연에서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왜란이 일어난 후에야 선견지명을 감탄하고 성인으로 우러러보았다. 어찌 자기편만 다 옳고 저편은 다 옳지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며 당파싸움을 말리고 타일렀다.
- 깊고 넓은 안목을 가진 정치가이며, 봄바람같은 온화한 성품을 가진 위대한 德人으로 한번 우러러보아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계모가 신경질적이고 술을 잘 마셨으면 율곡의 봉급도 제멋대로 쓰고 율곡은 손도 못되게 하였다. 마침내 율곡의 정성에 감동되어 사람이 달라졌다.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3년상복을 입었다. 1584년 49세로 시상을 하직하자 수의 만들 천조차 없었다. 영구가 서울을 떠나자 횃불을 들고 따르는 시민이 수십리.
* [성학집요] : 보편적 규범 중시. 성인들의 방법은 다르나 백성들의 마음을 중히 여기고 하늘의 참뜻을 존종.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변함이 없다. 성인이 죽으면 또 다른 성인이 각 시대에 맞는 내용과 방법으로 백성을 가르침. 전통적 가치는 변함이 없으나 시대적 특수상황 중시. 가치가 시대에 알맞게 구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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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율곡 선생과 부인의 묘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의 선생의 묘소에는 부인 노씨의 봉분이 그 뒤에 있다. 왜란 중 부인이 왜병에 항거하다 시녀와 함께 칼에 맞아 죽었다. 일년후 시신을 거두니 누가 누구인지 몰라서 였다.
22. 이율곡 선생 묘에서 바라본 모습, 바로 아래가 형 이선의 부부 합장묘,
그 다음 부모인 이원수와 심사임당 합장묘, 제일 아래 쪽은 아들 이경림 부부 합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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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율곡 선생묘 참배
27. 이율곡 선생 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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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이원수 신사임당 묘앞에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신사임당의 그림 초충도를 관람했었다.
31. 신사임당 묘
율곡이 16세 때 부 이원수가 수운판관이 되어 공무로 평안도 출장 갈 때 따라갔는데, 어머니 신사임당이 갑자기 병이 들어 돌아 가심에 임종도 못하고 여의고 말았다. 어머니를 여윈 율옥은 마음을 달랠길 없었는지, 18세 때 봉은사 금강산 유점사 등에서 승려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승려의 길은 그에게 맞지 않아 환속하였다.
32. 내자는 율곡얘기를 전해 듣고 신이 났다.
33. 젊을 때 이곳에 와서 신사임당 얘기를 들었다면, 사람이 좀 달라졌을까?
[2] 화석정花石亭
34. 이율곡 선생 유적지 화석정
이율곡 선생은 앞을 내다 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10만양병설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심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조상의 고향인 이곳에 와서 지내셨다. 뒤에 다시 왕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정치를 하러 들어 가셨는데, 그 사이 수년간 이 곳 율곡리 일원에서 학문과 교육을 하며 지내셨다.
35. 이율곡 선생 유적지 화석정,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의 별서인 평천장의 記文을 따서
조부 이숙함이 정자이름을 지었다.
율곡의 선견지명이 이곳에도 일화가 전한다. 이 정자에 기름을 많이 먹여두면 후일 쓰을일이 있다고 했다. 과연 왜란이 일어나 선조 임금이 칠흑같은 밤중에 이 곳 임진강을 건너 피난할 때 이 정자에 불을 붙여서 밝혀 도강 피난길을 도왔다는 얘기다. 물론 이 때는 율곡은 고인이 된 이후이다. 그런데 기대했던 이야기는 이곳 안내판 어디에도 없어서 서운하다.
36. 화석정에는 이율곡 선생이 8세 때 지은 한시를 돌에 새겼다.
花石亭 詩
이율곡 8세 시
林亭秋已晩 /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騷客意無窮 /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을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 / 산위에는 둥근 달이 떠 오르고
江含萬里風 /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먹음었네.
寒鴻何處去 /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聲斷暮雲中 / 울고 가는 길기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37.
38. 보이는 강은 화석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임진강(오른쪽편으로 경치)
화석정 바로 아래에 도로가 생겨 정취를 깨뜨린다.
39. 보이는 강은 화석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임진강(왼쪽편으로 경치)
화석정 바로 아래에 도로가 생겨 정취를 깨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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