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그네와 회심곡(回心曲)
정현수
겨울은 추위에 답답함이 반복되는 계절이다. 방안퉁수인 난 여전히 추운데 라디오에서는 벌써 계절이 바뀜을 재촉하는 것 같다. 봄의 향연을 부르듯 슈트라우스, 봄의 소리 왈츠나 비발디 4 계 중 봄이 들려오곤 한다. 숱한 세월을 살아왔고, 어느 때부터인가 겨울의 쓸쓸함은 슬픈 경험으로부터 오는 거쳐야 할 과정이다. 우울로 인한 스스로 위축된 초라함을 느끼기도 하며, 내 운동 습관을 개을리 하기도 한다. 글을 쓰는데 생각이 움츠러 감각을 잊게 하기도 하고 기가 꺾이거나 풀이 죽는 우울에 젖게 한다. 그 우울은 정말 불필요한 시행착오일까? 그건 모나리자의 미소에 빠져 들은 듯 멍한 상태에서 무념무상에 경지에 오르는 것과 같은 공상(空想)에 빠지게 한다. 멍 때림으로 얼마만큼 좌선을 해야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하여 우울의 연속이 때론 슬며시 반갑기도 하지만…… 우울은 움츠린 삶을 상상으로 미워하지 않으면서 나와 내가 서로 상처를 입히는 순환의 피치 못할 장식 같다. 김이 잔뜩 서린 겨울 유리 창문에 흐르는 눈물같이 애타하면서도 슬며시 뭔가를 요구하는 호소이기도하다. 어쩌면 어떤 이가 보기엔 그 순간이 낭비라 할 수 있는 하릴없는 포기라 하며 나무랄 것 같다. 각각 서로 다른 점을 구분 못하고 나의 정신적 신념에 물음표를 찍어야 하는 묘한 뉘앙스의 비관적 사고(思考)라 할 수 있는 겨울의 필요 불가결한 우울이다.
오늘 오랜만에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전곡을 들으며 진정 자유인인 그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본다. 서러움을 품은 듯 목가적이라 할 만큼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는 사랑과 슬픔, 고독, 절망을 그리고 희망까지도 세세히 파헤친 낭만주의 음악의 정수를 보여준 가곡이다. 그가 죽기 1 년 전인 1827 년 이곡을 쓴 그는 특히 호소하는 듯한 간절하고도 해석이 깊은 노래로 모든 이의 마음에 가냘픈 심금을 울린다. 피셔 디스카우가 부르는 겨울 나그네는 그 안에 숨겨진 많은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엔 끝없는 깊이와 무한한 희생적 사랑도 있다. 실현당해 실천이 따르지 않는 관념적 인생무상도 함께 노래하는 듯도 한다. 뭔가에 종속되어 버린 연민, 혹은 시대적 상항에 얽매여 우울과 혼란 속에 헤매기도 했지만 그는 마지막을 장식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자기 이성, 지성, 감성 등 마지막 열정을 쏟아부어 이곡을 완성한 것 같다.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슈베르트가 자기의 정서, 그 시대의 설움 속에 헤매는 자기 처지를 노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집념적인 본성에 왕성한 상상력을 드러낸, 그만의 특이한 우울이 충분한 가곡이다. 불확실하면서도 결코 완벽하지 못한 그의 서글픈 생은 잔뜩 움츠린 자기 현실 생활과 함께 하기도 했다. 그는 그 가운데 항상, 늘 변화를 요구했다. 그의 우상 베토벤의 위대성을 동경하며 그 둘레에서 자유롭게 벗어나기(?) 위해 숭배자로부터 강제가 아닌 자기 노력의 향상을 위한 절실한 욕망, 해내려는 의지가 필요했다. 자기희생을 요구하며 뭔가를 이루기 위한 욕망(작곡)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게 그가 할 일이었다. 그저 오직 일념으로, 한 잣대로 거리낌 없이 순간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겨울 나그네는 24 곡으로 구성됐으며 전 곡이 그 시대 서사적 틀 안에 연결되어 있다. 음악의 전체적인 흐름은 듣는 이로 하여금 나그네의 여정을 함께하는 듯한 색채와 형태로 이어 저 나에게 서럽고 쓸쓸한 감동을 아낌없이 준다.
