淵齋先生文集卷之四十 / 墓表 / 忘機堂曺公 漢輔 墓表
曺漢輔 | 14?? | 15?? | 昌寧 | 忘機堂 |
忘機堂曺公。學問事行。世則遠。有所不可徵者。東京志曰。公博覽古書。而流於禪學。晦齋先生。作書辨之。蓋先生與公論太極無極之說也。然一辨而變其舊見。再辨而頗有新得。漸掃糠粃。以就往聖之軌範。則此豈非公聞義能徙之勇乎。故晦齋又以爲其論甚高。本於濂溪之旨。而不無過智之意。觀此。亦可以知公之爲公也歟。又按世譜。有曰。公氣宇莊嚴。目光如電。人皆畏慴。制行謹葸。所居有巖下徑。終身不由焉。嘗補上舍生。又擢文科。尋見罷。築室於東都之虎溪。閉門讀書。與晦齋及權冲齋。爲道義之交。古人云。不見其人。視其友。斯尤驗其爲君子儒也。公諱漢輔。昌寧人。曺氏。皆祖新羅駙馬繼龍。累公累卿。至左政丞襄平公諱益淸。爲麗朝名臣。於公爲高祖。曾祖諱信忠。郡事。入我朝。徵而不起。祖諱尙治。副提學。自靖于莊光之際。贈諡忠貞。考諱變雍。隨忠貞歸鄕。不復出仕。虎溪遺址。有鴨脚樹。俗傳公手植。而村後會靈洞向亥原。卽其葬也。
配柳氏。擧二男三女。
男長。弘度。司直。
次弘量。進士。
女適進士李華。
進士兪煥。
參奉全懷玉。
司直生國良。參奉。元良。
進士生國賓。女壻辛恪。曾玄不盡錄。而十四世孫秉夏。從我遊。以公表墓屬之。義不敢辭。聊書此。俾歸篆焉。噫。百世之下。庶幾知高士之藏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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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보(曺漢輔)
[진사] 예종(睿宗) 1년(1469)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67위(97/100)
본인본관 창녕(昌寧)
거주지 미상(未詳)
선발인원 100명 [一等5ㆍ二等25ㆍ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하(○○下)
[부(父)]
성명 : 조변옹(曺變雍)
관직 : 행사용(行司勇)
[출전]
『성화기축6년9월일생원진사시방(成化己丑六年九月日生員進士試榜)』(고려대학교 도서관[만송 貴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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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보 (曺漢輔)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망기당(忘機堂). 할아버지는 조상치(曺尙治)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으나, 1473년(성종 4) 생원 임지(任沚)·최희철(崔希哲) 등과 함께 성균관 관원들을 배척하고 동맹 휴학을 했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이후 많은 경전을 두루 섭렵하며 학문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마침내 명유(名儒)가 되었다. 특히, 성리학에 깊이 침잠했으며, 불학(佛學)에도 이해가 깊었다.
1518년(중종 13) 경부터 시작된 후배 학자인 이언적(李彦迪)과의 성리학에 관한 논쟁은 우리나라 초유의 것으로 학계의 주목을 많이 끌어 왔다. 조한보의 학문과 사상은 이언적의 문집인 『회재집(晦齋集)』에 수록된 서찰 등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데, 대체로 도교나 불교 사상에 가까운 경향을 보이고 있다.
조한보는 존양(存養)을 말함에 있어 “심(心)이 무극의 경지에 소유(逍遊)해 허령의 본체로 하여금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삼는다.(遊心於無極之眞, 使虛靈之本體, 作得吾心之主)”, “천지만물로 하여금 나를 조종(朝宗)하게 해 운용에 막힘이 없게 한다.(使天地萬物朝宗於我, 而運用無滯)”, “무극태허로써 오심(吾心)의 주(主)로 한다.(以無極太虛之體, 作得吾心之主).”라고 하여 도가 사상에 가까운 경지를 취하였다.
수양 공부의 방법으로는 “경(敬)을 주하여 심(心)을 존(存)함으로써 위로는 천리에 달한다.(主敬存心, 而上達天理)”라고 하여 선가(禪家)의 돈오(頓悟)에 가까운 견해를 취하고 있었다. 또한, 태극을 무극태허로 해석하고 “태허의 본체는 본래 적멸이다.(太虛之體本來寂滅)”라고 하여 불가의 진여적멸(眞如寂滅)의 열반경(涅槃境)을 태허의 본체, 즉 도체(道體)로 보았다.
