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十一 章 지혜로운 소년
그는 이제 눈을 감고 적군의 광태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하여 막 눈을 감으려는 순간 그는 적군의 왼팔에 꽉 끼어 있던 모백이 오른쪽 팔굽을 구부려서 적군의 아랫배를 힘을 다해 내지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원래 그는 전모백이 혈도를 봉쇄당한 끝에 꼼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눈조차도 뜨지 못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모백이 기습 공격을 펼치는 것을 보자 그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는 모백의 어린 힘으로는 일반 무림인물을 상대하기에도 부족할텐데 어떻게 적군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미쳐버린 적군이 홧김에 모백을 당장 그 자리에서 쳐 죽이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놀란 외침이 막 입에서 터져 나오는 다음 순간 적군 역시 당혹한 비명소리를 내지르는 것이 아닌가. 모백이 팔굽을 구부려 가격한 것이 정확하게 적군의 복결혈(腹結穴)을 적중시킨 모양이었다. 복결혈은 사혈(死穴) 가운데 하나다. 남삼객 적군이 비록 호신기공(護身氣功)을 연성했다고는 하지만 마음과 몸이 격동된 상태였는데다 근본적으로 모백이 느닷없이 그를 공격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 방비를 하지 않았고 운기하여 몸을 보호할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한순간 아랫배에 격렬한 통증을 느끼게 되었고 끌어 모았던 진기가 하마터면 그 일격에 흩어질 뻔했다.
따라서 적군은 어억, 하는 소리를 내지르면서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구부리게 되었다.
바로 이때, 그는 두 가닥의 기이한 힘이 전모백의 손에서 뻗쳐 나오는 것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밀어내고 또 한편으로는 흡입하는 두 기운이 그가 허리를 구부리는 기세를 따라서 놀랍게도 그를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는 대뜸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신타 을휴는 자기의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모백은 씨름을 하는 것 같은 수법으로 남삼객 적군을 거꾸로 처박은 것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훌륭하다!』
전모백은 그에게 눈을 한번 깜박여 보이더니 한가닥 연기처럼 벼랑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그 굵직한 등나무 줄기를 타고서 깊은 벼랑 아래로 도망쳐 내려갔다. 남삼객 적군은 몇자 밖으로 나가떨어져 머리를 처받고 곧이어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으며 숨조차 쉬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 내력이 심후했다. 다만 조금전에는 생각지도 않게 모백에 의해 요혈을 격중당했기 때문에 어떻게 힘을 쓸 겨를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게 되자 재빨리 한가닥의 진기를 끌어올리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가 한평생 이와같은 낭패한 꼴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더욱이 명성을 떨치게 된 이후 그의 무공은 하루가 다르게 고강해져서 좀처럼 적수가 될만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웠고, 급기야 그는 천하를 아래로 굽어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신타 을휴를 두려워 하는 것은 을휴의 무공이 무서워서라기보다 어릴 때부터 억눌려온 심리적인 요인이 그로 하여금 감히 정정당당하게 신타 을휴와 손을 쓰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사람, 신타 을휴를 계교로 제압한 후에 놀랍게도 모백의 공격을 받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게 된 것이었다. 이와같이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로서는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으니 그가 어찌 울화와 분노가 치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얼굴이 새파래질 정도로 분노해서 즉시 몸을 솟구치더니 그 굵직한 등나무 줄기 쪽으로 달려갔다. 신타 을휴가 무겁게 소리쳤다.
『적군!』
적군은 벼랑가에 서서 막 몸을 날려 뛰어내리려다가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듣자 고개를 돌리더니 매섭게 흘겨보았다. 신타 을휴는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너는 이미 그 아버지를 해쳤으니 그 아이는 용서해 주어라.』
적군은 싸늘하게 코웃음 치더니 몸을 날려 벼랑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신타 을휴는 속으로 다급해져서 죽고 싶도록 초조해졌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오직 하늘에 대고 모백이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빌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남삼객 적군의 경신법이 그토록 뛰어나니 모백이 설사 숲속까지 도망친다 하더라도 아마 멀리 달아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숲속에는 나뭇잎이 모두 다 떨어져서 전모백이 몸을 숨긴다 하더라도 날이 밝게 된다면 즉시 발각될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유일하게 도망칠 수 있는 길은 바로 깊은 벼랑 아래로 가는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동굴들이 무척 많기 때문에 그가 어느 한 곳을 제대로 찾아서 몸을 숨기기만 한다면 남삼객 적군의 손을 피해 산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조금은 있는 것이었다. 이 길은 위험했지만 그중 안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신타 을휴는 생각했다.
