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한민국의 소설가. 호는 미백(未白)이다.
2. 생애
1939년 전남 장흥군 대덕면 진목리에서 출생했다. 경주 이씨 상서공파이며 5남 3녀 중 4남이다. 이름은 맏형이 지었는데 돌림자 '쇠북 종(鍾)'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족보에는 종청(鍾淸) 으로 올랐다. 호는 '未白'인데 수필 '작호기'에 지어진 사연이 나온다. 일찍 머리가 센 이청준이 노모에게 절 할때마다 '절하지 말고 그냥 앉거라. 에미보다 머리가 센 자식 절을 받으려니 민망스러 못 당할 꼴이다.'고 했는데 미백은 머리가 아무리 셌더라도 노모 앞에선 아직 센 머리가 아니다, 절대로 세어서는 안 되는 머리라는 뜻이다.
6세에 두살 아래의 남동생이 4살에 홍역으로, 7세일 때는 맏형이 26세에 폐결핵으로, 그리고 다음해에는 아버지가 홧병에 돌림병까지 들어 세상을 떠났다. 음악과 문학을 좋아했던 맏형이 남긴 책, 서간, 일기장 등의 유품은 이청준의 남은 삶에 큰 영향을 준다. 맏형의 죽음에 대해 이청준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형님은 그렇게 죽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여전히 함께 하고 있었다. 아니 죽음은 삶의 종말이 아니라 그렇듯 보이지 않는 어떤 모습으로 여전히 우리 삶 속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형님이나 죽음에 대한 나의 느낌은 다른 가족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갖게 했고, 그것이 내게 차츰 죽음과 추상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눈앞의 경계를 넘어선 본질적(형이상학적) 삶과 세계-혹은 표현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하고, 거기 이끌리다 종국엔 그를 통로로 내 소설과 문학이 길에까지 이르게 하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 나는 왜, 어떻게 소설을 써왔나 / 이청준<오마니>(문학과 지성사 간/1999.4.17)에서
1948년 대덕동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학령보다 3년이 늦었다. 해방 직후여서 행정구역도 엉망이었고, 이리저리 학교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인가가 나지 않은 학교를 포함하여 8군데를 다녔다고 한다. 공부를 아주 잘해서 '천재'로 불렸으며. 선생님의 지시로 동급생은 물론이고 상급생도 가르치곤 했다. 저학년때부터 형이 남긴 소설을 읽고, 형이 책에 남긴 메모를 보며 정신적 교류를 했다. 매일 보리밭에서 연을 날리며 허기를 잊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경제적 형편이 되지 않았으나, 6학년 담임이던 이종남 선생과 교장 선생님의 도움으로 광주에서 시험을 보고 광주서중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50년 가을, 6.25 발발 후 전짓불 체험을 한다.
1954년 광주서중에 입학했다. 당시 교장이던 강봉우 선생은 이청준이 평생 스승으로, 삶의 모델로 삼으며 존경하게 된다. 처음에는 친척 누님 집에 의탁했는데 선물로 들고갔던 '게자루' 일화가 나온다. 먼 고향에서부터 선물로 들고 갔던 자루속의 게는 광주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상해 버릴 수 밖에 없었고, 코를 막은 누님이 대문 밖 쓰레기통에 내다버린 게자루를 본 이청준은 그것이 삶을 이끌 숙명의 씨앗자루였다고 회상하였다.
'그러니 그때 그 쓰레기통 속으로 내던져진 것은 그 썩은 게자루만이 아니었다. 나 자신은 물론 내 척박한 고향시절과 거기서 품어온 남루하기 그지없는 꿈까지도 가차 없이 함께 내던져진 격이었다. 두고봐라. 나도 이제부턴 이 누추한 시골내기 티를 깡그리 벗으리라. 이를 악물고 너희와 함께 할 수 있는 부끄러움 없는 삶의 길을 열심히 배우고 익히리라. 너희 속으로 함께 섞여들어 그 유족하고 자랑스런 도회인의 삶의 길을 떳떳하게 살아가리라-, 그리고 그런 다짐 속에 거의 혼자 자력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중엔 서울로 대학 진학까지 해 올라갔다.'