조한보의 이와 같은 학설은 이언적으로부터 유자(儒者)의 설이 아니라고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이언적은 태극 위에 다시 무극이라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없으며, 도나 태극은 지고지묘(至高至妙)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근지실(至近至實)한 데 있기 때문에 이단(異端)의 공적(空寂)에서는 구할 수 없다는 말로 그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49)
집필자 이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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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32권, 성종 4년 7월 28일 丁巳 1번째기사 1473년 명 성화(成化) 9년
사헌부에서 스승을 능멸한 성균관 유생의 죄를 아뢰고 처벌할 것을 청하다
○丁巳/司憲府啓: "成均館首善之地, 而師弟之間, 有父子之恩, 今生員任沚、崔希哲、金俊孫、曺漢輔、李兢, 憤長官生員寄齋, 一樣行楚, 極目揚說, 悖慢無禮。 而又唱爲詭激之說, 皷動諸生, 效衰世捲堂之事, 空館而去。 輕蔑朝廷, 大毁名敎, 罪犯深重。 若不痛懲, 頑悍之徒, 長惡不悛, 汙染風化, 非細故也。 請上項崔京哲, 決杖一百, 任沚拒逆不著, 加二等, 杖六十徒一年, 金俊孫、曺漢輔、李兢, 各杖九十收贖, 皆永永停擧, 以戒後來。" 從之。
성종 4년 계사(1473) 7월 28일(정사)
04-07-28[01] 사헌부에서 스승을 능멸한 성균관 유생의 죄를 아뢰고 처벌할 것을 청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성균관(成均館)은 수선지지(首善之地)로서 사제지간(師弟之間)에 부자(父子)의 은의(恩誼)가 있는데, 지금 생원(生員) 임지(任沚)ㆍ최희철(崔希哲)ㆍ김준손(金俊孫)ㆍ조한보(曹漢輔)ㆍ이긍(李兢)이 장관 생원(長官生員)이 재사(齋舍)에 기숙(寄宿)하는 것에 격분하여 똑같이 회초리로 때렸으며,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로 말하여 패만(悖慢)하고 무례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온당치 못하고 격렬한 말을 끄집어 내어 여러 생원(生員)들을 부추기고 움직여서, 쇠퇴한 세상의 권당(捲堂)의 일을 본받아서 성균관을 비우고 가버렸습니다. 조정(朝廷)을 경멸(輕蔑)하고 명교(名敎)를 크게 허물어뜨렸으니, 죄를 범한 것이 깊고 무겁습니다. 만약에 엄하게 징계하지 아니한다면 완악(頑惡)하고 사나운 무리들의 장차 악(惡)을 조장하고 뉘우치지 않아서 풍속과 교화(敎化)를 오염(汚染)시킬 것이니, 작은 연고가 아닙니다. 청컨대 위의 항목의 최희철은 결장(決杖) 1백 대를 때리고, 임지는 거역하고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니, 죄 2등을 더하여 장(杖) 60대에, 도(徒) 1년에 처하며, 김준손ㆍ조한보ㆍ이긍은 각각 장(杖) 90대를 속(贖)바치게 하되, 모두 영영 과거(科擧)를 정지하게 하여서 후래(後來)를 경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주-D001] 수선지지(首善之地) : 다른 곳보다 모범이 되는 곳.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채희순 (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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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생(寄齋生)
성균관은 국가의 최고 교육기관이어서 입학 자격에 일정한 기준이 있었다. 세종 때 정원(200명)의 반은 상재생(上齋生) 또는 상사생(上舍生)이라 하여 생원ㆍ진사로 입학시켰고, 나머지 반은 하재생(下齋生) 또는 기재생(寄齋生)이라 하여 유학(幼學) 중에서 선발하여 입학시켰다. 기재생은 대체로 사학(四學)의 생도로서 소정의 시험에 합격하여 입학한 승보기재(陞補寄齋)와 부친이나 조부의 공덕으로 입학한 문음기재(門蔭寄齋)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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葛川先生文集卷之二 / 文 / 㵢溪先生兪公行狀