'이 아이가 이토록 총명하고 기지가 뛰어난데다가 무공의 기틀마저 이렇게 훌륭하니, 전옥린이 그를 애지중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로구나. 만약에 기회가 있어서 내가 그에게 무공을 전수하게 된다면 십년이 지나지 않아 일류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인데……'
그는 무공을 전수한다는데 생각이 미치게 되자 즉시 자기가 지금 중독되어 꼼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눈앞의 그 한 무더기 꺼져가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자기가 바로 그 나머지 불꽃처럼 곧 모든 능력을 잃고 하나의 폐물로 변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고통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윽고 고통을 떨치고 마음을 진작시켰다.
그는 쓸데없는 생각을 억제하고 눈을 감았으며 운기행공의 요결에 따라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서 몸속의 중독된 독을 몸 밖으로 몰아내려고 했다.
그가 몇 번이나 시도했는지 몰랐지만 시종 그 있는 듯 없는 듯한 진기를 끌어올릴 수가 없어서 포기하려고 했을 때 남삼객 적군의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십일소에 중독이 되었으니 열흘이 지나기 전에는 결코 운기행공해서 진기를 끌어올릴 수가 없다오.』
신타 을휴는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적군은 이미 벼랑 아래쪽에서 올라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을휴는 전모백을 볼 수가 없자 마음이 기뻐서 물었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가?』
남삼객 적군은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흐흥! 그 녀석은 교활하기 이를 데 없어서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었소.』
그는 잠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리 좋아할 것 없소. 내가 그 등나무 줄기를 잘라버리게 된다면 그 산골짜기 밑바닥에는 나갈 길이 없으니 그 녀석은 도망칠래야 도망칠 길이 없게 되오.』
신타 을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간에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마음이 놓였다. 그는 모백의 무공과 지혜라면 산속의 야수들에게 상해를 받지 않고 길을 찾아서 어떻게 해서든 도망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잠자코 있자 남삼객 적군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어린아이가 능력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을라구! 이러한 절벽 아래서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어?』
신타 을휴는 그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서 그가 실제로는 모백의 탈출에 대해 매우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모백은 그같은 어린 나이에 놀랍게도 검신 적군으로 하여금 커다란 낭패를 당하도록 했으니, 나중에 그가 장성하게 되었을 때는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모백이 사로잡히지 않는 그 날까지 남삼객 적군은 마음을 편안히 가질 수가 없을 터이었다.
남삼객 적군은 신타 을휴의 눈빛을 보더니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일시적으로 낭패를 당했다고 해서 그 녀석을 안중에나 둘 것 같소? 설사 그 녀석이 양심신공을 연성했다 해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오.』
신타 을휴는 놀라서 그 말을 가로채듯이 물었다.
『뭐라고? 그 아이가 양심신공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남삼객 적군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누군줄 아시오? 나는 조금전에 미처 방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나가떨어지게 된 것이오. 그 아이가 뿜어내는 힘은 매우 이상야릇하고 마치 혈도의 위치를 바꾸어놓는 것 같았소. 그러니……』
그러다가 그는 무릎을 탁, 쳤다.
『맞았다! 천하에 오직 양심신공만이 역으로 진기를 운행시킬 수 있고, 하나는 올바르고 하나는 반대되는 두 가지의 다른 힘을 같이 쏟아낼 수가 있지.』
신타 을휴는 그 말을 받았다.
『나중에 그가 양심신공을 제대로 연마하게 된다면 너는 영원히 베개를 높이 베고 평안히 잠들 수가 없게 될걸.』
남삼객 적군의 안색은 무거워졌다.
『맞았소.』
그는 생각에 잠겨서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 아이 녀석이 나의 심복지환이 되리라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는걸.』
신타 을휴는 그의 눈동자에 음독(陰毒)한 빛이 드러나자 그만 자기가 쓸데없는 말을 한 데 대해 후회했다. 그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적군, 내 자네에게 몇마디 물어볼 말이 있네.』
남삼객 적군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물었다.