회심곡을 완창 한 '김영림' 나는 그녀의 열렬한 팬이다. 가끔 화면에 나오는 모습도 챙겨보는, 나에겐 내 일상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관심으로 좋아하는 신 사고적 대상이다. 슬프디 슬픈,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로 회심곡을 부른 김영림은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판소리 꾼이다. 어떤 지향을 위해 열창을 하는 그녀는 듣는 사람이 몽환에 빠지게 하고 자칫 틀에 얽매인 나를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일종의 욕망에서 벗어나게 하는 내 인생의 구도자다. 그녀의 열창으로 그녀 생각, 뜻을 이루어 내는 확실한 창의 대가다. 각 주제로부터 이탈하지 않고 내용을 분리하지 않으며 자아를 해탈한 듯 끝날 때까지 헌신, 열창으로 노래함은 가희 내 운명을 좌우하는 듯한 의지적 존재다.
"동삼(冬三) 석 달 죽었다가 명년 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인생 한번 가면 어느 시절 다시 오나 세상만사 헤아리면 묘창해지일속(渺滄海之一粟)이라 단 불의 나비로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김영림의 창은 운명을 인정해야만 하는 전생의 업보 같다. 공허한 무아론에 빠지는 것보다 죽음에 조화, 융합하여 한 톨의 좁쌀이 되어 이상적인 영원한 천국을 맛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그녀의 노래는 서로의 삶에 인간적 접촉으로 마지막 휴머니즘을 노래하는 것 같다. 그것엔 오만과 욕심을 넘어 감추어진 선과 악이 우리 마음속에서 싸움질할 때 그것에서 벗어나 자연과 조화를 이룸이 어떨까 하는 노래다. 욕심과 이기에 이르러 마지막 죽음에 아무 의미 없이 생을 마감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한 것과 같은 은근한 합리가 아닐까? 흔해빠진 이분법적 결론이 아닌 어느 확실한 판단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 개념이다. 그리하여 설사 자기 자신은 패배했을지 모르지만 후세 주위의 누군가에게 감명을 주고 모범을 주지 않았을까 하고픈 내 나름의 해석이고 싶다. 이 노래는,
"회심곡(回心曲)을 업신여겨 선심공덕(善心功德) 아니하면 우마형상(牛馬形狀) 못 면하고 고렁배암 못 면하네 조심하여 수신하라 수신제가(修身齊家) 능히 하면 치국안민(治國安民) 하오리니 아무쪼록 힘을 쓰오"
라는 노래로 끝이 난다. 결국 살아생전에 가정이라는 울타리, 나아가서는 사회라는 더 큰 곳에 원동력이 되어 각 개인의 삶을 지탱해 주고 그 테두리 안에서 그야말로 신념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슈베르트와 김영림, 그들 공통적 활동에 내 견해는 지치지 않는 창의적 활동이다. 그들은 나에게 동기부여를 주고 창조적 일에 번득이는 자극을 줌으로써 글의 인스피레이션이 된다. 부족하지만 나만의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허투루 낭비할 수 없는 내 나머지 생에 그들 생각, 활동은 나에겐 너무나 많은 공감을 준다. 그들 생활 속의 하나하나의 계기들이 나에겐 희망적 요소가 되고 뭔가를 위한 전제는 내 인생의 지표가 된다. 내 이익이나 실리만을 위한 것은 이젠 버려도 된다. 슈베르트가 그랬듯이 오직 좋아서 하는 일엔 죽음이 코앞에 있을지언정 그건 행복이었고 창의적 삶이었다. 그 안에 자기만족에 국한되고 어떤 책임에 무성의해서도 안된다. 나만 그럴듯하게 사는 건 말도 안 되는 죽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지금 노년을 사는 나에겐 너무 중요하다. 어떤 것은(책임에 무성의 한) 모순에 빠져버릴 수 있고 또 다른 어떤 것은 절망적 낭패로 누군가 혹은 뭔가에 안하무인적 모습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치 있는 삶을 먼저 생각할 줄 알고 누구든 존중하며 우리 스스로 퇴화하는 무분별한 욕심에서 벗어나자.
2024.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