兪好仁 | 1445 | 1494 | 高靈 | 克己 | 㵢谿 | 文禧 |
세종 | 27 | 1445 | 을축 | 正統 | 10 | 1 | 咸陽에서 태어나다. |
세조 | 8 | 1462 | 임오 | 天順 | 6 | 18 | 생원ㆍ진사시에 합격하다. |
성종 | 3 | 1472 | 임진 | 成化 | 8 | 28 | 가을, 점필재 金宗直을 따라 頭流山을 유람하다. |
성종 | 5 | 1474 | 갑오 | 成化 | 10 | 30 | 문과에 합격하다. ○ 승문원 正字가 되다. |
성종 | 7 | 1476 | 병신 | 成化 | 12 | 32 | 奉常寺 副奉事로 賜暇讀書하다. ○ 홍문관 博士가 되다. |
성종 | 8 | 1477 | 정유 | 成化 | 13 | 33 | 4월, 松都를 유람하고 〈遊松都錄〉을 짓다. ○ 홍문관 부수찬이 되다. |
성종 | 10 | 1479 | 기해 | 成化 | 15 | 35 | 홍문관 수찬이 되다. ○ 乞養하여 居昌縣監이 되다. |
성종 | 16 | 1485 | 을사 | 成化 | 21 | 41 | 2월, 경상도 관찰사 李克基가 명을 받고 曺偉와 저자가 지은 詩를 책으로 만들어 진헌하다. ○ 3월, 상이 글을 내려 칭찬하고 저자의 모친에게 米豆 15석을 하사하다. ○ 공조좌랑이 되다. ○ 8월, 文臣製述에서 〈秋月揚明輝排律十韻〉을 지어 居首하다. ○ 遠接使 盧公弼의 종사관이 되다. |
성종 | 17 | 1486 | 병오 | 成化 | 22 | 42 | 「輿地勝覽」의 수정, 편찬에 참여하다. ○ 홍문관 교리가 되어 경연시독관을 겸하다. ○ 文臣都試에서 居首하다. 謝恩日에 명을 받고 즉석에서 〈謝恩榮排律十二韻〉을 제진하다. |
성종 | 18 | 1487 | 정미 | 成化 | 23 | 43 | 1월,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다. ○ 〈孫君墓誌銘〉을 짓다. ○ 義城縣令이 되다. |
성종 | 21 | 1490 | 경술 | 弘治 | 3 | 46 | 3월, 「詩藁」를 자편하여 진헌하다. 王이 食物을 저자의 모친에게 하사하고, 〈壽母生辰〉 詩를 칭찬하다. |
성종 | 22 | 1491 | 신해 | 弘治 | 4 | 47 | 〈參判李公(瓊仝)母氏墓誌銘〉을 짓다. ○ 여름, 姜龜孫 등과 낙동강을 유람하다. 〈洛江泛舟詩跋〉을 짓다. |
성종 | 23 | 1492 | 임자 | 弘治 | 5 | 48 | 홍문관 교리가 되다. |
성종 | 24 | 1493 | 계미 | 弘治 | 6 | 49 | 3월, 先農祭에 執尊으로 참여하여 加資되다. |
성종 | 25 | 1494 | 갑인 | 弘治 | 7 | 50 | 1월, 사헌부 장령이 되다. ○ 2월, 부인상을 당하다. ○ 乞養하여 陜川郡守가 되다. ○ 4월, 병으로 졸하다. |
公諱好仁。字克己。高靈縣人。曾大父諱堅白。軍器小監。大父諱信。中領郞將。考諱蔭。以處士終。年逾八旬。得階將仕。處士自長水娶李節女于咸陽。因家焉。正統乙丑。生公。公幼而聰睿。器宇天成。年纔逾紀。華聞已播。壬午。俱中司馬兩試。佔畢齋金先生爲郡倅。一見奇之。許以忘年。甲午捷科。補承文正字。以公名望素重。旋擢弘文正字。丙申。成廟命揀文臣。賜暇讀書。公與許琛,蔡壽,曺偉,權健,楊煕止實膺其選。世皆榮之。歷博士修撰。以親老乞養。乃拜居昌縣監。在縣三年。値武人爲方伯。所尙矛盾。居下考。成廟驚訝曰。好仁乃予經幄舊臣。爲人不宜至是。命訊其由。方伯難其對。以吟詩不輟。不顧民事爲辭。壬寅。丁內艱。服闋。拜典籍。轉工曹員外。乙巳。判書盧公公弼。遠接皇華于國界。公與木溪姜渾爲從事。有唱斯和。人咸服之。丙午。拜弘文校理。上設文臣都試。公爲第一。受表裏。謝恩日。上命製謝恩榮排律十二韻。公立就以進。上大加褒賞。公以母老辭職。拜義城縣令。上愛其才。命歲季錄所著以進。每覽。嘉嘆不已。嘗手書數句于御案以爲忼。且令監司賜米穀數十斛于其母。歲以爲常。秩滿。復入弘文爲校理。擢司憲府掌令。以母老且病。又乞歸養。上惜其去。與群臣議其允否。咸曰。好仁非徒才大。德邵年高。宜大用置左右。上曰。予意也。命召曰。予初愛汝。不欲遠離。今詢廷議。亦以爲然。當以予意。輦母來京。公承命。請母病不克行反命。上手札諭銓曹曰。好仁事君之日長。事親之日短。不可不從其志。特除晉州牧使。銓曹啓以晉牧未滿六期。爲好仁經除。有乖成憲。拜樂安郡守。公以遠辭。乃以陜川換之。在郡逾月。以疾卒。卽甲寅四月也。是歲二月。公在京師。