『무슨 알고 싶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오? 말해보구려.』
신타 을휴는 물었다.
『자네는 전옥린을 어떻게 했는가?』
적군은 대답했다.
『그는 안전하오. 지금쯤은 무정산으로 옮겨가는 도중에 있을 것이오.』
그는 느글느글하게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안심하시오. 얼마 후면 당신의 두 눈으로 그를 보게 될 터이니.』
신타 을휴는 넌즈시 물었다.
『그는 상처는 입지 않았는가?』
남삼객 적군은 눈빛을 빛냈다.
『나는 한평생에 좀처럼 친구를 사귀지 못했지만 전옥린은 나의 친구인데 내 어찌 그에게 상해를 입히겠소? 나는 그가 나를 따라서 함께 천하를 휘어잡아 호령하는 맛이 어떠한지 맛보여 줄 참이라오.』
신타 을휴는 코웃음쳤다.
『흥! 자네는 전옥린이 자네처럼 뻔뻔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남삼객 적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건 나에게 다 방법이 있다오.』
신타 을휴는 코웃음 쳤으나 반박하고 싶지도 않아서 다른 일을 물었다.
『그렇다면 벽라도주 원현기 역시 자네 휘하의 사람이겠군?』
남삼객 적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렇소.』
신타 을휴는 계속 물었다.
『자네가 그를 객잔으로 보낸 것은 바로 그 양심신공비급 때문인가?』
남삼객 적군은 순순히 시인했다.
『맞았소.』
그리고 그는 덧붙여 설명했다.
『전옥린이 가짜 비급으로 속이려 했지만 내가 어찌 그 속임수에 넘어가겠소? 나는 본래 그가 나의 일에 말려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가 비급을 오대문파 녀석들에게 넘겨주기를 바랐소. 그러면 나는 다시 그들의 손에서 비급을 빼앗으려고 했던 것인데, 뜻밖에도 음무극이 잘난 척 계획을 세워서 그로 하여금 나에게 도전하도록 만들어서 그만 사태를 더욱더 복잡하게 헝클어 놓은 것이라오.』
신타 을휴는 그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자네의 말뜻은, 자네의 참된 신분을 자네 부하들마저도 모른다는 것이렷다?』
남삼객 적군은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그렇소. 무정산 속의 부산주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들의 산주가 검신 남삼객인 줄을 모른다오.』
그는 빙그레 웃고 재차 입을 열었다.
『형님, 당신은 죽었다가 깨나도 그 부산주가 누구인지 모를걸?』
신타 을휴는 자못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는 누구인가?』
남삼객 적군은 대답했다.
『그녀는 천하에서 가장 당신을 미워하는 두 사람 가운데 하나라오. 그녀는 나처럼 당신의 염통을 도려내고 당신의 살을 저며 내야만 속이 시원해지는 여자라오.』
신타 을휴는 생각해보더니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냉소했다.
『또 한 명의 미치광이겠군.』
남삼객 적군은 찡긋 웃었다.
『당신은 궁금해 하지 마시오. 그녀를 만나게 되면 자연히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오.』
신타 을휴는 눈빛을 빛냈다.
『벽라도주 원현기가 자네의 부하라면 조금전 자네가 쳐 죽일 것이라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연극을 한 게로군.』
남삼객 적군은 그 말을 다 듣지 않고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오. 그는 무정산의 명예를 더럽혔기 때문에 나는 결코 그가 살아남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소. 무정산은 비록 갖가지 마두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만 그같이 여자를 모욕하고 못살게 구는 망나니들이 설쳐대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소. 나중에 우리가 산으로 돌아간 이후 내 친히 그를 당신 눈앞에서 죽이도록 하리다.』
신타 을휴는 물었다.
『나는 이미 자네 손안에 떨어졌는데 자네는 빨리 우리를 무정산으로 데려가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남삼객 적군은 대답했다.
『나는 그 두 명의 늙다리 거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오. 지금은 오직 그들만이 무정산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으니 나는 결코 그들이 살아남는 것을 용납할 수 없소.』
신타 을휴는 한모금 찬 기운을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이미 오용대사와 좌수신검마저 죽였는가?』
남삼객 적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들이 이미 무정산의 비밀을 알았으니 살아남을 가능성이 애초 없었소이다.』
신타 을휴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다삼공과 원현기는 모두 다 자네의 부하겠지? 성균이 나에게 이야기해 준 바에 의하면 옛날 오대신궁의 궁주들마저도 무정산 휘하로 들어갔다더군. 그게 사실인가?』
남삼객 적군은 간단히 말했다.