- 나는 왜, 어떻게 소설을 써왔나 / 이청준<오마니>(문학과 지성사 간/1999.4.17)에서
1957년 광주제일고에 입학하여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학업을 지속했고, 1959년 3학년 때 최초로 치러진 학생회장 직접선거로 학생회장이 되었다. 자의로 출마한 것이었으나, 이때의 경험으로 정치혐오증을 가지게 되어 가족과 고향의 기대를 뒤로 하고 법대 대신 문학과 진학을 결심한다. 이후 이청준은 오랜 기간 고향에 발길을 하지 않았다. 고 1 겨울에 고향집은 남의 손에 넘어가고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방학에 내려간 고향에서는 홀어머니가 남의 집이 된 옛 집에서 아들을 맞아 하루를 보내고 새벽에 떠나보낸다.
1960년 서울대 문리대 독문과에 입학하였다. 과는 다르지만 불문과 김승옥과 서울대 60학번 동기이다. 서울대 60학번은 한국 문학에 한획을 그은 학번인데, 불문과 김승옥, 김현, 김치수, 하길종, 독문과 이청준, 염무웅, 김주연, 김광규, 영문과 박태순, 정규웅 등이 포함되어 있다. 중학교 3학년 이후 가정교사로 생활을 해결했는데, 당시 매우 가난하여 이불이 없어 입주 가정교사도 못하고 시간제 가정교사를 하며 잠은 주로 학교 강의실에서 해결했다고 한다. 당시 수위가 휘두른 전짓불도 이청준의 정신에 각인된다. 그리고 대학 1,2학년 때 4.19와 5.16 을 겪었는데, 이상의 실현과 좌절로 요약할 수 있는 성인이 되며 최초로 당한 상처로 남는다.
'그때 친구 하숙집에 저녁 식사 때 가면 숟가락 하나 더 주는 주인이 있고 안 주는 주인이 있죠. 배고프다는 거, 그 설움 아는 사람만 알지. 결국 이런 식으로 학교 다녀 봐야 쓸 데도 없고 해서 2년 마치고 군대를 갔지.'
1962년 육군 입대, 1964년에 제대하였다. 입대하며 친지들에게 맡겼던 짐들(사진, 비망록 등 젊은 시절의 정신적 편력을 볼 수 있는 자료들)은 제대했을 때 다 사라졌다. 제대 후 복학하여 강두식 교수의 토마스 만 강독을 수강하였다. 이 강의를 통해 이청준은 만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특히 '선택된 인간'에 대해서는 '문학이나 소설이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치열한 인간의식의 구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는 말도 했다. 만의 영향에 대해서는 '철학적 진지성과 음악적 특성을 지닌 작품구성방식', '이원적 세계관의 대립 양상과 액자 양식의 이야기 전개 방식' 등을 들고, 만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자신의 작품으로 '병신과 머저리', '매잡이', '남도사람' 연작을 들었다.
1965년 '퇴원'이 사상계 신인상으로 당선되어 등단했다. 심사워원은 정명환, 김성한, 오상원, 오영수, 선우휘였고, 당선 결정 이유는 '매우 예민한 감수성과 재치있는 관찰과 그리고 삶의 어떤 양상을 기존적 사고방식 밖에서 다루려는 의욕을 지닌 이 애매성 속에 풍요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를 계기로 다음해 대학 졸업 후 사상계에 입사했다. 하나 남았던 형이 이 해에 사망하여 독자가 되었다. 1967년 '병신과 머저리'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하고, 직장을 월간 '여원'으로 옮겼다.
1968년 배우자 남경자와 혼인하여 작은 셋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고, 가정이 생긴 그는 떠돌이 생활을 이제 청산하고 안정된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 훗날 13평 아파트를 처음 장만한 후에는 스스로를 '자기 신앙의 신전을 지닌 당당하고 자랑스런 사도'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후 평생동안 직업 소설가로 글에만 집중하였다.