夫人李氏。卒于咸陽之第。公哀悼過傷。頗損其精云。上聞訃震悼。命優賜賻物。俾克襄事。皆出於異數。其年冬。合窆于咸陽大匡之原。
夫人考諱。敏道也。
生二男三女。
男長曰瑍。壬子進士。
次曰㻑。幼歿。
女長適朴叢。爲簽使。
次適梁應麟。
次適朴訥。庚午司馬。朴之適。㻑之歿。皆在公卒後。公忠孝淸白。出於天性。詞藻雄渾。筆力遒健。成廟之朝。號稱多士。而以公爲首。居家淸儉。不事產業。妻孥不免有窘。晏如也。性沈重簡嚴。常不動聲色。而子弟僕妾。畏之如神明。其在義城也。恩信大孚。民切去後之慕。愈久不忘。後有姓金縣令。圖公行蹟。作屛于客軒。其爲人景慕如此。嘗在鸞坡。上以御服出。與群賢討論經史。至夜分將罷。公熟睡未起。上解御衣覆之。其寵遇類此。世方想望大用。而公以將母之諗。不能一日安於朝廷之上。卒至天不假年。齋志以歿。資至於奉列。壽止於五十。而鶴髮在堂。黃口滿室。哀傷痛惜。下至走卒焉。疾革。語瑍曰。君子要須不欺君。吾於事君。實無所欺。汝若得一命。當以爲家法。此乃公平生所守也。家在㵢溪上。以㵢溪自號。有集若干卷行于世。人寶之如瓊琚云。
[주-D001] 齋 : 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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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집(晦齋集) 이언적(李彥迪)생년1491년(성종 22)몰년1553년(명종 8)자복고(復古)호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본관여주(驪州)시호문원(文元)
晦齋集 卷五 / 雜著 / 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 【丁丑○忘齋,進士孫叔暾;忘機,進士曺漢輔,皆慶州人。】
중종 | 12 | 1517 | 정축 | 正德 | 12 | 27 | 〈元朝五箴〉을 짓다. ○ 忘齋(孫叔暾)와 忘機堂(曺漢輔)의 無極太極說을 비판하다. ○ 7월, 副正字가 되다. ○ 10월, 正字에 오르다. |
謹按忘齋無極太極辨,其說蓋出於陸象山,而昔子朱子辨之詳矣,愚不敢容贅。若忘機堂之答書則猶本於濂溪之旨,而其論甚高,其見又甚遠矣。其語《中庸》之理,亦頗深奧開廣,得其領要,可謂甚似而幾矣。然其間不能無過於高遠而有背於吾儒之說者,愚請言之。
夫所謂“無極而太極”云者,所以形容此道之未始有物而實爲萬物之根柢也。是乃周子灼見道體,逈出常情,勇往直前,說出人不敢說底道理,令後來學者,曉然見得太極之妙不屬有無、不落方體,眞得千聖以來不傳之祕,夫豈以爲太極之上復有所謂“無極”哉?此理雖若至高至妙,而求其實體之所以寓,則又至近而至實。若欲講明此理,而徒騖於窅冥虛遠之地,不復求之至近至實之處,則未有不淪於異端之空寂者矣。
今詳忘機堂之說,其曰:“太極卽無極也。” 則是矣;其曰:“豈有論有論無、分內分外,滯於名數之末。” 則過矣;其曰:“其大本則人倫日用酬酢萬變,事事無非達道。” 則是矣;其曰:“大本、達道渾然爲一,則何處更論無極太極、有中無中之有間。” 則過矣。此極之理,雖曰“貫古今、徹上下而渾然爲一致”,然其精粗、本末、內外、賓主之分,粲然於其中,有不可以毫髮差者,是豈漫無名數之可言乎?而其體之具於吾心者,則雖曰“大本、達道初無二致”,然其中自有體用、動靜、先後、本末之不容不辨者。安有得其渾然則更無倫序之可論,而必至於滅無之地而後爲此道之極致哉?今徒知所謂“渾然”者之爲大而極言之,而不知夫“粲然”者之未始相離也,是以其說喜合惡離,去實入虛,卒爲無星之稱、無寸之尺而後已,豈非窮高極遠而無所止者歟?
先儒言:“周子喫緊爲人,特著道體之極致,而其所說用工夫處,只說‘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君子修之吉’而已,未嘗使人日用之間必求見此無極之眞而固守之也。蓋原此理之所自來,雖極微妙,萬事萬化,皆自此中流出,而實無形象之可指。若論工夫,則只中正仁義,便是理會此事處,非是別有一段根原工夫又在講學應事之外也。”今忘機之說則都遺却此等工夫,遽欲以無極太虛之體,作得吾心之主,使天地萬物朝宗於我而運用無滯,是乃欲登天而不慮其無階,欲涉海而不量其無橋,其卒墜於虛遠之域而無所得也必矣。
大抵忘機堂平生學術之誤,病於空虛,而其病根之所在則愚於書中求之而得之矣。其曰“太虛之體本來寂滅”,以“滅”字說太虛體,是斷非吾儒之說矣。“上天之載,無聲無臭”,謂之“寂”,可矣。然其至寂之中,有所謂“於穆不已”者存焉,而化育流行,上下昭著,安得更着“滅”字於“寂”字之下?試以心言之,喜怒哀樂未發,渾然在中者,此心本然之體,而謂之“寂”,可也。及其感而遂通,則喜怒哀樂發皆中節,而本然之妙於是而流行也。先儒所謂“此之寂,寂而感”者 此也。若寂而又滅,則是枯木、死灰而已,其得不至於滅天性乎?然忘機於“本來寂滅”之下,便沒“滅”字不說,而却云“虛而靈、寂而妙,靈妙之體,充滿太虛,處處呈露”,則可見忘機亦言其實理,而說此“滅”字不去故如是,豈非有所窮而遁者乎?