『맞았소.』
그는 눈에서 기이한 안광을 빛내며 오만하게 말했다.
『나의 휘하에는 옛날의 삼대신마와 이대천존(二大天尊)까지도 포함되어 있다오. 그들은 나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한달 안으로 무림을 쑥밭으로 만들고 새롭게 일통할 수가 있을 것이오.』
신타 을휴는 속으로는 놀라웠으나 겉으로는 냉랭히 웃음지어 보였다.
『적군, 그 마두들은 모두 다 흉악 잔인하여 사람을 죽이기 좋아할 뿐만 아니라 거만하고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치들일세. 자네가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자네 명령만 듣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믿을 수가 없다네.』
남삼객 적군은 광소를 터뜨렸다.
『우하하하핫! 사실이 그러한데 당신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소? 그들은 산속에서 지금도 인재들을 훈련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장래 무림을 일통하는 엄청난 계획에 자기의 힘을 바치고 있는 것이라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이미 이십여 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을 뽑아서 구양박으로 하여금 특수한 영약을 써서 특이한 체질로 키우도록 한 연후에 다섯 분의 당주들로 하여금 각자의 절예를 전수시키도록 한 사실은 알지 못할 것이오. 장래 그 스무 명의 젊은이들이 바로 강호의 주된 흐름이 될 것이며 그때부터 각문각파의 무공은 모두 다 사라지고 오직 존재하는 것은 그 다섯 가지의 절예라오. 그러나 유일하게 그 다섯 가지의 절예를 제압하고 그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나의 무정검법이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직전제자는 대대손손 무림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오.』
신타 을휴는 그의 이같은 말을 듣게 되자 하마터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뻔했다.
그는 일찍이 어떤 미치광이가 강호의 모든 문파를 일제히 절멸시키려는 미친 생각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만약에 그의 계획이 실현이 된다면 수백 년 동안 전해져오던 각문각파의 절예는 그때부터 깡그리 절전이 되고 말리라. 그리고 그 후의 무림은 남삼객 적군이 안배한 것처럼 그의 제자가 장악하게 될 것이고 천하에 군림을 하게 될 것이었다.
신타 을휴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가 간신히 한마디 내뱉듯이 말했다.
『적군, 자네는 미쳤군. 미쳤어.』
남삼객 적군은 앙천대소했다.
『우하하하핫! 당신의 눈으로 볼 때 나는 물론 미쳤겠지. 그러나 당신은 나의 이상이 실현된 후에 나에 대해 탄복하게 되고 존경을 하게 되고야 말걸?』
신타 을휴는 조용하게 선언했다.
『너의 그 미치광이 망상은 영원히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남삼객 적군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무림에 어째서 그토록 많은 분규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셨소?』
그는 을휴가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은 무공을 연마하는 자들이 각기 자기의 의견만 주장하고 있고 이기적인 관념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자기 문파만이 무림에서 제일이고 자기네 무공만이 강호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오. 이같은 심리는 정파로 하여금 사파를 업수이 여기게 하고 커다란 문파가 작은 문파를 깔보게 만들기 때문에 강호의 분쟁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라오.』
그는 오만하게 웃으며 재차 말을 계속했다.