1971년 일지사에서 첫 창작집 '별을 보여드립니다'를 출간했다. 당시 언제 다시 책을 낼지 몰라 가능하면 작품을 많이 수록했는데 지금 같으면 3권도 가능한 양이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우려와 달리 1972년에 두번째 소설집 '소문의 벽'을 민음사에서 발간한다.1973년 '떠도는 말들'을 발표하였고, 이는 1981년까지 이어질 연작 '언어사회학 서설'의 첫 작품이다. 1974년 실존 인물 조창원을 모델로 한 '당신들의 천국'에 착수하여 1976년 완성한다. 1975년 '이어도'로 한국일보 창작문학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그동안 애써 외면하던 고향을 처음 방문하고, 이후 자주 내려가며 '서편제', '눈길'등 남도 소리와 어머니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쓰는 계기로 삼게 된다.
1978년 '잔인한 도시'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고, 1979년 '살아있는 늪'으로 중앙문예대상을 받았다. 1981년 외동딸이 출생하였다. 실존 인물인 안요한 목사를 모델로 한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출간하였고, '서편제'를 비롯한 남도 소리를 바탕으로 한 존재적 삶을 탐구한 연작과 '떠도는 말들'을 시작으로 관계적인 삶을 탐구하는 연작의 종합을 제시하는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를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하였다.
1985년에는 80년대 전반을 결산하는 작품집 '비화밀교'를 냈다. 계간 '외국문학' 여름호에 '벌레이야기'를 발표한다. 다음해에 '비화밀교'로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80년 5월 지배 권력이 자행한 광주에서의 폭력 사태를 염두에 둔 이청준은 80년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의식이라고 했다. 엄청난 악당에게 집단적으로 폭력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눈 뜨고 속수무책으로 보고 있는 것은 고민인데, 죄의식은 고문으로부터 증폭된다고 했다.
1990년 '자유의 문'으로 이산문학상을 수상했고, 1991년 '이어도'와 '예언자'의 프랑스어 판이 처음으로 해외에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1994년 '흰옷'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하고, 판소리 동화 '토끼야, 용궁에 벼슬가자', '놀부는 선생이 많다'를 출간하고, 1995년 '뻐꾸기와 오리나무',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 '한국전래동화 1,2'를 내며 동화작가로도 활동한다. 자신이 어린 시절 들었던 옛 이야기를 복원하면서 지혜나 미담을 강조하며 전통 사회의 윤리 덕목을 재생하고자 하였다. 동화를 쓴 계기로는 딸에 대한 사랑도 있다.
"판소리에는 오묘한 사람의 속성과 세상살이의 깊은 이치들이 담겨 있어요. 판소리는 단순한 문화나 유흥이 아니라 귀한 지혜와 위안을 줍니다. 늦둥이를 키우면서 세상 살아가는 이치나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워낙 복잡해지다 보니 지금 현재 벌어지는 일을 가지고는 설명하기가 어렵더군요. 그러다 어느날 문득 판소리에 담긴 우화를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아이도 아주 흥미롭게 듣더군요.
1998년 '날개의 집'으로 21세기 문학상을 수상하고, 1999년 순천대 문예창작학과 석좌교수가 되었다. 2000년에는 1학기분 저작권료로 623만 7천원을 받아 국어교과서 저작권료를 가장 많이 받는 소설가라고 발표되었다. 수필집 '야윈 젖가슴', 유년시절을 바탕으로 쓴 동화 '숭어도둑', 김선두 화백이 그리고 이청준이 쓴 산문집 '그와의 한 시대는 그래도 아름다웠다'가 발간되었다. 열림원에서 '이청준 전집'을 기획하여 2003년 장편소설 11종 12권, 중단편소설집 10권, 연작소설집 3권으로 마무리되었다.
'소설적 진실이 동시대 현실을 꿰뚫어 보는 작가정신의 치열함을 통해서만 획득되며, 또 그것이 작가가 자신이 택한 장르에 대한 철저한 자의식을 전제로 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할 때, 지난 30여 년 동안 치열한 산문정신으로 창작된 이청준의 소설들은 개화기 이래 수용된 서구 소설 장르의 한국적 갱신의 과정이라고 보아도 결코 손색이 없다. 본 편집위원들이 30여 년 넘게 축적되어 온 이청준 문학을 전집으로 발간하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소설의 전체적 이해를 통해서 지나온 우리 현대소설의 궤적을 추적하고, 그 위에서 새롭게 전개될 우리 소설의 나아갈 방향이 모색되기를 바라는 바다.'