自漢以來聖道塞而邪說行,其禍至於剗人倫、滅天理而至今未已者,無非此一“滅”字爲之害也,而忘機堂一生學術、言語及以上議論之誤,皆自此“滅”字中來,愚也不得不辨。若其超然高會一理渾然之體而的的無疑,則實非今世俗儒、高釋所可幾及,亦可謂智而過者矣。誠使忘機堂之高識、遠見,獲遇有道之君子,辨其似而歸於眞,提其空而反於實,則其高可轉爲吾道之高,其遠可變爲吾道之遠矣,而不幸世無孔、孟、周、程也,悲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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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집 제1권 / 고시(古詩) 금시(今詩)
생원 손숙경의 시에 차운하다을해년(1515, 중종10) 가을 〔次孫生員叔卿韻 乙亥秋〕
우주를 초월하는 기개를 품고 / 高懷超宇宙
강촌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노니 / 浪跡泊江村
성곽처럼 산이 두른 곳에 집 짓고 / 卜地山爲郭
띠를 베어 짠 자리로 문을 달았네 / 誅茅席作門
뒷산의 소나무들 집을 감싸고 / 蒼松擁後嶺
앞 언덕은 대나무로 덮여 있는데 / 翠竹被前原
가을 오면 벼와 서직 수확을 하고 / 秋隴收禾黍
봄 들판에 돼지를 풀어 키우네 / 春郊散彘豚
범중엄(范仲淹)의 근심 무슨 상관이런가 / 范憂千里遠
안회(顔回)의 단표지락(簞瓢之樂) 즐기며 사네 / 回樂一瓢存
분수대로 살아가면 생애 족하고 / 隨分生涯足
상황 따라 출처를 정할 뿐이니 / 因時出處分
궁통(窮通)에 어찌 마음 쓸 게 있으랴 / 窮亨那足介
득실(得失)은 입에 담을 필요 없어라 / 得喪不須云
일찍부터 충과 효에 뜻을 두었고 / 夙志惟忠孝
풍족하게 살고 싶은 욕심 없으니 / 平生非飽溫
소철(蘇轍)은 봉양 위해 벼슬 버리고 / 蘇因姑養退
한유(韓愈)는 가난으로 분주했었지 / 韓且爲貧奔
삐져나온 송곳 자루 보게 된다면 / 會見囊中脫
당하의 말이 어찌 필요하리오 / 何煩堂下言
거친 성품 야인으로 적합하거니 / 疏頑堪野逸
해후함은 임금님이 주신 은혜네 / 邂逅竊君恩
대궐 향한 충심 비록 간절하지만 / 雖切北辰拱
동해의 바닷가에 살려 하노라 / 却思東海蹲
요로에는 자욱하게 먼지가 날고 / 飛塵要路暗
환해(宦海)에는 놀란 물결 뒤집히는데 / 驚浪宦津飜
온 세상이 명예를 좇기 바쁘니 / 世竝趨名急
물에 빠진 사람을 누가 구하랴 / 人誰見溺援
동행하며 말고삐를 나란히 잡고 / 同行齊馬轡
구름이 짙게 덮인 산사(山寺)를 찾아 / 相訪抵雲根
산에 해가 기울도록 술을 마시며 / 把酒山將晩
바람 향해 큰 소리로 자주 웃도다 / 臨風髥屢掀
이주는 경세술을 발휘하였고 / 伊周經世術
추로는 하늘의 문 지니셨는데 / 鄒魯在天文
토론하니 시대는 다를지라도 / 論討時雖異
시 읊으매 드높은 뜻 한가지로세 / 吟哦志尙軒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 못 되고 / 不成甦旱雨
햇볕을 바치려는 정성뿐이니 / 空負獻君暄
훈업은 거울 자꾸 보게 만들고 / 勳業頻開鏡
시서는 거의 혼을 쏟게 하누나 / 詩書幾役魂
강가에서 넘어가는 해 바라보고 / 江頭瞻落日
울 밑에서 남은 술병 기울이노라 / 籬底對殘樽
큰길에는 고관들의 발길 안 닿고 / 紫陌阻軒冕
푸른 산이 형제처럼 옆에 있으니 / 靑山作弟昆
천지간에 매인 데가 없어 기쁘고 / 乾坤喜疏散
시끄러운 먼지 세상 염증이 나네 / 塵土厭囂喧
술기운에 얼굴이 불그레해져 / 入面春深暖
가슴 여니 뜻이 더욱 은근하여라 / 開襟意轉懃
산 위에는 찬별이 반짝거리고 / 寒星山上點
골짜기엔 푸른 연무 자욱하구나 / 綠霧洞邊屯
이로부터 자주 서로 내방하여서 / 從此頻來訪
술에 취해 달밤에 돌아갈지니 / 醉歸乘月昏
[주-D001] 생원 …… 차운하다 : 이언적의 나이 25세 때인 1515년(중종10)에 지은 시이다. 이해에 이언적은 경주 주학의 교관(敎官)이 되었으나, 그때가 몇 월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손숙경(孫叔卿)은 이언적의 셋째 외숙 손숙돈(孫叔暾)으로, 숙경은 그의 자이다. 호는 망재(忘齋), 부친은 손소(孫昭)이며, 생몰년은 미상이다. 1489년(성종20) 현량과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중종 때 척불소(斥佛疏)를 올렸다고 한다. 《韓國近代邑誌 8冊 慶尙道2 328쪽, 384쪽》[주-D002] 범중엄(范仲淹)의 …… 상관이런가 : 송나라 명신 범중엄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묘당(廟堂)의 높은 곳에 있을 때는 백성을 걱정하고, 강호(江湖)의 먼 곳에 있을 때는 임금을 걱정하니, 이것이 바로 나아가서도 걱정하고 물러가서도 걱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때에 즐거워할 것인가? 필시 천하 사람의 근심거리는 내가 먼저 근심하고, 천하 사람의 즐거움은 내가 나중에 누릴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지위가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뜻이다.