『나중에 내가 무림을 일통하게 된 이후 나는 천하의 모든 문파를 해체하겠으며 각파의 무공과 심법까지도 절멸시키고, 다만 사람들이 내가 지정한 몇가지의 무공만 익히도록 할 것이오. 그때부터 천하의 모든 무공은 한 파가 되며 무림인은 모두 다 동문이 될 것이니 어찌 분규가 일어날 수 있겠소? 형님, 나의 이러한 취지는 무림의 평화와 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신타 을휴는 그의 두 눈에서 기이한 광채가 휘번뜩거리고 얼굴 표정이 심각한 것을 보고, 그가 자기의 환상에 푹 빠져 있어서 자신이 아무리 권고한다고 해도 정신을 차리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같은 미치광이는 역사에 많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은 끝내 멸망하곤 하였던 것이다. 이런 광인은 설사 실패의 운명에 임하게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기의 이상이 아침이슬처럼 사라지리라는 것을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발버둥 치며 허우적거리게 마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같은 광인을 고치는 방법은 오직 하나, 그를 죽여버리는 길밖에 없다고 하겠으니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억울한 생명들이 희생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신타 을휴가 만약에 친히 귀로 듣고 친히 눈으로 본 사실이 아니라면 정말 이 세상에 이같은 광인이 있으리라고는 감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오늘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뇌리에 남아있는 적군은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고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다. 비록 그가 어릴 적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약간씩의 엉뚱한 일을 하여서 어른들의 꾸지람과 매질을 받기는 했지만 한번도 예의를 잃거나 가르침에 배반하는 일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그런 환경 속에서 애써 노력해왔으며 차츰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되고 대적할 사람이 없는 대검객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와같이 노력하고 분투하는 그의 정신만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존경하고 우러러 볼만 하였다.
그런데 그는 피나게 닦아 올린 자기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놀랍게도 무림을 통일하고서 휘어잡을 뿐만 아니라 각문각파의 절예를 멸절시키고 강호에 평지풍파의 겁난을 일으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신타 을휴는 마음이 얼음과 같이 차가워지는 것이 마치 만년 세월이 흘러도 녹지 않는 얼음구덩이 속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은 아파오기 시작했으며 이것저것 생각하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깊이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만약에 그가 과거에 적군에게 무공을 전수하지 않고 또한 그 태청검결을 그에게 건네어주지 않았더라면 적군이 어찌 오늘과 같이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겠는가?
만약에 그에게 높은 경지의 무공조예가 있어서 전수해주고 배경이 되어주지 못했더라면 적군이 어찌 무림을 일통하고 다스리겠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되었겠는가? 을휴가 아니었던들 어쩌면 그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을씨 집안의 노복으로서 한평생 충직하게 살아왔을 것이고 오직 생각하는 것은 주인을 어떻게 잘 시중들까 하는 문제였으리라. 신타 을휴는 한숨을 쉬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잘못한 탓이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구나.』
남삼객 적군은 그 말을 가로챘다.
『사실 나는 마땅히 당신에게 감사를 해야 되겠지.』
그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만약 내가 당신의 압제를 너무 오랫동안 받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운명에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겠지. 왜냐하면 나는 운명이 당신에게만 너무나 후한 것을 미워했기 때문에 결국 당신이라는 사람마저 미워하게 되었지.』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을 찔렀다.
『나는 당신이 이제부터 영원히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게 되고 나의 위대한 성취를 우러러보는 증인이 되도록 만들어 줄테다.』
신타 을휴는 깊이 한숨을 내쉬고 두 눈을 감았으니 더 이상 적군의 광태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눈을 감자마자 적군의 득의에 찬 얼굴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으며 그의 귓가에는 여전히 적군의 광기에 찬 말들이 맴돌고 있었다.
그는 이리저리 온갖 방법을 생각해 보았으나 어떤 방법을 써야 적군이 일으키려고 하는 미친 듯한 행동을 저지할 수 있을런지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별안간 그는 전모백을 생각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마음의 현이 땅! 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다.
'만약 적군의 목표가 달성되게 된다면 장래 유일하게 그를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모백 그 아이 뿐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자 그는 번쩍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적군은 뒷짐을 진 채 벼랑가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타 을휴는 눈을 한번 껌벅거리고 동녘 하늘가가 이미 뿌옇게 밝아오는 것을 보고 숨을 들이마셨다.
『날이 곧 밝아지겠군.』
남삼객 적군은 고개를 돌리더니 그를 한번 바라보고 천천히 다가왔다.
『으음, 곧 날이 밝겠군요.』
신타 을휴는 넌즈시 물었다.
『적군, 자네는 또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어째서 빨리 나를 무정산으로 데려가지 않는가?』
남삼객 적군은 미소했다.
『당신은 뭣이 그렇게 급하오? 그리고 당신은 그 두 괴물이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잊고 있소?』
신타 을휴는 노해 말했다.