- 열림원 이청준 전집 발간사에서
2004년 소설가, 시인, 화가의 눈으로 고향을 바라보기 위해 동향 후배인 시인 김영남, 화가 김선두와 산문집 '옥색바다 이불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를 냈다. 동화집도 꾸준히 발간하여 '새소리 흉내쟁이 요산 아저씨', '동백꽃 누님'을 냈고, 산문집 '아름다운 흉터', '인생'을 출간한다. 제36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2005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2006년 동경대에서 '화해와 공생'을 테마로 이청준 문학을 조명하는 심포지움이 열렸다. 2007년 호암상을 수상하였는데 수상 소감은 다음과 같다.
'저는 이 상으로 큰 격려를 받습니다. 우리 자신의 능력과 성취에 대한 바깥 세계의 평가라 할 노벨상은 우리가 원하든 아니든 우리 문학의 한 가지 숙제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상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저는 늘 마음 한 구석이 빈 듯한 쓸쓸한 느낌이곤 했습니다. 오늘 이후 저는 더 이상 그런 기분을 지니지 않으려 합니다. 저 또한 여기서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려 신명을 다하겠지만, 우리 문학 스스로 이 상의 내실을 거기까지 다져 채우고 그 위상과 긍지를 거기까지 높이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2007년 동경대학교에서 전해의 심포지움을 결산하여 이청준 특집호를 간행하였다. 7월 폐암 판정을 받았고, 다음해인 2008년 7월 31일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문인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고향인 장흥군 회진면에 묻혔다. 부모의 합장묘도 같은 곳에 있다. 진목마을의 생가에서 2km 떨어져 있으며 2005년에 생가가 복원되었다. 묘 앞에는 그를 기념하는 ‘이청준 문학자리 '라는 기념물을 세웠으며, 인근의 이청준 생가를 복원했다. 글 기둥에는 '해변 아리랑'의 유명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는 늘 해변 밭 언덕 가에 나와 앉아 바다의 노래를 앓고 갔다. 노래가 다했을 때 그와 그의 노래는 바다로 떠나갔다. 바다로 간 그의 노래는 반짝이는 물비늘이 되고 먼 돛배의 꿈이 되어 섬들과 바닷새와 바람의 전설로 살아갔다. - 해변 아리랑 중에서
2017년 작가의 전집이 문학과 지성사를 통해 완간되었다. 이 전집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작가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고 출간일순서로 배열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작소설이 전부 다른 권에 떨어져 있어 유기적으로 읽기 힘들다.
3. 평가
초기작은 4.19와 한국전쟁을 염두에 둔 작품이 많았으며 70년대 이후 언어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때 주요 등장인물이 소설가 혹은 비평가, 작가, 자서전 대필가 등으로 이루어진 것은 언어 문제를 쉽게 진행하기 위해서였다고. 그의 소설은 관념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이상섭이 분석한 의식소설이라는 말이 더 타당해 보이며, 본인도 그 견해에 동의하였다. 언어에 대한 실험을 지닌 언어사회학서설 연작과 한의 정서를 이야기한 남도사람 연작을 마지막 연작에서 엮어내며 완성한 때를 기점으로 점차 정신주의 색채가 강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대표적인 수상 작품으로는 동인문학상을 받은 "병신과 머저리", 이상문학상을 받은 "잔인한 도시",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은 "비화밀교", 그리고 이산문학상을 수상한 "자유의 문"이 있다.