[주-D003] 소철(蘇轍)은 …… 버리고 : 송나라 때 소철은 부친 소순(蘇洵) 및 형 소식(蘇軾)과 함께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소식이 봉상부(鳳翔府)의 판관(判官)으로 재직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순이 황제의 명으로 예서(禮書)를 편찬하게 되자, 소철이 부친을 봉양하기 위해 자신에게 내려진 상주(商州)의 군사추관(軍事推官) 직임을 사직하였다가 3년 뒤 소식이 돌아오고 나서야 대명부(大名府)의 추관(推官)으로 나갔던 일이 있다. 《宋史 卷339 蘇轍列傳》 여기서는 이언적 자신이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뜻으로 인용한 듯하다.[주-D004] 한유(韓愈)는 가난으로 분주했었지 : 한유가 최군(崔群)에게 준 편지에서 “저는 빈천한 탓으로 의식을 해결하느라고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궁귀(窮鬼)를 보내는 글을 짓기까지 하였다. 《韓昌黎文集 卷17 與崔群書, 卷36 送窮文》 여기서는 자신이 과거를 치러 벼슬길에 나가고자 한 것이 가난 때문이었다는 뜻으로 인용한 듯하다.[주-D005] 삐져나온 …… 된다면 : 전국 시대 평원군(平原君)의 식객(食客)이었던 모수(毛遂)가 “나를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게 하였다면, 송곳 끝이 삐져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송곳이 자루까지 튀어나왔을 것이다.〔使遂蚤得處囊中, 乃穎脫而出, 非特其末見而已.〕”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추천했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여기서는 인물의 뛰어남을 가리킨다.[주-D006] 당하(堂下)의 …… 필요하리오 : 춘추 시대 진(晉)나라 숙향(叔向)이 정(鄭)나라에 갔다. 얼굴이 추한 종명(鬷明)이란 자가 숙향을 만나고자 하여 조두(俎豆)를 맡은 자를 따라가 당하에 있다가 한마디 말을 하였는데, 그 내용이 훌륭하였다. 그러자 숙향이 “필시 종명일 것이다.”라고 하고는 당에서 내려와 그의 손을 잡아끌고 당 위로 인도하고서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하마터면 그대를 잃을 뻔하였습니다.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하고는 드디어 오랜 벗처럼 대하였고, 종명을 천거하여 진나라의 어진 신하가 되게 하였다. 《春秋左氏傳 昭公28年》 즉 뛰어난 인물이라면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알아보고 등용할 것이라는 뜻이다.[주-D007] 해후함은 …… 은혜네 : 자신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경주로 내려와 외숙 손숙돈과 해후하게 된 것이 모두 임금님 덕분이라는 것이다.[주-D008] 이주(伊周) : 은(殷)나라 고종(高宗) 때의 상신 이윤(伊尹)과 주나라 주공(周公)을 지칭한 말이다.[주-D009] 추로(鄒魯)는 …… 지니셨는데 : 추로는 맹자(孟子)와 공자(孔子)가 출생한 두 나라로, 공맹(孔孟)을 지칭한다. 공자가 광(匡)에서 위험에 처하였을 때 “문왕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문이 내 몸에 있지 않겠는가. 하늘이 이 문을 없애려 한다면 내가 이 문에 참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늘이 이 문을 없애려 하지 않았으니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해칠 수 있겠는가.〔文王旣沒, 文不在茲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라고 하였다. 《論語 子罕》 또 맹자는 공자의 도를 세상에 드러내어 밝히고 이를 계승한 것으로 자임(自任)한 바 있다.[주-D010] 가뭄을 …… 되고 : 나라를 위해 훌륭한 업적을 세우지 못했다는 뜻으로,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재상으로 임명하면서 “만약 나라에 큰 가뭄이 든다면 내가 그대를 장맛비로 삼으리라.〔若歲大旱, 用汝作霖雨.〕”라고 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書經 說命上》[주-D011] 햇볕을 바치려는 정성 : 옛날 송(宋)나라의 한 농부가 누더기 옷을 입고 근근이 겨울을 넘기고는, 봄날 따뜻한 햇볕을 쬐면서 그 아내에게 “등에 내리쬐는 햇볕의 따사로움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니, 이것을 우리 임금님께 바치면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는 데서 나온 고사로, 임금을 위하고자 하는 보잘것없는 충성을 비유한 말이다. 《列子 楊朱》[주-D012] 훈업(勳業)은 …… 만들고 : 훈업을 세우지 못한 채 세월이 흐르므로 마음이 조급해져 거울을 자주 들여다본다는 뜻으로, 두보(杜甫)의 시 〈강상(江上)〉에 “훈업을 못 이룬 채 거울을 자주 본다.〔勳業頻看鏡〕”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순희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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㵢谿集卷之七 / 文 / 洛江泛舟詩跋