『자네는 그들 두 거렁뱅이들마저도 기어코 놓아주지 않을 작정인가?』
남삼객 적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조금전에 설명하지 않았소? 무정산의 비밀을 알기만 하면 그가 어떤 자든 살아남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말이오. 전옥린이 이미 무정산에 관한 일을 그 두 괴물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내 어찌 그들을 놓아주겠소?』
신타 을휴는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흥! 자네의 무공은 물론 그들을 이길 수 있겠지만 그들이 손을 합쳐서 결사적으로 공격해 온다면 자네도 그리 쉽사리 그들을 격패시킬 수는 없을걸.』
적군은 미소했다.
『내가 왜 그들과 손을 씁니까?』
신타 을휴는 되물었다.
『자네는 그럼 그들을 암산하겠다는 건가?』
적군은 웃었다.
『누가 감히 검신 남삼객이 바로 무정산 산주라는 사실을 꿈에라도 생각하겠소? 그러니 그 두 명의 괴물은 일단 내가 손을 쓰기만 한다면 목숨을 건질 기회가 없어질 것이 명백하지요.』
신타 을휴는 적군의 성격이 크게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꾸짖었다.
『너…… 너는 비열하고 몰염치하며 사악하고 속된 작자로구나.』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남삼객 적군은 손가락을 뻗쳐서 그의 아혈을 짚었다.
『당신은 말을 너무 많이 했어.』
적군은 미소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나의 큰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좀 푹 쉬도록 하시오.』
신타 을휴는 이렇게 되자 말할 능력마저도 박탈당하게 되었고 오직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노기를 눈으로 쏟아낼 수 밖에 없었다. 적군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형님, 미안하오. 내가 이렇게 하는 것도 다 당신을 위해서라오. 말이 많으면 몸을 상하게 하는 법이니 몇마디 말을 적게 하고서 해가 떠오르는 것이나 기다려 보시오.』
그는 신타 을휴의 몸을 약간 돌려 동녘 하늘을 바라보도록 방향을 잡은 연후에 다 해진 담요를 집어서 인사불성이 되어있는 하옥지에게 덮어주었다.
현장을 한번 살펴보고 난 후 그는 빈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천지이로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삼객 적군은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한 시진이 넘게 기다렸으나 천지이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해가 어느덧 솟아오르게 되었고 온 누리를 환하게 비춰주었으니 남삼객 적군은 반시진 남짓하게 햇살을 받게 되자 속이 답답해지면서 열이 뻗쳤다.
어젯밤 남삼객 적군은 설사 천지이로가 단서를 따라 유곡신마와 벽라도주를 뒤쫓아 간다 하더라도 별로 득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에 그들을 내려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천지이로가 떠나간지 이토록 오래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을 줄을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그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줄곧 천지이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는 두 괴물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언제나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기 때문에 또 얼마나 기다려야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만약에 그들이 열흘이나 보름 후에야 돌아온다면 남삼객 적군도 이곳에서 열흘이고 보름이고를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남삼객 적군은 생각을 정리해본 후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우선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는 전모백을 찾아낸 이후에 다음 일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몸을 일으켰으며 왼손으로 신타 을휴를 옆구리에 끼고 오른손으로는 하옥지를 든 채 숲속으로 들어가서 나뭇가지가 무성한 커다란 나무를 찾아내어서 몸을 날려 위로 올라갔고 신타 을휴와 하옥지를 나누어 굵은 나뭇가지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자기가 벼랑 아래로 내려가 있을 때 공교롭게도 천지이로가 달려오게 되어 다른 변고가 일어나게 될까봐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신타 을휴의 체구가 너무나 거대했기 때문에 나뭇가지 위에다가 가로로 걸쳐놓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아서 남삼객 적군은 그를 나뭇가지에 묶은 이후에야 안심을 할 수가 있었다.
신타 을휴는 눈을 부릅뜨고 남삼객 적군을 노려보았는데 거의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남삼객 적군은 미소를 지었다.
『형님, 대접이 말이 아니지만 내가 전모백, 그놈을 찾아낸 후에 우리 즉시 출발하도록 합시다. 그때는 한 대의 쾌적한 마차를 빌려서 편안히 모실 것을 약속하겠소.』
그는 신타 을휴의 어깻죽지를 툭툭 치고 나무위에서 내려와 벼랑가로 달려갔다.