소설의 스펙트럼이 넒으며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 또한 다채롭다. 소설가로서의 뚜렷한 자의식 아래 작가 생활 내내 성실한 글쓰기를 유지하며, 6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작품 활동을 했다. 존재와 죽음에 대한 끊임 없는 의문, 말과 글의 문제, 어떻게 써야하는가, 왜 쓰는가에 대한 작가로서의 문제 의식을 심화하였고, 인간 구원에의 의지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소설의 지적 수준과 사상성의 공백을 끌어올리는 식자소설의 전범을 보인 거장이다. 소설의 양과 질, 넓이와 깊이 모두에서 가장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 작가로 꼽히며, 우리 문학사에서 본격적인 소설의 시대를 열었다. 12개 언어권에서 46권이 번역되었다. 이청준 사후 2008년에 작가 이청준과 관련된 연구 목록이 정리되었는데 300편이 넘는 평론과 소논문, 190편에 달하는 학위논문이 있었으며, 질적으로도 시대를 대표하는 평론가와 연구자들이 다양한 시각과 방법으로 연구하였다.
후배 소설가 이문열은 본인의 중단편전집 출간 서문에서 젊은 날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습작 시절 체홉이나 모파상은 누구보다 자주 나를 절망하게 만들었고, 고골이나 토마스 만의 섬뜩한 혹은 중후한 단편들도 내 가망 없는 사숙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 카뮈나 카프카의 숨 막히는 명편들, 그리고 여기서 일일이 다 늘어놓을 수 없을 만큼 긴 명인과 거장들의 행렬이 있었다. 거기다가 등단에 가까워질수록 눈부셔 보이던 이청준 김승옥 황석영의 1970년대 명품들...... 그런 단편들이 주는 절망감에 가까운 압도와 외경이 69년에 구체적으로 소설 쓰기를 지망하고도 10년이나 되어서야 겨우 중앙문단에 처녀작을 내게 된 내 난산의 원인이 되었다.
소설가 이승우는 자신의 유일한 문학적 스승으로 이청준을 꼽았다.
4. 소설의 여러 주제들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상처로 남은 죄의식이나 가해자 의식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본질로 수락하는 내면의 흔적과 떨림을 그려냈다. 억압하는 부정적인 권력의 실체로서의 현실과 그 현실에서 상처받은 개인을 드러냈고, 작가는 현실에 대한 투쟁보다는 상처받은 개인의 내면을 탐색하며 억압의 실체를 밝히고, 나아가 존재의 근원, 인간 구원의 문제도 조심스럽게 암시적으로 제시하려고 하였다.
1. 사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자유의 의미를 탐색: '퇴원', '병신과 머저리', '가수', '소문의 벽', '잔인한 도시', '빈방'
2. 현실에 좌절한 인물들의 갈등과 광기: '줄광대', '과녁', '매잡이', '황홀한 실종', '조만득씨', '가면의 꿈'
3. 고향과 현실이 만나는 자신이 존재론적 숙명에서 오는 상처와 죄의식 해소와 치유: '귀향 연습', '눈길', '해변 아리랑', '안질주의보'
4. 소리의 세계, 남의 아픔을 함께 하거나 대신 아파함: '남도사람' 연작들, '언어사회학서설' 연작들, '별을 기르는 아이', '구두 뒷굽', '흰철쭉', '날개의 집'
5. 존재론적 숙명의 상처를 치유하고 난 후 시대의 압력에서 오는 상처와 죄의식의 해결하기 위해 화해와 합일의 세계를 소망함: '시간의 문', '비화밀교', '흐르는 산', '벌레 이야기', '가해자의 얼굴'
5. 전짓불 체험
이청준 소설의 모티프로 등장하는 일화이다. '퇴원',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 '소문의 벽', '전짓불 앞의 방백'에 등장한다. 본인의 체험에서 유래된 것이며, 자신의 정체는 '전짓불' 뒤에 숨긴 채 이쪽의 정체만을 따져 물으며 주체에게 심각한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상황과 관련된 서술이다. 어둠에서 갑자기 환해진 불빛에 상대는 보이지 않고, 양자 택일의 선택만 강요당하는 상황인 셈이다.