성종 | 18 | 1487 | 정미 | 成化 | 23 | 43 | 1월,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다. ○ 〈孫君墓誌銘〉을 짓다. ○ 義城縣令이 되다. |
성종 | 21 | 1490 | 경술 | 弘治 | 3 | 46 | 3월, 「詩藁」를 자편하여 진헌하다. 王이 食物을 저자의 모친에게 하사하고, 〈壽母生辰〉 詩를 칭찬하다. |
성종 | 22 | 1491 | 신해 | 弘治 | 4 | 47 | 〈參判李公(瓊仝)母氏墓誌銘〉을 짓다. ○ 여름, 姜龜孫 등과 낙동강을 유람하다. 〈洛江泛舟詩跋〉을 짓다. |
僕。丁未春。來守聞韶。用休。己酉春。繼爲商牧。三飧莽蒼之間。隔洛相望。而各拘簿領。徒以書相問者數年矣。庚戌夏。偶以公事。會于東都。連鑣馬上。竟至新城而別。今年夏。又於花山。同試諸生。竣事之日。強要用休。▒弊縣之氷山。靑燈半壁。一尊而罷。未閱月。偕訪兼善相公於咸寧。僕爲用休氏所拉。得成觀水之遊。意者其必酬向日之氷山也。噫。海內親友。星散千里。出處離合之無常。雖皆出於人事。予則以謂有數存乎其間。雖在近者。未易朝夕往來。憧憧隔數年。僅得一二之會。猶夫擬諸天幸。況在天涯地角之外乎。然則今日之遊似非偶然。是夜。江雨涳濛。鴻烏群飛。一杯相屬。萬像呈奇。用休之酬我者。必不在啁啾絲管之中。僕亦竊以向之先施。爲自幸焉。夫佳山勝水。天地之間一無情之物。且非金玉之比。有何▒於吾輩。獨取之爲己有。人不爲貪。造物亦不以爲盜。以至比貴於蘭蕙。持以相與。而他人所不及焉。則雖曰吾二人之靑氈。可也。用休以吾言爲何如。同吾遊者。通判申礥彥玉,敎授李仁祐公輔,前正郞鄭倫仲經,生員朴信亨士隆。是。弘治辛亥六月初十日。靈川兪某。書。
續東文選卷之十七 / 跋 / 洛江泛舟詩跋[兪好仁]
僕丁未春。來守聞韶。用休己酉春。繼爲商牧。三飧莽蒼之間。隔洛相望。而各拘簿領。徒以書相問者數年矣。庚戌夏。偶以公事會于東都。連鑣馬上。竟至新城而別。今年夏。又於花山。同試諸生。竣事之日。強要用休遊弊縣之冰山。靑燈半壁。一尊而罷。未閱月偕訪兼善相公於咸寧。僕爲用休氏所拉。得成觀水之遊。意者其必酬向日之氷山也。噫。海內親交。星散千里。出處離合之無常。雖皆出於人事。予則以謂有數存乎其間。雖在近者。未易朝夕。往來憧憧。隔數年僅得一二之會。猶夫擬諸天幸。况在天涯地角之外乎。然則今日之遊。似非偶然。是夜江雨涳濛。鷗鳥群飛。一盃相屬。萬像之呈奇。用休之酬我者。必不在啁啾絲管之中。僕亦竊以向之先施爲自幸焉。夫佳山勝水。天地之間一無情之物。且非金玉之比。有何關於吾輩。獨取之爲己有。人不爲貪。造物亦不以爲盜。以至比貴於蘭蕙。持以相與。而他人所不及焉。則雖曰吾二人之靑氈可也。用休以吾言爲何如。同吾遊者。通判申礥彦玉,敎授李仁祐公輔,前正郞鄭綸仲卿,生員朴信亨士隆。是弘治辛亥六月初十日。靈川兪某書。
속동문선 제17권 / 발(跋)
낙강 범주시 발(洛江泛舟詩跋) / 유호인(兪好仁)
나는 정미년 봄에 의성(義城) 원이 되어 오고, 용휴(用休)는 기유년 봄에 잇달아 상주목사(商州牧使)가 되어 삼손망창(三飱莽蒼)의 사이에 낙동강 하나를 격하여 서로 바라고 있었으나, 각각 공무에 얽매어 한갓 편지로써 서로 물어온 적이 수년이었는데, 경술년 여름에 우연히 공무로 동도(東都)에 모이게 되어 나란히 말을 타고 함께 신성(新城)까지 와서 작별하였고, 또 금년 여름에 화산(花山)에서 시험을 치는 제생(諸生)들이 일을 끝마치는 날에 용휴을 강요하여 내가 관할하는 빙산(氷山)에서 노닐게 되어 반벽(半壁)의 등불아래 한 동이 술을 나누고 파하였으며, 그후 한 달이 채 못되어서 함께 겸선(兼善) 상공(相公)을 함녕(咸寧)으로 방문하였는데, 나는 용휴에게 납치를 당하여 물구경하는 놀이를 이루게 되었으니, 그것은 아마도 지난날 빙산의 놀이를 보답하자는 뜻이었으리라.
아, 국내의 친우 둘이 별처럼 흩어져 천리에 있으니, 나가고 들앉고 떨어지고 합하는 것이 너무도 무상함은 비록 인사에서 나온 관계겠지만, 나는 역시 그 사이에도 운수가 끼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가까운 곳에 있어도 아침저녁으로 왕래하기는 쉽지 않다지만, 수년을 두고 겨우 한두 차례 회합을 얻었는데 오히려 천행으로 생각하니, 하물며 저 하늘 가 땅 모퉁이 밖에 있어서랴. 그렇다면 오늘의 놀이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날 밤에 강 안개는 몽롱하고 갈매기와 새들은 떼지어 나는데, 한 잔 술을 서로 나누니 온갖 형상이 더욱 색다르게 보인다. 용휴가 나에게 보답하는 것은 반드시 소란한 거문고나 피리에 있지 않을 것이니, 나 역시 지난날 먼저 베풀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무릇 아름다운 산수는 천지의 사이에 하나의 무정한 물건이요, 또 금ㆍ옥에 비할 바 아닌데, 우리들이 무슨 관계라서 유독 가져다 제것을 만들어도 사람들이 탐낸다 하지 않고, 조물(造物)도 역시 도적이라 하지 않으며 난초나 혜초처럼 귀하게 보아서 서로 주고 받으며, 다른 사람은 따라오지 못하는 바이니 비록 우리 두 사람의 청전(靑氈)이라 해도 가하다. 용휴는 내 말을 어떻게 여기는가. 우리와 함께 노닌 자는 통판(通判) 신현(申礥)ㆍ언옥(彦玉) 교수(敎授) 이인우(李仁祐)ㆍ공보(公輔) 전 정랑(正郞) 정륜(鄭倫)ㆍ중경(仲卿) 생원(生員) 박신형(朴信亨) 사륭(士隆)이었다. 홍치(弘治) 신해년 6월 초10일 영천(靈川) 유 아무개 쓴다.