어젯밤에 그가 신타 을휴와 벼랑 아래로 내려갔을 때는 나무덩굴을 타고 내려갈 수 있었으나 나중에 그가 노한 끝에 등줄기를 잘라버렸기 때문에 다시 그 가파른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자 그는 잠시 망설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만약 전모백이 도망치게 된다면 장래에 그가 편안한 날을 보내지 못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그의 모든 계획과 이상이 전모백의 손에 의해 망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백이 비록 어린애이기는 하지만 이미 남삼객 적군의 이중 신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남삼객 적군은 그가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두려워하진 않지만 만약에 천지이로와 연락이 닿게 되고 개방과 무림 정파들이 뒷배경이 된다면 적군에 대한 위협이 상당히 커진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했다.
더 중요한 점은 모백이 이미 양심신공을 연마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삼객 적군은 그의 총명함과 지혜, 그리고 뛰어난 근골로 볼 때에, 어느정도 시간만 흐른다면 그의 성취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커다란 심복지환을 남겨두기보다는 차라리 지금 좀 귀찮더라도 후환을 제거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었다.
남삼객 적군은 일단 계산을 해본 후 즉시 벼랑 아래로 내려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는 발 딛을 곳을 확인한 후 한가닥 진기를 끌어올리고 몸을 나려 뛰어내렸다.
그 절벽은 높이가 사십여 장이나 되었으며 밑부분의 수장쯤 되는 곳에 많은 거대한 바위들이 절벽 밖으로 뻗쳐나와 있었고 상반부는 절벽 틈바구니 사이로 조그만 나무와 풀들만이 자라나고 있는 형편이었다. 남삼객 적군이 몸을 날려 뛰어내리자 처음에 그의 뚱뚱한 몸뚱아리는 마치 돌덩이처럼 직선으로 떨어졌으나 바닥으로부터 십 장 쯤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는 두 팔로 아래쪽을 한번 후려쳤고 그 바람에 그의 몸은 떨어지는 속도가 줄어들면서 허공에서 멈추어졌다.
바로 그같이 몸이 정체하는 순간 그는 허리를 비틀더니 비스듬히 절벽에 자라난 한그루 작은 나무위에 두둥실 내려서게 되었다.
그 나무는 약간 아래로 쳐지는 것 같았으나 즉시 되퉁기듯 오르게 되었고, 남삼객 적군은 어느덧 그와같은 기세를 빌어서 한가닥의 진기를 운용하고 몸을 날려 아래로 내려갔다. 남삼객 적군은 체형의 제한으로 비교적 일반 사람보다 경신법을 연마하는 데 있어서 더욱 정성을 들이고 각고의 노력을 쏟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굳건한 불굴의 의지로 놀랍게도 축척성촌(縮尺成寸)의 절예를 연성하였으니 경신법에 있어서 천하에 그와 견줄 사람이 드물 정도의 성취를 이루어낸 것이다.
그는 이때 절예를 펼쳐내어 절벽의 바위틈 사이로 비스듬히 자라난 조그만 나무들을 발 딛을 곳으로 삼아서 곧장 수십 장의 깊은 벼랑 아래로 떨어져 가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덧 계곡의 밑바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깊은 계곡에는 흐르는 물이 없었고 거대한 바위들만 어지럽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같은 바위들은 어떤 것은 높이가 일장 남짓 되었고 적은 것이라 하더라도 몇 자는 되었으며 여기저기 쌓이거나 곳곳에 흩어져 있어서 그 가운데에 들어서게 되면 마치 또 다른 세계에 온 듯 색다른 감이 있었다. 남삼객 적군은 돌바닥의 거대한 바위위에서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한번 사방의 지세를 살펴보니 벼랑가에 적지 않는 동굴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동굴들은 거의 등나무줄기와 무성한 풀, 그리고 이끼로 가려져 있어서 그 안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남삼객 적군은 가까이 있는 동굴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수색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수장밖 한 무더기의 가시덤불위에 한 조각의 베가 걸려서, 불어오는 산바람에 살랑거리듯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나는 듯이 달려가서 가시덤불에서 그 베조각을 떼어내었다. 즉시 그는 이 길다란 베조각이 전모백의 옷에서 찢겨진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도 전모백은 이쪽에서 바깥쪽으로 달려가다가 황급해서 정신이 없는 틈 사이에 그만 몸에 걸치고 있던 옷자락이 가시덤불에 한조각 찢겨 달아난 모양이었다.