내 개인적인 체험에 불과한 일이기는 하지만, 저 혹독한 6.25의 경험 속의 공포의 전짓불(다른 곳에서 그것에 대해 쓴 일이 있다.), 그 비정한 전짓불빛 앞에 나는 도대체 어떤 변신이나 사라짐이 가능했을 것인가. 뒤에 선 사람의 정체를 감춘 채 전짓불은 일방적으로 "너는 누구 편이냐''고 운명을 판가름할 대답을 강요한다. 그 앞에선 물론 어떤 변신도 사라짐도 불가능하다. 대답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그 대답이 빗나가 편을 잘못 맞췄을 땐 그 당장에 제 목숨이 달아난다. 불빛 뒤의 상대방이 어느 편인지를 알면 대답은 간단하다. 그러나 이쪽에선 그것을 알 수 없다. 그것을 알 수 없으므로 상대방을 기준하여 안전한 대답을 선택할 수 가 없다. 길은 다만 한 가지. 그 대답은 자기 자신의 진실을 근거로 한 선택이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제 목숨을 건 자기 진실의 드러냄인 것이다. 그밖에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 '전짓불 앞의 방백 - 가위 및 그림의 음화와 양화 2'
6. 여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출제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매우 좋아하는 소설가 중 한 명. 역대 수능과 모의평가를 모두 합쳐서 이청준의 작품을 무려 4번이나 출제했다. 그의 작품이 문학사적 가치가 높은 것도 있지만 시원시원한 문체, 뚜렷한 주제와 집필의도 덕분에 깔끔한 문제를 만들기가 용이해서 자주 출제되었다.
1969년 김수용 감독의 연출작 '시발점'을 시작으로 많은 영화화가 이루어졌다. 1972년 정진우 감독의 '석화촌', 1977년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가 있다. 임권택 감독은 '서편제', '축제'. '천년학'을 연출하였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 또한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며, 윤종찬 감독의 나는 행복합니다 역시 <조만득씨>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자신의 소설의 기원에 대해 다음 말을 했던 바가 있다.
'저는 작가는 필경 자기 시대를 쓰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자라면서 전쟁을 겪었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4.19를, 그 다음 해에 바로 5.16을 겪었는데, 한참 의식이 활발할 때 겪었던 이 두 사건의 의미를 지금 소박하게 정리해보면 삶에서 어떤 정신세계가 얼렸다가 갑자기 닫혀버린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 같아요. 20대의 분출을 사회적인 엄청난 힘이 방종으로 단죄해고 억합했을 때 여기서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죠.'
7. 주요 작품
7.1. 장편소설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 (1969)
이제 우리들의 잔을 (1969~1970)
조율사 (1972)
당신들의 천국 (1974~1975)
춤추는 사제 (1977~1978)
낮은 데로 임하소서 (1981)
제3의 현장 (1984)
자유의 문 (1989)
인간인 (1988~1991)
흰옷 (1993)
축제 (1996)
신화를 삼킨 섬 (2003)
신화의 시대 (2006~2007)
7.2. 단편소설
병신과 머저리 (1966)
별을 보여드립니다[36] (1967)
매잡이 (1968)
소문의 벽 (1971)
가면의 꿈 (1972)
건방진 신문팔이(1974)[37]
이어도[38] (1974)
황홀한 실종 (1976)
예언자 (1977)
눈길 (1977)
잔인한 도시 (1978)
살아 있는 늪 (1979)
흐르지 않는 강 (1979)
시간의 문 (1982)
비화밀교 (1985)
벌레 이야기 (1985)
숨은 손가락 (1985)
가해자의 얼굴 (1992)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1995)[39]
날개의 집 (1997)
인문주의자 무소작 씨의 종생기 (2000)
꽃 지고 강물 흘러 (2003)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2007)
더러운 강
7.3. 연작소설
'언어사회학서설' 연작 (1973~1981)
'떠도는 말들', '자서전들 쓰십시다', '지배와 해방', '가위잠꼬대', '다시 태어나는 말'의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도 사람' 연작 (1976~1981)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새와 나무', '다시 태어나는 말'의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위 밑 그림의 음화와 양화' 연작 (1984~1989)
'가위 밑 그림의 음화와 양화', '전짓불 앞의 방백', '금지곡 시대', '잃어버린 절', '키 작은 자유인'의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