[주-D001] 삼손망창(三飱莽蒼) : 《장자》 소요유편(逍遙遊篇)에, “망창(莽蒼)을 가는 자는 세 끼 먹을 양식만 가지고 가도 배가 든든하지만, 백 리를 가는 자는 한 방아 거리의 양식을 가져야 하고, 천 리를 가는 자는 석달 양식을 가져야 한다.” 하였고, 그 주에, “망창(莽蒼)은 근교(近郊)의 빛이라.” 하였다. 얼마 멀지 않은 거리를 말한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9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자는 경순(景醇)이고, 호는 사숙재(私淑齋)ㆍ국오(菊塢)ㆍ운송거사(雲松居士)ㆍ무위자(無爲子)ㆍ만송강(萬松岡) 등이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1441년(세종23)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447년(세종29)에 별시 문과에 장원하였다. 이조 참의, 공조 참판, 예조 판서, 형조 판서를 거쳤다. 1468년(예종 즉위년)에 남이(南怡)의 옥사가 처리되자 익대 공신(翊戴功臣)이 되고 진산군에 봉해졌다. 그 뒤에 판중추부사, 이조 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아들은 강귀손(姜龜孫)과 강학손(姜鶴孫)이고 사위는 성세명(成世明), 김성동(金誠童), 신렴(申濂) 등이다. 《私淑齋集 卷11 私淑齋先生文良姜公行狀, 韓國文集叢刊 12輯》
강 진원(姜晉原)은 진원군(晉原君) 강귀손(姜龜孫, 1450~1505)이다. 본관은 진주이며, 강희맹(姜希孟)의 아들이다. 1479년(성종10) 별시 문과에, 1486년 중시(重試)에 급제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연산군 때 이조 판서가 되었다. 이 당시 세자책봉사로 임명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뒤 1505년(연산군11)에 우의정이 되어 하등극사(賀登極使)로 다시 명나라에 가던 중 평안도에서 병사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을축(1505) 8월 25일(정축)
11-08-25[06] 우의정 강귀손의 졸기
우의정 강귀손(姜龜孫)이 졸하였다.
귀손의 자(字)는 용휴(用休)이고 본관(本貫)은 진주(晉州)이며, 좌찬성(左贊成) 강희맹(姜希孟)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에 제수(除授)되어, 여러 번 옮겨서 돈녕부 첨정(敦寧府僉正)에 이르렀다. 기해년1479 성종 10년. 과거에 급제하여, 사재감 정(司宰監正)ㆍ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지냈다. 을사년1485 성종 16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어 상주목사(尙州牧使)ㆍ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ㆍ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ㆍ이조 참의(吏曹參議)ㆍ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옮겼으며, 여러 번 승직(陞職)하여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정사년1497 연산군 3년.에 외직(外職)으로 나가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었다가, 무오년1498 연산군 4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옮기고,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사옥(史獄)에 참국(參鞫)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초승(超陞)되고, 이조ㆍ병조의 판서, 의정부 좌찬성으로 옮겼다. 을축년1505 연산군 11년.에 우의정으로 승배(陞拜)되어 새 황제(皇帝)의 등극(登極)을 축하하러 연경(燕京)으로 가다가 도중에 등창이 나서 죽으니, 나이 56이다. 숙헌(肅憲)이라 시호(諡號)하니, 마음을 바로 지켜 결단(決斷)함이 숙이요, 널리 듣고 재능이 많음이 헌이다.
성품이 억세고 재간이 있어 직무에 임하면 엄밀(嚴密)했으며, 일에 따라 잘 처리하여 하는 일은 남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으며, 친척과 친구를 후하게 대우하여 곤궁(困窮)과 영달(榮達)로써 달리하지 않았다. 만년(晩年)에 작은 정자(亭子)를 지어 장륙(藏六)이라 편액(扁額)하고 뜻을 비추었다. 그러나 속마음은 음험하여 자기를 거스르는 사람이 있으면 겉으로는 잘 지냈지만 속으로는 감정을 품었으며, 또 기를 부려서 꺼리는 사람이 많았다. 일찍이 이조 판서이었을 때에 자못 회뢰(賄賂)로 하여 전주(銓注)가 공정하지 않았으므로, 종루(鍾樓) 기둥에 ‘완산(完山)의 원은 베짜는 종을 바치고, 진도(珍島)의 아전은 매[鷹] 다루는 하인을 바쳤다.’고 써붙인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귀손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겼다. 왕이 황패(荒悖)가 날로 심하여지매 끝내 보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 폐립(廢立,임금을 폐하고 딴 임금을 세움)하려고 신수근(愼守勤)의 뜻을 알아볼 꾀를 썼으나, 뜻이 맞지 않으매 모사(謀事)가 누설될까 근심하더니, 드디어 등창이 나서 죽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연탁 (역) | 1975