남삼객 적군은 자세히 그 한 무더기의 가시덤불을 살펴보았는데 비스듬히 뻗쳐 나온 그 덤불의 가지위에는 약간의 핏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그는 입가에 으스스한 미소를 띄웠다.
'이 녀석은 아마도 어둠을 틈타서 도망을 치려다가 이곳에 가시덤불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몸에 걸치고 있던 옷을 찢기게 된 모양이로구나.'
그는 그 좁고 길다란 골짜기 바닥에 있는 소로길을 따라 앞쪽으로 달려갔다.
얼마 가지 않아서 그는 작은 한쪽 신발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신발을 주워들고 살펴보니 바로 전모백의 신이었다.
그로서는 골짜기 밑바닥의 소로길이 어떤 곳으로 통하는지, 또는 이 길을 따라서 나가게 되면 산을 나서게 되는 것인지 잘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전모백의 발걸음으로 설사 야밤에 출발했다 하더라도 그가 급히 쫓아가게 된다면 기껏해야 반시진이면 뒤따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신발을 품속에 집어넣고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갔다.
바로 그의 모습이 어지러운 바위들이 울퉁불퉁 서있는 지역에서 멀리 사라지게 되었을 때, 적군이 벼랑 아래로 내려섰던 한 무더기의 바위 밑에서 커다란 돌 하나가 밀어젖혀지고 곧이어 한 사람이 그 안에서 기어 나왔다.
그 사람은 작은 몸집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발에는 한 쌍의 하얀 버선만 신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팔에는 몇 곳에, 긁혀서 난 상처자국이 있었는데 바로 어젯밤 벼랑 아래로 도망쳤던 전모백이었다.
모백은 크고 작은 바위무더기로 이루어진 조그만 동굴 속에서 기어 나오더니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남삼객 적군이 달려간 방향을 한번 바라본 후에 재빨리 벼랑 위쪽으로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벼랑가의 골짜기 밑바닥에는 불거진 절벽의 돌조각들이 있어서 전모백은 올라가는데 그렇게 힘겹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백이 마지막으로 한조각의 불거져 나온 절벽위의 돌조각을 밟고 올라선 후 고개를 쳐들고 밋밋하게 뻗쳐오른 절벽을 보니 온몸을 붙여서 기어 올라가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모백은 먼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난 후에 두 손과 두 발을 모두다 절벽에 바짝 붙이고 천천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한모금의 진기를 끌어올린 상태에서 벽호공(壁虎功)을 펼쳐 일장 남짓 기어오른 후에 조그만 나무위로 올라서서 잠시 동안 휴식을 취했다. 나무위에 서서 골짜기 바닥을 한번 바라보게 되자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것이 하마터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떨어질 것 같았다. 모백은 재빨리 눈을 감고 두 손으로 나뭇가지를 꼭 붙잡고서 감히 더 이상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그는 줄곧 금응보 안에서 살았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시중을 받아온 몸이었다. 아버지는 무공을 연마하기 위해서 좀처럼 그와 가까이 한 적이 없었고 그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매우 엄하게 모백이 무공을 연마하고 글공부를 하도록 가르쳤었다. 그러나 하옥지는 그에게 매우 다정스럽게 대해주었다.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든 간에 하옥지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서 그가 만족하도록 돌봐 주었기 때문에 그는 한번도 근심걱정을 한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그의 과거 생활은 온실에서 성장한 꽃송이처럼 세찬 비바람에 시달린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가까운 사람들의 보호에서 벗어나게 되자 그는 거의 생존해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을 느끼게 되었다. 다행히 그는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년이었기에 역경을 만나서 스스로 헤쳐나갈 기지를 가졌으며 모든 사람들이 남삼객 적군에게 기만당해서 위태로운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에 그가 스스로 일어서지 못한다면 지금 그를 도울만한 사람은 다시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작은 몸을 떨치고 일어서야 했으며 자기의 지혜를 십분 이용하여 미끼를 던져 남삼객 적군을 멀리까지 뒤쫓아 가도록 유인한 것이었다. 그는 무정산이 어떤 곳인지를 몰랐지만 신타할아버지가 그토록 놀라고 분노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좋지 못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삼객 적군이 바로 무정산 산주이고, 또한 신타할아버지와 옥지 고모를 암산했다면 자기를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